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케비 비너스> 캔버스에 유채. 212×147cm. 1649~1651. 런던 내셔널 갤러리.


 1647년과 1651년 사이에 그려진 <로케비 비너스>는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누드화들 중 하나이며,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인도되기 전까지 영국의 로케비 홀에 소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제목이 붙었다.


후대 미술가들과 영화감독들에게 영감을 준 이 그림은 벌거벗은 비너스가 소파에 기대어,

그녀의 아들 큐피드가 붙잡고 있는 거울을 통해 관람자를 바라보며 누워있는 모습을 뒤에서 본 것이다.
신기하게도, 거울에 비친 비너스의 흐릿한 얼굴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다소 늙어 보이고 크게 보인다.


이 그림은 애초에 스페인 수석장관의 아들이었던 마르케스 델 카르피오를 위해 제작된 듯하며,
카르피오는 1651년 6월에 이 그림의 소유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 그림은 현존하는 유일한 벨라스케스의 여성 누드화이며,

스페인 화가가 그린 거의 최초의 누드화일 것이다.


그 당시 스페인의 종교적인 위신상 누드화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었기에

이 그림은 단지 개인적으로만 전시되었을 것이다.

<브레다의 항복> 캔버스에 유채 / 307×367cm / 1634~1635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9a실


〈브레다의 항복〉은 펠리페 4세의 명에 따라 여러 화가들이 부엔레티로 궁정의

‘세계의 전당’이라는 방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열두 점의 작품 중 하나로,

1625년 남부 네덜란드의 주요 요새 브레다 시가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항복한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다.


펠리페 4세 시절 30여 년간 끌어온 전쟁은 결국 네덜란드의 독립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 전투만큼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용맹하다고 소문난 장수를 무찔렀다는 일화로 인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치적을 과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림 중앙에는 주인공 격인 두 남자가 서 있다.

왼쪽은 브레다 성의 유스티누스 판 나사우(Justinus van Nassau, 1559~1631) 장군이다.


브레다 성의 열쇠를 바치는 패장의 얼굴에는 슬픔과 체념이 가득하다.

오른쪽은 스페인의 암브로조 스피놀라(Ambrogio Spinola, 1569~1630) 장군인데

자세를 낮춘 네덜란드 장군의 어깨에 한 손을 얹은 채 그의 얼굴을 따사롭게 쳐다보고 있다.


그는 상대 장군이 들고 있는 열쇠에 굳이 시선을 맞추지 않음으로써 패자에 대한 예를 다하고 있다.
스페인은 넉 달 동안 브레다 성을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성 내부로 가는 모든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고 고립시켜 승리를 얻어냈다.


네덜란드는 명예 항복을 요청했고, 이에 스페인은 그들이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한 채

성을 떠나도록 허락함으로써 승국의 관용까지 과시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는 스페인의 사기를 한층 드높였으며, 스페인 최고의 극작가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Pedro Calderon de la Barca, 1600~1681)에 의해 연극으로까지 상연되었다.


벨라스케스가 이 연극을 보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스피놀라 장군 뒤로 하늘을 향해 빽빽이 치솟은 창들의 질서정연함은 승전국 병사들의 기개를 적절하게 표현해내고 있는데,
덕분에 작품 제목이 〈창검〉으로 불리기도 했다.


화면 오른쪽을 압도하는 말의 뒷모습은 네덜란드 장군의 뒤편에 서 있는 말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등장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하나씩 따로 떼어놓고 보면 개인 초상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사실감이 압도적이다.
실제로 몇몇 인물들은 벨라스케스와 친분이 있었고, 개인 초상화도 이미 제작한 적이 있었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 곳곳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불러일으키는 묘한 신비감은 색과 빛,

그리고 대기의 흐름을 잡아내는 데 치중한 베네치아 화가들을 연상시킨다.


전쟁을 주제로 하는 그림들은 이 그림과 마찬가지로 후경은 격전지

혹은 전투 장면을 연상시키는 배경으로 하고 전경에는 중심 인물들을 배치하곤 했다.


벨라스케스는 모든 수사적 기교를 배제하고, 이 사건의 핵심인 인간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줄을 맞춰 선 군인들은 어떤 과장된 몸짓도 취하지 않으며, 정복된 자와 정복한 자를 구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군인들에게 전쟁이란 영웅적 행위의 여지가 없는 단지 소모적이고 더러운 사업일 뿐이다.


벨라스케스는 모든 수사적 기교를 배제하고, 이 사건의 핵심인 인간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줄을 맞춰 선 군인들은 어떤 과장된 몸짓도 취하지 않으며, 정복된 자와 정복한 자를 구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군인들에게 전쟁이란 영웅적 행위의 여지가 없는 단지 소모적이고 더러운 사업일 뿐이다.

 실 잣는 사람들(아라크네의 우화). 캔버스에 유채 / 220×289cm / 1657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5a실


이 작품은 아라크네에 관한 고전 신화를 복잡하고 높은 지적 수준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이 이야기는 로마 시대의 작가,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Metamorphoses)>에 등장한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리디아의 염색(染色)의 명인 이드몬의 딸인 아라크네는 베 짜는 솜씨가 뛰어나

여신 아테나보다도 자기가 훨씬 낫다고 뽐냈다.


이 소문을 들은 아테나는 노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녀를 찾아가 신을 욕보이는 언행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였으나
그녀는 듣지 않고 결국 아테나와 베 짜는 기술을 겨루는 시합을 열어 솜씨를 겨루었다.


아테나는 아라크네가 그녀보다 훨씬 베를 잘 짜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라크네가 짠 타피스트리 그림의 주제가 문제였다.


