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부셔 눈이 부셔



눈부셔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눈 가느다랗게 떠야만
달려드는 강렬한 샛노랑에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이다.

맨 마지막으로 흘러내린
인왕산 끝자락에는
무학대사 손자국이 깊이 패어 있는 바위 하나
크게 서 있다.

그 아래
우리네 고향 앞산처럼
골짜기와 산마루가 펼쳐져 있다


오밀조밀하게
노랗게 조금씩 조금씩 물들어 가더니
어느 날 대낮
드디어 개나리는 샛노랗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샛노라
관능적인 냄새가 나는 것 같고,
속이 약간 느끼해지기도 한다

해가 서쪽으로
비켜서는 오후가 되면
인왕산 개나리가 타오른다
샛노란 불길로 타오른다
노오란 노여움으로 타오른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노여움으로 불타오른다


쏟아지는 햇빛 담뿍 받은 개나리는
샛노란 노여움으로
불타오르는 것이다

얕은 골짜기 여기저기
띄엄띄엄 응달진 곳에
붉은 얼룩이 보인다


노랑 천지 속에
얼핏 보이는 저것은
불그스레한 그 번짐은 무엇일까?

이제는 까맣게 멀어져 간
4월의 함성이
이 봄에
슬그머니 되살아나고 있는가


부릅뜬 눈으로
아직은 절대 잠들 수 없는
피맺힌 5월이
아스팔트에 낭자하게 쏟아졌던
피, 그 피가
은연 중 배어나고 있는가


아니면 작년 9월
아! 그 남영동에서
내가 토해냈던
울부짖음의 파편이 튀어서
저리 붉게 피어나는가


물고문에
불고문에 바스라졌던 내 넋의 한 조각이
다시 새롭게 물 올라
한 무더기 진달래로 피었는가

노랑 바탕에 붉게 얼룩진 건너편 인왕산이
여전히 발시린 내 감방을 화안히 비춘다


이 밝음 맞아들이기 위해서
좁다란 창문 밖 쇠창살 앞에
개나리 서너 가지 꺾어 꽂아 놓았다


요구르트 병 두 개 말끔히 부셔내고
거기에 물 가득 담아
어렴풋이 꽃망울 맺힌
개나리 가지를
확실하게 꽂았다

4월 4일이었던가
나의 개나리
망울 별안간 터뜨리고
활짝 피기 시작했다.

그늘진 창문으로
때때로 몰려오는 아직도 써늘한 바람 밀어 내고서


아! 이것은 4월 3일
나를 찾아온
뜨거운 설레임.


들뜨는 자유 한 모금 몰아쉬고
망을 연 것이 아닐까


연성수, 권형택. 김종복 친구들
모질고 외진 이곳
나서는 가벼운 발걸음 따라 일어난
그 바람 먹고
개나리 피었을까

그러나 나는 본다
눈부심 속에서도
놓치지 않고 똑바로 본다

노란 개나리
붉은 진달래 무더기들의 눈부심.


그 아래
또 옆에 널려있는
겨울의 잿빛을
나는 눈 감지 못한다

어두운 회색에
아직도 젖어 있는 저 겨울은
속으로 속으로 울었던
내 울음을 되살려 내고
깊어져만 갔던 상처를
자꾸 건드려 대는 것 같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
몸과 마음에
깊이 패인 상처를 가졌던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한 세월을 보냈다


컴컴한 밤이 올 때마다
인왕산 허리 곳곳에
숨어 엎드려
새파랗게 빛 내뿜던 수은등들 때문에
나는 더 추었다


그 수은등
나는 정말로 미워했다.

 

 

늦었지만 리비아의 “카다피”에 대하여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교민 철수가 거의 완료되었다는 뉴스를 보고나서)

국민의 가슴에, 총질을 해대는 권력자는, 그가 누구든지 권좌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것은 이미 범죄이고 적법성을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리비아의 카다피가 그에 해당된다.

카다피가 퇴진하도록 필요한 말과 조치를 우리는 강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리비아가 있는 북아프리카는 여기 한반도에 너무 멀고, 심리적 거리는 더 멀다.

또 우리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취하더라도 카디피 퇴진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한편 우리의 리비아 수출에 지장을 줄 수 있고,

그곳에 진출해 있는 건설업체들에게 부담만 주게 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계산은 필요하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와 중동 이슬람지역에 불고 있는 민중들의 민주화 바람에 대해 결국 침묵하자는 얘기라면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상호 연관성과 의존성이 높아가고 있는 이 21세기 세계화시대에 걸맞지 않는 선택이다.

 

그것은 앞서 민주화 투쟁을 거치면서 많은 희생과 대가를 지불해왔던 “대한국민”으로서 감히 하자고 할 수 없는 비겁한 외면이다.

우리는 세계의 모든 일과 연관되어 있는 것 아닌가?


2011년 3월

 

13. 남영동을 떠나던 날

 


남영동에서 본인이 당하는 고문을 보면서, 그 고문을 거들었던 한 두사람이 보였던 그 눈물, 나는 그것을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여기를 떠나라. 정말로 큰일 나겠다"며 그 사람들은 울먹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용기였을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존경과 연민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나에게 구원이었습니다. 빛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동력은 이런 사람들이 여기저기 최악의 곳에서조차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성의 절망적인 측면,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인간동료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악마적 측면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26일 오후 3시경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김수현과 백남은을 찾았습니다.

잠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김수현과 마주 앉아 얘기했습니다.

별 의미있는 얘기는 없었으나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처참한 고문을 당하고 간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간다.

이러고도 속수무책인 것이 원통하다.

더구나 너무 끔찍하게 당해서 분노하기조차 두려운 것이 한스럽다.

떠나는 지금도 내놓고 욕 한 마디 할 수 없고, 그런 용기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말이다.

당신들, 이 저주받을 인간들, 악마같은 자들은 내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군림했으며

그에 아양조차 떨어야 했던 내게 이 끔찍한 지옥의 올마이티(Almighty)처럼 덮쳐 왔었다'

나는 그 자리를 일어나서 김수현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복잡한 감정을 갖고서.

그랬더니 김수현의 키가 점점 작아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고문실에서 결정권을 갖고 있었던 이 사람은 분명 나에게는 거인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나는 늘 의자에 앉아서 오들오들 떨거나 고문대에 묶여 눕혀져 있었고

김수현은 선채로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더욱 육박해 오는 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남영동을 떠나기 위해 일어서는 이 자리에서 구두를 신은 김수현은 나만한 키이거나 오히려 작게 보였습니다.

이처럼 '쪼그라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때렸습니다.

 

나는 늠름함에서 김수현에 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김영두 등과도 악수를 했습니다.

 

그 고문기술자도 찾았으나 '없다'고만 하더군요.

포니차를 타기 직전에 백남은이 계단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이 사람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똑바로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떠나는 이 마당에서만은 당당하고자 했습니다.

9월 4일부터 25일까지 나는 이런 눈초리로 이들을 한 번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기묘하게 열리는 남영동 대문, '열려라 참깨' 같이도 느껴지는 대문을 나서서

구치감으로 향하는 자동차 속에서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온몸에 받았습니다.

'아, 이 낯익은 거리에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이구나, 이 햇빛 속으로.'

이것은 축복이었습니다.

회생일지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죽음 속에서의 돌아옴이었습니다.

검찰청 5층 계단에서 정말 뜻밖에도 본인의 처인 인재근 씨를 만났습니다.

울음이 복받쳐 올랐으나 나는 용케 참아냈습니다.

