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정(影香亭)


영향정(影香亭)은 1425년 명나라 때 세워졌다.

정자 이름은 임화정(林和靖, Lin He Jing, 967~1028)의 「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시에 나오는

"소영횡사수청천  암향부동월황혼 (疏影横斜水清浅  暗香浮動月黄昏)"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 북송 때의 문인 임화정은 본명은 임포(林逋)로 송대 전당(錢塘) 출신이다.

자는 군복(軍復), 시호가 화정(和靖)이다.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뜰에 매화나무를 심고 학과 함께 살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렀다.

매화가 필 때쯤 되면 한 달이나 문 밖을 나가지 않고 종일 매화를 감상하고 노래를 부르며 혼자 즐겁게 지냈다. 


산원소매(山園小梅) / 林和靖(임화정)


衆芳搖落獨暄姸(중방요락독훤연)
온갖 꽃들이 시들어 떨어져도 홀로 아름답게 남아
占盡風情向小園(점진풍정향소원)
작은 정원의 정취를 독차지하고 있네.


疏影橫斜水淸淺(소영횡사수청천)
성긴 매화 그림자는 비스듬히 맑은 물 위에 드러나고
暗香浮動月黃昏(암향부동월황혼)
그윽한 매화 향기는 몽롱한 달빛 속에 감도네.






보송신재(寶宋新齋)


보송재(寶宋斋)에는 구양수의 산문 <취옹정기>를 동파 소식(蘇軾: Su Shih, 1036~1101)이 쓴 친필 석각을 세워 놓았다. 

구양수가 지은 글을 소동파가 썼다는 뜻에서 이 작품을 가리켜 「구문소서(歐文蘇書)」라 일컸는다.


소식과 그의 동생 소철(蘇轍, Su Zhe, 1039~1112)은 부친 소순(蘇洵: Su Xun, 1009~1066)의 안내로 구양수로부터 학문을 배운 바 있다.

소동파 이외에도 수많은 서법가들이 <취옹정기>를 썼다. 그 중 대표적인 탁본 세편을  pdf file로 아래에 소개한다.

               소식(蘇軾) 해서 <취옹정기 탁본> pdf file (여기를 클릭하면 탁본을 볼 수 있음)

            문정명(文征明) 해서 <취옹정기 탁본> pdf file
               동기창(董其昌) 행서 <취옹정기 탁본> pdf file

출처 :  http://family.swu.ac.kr/~cat/ae_maehwa_chuzhou_langyashan_2008.htm


풍락정기(豐樂亭記)


보송재(寶宋斋) 옆에는 구양수의 또다른 작품 <풍락정기>를 소동파가 쓴 글씨로 조각해 놓았다.

소동파는 1057년 아버지 소순(蘇洵)을 따라 사천에서 나와 카이펑에서 과거 시험을 보았고 이때 시험채점관이 구양수였다.


구소서간에 보면 요로에 소순의 문장을 추천하는 구양수의 편지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양수의 배경으로 소순은 장안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얻은 듯하다.


전하는 사연에는 시험관 구양수가 보기에 이만한 답안지의 수준은 필시 나의 제자 증공이 틀림없겠는데

그렇다면 이 답지를 장원으로 하면 스승이 제자를 봐줬다는 소리가 나올거 같으니 2등으로 하였는데

나중에 보니 그 답안지는 소식(蘇軾)이란 모르는 청년이었단 이야기가 있다.


훗날 동파 소식(蘇軾)은 구양수에게 여러모로 많은 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구양수를 흠모하는 마음이 소동파의 여러 글에 나타나고 있다.


풍락정기(豐樂亭記) / 구양수(歐陽修) 지음 - 소식(蘇軾) 書


修旣治滁之明年夏(수기치저지명년하)
나 구양수가 저주를 다스린 지 이듬해 여름이 되어서야

始飮滁水而甘(시음저수이감)
처음으로 저현의 샘물을 마셔보니 그맛이 달았다


問諸滁人(문제저인)
저주 사람들에게 물으니

得於州南百步之近(득어주남백보지근)
저주성의 남쪽 백 보 근처에서 얻었다고 한다


其上豐山聳然而特立(기상풍산용연이특립)
위로는 풍산이 높이 솟아 홀로 우뚝 서 있고

下則幽谷窈然而深藏(하칙유곡요연이심장)
아래로는 그윽한 골짜기가 조용히 깊이 숨어 있으며

中有淸泉滃然而仰出(중유청천옹연이앙출)
그 가운데에는 맑은 샘이 있는데 위로 솟아오르고 있다


俯仰左右(부앙좌우)
위아래 좌우의 경색을

顧而樂之(고이락지)
돌아보면 마음이 즐거워진다


於是疏泉鑿石(어시소천착석)
이에 물길을 트고 돌을 깨고

闢地以爲亭(벽지이위정)
땅을 정리하여 정자를 지어서

而與滁人往遊其閒(이여저인왕유기한)
저주 사람들과 더불어 여기로 와서 노닌다


滁於五代干戈之際(저어오대간과지제)
저주는 전쟁으로 번번하던 오대 때에는

用武之地也(용무지지야)
전쟁터의 하나였다


昔太祖皇帝(석태조황제)
지난달 태조 황제께서는

嘗以周師破李景兵十五萬於淸流山下(상이주사파이경병십오만어청류산하)
후주의 군대를 이끌고 이경의 군사 15만을 청류산 아래에서 깨뜨리고

生擒其將皇甫暉(생금기장황보휘)
이정의 장군인 황보위와

姚鳳於滁東門之外(요봉어저동문지외)
요봉을 저주성 동문 밖에서 생포하여

遂以平滁(수이평저)
마침내 저주를 평정하였다


修嘗考其山川(수상고기산천)
나는 일찍이 저주의 산천을 살펴보고

按其圖記(안기도기)
그 관련 지도와 기록을 찾아보고서

升高以望淸流之關(승고이망청유지관)
높은 곳에 올라 청류관을 바라보며

欲求暉鳳就擒之所(욕구휘봉취금지소)
황보휘와 요봉이 잡힌 곳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而故老皆無在者(이고노개무재자)
당시의 노인들이 모두 생존해 있지 않았다

蓋天下之平久矣(개천하지평구의)
대개 천하가 태평한지 이미 오래되었던 것이다


自唐失其政(자당실기정)
당나라가 정권을 잃은 이후부터

海內分裂(해내분렬)
천하가 분열되어

豪傑並起而爭(호걸병기이쟁)
영웅호걸들이 동시에 일어나 천하를 다투니

所在爲敵國者(소재위적국자)
피차 적국이 된 것이

何可勝數(하가승수)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乃宋受天命(내송수천명)
송에 이르러 천명을 받으시어

聖人出而四海一(성인출이사해일)
성인인 태조께서 나오시어 천하를 통일하였다


嚮之憑恃險阻(향지빙시험조)
지난날 험준함을 믿고 할거하던 인물들이

剗削消磨(잔삭소마)
제거되고 소멸되었다


百年之間(백년지간)
100여 년 사이에

漠然徒見山高而水淸(막연도견산고이수청)
사람들은 무심히 다만 산 높고 물 맑은 것만을 보고

欲問其事(욕문기사)
그 때의 일을 묻고자 하여도

而遺老盡矣(이유노진의)
그 일을 겪었던 노인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나 버렸다


今滁介於江淮之間(금저개어강회지간)
지금 저주는 장강과 회하 사이에 있어

舟車商賈四方賓客之所不至(주차상가사방빈객지소불지)
배와 수레를 탄 상인이나 사바의 빈객들이 오지 않는 곳이고

民生不見外事(민생불견외사)
백성들은 일생동안 바깥 사정을 보지도 못하고

而安於畎畝衣食(이안어견무의식)
농사와 의식에 안주하며

以樂生送死(이락생송사)
즐겁게 살다 죽으니

而孰知上之功德(이숙지상지공덕)
누가 임금의 공덕이

休養生息(휴양생식)
백성을 휴양시키고

涵煦百年之深也(함후백년지심야)
인구를 늘여서 100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윤택하게 해 준 것임을 알겠는가


修之來此(수지래차)
나는 이곳에 왔을 때

樂其地僻而事簡(락기지벽이사간)
이 지역이 산간벽지인데다 일이 간략한 것을 즐거워하였고

又愛其俗之安閒(우애기속지안한)
또 그 풍속이 편안하고 한가함을 사랑하였다


旣得斯泉於山谷之間(기득사천어산곡지간)
이미 산골짜기에서 이 샘을 찾아내니

乃日與滁人仰而望山(내일여저인앙이망산)
이에 날마다 저주 사람과 함께 고개를 들어 산의 풍경을 바라다보고

俯而聽泉(부이청천)
머리를 숙여 샘물의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掇幽芳而蔭喬木(철유방이음교목)
봄에는 향기 그윽한 꽃을 따고 여름에는 큰 나무 그늘 밑에서 쉬며

風霜水雪(풍상수설)
가을에는 바람일고 서리 내리고 겨울에는 얼음 얼고 눈이 내려

刻露淸秀(각로청수)
산 모습이 우뚝 곧게 드러나 맑고 수려하니

四時之景(사시지경)
사계절의 경치를

無不可愛(무불가애)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又幸其民樂其歲物之豐成(우행기민락기세물지풍성)
또 다행히도 이곳의 백성들은 작물의 풍작으로 즐거워하면서

而喜與予遊也(이희여여유야)
나와 함께 노니는 것을 좋아한다


因爲本其山川(인위본기산천)
따라서 나는 이곳 산천의 특징을 근거로 해서

道其風俗之美(도기풍속지미)
이곳 풍속의 아름다움을 설명하여

使民知所以安此豐年之樂者(사민지소이안차풍년지락자)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편안하게 이 풍년의 즐거움을 누리는 까닭이

幸生無事之時也(행생무사지시야)
다행히 태평무사한 때에 태어났기 때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夫宣上恩德(부선상은덕)
무릇 천자의 은덕을 널리 알려

以與民共樂(이여민공락)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것은

刺史之事也(자사지사야)
자사가 해야 할 일이다


遂書以名其亭焉(수서이명기정언)
그러므로 마침내 이 일을 써서 그 정자에 풍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심재(醒心齋)


성심재(醒心齋)는 1926년 진문권(陳文權: Chen Wen Quan)이 보송재(寶宋斋) 앞에 세웠다.

그 후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포화로 소실되었다가 2005년에 이곳에 다시 지은 것이다.


내부에 걸린 도덕사표(道德師表)라는 현판이 구양수가 후세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숭앙받는지를 가늠케 하였다.

왕안석(王安石: Wang Anshi), 소식, 소철, 증공(曾鞏: Zeng Gong)이 구양수에게 바친 제문도 게시되어 있다.

