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

 

원심법원이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라는 책 소유를 유죄로 인정한 것은

현 개명한 20세기 후반의 건전한 사회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며, 또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나는 사실 이처럼 점잖게 말하고 싶지 않다.

상스럽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 달라.

이렇게까지 되고 보면 발길로 걷어차 버리고, 서로 침을 퉤퉤 뱉고 돌아서는 편이 피차간에 차라리 솔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슬프고 기가 막히고 놀라서 어질어질 하기도 하지만, 정치군부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우리 사회를 정말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군부의 부릅뜬 눈아래 오금을 펴지 못하는 겁쟁이,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판사, 검사의 모습이 정치군부보다도 더

인류사회와 민족사회의 발전속도에 저만치 뒤떨어져 있는 집단이 어디에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겠지.


김영학 씨의 증언과 감정서를 유죄의 증거로 한 원심법원의 판결은 수치스런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들으면서, 들여다보면서 절간에 간 색시처럼 얌전하게 공판에 임해 왔던 나 자신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도대체 정치적 사건이란 게 그런 재판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농담이고 장난임을 이 이상 더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없으리라.

도대체 '내외 문제연구소'라는데가 아리송할 뿐만 아니라 미안한 얘기지만, 경제학에 대한 소양이 나보다 없음은 물론,

돕의 주저인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 "자본주의 발전연구"의 책 이름조차 잘 모르고, 그 책이 어떻게 다른지는 물론 모르고,

도무지 헷갈리는 이런 사람의 증언과 감정서를 증거로 하여 유죄로 인정하는 이 철면피의 뻔뻔스러움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겨져 기억되야할 것이다.


이것은 김영학 씨 개인에게도 괴로운 일이었을 게며 모독이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3~4일 전에 검찰로부터 감정 부탁을 받은 후

책을 받고 책을 읽고 감정서를 썼다는 이런 주장을 믿어주어야 하는가.

뭐 이것 뿐만은 아니지만, 거짓말과 사기는 쉬지 않고 줄을 지어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단언한다. 이것은 한낱 사기일 뿐이라고.

검찰청에 뻔질나게 불려 다닐 때 나는 담당검사에게 공소제기된 사실에 대해 모두 말했다고 밝혔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공판장에서 한 말 이상으로 자세히 설명했다.

 

돕의 주저에 대해서, 그런 책들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에 대해서, 또한 문제된 이 소책자가

'자본주의 발전연구'의 한 장을 조금 손대어서 정리하여 강연한 것이라는 것을 검사에게 말했다.

김영학씨는 아마도 그것을 검사한테서 듣고 앵무새처럼 외우려했던 것 같은데, 아주 서툴렀던 것이다.

반대심문의 기회가 왔을 때 분노가 아닌 슬픔이 밀려와 나는 김영학씨에 대한 심문을 포기했다.

그것이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라는 돕의 주저가 근대 경제학의 추세라는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출간된 사실을 인정하면서, 유죄를 인정한 것은 법리를 오해하고 위법적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것은 나의 법적 이익을 깡그리 박탈하는 것으로 자빠진 놈 한 번 더 밟아주자는 것인가.

이것은 법 앞의 평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국민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형해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또한 지성인의 한사람으로서, 경제학도로서 학문의 자유 그리하여 연구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참으려 해도 속이 느글느글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


그래서 한마디 하겠다.

하려면 이정도로 화끈하게 오로지임을 보여주는게 마땅할 것이다.

출세를 하라. 출세를 하라. 그리하여 출세를 하라.

 

 

그래도 못다한 말 한가지

 

행방불명된 나의 탄원서에 대하여.


다 아는 바와 같이 1심 공판정에서 탄원서 집필허가 문제에 대해 나는 네번 문제를 제기하였고, 마침내 재판거부 선언에까지 이르렀었다.

집필신청을 한 지 만 40일 후인 2월 5일 오후 3시 반 경에 허가통지를 받았다.


탄원서 집필문제를 가지고 이처럼 격렬하게 싸운 이유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나는 '탄원서'라는 이름으로 저 남영동에서 받았던 고문을 낱낱이 밝히고자 했던 것이며,

정치군부는 그것을 체면불구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막아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공판 사이사이에 나는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탄원서를 썼다.

보통 구치소에서 두 부 작성하는 다른 사람의 경우와 달리, 오직 한 부만을 작성하도록 미리 페이지가 매겨진 조사용지를 공급받아 썼다.

나는 그 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소심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국 이것이 행방불명된 것이다.


이제 탄원서 내용을 간략히 얘기하자.
고문준비, 계획은 어떻게 되었으며, 누가, 왜 했고, 어떻게 했으며, 그 때 고문자가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에 대해 나는 어떻게 견디고 또 굴복했는지, 그 고문대 위에서 또 아래에서 내 심정은 어떠했는지를 기록했다.

여기서 우선 고문자들의 이름을 밝혀 두겠다.

이 탄원서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는 기록이다.


총경 윤재호(남부경찰서장),

경정 김수현(전무),

경정 백남은(전무),

경감 장의사 둘째주인(고문 전문기술자),

경위 김영두,

경장 정현규,

경장 박병선,

경장(경북사람) 등


검찰은 피로 적셔 있는 남영동 기록을 증거서류로 제출했다.

공판정에서 고문사실과 그에 의해 강제된 것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 고발하였는데도 검찰은 이를 재판부에 제출한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했었는데 서성 판사는 그것이 피고인에게 불리할 수도 있고 유리할 수도 있다고 했다.

결국 이에 보기좋게 속아넘어갔지만, 나는 이 탄원서에서 남영동 증거서류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

고문은 물론 그 때 고문자들이 요구한 것을 자세히 기록하며 반박했다.

그런데 이를 절취하여 숨겨버린 것이다.


영화 '25시'에 이런 장면이 있다.

강제수용소 철조망 안에 갇혀 있는 한 지식인이

자신의 신념을 적은 글(아마도 성명서-적절한 이름은 아니지만)을 손에 들고 보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긴장이 고조되다가 보초가 들고 있는 총에서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총알이 튀어 나왔고 그 지식인은 거기서 퍽 꺾여졌다.

종이는 이리저리 바람에 날리면서 땅에 떨어지고 쓰러진 몸뚱아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적셔지고....

그 종이는 어쩐지 그 사람의 입에 물려졌던 것 같은 착각이 자꾸 들었다.

지식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그렇다. 나는 오른쪽 가슴을 관통당한 채 쓰러져 피 흘리며, 속으로 울고 웃으면서 쓴 것이다.

그런 탄원서가 행방불명된 것이다.

검찰이나 법원 둘 중에서 어디선가 꽉 틀어쥐고 내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재판이 끝난 직후 서성 판사에게 열람등사를 요청하였더니 "이미 발송했다"고 하며 역시 훌륭하게 따돌렸다.

검찰에 가서 확인하니 "서성 판사가 틀림없이 갖고 있다"고 하고....,

시작부터 끝까지 코미디이고, 거짓말이고......


지금 이 탄원서는 어디쯤에서 강철상자 쯤에 들어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나, 아 그러나 이것은 언제 끝날 것인가.


맨 끝으로 고문을 당하며 속으로 통곡하고 지내온 지난 겨울,

이 가막소에서 나는 애정이 넘쳐 나는 수많은 학생, 그리고 버림받은 재소자들의 격려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그때 두 겹의 비닐창문을 때리는 북풍에 견디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되뇌고 되뇌었다.

 

내 귀여운 아이들아
느이들 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애비가 어디 가서 오래 못 와도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져선 안된다
외로울 때는 엄마랑 들에도 나가보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봐야지
바람이 차거들랑 옷깃 잘 여며
감기들지 않도록 조심도 하고...

 

 

11. 슈퍼맨이 되지 못한 죄

 

 

나 중심으로 얘기하면 이렇다.

혼란과 당혹 속에 검찰에 넘겨진 세 사람은 각자 자신들의 절박함의 우선 순위에 따라 움직여 나를 검찰에 내주고,

그리하여 법관의 손에 넘겨주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아무런 다른 선택이 없던 것이다.

오직 마련된 길을 따라 등 떠다밀려갈 수밖에 없었으며, 누구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검찰에 갇힌 사람들이 부닥치는 문제점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우선 고문기관인 남영동 상급기관으로서 갖는 위엄과 그로 말미암은 위협감, 답답함이 가슴을 조이게 만들고

이런 사건이 모두 '괘씸죄'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잘 대처하고 따지게 되면 오히려 손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 되어

잘 보이려고 아양을 떨고 싶어 몸이 비비꼬일 지경이다.

나보고 '또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고, 또 그 얘기를 수긍할 수 있지만,

'또라이' 같은 얘기, 그러나 그때 내 심정이 그토록 어지러웠던 것을 말해 보겠다


나를 이대로 밀고 나가 결국은 죽이려고 하는가.

합법을 가장한 이러저러한 절차를 밟아서, 그리고는 분업화된 과정으로

아무도 큰 심리적 부담 내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교살하려고 하는가.

 

저 고문 남영동은 확실히 그런 방향이었고, 이 검찰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도대체 난데없이 KBS 방영이니 연합통신의 기승은 뭐란 말인가.

 

헷갈리고 또 헷갈리고, 돈다.

