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20-1823, 캔버스에 회반죽, 146x83cm.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 0층 한쪽에는 고야의 일명 ‘검은 그림들(Pinturas negras)’만 모아 놓은 전시실이 있다.
그는 1819년에 마드리드 외곽에 집을 마련하여 실내 벽화를 직접 그렸다. 이 집을 ‘귀머거리의 집’이라고 부른다.
벽화들은 검은색이 주조를 이루기 때문에 ‘검은 그림들’이라고 불렀다.
이 집은 철로가 들어서면서 철거되었는데, 철거되기 전에 벽면을 떼어 내서 캔버스에 붙이는 식으로 고야의 벽화를 보존했다.
당시 이 집의 소유주는 ‘검은 그림들’ 시리즈를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하고자 했으나 루브르 측에서 거절했고,
결국 프라도 미술관에 이 연작이 오게 되었다.
고야는 ‘검은 그림’ 연작을 비롯하여 유화, 판화 등을 주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렸다.
누군가의 주문을 받지 않고 예술가의 의지와 영감에 의해 자유롭게 그리는 그림,
이것이 현대미술의 특징 중 하나이며 이 점에서 고야는 선구자다.
'검은 그림' 연작 중 가장 관람객들의 시선을 끄는 작품은 바로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인 것 같다.
티탄(Titan)의 왕인 사투르누스(Saturnus)는 그의 자식이 자신을 죽이고 왕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다.
그래서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먹어치웠는데, 이를 보다 못한 부인 레아(Rhea)가 한번은
아기 대신 돌을 주어 삼키게 하고 그 아기를 몰래 키운다.
이 아이가 바로 후대 올림포스 신들의 왕이 되는 유피테르다.
이 작품에 대해서도 여러 해설이 가능하겠지만,
그중 하나는 말년의 고야가 자신을 스스로 사투르누스처럼 묘사했다는 점이다.
고야의 부인인 호세파 바예우는 고야와의 사이에서 여러 번 임신을 했지만,
사산된 아이도 많았고 태어나더라도 일찍 죽어서 결국 성인이 된 자식은 딱 한 명뿐이었다.
고야가 젊었을 때 문란한 생활을 한 탓에 매독에 걸렸고,
이 때문에 아기들도 태어나지 못하고 죽거나 일찍 죽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또한 고야가 청력을 잃게 됐던 열병도 매독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나이가 든 고야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죽게 된 아이들을 생각하며,
자신을 자책하고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그린 것 같다.
고야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확실히 성인군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훌륭한 화가가 꼭 훌륭한 인간은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고야처럼 현대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화가가 아닌 한 인간의 모습으로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화가의 업적과 장점뿐만 아니라단점들까지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The Colossus 거인>, 캔버스에 유화. 120×100cm. 1808 제작. 프라도 미술관
고야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뭐랄까 불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멜랑꼴리하기도 하고,
묘하게 복잡한 느낌을 갖게 된다.
고야의 작품은 제라르 르그랑에 따르면 유럽 전체의 무의식의 표현이기도 하다.
부지불식중이었지만, 그 역시도 18세기 말 고딕의 유행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신세계를 예언했다.
<거인>에서는 거인의 그림자에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과 짐승들이 산을 넘어 도망치고 있지만,
정작 거인은 달빛 속에 몽상하며 이 공황상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는 단지 나폴레옹의 침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하고,
마치 무의식의 거대한 출현에 모든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고야의 가장 드라마틱하고 유명한 그림으로 평가되어 온 ‘거인( The Colossus)은 고야의 작품이 아니라,
문하생이었던 아센시오 훌리아가 그린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한다. (조선일보 2009.01.28)
나폴레옹 군대에 맞선 스페인의 저항을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던 이 작품은 미술관의 전문가들이 6개월이 넘는 연구 과정을 거쳐
캔버스 구석에 적혀 있는 AJ가 그림을 그린 이의 이름 이니셜이라는 설명이다.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그림을 계속 전시할 것이지만 고야의 작품이라는 설명은 수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19세기 초반에 그려진 ‘걸작’으로 평가되던 문제의 작품을 그리는 데, 고야가 참여했을 것이라는 반론도 여전히 존재한다.
<The Witches' Sabbath> 캔버스에 유채. 43×30cm. 1789. 프라도 미술관
위의 작품은 사람들의 미신을 직접 전사한 그림으로, 야회(夜會)에서 악마는 그를 찬양하는 여성들에게 마술사로 나타난다.