이들은 당나라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과 더불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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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약 1000년의 구양수 수식매(歐陽修 手植梅)와 고매정 (古梅亭)


송나라 때 매화를 사랑한 사람 중 한 사람이 구양수다.

구양수가 직접 심었다는 매화나무는 구매(歐梅: Ou Mei)로 불린다.


이 나무는 살구나무와 매화나무 사이의 교잡종이라 행매(杏梅)라고도 부른다.   

<화중소허(花中巢許)>라는 글은 매화 속에 속세를 멀리하고 숨어 살았던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고매한 정신이 있다는 뜻이다. 


천년 고매를 관찰하려니 가슴이 뛰었다.

단첩 백색 매화 몇 송이 피어 그윽한 향기가 감돌았다.


고매 한그루 관상하기 위해 고매정을 세우고 그 향기를 음미하려고 영향정(影香亭)을 세운 정성이 놀랍다.

매화 한그루를 위한 정원의 아름다움! 그러나 매화나무 기둥에 시멘트 같은 것을 발라 놓아 몹시 아쉽게 느껴졌다. 




고매정(古梅亭)


고매정(古梅亭)은 명나라 가정(嘉靖) 14년(1535) 저주 판관이었던 장명도(張明道: Zhang Ming Dao)가

고매를 관상하기 위하여 세웠다.


원래 이름은 매서당(梅瑞堂: Mei Rui Hall)이다.

1928년 저주의 서법가인 황예오(黃藝五: Huang Yi Wu)가 고매정 뒤편의 바위에

고매정 (古梅亭)이라는 글씨를 각한 다음부터 고매정이라 부른다.



고매정 (古梅亭) 내부




이현당(二賢堂)

취옹정 바로 뒤에 이현당(二賢堂)이 있다.



구양수와 왕우칭(王禹稱)


이현당은 북송 소성(紹聖) 2년 (1095년) 구양수(사진 좌측)와

왕우칭(王禹稱: Wang Yu Chen 954~1001)을 기념하기 위하여 추저우 사람들이 세웠다.


구양수 필적 사본과 <구양문충공전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벽에는 <취옹정기>와 <붕당론>을 새긴 목판이 게시되어 있다.

취옹정 앞에는 비각들이 여럿 있는데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 들에 의해 크게 훼손된 흔적이 보인다.


왕우칭(王禹稱)은 중국문학사 상, 당대(唐代) 고문운동(古文運動)에서

송대(宋代) 시문혁신운동(詩文革新運動)으로 넘어가는 중간 시기인 북송 초기

문단에서 복고파(復古派)의 주도자이자 송대 시문혁신운동의 선구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문이재도(文以載道)’와 ‘문이명도(文以明道)’의 중간적인 ‘전도이명심(傳道而明心)’를 주장하였고,

당시 문단의 대표적인 폐해였던 ‘구지난도(句之難道), 의지난요(義之難曉)’를 반대하여

‘문종자순(文從字順)’의 측면을 강조하는 문학관을 지녔다. 


왕우칭은 강하고 굽히지 않는 성격과 직설적인 태도로 인하여 관직에 있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의 산문 중 정론문이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정치적 성향이 강하면서 개혁적인 성격이 나타나는 글을 창작하였다.


그리고 문학적으로는 당시 사회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풍자적인 글을 창작하였고,

자신의 감정과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였다.


그는 예술적으로는 대비를 절묘하게 사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였고,

묘사를 통해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비유를 사용하여 형상화하였고,

전고를 사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이런 그의 정치적 성향은 후대의 범중엄이 시도한 경력신정(慶歷新政)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문학관은 후대의 구양수가 주도하였던 시문혁신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寒食(한식) / 王禹稱(왕우칭)


今年寒食在商山(금년한식재상산) : 금년 한식을 상산에서 지내노라니
山里風光亦可怜(산리풍광역가령) : 산속의 풍광은 더욱 아름답구나
稚子就花拈蛺蝶(치자취화념협접) : 철없는 아이들 나비를 잡느라고 꽃에게 다가가고
人家依樹系秋千(인가의수계추천) : 여염집 큰 나무 아래엔 그네가 매였구나


郊原曉綠初經雨(교원효록초경우) : 이른 아침 내린 비로 교외의 풀은 더 푸르고
巷陌春陰乍禁煙(항맥춘음사금연) : 봄철 흐린날 저자거리에 밥 짓는 연기 잠시 끊어졌네.
副使官閒莫惆悵(부사관한막추창) : 부사 벼슬이 한가롭다고 한탄하지 말자
酒錢猶有撰碑錢(주전유유찬비전) : 비문 지어주고 받은 술값 아직도 남아있나니.


王禹稱(왕우칭)의 '어느 한식날'
왕우칭은 북송 초기의 사람으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상주의 부사로 쫓겨났다.

그 시절 한식을 맞아 쓴 시다.


한가롭고 아름다운 시골의 봄풍경을 네 가지 핀셋으로 콕 집어냈다.

나비를 잡으려 살며시 다가가는 아이, 집안 마당에 있는 나무에 매어놓은 그네, 첫비를 살짝 맞은 풀빛,

그리고 한식이라 밥을 짓지않아 연기가 끊긴 마을의 산그늘.


쓸쓸한 시절엔 아름다움이 더욱 사무치는 법인가.

그렇게 가만히 풍경을 읊은 뒤 신세한탄이 나오려고 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얼굴 좀 펴게. 어제 동네사람 비석 세우는데 글을 써주고 받은 돈으로 술 한 잔 하면 되지 않는가.

한식인지라 더운밥은 못 먹지만, 대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술을 먹여주니 고마운 일 아닌가. 

村行(촌행) - 시골길 / 王禹稱(왕우칭)


馬穿山徑菊初黃(마천산경국초황) : 말 타고 산길을 가니 국화가 이제 누렇게 피고
信馬悠悠野興長(신마유유야흥장) : 유유히 말 가는대로 길을 맡기니 시골 흥취가 풍긴다
萬壑有聲含晚籟(만학유성함만뢰) : 골짜마다 소리가 들리니 저녁이 오는 소리
數峰無語立斜陽(수봉무어립사양) : 말 없는 산 봉우리 몇 개가 석양 아래 서있구나


棠梨葉落胭脂色(당리엽락연지색) : 팥배나무잎은 연지빛으로 물들어 떨어지고
蕎麥花開白雪香(교맥화개백설향) : 메밀꽃은 흰 눈처럼 피어 향기롭구나
何事吟餘忽惆悵(하사음여홀추창) : 무슨 일로 읊고난 뒤 갑자기 서글퍼 지다니
村橋原樹似吾鄉(촌교원수사오향) : 시골 다리와 들판의 나무들이 내 고향 같구나


春居雜興(춘거잡흥) 其一 / 王禹稱(왕우칭)

兩株桃杏映篱斜(양주도행영리사) : 복숭아 살구나무 두 그루 울타리에 드리워져
妝點商山副使家(장점상산부사가) : 商山 부사집을 장식하네
何事春風容不得(하사춘풍용부득) : 봄바람은 무슨 일로 장식을 허락하지 않는지
和鶯吹折數枝花(화앵취절수지화) : 불어와서 매화가지 부러뜨리고 새는 날려 버리네.


春居雜興(춘거잡흥) 其二 / 王禹稱(왕우칭)

春云如獸复如禽(춘운여수복여금) : 봄 구름은 짐승 같기도 하고 새 모양 같기도 하다
日照風吹淺又深(일조풍취천우심) : 해가 비치고 바람이 불면 옅어졌다가 다시 짙어지고
誰道無心便容与(수도무심편용여) : 누군가 말했지 물욕이 없이 한가롭고 편안한 것 같다고
亦同翻覆小人心(역동번복소인심) : 또 소인의 마음이 이리 저리 뒤집혀 바뀌는것과 같다고






취적청향(翠積淸香)

정자 뒷편에 고매정으로 이어지는 담장에 "취적청향(翠積淸香)"과 "한류소영(寒流疎影)" 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한류소영(寒流疎影)




취옹정(醉翁亭)


중국의 유명한 랑야산 하면 취옹정이고 취옹정하면 구양수(歐陽修 1007~1072) 다.

북송 인종(仁宗) 경력(慶歷) 6년(서기1046)에 화성 지선이 건축하였고

당시 추저우 태수였던 40세의 구양수가 자신의 호인 취옹을 따서 취옹정이란 이름을 지었다.


취옹정은 베이징의 도연정(陶然亭), 장사의 애만정(愛晩亭), 항저우 서호의 호심정(湖心亭)과 더불어

중국 4대 명정(名亭)의 하나이며 천하제일정(天下第一亭)으로 손꼽힌다.

구양수가 '취옹(醉翁)’이란 호를 쓴 이유에 대해서는 그의 <취옹정기(醉翁亭記)>에 잘 나타나 있다.


“……샘 위에 정자가 날개를 펼친 듯 걸려 있는데, 이것이 취옹정(醉翁亭)이다.

정자를 세운 이는 누구인가? 이 산의 스님 지선(智僊)이다.

이 정자의 이름을 지은 이는 누구인가? 태수 자신이 붙인 것이다.

태수는 손님과 함께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는데, 술을 조금만 마셔도 금방 취했고,

또 나이도 가장 많았기에, 자신의 호를 취옹이라 한 것이다.

취옹의 뜻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수간에 있었다.

산수의 즐거움은 마음으로 얻는 것인데 술에 기탁하기 때문이다.

……창백해진 얼굴에 백발을 하고서 왁자지껄한 가운데 술에 취해 쓰러진 것은 태수가 취한 모습이다.……”


술에 약한 구양수가 취옹이란 호를 붙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술에 금방 취했고(醉), 나이가 많았기(翁) 때문인데,

취옹이라고 한 의도는 술에 기탁하여 산수를 즐기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이유와 의도를 비약시키면

술에 취하든 산수에 취하든, 그 무엇에 취하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취옹정기(醉翁亭記) - 구양수(歐陽修)

취옹정기(醉翁亭記)는 구양수(歐陽修)가 저주(滁州) 태수로 좌천되어 생활하고 있던 시기(1046)에 지은 것이다.

당시 구양수가 스스로 취옹(醉翁)이라고 부르며

틈이 날 때마다 랑야산(琅琊山)에 있는 취옹정(醉翁亭)에 가서 노닌 감회를 묘사한 글이다.


이 글이 나오자 견해의 독창성과 문체의 참신성으로 인해서 문인들이 서로 다투어 베꼈으며,

상인들도 이 글을 구하여 세관에 바치면 세금을 면할 정도였다고 한다.


구양수는 저주의 태수로 있으면서 랑야산의 계곡에 성심과 취옹의 두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이 글은 그 중 하나인 취옹정의 유래와 그 곳의 경치, 그리고 자신의 생활과 정취를 기술한 것이다.


