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
근대 미술로 이끄는 안내자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작품을 통해 불멸의 삶을 살던 거장들의 영향력도 영원하지는 못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했고, 미술계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거장들의 후광에 힘입어 이탈리아는 유럽의 모든 화가들에게 여전히 성지로 자리매김 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독일에서는 루벤스라는 걸출한 화가가 바로크 미술을 열었고,
프랑스에서는 푸생이라는 매우 사색적인 화가가 고전주의 회화의 한 획을 그었다.
유럽의 미술이 르네상스라는 출발점에서 바로크라는 종착지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새로운 전환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벨라스케스가 죽은 뒤 스페인은 유럽 미술계에서 거의 유명무실한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몇몇 화가들이 벨라스케스가 일구어낸 서유럽 르네상스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그러나 변혁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나는 아이러니한 변종과 같은 것이다.
'미술사의 전환'을 이끌어갈 주인공이 변방 스페인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변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고야였다.
후대 미술사가들은 스페인 동북부 시골 출신의 이 화가가 '근대 미술'로의 전환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고야가 그러한 변화를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고야는 극적인 사실주의화로 유명한 18~19세기 스페인의 궁정화가이다.
주요 작품은 <전쟁의 참화>. 사라고사와 마드리드에서 공부한 후 이탈리아로 유학했고,
사라고사로 돌아와 대성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일을 맡았다.
초기에는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다양한 세상을 묘사하고 풍자하는 자신만의 다양한 양식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카를로스 4세 때 궁정화가가 되어 스페인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침략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의 공포와 비참한 결과을 담은 <전쟁의 참화> 연작 동판화를 그렸다.
마드리드의 민중봉기를 극적인 사실주의로 표현했으며,
이때의 인상주의적 양식은 후에 19세기와 20세기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귀먹은 화가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15, 46×35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고야의 자화상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1815년에 제작된 〈귀 먹은 화가의 자화상〉이다.
1792년경 겨울, 고야는 세비야를 여행하던 중 이름 모를 중병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게 된다.
이후 고야는 죽을 때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귀머거리로 살게 된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적막에서 오는 공포가 작품 속 화가의 표정에 잔뜩 묻어나 있다.
그래서인지 〈귀 먹은 화가의 자화상〉에는 화가의 오른쪽 귀가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적막함의 공포가 화가의 귀를 더욱 쫑긋하게 만든 것이다.
〈화실에서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791~1792, 42×28cm, 스페인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
고야와 같이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는 화가의 작품들,
그 중에서도 특히 화가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자화상은 작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에게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시대의 변곡점의 중심에 서 있는 화가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고야의 자화상은 약 스무 점 남짓 전해오는데,
그 중 몇몇 작품은 화가의 삶을 여러 각도로 비추는 프리즘 같은 구실을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프리즘을 발광시키는 작품이 바로 〈화실에서의 자화상〉이다.
밝은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을 배경으로 서 있는 화가는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젤이 화면 밖으로 노출되어 있지 않아 화가가 무엇을 그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화가는 그림 밖 세상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 속 화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면
관람자가 화가의 모델이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고야는 자신을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림 속 화가는 스페인 전통 의상을 멋드러지게 입고 있는데,
이는 그림 밖에 있는 수많은 모델들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고야의 아내 <호사파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205 x 130cm. 1799년. 프라도 미술관.
1773년 고야는 베이유의 여동생 호세파와 결혼한다.
그 후 그는 왕립 미술학회 회원이었던 베이유의 도움으로 엘 에스큐리알과 엘 파르도 궁전의 테피리스트 제작에 참여하여
5년 여 간에 걸쳐 42개의 패턴을 제작하게 된다.
고야는 이 작업으로 왕가의 주목을 받았고 성 프란시스코 성당의 제단화를 그려
실력을 인정받은 후 왕실 미술학회의 회원이 된다.
(그런데 위 그림은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그림이라고 하는 기록도 있다.)
<1808년 5월 2일 : 맘루크의 공격> 캔버스에 유채. 266 x 345 cm. 1814년. 프라도미술관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끝난 뒤 스페인 밖으로 추방당했던 카를로스 4세의 장남이
1814년에 페르난도 7세로 스페인에 돌아왔다.
