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6 08:00 김삼웅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부터 시작된 김수환 추기경과 인권변호사들의 동지적 관계는 70~8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왼쪽부터 송건호, 김수환, 황인철, 홍성우.ⓒ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김근태는 1992년 1월 황인철 변호사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민변소속으로 반독재투쟁의 재야ㆍ청년ㆍ학생ㆍ노동자들의 변론을 도맡다시피 하였다. 다음은 편지의 뒷부분이다.

지금은 아직 우리에겐 겨울입니다. 지난 시기처럼 지독히 캄캄한 겨울은 아니지만, 여전히 뿌우연 그러나 봄은 머지않은 아니 이미 봄이 우리를 향하여 어느 정도 와있는 겨울이라고 저는 느낍니다. 그런 겨울의 짓누름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 연합해야 하겠지요.

그런 새로운 관계, 이것은 우리 내부에서의 상호의 힘의 관계, 그러나 적대적이지 않고, 제한적으로만 경쟁적이며 기본적으로는 우호적인 토대 위에서의 상호관계에 대한 적절한 평가 위에서 구축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복잡하고 미묘해서 꼬일 수 있는 것이지만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오늘의 위기적 상황에 직면케 된 것이고 다가오고 있는 총선ㆍ대선에서 만일 우리의 연합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지난 몇 년간의 것보다 훨씬 크고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며 이 유동적인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의 민족 역사에 민중의 삶에 그리고 이 지역 평화와 인류 진보에 큰 부담과 정체를 안겨주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떨굴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을 서둘러야 하는데 정말로 서둘러야 하는데 하며 마치 발을 동동 구르는 것 같은 초조함을 안고 지금 저는 징역을 살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이런 부담은 누가 짊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선배님들, 황 선배님을 포함한 선배님들에게 부과되고 요구되어지고 있는 엄중함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 후배들이 뒷받침해드려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주석 12)

김근태는 비슷한 시점에 홍성우 변호사에게도 편지를 썼다.
그 역시 인권변호사로서 독재시절 민주인사들을 변론하고, 김근태 사건도 맡았었다. 홍성우는 이 무렵 조영래의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둘 수 없습니다>라는 글모음집을 발간하여 신문에 광고가 실리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김근태도 홍성우가 보내준 이 책을 읽은 터였다.

이곳 감옥은 바깥의 역사로부터 배제되어 있고 소외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런 역사의 흐름과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면제될 수 있으며, 또한 그에 대한 승인거부, 그리하여 유보도 일종의 특권처럼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저는 이 특권에 집착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데도 추모집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연이어 광고로 나오고 그리로 시선도 자꾸 갔습니다.
그러다가 호흡이 가빠지면서 화들짝 놀라 눈길을 서둘러 돌리곤 했습니다. 저도 결국 다 읽긴 읽었습니다. 그러나 광고의 이 모퉁이, 저 모퉁이, 한 구절 또 한 구절 이렇게 보았는데 그걸 다 읽는데 얼마나 걸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기막힌 슬픔”이라고 하셨지요.
“영래의 손때 묻은 글 줄”이라도 만져서 감당하기 어려운 허전함, 상실감을 메우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지요. 생명의 불꽃이 스러져가는 과정을 직접 보셨을 홍 선배님에겐 정말로 가혹한 형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선 희망없음에 대한 생각은 선배님과 전적으로 동일합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이고, 또 그런 원인들의 무겁고 가벼움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지만, 지금 이대로 가면 더 큰 좌절과 캄캄함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타개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시급하게 그리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초조감도 생깁니다.

홍 선배님을 비롯한 선배님들이 그렇게 하실 수 없을까, 그렇게 되도록 여건이 마련될 수는 없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통일된 재야가 다시 시급히 꾸려지고, 그것과 통합야당이 민주대연합의 원칙아래 발전적 차원에서 다시 결합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저도 한 역할을 하고 싶지만 그래 봐야 현재로선 별 소용없는 일이고, 바깥에 대한 기대로, 안타까운 희망으로 까치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이 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 속에도 더 이상 가두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래나 병곤이의 죽음은 결국 지난 번 우리의 좌절과 실패의 결과였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주석 13)


주석
12> 앞의 책, 244쪽.
13> 앞의 책,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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