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2장] 가족사의 비극, 우수한 모범생의 소년기

2012/07/04 08:00 김삼웅

 

김근태 고문의 학창시절.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http://gtcamp.tistory.com

김근태는 1947년 2월 14일, 경기도 소사(지금의 부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용과 어머니 이한정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장 선생이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부모는 교육열이 강하여 아버지의 박봉에도 자식들 중에는 일본유학까지 보냈다.

김근태는 아버지가 번번히 전근을 하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4번이나 옮겨다니면서 졸업을 하게 되었다. 평택군에서는 청북과 진위초등학교를 다니고, 양평군에서는 원덕과 양수초등학교를 다녔다. 양수초등학교에서 졸업하였다. 어린시절부터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김근태에게 ‘고향’에 대한 인식은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승만 대통령을 찬양하는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이승만을 찬양하는 열변을 토했으나 3등밖에 못해 어린 마음에 좌절을 겪기도 하였다.

상처받은 어린 시절이었고, 또한 상처받은 고향으로 경기도 평택과 양평이 나에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상처받은 고향조차 사라져버리고 없다. ‘그리운 양평’은 모두 유원지로 전락되어버렸고, 평택은 공업지역으로 바뀌어버려 고향을 박탈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도시화되고 산업화되는 시대적 추세 속에서 나의 고향 또한 잠겨버린 듯하다. (주석 1)

어릴적의 잦은 이사와 전근은 김근태가 아니라도 소년의 정서에 심리적 부담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소년은 뒷날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자주 전학 다니는 것은 나에게 크나큰 고문이었다. 새로 친구를 사귀면서는 텃세를 부리는 본토 애들과 싸우기도 하고 알랑방귀도 뀌어야 했다. 어느 정도 안정된 관계가 이루어질 즈음해서는 어김없이 떠나야 하는 그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혹독한 처벌이었다. 몸살을 앓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권력자로 방패막이의 역할을 해주어서, 그나마 견뎌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주석 2)

해방 직후에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이면 당시로서는 비교적 안정된 가정이다. 다만 교직자의 신분이어서 잦은 전근으로 인하여 감수성이 예민한 자식들에게는 여간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매우 따뜻하신 분이었고, 어머니는 대단히 열정적이셨다. 아니 극성맞다고 해야 옳을 지 모르겠다. 두 분 다 자식을 공부시키는 데에는 만장일치셨다”고 김근태는 회고한다.

<민족과 지평> 편집위원 이재화는 1991년 봄 김근태가 홍성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을 때 본인의 접견과 부인 인재근, 친형 김국태 교수(추계예술대 문예 창작과)를 비롯, 손학규ㆍ최민화ㆍ조화순ㆍ안병직ㆍ문익환ㆍ채만수 등 지인들을 만나고 <김근태의 삶과 사상>을 썼다. 그의 생전에 쓴 글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다.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

김근태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따라 네 차례씩이나 전학을 하는 것과 관련, “어린 김근태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위대하거나 호방한 분이 아니라 작고 소심하여 두려움에 떠는 가슴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아버지를 존경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10대를 보냈다. 자연히 성격도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 형성된 구석이 많았다.” (주석 3)라고 소개하였다.

김근태는 이와 관련 부친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의 부인 인재근에 따르면, 남편은 “정열적인 면은 ‘기가센’ 어머니를 닮았고, 자상하고 섬세한 부분은 아버지를 닮았다” 고 전한다. 김근태의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또는 반항심은 더 있었다.

그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아버지로부터 3.1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다.
아버지 나이 19살이었을 때였다. 아버지는 읍내시장에는 나가지 못하고 뒷동산에 혼자 올라가서 실컷 만세를 불렀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에이 왜 좀더 대담하지 못했을까” 하며 투덜거린 적이 있다고 한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가 교과서에 나오는 유관순 누나같이 당당하지 못한 것이 창피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처럼 소심하고 무능력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자존심을 가진 그는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했고 모든 면에서 항상 최고여야 만족하는 성격이 형성되어 갔다.
(주석 4)

소년 김근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반항심은 성장하면서 반독재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발산되었다. 어릴적에 “마음씨는 좋지만 무능하여” 늘 지방으로 옮겨다니는 아버지로 인해, 토박이 아이들 속에서 막 뿌리를 내릴 때쯤이면 다시 전학을 가야 하는 ‘뿌리뽑히는’ 고통을 어린 김근태의 가슴에 ‘약함’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서울에 올 ‘빽도 없고’ 돈을 모을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주석 5)

김근태가 태어난 1947년은 해방 2년차로서 미군정 시절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분단에 이어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격렬한 찬반 투쟁이 전개되었다. 1947년 2월 5일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되고, 5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고 12월 2일에는 장덕수가 피살되었다. 1948년 4월 3일 제주 4ㆍ3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9월 9일에는 북한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남북에 상이한 두 개의 정권이 서게 되었다. 해방 3년만의 결과였다.

김근태는 동시대의 아이들처럼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교직에 있어서 혼란시기에서도 생계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전란기에 가족사에 불행이 겹쳤다. 김근태가 민주주의와 함께 민족주의에 남다른 관심을 갖는 데는 이때의 가족사에서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


주석
1> 김근태, <희망의 근거>, 415쪽, 당대, 1995.
2> 앞의 책과 같음.
3> 이재화, <김근태의 삶과 사상>, <민족지평> 제3호(1991.봄여름), 153쪽.
4> 앞의 책, 153~154쪽.
5> 앞의 책,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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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3 08:00 김삼웅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유성호

 

김근태는 흔히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그래서 2011년 말 별세했을 때, 생자(生者)들은 입을 모아 그에게 ‘민주주의자’ 라는 헌사를 붙이고, 장례를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치렀다. 명색이 민주공화국에서 ‘민주주의자’는 모든 성원에게 주어지는 보통명사일 터인데도 유독 김근태에게 주어졌다. 이 헌사가 돋보이고, 그의 고유명사가 되다시피한 것은,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파행과 불구성을 말해준다.

그가 성장하여 활동한 기간에 겪은 군부독재 30년은 민주주의가 처절하게 유린되는 반이성, 야만이 지배하는 몰상식의 시대였다. 그 시대에 김근태는 결코 관념적인 민주주의론자가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파수꾼이고 수호자 노릇을 하였다. 그래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고, 그로 인해 긴 세월을 병마에 시달리다가 홀연히 떠났다.

그는 불의에 저항하고 압제와 싸웠다. 청년들을 조직하고 동지들과 연대하면서 바빌론의 철옹성에 불을 질렀다. 그는 용기가 있었고 담력이 남달랐다. 무인(武人)의 기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때문이었다.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15호 조사실앞에 14일 오후 조화가 놓여 있다. ⓒ권우성

 

짧다고도 길다고도 하기 어려운 64년의 생애, 특히 청년기와 중년시절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기간이었다. 동시대의 인물들 중에서 그만큼 치열하게 싸우고, 처절하게 육신이 망가진 ‘민주인사’도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분신ㆍ투신ㆍ자결ㆍ의문사 등 숱한 의열사들과 같은 반열에서 김근태를 ‘민주화의 화신’ 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김근태에게는 ‘햄릿’ 말고도 몇 가지 별명이 따랐다. ‘공소외(公訴外)’ ‘국제신사’ ‘김진지’가 그것이다. ‘공소외’는 독재시대 조영래ㆍ장기표ㆍ심재권 등과 반정부 시위를 도모하다가 이들은 체포되고 용케 피신했을 때 검사의 기소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독립운동가 출신 백봉 나용균 선생을 기려 제정된 ‘백봉 신사상’의 단골 수상자일만큼 언행이 신사적이다. 일반적으로 투사와 신사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그에게는 이것이 가능했다. 독립운동가 중에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은 투사이면서 신사의 이미지를 갖는다. 어느 시인의 표현을 차용하면,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차서 / …”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찬 김근태는 투사와 신사의 모습이 불편하지 않게 공존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세속의 KS출신에 민주 투사이면서도 뽐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험한 말이나 함부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진중하고 소박하고 겸손하고 진지하였다. ‘김진지’ 의 별명은 ‘햄릿’과도 연관이 닿는다. 행동하지 않는 진지함이란 자칫 햄릿이 되기 쉽지만, 누구도 그를 일러 실천성 없는 관념론자라 말하지 않는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장례위원을 맡은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공보실장이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지난 1988년 9월 3일 서남 민청련 창립대회에 참석한 고인의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은 고인이 창립대회에서 민중운동의 진로에 대해 강연하는 모습). ⓒ유성호

박정희가 짓밟은 헌정을 다시 짓밟고 광주학살을 통해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5공의 독기가 시퍼렀던 1983년 김근태는 공개적으로 살인 정권에 도전장을 보냈다. 민청련의 조직이 그것이다. 민청련은 5공체제 등장 이후 최초의 공개적인 반정부 청년조직이었다. ‘김진지’와 그의 동지들은 오랜 진지한 사유 끝에 민청련의 상징으로 두꺼비를 내걸었다. 양서 동물로서 독성이 강한 두꺼비는 뱀에게 잡히면 죽지만 뱀 역시 두꺼비의 독성 때문에 죽는다. 하지만 두꺼비 새끼들은 그 안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자란다.