그리고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운 마드리드 시민을 기리는 그림을 제작할 것을 고야에게 주문했다.
고야는 1808년 5월 2일과 이튿날인 3일에 일어난 사건을 두 점의 그림으로 제작했다.
먼저 〈1808년 5월 2일〉을 보자.
당시 나폴레옹 군대는 이집트에서 데려온 마멜루코 용병과 프랑스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터번을 쓰고 둥글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는 등의 아랍식 복장과 프랑스식 군복을 입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당시 마드리드에는 수도를 수호할 만한 군대도 없었기 때문에
마드리드 시민들은 맨손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은 짧은 칼, 밧줄, 나무 몽둥이를 들고 싸웠다.
이 날의 시민 봉기부터 프랑스에 맞선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땅바닥에는 프랑스 군인과 마드리드 시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앞줄의 마드리드 시민들은 말을 공격하고 마멜루코 용병을 칼로 찌르고 말에서 끌어 내리려 한다.
이 시기는 신고전주의가 유행했고 신고전주의자들은 역사화를 많이 제작했다.
그러나 고야의 작품이 다른 역사화와 다른 점이 있다.
역사화에는 늘 영웅이 등장한다.
민중을 이끄는 영웅이라든지,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영웅이다.
그러나 고야의 이 그림에는 그런 비장한 인물이 없다.
프랑스 군인들은 침략자니까 영웅일 리가 없고, 그렇다면 마드리드 시민은 어떤가?
가장 뒷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자.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한 무리의 무지한 군중들처럼 표현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시기에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태일 것이다.
붉은 바지를 입고 피를 흘리며 말에서 거꾸러져 있는 마멜루코 용병과 그를 찌르는 스페인 사람을 보자.
용병은 피도 많이 흘렸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것이 이미 죽은 것 같다.
칼로 그를 찌르는 사람은 그것도 알지 못한 채 그를 계속 찌른다. 희번덕거리는 눈에는 광기가 보인다.
흰 점 하나, 검은 점 하나로 광기 어린 눈을 완벽하게 그린 고야의 기법은 훌륭하다.
<1808년 5월 3일> 캔버스에 유채 / 268×347cm / 181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64실
그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 봉기에 가담했던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스 군대에게 처형당했다.
마드리드 시 외곽과 시내 곳곳에서 처형이 자행되었다고 하는데, 고야는 이 장면을 그린 것이다.
〈1808년 5월 3일(EI 3 de mayo en Madrid)〉에서 곧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표정과 반응은 다양하다.
기도하는 사람, 공포로 눈을 둥그렇게 뜬 사람, 좌절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두 팔을 벌리고 죽음을 마주보는 사람 등.
그러나 프랑스 군대는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은 자세로 총을 들고 아무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총살이 자행되는 순간의 프랑스 군대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일렬로 선 군인들과 마치 처형당하는 예수처럼 팔을 벌린 마드리드 시민 사이에는 불을 밝힌 초롱이 있어서
곧 죽게 될 사람을 밝게 비춘다. 고야의 남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응시한다.
고야는 전쟁의 공포와 프랑스의 점령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단순한 증인이 아니다.
그는 또한 나폴레옹이 패배하면 자신이 증오하던 반계몽적이고 중세적인 스페인의 보복이 시작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국왕의 초상화가였지만 영혼으로는 공화주의자였다.
예술가로서 완숙기에 도달한 1799년까지도 그는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완전히 귀먹게 되는데,
이 때문에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고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 고야는 1800년대 들어서는 로코코를 포기하게 된다.
대중적이거나 풍자적인 암시들을 단순화시켜 환상적으로 나타내는 사실주의,
1810년 경부터 우세하게 나타나는 검은색과 갈색의 굵은 터치를 비롯하여
만년의 여러 작품에서는 검은색이 강박적으로 나타난다.
검은색은 19세기 불안의 시대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색인지도 모른다.
실존적인 불안은 두 가지로 나뉘어 나타나게 되는데,
아예 예술적 형상을 엄청나게 화려한 칼라로 표현하거나
아니면 고야처럼 무의식의 세계를 검은색 톤으로 직접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적 불안의 감정적 동요는 고대 원시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내려온
"삶의 권태"하고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듯이 보이는데,
여기에는 역사에 대한 실망이나, 성적인 위기 또는 전통적인 신앙의 상실 등
매우 다양한 원인이 잠복해 있을 것이다.