세상이 돌고, 내가 돌고.

 

나는 검찰의 손에 무릎꿇어 구애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고 어지러웠다.

제법 딴에는 점잖은 체면이어서 호모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해서는 안된다고 굳게굳게 결심했기 때문에 거기까지 나가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차단된 상태에서 검찰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병적인 애정구걸 같은 심리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검찰에서 '피고인은 당시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느냐' 고 준엄한 얼굴로, 노기띤 음성으로 법정에서 꾸짖는다.

담당검사는 이렇게 하여 비열한 거짓말쟁이로 피고인을 입증해 내고, 그렇게 해서 증거가 발딱 일어나고,

판사는 유죄의 심증을 거기서 형성하고, 우습고 웃기고 웃겨서 웃기는 장난이 된다.

이게 모두 두려움에 얼어버린 채 남영동에서 검찰로 왔을 때, 끊임없이 교양있는 검사를 짝사랑하고, 또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혹시 버티다가 재차 남영동으로 끌려가지 않을까 싶어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하며 저려온다.

한편 그래도 끔찍한 고문을 안해서 고맙고 감사하고, 때로는 슬쩍 가족 얼굴을 보게 해주고

따스한 입김이 볼에 닿게 해줄 때 우리들의 검사님은 너그러움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어찌 이 하늘같은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배덕자, 패륜아의 짓이고, 인간이면 검사님의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하고, 요구와 기대에 알아서 부응해야하는 것이다.


"오호 통재로다. 이것이 올가미구나."


깨닫게 되는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인 것이다.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린 뒤고. 우리들의 눈이 크게 열려 올바로 보게될 때는.

그러나 언젠가 온다.

 

검찰은 남영동 서류를 굳게 믿는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공격적 충동을 기르고 길러 내서 피묻은 남영동 서류조차 별 양심의 가책없이 믿도록 감시는 인도된다.

조종된다.

 

공소유지 의무와 더불어 정치적 사건에서의 기여도에 따라서 정치군부는 평가하여 훈장을 주고 처벌을 한다.

인사정책을 통해서, 검사는 이렇게 해서 검사가 되는 것이다.

 

나도 검찰에서 얘기할 것 다 얘기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더 버틸 마음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다만 글로, 조서로 남기지 않았을 뿐이다.


내겐 기적같은 만남이었다.

은혜처럼, 성령처럼, 비둘기같은 성령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검찰청 청사 그 계단에서 내 처 인재근을 만난 것은.

 

그리하여 김상철 변호인을 만난 것은 나에겐 축복이었다. 구원이었다.

그 만남이 없었다면 나도 틀림없이 남영동에서 두드려서 훌륭하게 만들어 낸 모든 것을 검찰 신문조서에,

자술서에 올리고 손도장을 꽝꽝 찍어댔을 것이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만남이 발생하여 거기에 기대어 나는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검사의 도발적 언사 한마디가 계기가 되어 화를 낼수있는 기력이 되돌아와준 것이다.


법정에서는 명백히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그렇게 이용될 가능성이 충분히 높다고 예견하면서도 진술한 것이 많이 있다.

검찰에서 이미 모두 말했던 것들이다.

그것을 잘라서 얘기하거나 수정 변경하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째째해지지 않기로 결심했고, 검찰한테서 비웃음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건 자존심이었을게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법관을, 법원을 믿으려 했고 검찰의 기본적 양심을 믿으려고 했던 시기였다.

어떤 신뢰를 저버리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므로 재판에, 그 결과에 아주 자신하였던 것이다.


아, 그러나 재판이 무엇인지 나는 몰랐던 것이다.

아니 재판은 한낱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특히 정치적 사건에서는 그렇다는 소문을,

나의 사전 인식은 아마도 지나친 단순화이고 편견이라고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검사 또는 판사 그 개인들과 은근히 통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모종의 분위기, 어떤 관계에 나는 취해 있었다.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분위기,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개인적 관계를 확대해서 재판을 보려고 했다.


나는 반쯤 눈이 멀었던 것이다.

참담한 결과가 올 수밖에 없었다.

 

논리학 교과서 첫 부분 어딘가에 나오는 확대적용의 오류를 그래도 뒤집어써 버린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그 모순은 작고 미미하지만, 좋은 나라인 민주화운동세력과 나쁜 나라인 정치군부 사이 속에서

그것은 아주 심각하고 격렬한 불신과 갈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라는 것을 말끔히 잊어버렸었다.

 

아니다. 그 간극을 사실의 증명격과 지식인으로서 판, 검사들의 양식이 메꾸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집단)'라는 책의 어떤 페이지들이 떠오른다.


판사, 검사 중에 개인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군부 체제 아래에서 이러저러한 재판을 하는 판사들, 검사들은

주관적 선의와 상관없이 군사독재의 옹호자이며 방위자로서 역할을 틀림없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중에게는 마땅히 존경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본래 알고 있었던 그대로가 맞는 것이었다.

사물과 사건 속에 휘말려 어지러웠고 직접성에 노출되어 피곤하였으며, 심약해진 마음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눈을 잃었던 것이다.

단어가 너무 격렬하고 선동적이어서 쓰고 싶지 않지만, 군사독재 지속에 단단히 한 역할하면서도 태연스러운 위선자들은 틀림없이 있다.

이 사건 재판에 관계했던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는지 자꾸만 따져보게 된다.

그건 그렇고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남영동에서 고문에 끝까지 버텨 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5층 15호실, 그 방안에는 죽음의 공포와 그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고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굴복하고 말았지만, 다시 그런 경우에 부딪쳐도 역시 무릎꿇겠지만, 누구도 나처럼 당하면 결국 꺾일 것이라고 단정하지만,

만일 내가 끝까지 버텼더라면 나는 거기서 살해되었을까, 아니면 그것으로써 사건은 끝나 버렸을까.


"남영동에서 누가 당신더러 굴복하고 인정하라고 했는가.

더구나 그럴듯하게 꿰어 맞추도록 협조도 하고, 증거가 될 것이라고는 말뿐임을 피차 진작 눈치챈 것이니,

그것을 손바닥 뒤집듯 홰까닥 엎지 못하도록 요리조리 꿰어 맞추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한 예측 가능한데도 그것에 코 꿰어 끌려간 당신 자신이 잘못한 것이다.

이제와서 고문을 당해서 그랬느니, 어쨌느니 해봐야 다 소용없는 일이다.

딱 잘라서 말하면 그건 당신 사정이고, 그러니 찧고 까불며 나를 원망하지 마라.

그렇게 되면 피차 지저분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나는 깨달음에 이르른 것이다.

그렇다. 모두 내 탓이로소이다.

 

능히 슈퍼맨이 되지 못한 나한테 죄가 있는 것이지, 강제로 정치군부가 가두고 때리고 짓밟고 한 그것은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슈퍼맨이 되지 못한 내 죄가 톡 튀어나와 누구 눈에도 아주 잘 보이도록, 극적 대비가 되도록 하기위해서 고문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어쩐지 시력이 나쁜 판, 검사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흔들리는 팔로 꽝꽝 유죄를 내리 찍을 수 있도록 고문을 활용한 것뿐이니까.

내가 오해를 했었던 것이다. 오해, 오해, 해오, 해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렇다면 결국 힘에 진 것이니까.


모든 깨달음은 위대할진저!

 

 

 

“2차 민주대연합 이뤄야 정권교체 보인다”
[한겨레가 만난 사람] 민주당 김근태 진보개혁모임 대표
한겨레 성한용 기자기자블로그 이정우 기자기자블로그
» 김근태 진보개혁모임 공동대표는 인터뷰 내내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범야권의 단일정당 통합 가능성에 대해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의 고비마다 기적은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2008년 6월 촛불 국면에서 아고라 누리꾼들이 토론 내용을 책으로 엮은 일이 있다. 책 서문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한국 민주주의에 절망하던 날, 아니 김근태가 신지호에게 패하던 날, 세상인지 역사인지로부터 받은 타격을 견딜 수 없었다.”


‘김근태’는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다. 그가 뉴라이트 계열 자유주의연대 대표를 지낸 신지호 의원에게 18대 총선에서 패배한 것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정치적 패퇴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런 그가 3년의 침묵을 깨고 다시 정치활동에 나섰다. 지난 3월8일 민주당 진보개혁모임을 결성하고 공동대표를 맡은 것이다. 그동안 이명박 정권은 반환점을 훌쩍 넘어섰다. ‘업적’과 ‘돈’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을 그렇게도 열렬히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이제 태도를 바꾸고 있다.


김근태 공동대표를 만나 진보와 개혁, 복지, 야권 통합과 연합, 내년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 등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김근태 대표는 정치인답지 않게 지나치게 사변적 언어를 구사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얘기는 경청할 가치가 있다. 인터뷰는 지난 5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한반도 재단’ 사무실에서 3시간 동안 했다.


인터뷰/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그동안 정치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하면서 지냈나?

“운동을 많이 했다.”


-민주화운동 말인가?

“(웃음) 아니고. 일주일에 사나흘은 동네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고, 나머지 사나흘은 집 근처 초안산에 오르내렸다.”


-공부도 꽤 했을 것 같은데?

“2008년 미국에서 출발한 전세계적 금융위기로 우리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어떻게 봐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공부를 좀 했다.”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왜 낙선했다고 생각하나?

