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투(當塗)와 차이스지(采石磯)    동영상 출처: EBS

이백과 두보의 교류

중국 고전 시가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백과 두보는 동시대에 살았는데, 두보가 이백보다 11살 어렸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744년 봄으로, 이백은 한림공봉으로 재직하다가 궁궐에서 물러나서 낙양을 노닐고 있을 때였고 두보는 젊은 시절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에 천하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이백은 이미 그의 문학적 재능으로 인해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였으며, 두보는 아직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각자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두보는 이백을 거의 우상으로 숭배할 정도로 우러러 보았지만 이백에게 있어서 두보는 아직 한갓 문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자주 술을 마시고 사방을 유람하면서 나이를 잊은 우정을 과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듬해에 다시 한번 더 당시 유명한 문인이었던 고적 등과 함께 산동에서 만나서 어울려 노닌 후 헤어지고는 영영 만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두보는 항상 이백을 흠모하면서 그를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다. 현재 그들이 서로를 위해 지은 시는 두보의 시가 10여 수 정도 남아 있고 이백의 시는 3수가 남아 있다. 그 중 일부를 살펴보면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좋아하고 그리워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春日憶李白(춘일억이백) - 봄 날에 李白을 생각하며 / 杜甫(두보)

白也詩無敵,(백야시무적) 이백은 시가 무적이니 
飄然思不群.(표연사불군) 표연하여 그 생각이 남들과 달라서,
淸新庾開府,(청신유개부) 청신함은 유신과 같고 
俊逸鮑參軍.(준일포참군) 준일함은 포조와 같네.
渭北春天樹,(위북춘천수) 위수 북쪽에는 봄 하늘의 나무 
江東日暮雲.(강동일모운) 강 동쪽에는 해질 무렵의 구름.
何時一樽酒,(하시일준주) 언제나 한 동이 술로 
重與細論文.(중여세논문) 다시 더불어 자세히 글을 논할까? 
두보(712~770)의 오언율시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이다. 
봄날에 이백(701~762)을 생각하는 두보의 이 시에서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춘수모운(春樹暮雲)이라는 성어가 생겼다. 

위수(渭水)의 북쪽인 위북은 당시 두보가 머무르고 있던 당의 수도 장안(長安)을 가리키며

강동은 이백이 떠돌던 강남(江南)을 말한다.

이 시는 비교적 많이 읽힌 작품으로 玄宗 天寶(현종 천보) 6년(747) 36세 때에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첫머리에 ‘白也’라 하여 이백을 높이지 않았으나, 이어서 ‘無敵’이니 ‘不群’이라 표현하여

최고의 讚辭(찬사)를 보내고, 이어 2연[3~4구]에서는 유신과 포조를 들어 그를 찬양했다.

3연[5~6구]에서 전환하여 그를 그리는 정을 표출하여 ‘그대가 없는 여기 장안의 봄이 무슨 뜻이 있으며, 그대가 있는 강남의 저녁노을 구름도 내가 없으니 제 빛을 내랴.’하고 읊어, 이백을 향한 지극한 정을 나타내었다.

이 구절은 특히 對句(대구)가 멋져서‘渭水江雲(위수강운), 暮雲春樹(모운춘수), 雲樹之懷(운수지회), 春樹暮雲情(춘수모운정)’ 이라는 새로운 語彙(어휘)가 생기게 되어 ‘먼 곳의 벗을 생각하는 간절한 정’을 표현하는 말로 쓰이고 있으니, 시인의 어휘 창조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는 언제 만나 함께 술 마시며 시와 글에 대해 논할 수 있으랴 하고 시인답게 끝맺어, 더불어 대화할 상대는 오직 이백뿐이라는 뜻을 숨겼다. 그런데도 이 둘은 이후 만나지 못했다고 하니 안타깝다.

‘두시언해’에서 이백과 관련된 시는 모두 8수인데, 이 시 외에 ‘冬日有懷李白(동일유회이백)’ ‘夢李白(몽이백)’ ‘送孔巢父謝病歸遊江東兼呈李白(송공소보사병귀유강동겸정이백)’ ‘與李十二白同尋范十隱居(여이12백동심범10은거)’ ‘贈李白(증이백 2수)’ ‘天末懷李白(천말회이백)’ 등이 있다.

이백과 두보는 744년, 당 현종 때인 천보(天寶) 3년 낙양(洛陽)에서 처음 만났다. 칭화(淸華)대 중문과 교수였던 원이더(聞一多·1899~1946)의 표현처럼 ‘창공에서 태양과 달이 만난 듯 중국 역사상 가장 신성하고 기념할 만한 만남’이었다.

