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루유지(镝楼遗址)

"본래는 한 채의 세 개 처마로 된 헐산식 적루가 있어 요망대로 사용하였는데 청조 가경년에 무너져 내려 강령현에서 다시 재건할 때 규모를 축소하였고, 1937년 겨울 일본군이 남경을 침공할 때 파괴되었다."


파손되기 전 성루(城楼)의 모습

중국에서 꼭 봐야 할 4대 역사 명승지로 만리장성과 북경의 자금성, 서안의 병마용, 그리고 남경의 중화문을 꼽을 정도로 중화문은 중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화문(中華門) 성루(城楼) 모형도


南京明代城墙(남경명대성벽)


南京明城墙全景圖(남경명성벽전경도)


1366년 주원장은 지리조건이 좋은 남경에 마음을 두고 옛 성을 확장하고 궁전을 지었다. 궁성(宮城), 황성(皇城), 내성(內城), 외곽(外郭)의 4중 성벽이 건설되었으며, 이것들을 총칭하여 남경성으로 불렀다. 하지만 현재는 내성만을 가리켜 남경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성의 성벽은 동쪽으로는 종산(鍾山)에 닿아있고, 서쪽으로는 석두성(石頭城), 남쪽으로는 진회하(秦淮河), 북쪽으로는 후호(後湖)에 걸친 지역에 건설되었다. 외곽성까지 모두 완공된 건 1393년으로, 처음 궁성을 건설하기 시작한 때(1366)로부터 무려 28년이 걸렸다. 명나라 성벽의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될까? “두 사람이 각각 말을 타고서 성벽의 반대 방향으로 하루 종일 가야만 만날 수 있다.” 16세기 중엽에 난징에 세 번이나 왔던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마테오 리치 중국 찰기(札記)>에 나오는 말이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명나라 성벽은 명실상부 세계 최대의 규모였다. 외곽성이 60㎞, 경성이 총 35.267km로 도시에 건설된 고대의 성벽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성벽이며, 중국에서도 보존상태가 좋은, 얼마 남지 않은 성벽이다. 하지만 일부 구간이 끊어진 상태이며, 현존하면서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구간이 23.399km에 불과하여 서안성(西安城)이나 개봉성(開封城)의 완전성에는 못 미치고 있다. 남경에서는 가장 거대한 고대 건축물이다.  
내성은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은 형태를 하고 있다. 벽돌을 쌓고, 그 속을 흙으로 채워 만들었다. 내성은 지형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성들과는 달리 방(方)형으로 지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의 성으로서는 혁신적인 모습을 한 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성은 남쪽에 정양문을 정문으로 3곳, 서쪽에 5곳, 동쪽에 1곳, 북쪽에 4곳, 총 13곳의 성문이 있었다. 성문의 이름은 각각 정양문(正陽門 : 한때 광화문이라 불렸으나 없어짐), 통제문(通濟門), 취보문(聚寶門, 중화민국시기 中華門으로 개명), 삼산문(三山門, 속칭 수서문水西門), 석성문(石城門, 속칭 한서문旱西門 또는 한서문漢西門), 청량문(清涼門), 정회문(定淮門), 의봉문(儀鳳門, 중화민국 때 흥중문興中門), 종부문(鍾阜門), 금천문(金川門), 신책문(神策門), 태평문(太平門), 조양문(朝陽門, 중화민국 때 중산문中山門)으로, 이들 성문과 외곽의 성문들을 합하여 “내십삼, 외십팔(裏十三,外十八)”이라 하였다.
13개의 성문 위에는 성루(城樓)를 지었고, 중요한 성문에는 옹성(甕城)을 지어 공격에 대비했다. 그 중 취보문(聚寶門), 통제문(通濟門), 삼산문(三山門)은 수륙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매 문마다 모두 옹성을 건설하여 방어에 힘썼다. 성벽위에는 군사들이 머무르며 보초를 섰던 와포방(窩鋪房)이 200곳 있었으며,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13,000여개 있었다. 와포방은 모두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성가퀴는 일부만 남아있다. 명나라 초기에 남경성 내외에 주둔했던 군사는 약 20만 명이었다. 황궁과 강을 지켰던 일부의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군사가 성내의 서북지역에 주둔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대규모의 병영과 식량창고, 병기창이 있는 일종의 군사구역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3개의 성문 중에서 사연 많기로는 신책문(神策門)과 태평문(太平門)을 능가할 게 없을 것이다. 먼저 신책문의 사연부터 알아보자. 남명의 정성공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기치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난징을 공격했을 때 난징을 지키고 있던 청나라 군대는 1만여명에 불과했다. 청나라의 양강 총독은 신책문을 굳게 닫고 지연작전을 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성문 밖으로 나가 싸워서 큰 승리를 거둔다. 순치제는 이를 기념해서 신책문을 ‘득승문(得勝門)’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난징이 태평천국의 수도였을 때, 청나라 군대가 내내 공격의 목표로 삼았던 곳도 바로 신책문이다. 결국 신책문도 태평천국도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말았다. 신책문의 ‘화평문(和平門)’이라는 글씨는, 민국시기에 화평문으로 개칭되면서 새겨진 것이다. 당시 화평문 안에는 아시아 석유회사(Asiatic Petroleum Company)의 유류창고가 들어섰다. 이후 일본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도 이곳에 유류창고를 두었다. 화평문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내내 유류창고의 기능을 하면서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었다. 화평문이 군에서 인민정부로 넘어오고 시민에게 개방된 것은 2001년, 비로소 평화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된 것이다.
태평문이야말로 그 이름과의 불일치가 가장 심한 성문이다.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의 최후 보루였던 태평문과 주변 성벽이 20여 장(丈)이나 무너져 내렸다. 태평천국 진압에 나선 상군(湘軍)이 성벽 아래 매설한 600여 포대의 화약이 폭발한 것이다. 조열문(趙烈文)의 <능정거사(能靜居士) 일기>에서는 난징이 함락된 이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성이 함락된 날 전군이 성을 약탈했다.” “사흘 동안 10여만명을 죽였고 진회하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마흔 이하로는 한 명도 살아남은 이가 없고 노인은 부상당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칼에 십여 번 혹은 수십 번을 찔렸으며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으로 멀리 퍼졌다.”
그로부터 70여 년 뒤, 태평문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1937년 11월 상하이를 함락한 일본군은 난징을 향했다. 12월 8일, 장제스는 비행기로 난징을 떠났다. 난징 사수를 강력히 주장했던 탕성즈(唐生智) 역시 퇴각 명령을 받고서 12월 12일에 배를 타고 난징에서 빠져나갔다. 이튿날, 태평문 부근에서 무려 1300여명이 학살된다. 일본군은 항복한 중국군과 시민을 이곳에 모아 놓고 주위에 철조망을 둘러쳤다. 이들의 발아래는 일본군이 매설해 둔 지뢰가 있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고 철조망 안에 갇힌 이들은 굉음과 함께 폭사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일본군은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70년이 지난 2007년 12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었던 태평문 근방에는 이날을 기억하고자 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날의 학살에서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을 증언한 이는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일본 병사다. 인터뷰 당시(1999) 그는 이미 여든 중반을 넘어선 노인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성벽의 역할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통행상의 필요에 따라 성문의 개수는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1908년 초장문(草場門)이 생겼고, 1909년에는 지금의 현무문(玄武門)인 풍윤문(豐潤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13년 지금의 읍강문(挹江門)에 해당하는 해릉문(海陵門)이 생겼으며, 1929년 무정문(武定門), 1931년 한중문(漢中門), 중앙문(中央門), 소북문(小北門), 1934년 신민문(新民門), 1935년 우화문(雨花門) 등이 건설되었다. 1930년대 이미 남경성의 성문은 24곳에 달했으며 1952년에는 다시 해방문(解放門)이 생겨났고, 1992년에는 집경문(集慶門)이 추가 되었다. 
내성은 1950년대까지도 대체로 완전한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20년 동안 심각하게 파괴되어 지금은 원형의 60%정도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내성의 최초 13개 성문 중에서 취보문, 석성문, 신책문, 청량문만이 명나라 때 건설된 성문이며, 나머지 것들은 전쟁에 파괴되어 나중에 다시 지은 것이다. 신책문도 성문자체는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성루는 파괴되어 재건하였다.
난징성은 전체적으로 "ㅏ" 자 모양이다. 성의 서북쪽(난징성의 최북단)은 양쯔강에 면해 있고, 동북쪽은 지금의 중산릉과 명효릉이 위치한 자금산에 닿아있다. 자금산 서쪽에는 인공 호수 현무호가 있고, 동남쪽으로는 월아호(月牙湖)에 이어 호성하(護城河)가 성을 보호하기 위한 해자 역할을 했다. 남쪽부터 서쪽에 이르는 긴 구역은 친후와이허가 해자 기능을 담당했다. 진짜 강줄기인 친후와이허는 난징성의 남쪽으로부터 서북쪽을 향하여 흐르다 양쯔강에 합류한다. 난징성의 최남단부터 양쯔강 합류 지점 중간쯤에 친후와이허를 바라보며 한중문(漢中門)과 청량문(淸凉門)이 있다.


진회하(秦淮河)

옛날 해자 역할을 하던 강 위로 다리가 놓여있다. 진회하는 총 길이 110 Km되는 남경의 주요 강으로 시 동남쪽에서 시내 방향으로 흘러든다. 중화문은 외진회하(外秦淮河)와 내진회하(內秦淮河)의 사이에 있다. 진회하의 옛 이름은 "회수(淮水)"였고, "용장포(龍藏浦)"라고도 했다. 원류는  동쪽으로 구용현(句容縣) 보화산(寶華山), 남쪽으로 율수현(溧水縣) 동려산(東廬山)이다. 두 물줄기가 강녕현(江寧縣) 방산태(方山埭)에서 만나서 남경성 동쪽 수문으로 흘러 들어와 성을 관통하여 서쪽 수문으로 빠져나가 장강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전체 길이는 약 110Km이다. 성밖의 물줄기는 외진회(外秦淮)라고 하고, 성내 물줄기는 내진회(內秦淮)라고 하는데, 내진회의 길이는 약 5Km이다. 전해지기로 진시황제가 이곳으로 순행 왔을 때 방산(方山)을 파고 장롱(長隴)을 잘라 금릉(현재의 남경)의 왕기(王氣)를 없앴던 연고로 진회하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의봉문(儀鳳門) 남경성 북쪽에 있는 문. 중화민국 때 흥중문(興中門)으로 바뀜





마도(馬道)
"성으로 오르는 비스듬한 말길은 전쟁 당시에 군수물자를 성에 나르는 쾌속도였으며

장군들이 직접 말채찍을 휘두르며 성 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마도(馬道)


위에서 내려다 본 마도(馬道)


위에서 내려다 본 마도(馬道)



성문 위의 넓은 광장. 성문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성문 위에 비치된 뢰석(礌石)


뢰석(礌石)은 돌을 쪼아 만든 볼링공 형태의 병기이다.

명나라 시기의 주요 방성(防城)도구로써 성벽을 오르는 적병에게 던져서 상해를 입혔다.

가장 큰 것은 무게가 200근에 달한다.



뢰석(礌石)을 올려놓고 멀리 던져 공격하던 기구



明代大炮(명대대포) 당시에 공격 무기로 사용하던 대포



명대 중형 공격 전차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발사하는 공격형 무기





성벽(城墙) 건설에 쓰인 벽돌의 책임실명제


난징 성벽을 쌓는 데 쓰인 벽돌에는 관리부터 인부에 이르기까지

해당 벽돌의 제조와 관련된 이들의 이름이 선명히 찍혀 있다.


검사에 불합격하면 관련자는 처벌을 받았다. 사형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벽의 벽돌조차 책임자를 찾아 문책했던 엄격한 ‘품질보증제’ 덕분에 난징의 성벽이 지금까지도 건재하고 있을 것이다.


고대 중국의 성벽은 대부분 이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벽돌을 절약하면서도

충분히 강한 성벽을 건설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타구는 총 13,616곳이 있었고, 성루에는 병사를 숨겨두었던 장병동(藏兵洞)이 200곳 있었다.

장병동은 성루에 마련된 터널식 공간으로 평소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전시에는 병사들을 숨겨두는 장소나 숙소로 이용되었다. 






제조지역, 제작자와 품질관리 관원, 그리고 감독자의 성명이 표기된 벽돌


벽돌의 탁본



南京明代城墙(남경명대성벽)


남경성(南京城) 주위를 해자가 감싸고 있다.

동쪽 주황색으로 표시된 곳이 황제가 살던 궁이고, 중화문(中華門)은 남쪽 큰 탑 앞에 있는 문이다.


북동쪽으로 현무호와 자금산이 보인다.

서쪽 성 안의 산이 청량산이다.


주원장이 어렸을 적 심각한 가뭄이 들었다.

이어진 메뚜기 피해와 돌림병. 반년 만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형까지 모두 잃은 이 가련한 소년,


관을 마련할 돈조차 없어 낡은 옷으로 유해를 수습해 이웃집 땅에다 안장했다.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하고 갈 곳은 절밖에 없었다.


얼마 뒤 절에서도 식량이 동났다. 소

년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탁발승 노릇을 하며 지냈다.


그렇게 몇 년을 떠돌다가 다시 절로 돌아온 게 1348년.

스무 해가 지난 1368년, 그는 난징에서 제위에 올라 명나라 건국을 선포한다.


그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 바로 주원장(1328~1398)이다.

주중팔은 홍건군(紅巾軍)의 우두머리 곽자흥(郭子興)의 휘하로 들어갔을 때 주원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朱)는 주살의 주(誅)를 의미하고, 원(元)은 원나라를 의미하며,

옥으로 만든 홀(笏)인 장(璋)은 인재를 의미한다.


주원장은 그 이름처럼 ‘원나라를 멸망시킬 인재’였다.

그는 원나라 군대를 거듭 격파했다. 곽자흥은 자신의 양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1


355년에 곽자흥이 병사하자 그 뒤를 이은 주원장은 강남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한족의 부흥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원나라와 대적하는 지도자로 부상한 주원장,


그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인재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였다.

주원장이 난징을 근거지로 삼은 것은 책사 풍국용(馮國用)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다.


주승(朱升)이라는 책사는 “성벽을 높이 쌓고, 식량을 많이 저장하고, 왕위에는 천천히 오르십시오”라고 했다.

주원장은 이 말을 그대로 실천한다.


라이벌이었던 또 다른 반란군의 지도자 진우량이 한왕(漢王)을 자칭하고 장사성이 오왕(吳王)을 자칭할 때도,

주원장은 왕위에 오르는 데 급급해 하지 않았다.


그는 소명왕(小明王) 한림아를 계속 받들면서 자신의 실력을 키웠다.

1366년, 홍건군의 기반인 백련교의 지도자 한림아는 난징으로 가던 길에 배가 뒤집혀 강물에 빠져 죽고 만다.


아마도 그의 죽음은 주원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듬해 주원장은 오왕을 자칭했던 마지막 라이벌인 장사성도 죽였다.


그리고 1368년, 주원장은 황제가 된다.

국호는 대명(大明), 소명왕 한림아를 계승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일찍이 백련교를 기반으로 일어났던 홍건군은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강생하고 명왕(明王)이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선전했다. 결


과적으로 보자면, 대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예언의 명왕이었던 셈이다.

“성벽을 높이 쌓으라”는 주승의 권고는 난징에서 착실히 이행되었다.



심만삼(沈萬三)


난징의 성문은 마치 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끝이 없는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난징의 13개 성문은 하늘의 별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난징을 둘러싼 성벽의 북서쪽 귀퉁이 의봉문(儀鳳門, 중화민국 때 흥중문 興中門)과

동남쪽 귀퉁이 통제문(通濟門)에 각각 점을 찍은 뒤 두 점을 선으로 연결해 보면

취보문(聚寶門) · 삼산문(三山門 속칭 수서문水西門) · 석성문(石城門, 속칭 한서문 旱西門 또는 한서문 漢西門) ·

청량문(清涼門) · 정회문(定淮門) · 의봉문은 ‘남두육성(南斗六星)’에 해당한다.


그리고 통제문 · 정양문(正陽門 : 한때 광화문이라 불렸으나 없어짐) · 조양문(朝陽門, 중화민국 때 중산문 中山門) ·

태평문(太平門) · 신책문(神策門) · 금천문(金川門) · 종부문(鍾阜門)은 ‘북두칠성’에 해당한다.


난징의 성벽을 만든 주원장의 효릉(孝陵)은 북두칠성 영역에 자리한다.

게다가 황릉의 신도는 모두 직선 형태인데, 효릉의 신도는 북두칠성 형태로 굽어 있다.


예로부터 남두육성은 삶을 관장하고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하는 별자리로 믿어졌다.

