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

012/09/07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대단한 문장가다. 편지 글의 면면을 읽다보면 ‘투사’로서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문장이 곳곳에 널려 있다. 행간에는 리얼리즘 문학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는 구절이 글의 품격을 높여준다.

‘겨울감옥’ 추위의 정황을 그린 대목이다.

인재근 씨에게.
정월 추위를 타는 모양입니다. 손이 다시 시렵고, 손이 자꾸만 허리춤 사이로 들어갑니다. 더욱 묘한 것은 해가 훤하게 밝은데도 바람이 팽팽해서 어수선하고 약간 불안한 듯한 분위기입니다.

긴밤은 참으로 뒤숭숭했습니다. 한숨이 두껍게 내려쌓여 있는 4동 뒤 좁은 마당을 돌개바람이 사납게 휘저었고 비닐 창문을 쉬지 안하고 덜컹덜컹 흔들어댔습니다. 바람으로 어수선한 밤에 넓은 방에 늦도록 혼자 앉아 있는 것이 청승맞을 듯싶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침낭 속으로 잠 속으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한 밤중에 바람소리, 창문 덜컹거리는 소리로 인해 나의 얄팍한 잠에서 끌려나왔습니다. 어사무사한 경계에서 버둥대다가 결국 눈을 뜨고 말았습니다. 마침 아랫배도 탱탱하게되어 더 버티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깨고나서 다시 잠이 들지 못해 머리가 띵한 상태입니다.
(주석 14)

다음은 신 새벽 감옥 담장위로 치솟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느낀 소회다. 마치 잘 다듬은 한 편의 산문과 같다.

새벽 미명에 자리에서 일어나 비니루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이곳의 풍경은 매일 좋구려, 거치른 시멘트 선, 건물의 사나운 직각이 시야를 찢고 들어오지만 거기에 별로 신경 쓰여지지는 않는구려. 때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담장 훨씬 위로 까마득하게 치솟아 올라간 20여 년 이상 묵은 나무들이 그렇게 정답게 다가올 수가 없소,

마치 머리를 기웃거리며 아는 체하고 내 방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 같다오. 거칠 것 없이 시원하게 크면서도 미루나무처럼 본때 없이 그리하여 허전하고 허망하게 길다란 그런 모습이 아니고, 희끄무레한 새벽하늘을 뒤로 하고 약간씩 구불텅구불텅 틀면서 다시 올가가고 그러다가 줄기를 내어 함께 위로 솟구쳐 오른, 빙 둘러쳐진 나무들 모습이 아주 친근하게 느껴지는구려.

여기에 갇혀져 있던 사람들의 한과 한숨이 저렇게 나무를 구비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오. 당신과 만나서 살아온 지난 날들이 미명에 그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저 나무처럼 여겨지는구려. 짧지 않은 세월을 저렇게 쭉 밀고 올라왔고, 그러면서 정답고 또한 구불텅한 구비와 옹이도 없지 않았던 세월이었지요.
(주석 15)

다음은 몇 해 전에 세상을 뜨신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이다.

꿈결처럼 다가오는 뿌연 저 인왕산 중턱의 색깔 변화가 어머니를 생각하게 하는구려. 우리 어머니는 피리를 잘 불었다오. 버들피리, 보리피리 모두 말이오. 봄은 어머니의 피리소리를 타고 널리 퍼져나갔던 것이오.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새끼손가락만하게 하고, 입에 무는 부분은 껍질을 살짝 벗긴다오. 먼저 만든 것은 나를 주시고, 또 하나를 만들어 입에 무셔서 적절한 위치를 잡으시는 것이오.

그 곡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입 속과 귓가에서는 뱅뱅 돌고 있지. 끊어질 듯 이어지고, 또 뭔가를 호소하고 거듭 호소하면서 반복되고, 변주도 되는 것 같았소. 그럴 때 어머니 표정,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오. 눈길은 아득히 먼 곳으로 가버리고, 몸은 점점 야위어가는 듯싶고, 그러면서도 생기가 도는 우리 어머니였다오. 이때의 어머니를 제일 사랑했던 것이오.
(주석 16)

다음은 ‘진눈깨비’에 관한 단상이다. 국어사전에는 “비가 섞여 내리는 눈”이라고 풀이한다. 김근태의 해석은 철학적이다.

며칠 전에 어둑어둑해질 무렵부터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리는 모양도 그렇지만, 이름부터가 약간 재미있고 짓궂은 듯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귀가 안 맞고 김빠지는 느낌이 듭니다. 눈이 질다는 것이 형용 모순이면서도 말이 되는 것이 재미있고, 도대체 ‘깨비’라고 붙은 것들이 몽조리 약간은 체신 머리 없고, 방정을 떠는데 그러면서도 악의나 잔인함은 상당히 배제되어 있는 듯이 여겨집니다. 방아깨비, 허깨비, 도깨비, 같은 것들이 그것들인데 이 반열에 진눈깨비도 끼어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 철 늦은 진눈깨비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은 재미있다든지 장난치고 싶다든지 하는 그런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스산한 느낌이었습니다. 쇠창살에 갇혀 제압당하고 그 쇠창살 위에 다시 촘촘히 그물눈의 쇠철망을 덮씌워 시원스런 시야도 차단당하여 내리고 있는 진눈깨비를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마침내 가물가물해지는 짜증스러움이 마음을 복잡하게 하였습니다.
(주석 17)

 



다음은 김병곤의 셋방을 찾아가서 함께 민청련의 일을 하자고 약속하면서, 그 집안의 풍경과 뒷날 닥치게 될 고난의 상념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그런 약속을 한 곳은 원효로의 어디쯤인가, 창고 같은 2층에 병곤이가 살 때였습니다. 마루엔 애들 기저귀가 치렁치렁 걸려 있었고, 문숙 씬 식사 준비한다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지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기쁘고 자랑스러웠지만, 동시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아픔, 그리고 슬픔으로 옆구리가 결리는 듯 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 갈 건지, 뭐 대단한 계획이야 있을까만, 그래도 봉급 받아서 뭣인가 해 보려고 하고 있었을 텐데, 아무런 대책 없이 그렇게 떠나는 병곤이가 과연 잘하는 것이고 그것을 권하는 나는 또 무엇인가 하는 상념에 흔들렸습니다. 그 날 문숙 씨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외면하고 앉아 있다가 옆걸음을 쳐 나왔던 것이 아직 기억에 생생합니다. (주석 18)


주석
14> 앞의 책, 223쪽.
15> 앞의 책, 723쪽.
16> 앞의 책, 73쪽.
17> 앞의 책,230쪽.
18> 앞의 책,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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