“직접적으로는 뉴타운 돌풍 때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에 대해 보상을 더이상 하지 않겠다는 국민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둘째, 민주화 세력이 아파트 분양 원가나 국민연금 등 민생문제에서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데 대해 국민들이 책임을 물은 것이다. 아무튼 낙선은 국민의 명령이었다. 그래서 자숙하고 자성했다.”

 

 

브라질 룰라처럼 정파 독자성 유지하며 통합
야권정당·시민단체·노동자 등 원탁회의 필요
연합공천 난망…지분협상 통한 통합이 살길


-국민들이 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선택했을까?

“역시 민생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했고, 일자리 부족은 여전했다. 중산층과 서민의 박탈감이 커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미국 중심의 시장만능주의가 밀고 들어왔지만, 워싱턴 컨센서스가 뭔지도 제대로 파악을 못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했는데, 그런 표현은 항복 선언이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집결시키지도 못했다. 아이엠에프의 강제와 재벌 연구소의 대안적 방향이나 참고하면서 난파했다. 반면에 특권세력은 이런 상황을 활용해 동맹을 재편하는 데 성공했다. 뉴라이트의 발호가 그 증거였다. 슬로건과 담론 투쟁에서도 우리는 패배했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구호가 국민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동안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는 이명박 정권이 패배했다. 이유가 뭘까?

“지표경제는 괜찮다고 하지만, 체감경기는 너무나 심각하다. 못 견디겠다고 반발하면 정권은 탄압을 했다. 그 과정에서 공권력을 사유화했다. 민주주의가 이렇게 후퇴할 것으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정권의 오만과 독선에 대한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이 내려진 것이다.”


-지역구에서 유권자들과 늘 접촉하는데 내년에 정권 탈환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교체를 못 한다면 가히 재난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87년 6월항쟁 이후 양김의 분열로, 재야의 분열로 노태우 정권이 탄생하고 국민들은 낙담했다.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그에 버금가는 상황이 올 것으로 본다.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범야권 세력은 역사적인 규탄을 받을 것이다.”


-범야권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절박한 민생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방향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당장 해결할 수 없다면 전망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통합과 연합으로 한나라당과 일대일 구도를 만들면 수도권과 부산·경남에서 한나라당을 패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담론과 슬로건 투쟁에서도 승리해야 한다.”


-담론과 슬로건이라면?

“경제의 인간화라고 할까,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정책을 도입하자는 것인데, 뭐라고 할지는 좀더 고민해야 한다.”


-진보개혁모임 결성을 주도하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모임을 왜 만들었나?

“한마디로 정권교체 위해 의미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활동하고 있나?

“매주 목요일 점심에 모여서 정세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다. 또 한 달에 한 번은 포럼을 하기로 했다. 거대 담론도 필요하겠지만, 구체적 사안에 집중하기로 했다. 5월에는 최저임금을 다루기로 했다. 주택담보 부채 문제는 6월에 다루기로 했다.”


-모임 이름을 왜 진보개혁으로 했나?

“우리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작은 정당이지만 정당 활동을 하고 있다. 민주당은 상대적으로 덜 진보적이다. 일종의 개혁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개혁세력과 진보세력의 대통합에 다리가 됐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진보개혁모임이라고 했다.”


-모임에는 진보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있다. 그러나 민주·진보세력이 대통합을 이뤄야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는 분들이다.”


-민주와 진보는 좀 다른 것 아닌가?

“어려운 질문이다. 진보의 문제가 발생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세계에서 미국·영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가 관철되고 있다. 1%의 사람들이 세계 재산의 43%를 갖고 있다. 10%가 83%를 갖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에서 이렇게 불평등하게 사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절박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진보적 정책과 대안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진보가 재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다고 보나?

“과거 반독재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학생, 노동자, 농민들이 진보적 목소리를 많이 냈다. 의미는 있었지만 바로 실현할 수는 없었다. 나는 민주대연합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고 그다음에 진보로 가자고 했다. 잘 알다시피 정권교체는 했지만 그다음으로 가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진보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됐다.”


-진보가 중요하면 진보정당을 강화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진보세력 일부에서는 개혁주의 세력을 빼고 가자는 주장이 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1987년 1차 민주대연합에 이어, 최근 상황을 2차 민주대연합으로 규정하고 싶다. 진보와 개혁주의 세력이 타협해서 함께 손잡고 가야 정권교체를 이루고 다수당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복지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자. 복지는 시장경제 시스템의 보완적 의미가 강한데, 지금 시대정신이 복지인가?

“시장경제는 불공정성과 정보의 비대칭 때문에 강자와 약자가 경쟁 전부터 구별된다. 어떤 경제제도를 택하면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보장하는 적극적 의미의 복지를 말하는 것인가?

“그건 복지가 아니라 민주적 시장경제라고 나는 주장한다.”


-진보개혁모임 창립선언문에는 그런 내용은 없다.

“공부를 더 해야 하는 부분이다. 아직 판을 제대로 못 벌였다. 지금도 시장경제가 마치 공정하고 자동으로 조절하는 기능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에 반대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시장에 대해 말하자면, 유연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갖추고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펴는 ‘덴마크 모델’을 검토해볼 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보편적 복지가 가능한 분야는 어디일까?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하나는 기초노령연금인데, 지금의 8만7000원에서 15만원 정도로 인상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한나라당의 대선공약이기도 했던 ‘반값 등록금’이다. 재원 확보를 둘러싸고 구체적인 논쟁을 벌였으면 좋겠다.”


-보편적 복지를 위한 증세에 찬성하는지?

“증세는 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순서나 단계를 고민해야 한다. 토론과 타협의 과정 없이 증세는 불가능하다.”


-민주당과 통합 문제로 넘어가자. 손학규 대표가 잘하고 있다고 보나?

“지금은 누가 대표를 해도 거기서 거기일 것 같다. 지금 민주당 지지율은 반사이득이다. 민주당은 아직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분당을에 출마했는데?

“이겼으면 좋겠다. 그래야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들이 지금처럼 이명박 대통령의 거수기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범야권 통합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나?

“브라질의 룰라가 12개 정파를 등록시켜 각 정파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통합을 이뤄냈다. 그리고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는 것이다. 민주당, 진보정당, 국민참여당 등 범야권 정당과 시민사회, 대중단체 조직, 노동자와 농민 조직이 참여하는 원탁 테이블을 구성하는 게 필요하다. 4·27 재보선이 끝나면 본격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통합이 안 되면 각 정당이 선거연대를 해야 하나?

“후보조정, 연합공천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지분협상을 통해 통합을 반드시 해야 한다. 통합만이 살길이다.”

-통합의 시한은?

“12월 중순까지는 통합전당대회를 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 방향이나 슬로건, 담론을 정하고, 200개가 넘는 지역구 후보 공천과 비례대표 공천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국민들은 국회의원 선거를 내년 4월로 생각한다. 시간표에 어긋남이 있다. 걱정이다.”

 

 

“박근혜 전대표가 대통령 안됐으면 좋겠다”
정치인으론 괜찮지만 국가지도자론 부적격
‘경제의 인간화’에 맞춰 민생 구체대안 찾을것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를 어떻게 생각하나? 진정성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꽤 평가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가 (대통령이) 안 됐으면 좋겠다. 지난 대선 때 ‘줄푸세’(줄이고, 풀고, 세우고)는 대표적인 시장만능주의 공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복지를 얘기한다. 일관성이 없고 설명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체계적인 철학과 비전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사학법 개정,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그가 반대할 때 보니까 정서와 마인드가 7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더라. 정치인으로서는 괜찮은 사람일 수 있지만, 국가 지도자로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김근태 공동대표는 인터넷 홈페이지 ‘김근태가 살아온 길’에 아래와 같은 글을 띄워 놓았다. ‘누군가 해야 한다면 김근태가 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이다. 오래전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지만, 지금 그가 처한 정치적 상황과 희망을 말하고 있는 듯해 여기에 인용한다.


“1970년대 어느 추운 겨울날, 저는 수배자로서 길가의 갈대밭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어쩐지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이 슬며시 먹빛으로 변하고, 먹빛 하늘이 청동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기적 같았습니다. 결국 저에게 아침은 왔습니다. 그 후 며칠 동안 죽도록 몸살을 앓았지만, 저는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정리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 김근태는

 

 

노무현 전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

김근태 진보개혁모임 공동대표의 일생은 제1막 박정희·전두환 독재에 맞서 싸운 ‘민주화운동 시기’, 제2막 정권교체에 합류하고 장관과 집권당 의장을 지낸 ‘정치인 시기’까지 전개되어 있다. 제3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1947년생이니까 만으로 예순네살이다.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경기도 양평 양수초등학교, 서울 광신중학교를 나왔다. 공부를 가장 잘하는 학생들이 들어가던 경기고를 나왔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고교 동기동창이다. 6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67년 육군 보병으로 입대해 70년 병장으로 제대했다. 서울대 졸업 1년을 앞두고 71년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됐으며, 74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됐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2대 의장을 맡았고, 그 때문에 85년부터 88년까지 감옥에 있었다. 85년 9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두 10차례의 전기고문·물고문을 받았는데,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폭로해 국내외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일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받았고, 독일 함부르크 자유재단은 그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했다. 90~92년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으로 다시 구속됐다.