난징의 13개 성문에는 자신이 세운 나라의 수도에 우주를 구현하고자 했던 주원장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또한 북두칠성 형태의 신도는 그가 우주의 중심 북두칠성에 묻힘으로써

영원을 기약하고자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런데 주원장은 엄청난 축성 자금을 어떻게 조달한 것일까?

명사(明史)에 따르면, 강남의 부자 심만삼(沈萬三)이 난징 성의 3분의 1을 쌓는 비용을 댔다고 한다.


심만삼(沈萬三 1330년 ~ 1379년)은 원나라 말기의 강남의 거부였다.

자는 중영(仲榮)이며 절강(浙江) 오흥(吳興)(현재 湖州)출신이다.


1368년 ~ 1911년에 이르는 명나라와 청나라 때 저우장의 심청(沈廳)의 60% 이상이 건축되었다.

저우장이 발전된 것은 명나라 때 유명한 거부 심만삼(沈萬三) 때부터이다.


명사에는 주원장이 심만삼의 재력에 도움을 받아, 서수휘, 진우량, 장사성 등의 세력을 격파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심만삼은 개인 출자로 난징 성벽을 쌓고, 게다가 그는 군대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금까지 내놓겠노라고 했다.


일개 필부가 천자의 군대를 위로하겠다니! 주원장은 분노하며 그를 죽이려 했다.

이때 마(馬)황후가 이렇게 말하며 주원장을 말린다.


“법률이란 불법을 저지른 자를 죽이기 위함이지, 불길한 자를 죽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라에 대적할 정도로 부유한 자는 불길하고, 불길한 자는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니 폐하께서 그를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주원장은 심만삼을 죽이는 대신 윈난(雲南)으로 유배를 보냈다.
명나라 초에 강남 일대의 부자는 모두 주원장의 고향인 펑양(鳳陽 봉양)으로 이주당하기도 했다.


이는 한나라 고조가 부자를 죄다 관중(關中)으로 이주시킨 사례를 따른 것으로,

주원장은 자신의 고향을 수도로 삼고자 14만 호에 달하는 강남 백성을 펑양으로 이주시켰다.


결국 펑양으로의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하들의 반대도 있었거니와, 그곳은 자신뿐 아니라 개국공신들의 고향인지라 권력의 누수가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대한 경계와 의심을 떨칠 수 없는 게 일인자의 숙명이긴 하지만 주원장은 그 정도가 너무도 심했다.

그런 그가 심만삼과 같은 이를 그냥 두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게다가 심만삼은 일찍이 주원장의 라이벌 장사성을 도운 전력까지 있다.

장사성을 도운 부자가 어디 심만삼뿐이랴.


장사성이 세력을 발휘할 때 누구든 그를 도울 수밖에 없었던 게,

주원장이 황제가 된 상황에서는 원죄가 되어버린 것일 따름이다.


주원장은 이 부자들을 죄다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경계와 의심을 해소했다.

그리고 부자에 대한 분풀이까지 해낸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13개의 성문 중에서 ‘취보문(聚寶門)’에는 심만삼과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진다.

취보문을 세울 때 계속해서 지반이 무너져서 점을 봤더니, 성문 아래에 취보분(聚寶盆)을 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취보분은 재물이 계속해서 나오는 일종의 화수분이다.

주원장은 심만삼이 가지고 있던 취보분을 가져다 성문 아래에 묻게 한다.


그랬더니 더 이상 지반이 무너지지 않았고 성문을 세울 수 있었단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설이지만, 취보분의 소유자로 말해질 정도로 심만삼이 부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부를 주원장이 앗아갔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취보문은 ‘천하제일의 옹성(甕城)’이라 불릴 정도로 완벽한 옹성을 갖추고 있는데,

1931년 국민정부에 의해 중화문으로 개칭되었다.


주원장의 지나친 경계와 의심이 도리어 그의 의도와 어긋난 결과를 가져온 경우도 있다.

황태자 주표가 한창 나이에 죽자 주표의 장자 주윤문을 후계자로 지명한 뒤 단행한 대규모 숙청이 대표적인 예다.


주윤문이 숙청의 이유를 묻자 주원장은 그에게 가시가 가득한 나뭇가지를 쥐어보라고 한다.

머뭇거리는 주윤문에게 주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 가시 돋친 나뭇가지를 쥐지 못하니, 내가 너를 위해 가시를 죄다 없애주려는 것이다.”

주원장은 이렇듯 손자를 위해 가시를 없애주고자 했으나,

능력 있는 이들이 모두 제거됨으로써 도리어 손자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원장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1399)에 넷째아들 연왕(燕王) 주체가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킨다.

1402년, 주체의 군대가 난징에 이르자 주혜와 이경륭은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난징은 함락되고 건문제(주윤문)의 행방은 미궁에 빠진 채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한다.

주체의 군대가 들어왔던 성문이 바로 ‘금천문(金川門)’이다.


일찍이 주원장이 잔인한 숙청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혹시 그들 중 목숨 걸고 금천문을 지켰을 사람이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홍무통보(洪武通寶)


중국 명대(明代:1368∼1644)에 주조된 화폐.

태조(太祖) 때의 홍무통보(洪武通寶), 성조(成祖)의 영락(永樂)통보, 선종(宣宗)의 선덕(宣德)통보 등이 있다.


그 후 세종(世宗)의 가정(嘉靖)에 이르기까지, 효종(孝宗)의 홍치(弘治) 때 이외에는 주전(鑄錢)이 시행되지 않았으며,

가정 이후부터 다시 대대로 그 연호의 돈을 주조하였다.

원료는 처음에는 구리에 납과 주석을 더한 것이었으며, 가정 연대 이후에는 아연을 섞었다.






장병동(藏兵洞)


장병동은 성루에 마련된 터널식 공간으로 평소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전시에는 병사들을 숨겨두는 장소나 숙소로 이용되었다.


작은 쪽문을 통해 들어가면 길다란 통로가 나오고 통로 끝에 넓은 공간이 나온다.

성루에는 병사를 숨겨두었던 장병동(藏兵洞)이 200곳 있었다.


장병동(藏兵洞)

"장병동"은 우리나라 고대 성문옹성 가운데의 독특한 건축이다.

고대 전쟁에서 물자의 저장과 병원의 매복 등 면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옹성에 건설된 장병동(藏兵洞)


성벽은 장방형의 돌을 바닥에 깔아 기초를 다지고, 돌을 깔아 다진 바닥 위에 흙으로 토성을 쌓고,

그 겉면에는 벽돌을 쌓아 성을 완성하는 방식이었다.


이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벽돌을 절약하면서도 충분히 강한 성벽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고대 중국의 성벽은 대부분 이 같은 방법으로 건설되었다.

다만 남경성 황궁의 경우에는 동쪽과 북쪽의 성벽은 전부 벽돌로 건설되었다.


성벽의 평균높이는 12m정도이며, 그 위에는 활을 쏘도록 고안된 타구(垛口)가 있다.

타구는 총 13,616곳이 있었으며, 벽돌의 기본 크기는 10cm X 20cm X 40cm으로

무게는 30 ~ 40근이었고, 재질은 두 가지였다.


양자강 중하류 지역인 강소(江蘇)성, 안휘(安徽)성, 강서(江西)성,

호남(湖南)성, 호북(湖北)성의 28개 부(府), 152개 현에서 제작되었다.


벽돌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벽돌의 측면에는 “OO府 OO州 OO縣”이라고 제조지가 기재되었고,

제작자와 품질관리 관원, 그리고 감독자의 성명이 표기되었다.


이것으로 벽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추적할 수 있었고,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벽돌에 써넣는 정보는 대게 70여자였으며, 정보를 넣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다.

벽돌에 글자를 찍어 넣는 방법이 있었고, 새기는 방법이 있었으며, 직접 써넣는 방법도 사용되었다.


글자의 형태는 전서(篆書), 예서(隸書), 위서(魏書), 해서(楷書), 행서(行書)가 사용되었으며

일부 간략화 된 필기체도 발견되었다.

약 10억 개의 벽돌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장병동(藏兵洞) 내부


장병동(藏兵洞) 내부


뢰석(礌石)

"뢰석은 명조시기에 성문을 방비하는 주요한 병장기였는데 청석으로 쫗아 만든 크고 작은 원형의 돌멩이 이다."



뢰석(礌石)


뢰석(礌石)은 돌을 쪼아 만든 볼링공 형태의 병기이다.

명나라 시기의 주요 방성(防城)도구로 성벽을 오르는 적병에게 던져서 상해를 입혔다.

가장 큰 것은 무게가 200근에 달한다.


뢰석(礌石) 저장고 내부






유구한 역사 문화의 도시 난징(南京)


난징(南京)은 중국에서 3,000 여 년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이어져 온 대표적인 도시다.

삼국시대 오(吳)나라를 세운 손권(孫權)은 229년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건업(建業)이라 불렀다.


당시 많은 백성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수도 허창(許昌)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가 되었다.


서진(西晉)시대 279년 흉노 출신의 유연(劉淵)이 세운 한(漢)나라가 서진(西晉)을 정복하자 

이 소식을 서진(西晉)의 황족 사마예(司馬睿)가 이곳 건업(建業)에서 전해듣고,

사마예(司馬睿)는 휘하 심복들과 호족들의 뜻을 모아 동진(東晉)을 세우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는 서진의 마지막 황제인 민제(愍帝) 사마업(司馬鄴) 이름의 끝자 '업(鄴)'이

이곳 건업(建業)의 '업'과 음이 같다해서 이를 피하기 위해 282년 건업(建業)을 건강(建康)이라 고쳤다. 


그 후 진(晋) · 송(宋) · 양(梁) · 진(陳)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이곳을 수도로 삼았고

당(唐)나라 시대에는 금릉(金陵)으로 불렸다.

이 시기 난징은 중국 전체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부상했다.


원(元)나라 시대 몽고인들은 중국 남쪽 지방을 천대하는 정책을 썼는데,

그로인해 금릉이 특히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금릉(金陵) 백성들은 몽고인들에게 많은 재산을 약탈당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지도 못하고 죽어나간 이들이 많았다.


이 시기 몽고인들은 이곳을 집경(集慶)으로 불렀다.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난징 시민들은 몽고인들에 대하여 강한 적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몽고인들과는 교류도 일절 하지 않는 편이다.


다행히도 1356년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 이곳을 점령한 이후로는

백성들을 편히 쉬게 하면서 일에 제대로 종사할 수 있도록 각별하게 배려해 주었다.

그리고 이름을 응천부(應天府)로 고쳤다.


주원장은 1328년 10월, 중국의 남동부 남경(南京) 인근에 위치한 호주(濠州)에서 태어났다.

호주는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이다.


명(明)나라가 건국된 이후 황제로 등극한 주원장은 이곳을 응천부에서 다시 남경(南京)으로 고쳤고,

1378년 정월 정식으로 명(明)나라의 수도가 되면서 경사(京師)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다.


그 이후, 주원장이 사망하고 주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몽고를 정복할 목적으로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北京)으로 천도하면서

영락 원년에 다시 남경(南京,중국어 병음: Nánjīng)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 후로도 난징(南京)의 이름은 여러번에 걸쳐 바뀌었다.

청나라 말기였던 1868~1905년 사이, 태평천국 운동을 주도한 홍수전은 이곳 명칭을 천경(天京)으로 바꾸었다.


천경(天京)이란 하늘의 수도라는 뜻으로

태평 천국이 하느님의 복음으로 발전할 도시이자 수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이곳은 동양에서 최초로 기독교가 가장 크게 발전한 도시가 되었다.

그 때문에 기존 청나라 정부로부터 크게 미움을 받았던 도시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중국의 황조 질서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인류 평등과 사회 개혁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후 1911년 중국 국민당의 최고 지도자인 쑨원(孫文)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중화민국을 세우고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고부터 난징(南京)은 당시 중국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잘 사는 도시로 발전한다.


중화민국은 동양에서 최초로 민주공화국이 되었고,

따라서 이곳은 자유와 혁명의 도시로 거듭난다.


1919년 5월 4일 대규모 반일 시위인 5·4 운동이 베이징(北京 북경)에서 일어나고

당시 난징 시민들도 상점과 학교 등을 휴업하고 일제히 시위에 동참하였다.


그 후 난징은 1928년 장제스(蔣介石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거대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일본군의 침공으로 30만 명이 살해되는 난징대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난징 대학살 이후 난징 시민들은 일본에 대해서 절대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 


1940년 3월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충칭으로 후퇴하고

난징은 왕징웨이(汪精衛 왕정위 1883~1944)가 친일정부를 조직하여

괴뢰정권의 주석으로 취임한 후 본거지로 삼았다.


하지만 그 후 중일 전쟁에서 승리한 장제스는 왕징웨이 정권으로부터 수도 난징을 다시 수복하였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해서, 난징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추방되거나 중국인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심하게는 이곳 난징에 있는 일본인 거주지가 크게 불에 타서 없어지거나

친일파들과 일본인들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국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에게 패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중국공산당은 이 도시의 지위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 여파로 난징은 중국 국민당의 중심인 국민정부 수도였던 시절에 비해서

너무나도 초라한 도시로 전락해버렸다.


그 결과 난징은 찬란한 대도시의 이미지가 사라지고,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 이름에 걸맞지 않은 지방 소도시로 전락하고

1953년 장쑤성(江蘇省 강소성)의 성립과 함께 그 성도가 되었다.  


타이완 섬에 있는 중화민국 정부는 이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50~1960년대에 난징의 지위를 떨어뜨렸다는 것은

중화민국의 국민들을 크게 화나게 할 일이라고 경고성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후 난징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하고 덩샤오핑(鄧小平 )이 집권하면서

개혁 개방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예전 못지않게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 정부는 난징을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농업과 공업과 산업을 크게 발전시키는 정책을 폈다.


개혁 개방의 영향을 받아서 난징은 1994년 부성급시로 승격되었다.

'오경(吳京)'은 지금도 난징의 비공식적 이름으로 사용된다.

이는 난징이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난징(南京)은 말 그대로 '남쪽의 수도' 라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수도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다른 도시들인 일본의 교토(京都, 경도), 대한민국의 서울(漢城, 한성)이 단순히 수도를 뜻하는 것처럼,

중국의 베이징(北京, 북경)은 북쪽의 수도를 의미하고,

일본의 도쿄(東京, 동경), 베트남의 통킹(東京: 오늘날 하노이)은 둘 모두 ‘동쪽의 수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북경'(베이징)과 '남경'(난징), '장안-서경'(시안)은

중국 내륙에 있는 낙양(洛陽 뤄양)을 중심으로 방향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삼국 시대이래로 난징은 전략적으로 지리적인 위치와 편리한 교통 때문에

방직과 조폐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명나라 때 난징은 산업이 더욱 확장되었고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번영하는 도시가 되었다.


방직과 조폐, 인쇄와 조선 등 많은 다른 산업들은

난징을 극동 아시아에서 가장 번화한 업무 중심지로 성장시켰다.


20세기의 첫 50년간 난징이 잠시 동안 중국의 정치 중심지의 지위를 회복하자

부유층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난징을 생산 중심에서 대량 소비도시로 점차 변모시켰다.

중양상창(中央商場)과 같은 거대한 백화점이 많이 생겨났고

중국 전역의 상인들이 자신의 물건을 팔기 위해 난징으로 모여들었다.


1933년에는 식품과 오락 산업에서 발생한 세입이 농업과 제조업에서의 산출량 합계를 초과하였다.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였고

마약과 도박과 살인 등의 불법 행위도 또한 크게 성행하였다.


1950년대에 중국 공산당은 빠른 산업화를 위한 국가 계획의 일환으로

국가 소유의 중공업을 세우기 위해 난징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전기, 기계, 화학, 철강 공장 및 회사 본사들이 연이어 세워졌고

동아시아 중공업 생산 기지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세계적인 수준의 산업 도시를 건설하려는 난징 지도자들의 지나친 열정은

석탄이 없는 광산에 수백만 위안을 투자하는 등의 재앙적인 실수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1960년대에 난징의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다행히도 오늘날에 이르러 개혁 개방의 영향을 크게 받아 난징은 거대한 도시로 다시 발전하고 있다.


도시 지역의 현재 산업은 1960년대의 특성을 이어받은 것으로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전력 산업이 5개의 기둥 산업을 이룬다.


대표적인 거대 공기업으로 판다 전자, 진청 자동차, 난징 철강이 있다.

난징은 양쯔강 삼각주에 위치한 이웃 도시들과 외국인 투자를 놓고 경쟁하고 있고

마이크로소프트, IBM, 애플, 폭스바겐, 이베코, A.O 스미스, 샤프와 같은

수많은 유명 다국적 기업들의 지부들이 세워져 있다.


중국이 WTO에 가입한 이래로 이곳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관심과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

현재 인구는 600 여만 명이지만 점차 많아지고 있고

난징 종합대개발의 목표는 2000만 명으로 잡고 있다.


중화문(中華門 종후아먼)


중화문(中華門)은 난징시에 있는 거대한 성문이자, 문화 유산이다.

