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 광상곡 1〉, 부식동판화. 13.5x11cm. 1797~1798년 제작.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교차하는 시대를 살았던 그는

뛰어난 초상화가이자 풍속화가로서 명성을 드높였다.

 

고야는 귀족적인 화려함과 민중적인 빈곤함을 모두 경험했다.

그를 단지 궁전에 봉사했던 화가로만 본다면

그의 예술은 다른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천편일률적인 찬사만을 받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동시대를 살았던 힘없는 스페인 민중들의 고통과 절규에 귀 기울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층의 무지와 포악함에 촉각을 세우고 그림으로 표현해 냈다.


고야가 살았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앙시앵 레짐(전제정치)에서 시민 사회로 이전하는 혁명의 시대였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왕정을 몰아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고야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그해에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그가 궁정화가로 있던 1808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을 침략했다.

그는 참혹한 정복전쟁의 고통을 맛보았다.


고야는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받아들인 진보적인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시민 사회를 추종한 혁명의식을 가진 화가였다.


고야는 청력을 잃으면서 특이하고 병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뒤틀리고 난해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판화집 〈광상곡 변덕〉 시리즈다.


에칭 형식으로 구현된 80여 점의 동판화에는 고야의 모습도 들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광상곡: 자화상 1〉이다.


작품 속 화가의 표정은 매우 불만에 가득 차 있는데, 이는 당시 부패한 성직자와 무자비한 전제군주와

그 사이에서 기생하는 귀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무언의 항의로 해석된다.


당시 프랑스 계몽주의에 깊이 경도돼 있던 고야는

이 판화집에 수록한 어둡고 기괴한 작품들을 통해서 부조리한 사회를 꼬집었다.


그러나 이 판화집이 종교재판에 회부될 것을 걱정한 고야는,

시장에 내놓은 지 열흘도 안 되어 모두 회수하고 만다.
사회 풍자를 통한 계도적 효과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카프리초스> 연작 중 ‘다 뜯기고 간다’1799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비록 왕가의 녹을 받으며 처세술에도 강한 고야였지만, 그는 분명한 계몽주의자였다.
무지한 백성들에 대한 비판, 탐욕으로 정신줄을 놓은 성직자들, 마녀사냥에 열을 올리는 종교재판소,

착취를 일삼는 귀족과 먹고 놀기에 급급한 이달고나 한량 등을 비판하는 판화집 <카프리초스: 변덕>은

‘깨어 있는 이성’에 대한 고야의 동경을 의미했다.


이런 저런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며 살던 고야는 때론 비판의 그림을,

때론 생계를 위한 타협의 그림을 반복하며 자기 앞의 생을 이어나갔다.


말년에 그는 마드리드 교외에 집을 구했다.

이미 병으로 청력까지 상실한 고야는 심각하게 쇠약해진 상태에서

첫 부인과 사별한 뒤 만난 마지막 연인 레오카디아 웨이스와 함께 지낸다.


정식 결혼이 아니어서 구설수에 오르내리기 쉬운 이 관계를 숨기느라 레오카디아 웨이스는 가정부로 위장했고,

고야는 외부인의 출입을 되도록 금한 채 은둔하다시피 살았다.


고야는 일명 귀머거리의 집이라 불리는 그 집의 방 두 개의 벽에 석고를 바른 뒤 유화를 사용해 그린 그림으로 가득 채웠다.
그림들은 주로 검은색과 흰색, 그리고 갈색조를 이루고 있어 ‘검은 그림’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현재 캔버스에 유화로 옮겨져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 혹은 보관되고 있다.

〈이성이 잠들자 악마가 태어나다〉(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 판화, 1799,


위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1799년에 출판한 80점의 판화 연작 ‘카프리초스’ 중 한 점인 ‘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낳는다’는 그의 이러한 대중의 불안과 불신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두 팔을 베고 엎드린 화가 자신은 곧 잠자는 이성이고

그 사이에서 활개 치는 올빼미와 박쥐 떼는 광기와 무지를 상징한다.


물론 이 판화는 이성을 잠재우면 인간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상상력, 감정이 자연스레 분출되고 심

지어 악몽 같은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그 모습을 선명히 드러냄으로써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악몽 같은 무의식의 세계는 여기에서는 개인의 무의식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무의식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 무의식의 세계는 프로이트의 출현까지 100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프로이트조차도 사회적 무의식보다는 개인적 심연의 무의식에 초점을 맞추어 정신을 분석한다.

사회적 무의식이 어떻게 개인적 무의식에 침잠하게 되는지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귀머거리의 집 (Quinta del Sordo)


47세에 앓은 병으로 이후 반평생을 귀머거리로 산 고야는 말년에

마드리드 외곽에 위치한 전원주택을 구입해 은둔생활을 했다.