95년에는 오랜 재야생활을 접고 민주당에 입당해 부총재를 맡아 정치를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한 국민회의에 합류했고, 96년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돼 내리 3선을 했다. 2002년에는 대통령 선거 당내경선에 나섰다가 중도하차하고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기여했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문제를 둘러싸고 노 대통령과 마찰을 빚었는데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2011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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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문용식, 이을호, 김근태

 

원심법원은 정치군부의 압력과 협박에 굴복하여 민청련을 이른바 이적단체 결성으로 인정하는 등 수치스런 과오를 저질렀다.

원심법원은 사전에 강제적으로 조성된 편견에서 해방되지 못했으며, 사실을 오인하고 채증법칙을 위반하고 심리미진의 잘못을 범했으며,

또한 법령을 위반하여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원심법원은 이적단체 결성이라고 하는 부분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국가 보안법 위반이라는 사실을 인정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는 저 더러운 남영동 수사기록에 의존했다.

그것을 실체적 진실로 전제하고 인정하는 것이 공판과정에서 은연 중 드러났고,

때로는 편견과 예단에 사로잡혀 유죄를 암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을호, 문용식, 그리고 최민화씨의 원심법정 중에서 증언과 검찰수사단계에서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

자술서 등에 서로 모순되는 점이 있다.

이것을 '진실을 은폐하려고 하는 기도'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감추려고 하는 사건 해결의 열쇠는 남영동 기록에 준비되어 있다.

더구나 그 기록 내용이 체계적이며 비교적 합리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실체적 진실이 이미 훌륭하고 규명된 것이고,

사실상 더 다툴 여지가 없는 것이다'라고 추정한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이처럼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재판은 끝나 있었던 셈이다.

다만 형식적으로 검찰에서 있었던 피의자 신문조서, 진술서에 손도장을 찍은 적이 있었던가를 공판정에서 확인하고는

그것으로 유죄판결을 내려버린 것이다.

이것은 서성 판사가 말한 다음과 같은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법정에서 이을호, 문용식, 최민화 등 각 증인에 의해 진정이 성립된 조서, 자술서를 검찰이 갖고 있지 않았다면

기소 제기조차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누가 손도장을 찍으라고 했느냐? 원망하지 마라. 그것은 당신들 탓이다"라는 뉘앙스를 가진 것이었다.

혼란과 공포속에서 찍은 손도장, 그것이 이 사건의 증거이자 유일한 유죄의 증거가 돼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문용식씨가 이을호를 물고, 이을호씨가 나를 물어서 확대된 사건이다.

다른사람으로 확대되는 그 사이사이마다 매개 수단이 되었던 것은 바로 잔인한 고문이다.

9월 초 이틀 또는 나흘 정도 차이로 문용식, 이을호, 그리고 내가 차례로 남영동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세 사람은 모두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같은 상태였고, 칼잡이들에 의해 무참하게 회쳐져 버린 것이다.

혹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완전무결하게 짓밟혀져 버렸다.

 

세 사람을 한 곳에 잡아 놓고 고문을 가하고, 고문을 통해 튀어나온 사소한 사실을 확대시키고,

혹시 서로 모순되는 것은 조정, 일치시켰는데, 이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강제되어 획득한 것을 남영동 수사관들은 거듭된 회의를 통해 체계를 잡고,

미진한 부분 또는 비합리적 부분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은 또다시 고문을 통해 보완, 수정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축을 이루었던 것은 상부인 정치군부에서 거듭 요구하고 지시하는 정치적 활동에 적합하도록 하는 것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고문이 단 두차례로 끝나지 않고 열번이나 계속된 이유가 이때문이다.

남영동 사람들의 거듭된 회의와 그에 뒤따르는 지겨운 고문은 수사기록을 점점 더 피로 물들이는 한편,

소위 그 내용을 체계화시키고 풍부하게 만들었으며, 그럴듯하게,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데에 성공했다.

 

남영동에서 나에 대한 부신문관이었으며, 초기에 가장 악질적으로 고문을 지휘했던 백남은은

"당신들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우리들의 중지에는 못 당한다"라고 말하고 뽐내었다.

남영동 사람들은 조무래기 경찰들이 아니었다.

어찌보면 개인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정치군부의 통치에 반드시 필요한 집단임을 이렇게 증명했다고도 할 수 있다.

 

고문이 가해지고, 계속해서 가해진 데에는 위에서 말한 것 이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세뇌시키고 그럼으로써 부정할 수 있는 심리적 힘이 말살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혹시 검찰이나 법정에서 강제된 것을 번복하거나 부정하려고 할 때는 큰 심리적 동요, 불안, 혼란이 발생토록 한 것이며,

구절구절마다 서려 있는 고문의 기억, 그 고통과 공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도록 한 것이다.

 

나는 고문대 위에서 이미 강제하여 배운 것을 암기하고 복습하고, 또 되풀이해서 공부했다.

그럼으로써 성적이 좋다고 칭찬도 받았고, 머리가 뛰어나다는 찬사도 여러번 들었다.

고문대 위에서 고문을 받으면 극도의 고통과 공포, 혼란이 일어나고 모든 현실이 무의미해지는데,

한가지 펄펄 살아나는 것은 고문자들의 음성, 그 요구이며 그에 응답하는 나의 암기능력, 명령에 순순히 따르고 모방하는 능력이었다.

고문대 위에 묶여 있을 때 들려왔던 고문자들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그에 회답하는 나의 떨리는 음성, 순명하는 마음가짐은 저 하나님 명령을 귀기울여 듣는 아브라함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나만의 일은 아니었고, 이을호씨, 문용식씨 모두 마찬가지였다.

고문은 내가 훨씬 더 가혹하게 여러번 받았지만, 개인의 인격동요와 붕괴에 미친 영향은 두 사람 모두 극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이을호씨 경우에는 정신분열적 혼란이 격발되었으며, 문용식씨는 아직 어린 나이어서 그 충격에 도저히 견녀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공황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

 

인격의 결정적 동요와 붕괴상태에서 검찰로 넘어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실이 올바르게 밝혀지고, 자신을 제대로 방어한다는 것은 애초에 글러버린 것이다.

고문과 협박, 세뇌로 야기된 정신적 위기상황이 구치소로 넘어오고 검찰에 송치되었다고 해서 며칠 새에 진정될 수는 없다.

고뇌와 공포로 물들어 있는 사항에 대해서 검찰이 신문할 때 이성적으로 대답하고 대처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더구나 이을호씨와 문용식씨 그리고 나는 각각 서 있는 위치에 차이가 있어서 자신에게 위험하고 절박한 것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이러한 위기와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에도 차이가 났다.

때문에 남영동에서 기막힌 솜씨로 조합되고 조립된 것으로부터 일정하게 이탈하며 들쭉날쭉한 결과가 있게 된 것이다.

남영동은 본래 일정하게 삭감될 것을 예측하고 미리 크게 부풀리고 공갈쳐 버렸던 것이다.

 

송치된 이후에서 이을호씨에게는 완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여전히 위험한 외적 현실이 덧씌워져 압박해 왔을 것이며,

남영동 고문에서 이미 격화되기 시작했던 내적 현실의 위기, 정신적 갈등과 분열은 오히려 시간과 더불어 심각해져 갔을 것이다.

이처럼 내외적 현실의 위기적 상황이 서로 상승적으로 작용하여 상태를 악화시켜 나갔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이런 자기 주체성, 동일성의 위기로부터의 탈출,

그리하여 인격의 붕괴를 회피하고 중지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이 있었겠는가.

나머지 모든 것은 마땅히 주변적이고 부차적이었으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아마도 문용식씨는 반국가단체로 몰려고 하는 공격으로부터 민추위를 방어해 내고,

이것과 관련된 여러 사실을 분명히 해내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을 것이다.

반국가단체로 몰릴 경우, 그것은 문용식씨 자신은 물론

민추위 회원들의 안전에 거의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가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만 사실대로 검찰이 받다준다면, 아마 나머지는 얼마든지 양보하고 그냥 인정해버릴 수 있었을 것이리라.

 

검찰수사 단계에서 이처럼 나에 관한 사항은 이들 두사람에게 당시 한낱 주변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차적인 것은 주어 버리고, 절박하게 중요한 것은 시급하게 획득해야 했을 것이다.

당시 이을호씨에게 중요했던 것은 가중되고 있는 강제수사와 공격적 질문과

더불어 닥쳐오는 그 위험으로부터의 해방, 아니 적어도 차단이었을 게다.

정상적인 사람도 한달 이상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강제수사를 받는 경우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이상심리에 빠지게 마련인데,

지독한 고문을 받고 정신분열적 갈등과 혼란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을 이을호씨의 경우,

끊임없이 밀어받치는 검찰 강제수사의 중압을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 얼마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시시각각 심해져가고 있는 자신의 내적 현실에 모든 주의를 빼앗기기 시작하면서

외적현실로부터 철수해 갔던 흔적이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보인다.

마침내 검찰의 요구와 기대대로, 이른바 이적단체 결성을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의 의미와 무게를 거의 느끼지 못했을 것이겠고.

