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만테냐〈성모 마리아의 장례식〉 목판에 유채 / 54.5×42cm / 1462년경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가 활동하던 시기,

이탈리아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인간중심적 문화를 재탄생시키는 르네상스

(Renaissance, 프랑스어로 부활이라는 의미다)를 맞고 있었다.


중세시대 미술, 특히 회화는 대상을 자연스럽고도 아름답게 미화시키는 작업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림 속 인물들이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처럼 단단한 입체감을 입고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공간을 점유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가 무르익으면서부터였다.


파도바 출생의 만테냐는 만토바를 지배하는 루도비코 곤차가(Ludovico Gonzaga) 후작의

궁정화가로 일하면서 곤차가 가문의 예배당을 위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


그림은 외경에서 전해지는 성모의 죽음을 주제로 했다.

그림 속에는 총 열한 명의 제자가 있다.

 
원래 예수의 제자는 열두 명인데,

예수를 은전에 팔아넘긴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유다를 제외하면 숫자가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화가들은 유다로 인해 생긴 빈자리를 기독교인을 박해하다가 개심하여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개명한 ‘사도 바울’로 채우곤 했다.


만테냐가 제자를 열한 명으로 그린 것은 유다의 부재를 확실히 하기 위함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제자 중 하나인 토마스의 부재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활한 예수를 도저히 믿지 못하여 의혹을 제기하는 토마스를 위해 예수는

자신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을 넣게 하여 확인해준 적이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마리아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이어 성모가 승천하는 장면마저 목격하지 못해 또 한 차례 의심을 품게 된다.


이에 마리아는 토마스의 의혹을 풀어주기 위해 승천하는 순간 허리띠를 토마스에게 던져준 일화가 있다.
만테냐는 토마스를 제외함으로써 이어질 그 이야기를 암시한 것이다.


소실점을 향해 점점 작게 모이는 타일의 모양은 만테냐의 원근법에 대한 관심과 기량을 어김없이 보여준다.
창 밖에 그려진 풍경은 만토바의 당시 모습을 꼼꼼하게 담고 있어 지형학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준다.


이런 장치들로 인해 마리아의 죽음은 평평한 2차원의 화면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3차원의 현실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보인다.


그림 가장 왼쪽에 있는 제자는 사도 요한이다.
13세기에 보라기네의 야코부스(Jacobus de Voragine)가 쓴 《황금전설(Legenda Aurea)》은 기독교 성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마리아는 자신의 하관식 때 요한으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서 있도록 명했다.
종교화에서 종려나무는 대체로 순교자들의 승리의 상징물로 통한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천사〉 패널에 유채 / 74×51cm / 1475~1476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e Messina, 1430~1479)는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 따르면

플랑드르에서 발명한 유화를 베네치아를 통해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도입한 화가다.

그는 플랑드르 지역인 브뤼주에서 잠시 활동하면서 유화 기법에 크게 열광했고, 이후 자신의 고향 시칠리아로 건너온

플랑드르 출신 화가들로부터 유화를 이용한 정교한 표현의 ‘플랑드르 회화’ 기법을 습득하였다.


그의 무덤에는 “물감과 기름을 섞어서 이탈리아 회화에 화려함과 내구성을 선사해준 선구자”라는 글이 적혀 있다.

 유화는 기름에 물감 안료를 섞어 사용하는 기법으로,

시간이 지나도 심하게 변색되거나 훼손되지 않아 내구성이 뛰어났다.


그뿐 아니라 몇 번이고 수정할 수 있기 때문에

치밀할 정도로 세밀한 플랑드르 회화의 전통을 일구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플랑드르 회화는 붓이 아니라 거의 바늘 끝으로 그린 듯이 정확하고 꼼꼼하게 대상을 묘사했다.
따라서 작품 속 예수의 땀과 고통에 젖은 머리칼과 코와 턱에 듬성한 수염은 만질 수 있을 듯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죽은 예수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아기 천사의 고운 머리칼, 날개 결,

예수의 몸을 두르고 있는 천 역시 사실적인 미감을 마음껏 발휘한다.


또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는 고통 속에 막 숨을 거두느라 채 입을 다물지 못한 예수의 모습과

이를 슬퍼하는 아기 천사의 애절한 표정을 기품 있게 그려냄으로써,

다소 도식적인 느낌이 드는 플랑드르 회화보다 한발 앞서 있다.


풍부하고도 자연스러운 표정, 조각처럼 단단한 형태를 갖춘 예수의 몸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특히 화면 전체를 골고루 밝히는 고운 빛과 그림 상단 짙푸르다가

아래로 갈수록 점차 옅어지는 하늘색의 부드러운 변화는
색과 빛의 표현에 능숙했던 베네치아 화가들의 전통을 잘 습득한 결과로 보인다.


배경에 그려진 풍경은 그의 고향 마을 메시나를 담은 것이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예수와 천사에 비해 이 배경은

컴퓨터 그래픽을 방불케 할 정도로 지나치게 정교한데, 그래서인지 딱딱한 느낌마저 든다.


