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4세의 가족〉, 캔버스에 유채, 1800, 280×336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태피스트리 화가로 활동하던 고야는 초상화로 각광받으면서 왕실 화가로 등극하게 된다.
초상화는 오늘날의 인물 사진이 과감한 후 보정을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모델을 실제 생김새보다 다소 미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현실 감각이 뛰어난 고야 역시 왕실 화가로서,
궁정 인물들의 초상을 가능한 한 세련되고 우아하게 포장하는 일에 서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걷는 왕가에 스페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품는 불만을
무조건 숨기고 있을 수 만은 없는 반골 기질도 분명히 있었다.
이 작품은 그가 오랫동안 모신 카를로스 4세 왕가의 집단 초상화이다.
얼핏 보면 잠시 틈을 내 모인 왕가의 일원들이 번쩍거리는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채
자신들의 권위를 한껏 과시하고 있는 모양새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많은 부분에서 이 무능력한 왕가를 고야가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통 정중앙에는 왕이 차지하고 있기 마련인데 그곳에 왕비가 서 있다는 사실은
무너진 가장의 위상을 가늠하게 한다.
이가 성하지 못했던 왕비의 합죽한 얼굴, 그 얼굴보다 더 두터운 거대한 팔뚝 등은
고야가 그녀를 위해 그 어떤 이상화도 시도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왕의 모습도 마치 술에 취한 듯 얼굴 가득 붉은 기운이 감돌아 어딘가 모르게 얼빠져 보인다.
도드라져 보이는 매부리코는 붓 끝만 조금 줄였어도 충분히 감출 수 있었겠지만 고야는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
튀어나온 배는 왕의 게으름을 짐작하게 한다.
이 두 부부 이외의 인물들도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곤 죄다 멍해 보이거나 야릇해 보인다.
카를로스 4세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가 재상인 고도이와 놀아나는 것을 묵인했을 뿐 아니라,
그에게 모든 국사를 맡겨버린 채 사냥에만 몰두했다.
고도이와 왕비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하늘을 찌르는 동안 둘의 사랑은 훨훨 타올라
왕비가 낳은 두 아이가 고도이의 자식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두 아이는 왕비 좌우에 서 있다.
카를로스 4세는 수많은 실정을 저질렀고, 결국은 아들 페르난도 7세에 의해 폐위되는 치욕까지 맞보았다.
그림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바로 아버지를 배반한 페르난도 7세이다.
고야는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수많은 왕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중 특히 유명한 것이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다.
이 작품은 흔히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과 비교되곤 하는데,
왕실을 배경으로 한 두 작품 모두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벨라스케스에 비해 고야는 매우 희미하게 묘사돼 있다.
이 작품을 두고 존경하는 벨라스케스에 대한 오마주라고 평하기도 한다.
한편,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수가 모두 열세 명이었는데, 서양에서 13을 불길한 숫자로 여기기 때문에
화가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모습을 추가했다고 하는 재미있는 속설도 전해진다.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기마 초상화> 1799, 캔버스에 유채, 338x282cm.
이 초상화는 카를로스 4세의 부인인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기마 초상화다.
카를로스 4세의 기마 초상화와 한 쌍을 이루는 작품인데,
전시실 안에서도 두 작품이 마주보게 전시되어 있다.
굳이 왕이 아니라 왕비의 초상화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 왕비를 그린 초상화 중에서 아마도 이런 초상화는 드물지 않을까 싶어서다.
카를로스 4세의 기마 초상화와 더불어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초상화에서는
벨라스케스의 영향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말의 자세, 풍경 등이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실 기마 초상화와 꽤 닮았다.
고야는 ‘나의 스승은 자연, 벨라스케스, 렘브란트다’라고 할 정도로
벨라스케스를 존경했으며 그의 그림을 연구했다.
마드리드에서 궁정화가가 된 이후에는 벨라스케스의 작품들을 판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백 년이 넘는 시대 차이가 나기도 하고,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스페인 왕은
지난 시절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번쩍거리는 장식을 두른 초상화를 공식 초상화로 내놓을 수가 없었다.
