정감촌(呈坎村 청칸춘 Chengkan)


안후이성(安徽省) 황산시(黄山市) 후이저우구(徽州区, 휘주구) 북부에 위치한

청칸진(呈坎镇, 정감진)의 촌급 행정구로 2008년 중국역사문화명촌(4차)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휘파문화(徽派文化) 예술이 결합된 전범(典范)인 이 촌락은

산과 물에 의지하여 건립되었으며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주희(朱熹)가 “정감쌍현리(呈坎双贤里), 강남제일촌(江南第一村)”이라고 칭한 이 촌락은

후이저우구(徽州区) 북부, 205국도로부터 불과 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칸향(呈坎乡, 정감향) 정부 소재지이다.

 

청칸촌(呈坎村)은 동한(东汉) 삼국시기에 건립되었다.

역경(易经)의 음양팔괘(阴阳八卦) 이론에 따른 배치로 양(阳)은 정(呈)이며 음(阴)은 감(坎)으로

당 말에 청칸(呈坎, 정감)으로 개명되었다.

 

송대에는 나천질(罗天轶)과 나천칭(罗天秤) 형제가 예장(豫章)으로부터 이곳으로 와 정착하며 나씨 가문의 선조가 되었고

명대 중엽 나씨 문중은 촌락과 중천하(众川河)에 대해 대규모의 공사를 단행하여

산과 물에 둘러싸인 이상적 공간 환경을 갖춘 촌락의 구조를 형성하였다.

 

1,8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이 촌락은 현재 2,7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며

휘파(徽派) 고건축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촌락의 하나이다.

 

청칸촌(呈坎村)은 보존이 잘 되어 있고

풍격이 각기 다른 정(亭), 대(台), 루(楼), 각(阁), 교(桥), 정(井), 사(祠), 사(社) 및 민거(民居)로 이루어져 있다.

 

이 촌락은 3가 99항(三街九十九巷, 3개 거리 99개 골목)이라는 칭호를 지니며 현재 청대 민거 200여 동,

명대 민거 30여 동이 있고 골목과 큰 거리는 대체적으로 수직으로 나 있으며 화강암으로 포장되어 있다.

이 중 나동서사(罗东舒祠)와 청칸촌(呈坎村) 고건축군(古建筑群)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경내의 장춘사(长春社)는 청칸나씨(呈坎罗氏, 정감나씨) 및 부근 촌락의 오(吴), 호(胡) 등 여러 성씨가

토지신, 오곡신(五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장소로 봄에는 일 년 동안 적기에 바람이 불고 때맞추어 비가 내리기를 빌었으며 가을에는 오신(娱神), 주신(酬神)에게 수확의 감사함을 제사지내던 장소였다.

 

이 사당의 규모는 매우 크고 정문(正门), 정당(正堂), 침전(寝殿) 및 좌우 무랑(庑廊)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축공예가 장중하고 경건하여 고대 조상과 신령을 숭앙하고 공경하던 옛 사람들의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다.

 

청칸(呈坎, 정감)은 역사상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송대 용도각(龙图阁) 대학사(大学士), 이부상서(吏部尚书) 나여즙(罗汝楫)과 그 아들인 나원(罗愿) 및 양저우팔성(扬州八怪)의 하나인 나양봉(罗两峰)이 이곳 출신이다.

 

 

 

 

 

 영흥호(永兴湖)


동한(東漢)부터 남송(南宋)시기 정감촌의 수구(水口)이고 풍수지리학에 지호(地戶, 물이 모이는 곳)로 불리우며,

물이 모여 재물이 쌓인다는 의미로 옛날부터 천문이 열려야 재물이 마을로 들어오고

지호에 물이 모여야 재물이 수구로 모인다고 천여 년 동안 정감촌의 흥성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송영길 전 인천시장과 함께. 


2014년 전국지방자치제 선거에서 인천시장 재선에 출마 후 낙선하자마자 곧바로 연구활동을 위해서

중국 칭화대학교(淸華大學)에 머물러 왔다고 한다.


우리 일행과는 황산 공항에서 합류했다.

학교 후배로 송 시장이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을 적부터 인연을 맺어 온 사이여서 각별하게 반가웠다.

 

 

 평안감(平安坎) 정감팔괘마을 ㅡ 천신만고를 이겨내어 생겨진 마을이라는 뜻으로 중국풍수에 관한 건축교재이기도 하다.

 

 

 팔괘도(八卦圖) 정감 팔괘촌의 자연환경은 천연 팔괘도를 형성한다.


정감촌 주위는 8개의 산봉우리로 둘러쌓여 선천팔괘로 불리운다.

촌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S"자 모양의 하천이 마을을 질러 흐름으로 팔괘음양의 흑백 분계선을 형성한다.