실제로 민청련은 5공이라는 뱀파이어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그 대신 독사의 뱃속에 들어간 김근태는 남영동의 지옥에서 오랜 ‘짐승의 시간’을 보내어야 했다. 일찍이 죽음을 대면했던 사람이다.

그는 민족모순과 시대모순이 활개치는 시절에 젊음을 보내면서, 그리고 ‘제도적 약탈’에 민중의 삶이 고통받는 시대를 살면서 뜨겁게, 불꽃같이 저항하였다. 작은 체구에서 불같은 열정이 치솟았다. 혁명가들의 생애가 그렇듯이 독재시대 그의 삶에는 비장감이 서렸다.

김근태는 3선 국회의원, 원내대표, 당대표, 보건복지부 장관 등 정계에 투신한 이래 세속적인 출세를 하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다지는 큰 역할을 하였다.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노인요양보험을 제정하고 암환자 진료의 본인부담률을 10%로 낮추는 등 민주주의, 통일 등 거대 담론과 함께 서민들의 복지에도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그는 본디 서민출신이고 서민과 함께 살아왔다.

하지만 그의 꿈이 채 영글기도 전에 ‘민간 독재자’가 나타나서 역사를 87년 이전 체제로 되돌리고, 그는 병마에 쓰러졌다.

김근태는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다가 2011년 12월 30일 눈을 감았다.
송건호ㆍ리영희 등이 겪었던 그 증상이었다. 체포 26회, 구류 7회, 5년 6개월에 걸친 두 차례의 투옥과 숱한 가택연금과 수배 …. 망국기 독립운동가들이나 겪었던 험난한 길을 그는 해방된 나라에서 겪게 되었다.

김근태는 대단히 겸손하고 성실한 품성이었다. 공사 생활에서 깨끗하고 정직한 정치인이었다. 지극히 가정적이고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그만한 정치적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재산을 모을 줄 몰라 부인은 항상 생활에 쪼들리고,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에는 그 흔한 자동차 한 대 굴리지 못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그는 야권의 누구보다 개혁성이 강한 진정성의 지도자였다. 장준하를 닮은 데가 많았다. 그는 어디서나 허투루 말하지 않고, 야당 정치인으로서 언론플레이용 강성 발언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면서 의회주의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진짜배기 민주주의자였다. 이승만으로부터 군부독재 그리고 민간독재에서 신줏단지처럼 모셔온 국가보안법 등 악법을 폐기하고, 외세가 갈라놓은 조국의 분단을 이어보려는 큰 꿈을 간직했던, 우리 정계에서 흔치 않은 한반도의 미래를 구상하는, 진정성의 정치인이었다. 그러던 그는 “2012년을 점령하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ㆍ중동의 아랍국가에서 민중들이 독재자와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을 때, 반독재 민주화의 ‘원조(元祖)’ 격인 한국에서는 ‘민간독재’가 극성을 부렸다. 여기에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의 망령을 불러들이는 ‘초혼제’가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의 거대한 동상이 다시 세워지고, 박정희의 호화판 기념ㆍ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경상도 어디선가는 ‘전두환공원’이 만들어졌다.

벤 알리(튀니지 전 대통령), 무바라크(이집트 전 대통령), 카다피(리비아 전 대통령)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다가 분노한 시민들에게 쫓겨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비슷한 시각, 한국에서는 60여 년 전과 30여 년 전에 죽은 독재자들의 망령이 부활하는 모습을 병상에서 지켜보면서 김근태는 “그동안 헛 살아오지 않았는가!” 라는 자괴감을 갖게 하고,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김근태는 “2012년을 점령하라”는 피울음을 유언처럼 남기고 갔다. 그리고 지역구민들은 그의 ‘바깥사람’ 인재근을 의회로 보냈다. 김근태의 부음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국민이 때이른 그의 죽음을 안타까와 했다. 그의 많은 동지와 후배들이 빈소에서, 영결식장에서 고인의 유지를 잇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발리바르는 조국해방전선에 나서면서 선서하였다.

“나 자신의 명예와 하나님의 이름과 조국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내 마음과 팔뚝은 스페인의 권력이 우리를 속박한 그 사슬을 깨뜨릴 때까지 한 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

김근태의 <남영동> 표지 ⓒ중원문화

남한의 반독재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감옥에서 다짐하였다.

“지나온 그 짙은 어둠은 어렴풋하게 느껴진다오. 잠속에서 꿈속에서 짓눌려 오는 공포로 되살아나곤 하는구려. 그때는 숨을 몰아쉬어 방어의 채비도 서두르게 되고, 윤동주 시인의 맑은 눈물이 스며있을 듯한 벽에 기대어 밤하늘의 별을 끌어안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오.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나가고 있는 중이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지도자 문익환 목사는 1980년대 중반에 이미 <김근태 동지를 알자>고 광야에서 목메이게 외쳤다. 아직 대중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 시점이다.

김근태 동지는 이제 나이가 겨우 마흔을 갓 넘었지만 그는 이미 우리가 깊이 알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80년대 민족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나아가 90년대 민족사를 구상하고 전망하는 데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에 그치지 않고 이미 그는 민족사의 핵심에 서 있고, 앞으로도 그는 그 핵심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는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지난날의 투쟁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날의 투쟁을 미루어 앞으로 전개될 민족사에 그가 담당할 몫을 생각하면서 나는 우리가 알아야 할 미래의 인물가운데 그를 첫 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 (주석 6)


주석
6> <김근태씨의 고문 및 옥중기록 남영동>, 277쪽, 중원문화, 1987.(이후 <남영동>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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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다시 생명의 불씨를...

 

내가 살고 있는 감방에 창이 두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바깥마당으로 열려져 있지.
북동쪽을 향한 창문이어서 지난 추운 겨울 내내 햇빛과는 서로 엇비켜 서 있는 꼴이었소.
해는 떠서 아침을 먹을 녘까지만 창틀 옆 변소 담벼락을 비추다가 이내 그늘 속으로 내 방 창문을 묻어버리곤 했소.
해서 더욱 얼어 있었고 그 위를 회색빛 우울과 바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오.
용기를 내서 창문을 열었다가도 이내 닫아 버리곤 했다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창문은 나에게 설레임으로 다가왔소.
저 고대하는 우리들의 희망을 향한 발돋움대이기도 하고,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이기도 하기 때문이요.
때로는 울적함을 노래에 실어 날려보내기도 하고, 저 아랫배로부터 토해져 나오는 짐승같은 신음소리를 쏟아내는 나의 창문이 되었다오.
지금 나에게는 꽤 중요한 것이 되었소.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작년 11월말 이후였다오.
그 전 두어 달 동안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뿐 아니라 불필요하게 간섭해 오는 존재였다오.


내가 있었던, 또 지금 내가 있는 방들은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곳이었소.
앞뒤의 창들은 비닐로, 아스테이지로 완전히 밀봉되어 있었소.
조그만 구멍들이 뻥뻥 뚫린 철판을 대어 어두컴컴 했었소.
바깥에서 이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상당한 주의력을 집중해야 가능한 일이었고 뭔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였소.
그 안에는 흉츳스런 것이 갇혀 있어야 마땅한 일이었고 경멸받아서 마땅한 존재로서 말이오.