 

문용식씨는 민추위를 반국가단체 결성으로 인정하라는 강요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견디면서, 다른 것들은 얼마든지 주었을 것이다.

나와 관련되었다고 하는 것은 - 판시 사실2중 나항 - 당시 문용식 씨에게 나머지 중의 나머지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용식 씨 공소장에서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 사실로 봐서도 그렇다.

검찰 수사가 뭐 시장의 장사처럼 주고받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경험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정치적 사건에서 특히 근래에 생긴 이사건, 또 비슷한 사건에서처럼 증거란 게 모두 말과 고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

주고받고 하는 흥정과 거래가 검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정치군부는, 그 하수인들은 이를 마치 예상하고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 같다.

남영동은 잔뜩 부풀려 버렸고, 나 자신을 포함해서 이 사건에 엮어진 모든 사람들이 이 무게에 짓눌려 주눅들어 버렸던 것이다.

남영동에서 내 생활이 끝나갈 무렵, 느닷없이 '민청련은 반국가단체'라고 하면서 신문조서를 꾸미고 인정하라고 협박해 왔다.

 

처음에도 또 중간에도, 최악의 고문 속에서도 일찍이 입밖에 한마디조차 꺼내지 않던, 이 때아닌 홍두깨는 무엇인가,

무슨 이유일까, 그 의미는 무엇인가, 지옥의 그 고통 속에서도 너무 어이가 없어 '꺽꺽'하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최초에는 아주 소극적이었다가 중,후반부터 최고 악질고문자로 발전해갔던 전무 김수현조차 맹숭맹숭하고 조금은 열적은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시키세요. 뭐든지 하겠어요"

 

이들이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이다.

상전인 정치군부의 요구와 지시에 회의할 줄 모르는 이들의 요구는 분명 현실이었다.

살을 꼬집으면 아팠을,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니....

 

아, 드디어 나를 죽이려고 하는가.

완전히 정치적 희생물로 만들려 하는가, 이 정치군부는.

이 죽음을, 이 어두운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는구나.

주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나는 사실 지금까지 울지 않았다.

고문대 위에서도 고문대를 내려와서도 악을, 악을 써대고, 수없이 울부짖기는 했어도 말 그대로 울음을 울지는 않았다.

오직 이때 한 번이었다.

 

이제 되돌아 생각해보니 양수겹장이었던 것 같다.

가혹한 보복을 놓치지 않고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검찰과 법정에서 삭감될 부분을

이 반국가단체 운운으로 상쇄시켜 버리고자 한 것이리라.

정치군부는 멀치감치 뒤에 물러서서 팔짱 낀 채 앉아 있었고 남영동은 흥정거리가 필요하다면 에누리해 줄수 있는 부풀린 상품,

여분의 상품속에 이을호, 문용식, 그리고 나를 파묻어 검찰에 넘겨버린 것이다.

 

 

고문, 그의 은폐, 학대행위 등, 이 사건의 본질을 구성하는 정치군부의 범죄행위에 대해

원심법원은 제대로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에서 마치 실체적 진실은 저멀리 따로 있고,

정치군부의 범죄행위는 단순히 소송법적 사실로서 자유로운 증명의 대상일 뿐이라고 여겨 판단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이른바 실체적 진실은 고문과 그 은폐 속에, 그 위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국가형벌권의 실현'이라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일인데다가, 피로 물든 더러운 손에 의해 강행된 정치적 소동이다.

이 사건은 중세시대의 저 악명높은 마녀재판 소동과 유사한 것이다.

내가 여자가 아니어서 꼭 같은 것은 아니겠고.....


1심 재판부는 이렇게 함으로써 고문자들을 적극적으로 두둔한 것이었고, 고문이 계속될 수 있도록 보장한 것이었다.

지난 4월초순경 이념서적 사건으로 구속된 청년들 중 김상복이라는 사람이 또다시 전기고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소아마비로 불구자인 이 청년에게 전기고문을 가한 사람은 바로 나를 고문했던 백남은이라고 한다.


1심 재판부는, 판사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것이라고 발뺌하고 말아버릴 것인가.

이 사건은 피고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최소한도의 권리보장조차 박살내 버린 것으로서

헌법적 요구인 적정절차에 대한 전면적 거부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처벌될 수 없으며, 처벌되어서는 안 된다.'


원심법원은 '공소제기 절차가 법령을 위반했으므로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나와 변호인의 주장을 이유도 밝히지 않고 배척했다.


현 헌법은 상세하고도 명확한 형사절차상의 인권규정을 갖고 있다.

즉 적정절차를 확고히 보장한 것이다.

 

헌법은 전체 모든 것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형사소송의 모든 문제는 헌법으로부터 출발한다'는 하강 과정적 방법에 의하여 해결을 기도해야 한다.

즉 헌법과 형사소송법규에 따라서 이 사건이 수많은 정치군부의 불법범죄행위에 의해 공판에까지 이르는 것이 명백한데도

유죄를 선고한 것은 원심법원이 법리를 오해한 것이다.

 

나아가서 위법, 불법범죄행위를 통해서 또한 그것에 의해 공소제기된 이 사건은

마땅히 공소기각 판결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붙이지 않고 배척함으로써 영향을 미친 잘못을 범했다.


나는 85년 6월 24일 불법적으로 체포된 이후, 특히 9월 4일 남영동으로 강제연행당한 이후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유린당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완전히 짓밟혔으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빼앗겼다.

특히 신체의 자유는 박탈당한 정도가 아니라 마구 짓밟혀 묵사발이 되어버렸다.

짐승처럼 매 맞았고 동물처럼 능욕을 당했다.


8월26일부터 9월4일까지 구류를 살고, 그 후 즉시 또 구속된 것은 별건 구속으로서 영장주의에 위반되며,

9월 25일 밤 9시반까지는 영장을 제시받지 않았으므로 이 또한 불법적 구금상태에 있었던 것이며,

인치장소로 영장에 명시된 용산경찰서 유치장에는 송치당일 오전 3시20분부터 오전 9시까지만 있었을 뿐이다.


85년 9월 당시, 남영동 공작1과 과장이었던 총경 윤재호의 직접지휘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참혹한 전기, 물고문을 10차례 당했다.

대엿새 정도의 끼니는 제공되지 않았고, 그 나머지는 고문 때문에 밥을 먹을 수 없어서 우유에 빵을 녹여서 겨우 허기를 메워 나갔다.

 

밤을 꼴깍 새운 날도 부지기수였고, 고문 받은 날은 잠을 좀 재웠는데 4시간 내지 4시간 반 정도였다.

참혹한 고문에 의해 강제된 것을 그대로 베껴 쓰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수집된 증거와 고뇌, 비명과 절망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그에 더 잡아 이리저리 꿰매어 모은 2차 수집증거에 의해 공소제기에 이르렀다.


남영동에서는 물론 검찰청에 뻔질나게 들락거릴 때도, 그리고 공소제기되고 나서 제1회 공판기일에 불과 10일 전까지

변호인과의 접견, 교통이 악마적으로 봉쇄되었다.

또한 85년 12월 13일,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법원에 고문증거로 제출하려던 상처딱지를 구치소에서 폭력적으로 탈취당했다.


이처럼 갖가지 위법한 절차에 의해 헌법적 형사소송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도전하는 절차에 의해 취득된 증거

또는 그에 뿌리박은 2차 증거를 원심법원이 증거로 허용함으로써 법원 스스로 위법한 절차를 옹호하고 승인한 결과가 되었다.

이는 사법의 염결성에 반하는 것이며, 또한 적정절차 보장을 통한 재판의 공정성 유지라는 대원칙을 붕괴시켜 버린 것이다.


사실과 법리가 이러한데도 원심법원이 아무런 이유의 제시없이 공소기각 판결을 배척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원심법원은 사실을 인정함에 있어서 증거의 요지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법령을 위반했다.

판결에서는 어떤 증거에 의해 어떤 사실을 인정했는지가 명백해야 하는데도 원심은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판결에 이유를 붙이고 증거의 요지를 명시토록 한 것은 법관의 자의를 배제함으로써 재판의 공정을 담보하고,

재판의 근거를 밝힘으로써 피고인을 납득시키고자한 것인데, 원심판결은 이에 실패함으로써 법령을 위반한 잘못을 범했다.

특히 정치적 보복인 이 사건에서 증거의 요지를 밝히지 않은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미국 홈즈 대법원 판사의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공판정에서 사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사용될 수 없다"는

저명한 판결을 환기시킴으로써 이 부분을 마치고자 한다.

 

바야흐로 가을이 왔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오세훈 전 시장 덕분에 봄이 한창이다.

 

가을의 한복판에 ‘서울의 봄’이 열렸다.

서로서로 꽃이 되고자 경쟁이 한창이다.

물론 각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중요한 선거고

나 역시 야권단일화 경선에서 선택된 후보가 최종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아쉬움도 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기간 중에 국정감사, 한미FTA 등의 중요한 정치일정이 있다.

그런데 국가적 사안들이 다뤄져야할 국회의 국정감사가 뒷전으로 취급되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를 게을리 한다기보다 여론의 관심이 분산되어 중요한 국가적 쟁점들이 부각되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다.

쟁점이 국회에서 부각되지 못하면 언론보도도 잘 안되고 가뜩이나 바쁜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정감사뿐만 아니라 곧 타결이 임박한 듯 보이는 한미FTA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선거가 모든 것을 삼키고 있다.