살아 있는 어린이들이나 죽은 어린이들, 심지어는 태아까지도 악마를 존중하여 경의를 표한다.
거친 장소, 거리의 부재, 황혼녘의 빛 등이 이미지로 가득 찬 악몽에 몽환적인 사실감을 부여한다.
이 그림은 빈곤한 지성과 모호성에 근거한 모든 종교를 우회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듯하다.
마술사들은 '낙태 시술가'를 상징하기도 한다.
고야의 이 작품 ‘마법사의 안식일’에 잘 드러나듯이, 그 당시 대중의 미신, 특히 마법사에 대해 품고 있는 두려운 감정은
심각한 수위에 도달한 상황이었으나, 이는 전통 종교의 흔들림, 믿음의 흔들림에 근원을 두고 있었다.
큰 기둥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한다.
사회의 술사들과 시정잡배들, 그리고 대중들을 등쳐먹는 그 모든 사람들은 마법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성 이시드로 순례 여행> 캔버스에 유채. 138.5×436cm. 1821~1823년. 프라도 미술관
고야의 검은 그림 연작시리즈중 하나다.
이 작품을 보면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인 산 이시드로의 은거지로 순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광기에 어린 혹은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어진 사람들이 보인다.
한때 이성을 믿었고, 출세를 위해 다양한 권력자들 아래서 쉼없이 일하며 예술가로서의 자유를 얻기를 소원했던 그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자발적으로 그린 그림은 어둡고 비관적이다.
그가 사회에서 몰아내기를 원했던 ‘괴물’이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고야의 집 벽면에 검은 잉크를 칠하고 그 위에 덧칠해 사람들의 표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그림이 재미있는 점은 고야가 젊은시절에 같은 주제를 두고 아래 <성 이시드로의 축제>처럼 밝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
<성 이시드로의 축제> 438 X 140 cm, 회반죽을 바른 캔버스에 유채, 1819, 프라도 미술관
이 작품은 고야가 젊은 시절 위에 있는 <성 이시드로 순례 여행>과 같은 주제로 그렸던 버전이다.
젊었을 때는 아마도 세상이 아름다워보였을 테니까 그렇겠지 라고 생각해 본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Judith and Holofernes)> Oil mural transferred to canvas. 1819~1823. 146 x 84 cm. 프라도 미술관
원래 고야가 자기 집 킨타 델 소르도에 그린 벽화였으나
1873-74년 프라도 미술관 큐레이터 Salvador Martínez Cubells의 감독 하에 캔버스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많이 손상되었다고.
여기에서 '유디트'라고 불리는 여성은 경외성서인 <유디트 書>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으로,
팔레스타인의 베투리아에 사는 과부였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는 서양예술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며,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카라바지오, 렘브란트, 고야, 클림트 등 많은 화가들이 그렸다.
<유디트 書>의 내용을 간추리면 아시리아 네부카드네자르 대왕 때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유대인 도시 베툴리아를 함락하기 직전.
물 공급이 막혀 항복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신앙심 깊고 부유한 과부 유디트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아름답게 치장하고 거짓투항하여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뒤 만취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돌아온다는 대범한 계획을
하녀 아브라와 단 둘이서 성공시켜버린다. 고야의 <유디트>는 이 설화에서 유래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이 이야기가 화가들의 흥미를 끌었는지,
마드리드 왕궁에는 이 주제를 다룬 그림이 틴토레토를 비롯하여 여러 점 더 있다.
<말년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93 X 75cm 1826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고야는 알바 공작부인과의 기이한 인연에 이은 헤어짐과 청각장애를 얻으면서부터 외부인과의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집인 '귀머거리 집'에 틀어박혀 거의 나오지 않고 칩거하게 된다.
그 당시에 그린 그림은 캔버스 위에 그린 것이 아니라 집에 있던 하얀 벽 위에 그렸는데 검은색 바탕,
기괴할 정도로 일그러진 사람들의 형상과 얼굴, 우울한 주제의식 때문에 '검은 그림'이라고 불린다.
또한 병의 재발에 대한 불안감과 더불어 당시의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는 침략과 전쟁에서
인간의 광기를 지켜보며 인간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
말년에 그린 그의 자화상에서 보이는 눈빛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시대의 모습을 꿰뚫는 예리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고야의 눈빛이 잘 반영된 듯하다.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4XXX660002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6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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