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2 08:00 김삼웅

 


지금까지 한국에서 실시해온 각종 선거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계층은 기권을 많이 하고, 부자들은 투표에 적극 참여하는 편이다. 그리고 가난한 계층에서는 부자 정당(보수정당)을 더 선호한다는 최근의 여론조사도 나타났다. 그래서 부자들의 대변자가 다수 당선되는 역설이 진행된다. 앞의 대학생들처럼 ‘민주화의 화신’과 ‘고문의 화신’을 환치시키는 경우가 낯설지 않았다. 이를 소급하면 친일파가 ‘건국의 주역’이 되고, 현재화하면 독재세력이 민주인사들을 ‘종북주의자’로 내모는 꼴이다.

김근태가 그토록 혹독한 고문과 끝없는 감시, 정보기관의 용공조작과 족벌신문들의 흠집내기에도 정신적으로 망가지지 않고 버틴 데에는 역사에 대한 낙관때문이었다. 앞의 ‘남은 자’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는 민중(국민)을 믿었고, 역사의 진보를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세월 동안 그가 겪은 고통, 특히 육신의 고통은 필설로 다하기 어려웠다.

최후진술을 통해 밝힌 고문의 한 대목이다.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절반쯤 됩니다. 고문할 때는 밥을 주지 않는데, 고문을 하지 않을 때도 밥을 주지 않아 심리적인 압박과 고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델시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셔져서 병사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해라’ 이런 참혹한 얘기를 하며 동물적 능욕을 가했습니다.

제 생식기를 가르키며 ‘이것도 잎이라고 달고다녀? 민주화 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하면서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머리와 가슴ㆍ사타구니에 전기고문이 잘되게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했습니다. 처음에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며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마음 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했습니다.
(주석 3)

여기서 나오는 ‘이재문’은 남민전사건에 끌려가 고문 당해 죽은 사람을 말한다. 숱한 사람이 저들의 고문으로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애국자들이 겪었던 고문과 비슷했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중용하면서 일제의 고문 기술자들이 살아남고, 박정희ㆍ전두환 시대에는 그 후예들이 ‘고문기술’을 전수받았다. 다음은 1912년 ‘105인사건’ 당시 심한 고문을 당했던 선우훈의 기록이다.

네 놈이 밤낮 30여일간 혹형을 계속했다. 묻는 말을 부인할 적마다 네 놈이 달려들어 때리고 찼다. 두 엄지손가락을 포승으로 결박하고 한편 팔은 앞으로 돌려 어깨위로 올리고 한편 팔은 뒷등으로 돌려 두 손이 서로 닿을 만큼 하고 매어다니 몸이 오척 가량 공중에 달렸다. 두 놈이 두 자 가량 되는 대막대기 두 개를 마주잡고 옆구리에서 허리까지 쭉쭉 훑드니 몸이 두 동강이 되는 듯 하체의 힘은 쭉 빠지고 전신의 기력이 없어진다. 다른 놈이 채찍으로 머리부터 다리까지 숨쉴 틈 없이 난타하니 땀은 낙숫물 같이 쏟아지고 호흡은 하늘에 닿고 가슴에는 불이 붙고 코에서는 불길이 훅훅 쏱아진다.

금시 목숨이 끊어질 듯 사지가 떨리고 눈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가슴이 터질 듯하다. 이러기를 약 20분 만에 전신은 동태같이 얼고 감각도 없어졌다. 눈은 곧아지고 혀를 빼어 물고 숨소리가 사라지자 이 때는 맥박도 끊어져 죽는 것 같이 되는 때라 한다.
(주석 4)

1988년 케리 케네디 대표로부터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여받은 인재근씨와 자녀들. (출처 - 김근태 블로그) ⓒgt

일제가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다가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고, 일본군출신 박정희 정권과 그의 충복 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체포하여 잔인한 고문을 하였다. 그 중에서 김근태는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하수인은 ‘고문 기술자’로 불린 이근안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한국의 대학생 중에는 김근태와 이근안을 분별하지 못하고, 6월항쟁과 김대중ㆍ노무현 민주정부 10년을 거친 뒤에 나타난 이명박 정권에서는 철거민들이 경찰의 공격으로 불에 타서 숨지고, 대통령의 측근들이 국무총리실에 아지트를 설치, 민간인을 사찰하는 야만의 세상으로 되돌아 갔다.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에서 사열을 받고, 하나회출신이 국회의장이 된다. 독재자의 딸은 집권당의 유력한 대통령후보이고, 5공의 대표적 조작시국사건인 ‘학림사건’의 판사는 집권당 대표, 배석판사는 헌법재판소 소장이 되었다. 역사는 가끔 반복되기도 한다지만, 이처럼 잔혹사가 단기간에 되풀이되기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김근태는 5공의 폭압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조직하여 전두환 세력과 전면에서 싸웠다. 1983년의 민청련은 1919년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의 정신을 닮았을 것이었다. 일제가 그랬듯이, 5공 정권의 보복은 혹독했다. 김근태는 치안본부 대공분실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살인적 고문으로 ‘지옥’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래도 꺾이지 않고 옥살이 끝에 출감해서는 다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하여 청년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김근태는 감옥에서 부인 인재근과 함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갇힌 몸이라 수상은 뒷날로 미뤄졌다. 그는 노태우 정권에서 또 체포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뤄야했다. 그 시대에도 동기생 중에는 고시를 하여 법관이 되거나 5.6공에 참여하고, 선량이 되기도 하였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그의 지명도를 사서 김영삼이 종로 출마를 제의했으나 “지금은 군부독재와 싸우는 재야의 결집된 힘을 약화시키고 개인적 지위상승으로 그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때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5선, 6선은 따놓은 당상이 되었을 것이고, 정계의 거물로 성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설 때와 머무를 때를 알았고, 어느 때에 어느 쪽에 서는 것이 정도인 지를 알았다. 백범 김구의 “정도냐 사도냐”를 늘 가슴에 새겨왔다.

그는 뒤늦게 정권교체와 정치혁명을 꿈꾸며 정치에 참여했다.
1991년 출감했을 때 김대중이 신민당의 부총재를 제의하여, 44세에 정계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원외의 부총재, 그것도 임명직 부총재의 지위는 별로 힘을 쓰기가 어려웠고, 성격상 ‘정치적’이지도 못하였다. 한국의 정계에는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보다는 정략에 능숙한 정상배들이 들끓었고, 정도보다는 사도가 정치의 능력으로 평가되었다. 더욱이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때에는 5공세력과 일부 야당이 야합한, 3당 야합 세력이 판치던 시절이었다.


김근태는 도전 끝에 제15대 국회의원이 되고, 이후 집권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기도 했으며, 참여정부에서는 보건사회부 장관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그가 별세했을 때 어느 신문의 사설처럼 “정치인으로서 김근태는 많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권력 정치나 심지어 너무 진지해서 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대신에 그는 정치개혁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했다. 정치권에서 그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주석 5) 김근태는 ‘정치공학’에는 서툴렀으나 진정성 있는 정치인의 길을 걸었던 정치인이다.

김근태는 정치에 입문하고서도 도덕성과 순결성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영혼’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마키아벨리즘이 판치는 한국의 정치판에서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찍이 독립운동가로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도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좌절을 겪어야 했던 그런 길이었다. 한마디로 김근태는 정치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순결한 지성인이었다.


주석
3> 김근태,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1심 최후진술.
4> 김삼웅,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65쪽, 사람과 사람, 1998.
5> <한겨레> 사설, 2011년 12월 31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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