명대(明代)에 있었던 13개의 성벽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대했던 명나라 도성의 정남문이다.


문의 길이가 남북으로 128m, 동서폭이 118.5m, 총면적이 15,168㎡ 에 달한다.

외진회하(外秦淮河)와 내진회하(內秦淮河)의 사이에 있다.


중국 대륙에서 현존하는 성문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성보식(城堡式 : 작은성) 옹성(甕城)이며, 세계적으로도 구조가 가장 복잡한 옹성(甕城)이다.


중화문(中華門)은 명나라 때 취보문(聚寶門)이라 불렸다. 

명나라 홍무 2년부터 8년(1369~1375)까지 축성되었고, 1931년 중화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전체 성벽은 1366년에 건설하기 시작해서 1386년 완성된 총 길이 33,676m로 세계 최대 규모이다. 

중화문(中華門)은 고대에 방어를 위한 군사용으로 지어진 것인데, 

어마어마한 규모에 걸맞게 3중의 옹성(甕城)이 있고 4개의 아치형 문이 설치되어 있다.


성문의 높이는 21.45m이며 성루 옆으로 말이 올라갈 수 있도록 마도(馬道)가 마련되어 있다.  

또 문마다 양 쪽으로 여닫는 목조성문과 상하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천근갑(千斤閘) 문이 달려 있어

완전히 폐쇄(閉鎖)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즉 적이 성문을 파괴하고 진입해도 천근갑이 아래로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

적을 가두고 퇴로를 차단할 수 있다. 그야말로 철옹성(鐵甕城)이다.


성문 옹성에는 상, 하 총 27개의 장병동(藏兵洞)이 있다.

평소에는 식량을 저장했고, 전시에는 군수물자를 제작하거나, 병사를 숨기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중화문의 장병동은 창이 없는 터널식으로 그 깊이가 상당하다.

3,000명의 병사가 숨을 수 있다고 하니 그 규모와 아이디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군의 최대 5배 되는 적군을 상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 난징성에는 13개의 문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중화문, 한서문, 청량문(淸凉門), 화평문 네 개 뿐이다.


중화문 안쪽에는 내진회하(內秦淮河)를 가로지르는 진회교(鎮淮橋)가 있는데,

이 다리는 남당(南唐)이래 1000년 동안 가장 번화했던 중화로(中華路)로 연결되며,

중화문 밖에는 장간교(長幹橋)가 있어 우화로(雨花路)로 연결된다.


중화문은 남당의 도성 남문유적에 다시 지은 성문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성문 아래에 강남 최고 부호였던 심만삼(沈萬三)의 취보분(聚寶盆)을 묻어

취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중화문이라는 지금의 이름은 1931년에 얻은 것이다.


중화문(中華門)의 모형도


종후와먼(中華門)은 4중의 성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도시 방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성벽이었고,

성벽 중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는 성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옹성을 쌓는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종후와먼(中華門)의 4중 성문 체계는 그 중 가장 뛰어난 편일 것 같다.

설사 적군이 가장 바깥의 성문을 파괴하고 내부로 진입한다 해도,

여전히 부숴야할 성문 3개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성문에는 천근갑(千斤閘)이라는 철문이 내려와 퇴로를 봉쇄하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성문 지하에는 기습부대가 숨어 있었다고 한다.


성문 곳곳에 기습부대가 튀어나올 수 있는 문이 있었다.

5배의 적군도 거뜬히 방어해낼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중화문(中華門)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글씨


옹성(甕城)


중화문은 처음에는 취보문이라고 불렀는데

모양새가 도자기 단지처럼 생겼다고 하여 옹성이라고도 불렀다.


세 개의 옹성에다 네 개의 권문이 관통하고 있었다.

기묘한 설계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군사적 고려 때문이라고 한다.


적이 바깥쪽 문을 뚫고 들어오면 문과 문 사이에 있는 아치형의 통로 위에서 천근 갑문을 내려

27개 장병동에 숨어 있던 삼천여 명의 군사들이 기습적으로 적군을 섬멸했다고 한다.


옛날 전쟁의 승패는 성벽과 성문을 얼마나 잘 방어하는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 천근 갑문은 없어졌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원래 13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중화문 한서문 청량문 화평문 등 4개가 남아 있다.

철옹성(鐵甕城) 천근갑(千斤閘) 문의 흔적


천근갑(千斤閘) 문이 끼어 있던 흔적(사진 왼쪽)만 깊게 패인 모습으로 남아 있다.

문마다 상하로 열 수 있는 천근갑(千斤閘) 문이 달려 있어 완전히 닫을 수 있게 해 놓았다.


즉 적이 성문을 파괴하고 진입해도 천근갑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닫히면 

적을 가두고 퇴로를 차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천근갑은 명나라 초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방성기구이다.

나무로 만든 문에 철판을 덧대어 만드는데 무게가 천근이라고 하여 천근갑이라 부른다.


중화문의 천근갑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천근갑을 고정했던 홈의 크기로 옛 모습을 추정해볼 따름이다.


현존하는 최대의 천근갑은 북경 정양문(正陽門) 전루(箭樓)에 있는 것으로,

폭 6m, 높이 6.5m, 두께 6Cm로 그 무게는 1990kg이다.


천근갑은 그 이름과 무게 때문에 일종의 아이콘이 되었다.

소설 <수당연의(隨唐演義)>를 보면 양림(楊林 : 수나라 개국공신)이 성문을 닫고

성안에 갇힌 군사들을 태워 죽이려 했을 때 대역사 웅활해(雄阔海)가 천근갑을 들어 올려 병사들을 탈출시켰다.


비록 웅활해 자신은 힘이 빠져 천근갑에 깔려죽었지만,

천근갑 덕에 웅활해는 더욱 유명해졌고, 천근갑은 ‘어려움’, ‘고난’을 대표하는 용어가 되기도 했다.


 “천근갑과 마주치다(遭遇千斤閘)”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는 뜻이며,

“개갑(開閘)”은 난제를 해결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천근갑(千斤閘)이 설치되었던 홈


천근갑(千斤閘)이 설치되었던 홈에 천정



쑨원(孫文;손문 1866~1925)의 일생


쑨원은 오늘날의 중국 남부 광둥성 출신으로 홍콩에서 서의서원이라는 의학교에서 줄곧 수석을 했다고 전해지는 당대 수재였다.

재학 중에 혁명에 뜻을 품고 1894년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하여 이듬해 광저우에서 최초로 거병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망명하면서 삼민주의를 착상, 이를 제창했다.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이 당시 일본 여성과 결혼하고 많은 일본인들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한 사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 중국인으로부터 친일파로 매도되지는 않았다.


1911년 쑨원은 난징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북양군벌의 거두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와 타협, 같은 해 3월 1일 원세개에게 실권을 위임하였고

급기야는 같은 해 3월 10일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제2혁명'에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여 반원(反遠, 반 원세개)운동을 계속했다.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9년 중화혁명당을 개조, 중국 국민당을 결성했다.


1924년 국민당대회에서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3대 정책을 채택,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

이어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국민혁명'을 제창, 국민회의를 주장했으나, 이듬해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오늘날 중화민국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쩌둥보다도 유명한 혁명 선구자로서 존경받고 있다.


쑨원은 한국의 독립 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1962년과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청조와 일제, 그리고 군벌 등의 정적들에게 평생 추적을 당하면서 중국 국내외 여행이 많았던 그는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의 호칭은 잘 알려진 쑨원(孫文)과 중산(中山) 외에도 여러 개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호적상의 본명은 쑨더밍(중국어 정체: 孫德明, 병음: Sūn Démíng, 손덕명)이며

아명(兒名)은 쑨디샹(중국어 정체: 孫帝象, 병음: Sūn Dìxiàng, 손제상)이다.


쑨원(중국어 정체: 孫文, 병음: Sūn Wén, 손문)이라는 이름은 그가 10세 무렵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자(字)는 재지(중국어 정체: 載之, 병음: Zàizhī, 자이즈)이다.


그리고 호(號)는 일신(중국어: 日新, 병음: Rìxīn, 르신)이었는데

홍콩 서양 의학원의 중문학 스승의 권유로 일선(중국어 정체: 逸仙, 병음: Yìxiān, 이시옌)이라는 또다른 자(字)를 병용한다,


일신과 일선은 광둥어로 발음하면 "Yat-sen 얏센"으로 같은 발음이다.

잘 알려진 중산(中山)은 정식으로 만든 호가 아니라 1897년 무렵부터 사용한 "나카야마"라고 하는 일본 성씨 가명이다.


쑨원이 광저우에서 1895년 30세의 나이로 가담한 혁명이 실패한 후,

외국으로 수 년간 피신했을 시기에 일본에서 사용한 가명 中山 樵(나카야마 키코리, 나카야마 사코노, 중산 차오, 중산 초)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일본에서 망명하던 시절에 다카노 나가오(高野長雄)라는 일본식 가명을 사용하였다.


의대를 졸업한 후 쑨원은 병원을 개업하고 잠시 개업의로 생활한다.

하지만 서구 열강들의 침입으로 나라가 더욱 어려워지자 쑨원은 1894년 청조의 실력자 이홍장에게 편지를 보내

 "사람은 그 재능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토지는 그 이익을 다할 수 있어야 하며, 물건은 그 쓰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재화는 그 흐름이 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혁적인 주장을 펼쳤지만 이 편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쑨원은 1894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강령으로 하는 흥중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895년 1월에는 홍콩에서도 흥중회 지부를 결성했으나,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흥중회는 청나라 조정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갈수록 그 무능함을 드러내자

'오직 혁명만이 위기에 놓인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는 신념 아래 1895년 10월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봉기는 가담자의 밀고로 허무하게 무산되고, 쑨원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우선 일본으로 탈출, 망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1896년으로 일본을 떠나 영국에 머물렀는데, 거기서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되고만다.


그러나, 다행히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풀려났다.

석방 직후 기자회견에서 영국을 격찬,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은 해외 언론들의 관심을 받았고 중국 혁명의 지도자급 핵심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국 런던에 체류하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을 드나들며 약 9개월간 독서에 열중하면서 지낸다.


이 기간동안 쑨원은 경제학자들인 카를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 등의 저술을 탐독했고

사회 과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했는데, 이때부터 그의 혁명이념인 '삼민주의(민권·민족·민생)'의 윤곽이 형성되었다.


이듬해 1897년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우익들의 도움을 받으며 망명생활을 지내게 되는데,

이 시기 쑨원은 나카야마 쇼우라는 가명을 쓰며 다시 혁명세력을 결집하고 다녔다.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청나라 정국이 더욱 어수선해진 상황에서 쑨원은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2차 무장봉기를 준비하지만,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몇 년간 쑨원은 일본, 하와이, 베트남, 시암,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1905년에는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혁명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1905년 8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흥중회, 화흥회 등의 단체를 기반으로

중국혁명동맹회(중국 동맹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창건하고 총리에 추대되었다.


동맹회는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국 창립, 토지 조유의 균등'을 강령으로 채택했고,

쑨원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民報) 발간사를 통해 삼민주의를 발표했다.


이후 중국동맹회는 총재 쑨원의 지휘를 받으며 수십 여 차례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봉기는 빈번이 실패로 끝나고 쑨원에게는 가혹한 질책과 비판이 뒤따랐다.


쑨원은 중국동맹회의 활동을 다른 동지에게 맡기고 출국하여 1911년 무렵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중국혁명의 당위성을 알리는 한편, 혁명자금과 군자금을 마련하여 동맹회의 활동을 뒤에서 도왔다.


혁명의 기회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민간이 스스로 주식을 발행하여 마련한 자금으로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철도 부설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1911년, 청조에서는 우전부대신 성선회의 건의에 따라 이들에게

아무런 설명이나 사전 협의도 없이 철도건설을 국유화시켜 버렸다.


이러한 청조의 철도 국유화 정책으로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것은 쓰촨성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사천보로동지회'를 결성하여 동맹휴학과 납세 거부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하였고,

각지에서 보로운동이 전개되었다.


다급해진 청조는 우창에 있던 군인들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우창에서는 중국동맹회의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동맹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0월 10일 우창 봉기를 일으키고 총독관청을 일시에 장악해 '호북군 정부'를 조직했다.

이 소식은 빠르게 중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각지에서 우창 혁명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두 달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17개 성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12월 2일 혁명군은 난징을 함락하고 난징에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동맹회와 혁명군의 성과는 혁명운동의 지도자들도 예상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을 중흥할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고, 강력한 영도자도 없었다.

때문에 청조로부터 요청을 받은 위안 스카이 군대에 의해 진압당할 형편이 되었다.


한편, 혁명이 일어났을 때, 쑨원은 중국 밖에 있었다.

그는 그때 외교적,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 서구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우창 봉기 당시 쑨원은 혁명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 체류중이었다.

그는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그곳의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국내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쑨원은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서구 열강의 간섭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즉 외교의 성패에 따라 혁명의 성공이 좌우된다고 여긴 것이다.


당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6개국으로 미국과 프랑스는 공화정을 실시하려는 중국을 동정하는 입장이었고,

그 반대로 독일과 러시아는 혁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일본의 재야는 중국의 혁명에 동정적이었으나 정부는 그 반대였고,

영국의 경우는 재야가 동정적이었으나 정부는 미정된 상태였다.


따라서 쑨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나라가 영국이라 보고 급히 영국으로 달려가 교섭을 벌였다.

그는 영국 외무성과 회담하고 영국정부에 대하여 청조에 대한 일체의 차관을 중지할 것과

일본에게 청조의 지원을 중지하도록 해주고,

영국 각 속지에서 '쑨원 추방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여 영국정부로부터 확약 받는 대신에

혁명정부는 청나라와 체결한 모든 조약을 인정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프랑스로 가 똑같은 약속을 받아내고,

12월 16일 싱가포르에서 체류하다 12월 21일에 홍콩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호한민과 요중개를 만나 전후의 사정을 듣고 '광둥지역을 기반으로 삼자'는 일부 인사의 주장을 거절한 채

12월 25일 상하이로 와 진기미,쑹자오런을 만나 정부조직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여기에서 쑹자오런은 '내각 책임제'를 주장했고, 쑨원은 '미국식 대천황중심제'를 주장하였다.


12월 29일에 난징에서 '각성대표회의'(17성의 45명, 화교 2명)는 총통 선거회를 열었는데,

쑨원이 16표를 얻어 초대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다.


쑨원은 이 소식을 듣고 이를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1912년 1월 1일에 손문은 난징에서 영접 온 이들과 함께 열렬한 축하를 받으며 상하이를 출발하여

그 날 오후 5시에 난징에 도착하여 밤 11시에 총통부에서 취임식을 갖고 서약하였다.


이어 쑨원은 임시대총통직에 취임한 뒤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하였다.

이로써 그 동안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벌였던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민주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쑨원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록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청조는 굳건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들을 무너뜨리기에 그의 세력은 너무 약했다.


쑨원은 여기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데,

바로 청조의 요청으로 혁명군 진압을 지휘하고 있던 위안 스카이(袁世凱:원세계)와의 협상과 연합이었다.


쑨원은 위안 스카이(袁世凱:원세계)에게 청조를 설득하여 그들을 퇴위시켜줄 것을 요청하고

만일 이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대통령의 지위를 그에게 양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위안 스카이는 청조를 설득하여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를 하여금 2월 12일 퇴위조서를 발표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청조는 1912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혁명정부는 청조와 위안 스카이 사이에 퇴위협약이 진행되는 동안

위안 스카이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3월, 대통령중심제였던 '임시정부 조직대강'을 수정하여

내각 중심제를 기본 틀로 한 '임시약법'을 제정,발표하였다.


그리고 쑨원은 약속대로 위안 스카이에게 1912년 4월에 임시 대총통직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쑨원과 쑹자오런(宋敎仁;송교인)은 중국 동맹회를 1912년 12월에 국민당으로 개편하여

쑹자오런이 이사장 대리으로서 당수가 되었고, 쑨원을 이사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위안 스카이의 야심은 제약할 길이 없었다.

위안 스카이는 임시약법을 무시하고 대통령 중심제로 법을 개정함으로써 완전한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서구 열강세력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받아먹는 등 '매국'행위와 '독재'정치를 일삼았다.


아울러 그의 유력한 정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던 국민당의 이사장 대리였던 쑹자오런을 암살하는 등 전횡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쑨원은 위안 스카이를 무력으로 타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위안 스카이의 전횡에 반대하는 이열균(李烈均) 등이 토원군(討遠軍)을 조직하여 대항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쑨원은 1913년 7월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제2차 혁명)


위안 스카이의 독재정치와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용단체를 조직하고 여론을 선동하여 '황제'로의 등극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1914년 쑨원은 일본 도쿄에서 구(舊) 혁명당원들을 모아 중화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이 중화혁명당은 뒷날 중국 국민당의 모태가 된다.