이웃 나라에서는 왕이 단두대에 오르는 와중에(게다가 사형당한 프랑스 왕과 스페인의 왕은 친척이었다)
왕이 사치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과 왕비는 벨라스케스 시대의 왕보다 훨씬 수수한 옷을 입고 있다.
마리아 루이사 왕비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자.
옛날에 여자들은 말을 탈 때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몸을 옆으로 돌려서 말을 탔다.
다리를 벌리고 말의 몸 한쪽에 한 발씩을 놓고 등자에 발을 걸친 자세는 남자들만의 자세였다.
아마도 여자들만의 말 타는 기술이 있었을 것이다.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서 말을 타자면 등자를 이용할 수 없으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남자처럼 다리를 벌리고 앉아 등자에 발을 걸친 채 말을 타고 있다.
게다가 등은 꼿꼿이 세우고,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턱을 살짝 든 자신만만한 자세다.
왕비는 이런 사람이었다.
무능하고 특별한 성격 없는 카를로스 4세에 비해 왕비는 남편을 휘어잡고,
자기의 젊은 애인을 총리 자리에 앉히는 여자였다.
카를로스 4세는 좋게 말하자면 사람 좋게, 안 좋게 말하자면 조금 ‘맹하게’ 생겼다.
기세등등해 보이는 왕비와 기싸움에서 밀리게 생긴 것이다.
고야는 이런 식으로 왕비의 성품까지 초상화에 잘 녹여 냈고,
왕비는 이 초상화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오수나 공작 부부와 자녀들> 캔버스에 유화. 174 x 225 cm. 1787~1788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고야의 재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의 진수는 초상화에서 잘 나타난다.
오수나 가문은 스페인 귀족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항력 있는 가문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고야는 왕실 사람들의 멋진 모습이 아니라 약간 겁먹은 듯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수나 공작은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거물이지만,
고야가 보기에는 약한 식솔들을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무능한 아버지일 뿐이다.
오수나 부인은 뛰어난 여인으로, 아이가 넷이었던 첫번째 가족을 잃은 후,
두 번째 가정에서는 좋은 어머니가 되려고 애썼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몸에서 여성적인 면은 전혀 보이지 않고,
꼿꼿하게 윗몸을 세운 모습에서는 도도함만이 느껴진다.
측은해 보이는 아이들은 착하게 행동하려고, 눈을 크게 뜨고 화가를 주시하고 있다.
여기서 자유롭게 놀고 있는 대상은 개뿐이고,
다른 이들은 모두 '오수나 가문의 사람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짓눌려 있다.
고야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아무런 주석도달지 않는다.
그는 그저 보여줄 뿐이다.
〈친촌 백작부인〉1800, 캔버스에 유채, 216x144cm. 프라도미술관
작품 속 젊은 귀부인은 친촌 백작부인(La condesa de Chinchón)이다.
남동생이 친촌 백작 작위를 받았으나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면서 작위를 누나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왕인 카를로스 4세와는 사촌 간으로, 왕의 최측근인 마누엘 고도이와 결혼했다.
물론 이 결혼은 정략적인 결혼이었는데, 그래도 이 젊은 여인은 남편을 꽤 좋아했다고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마누엘 고도이는 왕비의 애인이었고, 물론 그에게는 왕비 외의 다른 애인도 있었다.
고야가 이 여인을 그린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닌데, 백작부인의 아버지이자 카를로스 3세의 동생인
인판테 돈 루이스(Infante Don Luis) 가족의 그룹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고,
3살 때의 백작부인을 단독 초상화로 그린 적도 있었다.
이 초상화를 그릴 때 스무 살이었던 백작부인은 임신 중이었고,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초상화 모델로 앉아 있을 때 남편인 마누엘 고도이가 언제 오는지 하도 기다리는 통에
약간만 인기척이 나도 뒤를 자꾸 돌아봤다고 한다.
이런 상태를 표현한 고야의 방식은, 화면 왼쪽 앞을 향해 앉아 있지만
고개는 약간 오른쪽 뒤로 돌리고 있는 백작부인의 자세다.
남편을 좋아하는 마음은 부인의 손에 있는 반지에서도 보인다.
반지에 작고 둥근 미니어처 초상화가 붙어 있는데, 남편 고도이의 초상화라고 한다.