 

주택 집은 대부분 목조 건물 2층으로 되어 있다. 중국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천정(天井) 이것이 바로 천정의 전형이다.


햇빛은 물론이거니와 비가 오면 빗물이 마당으로 들어와 물을 받아 쓰도록 설계되어 있다.

옛 휘주인들은 집을 지을 때 색채의 조화에 특히 신경을 써서 흰 벽체에 검은 기와가 청산녹수 속에 있으면 안온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건물마다 지붕에 구멍을 뚫고 집안에 마당을 만들었는데

이런 건물들에서는 밖에 나가지 않고도 낮에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고 밤에는 달과 별 또한 볼 수 있다.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두 마당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옛날 휘주인들은 비는 금을 의미하고 눈은 은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붕에 뚤린 구멍을 통해서 비와 눈이 마당에 떨어지는 것은 부(富)가 집에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실내의 기온조절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습도를 높여주는 역할도 한다.

 

 

ㅁ자형의 2층 가옥.


이 집들은 밖에서 보면 아래층에는 창문이 없고 2층과 3층에 조그만 창이 나 있다.

옛 휘주의 여성들은 절개를 소중히 여겨서 외간 남자를 함부로 집에 들이지 않았다.

바깥에서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2층이나 3층 조그만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아는 사람인지 확인 후 문을 열어 주었다.


특이한 점은 이미 명 청대에 2층 3층의 목조 가옥을 짓고 오늘날까지 남아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

한옥과는 달리 온돌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당시 중국의 건축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발용 의자?

가이드의 설명으로 100 여 년 전 외국에서 들여온 이발용 의자라는데...

1층에는 방이 없고 손님을 맞이하는 거실이 있다.

 

 

 

 

천정에서 빗물이 떨어지면 이곳으로 모여든다. 여름에는 에어콘 역할도 한다고.

 

 

 정정나동서선생사(貞靖羅東舒先生祠)

 고건축학자 나철문(羅哲文, 1924~2012) 서.

 

나동서(羅東舒)는 송나라 말기와 원나라 초기의 학자로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가난한 친척들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세심한 고증을 거쳐 족보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완하는 등 가문에 기여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3대 70년에 걸친 대공정 끝에 1617년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때 사당을 완공하였는데,

이는 민간 사당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경우이다.


개인 이름의 사당이지만 나동서뿐 아니라 나씨 후대의 제사도 함께 지내며 여자들을 위한 사당, 곧 여사(女祠)도 축조된 것이 특징이다.

부지면적은 약 3000㎡이고, 건축면적은 약 2000㎡이다.


주요 건축물은 조벽(照壁)·영성문(欞星門)·좌우비정(左右碑亭)·의문(儀門)·곁채·배대(拜臺)·향당(享堂)·후침(後寢) 등이다.

중축선(中軸線)이 분명하고 건물의 분포가 좌우로 대칭되어 치밀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영성문은 나무 울타리로 된 패방식(牌坊式) 대문으로, 조벽과 더불어 하나의 전정(前庭)을 이룬다.

의문은 영성문 안 쪽에 있으며, 정면 폭이 7칸 26.5m, 안 길이 10m, 높이 9.5m로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의문을 지난 정원을 거쳐 향당에 이른다.

정원의 동서 양쪽에 있는 곁채에는 약 1000개의 고대 편액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시기에 대부분 파손되고 지금은 30여 개만 보존되어 있다.


주 건물인 향당은 정면 폭이 5칸에 25.6m이고, 안 길이는 7칸에 22.5m, 용마루까지 높이는 13.6m이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일 뿐 아니라 가문의 일을 의논하고 공신과 명족을 접대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보륜각(寶綸閣)


보륜각(宝纶阁)은 정감촌에서 가장 큰 건물로 명나라 가정(嘉靖) 21년(1542)에 건립되었고

침전(寝殿)의 대들보상의 채색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민간 채색의 진품이며 명대 고건축의 정수이다.

금사난목 기둥 1주의 가격이 3억 위안이라는 가이드의 설명.


후침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11칸으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트러스(truss)와 지붕받침, 도리, 기둥머리 등에 보존된 명나라 때의 채색화로 더 유명하다.

향당 남쪽에 있는 여사는 면적이 160㎡으로 남사(男祠) 규모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여 남존여비의 관념을 드러낸다.

 

 

보륜각(寶綸閣) 명말 서예가 오사홍(吳士鴻) 서.

 

 

 

 이륜유서(彛倫攸叙)

 동기창(童其昌 1555~1636) 서. 윤리가 일정하게 베풀어진다.

 

 

 

 마을을 빠져 나오자 S자 모양으로 흐르는 큰개울이 있다.

 

 

 

 

 

 

 개울가에는 빨래터가 있어 빨래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자기의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해서 관광객이 사진 찍는 것을 무척 싫어한단다. 주의해야 할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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