혁명당원들은 곧 국내로 들어와 위안 스카이에게 반대하는 무리들을 규합하여 토원군을 재조직하였다.

위안 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가운데 운남성 도독이었던 당계요가 토원군에 가담하여 이름을 호국군(護國軍)이라 개칭했다.(제3차 혁명)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위안 스카이의 심복이었던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도 위안 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반대했고,

서구 열강들도 위안 스카이에게 황제 등극을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위안 스카이는 황제 등극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에 호국군은 더욱 압박을 가해 위안 스카이의 퇴임을 요구했으나

1916년 6월, 위안 스카이가 병사함으로써 이 일은 자연스럽게 일단락되었다.

1916년 위안 스카이의 사망과 때를 같이하여 쑨원은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1917년 위안 스카이 사후 북양 정권은 돤치루이의 수중에 떨어졌다.

돤치루이의 탄압을 피해 광둥 성지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비상국회를 열어 서남군벌 세력과 연합하여 광저우에서 군사정부를 세우고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다.(호법 정부)


쑨원은 1917년 9월, '광둥 군정부'의 대원수로 임명되어

임시약법 수호를 위해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첫 번째 호법 정부)


그러나, 그 조직도 실권을 잡지 못했고 같이 손잡은 군벌들의 본질을 보고

이들 군벌들과는 '호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다음 해 1918년에 대원수 직책을 사임하고 5월에 상하이로 망명가야했다.

이 기간동안 쑨원은 얼마간은 상황이 유리할 때는 광저우로 돌아갔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다시 상하이로 도망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고 지냈는데,

상하이에서 《쑨원학설》,《건국대강》등 중요한 저술을 발표하였고,

이는 뒷날 국민 정부의 지도이념이며 국정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또, 쑨원은 상하이에 있는 동안에 《건설》잡지를 창간하고,

'민지서국'(民智書局)을 세워 혁명 사상을 선전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18년 여름무렵에 레닌과 소련 정부에 축전을 보냈다.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은 쑨원에게 있어서 커다란 자극을 주었는데,

이 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보고 '중화혁명당에 대중성을 도입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쑨원은 5.4 운동을 계기로 기존에 구상했던 '위로부터의 혁명'노선을 버리고 '아래로부터의 혁명'노선으로 선회하여

1919년 10월 10일에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칭하고 총부를 상하이에 두었다.


중국 국민당은 조직상에 있어서 중화혁명당과 달랐는데, 비밀당의 조직을 공개적으로 한 점과

중화 혁명당 시기에 당원이 당수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규정을 삭제하고 당원의 등급을 폐지시킨 것 등이었다.


한편, 쑨원이 대원수 직책 사임한 이후 1918년 5월~1920년 6월까지의 광둥 정부(호법 정부)는 '7인 총재정부'로 존재했다.

1920년 6월에 쑨원은 상하이에서 당소의(唐紹儀, táng shào yí), 오정방(伍廷芳, wǔ tíng fāng) , 당계요(唐繼堯;탕지야오) 등과 함께

합작을 성명하고, '광둥 정부의 계계 군벌이 호법의 이름을 빌려 나쁜 일을 저지른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복건성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광둥 성 군벌 진형명(陳炯明, chén jiǒng míng)에게

광둥에 자리잡고 있는 광서성(계계) 군벌을 타도하도록 하였다.


이에 진형명은 '광둥인이 광둥을 다스려야 한다'며 광둥 정부를 타도하였다.
진형명은 쑨원이 광저우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쑨원은 그를 광둥성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안심시켰다.


그리고 11월 말에 국회의원들과 함께 광저우로 와 국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에서 '군정부가 이미 존재하지 않으므로 정식 정부를 세우자'고 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21년 4월 광둥 성 국회에서 '중화민국 정부조직 대강'이 결정되었다.

다음달 5월에는 쑨원이 광둥에서 '중화민국 정식정부'의 총통에 취임했다.

이로써 중국은 북쪽에서는 북양 정부, 남쪽에서는 쑨원 중심의 광둥 정부(두 번째 호법 정부)로 양분되었다.


호법 정부가 성립된 후 쑨원은 호법(護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력으로 북양 정부와 대항하고자 국회에 '북벌안'(北伐案)을 제출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호법 정부는 구이린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대대적으로 북벌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쑨원은 안휘파와 봉천파와 함께 '반(反) 직예파 삼각동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형명은 직예파의 오패부와 결탁하여 북벌을 반대하고, 쑨원과 가까운 광둥군 참모장 겸 제2사단장을 암살하였다.


이에 쑨원도 1922년 봄에 구이린에서 긴급 군사회의를 열어 북벌 계호기을 변경,

광둥으로 돌아와 진형명이 가지고 있던 광둥 성 성장 등의 직책을 취소하였다.

또 5월 4일에 북벌령을 내려 소관(韶關)에 대본영을 설치, 강서 성으로 북벌을 시작하였다.


한편 진형명은 쑨원의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1922년 6월에 총통부를 포위하였다.

이 때,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황푸에서 영풍함(永豊艦)을 타고 광저우로 와 쑨원을 구하였으며,

호법 정부는 북벌군을 불러들여 진형명을 토벌하였다.


결국 호법을 위한 두 번째의 북벌도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쑨원도 상하이로 갔다가 1923년 초순 주변군벌의 압력에 의해 '진형명의 난'이 평정되자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

세 번째 호법 정부를 조직하고 다시 북벌을 도모하였는데, 이러한 시기에 쑨원에게 접근한 것이 소련의 코뮌테른이었다.


코민테른은 1920년에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다고 해도 그 힘으로는 중국 혁명을 이끌어 낼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 안에서 협조자를 물색하였는데, 오패부와 같은 군벌도 고려되었지만

그동안 혁명을 이끌어 온 쑨원을 지목해 관심을 가졌다.


때문에 보이틴스키(Voitinsky)는 상하이에 와서 쑨원을 만났고,

쑨원도 소련의 혁명 사정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였다.


1921년 7월, 레닌의 비서인 마링도 중국에 오자마자 쑨원과 만나 중국 국민당 개조를 촉구하고,

군사학교를 세워 혁명을 위한 무력을 키워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때 쑨원은 소련이 실시하고 있는 신경제정책(NEP)과 자신의 실업 계획이 별차이가 없음을 밝히고,

처음에는 중국 공산당이나 코민테른과의 합작을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쑨원은 북벌을 준비하고 있어 양쯔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이 지역은 영국의 세력권이어서 그 방해를 받을까 우려되었고,

당시 '반(反)직예파 삼각 동맹'의 안휘파나 봉천파는 모두 일본과 가까운 관계여서 소련과의 합작은 곤란하였으며,

또한 중국 공산당의 힘이 당시로서는 너무 미약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쑨원은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면서 이들의 주도 아래 노동운동이 확산되고 노동자의 요구가 관철되는 모습을 목격하며,

만일 중국공산당 당원이 개인적으로 가입을 원한다면 받아들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결의하고,

소련은 외교가인 요페(Adolf Abramovich Joffe)를 파견하여 북양 정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고 하면서 베이징으로 왔다가

다시 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쑨원을 만나 중국 국민당의 개조문제,

코민테른의 중국 혁명 원조 문제 등을 협의하여 1923년 1월 16일 이른바 '쑨원-요페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으로 쑨원은 '연소용공' 정책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른바 '제1차 국공합작'의 기초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쑨원과 소련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1923년 1월 1일에 쑨원은

'중국 국민당 개조 선언'을 발표하여 당의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따라서, 공산당 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게 되었으며,

또 프랑스에 유학 중인 학생들로 조직된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의 단원은 단체로 중국 국민당 프랑스 지부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초청으로 8월 16일에 장제스를 단장으로 '쑨원(일선) 박사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소비에트 제도와 군사 조직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이들은 약 4개월 동안 소련의 각 도시를 돌면서 소비에트 조직과 군사학교 등을 시찰하고 12월 15일에 귀국하였다.

소련 정부도 쑨원에게 재정 원조와 고문단을 보내기로 결정하여 정치 고문 미하일 보로딘과 군사전문가를 중국에 파견하였다.


1924년 1월에는 쑨원의 주관으로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광저우에서 소집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하여 공산당과의 합작을 이루었다.(제1차 국공합작)


여기에서 새로운 당의 강령과 헌장을 제정하여,

1.소련과의 연합, 2.공산당과의 연합, 3.노동자·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 정책을 확립하고,

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 통치 기구를 구성하였다.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서 쑨원은 삼민주의에 반제 · 반봉건적 내용을 추가하였다.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이 소집은 쑨원의 혁명사업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련의 투쟁을 통해 쑨원은 제국주의 타도만이

중국의 독립과 부강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북벌군이 진격할 즈음,

1924년 10월 봉천파 군벌 장쭤린과 직예파 군벌인 펑위샹이 연합하여

차오쿤을 대표로 하는 군벌 정부를 전복시켰다.(베이징 정변)


이후 펑위샹(馮玉祥:풍옥상, 1882~1948), 돤치루이, 장쭤린(張作霖 장작림)이 쑨원에게 전문을 보내어

국정을 함께 논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쑨원은 정치교섭이 필요함을 느껴 이 요청을 받아들여

1924년 11월 광저우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는 광저우->상하이->일본 고베->톈진->베이징 순으로 시찰하고 다녔는데,

이때 그의 몸에는 암이 번지고 있었다.


시찰 도중에 일본 고베에 들렀을 때 현립 고등여학교에서

'대아시아주의'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일본 정부에 이같이 물었다.


“ 일본은 열강을 본떠 중국 등 약소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같은 편에 설 것인가. 왕도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패도를 취할 것인가. ”


이듬해 1925년 초 돤치루이의 주선으로 시국 수습을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베이징에서 소집되었다.

쑨원은 동지들을 인솔하여 베이징으로 향하는 도중에 간암으로 쓰러졌다.

이해 2월 24일 아들 손과와 송자문, 공상희, 대계도 등을 증인으로 한 가운데 유언을 남겼다.


“ 나는 30년 동안 중국의 자유평등을 얻기 위한 국민혁명에 모든 힘을 다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반드시 민중에 호소해 궐시키기고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해

공동으로 분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는 아직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

나의 동지들은 필히 내가 쓴 《건국방략》, 《건국대강》, 《삼민주의》, 《제1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따라

계속 노력하고 관철해달라. ”


이는 왕징웨이(汪精衛 왕정위 1883~1944)가 쑨원의 구술을 받아쓰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그의 첫 유언에는 부인 쑹칭링(宋慶齡 송미령)과 자식들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는 한달 뒤 다시 첫 유언을 남길 때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 모아놓고 두 번째 유언을 했다.


“ 나는 국사에 진력하다 보니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다.

내가 남긴 서적과 의복, 주택 등 일체는 나의 처 쑹칭링에게 주어 기념으로 삼도록 하라. ”


그는 1925년 3월 12일 간암으로 베이징에서 향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모두 네 차례에 걸친 입관 끝에 장제스가 1928년 북벌에 성공한 직후인 1929년 6월 1일

난징 시외의 중산릉에 안장될 수 있었다.


쑨원은 청년 시절부터 쑹자수(宋嘉樹), 여우례(尤列), 양허링(楊鶴齡), 루하오둥(陸皓東),

관징량(關景良), 천사오보(陳少白)와 절친한 친구 관계였다.


친구이자 흥중회 동지인 루하오둥은 1895년 청나라 관군에 체포되어 사형 집행되었고

친구이자 장인인 쑹자수는 훗날 개신교 목사가 되었는데 쑨원이 쑹자수의 차녀인 쑹칭링과 재혼하였기 때문에

쑹자수가 쑨원의 장인이기도 하다.


옛 일본인 첩실 오쓰키 가오루(大月 薰)의 딸 미야가와 후미코(宮川 富美子)에게는 친아버지가 되나

생전에 쑨원이 친권을 포기하였고 후미코가 나중에 일본을 떠나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이미 죽은 쑨원과 그가 남긴 중국국민당을 지지하며 쑨원을 정신적 지주로 섬겼다.


명효릉에서 이런 차를 타고 중산릉으로 이동


박애(博愛)


중산릉의 패방부터 묘실까지 모든 것에 쑨원의 정신,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중국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패방에 적힌 ‘박애(博愛)’라는 글자는 쑨원의 일생을 개괄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중산릉(中山陵)


쑨원이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 후 베이징 벽운사(碧雲寺)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던 쑨원의 유해가

난징으로 옮겨져 묻힌 건 1929년 6월 1일이다.


쑨원이 잠들어 있는 곳을 ‘중산릉’이라고 한다.

일찍이 쑨원은 일본 망명시절에 중산초(中山樵)라는 가명을 썼는데,

이후 ‘중산’은 그의 여러 이름 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중산릉은 쑨원이 생전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히길 바랐던 장소다.

광둥에서 태어나 베이징에서 사망한 그가 왜 난징에 묻힌 것일까?


임시대총통에서 사임한 1912년 어느 봄날, 쑨원은 이곳에 사냥을 하러 왔다가 사방을 둘러본 뒤

훗날 자신이 죽으면 이 땅에 안장해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쑨원이 난징에서 머문 기간은 오래지 않지만 그에게 난징은 어느 곳보다 의미 있는 곳이었으리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곳, 신해혁명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곳이 바로 난징 아닌가.


능문(陵門)과 천하위공(天下爲公)


패방을 지나 설송(雪松)과 향나무가 늘어선 400m가 넘는 묘도가 끝나는 자리에 ‘능문’이 자리하고 있다.

능문의 위쪽에 적힌 글자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다.


천하는 모두의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쑨원이 평생 분투했던 이상이기도 하다.


능문(陵門)


천하위공(天下爲公)


손문이 직접 쓴 “천하위공(天下爲公)” 네 글자가 현판에 쓰여 있다.

서양식 디자인이 가미된 문루 위에는 푸른색 유리기와가 얹혀 있다.

푸른색은 창천(蒼天)을 상징하며 푸른색 기와는 “천하위공(天下爲公 : 조금도 사적인 것이 없다.)”을 뜻한다고 한다.


비정(碑亭)


능문을 지나면 비정이다. 넓이 12m, 높이 17m의 방형 건물이다.

내부에는 높이 8.1m, 폭 4m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는 당시의 국민당정부 주석이자 국민당 4대 명필의 한 사람이었던 단연개(譚延闓)선생이

“중국국민당 총리 손선생 여기에 묻히다. 중화민국 18년 6월 1일(中國國民黨葬總理孫先生於此 中華民國十八年六月一日)”

라고 쓴 비문이 적혀있다.


손문이 사망할 당시 그는 대총통의 지위를 원세개에게 양위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총통’이 아닌 ‘손선생’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쑨원의 공적을 담은 비문을 새길 계획이었지만 결국엔 이렇게만 새겼다.

그의 공적을 비문에 제대로 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당 입구의 문미에는 ‘민족(民族), 민생(民生), 민권(民權)’이라고 적혀 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中國國民黨葬總理孫先生於此, 中華民國十八年六月一日

중국국민당이 총리 쑨 선생을 이곳에 안장하다, 중화민국 18년 6월 1일.


후에 중국공산당은 중국국민당을 축출하고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국민당 주관으로 세운 이런 기념비를 그대로 남기고 기리는 것은 승자가 가지는 아량의 표현일 것.


한편 쑨원 선생이 차지하는 비중이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을 뛰어 넘을만큼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돌계단


비정을 지나면 제당까지 이어진 돌계단이다.

비정에서 제당까지 돌계단의 개수는 339개, 당시 국민당 의원의 수를 상징한다.


패방부터 제당까지 돌계단의 개수는 392개, 당시 중국의 인구 3억9200만명을 상징한다.

쑨원에 대한 중국인 모두의 존경을 담은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제당이 있다.



제당(祭堂)

 

제당 입구의 문미에는 ‘민족(民族), 민생(民生), 민권(民權)’이라고 적혀 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글씨를 쓴 이는 당시 국민당 원로였던 장정강이라고 한다.


천지정기(天地正氣) 쑨원의 친필


쑨원의 좌상


쑨원의 관


제당(祭堂)에는 2.1m 높이의 기단 위에 4.6m에 달하는 쑨원의 좌상이 놓여 있다.

제당 뒤편 묘실(墓室)에는 묘혈 위로 쑨원의 와상이 놓여 있다.


쑨원의 모습을 일대 일 비율 그대로 재현한 이 와상 아래 5m 지점에 쑨원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제당의 좌상과 묘실의 와상 모두 흰색 대리석 조각이다.


그런데 제당의 쑨원은 중국 전통의 마고자 차림인데, 묘실의 쑨원은 중산복 차림이다.

이는 국민당 우파와 좌파의 갈등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우리가 흔히 인민복이라 부르는 옷을 발명한 사람이 쑨원이다.

흔히들 인민복은 중국 본토에서만 입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쑨원이 일본 거주당시 일본의 가쿠란에 영향을 받아서

우리도 저런 실용적인 옷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만들어 낸 것이 '중산복(中山裝)'이다.