고야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불안감은 고스란히 작품들 속에 표현되는데,
그 은밀하고 지속적인 내면의 불안은 곧 죽음과도 밀접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혁명"과 "나폴레옹의 제정"은 유럽 전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막연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중세의 꿈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
그 미지의 세계는 삶과 죽음이 직접적으로 교감하게 된다.
위의 1814년에 그린 <1808년 5월 3일>의 작품에서 검은색과 갈색 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1808년 5월 2일 프랑스의 스페인 점령에 대항해 스페인 반란군이 봉기를 일으키자,
그 다음날 그 보복 조치로 마드리드의 양민을 학살한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다.
좁혀진 공간이 총살형의 공포를 더한다.
이 그림은 회화의 역사에서 인간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첫 번째 그림일 것이다.
병사들은 자동인형의 상태로 축소되어 있고, 그들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감정 표현 없이 기계적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근대의 출현을 이 작품이 예고하는지도 모른다.
한편, 고야의 그로테스크한 판화 작품은 18세기 이후 여러 미술 사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고흐, 마네, 모네, 세잔과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서부터 들라크루아와 같은 낭만주의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고야에게 큰 영향을 받았음을 토로했다.
그의 판화집이 당시의 사회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미술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프랑스 작가이자 평론가인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는 『고야에 관해 논함』이란 책에서
"고야는 현대 회화의 전체적인 경향을 예견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옷을 벗은 마하〉캔버스에 유채 / 97×190cm / 1799~180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36실
기존의 누드화들은 대부분 신화 속 존재들을 그리고 있다.
물론 종교화에서도 누드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긴 하지만,
대부분 ‘이야기 전개상’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드물게 실제 여성의 누드를 그린 그림도 발견되지만,
대체로 화가가 자신의 연인을 담아 개인적으로 보관한 것이거나 습작용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는 스페인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멋쟁이 여자 한량 ‘마하’가
그야말로 별 이야깃거리 없이 나체로 누어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서 마하(Maha)는 집시에 가까운 자유분방한 여성을 뜻한다.
비너스 등 여성 누드화의 단골들은 인간이 아닌 상상 속의 인물(여신)들로,
9등신 8등신 등 완벽한 몸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그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타고 그려지기 시작했고,
따라서 화가들은 그 모델을 완벽한 비율의 과거 조각상에서 찾았다.
체모는 당연히 그리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의 머리카락마저 남성들의 경건한 마음을 들쑤신다고 여기던 옛사람들에게
차마 체모를 드러내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체모는 여인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흠으로 보이기도 했다.
고야는 그 금기들을 뛰어넘었다.
여신도 아니고 완벽한 비율의 조각 같은 몸도 아닌 ‘그냥 진짜 여자’ 마하.
게다가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는 ‘도발적인 시선’.
옷을 벗은 마하는 제대로 말하자면 ‘nude(고상하고 이상적인 신체로서의 몸)’라기보다는
날것 그대로의 알몸, 즉 ‘naked’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의 주문자는 카를로스 4세 시절 왕비의 애인이자 왕을 대신해 나랏일을 쥐락펴락하던
재상 마누엘 고도이(Manuel Faria, 1767~1851)였다.
고야가 발가벗은 여자의 몸을 그리면서도 종교재판소의 매 같은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주문자의 ‘권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4세와 고도이가 쫓겨나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고도이가 소장했던 작품들이 대거 국가에 귀속되는데,
그들 중에는 당연히 이 작품들을 비롯해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도 함께 있었다.
고야는 뒤늦게 〈옷을 벗은 마하〉로 인해 종교재판소의 호출을 받게 된다.
다행히도 고야는 페르난도 7세의 신임을 받던 화가였기에 처벌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술과 외설이라는 케케묵은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던 이 작품으로
고야는 당시 궁정화가로서의 직위마저 박탈당한다.
〈옷 입은 마하〉, 캔버스에 유채, 1805, 97×190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궁정화가 직위를 박탈당한 뒤 고야는 이 작품 속 누드 모델에게 그대로 옷을 입힌 작품
〈옷 입은 마하〉를 내놓아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받는다.