고야는 모델의 아버지인 돈 루이스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을 테고,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아이가
자라서 결혼하고 아기까지 가진 것을 보고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고도이와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남편을 좋아하는 젊은 부인이 애처로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야는 백작부인을 청순하고 연약하게 그렸다.
어쩌면 임신한 여인들 특유의 분위기일지도 모르겠다.
이 초상화에는 모델인 친촌 백작부인의 감정뿐만 아니라 화가인 고야의 감정도 투영되어 있다.
이것이 고야의 초상화가 가지는 특징이자 힘이다. 바로 대상의 내면까지 잘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림 표면으로 눈을 돌리면, 이 그림에 쓰인 색채는 단순하다.
배경의 어두운 색과 드레스의 크림색, 드레스 끝자락과 머리장식에 추가된
약간의 파란색 정도가 전부인데도 화폭은 매우 아름답게 빛난다.
드레스의 빳빳한 질감과 빛을 반사해서 빛나는 천의 느낌도 좋다.
고야가 얼마나 색을 잘 다루는 화가인지를 보여 주는 예다.
당시 아카데미풍의 신고전주의 화가들은 다양하지만 차가워 보이는 색으로 그렸던 것에 비해
고야는 밝게 빛나는 화폭을 만들어 냈다.
고야가 동시대의 화가들과 얼마나 다른 그림을 그렸는지는
프라도 미술관 0층에 전시된 신고전주의 작품들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 작품을 미술관에서 직접 본다면 작품의 표면이 갈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친촌 백작 가문의 후손들이 그림을 소유하고 있다가 2000년에 프라도 미술관에 소유권을 넘겼는데,
적절한 환경에서 보관되지 못했기 때문에 작품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럼에도 백작부인의 얼굴빛이라든가 자잘하게 수놓인 빛나는 드레스 등의 아름다운 색감은 여전하다.
<파라솔> 캔버스에 유채. 104cmx152. 1777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고야는 궁정화가였던 처남 바예우(Francisco Bayeu, 1734-1795)의 알선으로
1775년부터 마드리드의 산타바바라 태피스트리 공방에서 장식디자이너로 일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일 년여 만에 고야는 엘 파르도 궁으로 보낼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맡게 되었고, <파라솔>도 그때 그려진 것이다.
이 밑그림을 바탕으로 완성된 태피스트리는
엘 파르도 궁의 식당 벽에 걸렸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유실되었다.
엘 파르도 궁은 카를로스 4세가 왕세자(아스투리아 공작) 시절에 거처로 사용했고
즉위한 후에는 왕비 마리아 루이자와 함께 겨울을 지내는 별궁으로 삼았다.
훗날 고야는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을 신랄한 필치로 묘사한 인상적인 그룹초상화를 그렸다.
고야의 초기작에 속하는 <파라솔>은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채와 경박한 느낌이 지배적이다.
예쁘장한 소녀가 풀밭에 앉아 있고 소년은 녹색 양산을 펼쳐 들어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고 있다.
마치 스크린처럼 옅게 채색된 풍경이 사랑스러운 두 인물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만든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젊은 멋쟁이들로 여성은 마하(Maja), 남성은 마호(Majo)라고 불렸다.
마하, 마호는 집시 풍의 화려한 옷차림과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당시 마드리드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귀족들마저 이들의 유행을 따라 할 정도였다.
풍성한 노란 스커트와 몸에 꼭 맞는 하늘색 상의
그리고 흰 망토를 걸치고 풀밭에 앉아있는 마하는 인형처럼 예쁘장하다.
양산이 마하에게 작은 그늘을 드리워주고 있지만,
노란 스커트에 반사된 빛이 마하의 얼굴을 은은하게 밝혀준다.
입가에 요염한 미소를 띠고 관람자를 빤히 바라보는
마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당돌한 매력을 뿜고 있다.
마하의 무릎 위에는 검은 털을 가진 작은 강아지가 웅크리고 있다.
맑고 산뜻한 햇살 아래 바람이 부는 지 나뭇가지들이 오른쪽으로 휘어 있고 나뭇잎은 바람에 나부낀다.
한가롭고 유쾌한 정경이다.
<파라솔>은 별 볼 일 없는 시골 출신의 무명화가가 마드리드에 입성해서
18세기 스페인 미술의 역사를 새롭게 쓴 대가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의 첫 단계를 보여준다.