구양수의 문장은 간결하며 객관적인 묘사에 뛰어나다.

이 글 역시 간결하면서도 생동적인 구양수 특유의 멋이 엿보인다.


 마지막 부분의 “禽鳥知山林之樂, 而不知人之樂. 人知從太守遊而樂, 而不知太守之樂其樂也

- "새들은 산림에서 사는 즐거움은 알지만 사람들의 즐거움은 알지 못하고

사람들은 태수를 따라다니며 노는 즐거움은 알지만

태수가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줄은 모른다” -

는 그의 애민사상이 반영된 구절로 인구에 회자하는 천고의 명구이다.


環滁皆山也. 其西南諸峯, 林壑尤美. 望之蔚然而深秀者, 琅琊也. 山行六七里, 漸聞水聲潺潺. 而瀉出於兩峯之間者, 釀泉也. 峯回路轉, 有亭翼然, 臨於泉上者, 醉翁亭也. 作亭者誰, 山之僧智僊也. 名之者誰, 太守自謂也. 太守與客來飮於此, 飮少輒醉, 而年又最高, 故自號曰, “醉翁也.” 醉翁之意不在酒, 在乎山水之間也. 山水之樂, 得之心而寓之酒也.

若夫日出而林霏開, 雲歸而巖穴暝, 晦明變化者, 山間之朝暮也. 野芳發而幽香, 佳木秀而繁陰, 風霜高潔, 水落而石出者, 山間之四時也. 朝而往, 暮而歸, 四時之景不同, 而樂亦無窮也.

至於負者歌於塗, 行者休於樹, 前者呼, 後者應, 傴僂提攜, 往來而不絶者, 滁人遊也. 臨谿而漁, 谿深而魚肥. 釀泉爲酒, 泉香而酒洌. 山肴野蔌, 雜然而前陳者, 太守宴也. 宴酣之樂, 非絲非竹. 射者中, 弈者勝, 觥籌交錯, 起坐而諠譁者, 衆賓懽也. 蒼顔白髮, 頹然乎其間者, 太守醉也.

已而夕陽在山, 人影散亂, 太守歸而賓客從也. 樹林陰翳, 鳴聲上下, 遊人去而禽鳥樂也. 然而禽鳥知山林之樂, 而不知人之樂. 人知從太守遊而樂, 而不知太守之樂其樂也. 醉能同其樂, 醒能述以文者, 太守也. 太守謂誰. 廬陵歐陽修也.


環滁皆山也(환저개산야)라 : 저주(滁州) 지방은 모두 산으로 에워싸져 있다.
其西南諸峰(기서남제봉)에 : 그 중에서도 서남쪽에 있는 여러 봉우리들은
林壑尤美(임학우미)하여 : 숲과 계곡이 특히 아름다워,
望之蔚然而深秀者(망지울연이심수자)는 : 멀리서 바라보아 울울창창 그윽하고 빼어난 것이
瑯王耶也(낭왕야야)라 : 바로 곧 낭야산(琅琊山)이니라
山行六七里(산행육칠리)에 : 산길을 육 칠리쯤 걸어 올라가면
漸聞水聲潺潺(점문수성잔잔)하여 : 물소리가 졸졸 차츰 크게 들려오니,
而瀉出于兩峰之間者(이사출우량봉지간자)는 : 두 봉우리 사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釀泉也(양천야)라 : 바로 곧 양천(釀泉)이니라
峰回路轉(봉회로전)에 : 봉우리를 도니 산길 구불구불,
有亭翼然(유정익연)하여 : 날개를 활짝 펼친 새처럼 정자가 있어
臨于泉上者(임우천상자)는 : 샘 위에 임해있는 것이
醉翁亭也(취옹정야)라 : 바로 곧 취옹정(醉翁亭)이다.


作亭者誰(작정자수)으로 : 이 정자를 지은 자는 누구인가
山之僧智仙也(산지승지선야)할새 : 산에 사는 승려 지선(智僊)이었다.
名之者誰(명지자수)오 : 정자에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인가
太守自謂也(태수자위야)라 : 태수가 스스로 정자이름을 지어불렀다
太守與客(태수여객)으로 : 태수는 손님들과 함께
來飮于此(래음우차)할새 : 여기에 와서
飮少輒醉(음소첩취)하고 : 술을 마시곤 하였는데, 조금만 마셔도 취하고
而年又最高(이년우최고)라 : 나이도 제일 많은지라
故自號曰醉翁也(고자호왈취옹야)라 : 스스로 취옹(醉翁)이라 불렀다.
醉翁之意(취옹지의)는 : 취옹의 뜻은
不在酒(부재주)하고 : 술에 있지 아니하고 .
在乎山水之間也(재호산수지간야)라 : 산수지간에 있었으니,
山水之樂(산수지락)을 : 산수간에 노니는 즐거움은
得之心而寓之酒也(득지심이우지주야)라 : 마음으로 이것을 얻어 술에 기탁한 것이었다


若夫日出而林霏開(약부일출이림비개)하고 : 해 떠오르면 숲속의 안개비가 걷히고 
雲歸而巖穴暝(운귀이암혈명)하여 : 저녁 구름이 돌아오면 바위구멍이 어두워진다
晦明變化者(회명변화자)는 : 어둡고 밝아지는 변화를 보여주는 이것은,
山間之朝暮也(산간지조모야)라 : 바로 산속의 아침 저녁이다.
野芳發而幽香(야방발이유향)하고 : 들에 꽃이 피니 그윽한 향기나고
佳木秀而繁陰(가목수이번음)하며 : 어여쁜 초목은 빼어나 무성한 녹음지고,
風霜高潔(풍상고결)하고 : 바람과 서리는 높고 깨끗하고
水落而石出者(수락이석출자)는 : 수량이 줄어들어 앙상한 모습을 드러낸 바위들
山間之四時也(산간지사시야)라 : 바로 산간의 사시의 풍광이다
朝而往(조이왕)하고 : 매일같이 아침이면 이 산속을 찾아가고
暮而歸(모이귀)에 : 저녁이면 돌아오곤 하였으나,
四時之景(사시지경)이 : 사시 사철의 풍광이
不同而樂亦無窮也(부동이락역무궁야)라 : 저마다 다른지라 즐거움은 끝이 없었다.
 
至於負者歌于途(가우도지어부자)하며 : 짐 지고 가는 자는 길에서 노래부르고
行者休于樹(행자휴우수)하고 : 지나는 사람들은 나무 밑에서 쉬는데 이르러서도
前者呼(전자호)하면 : 앞서가는 자가 소리쳐 부르면
後者應(후자응)하여 : 뒤에 가는 자는 응한다
傴僂提携(구루제휴)하여 : 구부정 노인네는 손을 잡고
往來而不絶者(왕래이부절자)는 : 오고 가며 끊없이 이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滁人遊也(저인유야)라 : 바로 저주(滁州) 사는 백성들이 유람나온 것이었다
臨溪而漁(임계이어)하니 : 계곡에 내려가서 물고기를 잡으니
溪深而魚肥(계심이어비)하고 : 물이 깊어서 물고기는 살찌고
釀泉爲酒(양천위주)하니 : 양천(釀泉)으로 술을 빚으니
泉香而酒洌(천향이주렬)이라 : 샘물이 향기로와 술이 맑고 차가웠다.
山肴野蔌(산효야속)이 : 산나물 안주와 들나물을
雜然而前陳者(잡연이전진자)는 : 잡다하게 앞에 벌여 놓은 것은 
太守宴也(태수연야)라 : 바로 태수가 베푼 연회이다
宴酣之樂(연감지락)은 : 연회에서 술마시는 즐거움은
非絲非竹(비사비죽)이라 : 현악기와 관악기가 필요 없었다
射者中(사자중)하며 : 활쏘는 자들은 과녁을 맞추고 
奕者勝(혁자승)하고 : 바둑을 두는 자는 이기려 하고
觥籌交錯(굉주교착)하여 : 벌주 잔이 큰 쇠뿔 잔을 세는 셈가지가 어지럽게 뒤섞이고
起坐而諠譁者(기좌이훤화자)는 : 일어났다 앉았다가 시끌벅쩍한 것은
衆賓歡也(중빈환야)라 : 모인 손님들이 즐거워 하기 때문이다.
蒼顔白髮(창안백발)이 : 푸른 얼굴에 백발한 늙은이가
頹乎其間者(퇴호기간자)는 : 그 사이에 쓰러져 있는 것은
太守醉也(태수취야)라 : 태수가 취해서 쓰러져 있는 것이다


已而夕陽在山(이이석양재산)하고 : 어느 사이에 석양이 서산에 있고
人影散亂(인영산란)은 : 사람들의 그림자는 어지럽게 흩어지니,
太守歸而賓客從也(태수귀이빈객종야)요 : 태수가 돌아가니 손님들이 행차를 따라 돌아가는 것이었다
樹林陰翳(수림음예)하여 : 숲속이 어둑어둑 해지고,
鳴聲上下(명성상하)는  : 아래 위로 지저귀는 소리는
遊人去而禽鳥樂也(유인거이금조락야)라 : 바로 곧 유람나온 사람들이 사라져 새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다.
然而禽鳥知山林之樂(지산림지락연이금조)이오 : 하지만 뭇새들은 숲속에서 노니는 즐거움은 알지언정
而不知人之樂(이부지인지락)하고 : 사람들의 즐거움은 알지 못하고,
人知從太守遊而樂(인지종태수유이락)이오 : 사람들은 태수를 따라 유람나온 즐거움은 알지언정
而不知太守之樂其樂也(이부지태수지락기락야)라 : 태수가 그들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
醉能同其樂(취능동기락)하고 : 술이 취해서는 그들의 즐거움을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할 줄 알고,
醒能述以文者(성능술이문자)는 : 술에서 깨어나서는 글로써 그 마음을 표현해낼 수 있는 이는
太守也(태수야)라 : 곧 태수이라
太守謂誰(태수위수)오 : 태수는 누구라 하나
廬陵歐陽修也(여릉구양수야)라 : 여릉 땅의 구양수이다.



양천(釀泉)


'釀泉'이 '讓泉'으로 씌여 있다.


이 지방에서는 '釀'과 '讓'이 같은 발음이기 때문에 의미가 더 나은 '讓'자를 쓴다고 한다.

'파리천(玻璃泉)'이라고도 한다.


송나라 때 구양수(歐陽脩, 1007~1073)가 저주(滁州, 지금의 안훼이성[安徽省]에 속함)에 유배되어 태수(太守)를 지낼 때

그 지역 낭야산(琅琊山) 취옹정(醉翁亭)에서 자주 연회를 열곤 했는데, 바로 그곳에 있는 샘이다.