이 옷이 훗날 재봉방식의 변화에 따라 '마오복'이라고도 하는 인민복과 타이완의 국민복으로 나뉘게 된다.

2차 국공내전 직전에 중재협상 과정에서 찍은 마오쩌둥과 장제스 두 사람이 입은 옷을 보면 둘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상의 앞 주머니를 드러나지 않게 안쪽으로 재봉하면 인민복, 드러나게 재봉하면 국민복이 된다.

쑨원의 조각상에 대해 국민당 우파는 전통 복장을 주장한 반면 국민당 좌파는 중산복을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합의를 보지 못했고, 쑨원의 좌상과 와상의 차림새가 제각각이 된 것이다.


쑨원의 유해를 중산릉에 안장하는 ‘봉안대전(奉安大典)’이 거행된 1929년 6월 1일,

정오를 기해 전국의 교통이 3분 동안 멈추었고 전 국민이 3분 동안 애도를 표했다.


국부(國父)에 대한 최고의 예를 표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사후에 중산릉 곁에 묻히길 바랐다.


장제스(蔣介石 ; 장개석) 역시 중산릉 서쪽에 자신의 묏자리를 봐둔 적이 있다.

만약 훗날에 벌어졌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승리했다면 장제스는 바로 그곳에 묻혔을 것이다.


1929년 6월 1일,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코 장제스였다.

바로 전해에 그는 북벌을 완수하고 군벌 세력을 잠재웠다.


국민정부의 지도자로서 장제스는 쑨원의 이장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관했다.

장제스는 국가 수장이자 쑨원의 동서였으며, 쑨원의 후계자였다.


그런데 봉안대전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장제스를 쑨원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쑨원의 부인 쑹칭링(宋慶齡 ; 송경령)이다.


쑨원이 세상을 떠난 뒤 쑹칭링은 장제스와 대립하며 국민당 좌파를 지지했다.

그녀는 장제스가 쑨원과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에 반대하며 중국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가 나중에는 베를린에서 지냈다.


‘봉안대전’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은 쑹칭링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귀국은 자칫 장제스를 쑨원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인정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쑨원의 아내로서 봉안대전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녀는 귀국을 결정하는 한편 성명서를 발표한다.


중앙집행위원회의 정책과 활동은 반혁명적이기에 국민당의 일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거듭 강조하면서,

자신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결코 기존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 게 아님을 밝혔다.


봉안대전이 거행된 당일 저녁, 쑹칭링은 난징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장제스는 그녀가 묵을 곳을 마련해 놓았고, 그녀의 친동생이자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 ; 송미령)은

그녀에게 남아 있길 간청했음에도. 장제스가 자신을 이용할 그 어떤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서 떠났던 것이다.


장제스 앞에는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복잡한 당내 분쟁, 여전히 딴마음을 품고 있는 군벌, 중국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열강, 게다가 눈엣가시인 공산당.

이런 상황에서 쑨원은 그에게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버팀목과 같았다.

그가 봉안대전에 온갖 심혈을 기울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쑹칭링과 장제스, 두 사람은 쑨원으로 인해 서로 대립하면서도 쑨원으로 인해 그날 한 장소에 모였다.

훗날 쑹칭링은 중국 대륙에 남고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쫓겨 간다.


이후 중산릉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요 인사들의 참배 장소가 되었음은 물론,

2005년에 타이완의 국민당 주석 롄잔(連戰)이 참배한 것을 필두로 타이완 주요 인사들의 참배 장소가 되었다. 


2016년 타이완에서는 민진당 주석 차이잉원(蔡英文)이 총통에 취임했다.

그녀는 5월 20일, 타이베이 총통부에 걸린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선서를 했다.


차이잉원은 역대 그 누구보다 탈중국화와 타이완 정체성을 강조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이 내세우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은 매우 견고해 보인다.


쑨원의 유해가 안치된 자동관(紫銅棺)은 시멘트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일찍이 항일전쟁 시기에 국민당 정부는 쑨원의 유해를 충칭으로 옮기려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묘혈을 폭파할 경우 유해가 손상되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장제스가 쑨원의 유해를 타이완으로 옮겨가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먼 훗날 타이완 총통이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선서를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는지 사뭇 궁금하다.

손문의 좌상은 프랑스 조각가인 폴 랜도우스키(Paul Randowsky) 의 작품.


한백옥(漢白玉)이라는 돌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한백옥이 중국에서 생산되는 고급 옥돌인지

아니면 이탈리아나 그리스 등지에서 수입한 최고급 대리석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쑨원 (孫文 손문 1866~1925)


 쑨원의 부인 쑹칭링 (宋慶齡 송경령 1892~1981)


장제스 (蔣介石 장개석 1887~1975)


쑨원의 처제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 (宋美齡 송미령 1897~2003)


제당 양쪽으로는 오벨리스크를 닮은 돌기둥 2개가 대칭해서 있다.



 

효릉 최고의 건물인 명루(明樓)


명 효릉에서 처음 등장한 황릉건축양식이다.

보성(寶城) 앞에 방성(方城)을 쌓고 그 위에 건설하였다.


방성은 동서로 75.26m이며, 남북으로 30.9m, 높이가 16.25m이다.

내부의 터널에는 54개의 계단이 있고, 이 계단을 따라 올라오면 보성의 남쪽 성벽과 마주하게 된다.


웅장한 루의 모습이 성벽과도 같다.

남경의 효릉을 제외하고 북경에 건설된 명나라의 황릉에는 일반적으로 명루 내부에

사망한 황제의 성덕비를 세웠으나, 이곳은 비어있는 상태이다.


남쪽에는 아치형 문이 세 곳 있고, 좌우와 북쪽에 각각 한 곳 씩 문이 있다.

바닥에는 커다란 벽돌이 깔려있으며 명루의 지붕은 황금색 기와로 덮여있다.

청나라 때 훼손되었던 것을 2008년부터 1년간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승선교(升仙橋)


명루 앞에 다리가 있는데 승선교(升仙橋)라 한다.

이 다리를 건너면 곧 신선의 세계라는 뜻. 당시 주원장의 관(棺)이 이 다리를 건너 안장되었기 때문에 승선교라 한다.



효릉(孝陵)


효릉은 명나라의 첫 번째 황릉으로서 당시의 건축과 석각예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500년 동안 이어진 명, 청 두 왕조의 왕과 황제들은 효릉의 규격에 따라 능을 축조하였다.


효릉은 명 홍무14년(1381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명칭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공사가 시작된 다음 해에 마황후가 세상을 떠서 이곳에 먼저 안치 되었으며,

마황후의 시호가 효자(孝慈)였기 때문에 이를 따라 효릉(孝陵)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는 설과,

 “효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효릉이라고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공사는 크게 신도(神道)부분과 능원 두 부분으로 구분되었다.

1398년 주원장마저 세상을 뜨자 자신이 조성한 무덤에서 영원히 잠들게 되었는데,

이때 비빈과 궁녀 40여 명이 함께 순장(殉葬)되었다는 말이 전한다.


노동자와 군인 10만 명이 투입되었고, 25년이 걸려서야 끝마쳐진 대공사였다.

공사가 끝난 후 능원 내에는 10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사슴 1 천 마리를 방생했으며

5천 여 군사가 밤낮으로 순찰하며 호위했다고 한다.


주원장이 죽은 후에도 부속건물 등이 계속 조성되어 1413년 영락제(永樂帝)가

주원장의 공적을 비문 2746자에 기록한 대명효릉신공성덕비(大明孝陵神功聖德碑)를 세움으로써 공사가 끝났으니

착공한 지 32년 만에 완공된 것이다.


효릉은 명나라의 뿌리를 상징하는 장소로서 명나라 내내 존중을 받았다.

효릉은 200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청나라 역시 효릉을 중시했다.

만주족 출신의 황제가 절대다수의 한족을 통치하려면, 고압적 정책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한족의 왕조를 세웠던 주원장을 적대시하는 것보다는 끌어안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효릉은 역대로 ‘참배 정치’의 장이었다.

이민족의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기에,

그가 묻힌 이곳은 한족 지도자에게 더더욱 중요한 곳이었다.


만주족 왕조를 악마로 규정했던 태평천국의 홍수전은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祭明太祖陵寢文’)에서

자신을 ‘불초한 자손’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제문에 의하면, 중국은 ‘한족’의 것인데 이민족이 중국을 차지함으로써 종족이 멸망의 위기에 빠졌다.

홍수전은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이민족을 몰아내고 우리의 신주(神州, 중국)를 되찾겠다”고 다짐한다.


태평천국은 만주족 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한 채 멸망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50년이 되기도 전에 청나라 역시 멸망한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이듬해인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가 퇴위를 선포한다.


사흘 뒤인 2월 15일, 쑨원은 임시정부 관료들을 대동하고 효릉을 참배했다.

당시 쑨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자격으로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청나라가 무너졌음을 고했다.


이날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祭明陵文’)에서 쑨원은 “중화민국의 완전한 통일”을 강조했다.

일찍이 그는 1912년 1월 1일에 발표한 ‘임시대총통선언서’에서 한족 · 만주족 · 몽골족 · 회족 · 티베트족의

통합을 주장하는 ‘오족공화론(五族共和論)’을 발표한 바 있다.


청나라가 무너진 상황에서 ‘한족’만의 중국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분할을 초래할 터,

쑨원은 발 빠르게 기존의 배만(排滿)에서 오족공화로 급선회했다.


하지만 기존의 배만 의식과 한족주의는 한순간에 떨쳐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에서 쑨원은 청나라가 지배한 268년을 원통한 시간으로 규정했다.


또한 그는 주원장이 몽골족을 물리치고 명나라를 건국한 것을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진 광복에 빗대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주원장이 원나라를 무너뜨린 것은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선구였던 셈이다.


쑨원이 효릉을 참배한 날은 그가 임시대총통 자리를 내놓기 직전이었다.

이날 난징에서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선거가 열렸다.


여기서 위안스카이[원세개 袁世凱]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된다.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한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공화제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다.

쑨원은 위안스카이에 맞서야 했고, 이어서 여러 군벌을 상대해야 했다.


결국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한다.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계속 노력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베이징 벽운사(碧雲寺)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던 쑨원의 유해가 난징으로 옮겨져 묻힌 건 1929년 6월 1일이다.

쑨원이 잠들어 있는 곳을 ‘중산릉’이라고 한다.


일찍이 쑨원은 일본 망명시절에 중산초(中山樵)라는 가명을 썼는데,

이후 ‘중산’은 그의 여러 이름 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중산릉은 쑨원이 생전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히길 바랐던 장소다.

광둥에서 태어나 베이징에서 사망한 그가 왜 난징에 묻힌 것일까?


임시대총통에서 사임한 1912년 어느 봄날, 쑨원은 이곳에 사냥을 하러 왔다가 사방을 둘러본 뒤

훗날 자신이 죽으면 이 땅에 안장해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쑨원이 난징에서 머문 기간은 오래지 않지만 그에게 난징은 어느 곳보다 의미 있는 곳이었으리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곳, 신해혁명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곳이 바로 난징 아닌가.


명루(明樓) 안내문


"명루(明樓)는 명효릉이 처음 개척한 건축형식으로 방성위에 건축되었으며 명효릉 건축의 최고점이다.

지붕은 중연구척에 황색 오기기와로 덮혀졌고 남쪽에 아치형 문이 3개 있고,

동 서 북쪽에 각각 아치혐 문 1개씩 있고 벽돌로 바닥을 깔았다.

청나라 함풍년 시기 지붕이 전란에 회손되어 지금은 4면에 담벽만 남아 있다."


방성(方城) 서영벽(西影壁) 안내문


승선교 뒤편에 효릉원의 마지막 건물인 방성(方城)이 있다.

두께가 31미터나 되는 방성의 중앙에 위치한 터널에는 54개의 돌계단이 있어

여기를 통과해야만 주원장의 묘인 보정(寶頂)에 이른다.


방성 위에 명루가 있다.

방성과 명루는 역대 어느 제왕의 능에서도 볼 수 없는 효릉만의 독창적인 건물이다.


방성(方城) 속의 계단


보성(寶城)  명태조의 무덤임을 알리는 글귀 "차산명태조지묘(此山明太祖之墓)"


주원장과 황후 마씨가 매장된 곳이다.

직경은 400m 둘레 1,000m 놏이 7m의  흙을 쌓아 만든 원형의 토산 주위에 석재를 쌓아 만들었다.


석재를 쌓은 두께는 1m에 달하는데,

이것은 도굴을 막고자 쌓은 토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를 보성(寶城)이라고 한다.

옛날엔 엄격히 통제된 성역이었지만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후에는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서 보정(寶頂 ; 무덤)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방성(方城)의 터널을 통과하면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이 보성(寶城) 성벽인데

거기에 "차산명태조지묘(此山明太祖之墓 : 이 산은 명태조의 묘이다)”라고

조잡하고 초라하게 새긴 글씨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능(陵)이 아니고 묘(墓)라... 이 일곱 자가 새겨진 연유인즉슨 이렇다.

'주원장이 정말 이 곳 효릉에 묻혔을까'에 대한 의문이 이전부터 있어 왔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주원장의 장례식 날 남경성의 13개 성문에서 동시에 관이 운구되었다고 한다.

백성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주원장의 시신은 조천궁(朝天宮)에 안장되었다는 설도 있고,

명나라가 북경에 천도한 후 북경 근교의 만세산(萬歲山)에 이장했다는 설도 있고,

평소 의심이 많았던 주원장이 도굴을 염려하여 효릉에 가짜 무덤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막대한 비용을 들여 거국적으로 조성한 묘역이 가짜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어떤 사람이

보성에 글자를 새겨 이곳이 진짜 주원장의 묘임을 알렸다는 것이다.


명의 황제는 16대, 총 15명(1명은 복위)이다.

그 중 이곳 남경을 도읍으로 삼았던 황제가 초대 태조 주원장 홍무제와 2대 혜종(惠宗) 건문제(建文帝)인데,

이 중 주원장은 이곳에 묻혔고, 건문제는 영락제(永樂帝)의 쿠데타 속에서 행방불명되어

시신조차 찾지 못한 까닭에 능묘가 없다.


남은 황제 13명이 묻힌 곳은 바로 북경(北京)에 있는 유명한 '명십삼릉(明十三陵)이다.
보성은 600년이 넘는 세월을 잘 버텨왔으나 지반이 가라앉기 시작함에 따라

곳곳에서 균열이 발생하는 등 보수가 필요한 실정이다.




명 태조 홍무제 주원보정(寶頂)


명루에 올라 뒷쪽으로 돌아가면 그저 평범해 보이는 산이 나타나는데,

이 산이 바로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실제로 묻혀 있는 무덤인 보정(寶頂)이다.

우리나라 왕릉과 같은 봉분은 따로 없고 그저 숲으로 덮힌 거대한 산 전체가 무덤이다.



보정(寶頂) 안내판



보정 정상에 서 있는 나무에 동전들이 단단하게 박혀 있다. 무슨 의미인지...






영성문(欞星門)


용봉문(龍鳳門)이라고도 한다.

신도에 위치한 하나의 상징적 의식성 건축물이다.


6개의 기둥에 3개의 문으로 된 패루이며 주춧돌과 포고석(抱鼓石)은 명나라 시대의 것이다.

포고석은 대문을 이루는 기둥이 흔들리지 않도록 기둥을 받쳐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보통 관직이 높거나 부잣집에서 사용하는 건축양식이다.



어하교(御河橋)


입구에서 본 영성문(欞星門)과 어하교(御河橋) 모두 효릉 건설 당시부터 있던 것이지만

후대에 모두 무너져 기둥과 교각만 남아있던 것을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어하교도 원래는 다섯 개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세 개로 되어 있다.

왼쪽에 명효릉(明孝陵)이라 새겨진 안내석이 보인다.







문무방문(文武方門)


효릉 능구(陵區)의 첫 번째 문이다.

거의 무너져 있던 것을 청(淸)나라 때 일차로 보수했고,

1998년 중산릉 관리국에서 명효릉 규격제도에 따라 황실건축양식에 맞춰 복원한 것으로 자색으로 칠해졌다.


중앙에는 세 개의 아치가 있는 문루가 있고, 그 좌우로 각각 한 곳씩 통로가 있다.

문루의 오른쪽 아래에는 청 선통5년(1909년)에 양강총독국과 강녕부지부회에서

명효릉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워진 특별고시(特別告示)비가 있다.


이것은 특이하게도 일본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로 쓰여 있는데

외국인 참관객들이 난간을 넘어 유물들을 훼손하는 것을 막고자 쓰여진 것이다.





특별고시비(特別告示碑)


 청 선통5년(1909년)에 세워졌다.

이것은 특이하게도 일본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로 쓰여 있는데

외국인 참관객들이 난간을 넘어 유물들을 훼손하는 것을 막고자 쓰여진 것이다.



