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4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김병곤을 ‘지혜 있는 용기’의 인물로 평가한다. 백범 김구의 천 길 낭떨어지에서 붙잡았던 나뭇가지를 놓아버리는 용기를 일컽는다. 김근태와 김병곤 등 민청련 집행부는 ‘죽는 것이 사는 길’, 곧 지사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대중운동은 기본적으로 전투적이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 그것은 전략적으로 그래야 되고, 전술적으로는 용기와 더불어 정말로 지혜있는 유연함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더 높은 도덕성과 명분은 지난 시기에 투쟁을 통해서, 아니 투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왜 우리가 이렇게 투쟁할 수밖에 없는지를 지혜롭게 대중에게 알리고 동의를 구하는 데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병곤이는 또한 벌써 지혜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혜있는 지도자라 할까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하던가요. 서(書)는 어떨까요만, 나머지에 관한 한 정말 뚜렷하게 두드러졌습니다. 요새 정치군인들인 별자리들과는 전혀 달리 진짜 장군의 피가 흐르는 번듯한 허우대와 기상에서 그것은 넉넉히 엿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보스 기질과는 다른 것입니다. 열려 있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면서,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견 또한 분명하고, 줏대 없이 그리고 대책없이 흔들리는 경우란 없고, 그리고 결정을 내려야 될 때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하고 결정된 것은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그런 병곤이었죠.

1984년 당시 병곤이가 역할을 맡고 있었던 상임위는 정치, 경제, 국제, 운동론 등을 연구, 분석, 토의하는 모임과 기층 대중 운동을 연구하고 부분적으로 그와 연계되는 모임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치 최전선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괜찮은 조건이기도 하였지만, 상임위의 활동이 그처럼 매우 활발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병곤이의 그런 지도력, 지혜있음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주석 8)

김근태의 ‘김병곤회고’는 더 이어진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얘기는 자주 들어서인지, 오래 전 일이기 때문인지, 그러고 어쩌면 지나치게 신화가 되어서인지, 병곤이의 ‘용기 있음’을 예증하는데 설득력과 감동이 오히려 떨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또한 당시 재판정이 극단적인 경우였기 때문에 그에 대해 즉자적인 반발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혐의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기 어려운 점도 있는 것 같구요.

병곤이가 민청련 조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9월 경부터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민청련이 발족하여 움직인 지 1년 여가 지나서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간부 역량이 부족하여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곤이의 참여를 요청하게 되었지요.

이유는 또 있습니다. 1980년의 공간에서도 전술 구사를 둘러싸고 일정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 심각해져 갔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학생 운동에서 주류를 형성했던 쪽의 대표적 선배 활동가가 병곤이었습니다. 1980년 광주 이후, 그리고 1983년 공간에서 학생운동의 주류를 형성했던 부분이 그 영향만큼, 또 기대되는 만큼 활발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를 타개하는 계기로서,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러한 것은 촉발하는 뇌관으로서 병곤이의 적극적 활동이 기대되었습니다.
(주석 9)

김병곤의 용기야말로 진정한 용기임을 근태는 깨달았다. 그것은 사형구형에 대한 ‘영광’이라는 반응보다 살얼음판 같은 5공 초기에 청년조직을 기획하고, 맨 앞에 서서 압제자들과 싸운 용기를 더욱 평가한 것이다.

김근태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김병곤은 그처럼 허망하게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뜻과 행동에서 분신과 같았던 김근태도 그의 뒤를 따랐다. 김근태가 그의 영원한 동지에게 바치는 헌사는 다른 누가 김근태에게 바쳐도 손색이 없겠다. 김근태의 ‘헌사’는 이어진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로 신화로 만들어야 되는 것은 “사형을 주어서 영광입니다.”가 아니고, 병곤이의 바로 이 점, 자신의 의견과는 달리 내려진 공적 결정일 경우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단호히 그것을 보위하는 것, 이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병곤이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신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되어야 할 것이구요.(……)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가 병곤이 보고 “눈 감고 고이 잠드소서.” 라고 말할 때가 오지 않은 것입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역사적 과제 앞에 더 큰 힘으로 개입해야 되는 분명한 이유가 이처럼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병곤이를 떠나보내지 않았고, 또한 떠나보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병곤이는 우리의 가슴 속에, 눈빛 속에, 그리고 오늘의 이 역사 속에 타오르는 불길로, 불꽃으로 여전히 타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석 10)

주석
8> 앞의 책, 269 ~ 270쪽.
9> 앞의 책, 266~267쪽.
10> 앞의 책, 269 ~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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