 

경찰 한 사람과 본인의 처가 계단을 부축해 내려가는 동안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말했습니다. 불과 1분여 동안이었습니다.

 

그 고문은 나 개인에게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얘기했습니다.

고문얘기를 듣고 처가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면서 그만둘까도 했지만,

그럴 문제가 아니었고 도무지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에 나는 말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침착하게 말하면서 신고 있던 양말을 벗었습니다.

발뒤꿈치의 상처들과 발등의 시꺼멓게 탄 부분을 보여주었고, 팔꿈치의 상처도 보여주었습니다.

이 만남은 정말로 기적같은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관례와는 다르게 늦은 오후에야 도착한 본인을 만날 수 있덨던 것은, 그리하여 정치군부의 고문과 그 은폐행위가

폭로되고 국내외적으로 맹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게된 이 만남은 본인에게는 영원한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사건의 개요

이 사건은 정치적 보복이며, 그 대상으로 본인이 찍힌 것입니다.

85년 5월, 학생들의 미문화원 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정치군부는 학생운동에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복수를 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소위 '학원안정법' 제정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권력 내부의 복잡한 전개도 문제였지만,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반대와 미국을 비롯한 여러나라의 회의적 반응 때문에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타협과 양보를 생각하며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군부는 오히려 수치나 치욕으로 강퍅하게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의한 표적으로, 희생양으로 본인이 선택되었습니다.

한편 '미문화원 농성사건' 이후 정치적 탄압에 몰린 학생들은 민청련 등 여러 재야 단체로 찾아와서

호소도 하고 압력을 가하면서 지원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본인은 이러한 학생들의 요구에 대해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특히 민청련이 개입해서 지원한다면 그 효과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부담을 감당해내기 어렵게 될 것이다' 는 점을 민청련 간부들에게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5월 29일쯤 청년학생운동단체가 공동으로 종로 2가에서 '광주사태 항의 국민대회'를 시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본인이 구류를 사는 6월 하순에 '민중민주화운동 탄압저지대회'가 서울대에서 열렸는데,

거기에 또 학생들의 강력한 참석 요구에 따라 민청련 상임위원장 김병곤씨가 참석했던 것이 하나의 분수령이었습니다.

 

맨 앞에서 얘기한 대로 5월 29일의 '국민대회'를 학생운동단체와 공동으로 개최한 것을 이유로

정치권력은 본인에 대한 구속을 결심했으리라 추측합니다.

다만 광주사태 문제로 구속하는 것이, 그로인해 발생할 정치적 쟁점이 싫었으리라고 믿어집니다.

이른바 '만민탄 대회' 등 계속되는 학생집회에 민청련 간부이자 학생운동의 선배들이 모여있는

민청련이 지원하는 모습을 절대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은 칼을 뽑았고 김병곤씨는 이렇게 구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병곤씨를 조사한 남영동은 상부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습니다.

당시 신문에도 발표됐듯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덮어 씌우려고 조사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학생운동의 배후로 만드는 일도 별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본인과의 어떤 직접적 연결도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곤경에 몰린 남영동은 무엇인가 보여주어야할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권력의 정치적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85년 8월 '학원안정법' 제정기도 취소 이후 전개될지도 모르는 정치적 곤경을 타개할 수 있는 핑계거리로

본인이 선택되었으며,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무조건 극도로 잔인하게 고문을 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이겠지요.

 

여하튼 결과적으로 괜찮은 것을 획득하고 만들어만 낸다면

과정에 무리가 있다하더라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자신했겠지요.

정치적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으리라 낙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계산이 여러 가지로 틀려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우선 남영동에서 만든 그 각본이 너무 조잡하고 근거가 박약했던 점일 것입니다.

누구도 예기치 못한 만남을 통해 본인이 당한 고문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된 것이 권력의 계산과는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검찰에서 본인의 완강한 진술거부 또한 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이에 권력은 '공소유지조차 힘들게 되는 것이 아닌가' 라며 허둥지둥댔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본인을 구속하고도 한달 정도나 그냥 있다가 본인의 묵비권 고수가 결정적인 것으로 보고

10월 2일에야 별안간 민청련 간부를 대대적으로 체포, 구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별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조사해 봐야 별 것 없었고 문제가 되었던 것에 대한 증거수집도 신통치 않았던 점이 명백합니다.

 

본인에 대한 혹심한 고문 얘기를 듣고 잡혀간 간부들은 최민화씨 말대로 얼어 있었는데,

고문은 커녕 폭행조차 당하지 않아서 고마움조차 느끼는 묘한 심리에 빠지게 만들어,

어떤 의미에서는 본인을 함정에 몰아넣도록 유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의 경우, 기적같은 만남을 방지하려고 송치되는 날 구치감을 거치지 않고 바로 검사실로 연행했으며,

또한 그날 당장 보통 관례와는 다르게 피의자 신문조서를 여러 간부들,

최민화, 김희상, 김종복 씨로부터 받아내어 본인에 대한 직.간접의 증거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법된 사실은 아니지만,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백합니다.

남영동의 강박 상태로부터 회복하여 바르게 대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계획되고 의도된 것입니다.

 

본인에 대한 경험,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기 위함이었겠지요.

따라서 세 사람에 대한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는 임의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인에 대한 여러가지 탄압이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계속 강행되어 나갔던 것입니다.

공소가 제기되었던 사실과도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 KBS-TV와 연합통신을 통하여

서울신문, 경향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실패한 탄압과 고문, 그것의 계속되는 은폐행위,

나아가서는 재판에 영향을 미치고자 또다시 무모한 시도가 전개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소용없는 것들이 되었습니다.

 한낱 웃음거리로 또 하나의 80년대 희극물로 본 사건이 나타났을 뿐임은 이 시대가, 모든 국민이 알게 된 일이니까요.

- 민주당 지도부에게 보내는 편지

 

손학규 대표님을 비롯한 최고위원 여러분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런 와중에 어려운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스런 마음입니다.

그러나 무릅쓰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민주당 지도부가 통 큰 결단을 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민주당이 통 큰 양보를 해야 할 때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4.27 재보궐 선거에서 전국적 승리를 하기 위해서지요.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물가급등, 끝나지 않는 구제역사태, 전세대란, 깊어가는 양극화 등

시급하고도 절박한 민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동력을 얻기 위해서 정말로 통 큰 양보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 지금의 지엽적이거나 낡은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한나라당 정권의 정책으로는

이 시급하고 절박한 민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엇나간 오만과 독선에 대한 실망과 반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40% 후반의 지지를 받는다고 하면서 헤매고 있는 저들을 죽비로 내리 칠 수 있도록 우리 야권이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선거에서 준엄한 심판이 내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국민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무능하고 독선적인 세력에게 정권을 빼앗겼다는 것이 정말 부끄럽고 죄송스럽습니다.

 

결단해야 합니다.

분당, 김해, 순천 등에서 적어도 한 곳은 비민주당 야권단일후보가 나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현실정치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고통도 받아들여야 할 운명입니다.

그래야 국민 속에서 부활이 가능할 것입니다.

 

연대, 연합특위에서 위원들 간에 의견교환이 있었다는 것을 언론보도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또 당내 여기저기서 얘기 된 것을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범야권 연대를 위해서, 장래의 가치연합, 정책연합, 그리고 조직통합 또는 연합을 위해,

마침 지금 공석이 되어있는 16개 지역위원회 위원장 선임을 보류하자는 의견이 건의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최고위원들이 소극적이거나 침묵을 지켰다는 말을 언론보도를 통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국민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시대정신이 간곡하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백척간두 진일보 (百尺竿頭 進一步)의 심정으로 손을 놓아 버려야 합니다.