 

물론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잘해야 대한민국 안에서의 일일 뿐이고 정치적인 일일 뿐이다.

때 아닌 서울의 봄 속에 대한민국이 선거로 가을앓이를 하는 동안에도

세계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시시각각 새로운 경쟁 속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우선 정치적으로 역시 중동 지역이 격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유엔회원국 승인신청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은 더욱 궁지에 몰리고 있으며,

리비아에서의 NATO 개입과 승리가 확실해질수록 시리아문제를 적극 해결할 수 없는 NATO의 무력함과 위선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정치적 사건과 경쟁들보다 중요한 일이 경제에서, 금융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리스의 금융위기와 스페인, 이탈리아의 위기설로 세계금융은 심하게 부침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스 금융위기 해결에 관한 수많은 논쟁과 논의는 최근 독일의 지원이 의회에서 최종 의결됨으로써 우선 일단락되었다.

금융위기 논쟁 중에 주목을 끌었던 것은 워렌 버핏과 빌 게이츠였다.

버핏은 소위 버핏세라 일컬어지는 부자증세를 주장했고, 빌 게이츠는 ‘토빈세’라고 불리는 금융거래세를 주장했다.

 

 

문제는 우리 정부와 정치권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다. 한마디로 참담하다.

박재완 기획재정부장관은 버핏세 도입에 대하여 미국과 사정이 달라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재정적자 수준이 미국과 달리 양호하다는 단순한 생각인데 어떻게 저런 인식으로 국가경제를 이끌고 있는지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버핏세 논란을 계기로 선제적으로 재정건정성 확보에 주도권을 행사해야할 주무 장관의 발언으로 너무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버핏세의 핵심은 미국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감세 수준이 정부 재정에 부담이 될 정도로 과도했고

지금보다 빠른 시점에 감세를 중단하고 점진적 증세를 추진했어야 한다는 것이 버핏세의 교훈이다.

 

솔직히 박재완 경제팀에게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미국과 유럽의 교훈으로 당연히 중단해야할 감세조차 야당과 친박의 반대에 부딪쳐 겨우 수용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토빈세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G20의장국을 큰 업적으로 자랑하는 이명박정부가 가장 공을 들일 사안이다.

 

이와 관련 의미 있는 소식이 하나 전해지고 있다.

EU 집행위원회가 EU내 주식 및 채권 거래에 0.1% 세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소위 금융거래세, 토빈세인데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EU의 유로존 17개 국가에서 먼저 도입할 예정이고

깐느 G20정상회담에서 제안할 방침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깐느에도 금융전쟁의 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휴양지인 깐느는 우리에게 영화제로 더 유명하다.

비록 서울의 봄에 묻힌 깐느의 G20 정상회담이지만 대한민국의 운명에 더 치명적인 것은 깐느의 봄이다.

이번 깐느 G20의 황금종려상을 ‘토빈세’가 수상하고 대한민국이 이에 기여하기를 기대해 본다.

 

만약 깐느의 봄에서 토빈세가 황금종려상을 받게 된다면 그간의 정책실패를 만회하고도 남을 이명박 정부의 최대 업적이 될 것이다.

G20과 G20의장국은 솔직히 업적이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국력과 국격이 그 정도 수준으로 성장한 것이고 운이 따랐다.

이명박 대통령이전에 대한민국은 이미 G20수준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진정 독보적인 이명박 정부의 업적은 토빈세 등의 도입을 통한 횡포의 견제에 달려 있다.

11월 3일과 4일에 있을 깐느의 봄, 대한민국의 봄을 기대해 본다.

 

 

2011년 10월

김 근 태

 

나는 아프지 않아야 한다고 단단히 결심을 했다.

몸이 아파서 쓰러지는 것은 정치군부에 대한 두 번째 패배가 될 것이다.

남영동 고문에 불복한 것에 뒤이은 또 다른 패배가 될 것이다.

나는 두 발로 버텼다. 나는 자생력을 믿었다.

 

봄과 함께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은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

이제 남은 것은 심하게 옭죄는 두통이다.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 않는 것뿐이다.

 

지난 4월초 구치소 의무과는 스크린 테스트(개략검사)로 가슴과 머리 사진, 피검사, 소변검사를 했다.

의무과장은 이상이 없다고 말해 주었다.

우선 다행스런 일이다.

 

그렇다면 이 견딜 수 없는 두통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게 하고자 했다면 타이밍을 놓쳐 버린 것일 게다.

 

보다 엄밀한 진료와 검사가 필요한 단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죄어 오는 아픈 머리와 푸석하게 부은 두 눈으로 이 글을 써내려간다.

그러면서 나는 은근히 걱정한다.

이 두통과 부조화들이 정신적 외상으로 인한 신체적 반응 증상은 아닌가 하고.

 

전기와 물고문의 그 고통, 공포와 혼란으로 입은 정신구조의 깊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혹시 이을호씨가 앓고 있는 그것을 나도 부분적으로 가슴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나의 가슴앓이를 지그시 누르면서 또한 박영진 형제의 가난한 죽음 앞에, 경원전문대의 한 학생의 분신,

그리고 서울대의 두 학생의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항의에 부끄러운 옷깃을 여미면서, 울컥 치솟는 뜨거운 것을 꾹꾹 누르면서,

내 얘기를 내 사건이라는 것을 이것저것 따져 보고 짚어 나가겠다.

 

정치군부는 재판에 끊임없이 간섭하고 장애를 조성했다.

그렇게 하여 재판부 판사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였고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85년 12월 19일 첫 공판 기일 이래 매 공판 때마다 법원구내와 주변에 많은 정, 사복 경찰병력을 배치시켜

삼엄한 분위기를 고의적으로 만들었고, 문익환 선생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을 불법적으로 자택에 감금시켜 방청하지 못하도록 했다.

 

미국에서 급거 날아온 두 명의 변호사 역시 기만과 강박으로 인해 방청을 봉쇄당했다.

한 사람인 에이미 영 미법률가협회 총무는 공판기일에 법원 구내까지 들어왔다가 방해받아 방청하지 못했다.

구치감 앞에 머문 지프차에서 내리는 나를 먼 발치서 바라보고 난 후 곧 강압적으로 어디론가 안내되었다.

자칭 미대사관 직원이라고 하는 건장한 사내들에 의해 사실상 끌려간 곳은 공안연구소장 김경한 검사 앞이었다.

김 검사는 말했다고 한다.

 

"남영동에 있을 때 변호인 접견이나 조력을 요청하지 않았다. 고문 받지 않았다.

만일 고문 받은 사실이 판사에 의해 인정되면 석방될 것이다.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물론 자기의 외래의사 진료와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프지 않다."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이 뻔뻔한 거짓말 중에 그래도 꼭 하나 사실과 맞는 얘기가 있다.

그렇다. 나는 변호인의 조력과 접견을 요청하지 않았다. 못했다.

 

그러나 어떠했을까?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한심한 작자라고 구박받으면서 한 차례 더 전기고문, 물고문이나 당하지 않았을까?

 

재미동포들과 우리의 미국 친구들을 대신해 대표로서 이들이 찾아왔다.

비열한 고문행위에 항의하고 재판을 방청하려 했던 인권 변호사들의 목적은 효과적으로 막혀졌다.

이 고문, 이 사건에 대한 국제적인 주시, 비판을 정치군부는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아주 능률적으로 차단해 버린 것이다.

 

정치군부는 협조라는 이름으로 신문사 사주, 편집국장을 협박하여 남영동 짐승들의 고문에 관한 것은 전혀 기사화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공판정에서는 많은 기자들이 열심히 메모를 하는 데도 고문에 관한 것이나 중요한 쟁점은 보도되지 않았다.

 

이는 언론자유를 침해한 것일 뿐 아니라 재판의 공개주의를 훼손시켜 버린 것이다.

개개인의 방청자유는 물론 현재 대중사회에서는 재판에 대한 보도자유가 보장됨으로써만

국민은 재판이 성실하게 행해지는지의 여부를 감시하고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공개주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어용보도기관인 KBS와 연합통신을 동원하여 사실을 왜곡, 날조함으로써 사전에 관제여론재판을 강행하려 시도했으며,

그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고문 사실의 일부가 노출된 이후 KBS등은 더욱 기승을 부렸는데,

이것은 맞붙어 자름으로써 고문은폐 효과를 거두고 의도된 정치보복을 최종적으로 완수코자 한 것이었다.

 

서성 판사는 공판정에서 이 사건이 신문, 방송에서 보도된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것에서 만들어진 편견에서 해방되느라고 무척 힘들었다는 의미의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정치군부와 관제언론에 의해 만들어지고 강요된 편견 속을 헤매었으며,

남영동에서 각색된 피 묻은 서류에 파묻혀 영원히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서성 판사를 비롯하여 재판부 전원이 아주 깊숙이 침몰돼버린 것이다.

 

1심 재판에는 예단과 편견배제의 원칙을 저버리고 공정성을 잃어버림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연합통신 제공으로 반 강요된 기사가 각 일간신문에 획일적으로 크게 보도되었고,

KBS 뉴스시간에 여러 번, 거기다가 2회에 걸쳐 40여분짜리 나 개인에 관한 특집 기획물까지 만들어 방영했다.