아라크네는 아테나의 아버지인 제우스가 님프인 유로파를 납치하기 위해

황소로 변신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꾸몄고, 아테나는 진노해 아라크네를 거미로 변신시켰다.


이 그림에서는 두 개의 내용이 등장한다.

먼저 전경에는 산타 이사벨의 로열 타피스트리 공방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의 두 단계가 묘사되어 있다.


후경에는 유로파의 납치에 대한 내용이 직조된 타피스트리가 벽에 결려 있다.

그 앞에는 갑옷을 입은 아테나가 아라크네를 응징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여인이 벌을 주고 있는 아테나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아라크네다.

전경의 베 짜는 풍경은 베 짜기 시합을 묘사하고 있다.


아라크네가 털실을 감을 동안 아테나는 물레를 돌리고 있다.

연구자들은 이 작품에서 벨라스케스가 회화 장르의 고귀함을 강조하면서

벨라스케스 자신이 최고라고 단언하고 있음을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작품은 원래 궁정 사냥꾼인 페드로 데 아르스(Pedro de Arce)의 주문으로 그려졌다.
작품의 가장자리 부분은 1734년 마드리드의 알카자르 궁전(Alcázar Palace)의 화재로 손상을 입은 후 수리되었다.


이후 1734년부터 1772년까지 부엔 레티로 궁전(Buen Retiro Palace)에 보관되다가
이후 1772년부터 1794년까지 마드리드의 왕실이 소장하고 있는 재산 목록에 기재되어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의 소장품이 된 것은 1891년의 일이었다.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캔버스에 유채. 209×125cm. 1626~1627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궁정화가로서 벨라스케스가 해야 할 가장 큰 의무는 왕가 일원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사진보다 더 정확해 보이는, 그야말로 사실성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왕실 초상화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남긴 가장 특별한 유산이었다.


유럽 그 어느 궁정도 벨라스케스가 있던 스페인만큼 훌륭한 초상화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발타사르의 카를로스 왕자는 펠리페 4세의 아들로 16세에 요절했다.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의 기마 초상〉캔버스에 유채. 211.5×177cm. 1635~1636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앞발을 든 말에 타고 있는 것은 승마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기교로,

인물의 권위를 한층 더 강조할 수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겨우 혼자서 뛰는 것도 힘들었을 어린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마저도

이 고급 기술을 구사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왕비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234 x 132 cm. 1652~1653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펠리페 4세는 첫 아내인 이사벨과 사별한 후 누이의 딸, 즉 조카인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나와 재혼했다.
원래 마리아나는 펠리페 4세의 아들과 ‘4촌 결혼’을 계획했으나, 전처와 사별한 삼촌과의 결혼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시녀들〉의 희미한 거울 속에 왕과 함께 등장한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역시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비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는데, 화려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옷과 머리 장식,
커튼 등에서 마치 마감이 덜 된 듯 붓 자국을 강하게 남기는 벨라스케스다운 대담함이 돋보인다.


〈시녀들〉의 공주를 그린 〈도냐 마리아 마르가리타 공주〉는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그린 작품인데,
그녀는 열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왕인 레오폴드 1세와 결혼했다.


족보상으로 남편은 그녀의 외삼촌이었다. 지속되는 근친혼의 결과 약골인 그녀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죽던 해에 그린 미완성 작품을 그의 사위인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가 마감했다.


<이사벨 데 보르본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301×314cm. 1634~1635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펠리페 3세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 305×320cm / 1634~1635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정략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 유지하였고 왕가의 근친혼도 불사했다.
그로 인해 조산, 기형, 단명 등의 후유증 역시 극심했는데,
펠리페 4세의 경우는 대대로 이어온 부정교합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 없어 늘 병치레를 해야 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펠리페 4세의 초상화에서 눈에 띌 정도로 튀어나온 그의 아래턱이

바로 그 병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마르그리트 왕비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297×309cm. 1634~1635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벨라스케스는 왕가 일원의 기마상 초상도 다수 제작하였다.

펠리페 4세의 첫 왕비인 〈이사벨 데 보르본의 기마상〉이나 그 뒤를 이를 후계자로 지명된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의 기마상>

그리고 익명의 원작을 수정하고 크게 보완하여 조수와 함께 제작한〈펠리페 3세의 기마상〉과

그 아내이자 펠리페 4세의 어머니인 〈마르그리트 왕비의 기마상〉 등은 올리바레스 백작의 주도에 따라 건축된

마드리드 근교의 새 궁전 부엔레티로의 접견실을 꾸미기 위해 제작되었다.


기마상은 소위 ‘야생의’ 거친 말을 길들이고 다룰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구에서는 최고 권력가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자주 그려졌다.


〈펠리페 4세의 기마상〉은 모자의 장식깃이나 갑옷의 문양, 소맷부리, 그리고 손 등에 다소 거친 붓 자국을 남김으로써
그림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잔뜩 품어낸다.


벨라스케스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종으로 소문난 스페인산 말을

왕실 마구간에서 면밀히 관찰한 뒤 그 자세와 형태를 정확하게 그려냈다.

그의 기마상 시리즈 속 말들의 사실감 넘치는 표현은 눈여겨볼 만하다.


〈펠리페 4세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303×317cm. 1634~1635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올리바레스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313×239cm. 1636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올리바레스의 기마상>은 그가 비록 왕족은 아니지만, 그만큼의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소위 기마 초상화는 당시까지만 해도 주로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펠리페 4세의 기마상과 마찬가지로 올리바레스가 타고 있는 말도 두 앞발을 치켜들고 있다.


 참고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1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8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