 

정치적 장래에 대한 미세한 계산을 멈추어야합니다.

결단하는 길 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입니다.

 

고심했습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결단해야 합니다.’ 라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길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2011년 2월 16일

김근태 올림


 

12. 마지막 고문 - 열 번째 고문

9월 20일 저녁 8시경에서 10시 반경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김수현, 김영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과 또 한사람이 고문에 가담했습니다.

 

직접 전기고문도구를 든 것은 김수현이었습니다.

그동안 강제해온 것들, 특히 문용식의 N.D.R.과 C.D.R., P.D.R.에 대해서 고문으로 확인해 나갔습니다.

이을호의 C.D.R., N.D.R., P.D.R. 역시 마찬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확인하고요.

 

박문식과 관계가 있었음을 자백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고문대 위에서 수없이 인정하고 암기하였음에도 또다시 반복됐습니다.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아마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고, 이것을 검찰이나 법정에서 부인할 경우의 심각한 두려움,

즉 강제당할 때의 그 고문을 기억시켜 당혹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고도의 심리적, 정신분석적 접근에 기초한 고문행위였다고 믿어집니다.

사실 지금도 고문 당시의 상세한 상황, 김수현이나 백남은의 말과 거동을 거스르는 경우에는 상당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필경 나중에 또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에 어떤 부분은 그냥 넘어간 부분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전과는 달리 20일에야 비로소 이른바 반국가단체결성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해왔습니다.

아니, 고문대 위에 있는 본인에게 지시, 명령을 해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요구선에서 한 단계 더 비약해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완성된 것을 갖고 한번 더 왕창 고문하여 그것을 암기시키고,

손도장 찍게 하는 것이 능률적이고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는 것은 고문자들 나름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각 부분에 그럴 듯한 근거를 마련하고 관련된 사람들의 범위를 그어 나가며,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적 필요성, 활동성에 대응하는 신축성 여지를 유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체결성 인정명령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점은 김수현 당신이 스스로 얘기했다.

 

이른바 1월말의 최민화, 박우섭, 김희택, 천영초, 본인이 있었다고 만들어진 - 본인이 여러가지 필요성에서 만든 것인데 -

민청련 사무실의 모임을 얘기하면서

"이것은 당신이 배척받은 것이 분명한데 왜 자꾸 본인이 N.D.R.을 얘기했느냐고 했지 않은가.

그래놓고 이제와서 그것을 민청련의 공식지도이념으로 결정했었다고 자백하라니 아무래도 이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당신 스스로 얘기했던 것을 정면으로 뒤엎는 것이 아닌가" 라며 항변했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애당초 합리화, 논리화라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요.

고문대 위에서 버티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어서 결국에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 단체결성명령의 항복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본인을 처형하겠다는 노골적인 정치군부의 선언입니다.

공포와 고통을 못 견뎌 울부짖는 거야 고문대 위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정말 슬퍼서 운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아, 내가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이구나.

그동안 고문대 위에서의 죽음은 죽은 것이 아니었구나.

내 나이 마흔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구나.'

고문대에서 내려와 자리에 앉으니 그냥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멍하니 내버려 두었습니다.

 

바깥사회와 완전히 차단되었던 나는 정치적 사정이,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본인의 생명말살을 절대로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각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고 단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끔찍한 고문, 말도 안되는 각본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그래, 죽을 수도 있다. 40년을 살아왔다.

유관순도, 윤동주도, 그리고 김주열도, 80년 광주의 숱한 선랑한 시민들도 그렇게 살해당하지 않았는가.

추하게 정치군부, 너희들에게 굽신거리지는 않겠다.

절대로 휘청거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니 본인도 '이것은 지나친 생각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사실 그때 정치군부의 방향은 이쪽으로 몰고 나가려는 유혹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탄압, 가혹한 탄압에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려 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1월말 민청련 사무실에서 열린 회의내용이 바뀌어지게 됩니다.

김희택씨가 얘기했다고 한 부분에서 처음에는 "일단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하라"는 것으로 본인이 기술하였는데,

여기를 "일단 민청련의 지도이념으로 하되 총선이 끝날 때까지 덮어두는 것으로 하자"고 바꿀 것에 본인은 항복했으며,

3월말 이른바 '작은 자리'의 교육내용 중에서 처음에는 본인이 N.D.R.을 단순히 설명한 것으로만 돼 있었는데,

이것이 민청련 지도이념으로서 확정되는 것으로 수정하도록 강요했고, 속절없이 그렇게 했으며,

8월 10일 5차 총회에서 그 N.D.R.에 기초한 선언문을 작성하여 채택했다고 자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들의 요구대로 되었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른바 1월말 민청련 사무실에서 열린 회의에 대해 약간 덧붙이면 이렇습니다.

이을호씨의 자백에는 2월 중순경 민청련 사무실에 15,6명 정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여기서 본인이 N.D.R.을 설명했다고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수정하고자 했습니다.

평회원의 참석도 문제고 너무 여러사람과 관계되어 다치는 범위가 넓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월말 민청련 사무실에서 했다는 5명의 회의를 즉석에서 만들어 냈습니다.

또한 신뢰를 얻기 위해서 본인이 N.D.R.에 대한 설명을 마친 다음, 여덟 사람의 발언까지 제법 그럴 듯하게 기술했습니다.

고문자 특히 김수현은 이를 좋아하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을호씨에게 강제하여 얻어 냈던 2월 민청련사무실에서 N.D.R. 설명이라는 것은 전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월 민청련 사무실, 2월 민청련 사무실, 3월 작은 자리, 그리고 또 고문자들이 요구하여 기독교회관 내 기독학생총연맹사무실과

카톨릭 정의평화위원회 사무실까지 총 다섯 번의 설명 내지 발표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남영동에서는 작성되었습니다.

검찰에서 2월과 기독교회관, 카톨릭 정의평화위원회 사무실에서의 자리가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본인이 1월 말을 만들어 낸 것은 위에서 얘기한 것, 그리고 공판에서 얘기한 이유 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최민화, 김회택, 박우섭, 천영초 씨는 이런 조작된 사실을 충분히 반증해 낼 수 있을 것이며,

본인이 당했던 고문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해줄 것이다'는

내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수현은 처음에는 별 주의를 하지 않다가 왜 N.D.R.이라는 주장을 1월말 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와 이유를 말하라고 윽박질러 댔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하라고요.

 

며칠을 쩔쩔매다가 "공판정에서 진술한 바 있는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 공천추천 의향과 그에 대한 고사에 대하여,

그리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눈치 채인 것에 대해 해명할 필요에서 그렇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적 처세의 교만함 때문이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민주화운동 대열에서 그렇게 자신없는 태도로 활동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출세주의자로 비치지 않을까 조바심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국회의원으로 발돋움하는 것으로 민청련 의장 자리를 이용할 의사가 없었고, 또 그렇게 비칠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김영삼 총재와 만난 것, 고사한 것에 대해 신의를 갖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또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를 해명할 필요는 물론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느 의미에서는 민청련 활동에 대한 인정으로, 대중적 인식이 넓어져 가는 것으로

본인을 비롯한 민청련 회원이 자부심조차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N.D.R.발상의 배경과 계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남영동은 20일에 N.D.R.을 민청련 지도이념으로, 반국가단체 결성으로 완결지었던 것입니다.