따라서 학자들은 이 배경 부분과 다소 자연스러움이 결여되어 보이는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그가 아니라 제자이자 아들인 야코벨로가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요하힘 파티니르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이 있는 풍경> 패널에 유채. 64×103cm. 1520~1524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56a실


르네상스 시대만 해도 몇몇 예외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이탈리아 화가들에게 풍경은

그림 속 인물들을 도드라지게 보이게 한다거나어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알프스 북쪽의 화가들은 그림 속 풍경의 비중을 훨씬 높이곤 했다.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한 요하힘 파티니르(Joachim Patinir, 1480?~1524)는 북유럽 최초의 풍경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물론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이 있는 풍경〉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다룬 신화를 주제로 하고 있고,

실제 자연을 그린 것은 아니어서 오늘날 말하는 풍경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어떤 지역의 풍광을 마치 새처럼 높은 곳에서 바라보듯 펼쳐 보이고 있어서

그림 속 일화들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이다.


화면 왼쪽의 낙원으로 굽이치는 강은 레테의 강이다.
생을 다한 이가 이 강의 물을 마시면 이승에서의 일은 모두 잊고, 영원히 늙지 않는 몸으로 낙원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그림 속 낙원에는 천사들이 유유히 산책을 하고 있다.

정중앙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스틱스 강 위에 떠 있는 카론의 배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실어 나른다.


배는 아마도 그림 오른쪽의 지옥을 향하는 듯하다.
활활 타오르는 화염과 더불어 괴이하게 생긴 건물 안에 머리가 셋인 개가 버티고 있는데,

이는 지옥의 문을 지키는 케르베로스이다.

요하힘 파티니르와 캉탱 마시 <성 안토니오의 유혹> 캔버스에 유채. 155cm×173cm. 1520~1524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56a실


〈성 안토니오의 유혹〉은 파티니르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였던

캉탱 마시(Quentin Matsys, 1466~1531)와 함께 그린 그림으로, 파티니르는 풍경을 그리고 캉탱 마시는 인물들을 그렸다.


성 안토니오는 3세기경의 수도사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스무 살 시절부터 깊은 산속에 홀로 살면서 금욕적인 수도 생활을 했다.


화가들은 그가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는 장면들을 자주 그림으로 그리곤 했다.

이 그림 속 성 안토니오에게 닥친 유혹은 바로 ‘미인계’다.


괴물처럼 흉측한 얼굴의 노파는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기괴한 노부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노파 덕분에 성 안토니오를 유혹하는 젊은 미인의 아름다움이 한층 강조된다.


이 그림에는 이야기의 중심에 선 인물들의 모습이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이 있는 풍경〉보다는 크게 그려져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역시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네덜란드나 벨기에 어느 지방의 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종교화이지만 풍경화이고, 반대로 풍경화이지만 결국 종교화인 셈이다.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첫 번째〉패널에 템페라 / 83×138cm / 148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대부호인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가득 받으며 화가로서의 삶을 이어나갔다.


종교적인 이유로 한때 붓을 꺾기도 했지만 그는 중세 동안 금지되다시피 한 고대 그리스 신화를 그림으로 옮김으로써
고대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 회화의 진수를 펼쳐보인다.


프라도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 작품들은 지오반니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 1313~1375)의 《데카메론(Decameron)》에 나오는 일화를 담고 있다.


라벤나의 오네스티 가문 상속자 나스타조는 지체 높은 신분의 여인 파울라를 지극히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차갑게 그를 거절했고, 이에 나스타조는 상사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그로 하여금 잠시 라벤나를 떠나 있기를 권했다.
첫 그림 왼쪽 모퉁이에는 라벤나를 떠난 나스타조가 머물던 천막이 그려져 있다.


빨간색 옷을 입은 나스타조는 망연자실한 채 숲을 산책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나뭇가지를 집어 개를 쫓는 모습으로 두 번 등장한다.


그날 나스타조는 산책을 하다 우연히 칼을 든 기사 한 명이 말을 타고 알몸의 여자를 쫓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여인이 기사가 풀어놓은 사냥개에게 잡혀 쓰러지기 직전인 것을 보고 그 개를 물리치려고 한다.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두 번째〉 패널에 템페라 / 82×138cm / 148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인물과 사건을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그려서 마치 오늘날의 사진과도 같은 효과를 노리는 것이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이라면, 이 그림은 그런 자연주의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동일한 인물이 한 화면에 두 번 등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숲에 가득한 나무들 역시 요즘 동화책에서 흔히 보듯 도식적이어서 사실성보다는

그림으로서의 장식적 기능에 더 충실한 것 같다.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세 번째〉 패널에 템페라 / 83×142cm / 148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나스타조는 그 기사로부터 슬픈 이야기 하나를 듣게 된다.

기사는 여인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나 여인이 거부하자 실의에 빠져 자살하고 만다.


얼마지 않아 여인도 죽게 되는데 기독교에서 금하는 자살을 한 기사와

그를 죽게 만든 여인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벌을 받게 된다.


금요일마다 남자는 여자를 쫓아 칼로 찔러 죽인 뒤 그녀의 내장을 꺼내 개에게 던져주는 일을 반복하고,

그녀는 늘 그런 죽임을 당하면서도 다시 살아나 매번 다시 쫓기고 죽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나스타조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쫓고 죽이는 일을 반복하는 그 장소에서 성대한 파티를 연 다음

자신이 흠모하는 파울라를 초대하여 그 장면을 목격하게 하였다.

파울라는 비로소 마음을 열고 그의 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네 번째〉 패널에 템페라 / 83×142cm / 1483년 / 개인 소장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6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7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8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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