 

이것은 정치군부 보복의지가 얼마나 강렬한가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른바 이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군부 보복의지 강도의 문제이다.

이 우렁차게 선포된 강고한 의지 앞에 재판부는 뼛속까지 얼어 버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성 판사는 공소제기일로부터 제1회 공판기일까지 근 두달여 동안 단독결정으로 가족면회를 금지시켰다.

검찰에서 묵비고수 때문이라는 것이다.

묵비권 행사가 죄증을 인멸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아닌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군부가 고문증거를 인멸할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그 진정한 이유다.

공소제기 전, 경찰, 검찰수사 단계에서도 역시 두 달 가까이 가족은 물론 변호인까지

서로의 만남이 완전 봉쇄되었던 것을 잘 알면서도 내린 이 결정은 잔인한 것으로서 그 자체가 무효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친밀한 인간적 만남 속에서 비로소 존엄성와 가치를 누릴 수 있으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서성 판사의 이러한 결정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차단당하고 만 것으로 바로 헌법 제9조 위반이다.

그러나 뭐 위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처음부터 논리나 양식 그런 문제는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성 판사는 제1회 공판기일부터 공연히 방청권을 발행하여 가족과 민주인사들의 재판 방청을 사실상 방해했고,

그럼으로써 고문을 규탄하고 항의하는 분위기를 삭히는데 누구보다 노력했다.

 

아무런 이유없이 방청인 수를 대폭 제한하였으며, 그나마 절반정도는 기관원 또는 그렇게 동원된 사람들에 의해 점거되게 했다.

이렇게 하여 오히려 일정한 긴장을 유발시켜 놓고도 방청에 제한당한 사람들이 소란을 피운다는 명목으로

법정 경찰권을 동원해서 잔인하게 제지를 가하는 결과를 빚어지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나의 처 인재근은 경찰의 폭행으로 졸도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제1회 공판조서의 기재내용이 지나치게 부실하여 이에 대해 변호인도 나도 이의제기를 하고 시정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이랬다.

 

"다른 사건에서는 피고인이 이익되는 진술을 30여 분 해도 고작 한 두줄 정도로 기재하는 것이 현행 관례다.

개선되어야 할 관례지만 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충실한 편이었다"고.

 

나는 첫 공판기일에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을 아주 짧게 줄여서 말했다.

그런데 그것을 극도로 줄였을 뿐 아니라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기재하여 고문사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정도였다.

거절을 수긍할 수는 없었지만 갈 길이 멀고 멀어서, 또 고문을 참혹하게 하고서는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정치군부를 의식한 판사들이 안되어 보여서, 그 정도로 하고 지나치기로 했다.

 

증인 심문 단계 중간쯤부터 서성판사는 공정성을 저버리고, 유죄를 예단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증인에게 두서없이 던졌으며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집시법 부분에서 거론한 최민화 씨 증언시에 서성 판사는 다음 같이 증인에게 물었다.

 

"왜, '민주화의 길'의 논설을 의장만 쓰는가? 그렇게 하면 영향력이 의장에게 집중되지 않느냐."

 

당시 서성판사의 뉘앙스까지 합쳐보면 민청련 운동은 거의 나 혼자 해온 것처럼 인상을 지우면서

동시에 사건을 은폐하려는 저의가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예단이니 편견배제니 그런 것을 넘어선 도전적이고 적대적인 것이었다.

 

나는 울컥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을 누르면서 '참자, 또 참자' 고 자신을 억누르면서

'논설은 의장단이 써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아서 결국 나에게 부담으로 돌아온 것" 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학생들처럼 엎어버리지는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서 '참고 넘어가 주자' 고 하며 그냥 지나간 것이 지금에서는 몹시 억울하다.

점잔을 뺀 것이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시쳇말로 쪽은 쪽대로 팔려 버렸으니......

 

서성 판사는 내가 제출한 탄원서에 대한 변호인의 열람을 거짓말로 따돌렸다.

활용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까지 힘을 다해 남영동 고문을 생생하게 기록했었다.

탄원서라는 이름의 서류에.

3월 4일. 선고 날 이틀 전에 아마 재판부에 도착했을 것이다.

 

선고가 있은 후 닷새째 날인 3월 11일, 변호인은 이 탄원서의 열람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서성 판사는 "이미 소송기록을 보냈다"고 하면서 따돌렸던 것이다.

앞뒤 사정을 봐도 그렇고 검찰의 말을 들어 봐도 그렇고, 이미 소송기록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거짓말로 열람요청을 방해한 것이다.

 

이것은 작전이었다.

그 작전을 모른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패대기쳐진 것이다.

완전히 해낸 것이었다. 치밀하게. 그리하여 훌륭하게 여러가지 현실적인 고려를 하고 대처하여 서성 판사는 승리했다.

 

 

본래 이 사건에 대한 의혹과 고문에 대한 광범한 분노를 잘 읽고,

형식 또는 절차는 주고(그것도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문사실은 안되고), 내용은 완전히 꼴깍 먹어치운 것이다.

 

그럼으로써 '짱' 박아두었던 '충성'이 매우 빛을 발하게 되었으며 정치군부의 승리를 남영동. 검찰에 이어 또 한번 튼튼하게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 공로에 대한 보답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 정부에 대해 위헌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현 정부는 자극을 받아 외교통로를 통해 일본정부에 대해 협의를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외교부 부대신이 “이미 청구된 문제는 1965년 한일 기본협정으로 다 해결됐다” 고 주장했다.

일본의 궤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의 딱한 사정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봄에 발생한 대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 사고, 그리고 중국에 추월당한 국제적 위상과 최근의 신용등급 강등은

여러 측면에서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다.

노다 수상이 새롭게 일본을 맡게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미일 안보동맹강화를 지지한다는 목소리 이외에는 들리지 않는다.

 

일본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 원인이 있다.

그 중 세 가지를 주목한다. 신자유주의, 탈아입미(脫亞入美), 관료주의다.

 

 

90년대부터 미국을 모방해 시작된 일본의 신자유주의는 고이즈미 전 총리시절 정점에 이르렀다.

그 오랜 신자유주의의 결과는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2011년 재정 악화와 신용등급의 강등이다.

 

 

두 번째로 미국을 추종하는 ‘탈아입미’ 노선이 일본의 발목을 잡았다.

‘탈아입미’는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었던 20세기 후반에 유용했지만 21세기엔 그렇지 않음에도 일본은 변하지 못했다.

 

21세기의 미국은 스스로 금융위기를 자초하고 20개의 국가들을 불러 모은 G20으로

문제를 미봉책으로나마 해결해야하는 수준으로 약화되었다.

자민당 일당 장기집권을 청산한 민주당 정권교체가 ‘탈아입미’를 ‘탈미입아(脫美入亞)’로 바꿀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사그라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관료주의에의 포획이 문제다.

사실 일본에서 신자유주의와 ‘탈아입미’ 노선은 관료를 통해서 전파되고 계승된다.

20세기 일본경제신화의 주인공인 관료들은 21세기 일본의 재앙이 되어있다.

 

일본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일본이 측은한 만큼 우리의 처지도 애처롭다.

 

 

이명박 정부의 미국에 몰입하는 외교노선과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추진, 그리고 관료에 포획된 정치라는 상황은 일본과 비슷하다.

그리하여 일본과 비슷한 일들이 한국에서도 벌어진다.

과도한 친미외교로 대외 영향력의 약화, 양극화의 심화와 재정의 악화, 관료를 극복하지 못하는 선출된 권력의 무력감이

한국에도 나타나고 있다.

만약 이런 추세가 지속되고 한나라당의 노선과 정책이 혁명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채 박근혜 전 대표가 정권을 잡는다면

한국의 제2의 일본화는 더 가속될 것이다.

 

문제는 민주당이다.

솔직히 이명박 정부는 민주당 10년의 민심이반으로 탄생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시절 IMF위기 극복 등의 여러 이유로 신자유주의가 한국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되었음을 인정하고 반성해야한다.

 

 

그러한 반성과 성찰 속에 집권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비전과 대안이 명확하지 않은 채 반MB정서 덕분에 정권을 잡는다면 다시 정체와 좌절이 찾아올지 모른다.

 

 

진정 승리하고 싶은가 !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되돌아보고 성찰로 김대중·노무현 정신을 계승하자.

대선에서의 승리를 함께 모색해야하듯이 승리 이후의 비전과 대안에 대해서도 함께 길을 찾자.

우리를 먼저 열어야 승리도 우리에게 길을 열어줄 것이다.

 

2011년 9월

김근태

 

7. 선택하라! 선택하라!

 

말하기 거북스런 것이 또 하나 있다.

아마 이것은 나의 심약함의 반영이었을 게다.

 

재판부, 변호인, 검사, 나, 방청객, 신문기자 모두가 반 정치군부적 분위기 속에서 암묵적으로 의사가 통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게다가 법정 구성의 당사자들은 거의 서울대 출신들이었으며,

재판장인 서성 판사는 경기고등학교 4년인가 선배라는 말에 뭔가 기대를 건 적이 있었던 것이다.

 

웃기는 얘기겠지만 난 사실 그랬다.