구양수는 이 샘이 돌산이 빚어낸 것이라고 여겨 '양천(釀泉)'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의 「취옹정기(醉翁亭記)」에 따르면 "이 샘은 물이 맑고 향긋해서 술을 담그면 맛이 훌륭하다[酿泉为酒,泉香而酒冽]."고 쓴 바 있다.



자매천 


 양천을 '자매천'이라고도 한다.

우측이 물이 솟아나오는 언니천이고, 좌측 동생천으로 물을 흘려 보내주어 똑같이 나누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의재정(意在亭)


취옹정 서쪽에 의재정(意在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양천(釀泉) 샘물을 끌어들여 정자 안의 좁고 구불구불한 도랑을 흘러 밖으로 흐르게 했다. 


이 도랑을 '구곡류상(九曲流觴)'이라고 불렀다.

여러 선비들과 함께 그 도랑 옆에 줄지어 앉아 시 짓기나 투호(投壺), 바둑 등의 놀이를 즐기며

도랑에 술잔을 띄워 흘리며 앉은 순서대로 술을 마시곤 했다고 한다.


포석정(鮑石亭)


의재정(意在亭)을 보면서 나는 경주의 포석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정원 시설물. 돌로 구불구불한 도랑을 타원형으로 만들고

그 도랑을 따라 물이 흐르게 만든 것으로, 신라귀족들은 이 물줄기의 둘레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화려한 연회를 벌였다.


기록상으로는 880년대에 신라 헌강왕이 이곳에서 놀았다는 것이 처음 나타나,

8세기 이전부터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927년 11월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화려한 연회를 벌이던 중

뜻하지 않은 후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잡혀 죽었다고 전하는 곳이다.

의재정(意在亭)이 1561년에 세워졌으니 포석정은 이보다 최소 680 여 년 전에 세워졌다.





랑야산(琅山 lang ya shan)


안후이성() 추저우시(, 저주시) 서쪽에 있는 랑야산(),

청시호(西), 구산호(), 삼고( : , 驿, )의 4대 경구로 이루어진 면적 115㎢의 국가급풍경명승구(2차, 1988).


봉우리들의 형상이 이리의 이빨처럼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솟아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6개의 봉우리가 5개의 그룹으로 모여 있다.


2천여 년 전 전국시대()의 랑산징슈[]는 바로 당시 연국()의 십경() 중 하나였다.

1941년 항일전쟁 중 팔로군()의 다섯 용사들이 이곳에서 저항하다 절벽으로 투신했다.


경내 주요 산봉우리로는 마퉈령(, 마타령), 펑황산(, 봉황산), 다펑산(, 대펑산),

샤오펑산( 소풍산), 랑야산() 등이 있으며 무성한 숲과 동굴, 호수 및 하천 경관 위주 지역으로

경내에는 동식물이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다. 


랑야산()에는 인문경관이 풍부하여 당대의 낭야사()가 있으며, 중국 사대명정()의 하나인 취옹정()은

풍악정()과 더불어 구양수()와 소동파()가 남긴 글로 유명하다.


고관애(), 고역도(驿), 고전장()의 3고경구(), 복가돈고유지()에는

대량의 고적과 문물이 남아있으며 이외에도 저명한 비석으로 당 오도자()가 그린 관음상(),

당의 이유경() 등의 마애석각, 원대 수백여 개소의 마애석각 등이 남아 있다.


山(랑야산) / 歐陽修(구양수)


石屛自倚浮雲外(석병자의부운외) 돌병풍 뜬 구름 밖에 서 있고
石路久無人跡行(석로구무인적행) 돌길에는 오랫동안 인적이 드물다
我來携酒醉其下(아래휴주취기하) 내가 술 가져와 그 아래서 취하여
臥看千峰秋月明(와간천봉추월명) 천 개의 봉우리, 밝은 달 누워서 본다




관광객 주의사항
입구 매표소 옆 안내판에 자국어[漢字] 다음 두 번째로 한글, 세 번째로 영어 등으로 씌여있다. 일본어는 없다.



랑야산 입구에서 취옹정까지 오르막으로 약 2km 남짓 되어 전동차를 타고 올라간다


구양수(歐陽脩, 1007년 ~ 1072년)

중국 송나라 인종 ~ 신종 때의 정치가ㆍ시인ㆍ문학자ㆍ역사학자. 자는 영숙(永叔)ㆍ취옹(醉翁)ㆍ육일거사(六一居士) .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길주(吉州) 여릉(廬陵) (현재의 장시 성 지안)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4살 때 쓰촨성 지방관이었던 부친 구양관(歐陽觀)을 여의었다.

이후 어머니를 따라 백부 구양엽(歐陽曄)이 추관(推官)으로 있는 수주(隨州, 후베이)로 가서 생활하며 빈궁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정규 교육에 의하지 않고 독학하였는데 어려서부터 구양수는 한유의 깊고 예리한 문장에 매력을 느껴 그를 추앙했다.

1023년 17세 때 처음으로 수주(随州)의 지방 고시에 참가하지만 그의 용운(用韻)이 관운(官韻)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패했다.


그 뒤 1028년 명사인 서언(胥偃)을 찾아가 자신의 문장을 보여주었다.

서언은 구양수의 웅대한 문장에 감탄해 그를 자신의 문하에 받아들였다.


그해 겨울 서언과 경사로 함께 가서 춘계국자감고시(春季國子監考試)에 응시한 구양수는 수석의 영광을 얻었고

가을에는 국학(國學)에 응시해 또 수석을 차지한다.


1030년(천성 (북송) 8년) 서른 살 때 진사에 급제하고 서언의 둘째 딸과 혼인하였다.

첫 임지인 낙양(落陽)은 문학적인 정취가 높은 곳으로 구양수는 이곳에서 문인들과 어울리며

술과 여자 그리고 시를 즐기는 호방한 기질을 보여주었다.


고관(高官)으로 출세의 길이 열려있었지만, 이런 환경에서 가꿔진 독립 사상은 그의 성품 중의 하나로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1033년 아내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1034년 양씨와 재혼하였다.


하지만 1036년 양씨마저 곧 사망하는 불행을 겪었고 설씨와 다시 혼인하였다.

그 후 관각교감(館閣校勘) 등을 역임하지만, 1036년(경우 (북송) 3년) 개혁파 범중엄(范仲淹)을 월권하면서까지 변호했기에

이것으로 당시 재상이었던 여이간에 의해 이능(夷陵)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범중엄이 조정에서 배척을 당한 후 신정을 지지하던 대신 부필(富弼)도 파직당했고,

그들을 변호한 한기도 연루되어 좌천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범중엄을 동정하던 적지 않은 사람들도 더 이상 그를 변호하지 못했다.

그러나 구양수(歐陽修)만은 과감하게 인종에게 상소를 올려서 범중엄을 변호했다.


“자고로 악인이 선인을 모함할 때는 언제나 붕당을 하여 권세를 독점했다고 없는 죄를 덮어씌우는 법이옵니다.

범중엄은 보기 드문 인재인데 어째서 그의 직을 파면시켜야 하옵니까?

악인의 말을 듣고 충신을 파면시킨다면 이는 충신을 가슴 아프게 하고 간신을 기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인 줄로 아옵니다.”


 1043년 인종은 언로(言路)를 확장하려고 간관(諫官)을 늘리면서 구양수 등을 지간원(知諫院)으로 삼고

여정(余靖)을 우정언(右正言)으로 임명하자 같은 해 4월에 구양수는 경사(京師)로 돌아온다.


약 십년의 지방 근무 후, 중앙에 복귀해 간관에 임명된다.

그러다가 이번에도 범중엄의 신정을 지지하는 발언을 해서 조정 권신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들은 있지도 않는 죄목을 구양수에게 씌워 저주(滁州, 안휘성 저주시)로 좌천시켰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저주는 경치가 수려한 고장이었다.


저주로 좌천된 구양수는 틈틈이 명소들을 찾아다니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그 당시 어느 화상이 저주의 낭야산(琅琊山)에 유람객들이 앉아 쉴 수 있는 정자를 세웠는데

구양수는 산에 올라 산천 구경을 한 다음에 늘 그 정자에서 술을 마시며 글을 지었다.


그는 자신을 ‘취옹(醉翁, 술 취한 늙은이)’이라고 부르고 그 정자를 ‘취옹정(醉翁亭)’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취옹정기(醉翁亭記)」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중국 문학사의 명작이다.


몇 년 후 다시 한 번 중앙에 복귀해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다.

1054년 몇 년 만에 구양수를 만난 인종은 그의 노쇠한 외모와 상황을 측은히 여겨 극진히 대우하면서 이부(吏部)의 유내전(流內銓)에 임명했다.


1057년 (가후 2년) 권지례부공거(權知禮部貢擧)에 오르고 1058년에는 포증에 이어 개봉 부윤(府尹)의 임무에 종사했다.

한번은 과거시험을 책임지는 주시관(主試官)에 임명되자, 인재를 선발하고 문풍을 개혁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실속 없이 화려한 미사여구만 늘어놓은 글들을 모두 낙방시켰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과거시험의 문풍은 즉각 달라졌으며 모두들 내용이 충실하고 문풍이 수수한 글들을 쓰려고 열심이었다.

이처럼 구양수는 문풍을 대대적으로 개혁하는 데 진력했을 뿐만 아니라 인재를 등용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이름이 없던 인재들이 그의 발견과 추천으로 등용되어 나중에는 이름을 날렸는데,

그중에 유명한 사람들로는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소순(蘇洵)과 그의 두 아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 등이 있다.

이들 5명과 구양수, 그리고 당나라의 한유와 유종원, 이렇게 8명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라고 한다.


당시 구양수의 정적들은 그의 기용에 두려움을 느끼고 각종 모함과 구설(口舌)을 만들었지만,

구양수는 경사(京師)에 지속으로 머무르면서 《당서》 편찬에 참여하고 한림학사겸사관수찬[翰林學士兼史館修撰]으로 승진한다.


그 후 추밀부사(樞密副使)ㆍ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副宰相)〕에 오르고 소순ㆍ왕안석 등을 등용했다.

왕안석의 신법을 전부터 지지했지만, 실제로 신법이 실시되자 역으로 청묘법을 대상으로 해 엄격한 논고를 지켜보는 등

가장 강력한 반대파의 한 사람이 되어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 다음 해인 1072년(희녕 5년), 은둔 생활하면서 영주(안후이 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양수는 66세로 천명을 다했고 2년 후에 조정에서 시호 '문충(文忠)'을 내렸다.

문충은 그가 일생 달성한 문학과 관련된 위업의 저력을 알 수 있는 상징이다.


산문에서는 한유의 예(例)를 모방하고 소위 고문 부흥 운동을 추진했다.

저주(滁州)의 자연이나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 〈醉翁亭記(취옹정기)〉는 아주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고

중국의 기행문 중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운문으로는 시(詩)와 사(詞)를 모두 쓰고 뽐내지 않고 재미있는 작풍이다.