 

20일 이후는 이에 대한 서류정리, 진술서, 진술조서 작성 때문에 고문 받은 20일은 물론 거의 25일까지 내내 한잠도 못 잤습니다.

26일 새벽 3시 20분 용산경찰서 유치장에 이르러 눈을 붙일 때까지.

25일 새벽 5시 30분, 본인이 자그만 반란을 일으켜 김수현으로부터 10여 차례 한 20분간 집중폭행을 당했습니다.

참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끔찍스런 고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되었습니다.

 

팔꿈치로 가슴을 가격 당했는데, 다른 경우 같았으면 크게 항의했을 그런 일이지만,

백 번을 그렇게 해도 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문용식과의 관계, N.D.R.에 대해 다시 내가 부정하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나는 문용식씨가 무서웠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그 심정은 이해되지만

마치 물귀신처럼 아무나 무엇이거나 잡고 같이 익사하자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본인 말고는 반증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본인은 필사적이었습니다.

김수현은 "이 새끼, 벌써부터 법정투쟁을 준비하는 거야? 이런 새끼는 가만 둘 수 없어" 하면서

당시 본인이 입고 있던 겨울 모직점퍼를 벗긴 다음에 에어컨에 기대어 세운 채 가슴을 가격했습니다.

 

결국에는 이들에게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나는 자포자기하여 혼란에 빠져들지는 않았습니다.

가능한 경우 나는 다시 저항했던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자존심의 불씨, 굴욕을 거부하는 불꽃이 완전히 꺼져 버렸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한국경제 미래가 백척간두에 섰습니다.

'G20' 이라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호의 저 객실 한 구석에선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미FTA 밀실협상이 진행 중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서울행 목적이 G20 정상회의가 아니라 한미 FTA타결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게 부담을 주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정부는 밀실협상으로 이에 화답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협상에서 지난번 쇠고기협상에서처럼 덜컥 무리수를 놓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하필 한미 쇠고기 협상의 주역이었던 민동석씨가 이 시점에 외교부 차관으로 컴백했다는 사실이 단지 우연일까요?

 

민동석 그가 누구입니까?

자신의 영달과 윗사람 눈치 보기 때문에 우리국민의 건강권과 우리나라의 검역주권을 포기했던 사람입니다.

그러고서도 “미국이 준 선물”이라고 뻔뻔스럽게 적반하장으로 나왔던 사람 아닙니까?


민주당 지도부와 당원동지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길은 외통수입니다.

이대로 두면 이명박 정부는 한미FTA를 쇠고기 협상처럼 처리하려고 할 것입니다.

전면적 재협상을 당론으로 채택해야합니다.

투자자-국가 제소 조항, 네거티브 리스트 조항, 이른바 역진방지조항, 서비스․의약품 조항 등

각종 독소불평등 조항에 대해 전면적 재협상을 요구해야 합니다.

전면적 재협상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에게 G20의장국답게 당당하게 미국과 협상하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만일 합의가 안 되면 이런 내용으로는 중단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에게 전면적 재협상을 하라고 하는 것은 마치 고양이 앞에 생선을 바치는 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미FTA를 지금대로 하라고 한대서 민동석 차관을 새롭게 등용한 이명박 정부가 이른바

“미국이 준 선물”과는 다르게 협상할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저들에게 맡기고 뒷북칠 일이 아닙니다.

민주당이 앞장서서 행동해야 합니다.

결연한 마음으로 국민과 함께 일어나서 반대하지 않으면 미국의 교만한 요구 앞에 속수무책이 될 것입니다.

물론 지난 참여정부시절 집권당으로서 추진했던 한미FTA를 이제와서 부정하는 것에 부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치인의 자기부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지난 과오를 알고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은 물론 국민과 역사 앞에 더 부끄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지난 97년 IMF 체제를 돌이켜 봅시다.
OECD 가입을 허락하는 대신 자본자유화, 외환자유화, 이른바 환율시장화라는 미국과 IMF의 강요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경제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이 우리가 이뤄놓은 성과, 특히 경쟁력 있는 제조업과 “금모으기운동”에 나섰던 국민의 단합정신이 있었기에

파국의 길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경제와 서민생활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IMF 위기를 통해서 우리 경제는 급속히 미국화 되었고, 미국의 금융자본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경제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으로의 제도화가 개혁의 이름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던 한국경제의 다이나믹스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성장의 함정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부유층과 서민의 양극화를 격화시켰습니다.

한국사회를 결정적으로 분열시켜 버렸습니다. 일자리를 없앴고, 있는 일자리의 절반은 비정규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불안과 공포의 사회, 패자부활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은 우리의 길이 아님이 분명해 졌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미 FTA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시기에 지지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집권시절 국내외 신자유의주의 세력의 압력과 영향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휘둘렸습니다.

미국식 양극화라는 덫에 걸려 정권을 교체당하고 말았습니다.

양극화 앞에서 좌절하고 분노한 서민과 중산층의 “민주화가 밥 먹여 주냐”라는 비난 앞에서 우리는 초라해졌던 것 아닙니까.

진정한 반성은 진정한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말로만 반성한들 그 어떤 국민이 믿겠습니까.

우리 민주당이 민주· 개혁·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는 세력이라면 반드시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와 한미FTA, 그것은 우리가 갈 길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고백해야 합니다.


이제 ‘진실의 순간’이 우리 앞에 왔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시간도 없습니다.

국민과 역사의 요구에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2010년 11월 2일
민주당 상임고문 김근태

9월 13일 밤 10시, 김수현, 백남은, 고문기술자 김영두 등이 왈칵 몰려 들어왔습니다.

차가운 분노를 내뱉으면서 김수현은 본인을 고문대에 올려 묶으라고 지시했습니다.

 

11, 12, 13일 오후까지는 순풍의 돛단배처럼 평화를 향하여 순조롭게 나아갔습니다.

협박과 공갈은 끊임없이 들었지만 몸서리쳐지는 고문이 사라져 가고 잇는 나날들이었습니다.

 

13일 저녁 식사가 15호실 방문턱을 넘어 본인 앞의 책상 위에 놓여졌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두번인가 먹었습니다.

그 때 복도에 있는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자 정현규가 받고 오더니 '미안 하지만 안 되겠다'면서 밥그릇을 들고 나가버렸습니다.

이 암담함이라니, 이것은 고문을 가하겠다는 선전 포고입니다.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여 혼란에 빠졌습니다.

오그라든 채로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이 5시 반경이었으리라고 가늠되는데, 밤 9시가 넘도록 고문할 기척은 없었습니다.

'아, 이것은 저들의 심리전술인 모양이다. 그들의 말대로 내가 해이하게 되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일 뿐이구나.'

그런데 10시에 고문은 또 다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김수현은 본인을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는 말했습니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13일이다. 무슨 날인지 알겠느냐?"
"악마의 날이다."
"서양에서는 오늘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한다. 너에게도 최후의 만찬 날이다. 각오하라."

고문 기술자는 8일 이후 본인의 사건에 이렇게 깊이 개입해 오지는 않았었는데 13일, 이 날은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새벽 2시 반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계속하여 가했습니다.

마음은 물론 몸도 도무지 견뎌낼 수가 없게 됐습니다.

고문기술자는 기승을 부리며 고문을 하고, 김수현은 퍼렇게 핏대를 세우며 끊임없이 모욕했습니다.

고문기술자가 피로하여 주춤하니 김수현이 직접 나서서 장치를 들고 전기고문을 꽤 오랫동안 했습니다.