비전(碑殿)


비전(碑殿)의 치융당송(治隆唐宋)비


비전은 원래 향전 앞의 중문(中門)으로 효릉문(孝陵門)이라 불렀다.

다섯 개의 아치로 된 문이었으나 후에 파괴되어 버렸다.


지금의 비전은 청나라 강희(康熙 : 1654 ~ 1722) 황제 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1699년 세 번째로 남방순시를 하던 강희황제는 효릉이 파괴된 것을 발견하고, 그 보수를 명하였다.


이때 그는 손수 치융당송(治隆唐宋) 네 글자를 써서 비석에 새기도록 하기도 하였다.

치융당송 비 좌우의 비석 역시 강희황제의 친필이라고 하며, 비전 내에는 총 다섯 개의 비석이 있다.


치융당송비는 높이가 3.85m, 폭이 1.42m, 두께가 0.38m이다.

“치융당송”은 태조 주원장의 치세가 당 태종 이세민과 송 태조 조광윤을 능가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강희황제는 6차례의 남방순시 중에서 5차례나 효릉을 참배하였다.

이것은 만주족의 지배에 불만을 품었던 한족을 회유하기 위한 것으로

그는 홍루몽의 저자인 조설근의 조부, 조인(曹寅)에게 명하여 치융당송비를 세우게 하였다.


효릉은 청(淸) 함풍(1850 ~ 1861)시기에 발생한 수차례의 전쟁에 휩쓸렸다.

때문에 지상에 지어진 많은 건물들이 피해를 입었고, 청 강희황제가 손수 쓴 석비 역시 이때 파괴되었다.


파괴된 효릉은 1864년 9월에서야 복구될 수 있었으나,

당시 청나라의 재정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수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치융당송비 역시 부서진 비를 재건축하기 보다는 부러진 비석을 다시 세워 허리부분을 때우고,

주변에 시멘트를 채워서 쓰러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취했다고 한다.

사진에 등장하는 분은 이번 여행에서 우리 일행을 안내한 현지 가이드.


용이 새겨진 비전의 난간들



신백로(神帛爐)


제사에 사용된 비단과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황색과 녹색으로 구운 기와를 사용하여 만들어 졌다.


황색기와는 황제를 상징하고 녹색기와는 하늘에 대한 겸손함을 상징한다.

중앙에 아치형 문이 있는데 이곳에서 비단과 축문을 태웠다.

향전 앞 동, 서 양쪽에 두 개가 있다.


향전(享殿)


비전(碑殿) 다음에 위치한 효릉의 주요건축물이다.

원래 명칭은 효릉전(孝陵殿)이나 주로 향전이라 불린다.


원래의 향전은 파괴되어 없어졌다.

3층의 미륵좌는 높이가 3.03m이며 5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한백옥 난간이 미륵좌에 설치되어 있다.


미륵좌 사방으로 설치된 계단의 중앙에는 장식성 건축물인 단폐가 있으며

이 단폐에는 구름과 용, 그리고 산수가 새겨져 있다.


원래 향전의 앞뒤 길이는 57.3m였고, 가로 길이는 26.6m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원래의 향전에는 주원장과 황후 마씨의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지금의 건축물은 청 동치시기에 건설한 3칸의 작은 건축물로 명효릉사료진열실(明孝陵史料陳列室)로 사용되고 있다.




향전(享殿) 주원장과 마황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


초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원장은 원래의 모습이 기괴하였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주원장에겐 곰보자국이 심했고 , 심지어 아내도 남편의 못생김을 인정했다 하며

잊을 수 없을만큼 괴상하게 생겼다는 말이 나오는 걸로 봐서 확실히 못생겼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이승과 저승을 구분 짓는 내홍문(內紅門)


황제가 매장된 보성(寶城)으로 통하는 문이다.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문이라고 하여 민간에서는 음양문(陰陽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을 기준으로 전조(前朝)와 후침(後寢)이 구분된다.

세 곳의 문이 있는 자색의 문루에 황금색 지붕이 얹혀져 있다.

2006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명효릉(明孝陵) 


장쑤성[江蘇省] 난징시[南京市] 중산[鐘山] 두룽푸[獨龍阜]에 있는

명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1328~1398)과 황후 마씨(馬氏)의 능.


명나라의 첫 황릉(皇陵)이며, 효릉(孝陵)이라는 명칭은 마황후(馬皇后)의 시호인 효자(孝慈)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 있던 카이산사[開善寺]를 이전하고 1381년 착공하였으며, 이듬해 마황후가 죽자 공사중인 황릉에 먼저 매장하였다.


1383년 대전(大殿)이 완공되었고, 1405년 태조가 병사한 뒤 매장되었다. 3

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영락제(永樂帝) 때인 1405년에 완공되었으며,

태조 이후의 명나라 황제들은 모두 이 능을 모방하여 황릉을 건설하였다.

효릉의 동쪽에는 주원장의 적장자(嫡長子)인 주표(朱標)가 묻힌 동릉(東陵)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주원장이 죽은 뒤 난징의 13개 성문을 모두 열고 관을 운구하여 성 밖으로 나가 매장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주원장의 진짜 능묘는 난징 서쪽의 조천궁(朝天宮) 삼청전(三淸殿) 지하에 있다는 설도 있고,

황성(皇城)의 만세전(萬歲殿) 지하 또는 베이징[北京]의 만세산(萬歲山)이라는 설도 있다.

이는 주원장이 사후 도굴을 피하기 위하여 생전에 가짜 무덤을 여러 개 만든 데서 비롯된 것이다.


명효릉의 지상 건축물들은 이미 훼손되었지만, 지하의 유적은 아직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고대의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효릉의 담벽 길이는 22.5㎞였는데,

이는 당시 난징 성벽 길이의 3분의 2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이다.


또 효릉의 구도는 베이징의 심삼릉(十三陵)과 기본적으로 일치하는데,

이는 십삼릉이 효릉의 구도를 모방하여 축조하였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주원장(朱元璋 1328~1398)


명나라의 창업자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전 세계의 역사에서 '입지전적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원장을 뺀다면 큰 의미가 없다.

5,000년 중국 역사 속에서 수많은 황제들이 명멸했지만 그들 중에서 진정한 '민중의 아들'은 주원장 단 한 사람뿐이다.


한(漢)나라의 건국자인 한 고조 유방 역시 지체 높은 귀족이 아닌 비천한 농민 출신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유방은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농이었으며

그 재산의 일부를 가지고 마을의 촌장 벼슬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유방과 달리 주원장은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로 궁핍한 소작농 출신이었다.

그것도 6남매 중의 막내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호구지책으로 절에 들어가 탁발승 노릇을 하기까지 했으며

사회적 여건상 그것도 여의치 않자 절망적인 심정으로 홍건적(紅巾賊)에 가담했다.


그는 작은 무리를 이끄는 소두령으로 출세하기 시작해서

홍건적 부대의 최고 지휘관으로 성공을 거두며 스스로 권력 기반을 닦았으며,

이를 배경으로 천하 패권을 노리는 각축장에 합류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천하의 주인이 된 사람이다.


주원장은 당시 중국의 시대상황이 낳은 인물이었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에 의해 중국식 왕조로 창건된 원(元)나라는 채 90년을 존속하지 못했다.


원 왕조의 황제들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한 기간도 고작 한 세대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승계 순서가 아니라 실력으로 칸의 자리를 차지했던 쿠빌라이의 원죄라고 할 수도 있다.


원 왕조는 승계 원칙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대 황제들은

형제나 일족 들을 실력으로 제압하여 통치권을 확보해야 했다.

이 때문에 왕조 말기에는 13년 동안 7명의 황제가 교체되었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쿠데타나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때문에 원나라의 황제가 가지고 있던 권위는 왕조의 후반부에 이르면서 거의 소멸되었으며,

황위 승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강력한 군벌 세력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11대 황제인 순제(順帝)는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대단히 무능한 통치자로 매도되고 있지만

사실 이는 상당히 억울한 평가이다.


그는 명석한 인물이었으며 땅에 떨어진 황제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해서 어느 정도 성공도 거두었다.


그렇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는 지나치게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으며 심성이 나약했다는 점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순제는 당시의 실권자인 바얀(Bayan) 엘 티무르(El Temur)의 격렬한 반대로 일곱 달 이상 즉위를 하지 못하다

바얀이 조카에게 살해당하면서 간신히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으니 비정상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순제가 즉위한 직후, 황실에서는 권력 투쟁으로 바람 잘 날이 없는 가운데 천재지변이 연이어 덮치면서 대혼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럽의 인구를 격감시킨 페스트가 유입된 것을 시작으로 대기근과 홍수가 연달아 발생하고

메뚜기 떼가 습격하면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전국적으로 수백만의 유민이 발생했으며 이는 산발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농민 반란은 점차 조직적인 봉기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배후에는 종교 단체들이 있었다.


그러한 종파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이 백련교(白蓮敎)였다.

이들은 13세기 중반 남송(南宋)에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정통 불교 종파로부터 파생된 종파로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내려와 세상을 구한다(天下大亂 彌勒佛下生)'라는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했다.


순제는 백련교의 교주였던 한산동(韓山童)을 체포해서 처형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

한산동의 처형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산발적인 농민 반란이 조직화되면서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커져 버린 것이다.


주원장은 1328년 10월, 중국의 남동부 남경(南京) 인근에 위치한 호주(濠州)에서 태어났다.

호주는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이다.


집안은 가난을 대물림한 떠돌이 소작농 집안으로, 그의 위로는 3명의 형과 2명의 누나가 있었다.

1341년 이 지역에 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메뚜기 떼가 습격하고, 연이어 전염병이 창궐했다.


주원장 일가도 이러한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와 큰형을 잃었으며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작은 형만 본가에 남고 바로 위의 형은 형편이 조금 나은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두 누나는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갔다.
열일곱 살이었던 막내 주원장은 황각사(皇覺寺)로 출가해서 중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재앙이 덮친 상황에서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절에 머물지 못하고 3년간이나 안휘성과 인근의 하북성(河北省) 일대를 떠돌면서 탁발로 생계를 유지했다.


사회적인 상황이 조금 진정되자 주원장은 황각사로 돌아와서 공부에 매진했다.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다.


낮에는 절 주변에 있는 밭을 갈고 저녁에는 불경뿐 아니라

유가(儒家)나 법가(法家) 등 구할 수 있는 모든 분야의 책을 구해서 독서에 몰두했다.

후일 황제가 된 다음의 행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주원장은 지적인 호기심이 유별난 사람이었다.


1351년 정권 교체를 목표로 하는 민중 봉기라기보다는 절망에 빠진 민중들이 정신적으로 위안을 찾던 정도의 백련교를

순제가 성급하게 탄압하고 교주 한산동을 처형하면서 중국 전체를 뒤흔드는 대변혁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한산동의 처 양(楊)씨는 어린 아들 한림아를 데리고 남쪽 지역으로 도망쳐 반원 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며,

여기에 전국에서 숱한 인물들이 호응했다.


백련교도를 주축으로 한 이들은 동일한 이념을 추구하는 동지라는 개념으로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러 '홍건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안휘성에서는 유복통(劉福通)이 가장 유력한 인물로 10만의 병력을 모았으며

대지주인 곽자흥(郭子興)도 별도로 군대를 일으켜 호주를 점령했다.


이들을 도적떼로 볼 수도 있고 반정부 혁명 세력으로 볼 수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굶주린 농민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상인이나 지주, 사찰과 같이 '가진 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약탈에 시달렸다.

주원장이 있던 황각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절이 습격당해 폐허로 변하자 주원장은 앞날이 막막해졌다.


그는 이때 절에 계속 머물 것인지 아니면 이 참에 아예 홍건적에 가담할 것인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주원장에게는 약간 엉뚱한 면이 있었다.

그는 황각사에서 공부하던 와중에 얻은 어설픈 주역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점을 쳤는데 당장 떠나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는 그 길로 호주를 장악하고 있던 홍건적의 수령 곽자흥을 찾아갔다.


곽자흥은 주원장의 인물 됨됨이가 맘에 들었다.

그는 파격적으로 주원장을 친위대 소속의 경호대장 격인 구천장(九天長)에 임명했다.


주원장은 험상궂게 생긴 추남이었으나 성격은 호방하고, 담력과 배짱이 있어 전투에서는 용맹했으며,

재물에 욕심이 없어 전리품을 모두 윗사람에게 바치거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곽자흥 또한 그를 중용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양녀를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그녀는 곽자흥의 절친한 친구인 마공(馬公)의 딸로 어릴 적에 고아가 되어 양녀가 되었다.

후일 황후가 되는 마씨 부인으로, 대단히 현명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홍건적이 봉기했던 초기, 원나라 조정에는 이를 제압할 만한 군사력이 충분치 않았다.

몽골군의 막강한 전투력은 그 시기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백부를 살해하고 그의 자리를 차지한 젊은 바얀 토구타는 상당히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다.


그는 서주(徐州)에서 압도적인 병력의 홍건적을 격파했다.

그러자 결정적인 순간에 황제의 고질적인 의심병이 도졌다.

토구타를 경계하고 시기해서 그를 진압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해 버린 것이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군 사령관이 교체되었으니 지휘 체계가 제대로 가동될 리 없었다.


서주의 홍건적들은 기사회생해서 곽자흥이 버티고 있는 호주로 몰려들었다.

당시 홍건적들 사이에서도 주도권 다툼이 치열했다.


서주에서 패퇴한 무리들에 의해서 곽자흥이 실권을 잃자 크게 실망한 주원장은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대략 700명의 병사들을 모아 자신의 부대를 조직했다.


그중에는 후일 개국공신으로 명성을 날리게 될 화운(花雲), 당승종(唐勝宗), 곽흥(郭興),

서달(徐達), 탕화(湯和)와 같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서달과 탕화는 황각사 시절에 사귄 친구들이었다.

후일에는 이들이 이름 높은 장군과 신료가 되겠지만 처음 모였던 이 무렵에는 무기라고는 처음 손에 잡아 보는 오합지졸들이었다.


이 초보 홍건적들은 과감하게 인근의 저주성(滁州城)을 공격해 성을 함락했다.

주원장은 곽자흥을 지휘관으로 모셔 왔다.


주원장이 저주성을 확보하자 등유(鄧愈), 이선장(李善長)과 같은 후일의 명장들이 가세했으며,

조카인 주문정(朱文正)과 이문충(李文忠)도 그의 휘하에 합류했다.

이들 역시 후일 불굴의 용사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저주성을 확보하고 병력이 늘어나자 주원장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화주(和州)를 공격해서 식량을 확보하고자 했다.

일단 점령하는 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무려 10만 명의 몽골 군이 화주를 포위한 것이다.

처절한 방어전이 벌어졌고, 초보 홍건적들은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수십 배나 되는 몽골 군의 맹공을 견뎌 낸 것이다.

몽골 군은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은 채 철수했다.


이 화주 공방전은 주원장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가 1355년 3월, 그가 홍건적에 가담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때는 홍건적의 봉기가 정점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가던 시기에 해당한다.

홍건적의 최고 실력자 유복통은 처형된 백련교주 한산동의 어린 아들 한림아를 소명왕(小明王)으로 맞아들여

새로운 나라 대송(大宋)의 건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곧바로 개봉(開封)을 공격해 점령하고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혁명은 변질되기 마련이다.

초반의 순수한 열기가 가라앉으면 천하 제패를 노리는 숱한 야심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야심가들의 목표는 혁명이 아니라 권력이다.

이러한 야심가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재주를 겨루어 마지막에 단 한 사람의 승자가 남게 되며

그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흥미진진한 게임으로 역사가 바뀌곤 하는데, 원나라 말기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홍건적이 봉기하면서 유복통이 동쪽을 장악했다면 서쪽의 실력자는 호북과 호남을 장악한 서수휘(徐壽輝)였다.

그는 스스로 황제에 오르면서 국호를 천완(天完)이라고 했다.

서수휘의 휘하에는 호시탐탐 독립을 노리는 진우량(陳友諒), 명옥진(明玉珍)과 같은 야심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홍건적과는 상관없이 봉기한 태주(泰州) 출신의 장사성(張士誠)도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원래 소금 밀매상이었는데 순식간에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인 양자강 하구의 소주(蘇州)를 장악했다.


우리의 영웅 주원장은 이때까지도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명목상으로 소명왕 한림아 휘하의 장군 곽자흥의 부장이었다.


그런데 1355년에 곽자흥이 병에 걸려 급사하면서 주원장은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소명왕은 곽자흥의 큰아들 곽천서(郭天徐)를 아버지의 후임으로 임명하고 주원장을 부원수에 임명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게 된 주원장은 과감한 군사행동을 감행했다.

그는 양자강을 넘어 강남으로 내려가 물류의 중심지인 태평성(太平城)을 기습 점령했다.