시는 만당(晩唐)의 현란(絢爛)한 문체를 피하고 성당(盛唐)의 실질에 부합하고 강건(剛健)한 위풍(威風)을 따랐다.


구양수는 사(詞)로도 유명한데 특히 채상자(采桑子)를 위해 만들어진 사(詞)인

〈西湖好(서호호)〉 일련(一連)은 그 양식이 표준화해 사(詞) 대중화에 대공헌했다.


사람들은 작가로서의 구양수를 유학(儒學)과 밀접하다고 생각해서 그와 관련한 대부분을 ‘개인에 관계된 것보다는 사회에 관계된 것’에,

‘해이(解弛)한 것보다는 경직되고 긴장(緊張)된 것’에, ‘유흥성을 띤 것보다는 건설성을 띤 것’에 무게를 둔다.


틀린 것은 아니다. 구양수의 시문으로써 그를 이해한다면 맞는 말이다.

별다른 배경 없이 상식만을 가지고 구양수를 본다면, 구양수는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처럼 보이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한 사람을 제삼(第三)의 눈으로 보아낸다는 것은 대단히 제한될 뿐만 아니라,

지금은 아쉬울 것이 없어도 앞으로는 아쉬울 것이 있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특히 심리의 저변은 본인만이 알기에 옆에서 단정해 무어라 말할 계제(階梯)도 아닌데

구양수는 사(詞)로써 아쉬운 소리와 사람들이 보지 못한 많은 심정을 쏟아내듯이

사(詞)로써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이면의 감정을 상당부 노출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배경 때문이었다.


사(詞)는 작가의 마음 표현에 가장 유리한 수단이었고 흥행에 점차 성공해 구양수가 살던 시기에는 지체의 고하에 관계없이

모두 애용하는 문학의 형식이 돼서 아무리 구양수가 공자와 맹자를 계승하고 한유의 도통(道統)을 이은 사람이라고 해도

기녀와의 사랑에서 느끼는 세심한 희열과 비애를 사(詞) 형식을 빌려 거침없이 쓰는 것이 결격이나 비난의 사유가 되지 않았다.


당황스럽고 민망(憫惘)한 내용이나 표현도 적잖게 보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모습이 호소력이 있다.

결국 구양수 문학 세계의 전체에 걸친 면모를 파악하려면 그의 작품을 망라해야만 하고 사(詞)는

구양수의 문학을 대상으로 한 오해를 일소(一掃)하고 환기(喚起)할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관건(關鍵)이 된다.


역사가로서 구양수는 지방 근무 중에 신오대사를 편찬하고 중앙에 복귀해 송기 등과 신당서를 편찬하였다.

이것은 당시 유명한 경학자였던 류창(劉敞)과 같이 작업해 범례를 찾게 만들어진 것으로,

춘추 학문상 색채가 강한 근엄(謹嚴)한 스타일을 견지(堅持)한 책으로서 평가됐으며,

금석문 수집을 좋아해 《集古録(집고록)》을 정리, 사료를 편찬하는 방법으로서

금석문의 활용을 확립하는 송 대의 역사 수법(특히 금석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구양수는 다방면에 관심과 흥미를 가졌는데 바둑에도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특히 서예(書藝)에 조예가 깊어

'구양수체'라느 서체가 있을 만큼 뛰어났다.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美文調) 시문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그의 문장과 시는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으며 후대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로는 매요신(梅堯臣)과 겨루었고, 문(文)으로는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송대의 고문(古文)의 위치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전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의 편자이기도 하며,

《오대사령관전지서(五代史伶官傳之序)》를 비롯하여 많은 명문을 남겼다.







劉禹錫(유우석 772~842)


늘 평온하지만은 않았던 당(唐)나라 때의 일이다.

‘안사(安史)의 난’이라는 내전이 벌어져 국가의 기운이 급격히 기울어 수많은 백성들이 참담한 상처를 입었다.


안으로는 성정이 음험한 환관들에 의해 졸렬한 정치가 펼쳐지기도 했다.

지방에서는 약해진 중앙 왕실의 허점을 파고드는 호족 세력의 발호가 그치질 않았다.

당 왕실은 국력이 최고조를 발하던 성당(盛唐) 시기를 보낸 뒤 점차 쇠락의 길로접어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자(字)가 몽득(夢得)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은 21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문재(文才)가 뛰어나며 당대 천재소리를 들었던 문인이자 정치가였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젊은 관료로서 왕숙문(王叔文)·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정치 개혁에 나섰으나 실패하여 지방의 하급관리로 좌천되었다.

권세를 독차지했던 정계의 실력자들에게는 매우 불리했던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그들에게 밀려나 지금의 중국 동남부 안후이(安徽)성 조그만 현의 ‘통판(通判)’이란 자리를 받는다.

이 벼슬은 남송(南宋)에 가서야 나름대로 지방관을 규찰하는 권한을 부여받는 직위지만 

당나라 시절에는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지방의 한직이었다.


중앙 왕실에서 권력 다툼에 밀렸다 싶은 그를 환대해주는 지방관은 없었다.

그의 상사는 골탕까지 먹이려 든다. 통판이란 벼슬에게 내주는 세 칸짜리 관사(官舍)를 두고서다.


지방관은 갖은 구실을 대서 그의 거처를 두 번 더 옮기도록 한다.

옮기면 옮길수록 그의 관사는 좁아지고 형편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받은 거처는 침대 하나에 책상과 의자 한 벌인 작은 방. 몸뚱이 하나만 간신히 들여놓을 하찮은 거처였다.


그의 유명한 문장 ‘누실명(陋室銘)’은  이 무렵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지은 자계(自戒)의 글이다.

글 제목은 ‘누추한 거처에서의 새김’이라는 뜻이다.


“산이 높지 않더라도 그 안에 신선이 있으면 좋은 산일 터, 물이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한 물이리라.

이 집이 누추하더라도 내가 닦은 덕으로 그윽할지니(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斯是陋室, 惟吾德馨)….”


보기에도 한심했을 거처, 즉 '누실'에서 내보이는 유우석의 기개가 가상하다.

자신이 놓인 환경에 결코 굴하지 않는 자신감은 스스로의 덕에서 비롯하는 것일 게다.


그 덕이란 반드시 도덕적인 기준을 이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유우석 본인의 속을 가득 채우는 실력과 사람 됨됨이다.


陋室銘(누실명) / 劉禹錫


水不在深有龍則靈(수부재심유룡칙령)
斯是陋室惟吾德馨(사시누실유오덕형)
苔痕上階綠草色入簾靑(태흔상계록초색입염청)
談笑有鴻儒往來無白丁(담소유홍유왕래무백정)
可以調素琴閱金經(가이조소금열금경)
無絲竹之亂耳(무사죽지란이)
無案牘之勞形(무안독지로형)
南陽諸葛廬西蜀子雲亭(남양제갈려서촉자운정)

孔子云何陋之有(공자운하누지유)


산은 높아서가아니라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요
물은 깊어서가 아니라 용이 살면 영험하다 이르네.
이곳은 비록 누추하나 오직 나의 덕은 향기롭도다.
계단은 이끼 끼어 푸르고 풀빛은 주렴 발을 푸르게 비추는데
훌륭한 선비와 담소를 나누는데 왕래하는 비천한 사람은 없고
거문고를 타고 좋은 경전을 읽을 수 있구나.
음악 소리 귀를 어지럽히지 않고, 관청의 문서를 읽는 노고도 없으니
남양의 諸葛亮(제갈량)의 초가집이요, 西蜀(서촉) 양자운의 정자와 같도다.
공자도 말하였지, 군자가 살고 있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으리오. 라고....


陋 [lòu]                 
1.[형용사] (사는 곳이) 협소하다. 좁다. 누추하다. 초라하다.
2.[형용사] 견문이 좁다〔적다〕. 식견이 천박하다.
3.[형용사] 미개한. 문명화되지 못한〔않은〕. 좋지 않은. 케케묵다.


室 [shì]              
1.[명사] 실. 학교·기관·공장 등의 내부 업무 단위
2.[명사] 집. 실. [기관(器官)·기계 등의 내부 공간]
3.[명사] 방.


铭 [míng] 번체(銘) 새길 명
1.[명사] 명문. [금석(金石)이나 기명(器皿) 따위에 새겨 놓은 글]
2.[명사] 명. [금석(金石)·기물(器物)·비석 따위에 남의 공적을 찬양하는 내용이나 사물의 ...
3.[동사] (기물 위에 기념하기 위한 문자를) 새기다.


* 陋室: [lòushì] 누추하고 보잘것 없는 집.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 铭:古代 器物에 새겨 자기를 警戒하거나 功德을 진술하는 文字를 “铭”이라 하고, 후에 一种의 文体가 되었다.

이러한 文体는 일반적으로 모두 對句를 사용하고,句式은 비교적 整齐되고,

朗朗上口(시문 등을 낭독할 때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고 유창하다.)하다.


* 在(zài): ~에 있다. 动词。
* 名(míng):出名,著名,名词가 动词로 작용한다.
* 灵(líng): (靈) 신령 령 1.[형용사] 총명하다. 기민하다. 영리하다.

2.[형용사] 재빠르다. 날쌔다. 날래다. 3.[형용사] 영험하다. 신통하다. 효력이〔효과가〕 있다.


* 斯:指示代词,此,这。是:~이다. 肯定을 표하는 判断动词.
* 馨 [xīn] 향기 형 1.[명사][문어] 꽃다운 향기. 분방(芬芳). 형향(馨香). 2.[명사][문어] 멀리 퍼지는 향기. 여기서는 品德이 高尚함을 말한다. 《尚书·君陈》:“黍稷非馨,明德惟馨。”。
* 苔痕上阶绿,草色入帘青:이끼 흔적이 계단 위에까지 자라고; 草色이 발안으로 비쳐 들어 푸르다.
* 鸿儒 [hóng rú] : 大儒, 여기서는 博学한 사람을 말한다. 鸿:“洪”과 같고,儒는 옛날 读书人을 말한다.
* 白丁 : 平民. 여기서는 어떤 学问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 调[tiáo]素琴:装饰을 하지 않은 琴을 弹奏하는 것을 말한다. 调:고르다. 조절하다. 여기서는 琴을 튕기는 것을 말한다.

素琴:장식을 하지 않은 琴
* 金经:지금도 学术界에는 여전히 争议가 존재하는데, 어떤 学者는 佛经(金刚经)이라 하고,

어떤 학자는 装饰이 精美한 经典(四书五经)으로 보고 있다. 金:珍贵한 것.
* 丝竹:琴瑟([qínsè] 거문고와 비파)、乐器의 总称, “丝”는 弦乐器를, “竹”은 管乐器를 말한다. 여기서는 奏乐의 소리를 말한다.