둘은 1년 여 동안 만나고 헤어지고 했지만 그 뒤 다시 만나지 못했다.

두보가 이 시를 지은 것은 처음 만난 지 3년 뒤인 35세 때다.

시에 나오는 유개부는 북주(北周)의 문학가 유신(庾信·513~581)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지내 ‘유개부(庾開府)’로 불렸다.

포참군은 참군(參軍) 벼슬을 한 남북조ㆍ송대(宋代)의 시인 포조(鮑照·414?~466)다. 고려 후기의 문신 백문보(白文寶)의 시에도 ‘淸新庾開府 終始郭汾陽(청신유개부 종시곽분양)’이라는 대목이 있다. 시풍이 청신함은 바로 유개부요, 부귀로 시종하기는 당 현종 때의 곽자의(郭子儀)로다, 이런 뜻이다.


夢李白(몽이백)- 꿈 속에 이백을 보다 / 杜甫(두보)

浮雲終日行(부운종일행) : 뜬 구름 종일토록 하늘을 떠다녀도
遊子久不至(유자구불지) : 떠난 친구는 오래도록 오지 않네
三夜頻夢君(삼야빈몽군) : 한밤에 자주 그대를 꿈속에서 보니
情親見君意(정친견군의) : 우정의 친함으로 그의 마음을 보노라
告歸常局促(고귀상국촉) : 돌아간다 말할 때 항상 풀 죽어 보이고
苦道來不易(고도래불역) : 돌아오기 어렵다 괴롭게 말하네
江湖多風波(강호다풍파) : 강호에 풍파 잦고
舟楫恐失墜(주즙공실추) : 배 젓는 노 떨어뜨릴까 두려워하네
出門搔白首(출문소백수) : 문 나서며 흰머리 긁는 것이
若負平生志(약부평생지) : 평생의 뜻을 저버린 듯 하구네
冠蓋滿京華(관개만경화) : 높은 벼슬아치들 서울에 가득한데
斯人獨憔悴(사인독초췌) : 이 사람 내 친구는 홀로 얼굴 수척하다
孰云網恢恢(숙운망회회) : 누가 말했나, 하늘의 그물이 한없이 넓다고 
將老身反累(장로신반루) : 늙어서 몸이 도리어 법망에 걸려들었네
千秋萬歲名(천추만세명) : 천추만년에 이름을 남긴다고 해도
寂寞身後事(적막신후사) : 죽은 뒤의 일은 적막하기만 하다. 
​[참고]
* 중국의 한시의 최고봉은 당시인데 양한시대를 거쳐 육조시대에 이르러 시의 평측법과 압운법이 완성되어 
중국발음으로 한시를 읽으면 그 자체로 노래가 된다.
이 당나라 시대에 두 천재시인 이백과 두보가 열 살 차이로 동시대에 태어나 낙양에서 조우하기도 했다.[이백이 11세 많음]
도가사상에 바탕한 이백의 시가 초월적 상상력에 비견할 자가 없다면 유가사상에 기반을 둔 두보의 사실주의 시는 
현실비판 측면에서 당할 자가 없다.

贈李白(증이백) - 이백께 드리는 시 / 杜甫(두보)

秋來相顧尙飄蓬,(추래상고상표봉) 가을 와 서로 돌아 보니 아직도 떠도는 쑥인데, 
未就丹砂愧葛洪.(미취단사괴갈홍) 단사를 이루지 못해 갈홍에게 부끄러워한다.
痛飮狂歌空度日,(통음광가공도일) 통쾌하게 마시고 미친 듯 노래 부르며 헛되이 날을 보내거니와, 
飛揚跋扈爲誰雄.(비양발호위수웅) 날아 오르고 뛰어 넘으니 누구 위해 영웅인양 하는가.

魯郡東石門送杜二甫(노군동석문송두이보) - 노군 동쪽 석문에서 두보를 보내다 / 李白

醉別復幾日,(취별부기일) 취하여 이별한 지 또 며칠이 지났던가? 
登臨徧池臺.(등림편지대) 못가의 누대를 두루 올라 굽어보았지. 
何時石門路,(하시석문로) 어느 때 석문의 길가에서 
重有金樽開.(중유금준개) 다시금 황금 술단지를 열 수 있을까? 
秋波落泗水,(추파낙사수) 가을이 되니 사수의 물결은 낮아지고 
海色明徂徠.(해색명조래) 새벽빛으로 조래산은 환해졌네. 
飛蓬各自遠,(비봉각자원) 날리는 쑥처럼 각자 서로 멀어지니 
且盡手中杯.(차진수중배) 손에 든 술잔이나 비우세