이렇게 김수현이 전기고문을 하는 동안 고문을 하는 고문대 옆 욕조에서, 고문대 위에서, 샤워를 하고 몸을 닦는 기척이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키득거리고, 왜 그런지 이것이 그렇게 마음에 슬픔과 상처를 안겨주더군요.

나는 아주 초라한 존재로서 미물처럼 짓밟히고 있는데, 그자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백남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머리가 컴퓨터일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중지에 못 당한다. 여러 사람이 의논해서 대처하는 데는 못 이겨.

당신이 왜 이렇게 고초를 당하고 미움을 받는 지 알아? 묻는 말에만 대답하기 때문이야. 그것도 아주 부분적으로....

그러니 고문당할 수 밖에 없어."

그러자 김수현은 "당신은 무슨 당신이야? 개새끼지, 나쁜 개새끼야!? 하고 잔인한 고문을 쉴 새 없이 가했습니다.

본인의 기력이 워낙 탈진해서인지 한번에 오래 고문을 가하지 않고 자주 쉬면서 했습니다.

워낙 꽁꽁 묶어서 고문을 안하고 고문대에 눕혀만 두어도 그 자체가 고통이었으며, 팔, 다리가 금방 저리고 시큰거렸습니다.

본인이 "손, 발에 피가 통하지 않아 저려서 못 견디겠다. 풀어 달라" 는 뜻의 말을 하자,

고문기술자는 "그래, 걱정 말아!" 하면서 전기고문을 왕창 세게 하기도 했습니다.

남영동 고문에서 본인은 한 번도 의식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3일, 이 날은 이미 기력이 다해선지 전기고문, 물고문을 가해도 발버둥질을 치지 못했습니다.

그때마다 고문은 중지되고 찬물을 머리에 붓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쳐댔습니다.

점차 아슴프레 해지는 의식 속에서 '아, 이제 내가 정신을 잃겠구나' 하는 순간이 되면 고문은 중지되었습니다.

고문기술자들은 아는 일이었습니다.

13일 고문 이후, 남영동에서는 물론 구치소에서 생활해 나가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몸이 참으로 나빠졌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밥을 먹고 소화해 낼 수 없었으며, 보행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두통이 걷잡을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다다른 것은 물론이구요.

어떤 한계점, 분수령이었습니다.

일단 13일 고문은 14일 새벽 2시 반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김수현은 남아서 박명선과 또 한사람을 데리고 14일 새벽 3시경 부터 3시반경까지 또 고문을 해댔습니다.

이 새벽녘 고문에서 김수현은 또 다시 문용식의 N.D.R.과 학생운동의 배후로서 민추위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자백을 요구했습니다.

사실 고문을 받지 않을 때는 이 부분에 대해서 완강하게 저항을 하고 고문대 위에서 인정했던 것을 엎어버리곤 했습니다.

점차로 슬그머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민추위라는 단체에 대해서는 9월 8일 문용식의 N.D.R.강제 인정 요구시,

민추협은 알지만 민추위는 모르는 것으로 이미 고문자들도 인정해 주고 넘어갔던 것인데 새삼스럽게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이 의도가 무엇인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학생운동의 배후로서 구체적인 관계 설정을 얻어내도록 상부로부터 지시받았을 것입니다.

김수현도 약간은 면구스러웠던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한테는 하나도 손해가 아니고, 그냥 그런 단체가 있었다는 것을 듣고 알고 있었다"는 것 뿐이라고.

이것은 본인이 문용식에게 N.D.R.을 설명했다는 강제자백을 요구한 그날 그 자리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며,

학생운동의 명백한 배후로 더욱 확대시키고 키워 가려는 의도임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고문대 위에서는 언제나 항복과 인정, 그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9월 13일에 가장 중요하게 강제해 온 주제는 민청련의 재정이었습니다.

남은 시간에 다시 배후의 문제가 등장하였고, 마무리 즈음에서는 9월 4일 이래의 총복습이 이루어졌고요.

밤 10시에 김수현과 백남은은 재정 문제에 대해 크게 화를 내면서 소리쳤습니다.

"우리 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제 김근태에 관해서는 모두 다 밝혀졌고 얘기도 잘 하고 있다. 재정문제도 그렇다고 보고했고,

회의석상에서도 그렇게 말했는데 이제 도대체 무슨 꼴이냐. 상부로부터 호통을 당하고 개망신을 당했다. 각오하라"는 공갈이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미국 워싱턴 소재 동포 신문사 기자인 심기섭씨로부터 송금되어 온 45만원,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를 통해서 민청련에 전달되었습니다.

얘기 못할 것은 하나도 없지만 이미 확정된 결론을 갖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짜 맞춰 나가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얘기한다는 것은

피해의 확산을 광범위하게 만들 뿐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 돈에 대해서 다른 정보수사기관인 안전기획부에서 치안본부와 남영동에 물어왔다는 것입니다.

본인에 대한 조사에서 이 점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을 본 안기부쪽은 남영동조사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고,

그것이 치안본부쪽과 남영동을 당황시켰을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에 대한 격노와 재차의 고문을 가하도록 남영동 상부가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나는 고문 앞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권호경 목사를 통해서 돈을 받았다고 인정했습니다.

선의와 민주화에 대한 염원에서 민청련을 지휘하고 그 전달통로가 되신 분들을 지켜낼 수가 없었습니다.

고문 앞에 무언의 약속을 저버린 배신자가 되어 갔습니다.

이 점 때문에 권호경 목사는 본인의 배후로서 위치가 좀 더 탄탄해졌습니다.

재정문제에 관해서 위에 말한 것 이외에도 대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이 고문자들은 자기들 상부에 보고해야 할 처지였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미 고문자들이나 본인에게 무엇이 사실인가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몰리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서 있는 현재의 처지가 본인과 이 고문자들은 극도로 대립적임에도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몰리고 있는 이 고문자들, 그 상부에 본인이 무엇인가를 주어아하는 시혜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고문대 위에서는 이것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한편 자포자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치명적인 부담이 몇 사람에게만 몰리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이들이 상부 또는 타 기관에 보고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각본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몰론 고문자들이 묻고 수정하고 하는 협력 속에서 각본은 점차 완성된 모습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회원들의 월회비 160만~180만원과 지도위원 40여명의 월 2만원 이상씩 60~80만원이 민청련 재정의 골격이며,

이는 이미 얘기한 것이라 이외의 것이 필요했습니다.

종교계, 재야, 언론계, 법조계 인사등 모두를 포함시켰습니다.

범위를 아주 넓혀 버리면서도 돈의 액수는 되도록 작게 했습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몇 분에게는 부담을 지웠습니다.

고문자들은 좋아하면서 "여기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어. 진작 얘기했으면 고문도 받지 않았을텐데..."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인간에 대한 고문을 주저하지 않고 사용하면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필요한 무엇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슨 중대한 것을 발굴해 낸 것처럼,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화색이 도는 낯빛을 했습니다.

며칠 후 고문자들은 네 개 은행의 구좌를 갖고 와서 또다시 재정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 때는 고문을 당하지 않았으며 심한 추궁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네개의 통장들은 민성돈이라는 가명으로 똑같이 만든 것입니다.

회비를 내는 직장 생활인들에게 부담과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개의 통장을 만들었고 가명을 사용했던 것이었습니다.

13일, 이날은 김수현의 말대로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그 고문의 강도는 8일의 경우보다 못하지 않았나 싶지만, 이 13일 이후 본인은 결정적으로 균형상태를 잃어버렸습니다.