작년 9월말 처음 이곳에 내던져졌을 때 난 이러한 것에 흥미나 관심이 전혀 가지지 않았다오.
아니 주의를 가질 기력이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오.
오직 필요한 것은 컴컴한 짙은 어둠과 외부의 모든 자극으로부터의 차단, 그것이었다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부터는 어느정도 비켜설 수 있게된 것이었으나,

더욱 깊어져 가는 마음의 상처,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오.
그냥 정신적 위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박하였소.

 

어떤 와해, 버텨가는 것의 종착역에 이르러 가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요.
나는 내가 이제 황폐함 속으로 밀려 떨어져 쓰러지겠구나, 이러한 것을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오.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 무너져 내리는 곰 같은 신세였소.

컴컴한 동굴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한편으로는 굴 입구에 나타날 수상쩍은 적을 경계하면서 상처가 아물도록 자꾸 혀로 핥는 것이었다오.
그래도 나는 안심이 되지않아 이불 속으로, 이불 속의 컴컴함으로 더욱 기어 들어갔다오.

오감도 속의 이상(李箱)처럼 나는 점점 이상해져 갔다오.


아, 이때 나는 정말 누군가의 체온, 그것을 갈망했다오.
인간의 목소리, 사랑이 담긴 그 눈빛을 나는 고대했던 것이오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소.
상처를 확인해 나가는 완화된 형태의 적의만이 순간순간 번득이는 것이었소.
그러나 구원은 나에게, 나에게 있었다오.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부터 구원은 나타난 것이었소.
그것은 마루 밑바닥으로부터였소.
그곳에서 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오.
애정이 넘쳐흐르는 코 먹은 소리였다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쥐들의 사랑이었소.

 

오. 쥐가, 쥐의 그 목소리가 나의 구원이었소.
그러면서도 한편 나의 이성은 주저주저 하였소.

쥐는 나에게 이런 것이었소.
쥐약 먹고 골목길에 나자빠져 시뻘개진 창자가 툭 튀어나온 채 길바닥에 내던져 있는 것이거나,

무서운 전염병을 옮기는 페스트처럼 파괴와 죽음의 그림자였다오.
미키 마우스같은 영리함은 우리들의 감수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고, 아마 누구나 이 점은 나와 비슷할 것이오.
그래도 이성은 살아서 이것은 뭐 이상하고 섬찍한 일인 것 같다고 나를 끊임없이 제동걸려고 했지만 제껴 버렸소.
내가 상식세계 그 바깥으로 쫓겨나 있던 그때 이성의 힘은 약합디다.


가슴에 다시 생명의 불씨를 살려 내는 것은 이성이 아니고,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일 뿐이오.
사람의 사랑이 봉쇄되어 버렸던 나에게는 그나마 이것은 크게 다행한 일이었소.
이렇게 막상 쓰다 보니까 뭔지 좀 어색해지고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그 때는 정말 사실이었소.
그리고 나의 희생에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오.
저희들끼리 나눈 쥐들의 그 사랑이 말이오.


그리고 참 인재근씨가 계속해서 넣어준 과일과 우유, 음료수, 이것도 나에게는 큰 용기를 주었소.
그 때 나는 별로 무엇을 먹고 싶거나 설사 어느 것을 먹었어도 소화해 낼 능력이 없었지만 이렇게 나를 기억하고,

이 물건들을 통해서 확인해 주는 그 손길이 눈물겨웠소.
거기에서 내가 아는 냄새를 맡으려고 킁킁대기고 했고, 혹시 체온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싶어 자꾸 만져보기도 했다오.
모두 빼앗겨 버렸던 당시의 나는 무엇인가를 소유하고도 싶었던 것이오.
이것을 채워주었던 것이지.

인재근씨, 당신이 말이오.


어쩌다가 하루 걸러서 이틀이 되고, 사흘이 그냥 지나면 나는 불안해졌던 거요.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요.

하지만 당시의 나는 정말로 버려져 있었던 것이오.
돌이켜보면 나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오.


또 다음에.


(1986년 3월 11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씨에게 보낸 편지)


김근태 평전/[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2 08:00 김삼웅

 


지금까지 한국에서 실시해온 각종 선거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계층은 기권을 많이 하고, 부자들은 투표에 적극 참여하는 편이다. 그리고 가난한 계층에서는 부자 정당(보수정당)을 더 선호한다는 최근의 여론조사도 나타났다. 그래서 부자들의 대변자가 다수 당선되는 역설이 진행된다. 앞의 대학생들처럼 ‘민주화의 화신’과 ‘고문의 화신’을 환치시키는 경우가 낯설지 않았다. 이를 소급하면 친일파가 ‘건국의 주역’이 되고, 현재화하면 독재세력이 민주인사들을 ‘종북주의자’로 내모는 꼴이다.

김근태가 그토록 혹독한 고문과 끝없는 감시, 정보기관의 용공조작과 족벌신문들의 흠집내기에도 정신적으로 망가지지 않고 버틴 데에는 역사에 대한 낙관때문이었다. 앞의 ‘남은 자’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는 민중(국민)을 믿었고, 역사의 진보를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세월 동안 그가 겪은 고통, 특히 육신의 고통은 필설로 다하기 어려웠다.

최후진술을 통해 밝힌 고문의 한 대목이다.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절반쯤 됩니다. 고문할 때는 밥을 주지 않는데, 고문을 하지 않을 때도 밥을 주지 않아 심리적인 압박과 고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델시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셔져서 병사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해라’ 이런 참혹한 얘기를 하며 동물적 능욕을 가했습니다.

제 생식기를 가르키며 ‘이것도 잎이라고 달고다녀? 민주화 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하면서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머리와 가슴ㆍ사타구니에 전기고문이 잘되게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했습니다. 처음에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며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마음 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했습니다.
(주석 3)

여기서 나오는 ‘이재문’은 남민전사건에 끌려가 고문 당해 죽은 사람을 말한다. 숱한 사람이 저들의 고문으로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애국자들이 겪었던 고문과 비슷했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중용하면서 일제의 고문 기술자들이 살아남고, 박정희ㆍ전두환 시대에는 그 후예들이 ‘고문기술’을 전수받았다. 다음은 1912년 ‘105인사건’ 당시 심한 고문을 당했던 선우훈의 기록이다.

네 놈이 밤낮 30여일간 혹형을 계속했다. 묻는 말을 부인할 적마다 네 놈이 달려들어 때리고 찼다. 두 엄지손가락을 포승으로 결박하고 한편 팔은 앞으로 돌려 어깨위로 올리고 한편 팔은 뒷등으로 돌려 두 손이 서로 닿을 만큼 하고 매어다니 몸이 오척 가량 공중에 달렸다. 두 놈이 두 자 가량 되는 대막대기 두 개를 마주잡고 옆구리에서 허리까지 쭉쭉 훑드니 몸이 두 동강이 되는 듯 하체의 힘은 쭉 빠지고 전신의 기력이 없어진다. 다른 놈이 채찍으로 머리부터 다리까지 숨쉴 틈 없이 난타하니 땀은 낙숫물 같이 쏟아지고 호흡은 하늘에 닿고 가슴에는 불이 붙고 코에서는 불길이 훅훅 쏱아진다.

