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

012/09/01 08:00 김삼웅

 

 강경대 열사의 죽음에 분노하는 학생들. 권위주의 정권의 군경에 맞아 죽은 학생은 열사란 이름으로 기억됐다. 하지만 경제적 불평등에 맞아 죽은 학생은 자살이란 이름을 얻을 뿐이다. 이 세상은 그들이 나약했다고 꾸짖는다. 더욱이 우리 같은 '별종'들이 죽으면 관심 한번 끌어보기 위한 '쇼'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김근태가 두번째 옥살이를 하게되는 1990~1992년은 3당 야합을 계기로 한국의 보수세력이 대동 결속하여 5공 못지않게 전제를 일삼은 시점이었다. 한때 국민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 하던 노태우는 3당야합으로 거대 여당을 거느리면서 비판하는 저항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민주화를 지도해온 김영삼의 민자당 참여는 일생일대의 실책이었다. 노태우는 박정희 → 전두환에서 정치적 혈통을 이어받은 그대로를 내보였다.

1991년 4월 24일 상명여대의 학원자주화 집회에서 지지 연설을 하고 돌아오던 명지대 박광철 총학생회장이 불법으로 연행되자, 학생들은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하며 강경하게 진압하였고, 학생들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경제학과 1년생 강경대는 4월 26일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 에 동료학생 300여 명과 함께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혀서 무자비하게 휘두른 쇠파이프에 집단 구타당해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박승희 열사의 영정 사진 ⓒ 김은숙

이튿날부터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대책회의)가 결성되고, 살인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가의 격렬한 항의시위가 전개되었다. 학생ㆍ시민들은 죽음으로써 노태우폭압에 맞섰다.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 분신, 5월 1일 안동대생 김영균 분신, 3일 경원대생 천세용 분신, 6일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 박창수 안양병원에서 변사체로 발견,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분신, 18일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와 광주 운전기사 차태권 분신, 20일 권창수 광주에서 시위도중 전경의 폭행으로 중태, 22일 광주 정상순 분신, 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 경찰의 폭력시위 진압과정에서 압사 등이 잇따랐다.

이런 와중에 시인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시론을 쓰고, 서강대 총장 박홍은 ‘어둠의 세력’ 운운하는 기자회견을 하여 국민의 분노를 샀다.

노태우 정권은 김근태를 다시 감옥에 보냈지만, 국제사회는 그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높이 평가했다. 1991년 5월 미국 하원의원 17명이 김근태의 구속수감에 대해 한국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고, 12월에는 미국 하원의원 44명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냈다.

김근태가 옥고를 치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민청련을 함께 조직하고 반독재투쟁의 일선에 섰던 김병곤이 위암투병 중 1990년 12월 6일 사망한 소식이다.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공안검사의 사형구형에 “영광입니다”고 거침없이 외칠만큼 담대한 청년지도자였다.

또 한 사람은 같은 해 12월 12일 인권변호사로, 학생ㆍ청년기에는 반독재 투사로 활동하고 <전태일 평전>을 써서 문명을 날린 조영래의 죽음이었다. 두 사람과는 너무 각별한 사이였고 동지 관계여서 이들의 부음 소식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할만큼 충격이 컸다.

김근태는 김병곤의 사망소식을 항소심 재판정에 나갔다가 돌아온 날 저녁에 어느 신문 귀퉁이에서 보았다. 충격이었다. 망연자실했다.

침이 마르고 목이 잠겼습니다. 머리속에서는 깨진 종소리가 계속해서 울리는 듯했습니다. 눈을 감고 생각하고자 했지만 갈피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학생ㆍ노동자의 푸르른 죽음도 아프고, 서남동ㆍ성내운 선생님 돌아가심도 그랬지만 이것은 또 다른 아픔이었습니다. 인정될 수 없는 것이지요. 종철의 죽음 때, 석규ㆍ한열이 때 많이 울었고, 조성만의 죽음 때도 어깨를 들먹거리며 울었는데, 이상하게 병곤이 기사를 보고 또 보는 데도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안절부절하면서 섰다 앉고 앉았다 일어서고 참 이상하고 곤혹스럽기도 하고 한편 내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불안불안하였습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한다면 병곤이의 떠나감에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절망하면서 혼란에 빠져갔습니다.

너무 많은 죽음에 부닥쳐서 이제 지쳐버린 것인가. 병곤이의 그 참혹한 모습에 정이 다 달아나고 만 것인가. 내 징역에 빠져서, 내 서러움에 갇혀서 그런 것인가. 내 뇌리를 채우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엉뚱함과 당혹 속에서 밤새 이튿날 접견실에서 인재근을 만나고 그로부터 직접 병곤이 얘기를 듣는 순간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고 참았지만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병곤이의 캄캄한 죽음은 정서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디찬 현실에 맞부딪쳤을 때 그것을 직접 얘기로 들었을 때 파열된 것처럼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주석 1)

 


민변, 조영래추모모임 등이 10일 인권변호사 조영래 20주기 추모 행사를 연다. ⓒ 조영래추모모임

김근태는 김병곤과 조영래의 너무 이른 죽음 앞에 하늘을 우러러 원망하고 탄식했다. 앞의 인용문은 1991년 3월 홍성감옥에서 고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우리는 정말 역사 속에서 얼마나 더 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인지……. “아직도 ……이니이까” 하는 성서 속의 그 절규와 신음이 가슴을 후벼파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겨울 징역을 살고 또 살고 또 더 살아야 하고, 그래야 할 것이고 …… 운동은 모두 시간 속에서 변화ㆍ발전할 터이지만 지겹게 반복되고 있는 거의 순환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좌우 편향 속에서 동요하고 있는 오늘의 이 풍경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큰 목소리로 “때가 왔다. 지금은 그때이다. 모두 일어서라”하던 그 많은 거짓 예언자들, 이론가들 그리고 뒤에서 아우성치던 평론가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그중에 몇은 이제는 “압도적으로 우리가 열세”라고 또 다시 근엄한 목소리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고 있고…….
(주석 2)


주석
1> 김근태,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235쪽.
2> 앞의 책,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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