 

이튿날인 14일부터 남영동을 떠나는 26일 점심때까지 본인은 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국물과 두어 숟가락 정도의 밥을 그것도 오래오래 씹어서 겨우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요기는 주고 햄버거빵을 우유에 녹여서 채웠고, 즉석라면에 물을 부어서 그 국물과 약간의 라면발로 허기를 메웠습니다.

 

김수현은 이러한 본인을 보고 "단식투쟁을 하는 것이냐"고 묻더군요.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의사가 약간이라도 통할 수 있는 사람들로 내가 자신들을 생각하리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목은 붓고 쉬어서 말을 제대로 못하고, 머리는 깨어져 나갈 것 같고, 온 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기 직전 같았습니다.

말하면 쓰고, 베끼고, 손도장 찍고, 또 찍고 하면서 26일까지 갔습니다.

14일부터 19일까지는 평균 4시간 정도 재워 주었습니다.

그 이후는 거의 잠을 못잤습니다.

4일부터 9일까지처럼 앉아서 약간씩 졸았던 것이 전부였습니다.

 

식사를 주지 않아 고문이 박두했음을 경고하는 심리적 고문, 조건반사에 기초한 압박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밥의 제공은 고문이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여부의 알림역할이었습니다.

당시 밥은 요기수단이 아니었으니까요.

 

평균 이틀에 한번 정도씩, 이른바 고문자들이 말하는 본인의 해이함을 방지하기 위해 이처럼 심리적 고문을 해왔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인 5시반부터 대략 10시까지 초죽음이 된 상태로 지내게 되고,

밤 10시가 지나면 이 고문자들은 본인을 위로하면서 라면을 끓여주었습니다.

고문 없이 하루가 지난 것을 고마워하면서, 주는 라면에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본인은 남영동에서 살았습니다.

미묘한 감정의 혼란상태로 들어가게 됐던 것입니다.

당시 김수현은 정말 표독하게 굴었습니다.

고문도 잔인하게 할 뿐 아니라 직접 자신이 도구를 들고 고문을 했고, 끊임없는 모욕과 학대를 가했습니다.

가톨릭신자이며 최기식 신부를 조사했다는 이 사람은 초기에는 소극적이었으며 무척 난감해 했습니다.

그러다가 8일 이후, 특히 13일 이후부터 본인을 악마같이 학대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러한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안보와 관련된 사건을 주로 맡아오고 있어서 고문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 사건들에서는 고문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필수적이다.

고문을 가한 것 때문에 자신에게 상처로 남은 것은 없다.

오히려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해 찜찜한 것으로 남은 사건들이 자꾸 떠오른다.

고문을 가하는 것은 상대에게 일찌감치 체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자백의 결단을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나름대로 합리적이고자 하며 절제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무슨 악마의 화신이나 그 아들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잠깐씩 하는 생활 얘기속에서, 그 모습에서 검소하고자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탐욕과 그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국가변란과 폭력적 행위를 한 것은 정치군부지만 생활을 위해서 자신들은 결국 그 힘에 굴복한 것이다.

그러나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다.

광주사태를 민중항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잘 모르겠다.

그것이 아닌 근거도, 또 그렇다고 할 논리도 제대로 갖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절벽은 아니고, 어느 면에서 치안본부 대공과장 신 모씨의 말처럼 약간 대화의 논쟁 비슷한 것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9월 4일부터 8일까지 백남은이 지독하게 고문을 가하도록 지시를 내렸는데 그 역할이 김수현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구성요건 해당성을 충분히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짐에 따라 상부의 요구와 질책이 심하게 가해져 왔을 것이고,

그에 따라 김수현은 자신의 역할을 악독하게 전환시켜 나갔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김수현이 무서울 뿐만 아니라 징그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비위가 역해지는 그런 사람으로 느껴져 갔습니다.

고문을 자주 가하면서 본인을 고문대 위에 올려 묶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고문받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이런 저주받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문 받는 것, 그것이 어떻게 습관이 되고 어떻게 면역이 될 수 있겠습니까.

초기의 김수현이 상대적인 합리성을 갖고자 했던 것, 그것은 상부의 지시와 요구, 즉 정치적 필요성에 입각한 명령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김수현의 역할이 바로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도봉구에 “가인(佳人)”초등학교라는 곳이 있다.
지역 주민 대부분께서도 이게 무슨 말인지, 왜 그렇게 이름 지었는지 잘 모른다.
또 너무 어려운 말이어서 알고 싶은 호기심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지난 15여 년 동안 이 곳 도봉구에는 학교가 많이 지어졌다.
나는 사명감을 갖고 여기 창동에 사셨던 독립운동가들의 성함을 학교 이름으로 짓도록 노력했지만

성공한 것은 단 하나 “가인” 초등학교뿐이었다.

그것도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본명도 아닌 ‘호’를 따서 지은 누구도 잘 알 수 없는 이름일 뿐이었다.

우선 이곳을 관할하는 교육장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일제 치하 1930년대 중후반기 군국주의가 노골화되고, 민족독립운동을 하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의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의 눈초리를 벗어나고자 이사해 온 곳이 여기 창동이었다.

경원선 출발역인 청량리에서 한 정거장인 이곳은 경성이 아니면서도 정보를 곧 전해들을 수 있는 안성맞춤 지역이었다.

한때는 도산 안창호, 위당 정인보, 임꺽정의 홍명희, 조선 무용가 최승희, 김병로 선생 등이 이곳에 모여 사셨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이곳 노인 어르신 일부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미국이나 서양처럼 사람 이름을 따서 학교, 거리, 건물 이름을 짓는 것에 익숙한 문화가 아닌데다

서양처럼 사람이름을 따서 기념하는 북한이 의식되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안창호” 고등학교, “정인보”중학교라고 하면 전국의 많은 사람들의 귀에 쏘옥 들어갈 것이고,

재학생들에게도 그런 이름 자체만으로도 큰 가르침이 될 것이고, 경쟁력도 그만큼 높아지지 않겠느냐고 권고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이 말한 학생인권조례(안)과 그에 대한 교육부, 교육관료, 일부교사

그리고 오늘 한국의 특권적 지배계층의 반응을 보면서 지난 일이 떠오른다.

우선 나는 전혀 놀라지 않고 있다. 교육도 ‘시장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공교육, 사교육에 있어서의 우월적 위치를 계속 대를 이어 유지하려고 한다.

이들로서는 기본적으로 학생은 교육의 ‘대상’이고 ‘훈육’되어야 할 ‘객체’로 규정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체벌을 금지하고 두발자유를 보장받는 교육의 주체로서 학생들이 인정받는 순간

혹시 권위주의적 시장주의 교육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이기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욕망 충족과 더불어 소통, 협력, 연대 없이는 심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살아갈 수 없다.

교육과정은 이 상호 충돌할 수 있는 근원적 욕구를 어떻게 이해하고 조정하고 상승시킬 수 있는지,

적어도 최악의 대립과 불행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인지 협동교육을 통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학생들은 교육과정에서 사회와 국가의 도움을 받고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도움을 받는다해서 학생 개개인의 주체성이 훼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이 이렇다면 어떻게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체벌을 이른바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허용할 수 있겠는가.

또 의존적인 계층의 표시로 두발 규격화에 복종해야 한다고 우길 수 있겠는가.

시행령을 고쳐서 학생인권조례를 사실상 무력화 시키고자 하는 교육부는 더 이상 어깃장을 놓지 말아야한다.