* 之:语气助词,不译。주어와 서술어 사이에 사용하고,구절의 독립성을 없앤다.
* 乱耳:귀를 어지럽히다. 乱:形容词의 使动用法,使……乱,扰乱([rǎoluàn] 혼란시키다. 어지럽히다. 뒤죽박죽되게 하다. 어수선하게 하다.)
* 案牍 [àndú] : 官府의 公文, 文书.
* 劳形 [láoxíng] 身体를 피곤하게 하다. 劳:形容词의 使动用法,使……劳累. 形:形体、身体.
* 南阳:地名,지금의 河南省 南阳市. 诸葛亮이 出山하기 前에 일찍이 南阳 卧龙岗에서 隐居하고 농사를 지었다.


* 南阳诸葛庐,西蜀子云亭 : 南阳에는 诸葛亮의 草庐가 있고, 西蜀에는 扬子云의 亭子가 있다.

이 말의 의미는 诸葛庐과 子云亭 모두 남루하지만 居住하는 사람이 매우 有名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诸葛亮,字는 孔明,三国时 蜀汉의 丞相,著名한 政治家 및 军事家, 出仕前에 南阳卧龙岗에 隐居하였다.

扬雄,字는 子云,西汉时의 文学家,蜀郡 成都人. 庐:남루한 작은 집


* 孔子云:孔子说,云在文言文中一般都指说。选自《论语·子罕》篇:“君子居之,何陋之有?” 作者在此去掉君子居之,体现他谦虚的品格。
* 何陋之有:즉 “有何之陋”,宾语前置에 속한다. 之,助词,强烈한 反问을 표시하고,宾语前置의 标志는 不译한다.

 全句를 번역하면: 무슨 남루함이 있는가? 孔子가 말한 그 구절은 《论语·子罕》篇에 보인다. :

 “君子居之,何陋之有?” 여기서는 孔子의 말로 자기 스스로가 “君子”임을 비유하고,全文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화룡점정하고,全文에서 주제를 반영하는 어구이다.
* 谈笑有鸿儒:谈笑에는 学识渊博한 사람들이 있다.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가슴 속 누실은 한 개쯤은 있을 수 있다.

그게 학벌이든 신체적인 결함이든 남에게 자랑스레 밝히지 못할 곡절 하나씩은 있을 수 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을 어떻게 채우느냐다.


누실의 반대어는 고대광실(高臺廣室)이리라. 그

러나 보기에 호화로운 집에 몸을 들이더라도 됨됨이와 교양의 수준이 별 볼 일 없다면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할 수 없는 법이다.


‘누실陋室'은 '누추한 집'이라는 뜻이며,

'명(銘)'은 대개 쇠북이나 솥, 비석 따위에 스스로 경계하거나 남의 공덕을 길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새긴 글을 말한다.


작자는 자신이 놓인 초라한 환경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드러내면서,

일세를 풍미한 촉나라의 제갈량(諸葛亮)과 한나라의 양웅(揚雄)이 살던 초라한 집을 언급하여 자부심을 높이고 있다.


나아가 마지막 구절에서는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을 그와 같은 군자(君子)로 끌어올리고 있다.

《논어(論語)》의 <자한(子罕)>편에 공자가 구이(九夷) 땅에 거하려고 하였을 때 누군가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하자

공자는 "군자가 사는 곳에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구절이 있다.


이후 배도(裵度)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태자빈객 겸 검교예부상서가 되어 세간에서는 '유빈객'(劉賓客)으로 불렸다.

유종원(柳宗元)과 교분이 매우 두터워서 '유유'(劉柳)라고 병칭되기도 했으며,

항상 백거이(白居易)와 시문(詩文)을 주고받는 등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유백'(劉白)이라고도 병칭되었다.


그의 시는 통속적이면서도 청신하며 〈죽지사 竹枝詞〉가 유명하다.

철학저작인 〈천론 天論〉에서는 천·인(天人)의 구별에 대해 논증했다.


즉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음덕설(陰德說)을 반박하고 '하늘과 인간은 상승(相勝)한다'는 설과

'상용(相用)된다'는 설을 주장하여 하늘이 인간 세상의 길흉화복을 더이상 주재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유신론(有神論)에 대한 근원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즉 법제가 잘 행해져서 상벌이 분명하다면 사람들은 천명(天命)에 바라는 것이 없겠지만,

만일 법제가 흐뜨러져 있어서 상벌이 분명하지 않다면 사람들은 오로지 천명에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말년에 불교에 대해서도 타협적인 자세를 보였다.

저서로는 유빈객집(劉賓客集) <유몽득집(劉夢得集)이라고도 함>이 있다.












장강(長江)과 착월대(捉月臺)   동영상 출처: EBS
임종가(臨終歌) / 李白 

大鵬飛兮振八裔(대붕비혜진팔예) 온 천지 진동시키며 날던 대붕이 中天儶兮力不濟(중천최혜력부제) 하늘 중간에서 날개가 꺽였구나 余風激兮萬世(여풍격혜만세) 그 바람이 오랜 세월 동안 일렁이고 遊扶桑兮掛左襼(유부상혜괘좌예)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 後人得之傳此(후인득지전차) 후세 사람들이 이를 알고 전한다 해도 仲尼亡兮誰爲出涕(중니망혜수위출체) 공자가 이 세상 뜬 이후이니 누가 눈물 흘려줄꼬

- 대붕(大鵬): 붕의 날개가 몇 천 리에 이른다는 새
- 부상(扶桑): 중국 전설에서 해가 뜨는 동쪽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무
이태백은 임종시에도 장자의 대붕을 떠올렸으며, 자신과 대붕을 동일시 했다.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는 부분에서는 대붕이 장삼을 입은 이백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백은 이처럼 대붕을 꿈꾸었다. 

월하독작(月下獨酌) / 李白

[1]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활짝 핀 꽃 속에서 술 단지 곁에 두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짝도 없이 홀로 술을 마신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부르니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원래 술을 못하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나를 따를 뿐이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나마 달과 내 그림자 함께 벗 삼아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봄이 다가기 전 함께 즐긴다. 我歌月俳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은 주위에서 서성이고,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취하기 전에는 함께 즐겁게 놀고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져 가세.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영원히 걸림 없는 교유를 맺어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리. [2] 天若不愛酒(천약불애주)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주성부재천) 하늘에 주성(酒星)이 어찌 있으며 地若不愛酒(지약불애주)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지응무주천) 땅에 어이 주천(酒泉)이 있으랴. 天地旣愛酒(천지기애주)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거니 愛酒不愧天(애주불괴천) 술을 사랑함이 어찌 하늘에 부끄러우리. 已聞淸比聖(이문청비성) 듣기로 맑은 술은 성인에 비하고 復道濁如賢(복도탁여현) 또한 탁주는 현인과 같다 하였네. 聖賢旣已飮(성현기이음) 성현을 이미 몸속으로 마셨거늘 何必求神仙(하필구신선) 구태여 신선이 되길 원하랴. 三杯通大道(삼배통대도)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일두합자연)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 但得酒中趣(단득주중취) 다만 술 마시고 얻은 즐거움이니 勿爲醒者傳(물위성자전) 깨어 있는 자에게 전할게 뭐랴. [3] 三月咸陽城(삼월함양성) 삼월의 함양성은 千花晝如錦(천화주여금) 온갖 꽃이 다 피어 비단 같구나. 誰能春獨愁(수능천독수) 누가 봄에 홀로 수심에만 잠기랴 對此徑須飮(대차경수음) 봄이라면 술잔을 마땅히 들지. 窮通與修短(궁통여수단) 인간세상 빈부와 길고 짧음은 造化夙所稟(조화숙소품) 일찍이 조화로 정해졌느니 一樽齊死生(일준제사생) 한 동이 술로 생사가 덧없고 萬事固難審(만사고난심) 인생 만사 가리기는 어렵기만 하네. 醉後失天地(취후실천지) 취하면 온 세상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쓰러져 홀로 자면 되지. 不知有吾身(부지유오신) 내 몸이 있는 줄을 나도 모르니 此樂最爲甚(차락최위심) 이보다한 즐거움이 더 있을쏜가. [4] 窮愁千萬端(궁수천만단) 답답한 수심 천만갈래니 美酒三百杯(미주삼백배) 맛있는 술 한없이 마시리 愁多酒雖少(수다주수소) 수심은 많고 술은 비록 적으나 酒傾愁不來(주경수부래) 술잔을 기울이니 수심이 사라지네. 所以知酒聖(소이지주성) 술이 좋은 것이라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노라. 酒酣心自開(주감심자개) 술이 거나하면 마음은 절로 열리는 것 辭粟臥首陽(사속와수양) 수양산에 누워 조를 사양한 백이숙제, 屢空飢顔回(루공기안회) 쌀뒤주가 노상 비어 주렸다던 안회 當代不樂飮(당대불락음) 모두 당대에 즐겨 마시지 못하였나니 虛名安用哉(허명안용재) 후세의 헛된 이름 무슨 소용 있는가. 蟹螯卽金液(해오즉금액) 게 가제 안주가 바로 신선의 선약이요 糟丘是蓬萊(조구시봉래) 쌓인 술지게미 봉래산이로다. 且須飮美酒(차수음미주) 이제 마냥 좋은 술 마시고 乘月醉高臺(승월취고대) 높은 대 위에 올라 달과 함께 취하리.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즉 「월하독작」은 전체 4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이며, 오언고시(五言古詩)의 형태이다.

이 시는 시인이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머물 때 지었다.


이백은 40여 세가 되서야 간신히 장안에서 관직을 얻어 황제 현종의 주변에서 머물게 되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 타격을 받아 1년 반 동안의 관직생활을 마치게 되자 그의 심정은 우울하고 괴로웠다.

이렇듯 이백이 침울하고 고독한 가운데 이 시를 지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런 심정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이백은 ‘술’과 ‘달’을 빌어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 시를 지었기에, 시 자체는 오히려 호방하고 신비롭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월하독작)」은 술을 통하여 달과 어울리는 환상을 그려내며,

술의 별과 술의 샘을 이용하여 술을 칭송하고, 술을 통하여 인생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하기에 역시 이백을 ‘주선(酒仙)’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술은 이백에게 있어서 중요한 소재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초상화 역시 술에 취한 이백의 모습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백에게 있어서 술은 사실상 근심을 녹이는 영약으로 술을 통하여 자신의 근심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백은 내심의 고통을 술로써 해소하고자 했을 뿐이며, 사실상 시에 나타난 즐거움은 단지 근심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월하독작」에서 표면적으로 술을 통한 즐거움을 표현하며 근심을 감추고 있지만, 전부 다 그렇지는 않다.