금시 목숨이 끊어질 듯 사지가 떨리고 눈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가슴이 터질 듯하다. 이러기를 약 20분 만에 전신은 동태같이 얼고 감각도 없어졌다. 눈은 곧아지고 혀를 빼어 물고 숨소리가 사라지자 이 때는 맥박도 끊어져 죽는 것 같이 되는 때라 한다.
(주석 4)

1988년 케리 케네디 대표로부터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여받은 인재근씨와 자녀들. (출처 - 김근태 블로그) ⓒgt

일제가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다가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고, 일본군출신 박정희 정권과 그의 충복 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체포하여 잔인한 고문을 하였다. 그 중에서 김근태는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하수인은 ‘고문 기술자’로 불린 이근안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한국의 대학생 중에는 김근태와 이근안을 분별하지 못하고, 6월항쟁과 김대중ㆍ노무현 민주정부 10년을 거친 뒤에 나타난 이명박 정권에서는 철거민들이 경찰의 공격으로 불에 타서 숨지고, 대통령의 측근들이 국무총리실에 아지트를 설치, 민간인을 사찰하는 야만의 세상으로 되돌아 갔다.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에서 사열을 받고, 하나회출신이 국회의장이 된다. 독재자의 딸은 집권당의 유력한 대통령후보이고, 5공의 대표적 조작시국사건인 ‘학림사건’의 판사는 집권당 대표, 배석판사는 헌법재판소 소장이 되었다. 역사는 가끔 반복되기도 한다지만, 이처럼 잔혹사가 단기간에 되풀이되기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김근태는 5공의 폭압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조직하여 전두환 세력과 전면에서 싸웠다. 1983년의 민청련은 1919년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의 정신을 닮았을 것이었다. 일제가 그랬듯이, 5공 정권의 보복은 혹독했다. 김근태는 치안본부 대공분실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살인적 고문으로 ‘지옥’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래도 꺾이지 않고 옥살이 끝에 출감해서는 다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하여 청년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김근태는 감옥에서 부인 인재근과 함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갇힌 몸이라 수상은 뒷날로 미뤄졌다. 그는 노태우 정권에서 또 체포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뤄야했다. 그 시대에도 동기생 중에는 고시를 하여 법관이 되거나 5.6공에 참여하고, 선량이 되기도 하였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그의 지명도를 사서 김영삼이 종로 출마를 제의했으나 “지금은 군부독재와 싸우는 재야의 결집된 힘을 약화시키고 개인적 지위상승으로 그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때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5선, 6선은 따놓은 당상이 되었을 것이고, 정계의 거물로 성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설 때와 머무를 때를 알았고, 어느 때에 어느 쪽에 서는 것이 정도인 지를 알았다. 백범 김구의 “정도냐 사도냐”를 늘 가슴에 새겨왔다.

그는 뒤늦게 정권교체와 정치혁명을 꿈꾸며 정치에 참여했다.
1991년 출감했을 때 김대중이 신민당의 부총재를 제의하여, 44세에 정계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원외의 부총재, 그것도 임명직 부총재의 지위는 별로 힘을 쓰기가 어려웠고, 성격상 ‘정치적’이지도 못하였다. 한국의 정계에는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보다는 정략에 능숙한 정상배들이 들끓었고, 정도보다는 사도가 정치의 능력으로 평가되었다. 더욱이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때에는 5공세력과 일부 야당이 야합한, 3당 야합 세력이 판치던 시절이었다.


김근태는 도전 끝에 제15대 국회의원이 되고, 이후 집권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기도 했으며, 참여정부에서는 보건사회부 장관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그가 별세했을 때 어느 신문의 사설처럼 “정치인으로서 김근태는 많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권력 정치나 심지어 너무 진지해서 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대신에 그는 정치개혁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했다. 정치권에서 그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주석 5) 김근태는 ‘정치공학’에는 서툴렀으나 진정성 있는 정치인의 길을 걸었던 정치인이다.

김근태는 정치에 입문하고서도 도덕성과 순결성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영혼’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마키아벨리즘이 판치는 한국의 정치판에서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찍이 독립운동가로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도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좌절을 겪어야 했던 그런 길이었다. 한마디로 김근태는 정치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순결한 지성인이었다.


주석
3> 김근태,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1심 최후진술.
4> 김삼웅,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65쪽, 사람과 사람, 1998.
5> <한겨레> 사설, 2011년 12월 31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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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0-27 03:00:00 기사수정 2012-10-27 10:02:20

 

새누리당과 합당을 선언하고 친정으로 15년 만에 돌아오게 된 이인제 선진통일당 대표가 그동안 자신의 어지러운 정치 행로를 공자(孔子)의 주유천하(周遊天下)에 비유했다.

이 대표는 25, 26일 언론 인터뷰에서 “운명적으로 정치를 처음 시작한 어머니의 당으로 합류하게 돼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한다”며 “공자님이 어머니의 나라를 떠나 10여 개국을 돌아다니다 14년 만에 돌아왔다고 하는데 저도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공자가 노(魯)나라에서 자신의 큰 뜻을 실현하기 어려워 경륜을 펼 수 있는 나라를 찾아 유랑한 것에 자신의 정치 행적을 비유한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라는 지적이다.



이 대표는 1997년 새누리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뒤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 의혹이 터지자 탈당해 국민신당 후보로 대선에 뛰어들었다. 대선 후에는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합당해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으나 대선후보가 되는 데 실패했고 다시 탈당해 충청권 정당인 자민련에 합류했다. 이후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을 거쳐 최근엔 당명을 바꾼 선진통일당 대표가 됐다.

이 대표는 잦은 당적 변경에 대해 “당명이 바뀌거나 다른 당과 정치적으로 통합한 것은 당적 변경과 상관없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몇 번 되지 않는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김근태 평전 / [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1 08:00 김삼웅

 

위정자의 덕이 없어서인가, 국민의 복이 없어서인가.

이명박 치하 4년여 동안 강원룡ㆍ박경리ㆍ김수환ㆍ노무현ㆍ법정ㆍ박완서ㆍ김대중ㆍ김준엽ㆍ정기영(건축가)ㆍ박태준ㆍ김근태ㆍ이소선… 등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각계의 지도자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사이비 종교지도자, 친일파군인, 독재자, 기회주의언론ㆍ문인, 유신잔당, 변절민주화운동가, 악덕기업인, 고문기술자 등이 호의호식하면서 한 세상을 누비는 데, 왜 그들은 그토록 빨리 죽어야 하는가.


<노자> 제70장에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지만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 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악당과 악행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해도 진정한 승리는 하늘이 항상 선한 사람의 손을 들어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세상은 거꾸로 되는 경우가 많은가.

사마천은 한무제 천한(天漢) 2년 (B.C 99년)에 이른바 ‘이능의 화’ (李陵之禍)을 당한다.
이릉은 용감한 장군으로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족을 정벌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부대는 전멸당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 그러자 조정의 중신들은 물론 황제까지 나서 너나없이 이릉을 배신자라며 매도하였다. 그때 한 사람 사마천이 이릉의 사람됨과 억울함을 잘 알고 있어서 분연히 일어나 그를 변호하였다. 이로 인해 투옥되고 사내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을 당하고 말았다. 거액의 돈을 내면 방면될 수 있었지만 그는 돈이 없었다.

사마천은 수모를 견디면서 <사기>를 집필하였다.
열전(列傳)의 첫머리에 백이숙제의 고사를 쓰고, <노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였다.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하늘은 옳은가 그른가!”를 거듭 물은 것이다.

사마천은 젊은 날 스승 동중서(董仲舒)에게 춘추공양학을 배우면서 역사철학에 뜻을 세웠다.
스승은 “하늘은 자연의 모습을 한 유의지적(有意志的) 최고신이다. 감응의 방식은 하늘이 인간의 행위를 감찰한 뒤에 일련의 자연현상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나타냄으로써 인간 세계의 지배자에게 훈계나 상을 내린다” (주석 1)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제창하여 천도의 존재를 명확하게 사마천에게 가르쳤다.

“갈 만한 곳을 골라서 가고, 해야 할 말을 하고, 삿된 길로 가지 않고, 공명정대한 일이 아니면 분발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재앙을 당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구나!”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하늘을 우러러 거듭 탄식했다.

김근태는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유신 변란이 아니었으면 유능한 대학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젊은날의 꿈은 교수였다. 전두환ㆍ노태우의 헌정 유린과 폭압 체제만 없었으면 온순한 시민운동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여의도의 햄릿’이라는 닉네임이 따를 만큼, 젊은 그는 행동인이기보다는 사색인이었다.