그것은 교육의 선진화, 사회의 진정한 선진화를 방해하는 잘못된 권위주의적 선택이다.

2010년 10월

김근태

 

9월 10일 밤 7시경부터 10시경까지 고문을 당했는데, 그것은 처음 당하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전기봉 고문인데 양쪽 발등에 무슨 장치를 하고 진동을 일으켜 고문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 고문을 직접 지휘한 것은 김영두이고, 그 뒤에서 김수현이 조정했습니다.

박병선, 최상남, 정현규, 경상북도 출신의 또 한 사람의 경찰관이 고문을 했습니다.

 

9월 8일을 고비로 백남은은 고문 지휘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맡아 김수현이 더욱 분명하게 주동적 임무를 맡아갔습니다.

9월 8일 밤 고문에서, 나중에 가서는 김수현이 직접 고문장치를 들고 전기고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9월 10일, 이날의 고문은 여러가지 계산 하에 뒤에서 지시하고도 자신은 잘 몰랐던 것으로

예상치 못했던 바라고 얘기하며 마치 위로자인 것처럼 행세하기도 했습니다.

전기봉고문은 이렇습니다.

대단히 빠른 진동때문에 발등에는 심한 통증이 옵니다.

상처가 생기고 깊이 파이는 것 같은 느낌조차 옵니다.

피가 흐르는 기분도 듭니다.

그래도 이 전기봉고문은 받을 만하다고 할까, 상쾌하다고나 할까, 아니 양념 고문이었다고 할까요.

원체 심한 고문을 당해서 그런지 이 날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조차 했습니다.

더구나 물고문도 이날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또 발뒤꿈치의 상처가 깊어지지 않도록 반창고를 붙여 주고 발 밑에 수건을 접어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한편 고마움조차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벼락 맞아 속이 다 타버린 고목처럼 깊이깊이 내상을 입히는 그런 전기고문이 아니고,

시커멓게 몰려오는 저 무서운 공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발등 정도 좀 찢어지고 으깨진들 그것은 별 대수로운 것은 아니니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인간적인 그런 고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문을 시작하기 전에 심리적인 압박을 받기는 했지만 '괜찮게 고문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기조차 합니다.

고문 도구, 즉 눈가리개, 물주전자 등을 책상에 나열하면서 겁을 주더군요.

마음에 부담을 주려고 그렇게 했겠지요.

 

이것을 박병선이 했는데 의도를 알겠더군요.

쫄아 들게 하려는 것이지만 이것은 실제로 고문하지 않을 조짐일 수도 있고,

하더라도 심하게 가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징조임이 읽혀졌습니다.

대충 그런 성격의 고문이기도 했구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은 결코 하닙니다.

이 고문도 역시 괴로운 것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10일 전에는 잘 몰랐었고 또 당초 식사할 수 있는 마음도 아니었기 때문에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고문자들은 9일부터 식사를 제대로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밥을 언제 주었는지, 준 적이 있었는지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겠구요, 10일, 저녁 식사를 주지 않았습니다.

 

9일 아침부터 쭉 주던 것을 안 주니 이상할 수 밖에요.

고문을 가할 경우에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날 알게 되었습니다.

가혹한 고문을 가하기 때문에 - 속이 뒤집히게 하는 것은 전기고문이 아니라 물고문인데 -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문시 거의 틀림없이 속이 뒤집혀 토할 것이고, 토하는 경우 고문자들을 난처하게 만들 것이며

고문의 진행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토할 때 기도가 막힌다든지, 그로 인한 불상사를 생각해서 안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밥을 안주면 고문이 임박한 것임은 아주 분명해졌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반복된 고문의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9월 13일 이후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데, 밥을 안 주는 것과 고문을 가하는 것을 연관시켜 매우 잘 사용했습니다.

즉 고문자들이 뭔가 불만이 있으면 밥을 안 주고, 그러면 본인은 고문이 박두했음을,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파랗게 질리곤 했습니다.

이때 고문자들은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나는 덜덜 떨면서 시키는 대로 하구요.

고문, 그것은 마음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과학적이고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정리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의 시점, 방법 등에 대해서는 정말 사장급 이상의 회의에서

여러 가지로 검토하고 결정하는 것이 틀림없을 분위기로 전달되었습니다.

이날의 주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강제해 온 것의 암기 확인, 복습, 다음에 본인이 60년대 중, 후반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어느 정도로 관여해 왔는지에 대한 확인,

그리고 군대 제대 후부터 복학하였을 때의 동료 친구관계를 집중해서 캐물었고, 끝으로 73년도인가 74년도에 크리스찬 아카데미

-강원용목사가 원장인-에서 시행한 중간 집단교육-노동조합 간부들을 중심으로 하고 몇 명의 봉급생활자들이 교육생으로 참여-에

참여했던 것과 그 교육과정에 대해 물었습니다.

복습암기에서는 욕을 먹고 나중에는 칭찬도 받았습니다.

학생운동에 대한 것은 워낙 먼 옛날인 20여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70년 9월 복학해서 72년 2월에 졸업할 때까지 교우관계에 대해서 처음에는 지나가는 것처럼 묻더니

나중에는 매우 심각하게 따지고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것은 13일의 고문으로 연장되기도 한 주제였습니다.

본인이 복학했을 때 상과대학 대학원에 제일교포 유학생으로 온 사람이 있었다면서 이 사람과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의 출신교인 경기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한 해 늦게 상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며

지금은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가 되어 있는 누구인지를 통해서 이 제일교포 유학생 간첩과 연관 지으려는 공작이었습니다.

빛바랜 사진을 고문대 위에 묶어져 있는 본인의 얼굴에 들이대면서 인정하라고 아우성 쳤습니다.

물론 이 사진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서울대 교수로 있다는 그 동창이 누구인지, 또 진짜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

만일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로 있다는 본인의 고교동기가 실제로 있고, 그 친구와 교분이 있거나 깊어서 고문자들이 평범하게 물을 때

그 이름을 얘기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13일의 고문에서도 이것은 꽤 오랫동안 집요하게 추궁받았고, 이 10일은 고문자들이 깊이 꾀를 내어 살살 접근해 왔던 것입니다.

남영동고문자들은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중간 집단 교육의 한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분개하였고,

이는 본인을 급진적인 분자로 단정하는 하나의 자극이 되었습니다.

73~74년 당시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노동조합총연맹에 교육생을 보내줄 것을 공식으로 요청하고,

이에 노총은 각 산별에 의뢰하여 노조 간부들을 중간 집단 교육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약간명의 중간 계층인 봉급생활자등도 참여했으며, 본인은 그런 자격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교육의 강사는 강원용 목사, 이문영 교수, 박재봉 교수 등 여러 분이 있었습니다.

강의도 있고 토론, 사례발표, 노래 연극 등 여러가지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앞으로 연도별 자기 일생 계획과 죽음을 맞이하게 될 시점,

그리고 무덤에 묻혔을 때 희망하는 묘비명에 대해서 써 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의 진행과 안내는 박재봉 교수가 맡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일단 작성이 완료된 후 노조간부들은 그것을 발표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당시 교육학생들은 일생계획수립에 대해 막연했으며, 더욱이 죽음과 죽을 때를 희망하는 시기와 묘비명에 대해서는

일정한 당혹과 동요, 부담감조차 없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에 대해서 박재봉 교수는 '여러분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고 다른 나라 교육프로그램에서 따와 시도해 보는 것'

이라며 나름대로 의미있음을 설득했습니다.