시인도 인간이기에 불현듯이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근심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백의 시 중에서 술과 관련된 대표적인 시 「장진주(將進酒, 将进酒)」의 마지막에서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녹이고자 하노라.(與爾同銷萬古愁)”라고 했던 것처럼 「월하독작」의 네 번째 시에서는

“근심이 많고 술이 비록 적지만, 술을 기울이면 근심은 다시 오지 않는다네.(愁多酒雖少, 酒傾愁不來)”라고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시는 혼자 술을 마시지만, 달과 그림자를 의인화시켜 자신까지 세 사람으로 만들고는

이들과 함께 술 마시는 장면을 묘사하여 매우 신비하고 낭만적이다.


그러나 비록 달과 그림자를 벗하지만 사실상 혼자 마시는 것 자체는 외로운 일이며,

사실상 이백은 이들을 빌어 근심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백은 취한 후에는 서로 흩어져버린다고 은근하게 자신의 고독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영원한 교유를 맺길 원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저 기약할 뿐이므로 역시 쓸쓸한 심정이 배어 있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 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었네.


「월하독작」의 첫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홀로 술이 마시는 시인은 달을 불러들여 벗하며,

또 달을 통해 다시 그림자를 만들어 자신과 함께 세 사람으로 의인화시켜 함께 술을 마신다.

이 구절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구상으로 역시 이백의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두 번째 시는 소위 애주가의 궤변이자 술의 덕을 찬양하는 주덕송(酒德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백은 술을 마시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酒星)과 땅에 있는 샘(酒泉)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이를 빌어 술을 좋아하는 것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다고 하니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성현들도 술을 좋아했으니 자신이 술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며,

신선이 되길 노력하는 것이 술을 마시는 것만 못하다고 재차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다음에는 한층 더 나아가 술을 마시는 것은 큰 이치를 깨닫는 것과 같으며,

심지어는 자연과 합치된다고 하니 가히 술에 대한 최대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는 ‘술 마시는 흥취’는 단순히 술에 취한 좋은 기분만은 아니다.

그의 당시의 정치적 타격을 생각한다면, 이 흥취는 형언할 수 없는 근심을 가린 흥취인 것이다.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천약불애주,주성부재천)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酒星)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네.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지약불애주,지응무주천)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응당 주천(酒泉)이 없었을 것이네.


「월하독작」의 두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술을 좋아하는 시인은 스스로 술을 사랑하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과 땅에 있는 술 샘을 이용하며 설명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애주(愛酒)의 변(辯)이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 혹 술을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백의 특이한 상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늘과 땅에 술을 뜻하는 글자를 가진 별과 땅 이름이 있으니,

하늘과 땅도 술을 좋아함이 틀림없기에 술을 마시는 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별 이름이나 땅 이름은 말할 것 없이 인간이 붙였겠지만 시인은 짐짓 모른 체한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도 청주를 성인에 비기고 막걸리를 현인이라 하니,

청주와 탁주를 모두 마신 나라 따로 신선을 구하려고 애쓸 것이 무언가 바로 내가 신선인데.

술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술 한 말이면 자연에 합치되는 것이라,


다만 술 마시고 느끼는 흥취를 얻으면 되나니 이 취중취를 술 못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알려주지 말지니라.

그들이 이 맛을 알게 되면 세상의 술이 동이 날 것이 아닌가,

또 주중취란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소중한 것이다.


하루에 3백 잔 술을 마셔야 성이 차고, 임금이 불러도

“저는 酒中仙(주중선, 술 속의 신선 곧 술로 속세의 일을 잊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고 가지 않은 이백이니,

이러한 작품이 나올 만하지 않은가



당투(當塗)와 차이스지(采石磯)    동영상 출처: EBS

이백과 두보의 교류

중국 고전 시가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백과 두보는 동시대에 살았는데, 두보가 이백보다 11살 어렸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744년 봄으로, 이백은 한림공봉으로 재직하다가 궁궐에서 물러나서 낙양을 노닐고 있을 때였고 두보는 젊은 시절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에 천하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이백은 이미 그의 문학적 재능으로 인해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였으며, 두보는 아직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각자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두보는 이백을 거의 우상으로 숭배할 정도로 우러러 보았지만 이백에게 있어서 두보는 아직 한갓 문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자주 술을 마시고 사방을 유람하면서 나이를 잊은 우정을 과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듬해에 다시 한번 더 당시 유명한 문인이었던 고적 등과 함께 산동에서 만나서 어울려 노닌 후 헤어지고는 영영 만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두보는 항상 이백을 흠모하면서 그를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다. 현재 그들이 서로를 위해 지은 시는 두보의 시가 10여 수 정도 남아 있고 이백의 시는 3수가 남아 있다. 그 중 일부를 살펴보면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좋아하고 그리워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春日憶李白(춘일억이백) - 봄 날에 李白을 생각하며 / 杜甫(두보)

白也詩無敵,(백야시무적) 이백은 시가 무적이니 
飄然思不群.(표연사불군) 표연하여 그 생각이 남들과 달라서,
淸新庾開府,(청신유개부) 청신함은 유신과 같고 
俊逸鮑參軍.(준일포참군) 준일함은 포조와 같네.
渭北春天樹,(위북춘천수) 위수 북쪽에는 봄 하늘의 나무 
江東日暮雲.(강동일모운) 강 동쪽에는 해질 무렵의 구름.
何時一樽酒,(하시일준주) 언제나 한 동이 술로 
重與細論文.(중여세논문) 다시 더불어 자세히 글을 논할까? 
두보(712~770)의 오언율시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이다. 
봄날에 이백(701~762)을 생각하는 두보의 이 시에서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춘수모운(春樹暮雲)이라는 성어가 생겼다. 

위수(渭水)의 북쪽인 위북은 당시 두보가 머무르고 있던 당의 수도 장안(長安)을 가리키며

강동은 이백이 떠돌던 강남(江南)을 말한다.

이 시는 비교적 많이 읽힌 작품으로 玄宗 天寶(현종 천보) 6년(747) 36세 때에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첫머리에 ‘白也’라 하여 이백을 높이지 않았으나, 이어서 ‘無敵’이니 ‘不群’이라 표현하여

최고의 讚辭(찬사)를 보내고, 이어 2연[3~4구]에서는 유신과 포조를 들어 그를 찬양했다.

3연[5~6구]에서 전환하여 그를 그리는 정을 표출하여 ‘그대가 없는 여기 장안의 봄이 무슨 뜻이 있으며, 그대가 있는 강남의 저녁노을 구름도 내가 없으니 제 빛을 내랴.’하고 읊어, 이백을 향한 지극한 정을 나타내었다.

이 구절은 특히 對句(대구)가 멋져서‘渭水江雲(위수강운), 暮雲春樹(모운춘수), 雲樹之懷(운수지회), 春樹暮雲情(춘수모운정)’ 이라는 새로운 語彙(어휘)가 생기게 되어 ‘먼 곳의 벗을 생각하는 간절한 정’을 표현하는 말로 쓰이고 있으니, 시인의 어휘 창조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는 언제 만나 함께 술 마시며 시와 글에 대해 논할 수 있으랴 하고 시인답게 끝맺어, 더불어 대화할 상대는 오직 이백뿐이라는 뜻을 숨겼다. 그런데도 이 둘은 이후 만나지 못했다고 하니 안타깝다.

‘두시언해’에서 이백과 관련된 시는 모두 8수인데, 이 시 외에 ‘冬日有懷李白(동일유회이백)’ ‘夢李白(몽이백)’ ‘送孔巢父謝病歸遊江東兼呈李白(송공소보사병귀유강동겸정이백)’ ‘與李十二白同尋范十隱居(여이12백동심범10은거)’ ‘贈李白(증이백 2수)’ ‘天末懷李白(천말회이백)’ 등이 있다.

이백과 두보는 744년, 당 현종 때인 천보(天寶) 3년 낙양(洛陽)에서 처음 만났다. 칭화(淸華)대 중문과 교수였던 원이더(聞一多·1899~1946)의 표현처럼 ‘창공에서 태양과 달이 만난 듯 중국 역사상 가장 신성하고 기념할 만한 만남’이었다.

둘은 1년 여 동안 만나고 헤어지고 했지만 그 뒤 다시 만나지 못했다.

두보가 이 시를 지은 것은 처음 만난 지 3년 뒤인 35세 때다.

시에 나오는 유개부는 북주(北周)의 문학가 유신(庾信·513~581)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지내 ‘유개부(庾開府)’로 불렸다.

포참군은 참군(參軍) 벼슬을 한 남북조ㆍ송대(宋代)의 시인 포조(鮑照·414?~466)다. 고려 후기의 문신 백문보(白文寶)의 시에도 ‘淸新庾開府 終始郭汾陽(청신유개부 종시곽분양)’이라는 대목이 있다. 시풍이 청신함은 바로 유개부요, 부귀로 시종하기는 당 현종 때의 곽자의(郭子儀)로다, 이런 뜻이다.


夢李白(몽이백)- 꿈 속에 이백을 보다 / 杜甫(두보)

浮雲終日行(부운종일행) : 뜬 구름 종일토록 하늘을 떠다녀도
遊子久不至(유자구불지) : 떠난 친구는 오래도록 오지 않네
三夜頻夢君(삼야빈몽군) : 한밤에 자주 그대를 꿈속에서 보니
情親見君意(정친견군의) : 우정의 친함으로 그의 마음을 보노라
告歸常局促(고귀상국촉) : 돌아간다 말할 때 항상 풀 죽어 보이고
苦道來不易(고도래불역) : 돌아오기 어렵다 괴롭게 말하네
江湖多風波(강호다풍파) : 강호에 풍파 잦고
舟楫恐失墜(주즙공실추) : 배 젓는 노 떨어뜨릴까 두려워하네
出門搔白首(출문소백수) : 문 나서며 흰머리 긁는 것이
若負平生志(약부평생지) : 평생의 뜻을 저버린 듯 하구네
冠蓋滿京華(관개만경화) : 높은 벼슬아치들 서울에 가득한데
斯人獨憔悴(사인독초췌) : 이 사람 내 친구는 홀로 얼굴 수척하다
孰云網恢恢(숙운망회회) : 누가 말했나, 하늘의 그물이 한없이 넓다고 
將老身反累(장로신반루) : 늙어서 몸이 도리어 법망에 걸려들었네
千秋萬歲名(천추만세명) : 천추만년에 이름을 남긴다고 해도
寂寞身後事(적막신후사) : 죽은 뒤의 일은 적막하기만 하다. 
​[참고]
* 중국의 한시의 최고봉은 당시인데 양한시대를 거쳐 육조시대에 이르러 시의 평측법과 압운법이 완성되어 
중국발음으로 한시를 읽으면 그 자체로 노래가 된다.
이 당나라 시대에 두 천재시인 이백과 두보가 열 살 차이로 동시대에 태어나 낙양에서 조우하기도 했다.[이백이 11세 많음]
도가사상에 바탕한 이백의 시가 초월적 상상력에 비견할 자가 없다면 유가사상에 기반을 둔 두보의 사실주의 시는 
현실비판 측면에서 당할 자가 없다.