4월혁명 이후 한국 사회가 평온한 질서의 민주주의 시대였다면, 정치인 네루의 길보다 비폭력저항운동의 간디의 길을 택했을 것이라는 김근태, 그는 유신과 5공 체제에서 가장 강력하게 투쟁하고, 가장 심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폭압과 반이성의 시대가 햄릿을 민주주의의 투사로 만들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광기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이성을 짓밟을 때 김근태는 청년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온건한 대학생이 감분(感憤)하여 전선에 뛰어든 것은 군부독재세력의 야만성때문이다. 전방에 있어야할 군인들이 후방에서 국민을 상대로 총칼을 휘두르는, 마치 고려의 무인시대와 같은 막장을 지켜보면서 저항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가 겪은 고통은 너무 심했고 시련의 세월은 너무 길었다.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은 좀체 아물지 않았다.

사마천이 울분하여 <사기>를 지었다면 김근태는 감분하여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고 하겠다.
어찌 김근태 뿐이었을까. 수많은 독립운동가, 평화통일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외적의 침략으로, 외세의 탄압으로, 독재자들의 폭압으로, 겨레와 민족이 짓밟힐 때 빼앗긴 조국독립과 통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분연히 몸을 던졌다. 그들의 능력과 역량으로 보아 시대에 적응하고 시세를 좇았으면 크게 출세하여 부와 감투가 주어지고 대대손손 부귀광영을 누렸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배부르고 등 따뜻함”을 추구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하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고래로 정도(正道)는 가시밭길이고 사도(邪道)는 풍요롭지만, 그래도 소수 나마 정도를 택한 사람이 있고, 이들로 인해 정의와 진리는 지켜지고 역사는 조금씩이나마 진보한다.

김근태는 가끔 구약성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꺼내곤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용기 있는 자들은 저항하다 잡혀 죽고, 비겁한 자들은 투항해서 바빌론의 앞잡이나 개가 되고, 저항하기에는 용기가 없고 투항하기에는 소시민적 양심이 살아 있던 남은 자들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남은 자들이 후에 다시 일어서서 이스라엘 민족사를 재건하는 중추세력이 되었다. 남은 자들은 용기는 없지만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심성이 많고 때로는 눈치도 보지만 근본은 선한 자들이며 때가 되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역사의 주된 물줄기를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김근태는 민중을 믿었고, 민중의 힘으로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김근태는 군부독재 시절에 가장 격렬하게 싸우고 가장 심하게 핍박을 받았지만, 이를 크게 내세우지 않았다. 독재자 편에 섰거나 반독재 투쟁을 외면하다가 ‘무임승차’하여 정ㆍ관계의 주역 노릇을 하는 사람들을 크게 탓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도 용서하였다. 다음은 김근태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어느 날의 ‘삽화’다.

1974년 1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택시 합승을 했다.
뒷좌석에는 신세대 여대생들인 듯한 손님 둘이 앉아 있었다. 택시가 출발하고 얼마 후 김근태는 뒷좌석의 여대생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우연히 마주친 그를 알아보고 인사하거나 격려해주는 것을 많이 접해본 그였다. 특히 고문경감 이근안으로부터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치욕을 당한 후 3년여의 옥고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던 88년에는 지하철을 타면 낯선 시민들의 따뜻한 인사말에 답하느라 바빴다. 이번에는 상대가 신세대 여대생들인지라 속으로 괜히 흐뭇해하며 무슨 말을 하나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머뭇거리며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대다가 예의를 차려 물어 온 말인즉슨,

“저 … 이근안 선생님 아니세요”?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여러 번 본 적이 있어 낯이 익고 그가 고문당했던 재야인사라는 것도 생각나는데 그만 이름이 헷갈린 것이다. 고문 경감 김근태에게 붙잡혀 고생한 재야인사 이근안 선생님으로.

물론 그날 그 자리에서 김근태는 허허 웃었다.
그러나 끝내 ‘나는 이근안이 아니라 김근태’라고 정정해주지 못하고 차를 내렸다. 마음 한 켠에 휑한 슬픔마저 느끼면서….
(주석 2)

하나의 ‘삽화’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때도 김근태는 ‘남은 자’들의 역할을 믿었다.

우리 겨레가 1900년대 전반기 ‘망국노’가 되었을 때나, 1900년대 후반기 이승만의 백색독재와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의 카키색 군부독재시대에 헌법상의 ‘주권자’가 되었을 때도 ‘남은 자’들의 역할은 다르지 않았다.

굳이 아놀드 토인비의 사관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난 역사는 어차피 ‘창조적인 소수’에 이끌려왔다고 할 수 있다. 소수의 독립운동가와 소수의 민주화투사들에 의해 우리는 독립을 전취하고 제도적이나마 민주주의를 쟁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민중의 힘이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남은 자’들의 숫자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김근태는 ‘남은 자’ 들의 역할을 믿었던 것이다.

주석
1> 풍우(馮禹)지음, 김갑수 역, <천인관계론>, 95~96쪽, 신지서원, 1993.
2> 윤석진, <월간중앙 WIN>, 1999년 1월호, <국민회의 김근태 부총재>, 이후 (<월간중앙>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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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근씨에게


병준이가 크레용으로 쓴 '우리 아버지'를 들여다보다가 나는 나의 우리 아버지를 생각했고, 아버지의 삶을 더듬어 보았다오.
어제로 우리 곁을 떠나신지 꼭 20년이 되었구료.

 

그동안 아버지는 제사상 위의 사진에서, 사진틀속의 사진에서 나를 만났고, 평상시 생활에서는 그 무게가 점점 작아져 갔었지.
어렴풋한 추억 속으로 아버지는 떠밀려 간 것이겠지요.
그러나 언제쯤부터인지 나는 우리 아버지의 아팠던 상처들, 삶의 그늘에 대해서 눈을 떠가게 되었소.

 

어제는 눈이 부실정도로 환한 날이었지.
그런데도 바람이 거세게 불고, 때때로 흙먼지 날리고, 차가움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 같았어.
이상스럽게 약간 무서운 느낌이 들고 내 가슴 속에 황황히 바람이 일어나더군.


그 속에서 나는 아버지 모습을 보았어.
움푹 패여 그늘진 어깨, 말라서 길어진 목 뒤 모습, 그리고 허벅지께부터 바람에 날려 휘감기던 바지 가랑이,

바지 가랑이의 허전함이 목을 메이게 했다오.

 

우리 아버지는 위대하거나 호방한 그런 분은 아니었어.
이렇다할 깊은 사상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차라리 소심하여 두려움에 떠는 작은 가슴을 가진 분이셨지.
이 때문에 나는 사실 아버지를 별로 존경한 적이 없었고, 어떤 다른 사람들의 아버지를 멀리서 소문으로 얘기들으면서

실망하고 짜증부리기도 하였어.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따뜻한 품을 가지고 계셨어.
아무리 추운 날씨라도 아버지의 품속으로 기어 들어가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
아늑하고 유쾌해졌지. 이럴때마다 아버지도 좋아하셨고.


조금씩 크면서 나는 아버지 품을 넘치기 시작했고, 생물, 과학 등을 배우면서

아버지 체온이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높은 체질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오.
이렇게 하면서 아버지 품을 나는 영영 떠나게 되었고, 아버지는 멀리 떠나가신 것이지.

 

20년 동안이나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나 가셨던 우리 아버지가

바람이 거칠게 불고 해가 벌겋게 공중에 떠 있던 어제 나에게 되돌아오고 계셨다오.
아니 벌써 되돌아오고 있었던 우리 아버지를, 그 삶의 고뇌를 똑똑히 보게된 것일게야.


고난과 치욕의 이 겨레 20세기의 한귀퉁이에서 당신에게 몰아쳐왔던 그 절망과 부담에 짓눌려 겁먹은 채 살아가셨겠지.
버티느라고 부르르 부르르 떠시면서 말이요.
버티는 것이 힘겨워 몸에 늘 미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신과 당신의 자식들을 가려 주느라고 속으로 미열을 내며 앓으셨던 그런 삶이였을 거요.

 

3.1운동 때 아버지는 19살이셨다오.
읍내시장에는 못나가시고 뒷동산에 올라가서 실컷 만세를 부르셨다고 말씀하셨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도의 숨은 쉬었지만,

"에이 왜 좀더 대담하지 않으셨을까" 하며 투덜거리던 내 국민학생 때 기억이 되살아나는구료.

 

유관순 누나같은 아버지가 아닌 것이 창피한 적도 있었지.
심약한 아버지를 가볍게도 생각하고. 