본인도 이에 따라 시기(연도)별 일생계획표와 세상을 떠날 연도, 묘비명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대부분의 것은 보지 않고, 또 전체의 흐름과 당시 교육에 참여했던 것이 노동조합 간부 중심이었던 점 등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 비위에 거슬리는 부분만 문제 삼아 화를 냈습니다.

물론 이 고문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지시하고 보고를 받고 자기들의 정치적 이익, 반사적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짓도 감행하는 정치군부에게는 이것도 본인을 불온한 불순분자로 몰아버리는 하나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희망하는 결혼 연도 등을 - 당시 본인은 아직 미혼이기에 당연히 결혼에 관하여 관심이 있었지요 - 빼 버리고 오직 세가지를 문제 삼았습니다.

첫째는 몇 년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동자, 농민의 정당 설립, 두 번째는 1988년에 남북민족통일,

세 번째는 2016년인가에 본인이 세상을 떠나고 희망하는 묘비명으로 '여기에 사람 사랑하던 사람이 잠들다' 라는 것을 작성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기층 민중의 정당이고, 계급정당의 구상으로 당연히 불순한 것이 아닌가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렇게 보기로 결심한 사람들 눈에는 아주 훌륭한 몇 개의 문자로 된 증거겠지요.

당시 교육은 대부분 노동조합운동과 그를 통한 사회발전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조합 간부들이 거의 전부이고, 이들이 교육 분위기를 잡아 나갔습니다.

 

조합원과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개선 뿐만 아니라,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에도 노동자들에게도 반드시 정치활동이 필요하다는 토의도 있었고, 조합 간부등의 토의, 종합결론도 있었습니다.

또 여러 교수님들 강의에서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는, 정치활동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되었습니다.

미국의 경우처럼 대통령 선거시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천명하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방법,

영국의 경우처럼 집권하는 방법 등 여러가지 소개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신 치하에서 유정회에 직능대표로 노동조합 간부를 보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가 비판적이었으며,

노동조합의 정치참여 금지규정, 법률에 대해서는 특히 격한 이의 제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조합 간부들이 노동자들의 정당 설립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같은 생각을 표시했습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가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되었습니다.

본인은 대학 출신, 그 중에서도 좋은 학벌 등으로 그 교육에서는 뭔가 미안한, 부채의식도 없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동일화가 되지 못하는 것, 즉 소외감도 있었구요.

그런 분위기에서 노동자, 농민의 정당 설립이라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조합간부 대다수 사람들의 일생계획표에도 등장했고 발표낭독도 되었다고 기억합니다.

이것을 앞뒤 다 자르고 이 몇 개의 문자를 들어 늘 그렇듯이 문제를 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남북통일이 왜 하필 88년도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내가 신통력이 있어 시점을 맞춘 것처럼 분개하고 괘씸해하며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73, 74년 당시 88년이 정권 임기와 관련 있을 것이라든지

하계 올림픽 연도가 될 것임을 이미 예측하고 고약한 장애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불순한 의도를 엿보게 할 수 있는 자의 음모라는 말인지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88년도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며 민족통일은 모든 민족의 염원으로 어울려 짝짓기 참 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1988년의 민족통일, 그것을 70년대 초에 기대하고 희망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고문자들도 추궁했지만 본인의 면전에서는 논리적으로는 심하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너무나 뻔한 일이어서 그랬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세상을 떠나는 시기와 묘비명 이름마저 유서에 써놓고 민주화 투쟁을 하는 악질 분자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희망한 것은 70살이 되어서 삶을 마치는 것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이는 장수고 어느 면에서는 천수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가장 중요한 양식인 인간에 대한 사랑, 그것을 실천하다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 무슨 비장한 결의인 것처럼,

음산하고도 어두운 음모인 것처럼 매도 당했습니다.

 

고문자들은 이를 무슨 대단한 일처럼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소위 남영동은 본인에 대한 불순한 배경의 중요한 기둥 중 하나로 의견서를 택한 것입니다.

최민화씨의 법정 증언에 의하면 본인은 이미 유서까지 써놓고 운동을 하는 것으로 고문자들은 말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포복졸도할 희극이 그렇게 무거운 부담으로 왔습니다.

이것이 범죄적 고문을 감행한 남영동 그곳에서 본인이 처했던 멍에였습니다.

이미 기정사실이 된 불순한 올가미에 온갖 것을 들어다 꿰어 맞추는, 남영동 제조공장이었지요.

6월 10일 고문은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고, 끝난 뒤에는 김수현으로부터 위로도 받았습니다.

고통이 심하고 고생이 되는 줄 잘 안다면서 고문대에서 내려오도록 부하 고문자들을 채근했습니다.

눈물이 핑 돌고 콧등이 시큰해졌습니다.

조금만 더 역성을 들어 주었으면 그 김수현 가슴에 기대어 엉엉 울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버렸을 것입니다.

 

나치 수용소에 감금되어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종전과 더불어 풀려나온 어느 유태인 정신과 의사의 피맺힌 기록이 생각납니다.

원수, 악마였던 S.S고문 친위대가 나중에는 병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경매의 존엄한 자로 군림하게 되는 절망적인 인간의 고백을 읽고 몸서리를 쳤었습니다.

 

인격의 와해, 인간의 허약함을 송두리째 폭로하는 것으로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분노하고 저주해야할 그 고문자들을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첫 날 혹은 둘째 날부터는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이 박탈되었던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열쇠를 갖고 있는 그 고문자들에게 모든 힘을 다하여 아양을 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고문자들의 현장 지휘자인 김수현에게 10일날 위로를 받은 것, 그것은 당시 본인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따뜻한 라면을 대접 받고, 밤 12시가 되어 잠도 재워 주고, 이제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문성근씨의 100만송이  국민의 명령 프로젝트 출범을 접하며

우선 축하합니다.

배우 문성근씨가 드디어 ‘100만송이 국민의 명령 프로젝트’, 즉 제3지대 야권단일정당운동을 가동했습니다.

스스로 야권 단일정당이라는 시대적 명령을 내리는 첫 번째 국민을 자처한 문성근 씨는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100만 민란의 주동자요 대장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문 대장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할 때 염화미소요, 이심전심이라 했습니다.

정말 마음이 찡해서 이렇게 김근태의 미소를 보냅니다.

 

문 대장의 제안서를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저의 첫 느낌은 “아.......!!”였습니다.

야권단일정당이라는 시대적 대의를 느끼거나 확신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대의를 추진할 방법을 이토록 구체적이고 민주적으로 제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민주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우리 국민에 대한 강고한 믿음 위에 지어진 이 멋진 대중운동에 거듭 찬사를 보냅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힘들고 험난할지도 모를 길을 문 대장이 먼저 나섰습니다.

솔직히 범야권단일정당이 정당의 문제이고 그래서 정치의 문제임에도 우리 정치권에서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저 김근태 약속합니다.

범야권단일정당이라는 큰 흐름에 조응할 수 있는 정치의 길을 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 둘 다 성공해 대한민국을 전혀 새롭게 창조할 수 있도록 분발하겠습니다.

 

아무리 미소일지라도 길면 민폐이므로 이만 짧게 미소 짓겠습니다.

사이버 촛불인 마우스 클릭으로 이루어지는 야권단일정당을 위한 100만 민란에서

문대장과 국민여러분이 반드시 승리하리라 믿습니다.

 

이 글을 읽는 국민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야권단일정당운동 사이버 촛불 들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참으로 좋은 배우를 가진 것 같습니다.

 

 2010년 8월 28일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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