작품 속 모델은 옷을 입고 있지만 여전히 선정적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옷 입은 마하〉를 보면서 〈옷 벗은 마하〉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경직된 스페인 사회에 대한 고야 특유의 통렬하고 냉소적인 항의 표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고야의 이 그림이 대체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은
최근까지도 사람들의 수다용 먹잇감이 되고 있다.
그중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가 바로 알바 공작부인이다.
고야는 스페인 실세 가문 알바 공작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녀와 만나게 되었다.
왕비보다 더 직함이 많을 정도로 지체 높은 알바 공작부인은 남편이 죽자
마드리드를 떠나 남부 안달루시아의 별장으로 갔는데, 고야도 그녀를 따라가 몇 달을 함께 머물렀다고 한다.
고야는 마하 복장 차림의 그녀가 손가락으로 바닥에 새긴 글자,
‘오직 고야(Solo Goya)’를 가리키고 있는 장면을 비롯해 그녀의 초상화를 자주 화폭에 담았다.
이 때문에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둘의 신분 차이로 미루어보아 두 사람의 관계는 고야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거나
설사 둘 사이에 심상치 않은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 해도 고야는 알바 부인 정도의 권력자가 거느릴 수 있는
‘심심풀이 정부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거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이 이 그림의 모델을 알바 공작부인이라고 단정하지만 정작 알바 공작의 후손들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공작부인의 유해까지 파내는 소동을 벌였다.
뜻밖에도 유해 검시관들이 그림 모델이 알바 공작부인과 비슷하다는 의견을 내놓는 바람에
또 한 차례 격론이 이어지기도 했다.
사실 고야가 그림을 그릴 때 공작부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게다가 이 그림들이 재상 고도이의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라면
고도이의 집안과 정치적 숙적 관계에 놓여 있던 알바 집안 여자를 고야가 굳이 모델로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모델은 고도이의 또 다른 연인 페피타 투도라는 여성이라는 소문도 있다.
어쨌거나 현재 이 두 작품은 나란히 전시실 벽에 걸려 있어서
“저 옷을 벗으면 어떤 속살이 펼쳐질까?”를 상상하는 관람자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후련하게 해소해주고 있다
<알바공작 부인> 캔버스에 유화. 210×149cm 1797.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알바 공작부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요녀”라고 부르고,
고야는 “걸어 다니는 남성”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두 사람의 열애는 스페인에서 화젯거리가 되었으나,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공작부인은
자신의 초상화에 또 다른 화젯거리를 남긴다.
고야는 값비싼 레이스와 반짝이는 비단의 질감을 당시 어느 화가보다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의 재능이 번쩍이는 공작 부인 초상화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부인의 당당한 모습이 담겨 있다.
자존감이 가득한 고야는 그림을 통해 누구보다도 당당한 모습으로 그녀의 연인을 지목한다.
레이스로 화려하게 치장한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흙바닥에는 “나에게는 오직 고야 뿐(Solo Goya)"이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요란한 화제를 제공한 두 사람의 열애는 오래가지 못하고 끝났다.
공작 부인에게 절교를 선언 받은 고야의 그림은 더욱 더 검은 어둠 속의 그림으로 변했다.
고야의 꿈에 나타나는 공작 부인이 어느 순간 마녀가 되어 그를 고통으로 몰고 가는 시간이 지속된다.
그의 작품에서도 마녀의 모습은 종종 나타난다.
알바 공작부인은 40세에 의문을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죽음에 이르러 고야의 아들에게도 유산을 남겼다.
그녀의 다른 정부는 그 시기 스페인 권력에 중심에 있었던 재상 고도이였고,
고도이의 또다른 정부가 카를로스 4세의 왕비인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이러한 이유로 ‘옷을 입은 마야와 옷을 벗은 마야’의 실제 모델이 귀족인 알바 공작부인이라는 추정에 대해
고야는 당시 유럽에서 악명 높던 스페인의 이단종교재판소에서 작품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고통을 치르게 된다.
공작부인과의 열애는 고야의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인 고통으로 남지만, 그는 한 번도 그녀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깊은 감정 역시 그가 스페인 민족에게 바치는 깊은 애정과 연관성 있게 다가온다.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600010
http://blog.daum.net/jeongsimkim/29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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