그러나 나 이제 우리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 같다오.
작은.... 그런 아버지. 그 삶을 이 철창 안에 들어 앉아서 말이요.

 

저들의 뻔뻔한 짓에 두 발로 버티면서, 부르르 떨면서 나는 우리 아버지를 되돌아 오시도록 하는 것이요.
그리하여 내가 다시 우리 아버지의 그 고뇌에 참여하면서, 그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싶소.
혹시 내 삶을, 절망을, 아버지가 먼저 사셨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그리하여 남겨지고 이어지는 그 삶을, 그런 치욕과 중압을 오늘 여기서 내가 살고 있는 것이겠지요.

 

불길하게 바람이 불고 뻘겋던 어제, 나는 우리 아버지를 새롭게 만나면서 목이 메어졌다오.
아버지처럼 두근거리는 작은 가슴을 가져 자꾸 겁을 먹으면서 말이요.
그러나 나 이제 작지만 끈질긴 가슴이 되는 것 같다오.
겁먹고 겁먹고서 다시 버티는 그런 것이 되는 것이요.

 

병준이는 아버지인 나를 보면서 멀지않아 이 두근거리는 내 가슴을 알게 되겠지.
두려워 밀리는 것에 실망도 하겠지.
하여 조금씩 상처를 입으면서 이 세상 깊은 곳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들어가게 될 병준이, 병민이가 될 것이지.

 

난 사실 병준이, 병민이 아버지이어야 하는 것에 은근히 겁을 내고 있는 것 같소.
그저 휘청거리면서 버텨 나가는 이 모습에서 어떤 것을 그 애들은 배우게 되고 흉내내게 될 것인지 말이요.
혹시 '별 볼일없는 삶이구나, 우리 아버지는' 하며 실망할지 모르는 것도 조바심칠 일이지만,
그 애들 가슴에 맺힐지 모르는 상처들, 검은 그림자들의 드리움, 그것이 걱정이 된다오.

 

그러나 병준이 엄마의 따슨 사랑을 보면서 나는 안심을 하지.
애들이 그 속에서 몰아쳐 올지 모르는 어떤 것도 견뎌낼 것을 나는 믿는 것이요.
그러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또 그 애들 자신의 삶으로 생명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1986년 1월.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씨에게 보낸 편지)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유난히 올 겨울의 추위가 더욱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고, 무섭게 만드는구료.

속 의를 입을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 매서운 추위가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잘 모를 것이요.

어깨를 내리찍어 웅크리게 만드는 이 추위를 나도 60년대 중반 이후 한 20여 동안 잊어버리고 살다가 뜻밖에 여기서 다시 부딪치게 되었소.

 
'간다 간다 나는 간다'는 그 구절이 가슴을 치는구료.

여기는 오는 곳이 아니라 가는 곳이 틀림없소.

잿빛 그늘 속으로 점점이 사라져 가는 그런 입구인 것처럼도 생각되고 말이오.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는 한숨과 눈물이 그렁그렁 쌓이고, 치밀어 오르는 목메임 때문에 목을 가누는 것이 어색한 것 같구료.

하지만 저녁 사 후가 되면 별안간 활발해진다오.

다가오는 어스름 속에서 용기도 생기고 목청을 조용히 뽑아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들로 생기가 살아난다오.

 

야릇한 흥분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요새 대중가요를 익히느라고 제법 바쁘다오.

특히 '사랑의 미로'라는 노래는 이제 수준급에 올라섰는데 이걸 들려줄 기회가 없어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구료.

 
지나온 그 짙은 어둠은 이제 어렴풋하게 느껴진다오.

하지만 그것은 어느 밤 달그림자 진 건물 모퉁이에서 왔다갔다 서성대는 이곳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

그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고 말이오.

잠속에서 꿈속에서 짓눌려 오는 공포로 되살아나곤 하는구료.

그 때는 숨을 몰아쉬어 방어의 채비도 서두르게 되고,

윤동주 시인의 맑은 눈물이 스며 있을 듯한 벽에 기대어 밤하늘의 별을 끌어안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오.

 
그러나 요사이 나는 행복한 것 같구료.

목요일의 따스함을 안고 주말을 보내고 일주일을 보낸다오.

반가운 얼굴, 귀에 익은 목소리들의 수군거림이 나를 여간 흥분시키는 것이 아니오.

소풍가는 어린이처럼 마음을 들뜨게 한다오.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 나가고 있는 중이오.

당신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구료.

9월말 그 때 기적같은 만남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한 것이오.

그 후 당신의 노고가 가히 짐작이 되어,때로는 허둥허둥도 했을 것이지만 훌륭히 견뎌 낸 것이요. <후략>

 


-1986년 1월 26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 씨에게 보낸 편지-

 

[자료 2] 1심 최후진술

 

 

민주화를 위한 결단

 

 

먼저 본인과 본인의 사건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정치군부에게 당한 고문과 범죄행위에 대해 규탄, 항의한 국내의 민주인사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민주인사, 종교계인사, 양심수 가족들, 언론인들, 그리고 외국인과 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격려로

본인은 남영동에서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시 인간으로 회생하여 복귀하게 됐습니다.

이분들의 격려와 항의로 정치군부의 음모의 그물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 뜨거운 관심과 격려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민주화 실현을 위한 역군으로 다시 회생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본인에 대한 이 사건은 두 개의 잘못된 가정과 정치군부의 보복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첫째, 오늘날의 민주화 열기가 김근태와 민청련에 의해 초래되었으며

 

둘째,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는 정치군부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의 배후는 명백히 존재하며,

그것은 분명히 김근태일 것이라는 단정적인 가정 하에서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만들어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정치군부의 범죄행위와 은폐행위가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사건에 대해서 재판부는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본인의 사건과 고문 및 은폐행위를 두 개의 사건으로 분리해서 접근한다면,

또한 실체적 진실과 이러한 범죄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헌법과 법률위반 및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담당하고 있는 책무를 사법부 스스로가 포기하는 것이며,

계속 이러한 시각을 갖게 된다면 이는 고문자를 옹호하고 고문을 장려할 뿐 아니라

정치군부에 반대하고 민주화 실현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대의를 배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 시대를 10 여년 이상 지내며 살아왔는데,

당시 독재자들은 이른바 국가안보라는 미명아래 수많은 사람을 교도소와 감옥, 고문장으로 보냈습니다.

 

그때 법원과 법관은 이를 합리화시키고 추인, 협력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80년 5월 17일을 전후하여 암담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이 좌절과 공포로 보낼 때도

정치군부는 또다시 이른바 국가변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많은 사람들을 교도소로 보냈으며,

그 때도 법원과 법관들은 이를 무기력하게 추인하고 협력했습니다.

 

85년 중반 이후 본인이 있는 서울구치소에는 2백 여 명 이상의 많은 수인들로 꽉 찼는데,

이 나이어린 학생들이 본 구치소에 구속된 것은 법관이 발부한 영장에 의해서입니다.

며칠 전 면회 장소에서 나이어린 학생을 만났기에 몇 학년이냐고 물었더니 대학 1학년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상황에 우리는 매우 슬프고, 이것에 굴종할 수밖에 없는 법원과 법관,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정치군부와 법관의 정치적, 물적 독립성를 파괴하는 그 귀결점에 결국 나이어린 학생들이 감옥에 갇히면서도

정치군부에 반대해야 되는 이런 비극적인 현실을 오늘 또다시 낳았던 것입니다.

 

나는 본 사건을 시대의 불행 중 하나라고 봅니다.

입장들은 서로 다르지만 그 동안 이 공판에 참여하고 고충과 어려움을 겪어온 재판부, 변호인들, 검찰관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인의 불행일 뿐 아니라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비극으로서 우리가 같은 공감대를 갖고 통곡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이 이 공판에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민주화실현을 위해 국민으로서, 그리고 자기 자리에서

민주화를 향해 나가는데 기여하고 자극이 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충심으로 희망합니다.

 

본인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배웠는데, 그 분들 중의 일부가 일제의 탄압과 생활고로 인해

좌절하고 일제의 폭거에 침묵하고 나아가 그들의 주구배가 된 것에 인간적으로 부분적으로는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갔었습니다.