아직 고야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필치가 나타나지 않고 다소 어색한 표현도 보이는데,
아마도 장식품의 도안으로서 주제나 형식 면에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고야가 이때 그린 밑그림들은 사냥, 소풍, 어린아이들의 놀이, 장터 등
시골의 풍경과 풍속을 다루고 있다.
당시 왕실의 취향이 신화적 주제나 역사화 일변도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대중적인 주제로 변화하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란시스코 데 고야 〈겨울-눈보라〉 캔버스에 유채. 275×293cm. 1786~1787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고야가 소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것은 〈파라솔〉처럼 성 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왕실 여자들에게
스페인 사람들의 낙천적인 일상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신화나 종교적 주제를 다루는 ‘역사화’에 대한 왕실의 선호가 주춤하기 시작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18세기가 무르익으면서 프랑스를 위시한 서구 미술계는 딱딱하고 고루한 역사화보다는
귀족들의 향락적인 문화를 담는 아기자기하고 세속적인 로코코 미술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왕가 역시 프랑스 왕가 부르봉의 혈통으로 이어지면서 소위 ‘프랑스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두드러졌고,
로코코 역시 그런 연유에서 자연스레 흡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이 퇴폐적이기까지 한 귀족 놀음들에 대한 계몽주의의 비판이 거세지자
스페인 지식인들 역시 각성하기 시작했다.
〈겨울-눈보라>나 아래 그림 <부상당한 석공>은
가난하고 혹독한 삶을 겪어내고 있는 스페인 소시민들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부상당한 석공〉 캔버스에 유채 / 268×110cm / 1786~1787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부상당한 석공〉은 원래 술 취한 사람을 동료들이 옮기는 내용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고야는 가톨릭의 엄격함이 몸에 베어 있던 스페인 왕실에서 술에 취해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들의
추태나 주사를 혐오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이를 부상당한 모습으로 바꾸어 버렸다.
졸지에 이 작품은 소위 산업재해보험처럼, 작업 중에 부상당한 노동자들에게 국가가 지원하는 법령을
막 발표한 왕실의 업적을 선전하는 그림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기게 되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결혼〉 캔버스에 유채 / 267×293cm / 1791~1792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결혼〉은 소시민들의 생활상을 담은 네덜란드 장르화의 전통을 일견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장르화는 신화, 종교의 역사적 주제를 벗어난,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가감 없이 묘사한 그림을 일컫는다.
정중앙 검은 옷을 입고 화면 왼편을 바라보는 신부의 얼굴은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설렘보다는
왠지 슬픔과 체념, 그리고 두려움이 더 가득해보인다.
그런 신부의 뒤를 쫓는 붉은색 옷차림의 남자는 여자들이 애정을 느끼기 힘든 추남으로 그려져 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돈에 의해 팔리다시피 하는 가난한 여자의 모습을 담은 슬픈 풍속사라 할 수 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꼭두각시〉 캔버스에 유채 / 267×160cm / 1791~1792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꼭두각시〉는 한편으로는 귀족 여인네들의 즐거운 놀이문화를 담은 로코코 풍의 유쾌한 그림으로도 볼 수 있지만,
돈 많은 여자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조롱거리로 만들고 살아야 하는
광대의 슬픔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포도수확> 1786년. 캔버스에 유채. 190 x 275 cm. 프라도 미술관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4XXX6600020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5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53
'▷ 인문기행 > 스페인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 프란시스코 고야 / 검은 그림들 <로스 카프리초스> 연작 (0) | 2018.10.12 |
---|---|
11. 프란시스코 고야 / 아들을 잡아 먹는 사투르누스, 거인, 카프리초스 연작 등 (0) | 2018.10.12 |
09. 프란시스코 고야 / 자화상, 1988년 5월 2일, 옷 벗은 마야 등 (0) | 2018.10.09 |
08. 디에고 벨라스케스 / 이솝, 광대, 난장이, 바쿠스, 대장간 등 (0) | 2018.10.09 |
07. 디에고 벨라스케스 / 비너스, 브레다의 항복, 실 잣는 사람들, 기마상 등 (0) | 2018.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