贈李白(증이백) - 이백께 드리는 시 / 杜甫(두보)

秋來相顧尙飄蓬,(추래상고상표봉) 가을 와 서로 돌아 보니 아직도 떠도는 쑥인데, 
未就丹砂愧葛洪.(미취단사괴갈홍) 단사를 이루지 못해 갈홍에게 부끄러워한다.
痛飮狂歌空度日,(통음광가공도일) 통쾌하게 마시고 미친 듯 노래 부르며 헛되이 날을 보내거니와, 
飛揚跋扈爲誰雄.(비양발호위수웅) 날아 오르고 뛰어 넘으니 누구 위해 영웅인양 하는가.

魯郡東石門送杜二甫(노군동석문송두이보) - 노군 동쪽 석문에서 두보를 보내다 / 李白

醉別復幾日,(취별부기일) 취하여 이별한 지 또 며칠이 지났던가? 
登臨徧池臺.(등림편지대) 못가의 누대를 두루 올라 굽어보았지. 
何時石門路,(하시석문로) 어느 때 석문의 길가에서 
重有金樽開.(중유금준개) 다시금 황금 술단지를 열 수 있을까? 
秋波落泗水,(추파낙사수) 가을이 되니 사수의 물결은 낮아지고 
海色明徂徠.(해색명조래) 새벽빛으로 조래산은 환해졌네. 
飛蓬各自遠,(비봉각자원) 날리는 쑥처럼 각자 서로 멀어지니 
且盡手中杯.(차진수중배) 손에 든 술잔이나 비우세

戱贈杜甫(희증두보) - 두보에게 농담조로 주다 / 李白

飯顆山頭逢杜甫,(반과산두봉두보) 반과산에서 두보를 만났는데 
頂戴笠子日卓午.(정대입자일탁오) 머리에는 삿갓을 썼으니 대낮이라네. 
借問別來太瘦生,(차문별래태수생) 이별 한 뒤로 너무 말랐다고 물어보니 
總爲從前作詩苦.(총위송전작시고) 여태까지 시 짓느라 고생해서 그렇다네. 
 * 飯顆山= 일명 長樂坡라고도 하여 서안시 근처에 있는 산이라 하는데 語意대로 말하자면 밥풀산이 된다
別來= 헤어진 뒤에
太瘦生[태수생]= 매우 수척한 서생, 시를 짓느라 고생해서 수척해진 것을 뜻함
總爲[총위= 모두 ~ 때문이다.
註: 이 시는 이백이 44세 때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러면 두보는 32살 때이니 한참 후배로 생각했을 것이다. 
飯顆山이니 太瘦生이니 하여 詩題처럼 두보를 희롱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지마는 마지막 두 句를 보면 
戱謔은 하면서도 깊은 정이 베어 있어 희롱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시로 인해 詩作으로 고생하는 시인을 보고 태수생이라 부른다.
이백의 시가 폭포수 같이 시원 하다면 두보는 밥풀을 세이듯 한자 한자 따지는 꼼꼼한 시인으로 
서로 상반 되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早發白帝城(조발백제성) / 李白

朝辭白帝彩雲間(조사백제채운간) 아침 일찍 오색 구름 감도는 백제성에 이별하고 
千里江陵一日還(천리강릉일일환) 천리길 강릉을 하루만에 돌아왔네
兩岸猿聲啼不住(양안원성제부주) 강기슭 원숭이들 울음소리 그치질 않는데
輕舟已過萬重山(경주이과만중산) 가벼운 배는 만겹의 산을 지나왔다네
이백은 만년에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거병에 가담하였는데, 
이린의 거사가 실패하자 그도 체포되어 지금의 구이저우성[貴州省] 서북부의 야랑(夜郞)으로 유배되었다. 
야랑으로 가는 도중에 백제성(白帝城)을 지나면서 이백은 자신의 사면 소식을 접하였고, 
자유의 몸이 되어 강릉으로 돌아가면서 이 시를 지었다.
제목은 '아침 일찍 백제성을 떠나며'라는 뜻이다. 백제성은 쓰촨성[四川省] 펑제현[奉節縣] 동쪽의 백제산(白帝山)에 있는 산성이며,
강릉은 후베이성[湖北省] 장링현[江陵縣]으로 두 곳의 거리는 양쯔강의 물길로 약 300㎞이다. 
양안(兩岸)은 무산(巫山)과 협산(峽山)의 양쪽 언덕을 가리키며, 
그 사이로 양쯔강이 흘러가는데 강폭이 좁아 유속(流速)이 최고 시속 24㎞에 이를 정도로 빠르다고 한다. 
또 이곳은 원숭이들이 많은 지역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백은 한시라도 빨리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아침 일찍 서둘러 백제성을 떠나 배를 타고 강릉으로 향한다. 
강가 양쪽 언덕에서 쉼없이 울어대던 원숭이들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데, 
세찬 물살에 가벼워진 배는 겹겹이 쌓인 산들을 빠르게 지나 천리길 같은 강릉에 하루만에 도착한다. 
자유의 몸이 된 기쁨을 빠른 물살처럼 경쾌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이 시 또한 이백의 명작 중의 하나이다. 
백제성에서 무협을 거쳐 호북성의 강릉까지 뱃길로 천 3백여 리요, 그 중 골짜기 길이가 7백 리나 되는 먼 거리인데, 
그 먼 길을 아침에 떠나 하루에 닿았다 하니, 강의 흐름의 빠름과 배가 얼마나 빨리 떠내려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에 강기슭의 원숭이 울음이 자꾸 뒤로 뒤로만 밀린다 했다. 
아침노을, 빠른 강 흐름과 똑같이 빠른 배, 산으로 첩첩이 쌓인 강 언덕 등 敍景(서경) 중심의 작품이다.
白帝 : 白帝城(백제성). 重慶市(중경시)와 湖北省(호북성) 사이의 巫峽(무협) 부근에 있는 성.1)
彩雲 : 빛깔이나 무늬가 있는 구름.
江陵 : 지금의 호북성 荊州市(형주시).
啼不住 : 원숭이 울음소리가 한 곳에서 계속 들리지 않고 없어져 버림. 배가 빨리 달리는 모양을 강조한 말임.
輕舟 : 가볍고 빠른 작은 배.


청풍정(淸風亭) 이백이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던 곳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글씨 將進酒(장진주)  모택동은 당대 문장과 문필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다. 청풍정 뒷편에 있다.


將進酒(장진주;술 한 잔 받으시오) / 李白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하였는가?
黃河之水天上來(황하지수천상래)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回(분류도해불복회) 바다로 내 닫아서는 돌아오지 않았음을!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 하였는가?
高堂明鏡悲白髮(고당명경비백발) 고대광실 밝은 거울에 비친 서글픈 백발,
朝如靑絲暮成雪(조여청사모성설) 아침에 검은머리 저녁때 백설 됨을!
人生得意須盡歡(인생득의수진환) 인생 젊어 득의 찰 때 즐기기를 다할지니
莫使金樽空對月(막사금준공대월) 금 술통 헛되이 달빛아래 두지 말지어다.
天生我材必有用(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이 나를 이 땅에 보낸 것은 쓸모가 있었음인데,
千金散盡還復來(천금산진환복래) 돈이야 흩어졌다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니
烹羊宰牛且爲樂(팽양재우차위락) 염소 삶고 소 잡아 맘껏 즐겨 보세나!
會須一飮三百杯(회수일음삼백배) 한번 마시기로 작정하면 삼백 잔은 마실 일
岑夫子丹丘生(잠부자단구생)     잠부자여! 단구생아!
將進酒杯莫停(장진주배막정)     술 권하거니 잔 멈추지 말고
與君歌一曲(여군가일곡)         노래한곡 부를 테니
請君爲我側耳聽(청군위아측이청) 귀 기우려 들어주게
鐘鼓饌玉不足貴(종고찬옥부족귀) 고상한 음악 맛있는 음식 귀 할 것도 없으니
但願長醉不願醒(단원장취불원성) 다만 원커니 이대로 취하여 부디 깨지 말기를!
古來聖賢皆寂寞(고래성현개적막) 예로부터 성현들도 지금 모두 사라져 없고
惟有飮者留其名(유유음자유기명) 오로지 술 잘 마시던 이들의 이름만 남았다네.
晉王昔時宴平樂(진왕석시연평락) 그 옛날 진사왕이 평락관에서의 연회,
斗酒十千恣歡謔(두주십천자환학) 한말에 만냥 술로 질펀히도 즐겼다네.
主人何爲言少錢(주인하위언소전) 여보시게 주인양반 어찌 돈이 모자라다 하나
徑須沽取對君酌(경수고취대군작) 어서 가서 술 사오시게 같이 한잔 하자고야
五花馬千金구(오화마천금구)     오화마,천금구 따위
呼兒將出換美酒(호아장출환미주) 아이 불러 어서 술과 바꿔오시게
與爾同銷萬古愁(여이동소만고수) 우리 함께 더불어 만고의 시름 잊어나 보세!

*구:가죽옷 구(求+衣)

주)
1. 고당 : 고대광실, 호화주택
2. 청사 : (청년 시)의 검은머리.
3. 잠부자 : 이백의 친구 잠삼(岑參)
4. 단구생 : 이백의 친구 원단구(元丹丘)
5. 진왕 : 조조의 셋째 아들, 칠보시로 유명한 조비의 동생인 조식(曺植). 진왕에 봉해졌고, 시호가 사(思)이므로 진사왕이라 한다.
6. 평락 : 낙양의 평락관.
7. 경수 : 지금 바로....해야 한다
8. 고취 : 사오다. 고(沽)=매(買)
9. 오화마 : 다섯 가지 털 무늬가 있는 명마.
10. 천금구 : 천금의 가치가있는 비싼 가죽 옷.





취라산 삼태각


연벽대(聯璧臺)


 30cm/40cm 정도의 크기로 깊게 각인된 글씨에는 붉은 페인트가 거칠게 칠해져 있는데

그 글씨 바로 아래에 조금 작은 글씨로 ‘착월대(捉月臺)’라는 각인 또한 뚜렷하게 보인다.

글자 그대로 달을 잡으려한 바위라는 뜻.


여기에서 술을 마시던 이백이 술에 취하고 강물에 비친 달빛 경치에 취해 달을 잡으려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암반에서 강의 수면까지 50여m는 될 듯한데 암반이 안으로 굽어 그 곳에서 몸을 던지면

아무런 지장없이 곧바로 강으로 떨어지는 모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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