 

또한 70년대 암흑과 같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독재에 항거했는데, 그 과정에서 투옥되고 박해받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당시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대열에서 멀어져 가고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며 '왜 극복하지 못할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과 그 후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되돌아보면, 우리가 지배자들의 조직적 폭력과

박해를 뚫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 되며 용기있는 일인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나아가 본인은 이러한 70년대에 한번 투옥되면 원스타, 세번 투옥되면 쓰리스타가 되는,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어떤 의미에서는 어깨에 힘을 주는 이러한 민주인사들에 대해 이해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꼭 마땅하게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적 박해와 폭력적 탄압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이 시대의 운명과 더불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로부터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하고 쓰리스타, 포스타 나아가서 원수로 칭송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 인간은 정치군부의 폭력적 탄압에 굴복하고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본인은 체포된 이래 수많은 굴종을 강요당했습니다.

 

두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아니 고통 없이 죽여 달라고 빌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저항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또다시 저들에게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지금, 본인은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가 있기 때문에

다시 민주화대열에 한 사람으로서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근태 개인은 앞으로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김근태가 민주화 대열에서 당한 고난이 우리 사회에서 열 명, 그리고 새로운 백여 명의 민주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창출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 민주화운동은 이미 폭력적 탄압 아래서 굴복하고 좌절해 가는 사람 숫자를 열 배, 스무 배로 보충하고도 남을 충분한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동조하는 배후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 80년 5.17과 광주사태 이후 우리사회에 새로운 민주화열기를 고조시키고

물러설 수 없는 민주화실현의 몇 단계를 진행해 온 것만 봐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은 인류의 위대한 각성의 시대입니다.

20세기의 수치라던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에서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다양성과 합의와 토의를 통해 민주적 사회로 진행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70년대에 신흥공업국으로서 국제무대에서 뻐기고 많은 경제발전 국가들에 의해서 칭송을 받던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에서도

적과 동지, 폭력적 대응 이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던 군사정권으로서는, 이른바 국가안보는 물론

경제발건과 민생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졌고, 이제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군사정권은 퇴진하고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서서 이른바 통치는 물러나고 정치의 사회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 필리핀에서 지금 위대한 민주화의 승리의 나팔이 울리고 있습니다.

민주화 승리와 민중승리의 깃발이 올려졌습니다.

아키노 상원의원의 하염없는 눈물과 통곡, 뜨거운 피로써 차디찬 시신 위에서 그리고 필리핀 민중의 결단과 투쟁에 의해서

오늘 필리핀 민중의 승리가 다가온 것입니다.

 

정치군부는 이른바 국가안보를 운위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특권유지와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부전선을 비운 채 서울로 진격했으며,

국민의 군대의 보안을 유지해야 될 보안사령부가 국민을 탄압하고 민주적 질서를 기본적으로 훼손시키는 장치로 기여하고 역할을 한

정치군부가 오늘날 국가안보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정치군부는 헌정질서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참모총장 공관과 국방부에 총질을 하여 민주적 기본질서를 유린한 자들이 얘기하는 헌정질서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정치군부의 특권에 대한 보호를, 정치군부에 대한 이의제기를 짓밟고

오직 굴종과 폭력적 탄압을 합법화시키고자 하는 하나의 장치적 언어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료 1]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의장 김근태 제1차 공판기록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일 시 : 185. 12. 19(목) 오전 10시

장 소 : 서울 지방법원 118호 법정

 

 

재판장 : 서성 부장판사

변호인 : 홍성우, 김상철, 이돈명, 황인철, 장기욱, 조준희(이상 참석자), 신기하, 목요상

담당검사 : 김원치

 

 

민청련 전의장 김근태씨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등 사건 첫 공판이 19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법 합의 11부 심리로 열렸다.

공판은 재판부의 인정심문에 이어 변호인들이 방청 제한을 항의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 중단되는 사태를 빚었다.

 

 

인정심문이 끝난 후 변호인단의 장기욱 변호사는 "재판공개원칙은 절대로 필요하며 확신범이나 정치범인 경우 더욱 그러하다"고 말했고,

김상철 변호사는 "재판공개는 가족만 방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방청을 원하는 누구에게나 방청의 기회를 주는 것이므로

20 여 명에 이르는 교도관들을 내보내고 차라리 일반인들의 방청을 허용해야 한다"고 재판부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때 방청석에서 누군가가 "김근태씨의 부인도 방청제한으로 이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항의하였다.

 

 

이어 김원치 검사가 5분 가량 공소사실 요지를 낭독하는 동안 방청권을 얻지 못해 법정에 들어오지 못한 가족, 친지, 민주단체인사,

민청련 회원 등 30 여 명은 법정 입구에서 출입문을 손으로 치며 "김근태, 재판받지 말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때 김상철 변호사는 "재판부기 공판에 앞서 방청객 수를 예정해 방청을 원하는 사람 모두가 방청할 수 있도록

큰 법정으로 장소를 옮겨야 한다"고 해서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 (5분간 휴정).

 

 

변호사 : 기소된 후 20 여 차례에 걸친 피고인 접견신청을 했으나 출정 등의 이유로 접견이 거부되어

첫 공판 10일 전인 12월 9일에야 첫 접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재판을 충분히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에 들어가기 전 그동안의 이러한 절차상의 문제에 대해 재판부에 두 가지 이의를 제기합니다.

 

 

피고인에 대해 출정이라는 이유로 접견이 금지된 것이 실제 검찰청으로 출정을 해서 그런지와

기소된 이후에도 출정한 것이 타당한지 먼저 충분한 사실의 조회가 있기를 요구합니다.

 

 

검 사 : 경찰조서의 20개 항의 조사사실 중 피고인의 진술거부로 인하여 9개항 만을 기소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11개항을 조사하기 위해 기소 후에도 피고인을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호사가 구치소에서 피고인을 접견하기를 원했다며 출정과 겹치지 않도록 검사에게 요청할 수도 있었는데

한번도 그러한 요청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변호사 : 접견 허락을 검사에게 받아야 된다는 이야긴데 지금까지 그러한 전례가 과연 있었습니까?

또한 일반적으로 기소된 후에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출정하는 것은 상례가 아닙니다.

 

 

기소 후 계속 피고인을 조사한 것은 기소된 사실이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기소 이후에 검찰조사를 목적으로 출정을 계속시킨 것은 공소권의 남용입니다.

공소의 제기가 수사 절차상에 문제가 있었을 때는 재판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절차문제를 먼저 처리함으로써 이 재판 자체가 성립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재판장 :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사실 여부에 대해 피고인이 직접 진술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피고인이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재판진행에 대하여 피고인의 의견을 진술하시오.

 

 

김근태 : 지금 검찰과 변호사 간에 있었던 공방에 대하여 본인이 자세하게 증명을 한다면 보다 더 좋은 증명을 할 수 있겠지만,

이것보다 더 급박하고 현존하는 위협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인은 지난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검사 제지) 본인의 이 사건은 지난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서 있었던 비인간적이고, 불법적인 고문에 의해

그리고 동물적인 능욕과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생명에 대한 위협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진실이 밝혀지고 사법적 정의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본인에게 가해졌던

참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이러한 고문이 조사되고 색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본인은 당 재판부에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의 경위에 대한 조사를 요청합니다.

 

 

그 다음, 9월 한달 동안 가해졌던 고문의 후유증이 현재 본인에게 상당한 정도로 남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보행이 불편하고 머리가 대단히 아프고 등이 아픕니다.

소화가 되지 않고 몸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한달 동안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에게 가해졌던 정신적인 상처입니다.

본인의 인간적인 자존심과 주체성은 산산이 부서지고 찢어졌습니다.

동시에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은 짓밟혀졌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후유증으로 지금도 남아 있고 이것이 당 재판부에 조사를 요청하는 두번째 이유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본인이 변호인을 만난 것이 재판 시작일에서 불과 열흘 전 밖에 안됩니다.

이것은 방어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일 뿐만 아니라 본인에게 가해졌던 용서할 수 없는 고문행위를 은폐하려는 기도였습니다.