이 집의 별칭은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였는데,

이 전의 주인 역시 귀머거리여서 이런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고야는 귀머거리의 집 1층과 2층에 각각 7점씩 14점의 벽화를 장식하였는데,

석회벽에 직접 유화물감을 채색하여 일반적인 벽화 채색양식과 다른 방법을 이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그림들은 검은 그림들(Black Painting)로 불리워지는데,

그 색채와 주제가 음울하고 괴이하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안식일> 1820~23년, 회벽에서 캔버스로 옮김, 140x438cm, 프라도 미술관


그림을 보면 염소 머리를 한 악마가 둥그렇게 무리를 이뤄 쭈그리고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무엇인가 설교하고 있다.
마법사들은 저마다 겁에 질려 있는 표정이다.


금방이라도 자신들에게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닥치리라는 공포감에 저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작품 역시 흑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고 점이나 마법사들이 광기 어린 눈동자를 하고 있는 점이 사티로스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고야 생존 당시 대중의 미신, 특히 마법사에 대해 품고 있는 두려운 감정은 심각한 수위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계몽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은 자유주의자였던 그에게 이런 대중의 미신 숭배는 사회의 안정을 저해하는 위험천만한 행위로 비쳤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대중의 무지를 사탄의 발호로 규정하고 무자비한 마녀사냥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려던 교회와 왕정의 구태의연한 중세 회귀적 행태였다. 


‘마법사의 안식일’은 곧 대중의 무지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구세력이 자행하고 있는

또 다른 무지를 동시에 신랄히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참화> 부식동판. 1820년대 제작. 프라도 미술관


이웃나라 프랑스는 스페인과 달리 변혁의 시대를 구가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라는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켰다.


고야는 나폴레옹이 스페인 민중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세운 스페인 왕조(조셉 왕)에서 궁정화가로 봉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에서 자행되었던 점령자 프랑스군의 전횡을 목격했고,

그 경험은 〈전쟁의 참화(Desastres de la Guerra)〉라는 연작 판화를 낳았다.


이 작품은 1810년에 착수하였지만 찍어 내지는 못하고,

훗날 그가 프랑스로 이주했을 때 거기서 한정판으로 찍어 냈다.


<전쟁의 참화〉에서 고야는 죄 없이 학살당한 민중들의 모습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표현해 냈다.
때론 이 사실적 표현이 너무나 참혹하고 혐오스러워서 초현실적으로 비춰지기까지 했지만,

그림 속 잔혹함은 현실이었다.

<그들은 예하고 선착 구혼자에게 손을 내민다> 18×12.5cm.

They Say Yes and Give their Hand to the First ComerEtchingPrivate collection.


결혼을 통해서 사회적 지위와 부를 획득하는 당대의 악습을 풍자한 그림.
신부가 아버지인 듯한 남자에 의해 계단 위로 인도되고 뒤에는 호색적인 미소를 띤 신랑이 뒤따른다.

신부가 쓰고 있는 가면은 위선을 상징한다.

신부의 머리 위에 기만적인 결혼 현장을 냉소적으로 비웃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치아를 사냥하다(Out Hunting For Teeth)> 1797~1798년 제작. 판화시리즈. 18×12.5cm.


주술에 사용할 마법약을 만들기 위해서 두려움에 떨며

사형수의 시신에서 이를 뽑는 젊은 여인을 그린 작품.

<이래도 그는 그녀를 알 수 없다(Even Thus he cannot make her out)> 18×12.5cm.


단안경으로 살펴보지만 신사는 여자의 외모와 미소에 현혹되어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비틀어진 둔부와 돌려진 두 발은 당시의 마드리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매춘부의 표정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다.

<신이여 용서하소서. 이 사람은 어머니입니다(For Heaven's sake-and was her Mother)> 18×12.5cm.


어릴 때 시골에서 집을 나간 젊은 여인은 지금은 마드리드에 제일 비싼 매춘부가 되어 있다.
구걸하는 노파를 쫓아버렸지만 끝까지 뒤따라와 '누가 이리 귀찮게 구나" 싶어 뒤돌아보니 어머니가 아닌가.

당시 스페인 사회의 한 단면이다.


<우리를 풀어줄 사람은 없는가?(Can't Anyone untie us?)> 18×12.5cm.


한 쌍의 남녀가 한 나무 속에 묶여 안경낀 올빼미의 발톱 아래에서 서로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무의 기둥은 남자의 오른 다리와 연결됨과 동시에 여자의 양 팔은 나뭇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남녀는 서로로부터 자유스러워지기를 원하지만 율법의 화신인 올빼미가 이들의 불리를 막기 위해 여자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다.
이혼을 금지하는 교회의 독단을 비판하고 있다.


참조 : https://blog.naver.com/rsk1227/80161205134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600010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da1201&logNo=221373561025
http://magazine.hankyung.com/money/apps/news?popup=0&nid=02&c1=2004&nkey=2012122400091069542&mode=sub_view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sk1227&logNo=8016120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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