戱贈杜甫(희증두보) - 두보에게 농담조로 주다 / 李白

飯顆山頭逢杜甫,(반과산두봉두보) 반과산에서 두보를 만났는데 
頂戴笠子日卓午.(정대입자일탁오) 머리에는 삿갓을 썼으니 대낮이라네. 
借問別來太瘦生,(차문별래태수생) 이별 한 뒤로 너무 말랐다고 물어보니 
總爲從前作詩苦.(총위송전작시고) 여태까지 시 짓느라 고생해서 그렇다네. 
 * 飯顆山= 일명 長樂坡라고도 하여 서안시 근처에 있는 산이라 하는데 語意대로 말하자면 밥풀산이 된다
別來= 헤어진 뒤에
太瘦生[태수생]= 매우 수척한 서생, 시를 짓느라 고생해서 수척해진 것을 뜻함
總爲[총위= 모두 ~ 때문이다.
註: 이 시는 이백이 44세 때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러면 두보는 32살 때이니 한참 후배로 생각했을 것이다. 
飯顆山이니 太瘦生이니 하여 詩題처럼 두보를 희롱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지마는 마지막 두 句를 보면 
戱謔은 하면서도 깊은 정이 베어 있어 희롱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시로 인해 詩作으로 고생하는 시인을 보고 태수생이라 부른다.
이백의 시가 폭포수 같이 시원 하다면 두보는 밥풀을 세이듯 한자 한자 따지는 꼼꼼한 시인으로 
서로 상반 되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早發白帝城(조발백제성) / 李白

朝辭白帝彩雲間(조사백제채운간) 아침 일찍 오색 구름 감도는 백제성에 이별하고 
千里江陵一日還(천리강릉일일환) 천리길 강릉을 하루만에 돌아왔네
兩岸猿聲啼不住(양안원성제부주) 강기슭 원숭이들 울음소리 그치질 않는데
輕舟已過萬重山(경주이과만중산) 가벼운 배는 만겹의 산을 지나왔다네
이백은 만년에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거병에 가담하였는데, 
이린의 거사가 실패하자 그도 체포되어 지금의 구이저우성[貴州省] 서북부의 야랑(夜郞)으로 유배되었다. 
야랑으로 가는 도중에 백제성(白帝城)을 지나면서 이백은 자신의 사면 소식을 접하였고, 
자유의 몸이 되어 강릉으로 돌아가면서 이 시를 지었다.
제목은 '아침 일찍 백제성을 떠나며'라는 뜻이다. 백제성은 쓰촨성[四川省] 펑제현[奉節縣] 동쪽의 백제산(白帝山)에 있는 산성이며,
강릉은 후베이성[湖北省] 장링현[江陵縣]으로 두 곳의 거리는 양쯔강의 물길로 약 300㎞이다. 
양안(兩岸)은 무산(巫山)과 협산(峽山)의 양쪽 언덕을 가리키며, 
그 사이로 양쯔강이 흘러가는데 강폭이 좁아 유속(流速)이 최고 시속 24㎞에 이를 정도로 빠르다고 한다. 
또 이곳은 원숭이들이 많은 지역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백은 한시라도 빨리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아침 일찍 서둘러 백제성을 떠나 배를 타고 강릉으로 향한다. 
강가 양쪽 언덕에서 쉼없이 울어대던 원숭이들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데, 
세찬 물살에 가벼워진 배는 겹겹이 쌓인 산들을 빠르게 지나 천리길 같은 강릉에 하루만에 도착한다. 
자유의 몸이 된 기쁨을 빠른 물살처럼 경쾌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이 시 또한 이백의 명작 중의 하나이다. 
백제성에서 무협을 거쳐 호북성의 강릉까지 뱃길로 천 3백여 리요, 그 중 골짜기 길이가 7백 리나 되는 먼 거리인데, 
그 먼 길을 아침에 떠나 하루에 닿았다 하니, 강의 흐름의 빠름과 배가 얼마나 빨리 떠내려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에 강기슭의 원숭이 울음이 자꾸 뒤로 뒤로만 밀린다 했다. 
아침노을, 빠른 강 흐름과 똑같이 빠른 배, 산으로 첩첩이 쌓인 강 언덕 등 敍景(서경) 중심의 작품이다.
白帝 : 白帝城(백제성). 重慶市(중경시)와 湖北省(호북성) 사이의 巫峽(무협) 부근에 있는 성.1)
彩雲 : 빛깔이나 무늬가 있는 구름.
江陵 : 지금의 호북성 荊州市(형주시).
啼不住 : 원숭이 울음소리가 한 곳에서 계속 들리지 않고 없어져 버림. 배가 빨리 달리는 모양을 강조한 말임.
輕舟 : 가볍고 빠른 작은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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