 

 

9월 26일 기소가 된 후 10월 초순 내지는 중순 쯤 변호인이 접견을 요청할 시기에 검찰측은

여러차례에 걸쳐 오후3시30분 내지 5시에 출정을 요구해왔습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은 출정을 나갔을 때 검찰관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온 경우가 네 차례나 있었고,

또한 검찰청에 도착했을 때 검찰관이 없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과 당시의 여러 사정을 미루어 보아 이것은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의 흔적,

그것을 은폐하려는 기도가 검찰과 정치권력 사이에 긴밀한 연결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이 명백했다고 보여집니다.

 

 

더구나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은폐기도와 더불어 본인에게 가해지고 있는 안전에 대한 위협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을 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어지러운 듯 난간을 붙들고 숨을 몰아쉼)

담요 위임에도 불구하고 발뒤꿈치가 짓뭉개졌습니다.

그 발뒤꿈치 상처가 딱지로 아물면서 지난 10월 말 내지 11월 중에 딱지가 떨어졌습니다.

 

 

이 딱지를 본인은 당 재판부에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 보관해 왔습니다.

지난 12월 13일 오전 4시경 이돈명 변호사, 목요상 변호사, 조승형 변호사 세 분이 접견을 오셨길래 하도 반가와서,

그리고 형사소송법에 공판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자유롭게 수거할 수 있다는 규정을 생각해서 세 분에게 보여드리고

그것을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교도관 세 명의 제지에 의해서 이것이 전달되지 못했고 예측했던대로 본인이 병사에 돌아가자마자 서울구치소

보안과장 송선홍의 지휘 아래 10 여 명이 달려들어서 불편한 본인의 몸을 항거불능 상태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탈취해갔습니다.

본인도 "이러면 증거인멸의 죄에 해당한다"고 주지시키고 또한 "이러지 말라"고 애원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증거인멸뿐만 아니라 본인의 안전이 아직도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재차 말씀드립니다만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행위에 대해서 명백하고 엄정한 조사를 요청합니다.

 

 

이제 간략하게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서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때 검사가 제지하고자 이의신청을 하였고 이에 대해서 방청석에서 '놔 둬, 도둑놈들' 이라고 아우성이 터짐).

지난 9월 한달 동안 참혹한 고문행위에 대해서 이제 간략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본인은 이 기억을 되살리며 치떨리는 분노와 굴욕감을 느낍니다.

 

 

우선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본인에게 요구했던 것은 '항복'입니다.

항복을 받기 위해서 깨부수겠다고 이야기했고 또한 그와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더 많이 깨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국가보안사건과 관련된 본인의 사건과 같은 경우에는 신체적 한계에 부딪치게 하여, 좀더 일찍 체념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본인에게 자신을 포기할 계기를 주기 위해서 고문을 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세번째는 새로운 사실에 대한 신문이 시작될 때면 언제나 고문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네번째는 본인을 고문대 위에 올려놓고 고문자들이 요구하는 것을 암기시키고 학습시키고 복습을 시켰습니다.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은 준비되고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 분명합니다.

(지친 듯 잠깐 중단함) 이러한 과정에서 고문자들이 본인에게 요구했던 것은 첫 번째로 폭력혁명주의자인 것을 자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본인의 사상이 사회주의자다.

세 번째로 민청련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첫 깃발을 80년대 이후에 올렸고. 그리고 각계각층에 작용하는 선과 인물을 대라.

다시 말하면 본인이 한국의 민주화운동, 반군사독재운동에 있어서의 지휘자, 슈퍼맨이 될 것을 자백하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예컨대 학생, 노동자, 현실정치인, 재야, 개신교, 가톨릭, 심지어 미국의 사업가 또는 현 정치권력 내부에서

누구와 민주화운동을 의논해서 해나가는지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슈퍼맨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랬더니 무조건 요구하는 대로 자백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본인은 이 용서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하는 자들에게 인간적 절망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곳에서 그 사람들은 본인에게 절대전능한 신으로 군림했습니다.

 

 

본인은 9월 한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매일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부터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했습니다.

(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날 각 5 시간 씩 두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13일 금요일 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네 장례 날이다"라는 협박을 가하면서 두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검사가 이의제기하자 방청객에서 "조용히 해", "계속해"라고 외침)

 

그 다음에 20일 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 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 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고문할 때는 밥을 주지 않는데 고문을 하지 않을 때도 밥을 주지 않아

심리적인 압박과 고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몇가지 증언을 하면, 이 고문자들은 고문을 가하면서, 예컨데 8일날에는 이 사건을 지휘하고 있는 사장이란 자가

10시에 5층 15호실, 본인이 고문을 받았던 그곳 실내로 들어와서

"콧구멍에 고추가루를 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버리겠다, 내가 직접 이것을 지휘하겠다"

말을 하는가 하면 또 전무라는 자는 '정치가 법보다' 다시 말하면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는 것을

본인에게 납득시키고 받아들이도록 강요했습니다.

 

 

델시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넣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 철을 만났다.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위에 서줄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

는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해 동물적인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X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이렇게 말하면서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군데로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고 심지어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

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성의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방청석 통곡)

그리고는 이렇게 비인간적인 고문이 자행되는 것을 보니 '새로운 광주사태가 발생하거나 준비되고 있구나'하고 생각을 하며

본인은 여기에서 죽을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러한 결심을 고문 담당자에게 말하자 "그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굴복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본인에 대한 고문은 진술거부 때문이 아니라 미리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도 분노나 흥분의 빛이 없이 냉담하게 미소까지 띠우고 있었습니다.

과연 인간이, 한 인간의 고뇌와 죽음의 몸부림 앞에서 저렇게 냉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인간에 대한 신뢰가 산산이 부서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렀는지 모르겠다"

는 등 자신의 가족에 대한 애정어린 말들을 주고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양면성이 공존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 사람은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나중에 혼자서 제손을 잡고 이야기하기를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 나가라, 허위라도 인정해라, 여기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9월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본인에게 집단폭행을 가한 후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9월 26일날, 포니 자동차를 타고 서부역을 지날 때 낯익은 거리,

푸른 하늘이 아직도 있구나, 푸른하늘이 나에게 다시 왔다. 이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감회가 새로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제 처를 만났습니다.

 

 

대기실에서 짓뭉개진 본인의 발뒤꿈치를 제 처와 이을호 씨 부인 최정순 씨가 보았습니다.

그때 대기실 건너편 옥상에서는 인부 10여 명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인간의 땀과 창조가 저렇게 계속되고 있구나, 저것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구나.

그래 다시 시작하자,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을 새로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치소로 이송된 이후 현재까지도 협박적인 분위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사건의 실제적 진실 - 사법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군사독재정권을 물리치고 인간답게 살고자하는 모든 사람의 요구가

보장되고, 현재 양심수나 재소자의 인간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위의 사실이 충분히 조사되기를 바랍니다.

 

 

변호사 : 본 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고문에 의해 공소가 제기되었다면 이 공소사실은 무효입니다.

따라서 공소의 적법여부, 고문 및 용공조작이 밝혀져야 합니다.

그리고 '딱지'를 강제 압수한 서대문구치소 보안과장 송선홍 과장에게 증인심문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현재 피고인의 몸에 남아있는 고문 흔적에 대한 확인을 신청합니다.

 

 

검 사 : 사실 심리를 시작하겠습니다.

 

 

재판부 : 공소내용의 1항이라도 오늘 진행합시다.

 

 

김근태 : 심문은 다음 기회로 연기되었으면 합니다.

방어권에 대한 기본적인 봉쇄와 방해가 있었습니다.

본인은 변호사와 공소내용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공소사실에 대한 재판은 다음으로 연기할 것을 요청합니다.

 

 

변호사(김상철) : 그동안 변호사 접견이 20여 차례나 거부되는 등 피고의 방어권이 침해당한 상태에서,

피고인과 변호인이 공소사실에 대해 한 마디의 이야기도 안 해본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공소내용에 대한 심문은 다음기회로 연기되었으면 합니다.

 

 

재판부 : '고문흔적에 대한 확인'과 '수사과정에 대한 조사신청'을 구두로 접수합니다.

다음 재판일자는 86년1월9일 오전10시 118호 법정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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