성을 탈환하기 위해 몽골 인들은 급히 병력을 파견했지만 주원장은 이들을 격파하고

태평성에 별도의 독립군단인 익원수부(翼元帥府)를 설치하여 스스로 원수가 되었다.


그다음 해인 1356년은 주원장에게 상당히 의미 있는 해였다.

중국 남동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남경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경을 응천부(應天府)로 개명하고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주원장이 막 무대에 등장한 이 시기는 유복통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 홍건적이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인 상황 판단과 성급한 결정이 화를 불렀다.

홍건적 지휘부는 원나라 황실 타도를 목표로 북벌을 시도했다.


당시 정세를 보자면 홍건적과 다른 세력들이 동시에 봉기한 남부는 군웅이 할거하던 혼란한 지역이었지만

북부는 엄연히 원나라 황실의 지배력이 미치던 지역이었다.


유복통은 1357년에 개봉에 대병력을 집결시킨 후 세 방향으로 나누어 기세 좋게 북진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몽골의 바얀들은 부패하기는 했어도 무능한 지휘관들은 아니었다.


좀처럼 기세가 꺾일 것 같지 않던 홍건적들은 몽골의 정예군을 상대한 전투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질질 끌다

결국 북벌군의 반 정도는 전사하고 나머지는 항복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전황이 극적으로 역전되면서 거꾸로 대송의 수도 개봉이 원나라의 대군에 포위되었다.


유복통은 100일 가까이 몽골 군의 맹공을 견디면서 분전하다 식량이 떨어지자

한림아와 함께 가까스로 탈출해 멀찌감치 남쪽 저주의 안풍(安豊)으로 도피했다.


이 사태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냈다.

홍건적의 지휘부가 몰락하자 야심을 감추고 있던 혁명가들이 천하 패권을 노리며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때의 세력 분포를 주원장을 중심으로 보면 선두주자는 서쪽에 둥지를 튼 진우량과 동쪽에 이웃한 장사성이었다.

진우량은 서수휘의 휘하에서 독립한 인물로 1360년에 서수휘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한(漢)'이라고 했다.


장사성은 홍건적이 개봉을 잃은 시기에 남송 시대부터 가장 번화하고 풍요로운 평강(平江) 일대를 점령한 다음

소주를 중심으로 호주, 상주(尙州), 항주(杭州) 등 풍요로운 지역을 넓게 장악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언제부터 천하의 대권을 의식했는지 지금으로서는 명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

그는 남경을 근거지로 삼아 궁지에 몰린 소명왕 한림아를 지원했으나 곽자흥이 남긴 모든 것을 가로챘다.


곽자흥의 장남인 곽천서는 주원장보다 앞서 남경을 공격하다 전사했고,

차남인 곽천작(郭天爵)은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으며, 남아 있는 상속자들인 딸과 조카는 주원장의 첩이 되었다.


주원장이 남경에 입성한 이후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그의 주변에 유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유기(劉基), 송렴(宋濂), 도안(陶安)와 같이 실력과 명성을 겸비한 사람들이었다.


주원장은 유학자들과 어울리면서 홍건적과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백련교는 불교의 만민평등 사상에다 신비주의를 뒤섞은 서민들의 종교인 반면 유교는 원래부터 통치자들의 논리였다.


주원장 주변에 몰려든 유학자들은 대부분 현실정치에는 참여한 적이 없고

재야에서 글을 쓰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현실적인 정치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이상과 원칙에 충실한 성향을 보이게 마련이다.

결국 주원장의 새로운 참모들과 홍건적이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백련교의 교리와는 타협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주원장은 모순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가 남경에 입성하면서 공포한 격문은 유교적인 이념에 바탕을 두어 기존의 사회 체제를 견고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이른바 백련교의 개벽론이라든지 새로운 세상과 같은 개념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소명왕 한림아의 장수로 남아 있었으며 1362년에는 소명왕에 의해서 오왕(吳王)에 봉해졌다.


천하는 사파전의 양상이 되었다.

원나라의 세력이 남아 있는 가운데 주원장, 진우량, 장사성이 서로 각축을 벌였다.


서로 물고 물리는 이들의 관계에서 가장 먼저 균형이 깨진 것은 주원장과 진우량의 관계였다.

한왕을 자처하던 진우량의 장점은 막강한 선단을 바탕으로 양자강의 수로를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주원장은 수전으로 진우량과 승부를 벌여야 했다. 선공은 진우량이 했다.

그는 60만의 병력과 100척이 넘는 전함을 동원했다.


주원장은 이때에 소명왕이 있는 안풍을 공격한 장사성의 군대와 접전을 벌이던 중이었다.

양쪽에서 협공을 당한 꼴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장사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주원장에게 기회가 생겼다.


주원장은 장사성과 휴전은 했지만, 갑자기 대규모의 함대가 생길 리는 없었다.

그는 수백 척의 고깃배를 동원해서 응전했다.


이것이 이 시대 최대의 명승부 중 하나인 파양호(鄱陽湖) 전투이다.

파양호는 양자강 남쪽 강서성(江西省)에 위치해 있으며 여러 개의 지류가 모이는 곳이었다.


1363년 주원장과 진우량은 이곳에서 사흘 밤낮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양측에서 엄청난 전사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주원장 자신이 자칫하면 사로잡힐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행운은 주원장의 편이었다.

마지막 날 진우량이 화살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주원장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파양호 전투를 계기로 팽팽하던 주원장과 장사성의 균형도 무너졌다.

진우량이 지배하던 서부의 광대한 세력권이 모두 주원장에게 편입되었을 즈음에서야

장사성은 두 사람이 파양호에서 혈전을 벌이던 시기에 협공을 가해서 이득을 취하지 않았던 자신을 책망했을 것이다.


장사성은 개인적인 기질이 주원장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홍건적과는 무관한 사람이고 그들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장사성은 주원장이 홍건적에 합류한 다음 해인 1353년에

불법으로 운영하던 자신의 염전에서 일하던 청년들을 모아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소주가 속해 있는 현재의 강소성(江蘇省) 출신이었다.
소주는 남송 시대부터 상공업이 발달해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였다.


소주는 이러한 풍요로움에 걸맞는 화려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의 도시였다.

장사성은 그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지도자였다.


그는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였다.

성격이 호방하고 매일 연회를 즐기면서 씀씀이가 커서 주변에는 내로라하는 당대의 문인과 예술가 들이 모여들었다.

장사성은 천하 제패에 전력을 다하기보다는 이러한 생활 자체를 즐기는 편이었다.


장사성은 1357년에 주원장에게 한 번 패배를 당하고 나서

원나라와 손을 잡아 관직을 제수받으면서 매년 양곡 10만 석 이상을 공급하였다.


원나라와 동맹을 맺은 상황이니 주원장은 소주 방면으로는 감히 넘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1362년 장사성은 홍건적의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유복통을 격파하고 죽임으로써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성과에 오만해진 장사성은 원나라와 관계를 끊고 독립을 선언하면서 스스로 오왕(吳王)이라 칭했다.

이것은 헛된 명성만 얻을 뿐 아무런 실익이 없는 자충수였다.


진우량이 무너진 이후 장사성은 갑자기 자신보다 덩치가 3배로 커진 주원장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장사성은 1367년에 소주가 함락되면서 몰락했다.


걸출한 인물들이 몰락하는 계기는 지나친 자부심이 화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진우량의 경우는 막강한 전투선단이 그랬고 장사성의 경우는 한없는 풍요로움이 그랬다.


반면에 주원장은 태생적으로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으며 이것은 경쟁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장사성이 자살하면서 남쪽을 모두 장악한 주원장은 북경을 향해 대망의 북진을 시작했다.

그는 바로 다음 해인 1368년 1월 4일 산동성을 평정한 후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국호는 명(明), 수도는 응천부인 남경, 연호는 홍무(洪武)였다.

이때 주원장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원나라의 수도이자 당시에는 대도(大都)라고 불리던 북경은 바로 그해에 함락되었다.

순제는 수도를 북방의 상도(上都)로 옮기고 계속 명나라와 대립했다.


이때부터 이 왕조는 대제국 원(元)과 구분해서 북원(北元)이라고 한다.

명나라가 북원까지 제압하고 완전히 천하를 평정하는 데는 그로부터도 한 세대 이상이 걸리지만,

한족(漢族)의 왕조가 한 세기 만에 부활된 것이다.


주원장은 중국 역사상 기층민 출신으로

천하의 대권을 잡은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민중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민중의 바람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는 성공과 함께 민중을 배신하고 포악한 권력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의 잔인함은 중국 역사에서도 최상위에 꼽힐 정도이며

명 왕조 전체를 가혹한 폭정이 지배하게 되는 단서를 제공했다.


주원장은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에 대해 주도권을 잡게 되었을 때부터

홍건적과의 결별을 가시화했다.


이는 민중의 종교인 백련교를 버리고 귀족의 전통적인 윤리인 유교로 회귀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 무렵 백련교와 미륵교(彌勒敎)를 사람들을 현혹하는 요술(妖術)로 규정했다.


이와 관련한 상징적인 사건이 소명왕 한림아의 살해였다.
1366년 장사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주원장은 부하 장수인 요영충(寥永忠)에게

저주에 머물고 있던 소명왕을 응천부로 모셔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가 탄 배가 양자강에서 풍랑을 만나 뒤집어지며 소명왕이 익사했다.

요영충이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은 것이었다.

주원장은 얼마 후 요영충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사형에 처했다.


장사성을 격파한 후 자신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소주 지역에 대한 복수도 지나치게 치졸했다.

그는 장사성의 참모들을 참수하고 그 시체는 거리에 버렸다.


또한 그곳의 관리, 군인, 재산가 들과 그 가족 30만 이상을 추방해서 강제 이주를 시켰으며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마지막으로 소주 자체에 대해서도 높은 세율을 책정해 이곳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었다.
장사성에게 극진하게 대우받던 당대의 문인과 지성인 들 역시 화를 면하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천재 시인 고계(高啓)는 일단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중용되어

《원사(元史)》까지 편찬하지만 끝내 허리를 잘라 죽이는 형에 처해졌고,

이름난 학자 양기(楊基)는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장우(張羽)는 호송 도중에 자살했다.


이들 이외에도 문화의 도시 소주를 빛내던 많은 지성인들이 살해되었다.

이제 주원장은 탄압받던 농민을 위해 궐기한 의병의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남경 시절에 보여주던 온화한 통치자의 모습도 옅어져 갔다.


그는 점차 난폭한 정복자가 되어 갔다.
황제에 오른 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어떤 정권에서든 권력을 창출한 이후에는 대대적인 숙청이 불가피하다.

최종 승자가 과거의 동지나 공신들을 정리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 방법론은 항상 문제가 될 수 있다.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그러한 정리 작업 자체가 싫어서 자신을 황제로 세웠던 동료 장수들과 말술을 마시고 나서

모든 병권을 인수받아 후대의 칭송을 받았다.


조광윤과는 정반대로 주원장은 사상 유래가 없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주원장의 폭정은 '호람의 옥(湖藍之獄)'으로 대표된다.


주원장의 모사 호유용(胡惟庸)은 크게 신임을 얻어 승상직에 올라 인사권을 장악하고 전횡을 부렸다.

그러자 당연한 반발로 밀고가 들어왔으며 주원장은 이 사건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철저하게 이용했다.


호유용 자신이야 죽어도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관련자들이 문제였다.
호유용의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한 사람의 수는 그 당시에만 1만 5,000명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관련자들이 계속 추가되어 최종적으로 무려 3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주원장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호유용이 죽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 혁명 동지이자 친구였던 전 승상 이선장까지 이 음모에 관련된 혐의를 씌워 사형에 처했다.

이것이 '호유용의 옥(胡惟庸之獄)'이다.


남옥(藍玉)은 호유용과 달리 억울한 인물이다.

그는 주원장 치세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명장이었다.


명나라는 힘을 회복한 북원에 연패하면서 한 전투에서만 무려 40만의 전사자를 기록하는 등 고전을 계속했다.

남옥은 명나라 군대의 연패 행진을 끊은 명장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얻은 명성이 주원장의 시기심을 자극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번에는 남옥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다.

이어 2만 명이 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이것이 '남옥의 옥(藍玉之獄)'으로, 호유용과 남옥의 사건을 묶어서 '호람의 옥'이라고 한다.

이 두 번의 옥사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공신들이 갖가지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 갔다.

그는 친구건 친족이건 일단 제거 대상으로 결정하면 인정을 두지 않았다.


이문충(李文忠)은 주원장의 작은 누나의 아들로,

주원장이 곽자흥을 떠나 스스로 부대를 조직했을 때 소년의 몸으로 휘하에 가담해 줄곧 충실하게 따르며

험난한 전투에서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워서 조국공(曹國公)에 봉해졌다.


이문충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원장이 혁명 동지들을 몰살하는 것을 보다 못해 이를 말리는 상소를 올렸으며

주원장은 조용히 그를 독살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주원장의 처형 방식도 문제였다.

반역죄에 대한 처벌은 무조건 족주형(族誅形)으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가족 모두를 죽였다.


죽이는 방법도 다양해서 사지를 절단하는 능지(凌遲)나 허리를 자르는 요참(腰斬)은 점잖은 편에 속했다.

머리가죽을 벗겨 죽이는 박피형(剝皮形)도 있었다.

죽은 자들의 시체는 길거리에 버려지거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장소에 전시되었다.


주원장의 형벌 중에서 압권은 '정장(廷杖)'이라는 것이다.

형벌 자체는 단순해서 관료에게 과실이 있으면 그를 궁정 마당에 무릎 꿇게 한 다음 몽둥이로 내리쳤다.


이 정장형은 법률에 정해진 바도 없고 집행 규정도 없었다.

순전히 황제의 기분에 의해서 매질의 강도와 횟수가 결정되었다.

수많은 신하들이 하필이면 주원장이 저기압일 때 걸려서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죽어 나갔다.


세상에는 비천한 상황을 극복하고 성공한 예가 숱하게 많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과거의 부끄러운 시절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두 가지이다.


스스로를 극복하는 과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든가 과거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든가.

주원장은 아쉽게도 후자에 속했다.


그는 천한 출신에 많이 배우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했다.

이러한 열등감이 '문자의 옥(文字之獄)'이라는 역사상 유래 없는 황당한 참극을 만들어 냈다.


주원장의 과거를 연상시킬 수 있는 모든 글자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중 승(僧), 대머리 독(禿), 빛 광(光)은 그의 황각사 시절과 관련이 있었고,

도둑 도(盜), 도둑 적(賊)은 황건적 시절과 연관이 있었다.


여기에 승(僧)과 음이 같은 날 생(生)을 비롯해 적(賊)과 모양이 닮은 곧 칙(則)이 추가되었다.

이 규정을 어겨 숱한 신하들이 처형되었으며

길 도(道), 다를 수(殊)와 문자와 제비(帝扉)와 같은 단어들이 추가되면서 금지어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재주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도 표면으로 드러났다.

유학자 유기(劉基)는 명 왕조의 사상적 기반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는 점차 변모해 가는 주원장을 두려워해 고향으로 은퇴했는데,

그가 병에 걸리자 주원장은 위로한다며 궁중의 의사를 보내 독살했다.


개국 일등공신으로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던 서달(徐達) 역시

병에 걸려 요양하던 중에 황제가 보낸 거위 요리를 먹고 사망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에도 주원장은 단순히 잔인무도한 폭군이나

시기심에 불타는 소인배로만 매도할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유교적인 가치관을 가진 군주였다.

백성들의 가난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 자책했으며 농촌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대대적인 치수공사를 벌이고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정착시켜 농민으로 끌어들인 결과

그의 30년 통치 기간 중에 중국의 농업 생산량은 수요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향상되어

고질적인 식량 부족 문제가 해결되었다.


또한 주원장은 젊은이들을 좋아했다.

그는 특히 아직 권력의 맛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선비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반지성주의적인 성향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에 나가

학생들에게 직접 강의를 했으며 강의가 끝나면 오랫동안 학생들과 논쟁을 벌였다.

그는 자신과 논쟁을 벌이던 학생 중에서 눈에 띄는 인재가 있으면 곧바로 고위직에 채용했다.


주원장은 정서적으로도 대단히 놀라운 사람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각료를 맨바닥에 꿇어앉혀 놓고 몽둥이찜질을 가해 초죽음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그 길로 국자감에 나가 젊은 학생들과 나라의 장래를 위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면서 기분을 전환하곤 했다.

이렇듯 변화무쌍한 그의 성격을 두려워해 자살하는 관료들까지 있었다.


또한 그는 위험할 정도로 감성이 예민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평소에 색을 밝혀서 수많은 비빈을 거느리고 모두 26명의 왕자와 16명의 공주를 생산할 정도였지만

평생 반려자로 생각한 사람은 일찌감치 결혼했던 마황후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마황후가 먼저 세상을 떴을 때 며칠간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기도 했다.


정서적으로 극과 극을 오갔던 사실에서 주원장은 심각한 조울증 환자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조울증 환자들의 전형적인 증상을 모두 보이고 있으며,

상당수의 조울증 환자들이 그러하듯이 개인적인 성정이 음울하면서 동시에 호방했다.

이렇게 부조화스러운 다중인격이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명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만들어 냈다.

고위 관료들도 황제 앞에서는 노예나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들지 않아야 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열등감에 가득 찼던 조울증 환자 주원장이 처음 고안한 예법이며,

그대로 중국의 권위주의적인 전통으로 굳어졌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원장이 아무리 폭군이었다고 해도 그는 본질적으로 혁명가였으며,

유교적인 이상국가의 건립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아들 영락제(榮樂帝) 성조(成祖)로부터 시작해 점차 혁명 정권이라는 본질 자체가 유명무실화되었으며,

오직 주원장이 창안한 혹독한 통치 방법만이 계승되었다.


그러자 관료들은 황제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민중들은 권력에 순응하는 방법만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권위주의는 200년 동안 중국인들의 개성을 규정해 버렸다.

이것이 명 왕조의 역사를 폭군 아니면 무능력자인 황제, 환관과 측근 들의 전횡,

계속되는 폭정과 권위주의적인 전제정치, 진취성을 잃어버린 민중, 황실을 조롱하는 지성인들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지성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황실 등의 특성을 가지게 한 것이다.


주원장의 문지기가 된 손권


중산릉에서 명효릉으로 가는 길에 손권릉(孫權陵)이 있다.

명효릉 맞은 편의 평평한 공터에 손권 상(像)과 함께 외로이 비석 하나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손권릉인데,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쉬울 정도로 초라하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황제이자 최초로 남경을 수도로 세웠던 손권의 능을 이렇게까지 만든 것은 바로 주원장이다.

예로부터 명당 자리라 일컬어지는 자금산에 자신의 능을 만들기로 결정한 주원장은

이미 자금산에 만들어진 모든 무덤을 철거하라고 지시했는데

“손권도 영웅이므로 묘를 남기되, 그가 나의 무덤을 지키게 하라”며 손권의 무덤 이장(移葬)을 면해줬다고 한다.


그러나 명색이 황제였던 손권을 자신의 묘지기로 전락시킨 것이 과연 영웅에 대한 예우를 한 것일까.

그 이후에도 손권릉은 수 차례 걸친 전쟁으로 인해 과거 황제의 릉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모습이 되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석상로(石象路) 신도와 옹중로(翁仲路) 신도로 갈라지는 이정표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석상로(石象路)의 한글 표기가 '석코루'로 되어 있다.


아마도 코끼리 '象' 자에서 '코' 자만 따서 합성한 듯하다.

이처럼 각 지역 곳곳에 있는 안내판이나 안내문에는 엉뚱하게 번역해 놓은 글들이 종종 눈에 띈다.

다만 한글로도 번역해 놓았다는 성의로 양해하고 지나가야 할 듯.



신도(神道) 석상로(石象路)


외금수교(外金水橋 : 紅橋)를 지나면 12쌍의 석상이 줄지어 서있는 석상로(石象路)가 나온다.

석상로는 신도의 일부분으로 615m의 길 양편으로 석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석상들은 사자, 해치(해태), 낙타, 기린(麒麟), 말, 코끼리의 6종으로, 한 쌍은 서 있고,

다른 한 쌍은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석상 중에서 사자는 짐승의 왕으로서 총명하고, 용맹하여 다른 짐승들을 압도 한다.

또한 불교에서도 호법의 영물로 여겨지기 때문에 신도에서 빠지지 않는다.


사자는 황제의 위엄과 강한 세력을 의미한다.

해치는 사자와 비슷하나 곰의 눈과 뿔을 가진 동물로 법수(法獸)라고도 불려진다.


상상속의 동물이며 성품이 충직하여 싸우는 사람들 중에서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아 구별해 낸다고 알려져 있다.

황제의 공명정대함을 나타내고자 신도에 놓여진다.


기린 역시 고대인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동물이다. 길한 동물로 알려져 있으며

사자, 호랑이, 소, 용의 형태를 몸에 가지고 있다.

황제의 인덕을 상징하며 용처럼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


그런데 신도가 아주 특이하게도 굽어져 있다.

하늘에서 보면 북두칠성 모습으로 굽어져 있다고 한다.


효릉의 신도는 다른 제왕들의 신도와는 달리 직선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신도가 직선이 아닌 것은 중국에서 효릉이 유일하며,

매화산(梅花山)의 모양을 따라 건설된 이것은 재미있게도 북두칠성처럼 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처음 신도를 조성할 때 그 일대에 오나라 황제 손권(孫權)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사 책임자가 주원장에게 손권 묘를 옮길 것을 요청하니 주원장이 말하길

"손권 역시 훌륭한 사람이니 그대로 두어서 그가 나를 위해 대문을 지키도록 하라"고 명했기 때문에

손권의 묘를 피해서 조성하느라 곡선으로 되었다는 것이 하나의 설이다.


또 하나는 '북두칠성' 설이다.

즉 신도를 곡선으로 내어 대금문에서 보정(寶頂 ; 무덤)에 이르는 전체적인 배치를 북두칠성 모양으로 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원주형 돌 위에 구름과 용을 조각해서 세운 기둥이 등장한다.

그 이전 시대에는 주로 연꽃을 조각해서 세웠다고 한다.


신도는 사방성(四方城)에서 시작된다.

사방성은 비석을 보관하는 비정(碑亭)으로 위교(衛橋)와 중산릉 사이에 있다.


주원장의 아들 주체가 세운 대명효릉신공성덕비(大明孝陵神功聖德碑)가 이곳에 있다.

비석의 높이는 8.78m이며, 거북이 좌상위에 놓여 있다.

비문은 주체가 손수 작성했으며 주원장의 공덕을 칭송하는 2746글자가 기록되어 있다.



서 있는 말

제일 안 쪽에 말이 배치되어 있다.


꿇어 앉은 말


기린


아프리카의 토인들이 선사한 기린을 배에 싣고 와서 황제에게 바쳤는데 영락제게 크게 감격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기린이 등장하면 태평성대가 찾아온다고 전해왔기 때문에 황제가 감격했던 건 아닐까?


공자도 기린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깊이 탄식했다고 한다.

그래서 획린(獲麟)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고대 중국인들은 기린과 봉황, 거북과 용을 신령스럽게 여겼다.

기린이라는 짐승 속에 용과 호랑이와 사자와 소의 형상이 한 몸안에 다 들어있다고 여겼다.

조각한 모습을 보면 우리가 아는 기린과는 달리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코끼리




서 있는 낙타



앉아 있는 낙타



서 있는 해태  혹은 해치라고도 부르는 전설상의 괴물이다.



앉아 있는 해태


서 있는 사자


앉아 있는 사자

석상로 신도에서는 사자, 해치(해태), 낙타, 기린(麒麟), 말, 코끼리의 6종류 12쌍이 지키고 있다.

각각 한 쌍은 서 있고, 다른 한 쌍은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옹중로(翁仲路) 신도

석상로가 동물의 길이라면 옹중로는 사람의 길이다. 신도 양편으로 문무관리의 석상이 지키고 있다.


명효릉 신도 옹중로(翁仲路)


60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효릉은 나무로 만든 많은 건축물들을 잃었다.

하지만, 신도(神道)와 석각들, 방성(方城), 명루(明樓), 하마방(下馬坊), 대금문(大金門),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

등과 같은 석재 건축물들은 여전히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효릉은 전조후침(前朝後寢)이라고 하여, 앞쪽에는 정무를 보는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정원을 비롯한 침실 등 생활공간을 배치하는 황실의 규범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예규에 따른 것이며 당, 송 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능은 산에 기대어 짓는다.”라는 제도에 따라 산기슭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효릉이 과거의 규범만을 답습한 것만은 아니었다.

효릉의 전조(前朝)는 방형으로 지었지만, 시신이 매장된 지하궁전은 원형의 토산을 쌓아 완성시킴으로써

전방후원(前方後圓)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내기도 하였다.


효릉 이후에 건설된 명, 청 500년 20여 좌의 황릉은 모두 효릉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를 따라 지어졌다. 

효릉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황릉 중의 하나이며, 2003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명효릉 신도 옹중로(翁仲路)의 무신상


효릉의 신도는 다른 제왕들의 신도와는 달리 직선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신도가 직선이 아닌 것은 중국에서 효릉이 유일하며, 매화산(梅花山)의 모양을 따라 건설된 이것은

재미있게도 북두칠성처럼 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신도는 사방성(四方城)에서 시작된다.

사방성은 비석을 보관하는 비정(碑亭)으로 위교(衛橋)와 중산릉 사이에 있다.


주원장의 아들 주체가 세운 대명효릉신공성덕비(大明孝陵神功聖德碑)가 이곳에 있다.

비석의 높이는 8.78m이며, 거북이 좌상위에 놓여 있다.

비문은 주체가 손수 작성했으며 주원장의 공덕을 칭송하는 2746글자가 기록되어 있다.


옹중로(翁仲路)는 석상로 다음에 나오는 신도의 두 번째 부분이다.

길이는 250m이며, 한 쌍의 돌기둥인 화표(華表)로부터 시작된다.


화표에는 구름과 용이 새겨져 있으며 화표 북쪽으로는 2쌍의 무신과 2쌍의 문신상이 있다.

갑옷이나 망포를 입은 모습은 생동감이 넘쳐흐르며 그 위엄이 대단하다.


한 덩이의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는 이들 석상들은 선이 굵고 간결하며,

그 조형미가 아름다워 명나라의 예술걸작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위엄이 느껴지는 문신상

정면으로 영성문(欞星門)이란 이름의 석방이 보인다.








동락원(同樂園)



관폭루(觀瀑樓)


단체사진




일대문종(一代文宗) 구양수 상



추성부(秋聲賦) / 구양수(歐陽脩)


이 글은 구양수가 52세 때의 가을에 쓸쓸한 바람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감홍을, 직서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동자(童子)와의 대화 형식을 빌려 써낸 것이다.


가을 바람의 처량함과 만물이 조락(凋落)하는 경치를 보고, 자연 현상의 변화와 인간의 생활을 연관시켜

인생(人生)의 덧없음을 안타까운 탄식조로 노래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에는 그의 문장이 쉬우면서도 유창하고, 서술이 섬세한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추성부(秋聲賦)는 아방궁부(阿房宮賦) 로부터 비롯된 '문부(文賦)'를 발전시켜,

송대의 賦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산문적인 賦의 양식을 확립한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賦가 물상(物象)을 형용하는 서사(敍事).서경(敍景) 의 문학이라 한다면,

이 추성부(秋聲賦)야말로 참으로 그 특색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는 글이라 하겠다.


소리, 색깔, 경치, 감정 등 몇 가지 면에서 묘사와 비유를 가하여 변화가  다양한 가을 경치가 지면에서 배어 나올 듯하다. 

작가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감개라는 면에 착안하여 이를 가을소리, 가을풍경의 통일과 조화 속에 짜 넣었다.


가을소리를 빌려 우주 만물의 쇠락에서 짧은 인생의 비애를 연상한다.

이 부는 산문 같기도 하고 시와 같기도 하다.


늘어놓는 수법, 서정적 필치, 형상적 비유를 통해 가을소리의 묘사는 다채롭고 그윽하게 전개된다. 

그 사이에 동자와의 대화를 끼워 넣어 독자로 하여금 걷잡을 수 없는 신비로운 흥취와 무한한 감개를 느끼게 한다.


歐陽子方夜讀書, 聞有聲自西南來者, 悚然而聽之, 曰:"異哉!"
구양자방야독서, 원유성자서남래자, 송연이청지, 왈 : "이재"
구양자가 밤에 책을 읽다가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찟 놀라 귀기울이며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初淅瀝以蕭颯, 忽奔騰而澎湃;如波濤夜驚, 風雨驟至.
초석역이소삽, 홀분등이팽배. 여파도야경, 풍우취지.
처음에는 바스락 바스락 낙엽지고 쓸쓸한 바람부는 소리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하였다.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데,


其觸於物也, 鏦鏦錚錚, 金鐵皆鳴;又如赴敵之兵, 銜枚疾走, 不聞號令, 但聞人馬之行聲.
기촉어물야, 총총쟁쟁, 금철개명. 우여부적지병, 함매질주, 불문호령, 단문인마지행성.
그것이 물건에 부딪쳐 쨍그렁 쨍그렁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 들리는 듯하기도 했다.


予謂童子:"此何聲也?汝出視之." 童子曰:"星月皎潔, 明河在天, 四無人聲, 聲在樹間."
여위동자, 차하성야, 여출시지. 동자왈, 성월교결, 명하재천, 사무인성, 성재수간.
내가 동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 좀 나가 보아라."
동자가 "달과 별이 밝게 빛나며,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予曰:"唏唏悲哉!此秋聲也, 胡爲而來哉?蓋夫秋之爲狀也;其色慘淡, 煙(雨+非)云斂;
여왈: "희희비재! 차추성야, 호위이래재. 개부추지위상야, 기색참담, 연비운염.
나는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은 암담하여 안개는 날아가고 구름은 걷힌다.


其容淸明, 天高日晶;其氣慄冽, 砭人肌骨;其意蕭條, 山川寂寥.
기용청명, 천고일정. 기가율렬, 폄인기골. 기의소조, 산천적요.
가을의 모양은 청명하며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난다. 가을의 기운은 살이 저미도록 차가워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 들며,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故其爲也, 凄凄切切, 呼號憤發. 豊草綠縟而爭茂, 佳木蔥籠而可悅;
고기위야, 처처절절. 호호분발. 풍초녹욕이쟁무, 가목총농이가열.
그러기에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절하며 울부짖는 듯 떨치고 일어나는 듯한 것이다.

풍성한 풀들은 푸르러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 볼 만하더니,


草拂之而色變, 木遭之而葉脫;其所以摧敗零落者, 乃其一氣之餘烈.
초불지이색변,목조지이엽탈. 기소이최패영낙자, 내기일기지여열.
풀들은 가을이 스쳐가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그것들이 꺾여지고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 까닭은 바로 한 가을 기운이 남긴 매서움 때문이다.


夫秋, 刑官也, 於時爲陰;又兵象也, 於行爲金, 是謂天地之義氣, 常以肅殺而爲心.
부추, 형관야, 어시위음. 우병상야, 어행위금, 시위천지지의기, 상이숙살이위심.
가을은 형관이요, 때로 치면 음의 때요, 전재의 상이요, 오행의 금에 속한다.

이는 천지간의 정의로운 기운이라 하겠으니, 항상 냉엄하게 초목을 시들어 죽게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天之於物, 春生秋實. 故其在樂也. 商聲主西方之音, 夷則爲七月之律.
천지어물, 춘생추실. 고기재낙야. 상성주서방지음, 이칙위칠월지율.
하늘은 만물에 대해 봄에는 나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므로 음악으로 치면 가을은 상성으로, 서방의 음을 주관하고, 이칙으로 칠월의 음률에 해당한다.


商, 傷也;物旣老而悲傷. 夷, 戮也;物過盛而當殺.
상, 상야. 물기노이비상. 이, 육야. 물과성이당살.
'상(商)'은 '상(傷)'의 뜻이다. 만물이 이미 노쇠하므로 슬프고 마음 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夷)'는 '륙(戮)'의 뜻이니 만물이 성한 때를 지나니 마땅히 죽이게 되는 것이다.


嗟乎, 草木無情, 有時飄零. 人爲動物, 惟物之靈. 百憂感其心, 萬事勞其形. 有動於中, 必搖其精.
차호, 초목무정, 유시표령. 인위동물, 유물지령. 백우감기심, 만사노기형. 유동어중, 필요기정.
아! 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지도다.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온갖 근심이 마음에 느껴지고 만사가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하니, 마음 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리게 된다.


而況思其力之所不及, 憂其智之所不能;宜其渥然丹者爲槁木,黟然黑者爲星星.
이황사기력지소불급, 우기지지소불능. 의기악연단자위고목,이연흑자위성성.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것까지 근심하게 되어서는,

 마땅히 홍안이 어느 새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 버리고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奈何以非金石之質, 欲與草木而爭榮?念誰爲之戕賊, 亦何恨乎秋聲!"
나하이비금석지질, 욕여초목이쟁영. 염수위지장적, 역하한호추성.
금석같은  바탕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는가?

생각건대 누가 저들을 죽이고 해하고 있는가? 또한 어찌 가을의 소리를 한하는가?"


童子莫對, 垂頭而睡. 但聞四壁蟲聲喞喞, 如助余之歎息.
동자막대, 수두이수. 단문사벽충성즉즉, 여조여지탄식.
동자는 아무 대답없이 머리를 떨구고 자고 있다.

다만 사방 벽에서 벌레 우는 소리만 찌륵찌륵 들리는데, 마치 나의 탄식을 돕기나 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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