육사 몇 기로 뭉쳐서 설쳐대는 저 정치군부들의 흉내를 내고 싶어 했던 것일까.

정치군부가 자기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서 어떻게 작용을 가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할 수 없는 내가,

조금만 양식이 있으면 누구의 눈에도 보이는 이것을 나는 얼마동안 눈감아, 애써 눈감아 외면했던 것이다.

그 대신 아주 사소한 끈에 매달리려고 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이건 시궁창에 빠져 버린 쥐새끼처럼 참담해지고 만 것이 아니겠는가.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마음을 돌려 앉혀놓고보니 오히려 잘된 점도 있는 것 같다.

나에 대한 판결은 기본권 보장이니, 실체적 진실 발견이니 또는 사법적 정의실현이니 하는 주절거림으로부터

'깨어나라, 꿈을 깨라'는 통렬한 타격이었다.

 

사실, 하려면 이렇게 빨가벗고 나서서 "재판부는, 판사는 정치군부 편이다"고 선언해 주는 것이 속 편하다.

처음에는 분기탱천하는 바가 없지 않았지만, "아! 결국 당신들은 역시 그렇구나"라고 인정하면서 깨끗하게 끝낼 수 있었다.

더 이상 공연히 알쏭달쏭하게 만들고 헷갈리지 않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지난 4월 13일 전후 이곳 구치소 전 사동은 낮에도 밤에도 열기와 함성으로 들썩들썩했다.

병사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 나는 늘 형광등 신세를 벗어나지 못해 어리벙벙했지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화려한 송별식이었다.

터져 나오는 통곡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예 처음부터 재판과는 담을 쌓았던 '민정당 연수원 사건' 관련 학생들의 형이 확정되던 날 시작된 것이었다.

전국 각지의 가막소로 실려 나가는 날 아침까지 학생들의 아우성은 솟구쳐 올라왔었다.

 

이들의 목소리에 방 창문을 열고 귀 기울이면서 나는 미안한 마음이 되었다.

과격하고 무모하다는 비난을 흠뻑 뒤집어쓰면서 학생들이 싸우고 있을 때 재판 속을 헤매고 있던 나 자신을 되돌아봤다.

학생들에 대한 정치군부의 야멸찬 매도, 핏대올린 선전이 귀가 따갑게 울리는 동안

학생들은 외침으로, 떨리는 가슴으로 대치해왔던 것이다.

이런 학생들을 나무라는 점잖은 사람들이 있는 줄 안다.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나에게 있다.

가막소 벽에, 구치감 벽 여기저기에 쓰여있는 글을 보면서 학생들의 가슴에 새겨 있는 한숨과 외로움을 나는 보았다.

 

'군사독재는 물러가라', '민주주의 만세', '민주화운동은 승리한다', '서민생계 보장하라' 등이 시멘트 벽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서울대 학우여 투쟁하라', '고대, 연대, 성대, 이대, 서강대, 숙대 학우여 나서라!' 등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당신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바인가? 그렇지 않다.

당신들은 그 글자는 알지만 거기에 쓰여있는 눈물과 설레임은 모르는 것이다.

당신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졸전을 벌였다고 공박을 받은 무하마드 알리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들이 링사이드에서 찬 맥주를 마시면서 낄낄거리고 있을 때, 나는 배에, 턱에 강력한 주먹을 얻어맞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헉헉거렸다. 당신들은 이 고통, 이 외로움을 알 수 없는 얼간이들이다"라고.

 

이 말을 점잖은 당신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일단 정치군부에 찍히면 그것으로 결정난 것이다.

그 이후는 하나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나같이 뒤통수 얻어맞고 꿈을 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들 학생처럼

분식행위, 가식적절차를 처음부터 거절해 버리는 사람도 있다.

서성 판사의 승진소식을 들으면서 선뜻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넉넉한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도 있지만 따져봐야할 것이 있어서다.

 

아마 능력이 있고 충분한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정치군부의 요구와 기대대로 재판 결과가 마무리된 때문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보다 공정한 재판 결과가 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잘 모르는 일이다.

서성 씨에 대해서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그 개인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서 법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이 사실상 형해화 되어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다시 말하면 정치군부에 유리하게 했는가 아니면 불리하게 판단을 내렸는가가

법관 인사조치에 영향을 미치고 또 그렇게 추측되는 상황에서 자유심증주의는 매우 위험한 도구로 전락돼버리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엿장수 마음대로, '오야' 마음대로, 결국은 정치군부 마음대로

민주화 실현을 저지하고 국민을 탄압하는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벌써 그렇게 돼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법관의 인적, 물적 독립이 훼손되어 있는 상황 아래에서 법관 개인에게, 개인의 양심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정치군부가 맹렬하게 제기하는 사건에서 법관은, 법관의 양심은 피고인이 된 민주인사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라도 법관 자신의 안전에 대한 고려가 작용하여 유죄로 예단하고 추정하게 될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자유심증주의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앙상레짐을 타파하고 자유, 평등, 박애의 인류라는 이상을 드높인 불란서 대혁명 정신인 합리주의의 다른 표현이다.

전체적, 자의적 왕권지배, 규문주의적 재판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 획득된 원칙이다.

 

그런데 이 자유심증주의가 정치군부 독재 아래에서는 인권을 탄압하는 그럴 듯한 원칙으로 타락되어버린 것이다.

이번 나의 재판도 그 경우의 하나일텐데,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이렇다.

 

최민화씨가 증인으로 증언하고 있을 때,

서성 판사는 '민주화의 길'에 실려있는 '80년 서울의 봄에 대한 반성과 평가'에 대해 나에게 질문했다.

"그 글을 누가 썼는지 말할 수 없습니까? 대표라면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게 여겨 할려고 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공판정에서 어떤 심문에도 진술을 거부한 적이 없었는데도 이처럼 느닷없이 도발적인 질문을 한 것은

법관이 '심리 도중에 피고인으로 하여금 유죄를 예단하는 취지의 말을 한 경우'(대판 74. 10. 16. 74모68)가 되어

당연히 기피신청의 사유가 되고, 예단과 편견배제원칙을 위배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자유심증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치군부는 사실상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번 법관의 인사는 그것을 더 한층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현직판사로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나갔던 사람들, 청와대 비서관을 했던 사람이

법원의 여러 요직에 발탁되어 임명되고 있는 것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정치군부의 또 다른 혹심한 탄압이 무르익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하며, 유죄를 99.5% 강요,

이제 거의 100%까지 올리고야 말겠다는 결의의 표명, 전 세계 최고기록을 달성하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도 해석해야될 것이다.

 

폭력적 경찰, 나아가서 검찰이 야만적 정치군부의 하수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유신시대에서 본 것처럼, 5. 17과 광주사태 이 후 경험한 바와 같이 법관도, 법원도 이미 정치군부의 품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잇는 것이다.

 

거듭 소용없는 일임을 시퍼런 두 눈으로 확인해 가면서도.

정치군부의 폭력적 본성을 논리라는 당의정으로 겹겹이 싸 바르는 지식인들이여 ! 법관들이여 !

이제 당신들은 최종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우리시대의 대의인 민주화실현 대오에 설 것인지, 아니면 끝끝내 정치군부 옆에 서서 영원히 민족과 역사의 저주를 받을 것인지 선택하라 !

 

선택하라 !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당신들의 자유이다.

 

 

이제 이소선 어머니를 떠나 보내야 한다.
전태일의 어머니요 노동자와 약자, 소외된 모든 영혼의 어머니로 앞으로도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겠지만 이소선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런 눈물과 끝 모를 그리움 속에서 이소선 여사의 명복을 빈다.

전태일 열사가 불이었다면 이소선 여사는 물이었다.
전태일이라는 거대한 불덩이가 70년대의 하늘 위로 쏟아질 때 이소선이라는 장대한 물줄기도 땅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전태일이라는 불길이 지난 자리마다 이소선이라는 물이 흘러 들었다.

그을리고 상처 난 몸과 마음 속으로 흘러 새살이 돋게 하고 더 강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오늘날까지 전태일 정신이 살아있는 것도 이소선 어머니가 살아 계셨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소선 여사는 ‘살아남의 자의 슬픔’에서 머물지 않고 ‘살아남의 자의 기쁨’을 만들어 내셨다.

늘 사랑스럽게 슬프고 아픈 우리들을 감싸 주셨다.

돌이켜 보면 이소선 여사는 단순히 전태일의 어머니가 아니다.
40년 동안의 한결같은 삶을 볼 때 오히려 전태일이 이소선의 아들로 보일 정도다.

통찰과 용기로 깃발을 드는 전태일의 불같은 정신이 있다면 낮은 곳으로부터 스며들어

종국엔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는 물의 정신이야 말로 이소선 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0년을 꾸준히 한 길을 가는 힘.

40년을 꾸준히 낮게 임하고 높게 꿈꿀 수 있는 실천과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과 삶을 모든 가치 판단의 중심에 두는 이소선 정신은

환경과 복지, 반핵과 평화 등 미래 가치와 맞닿아 있다.

세월이 지날수록 넓고 깊은 마음으로 하늘 너머의 하늘까지 다 품었던 이소선 여사가 몹시 그리울 것이다.

그 그리움만큼 이소선의 마음, 이소선의 정신, 이소선의 길이 명확해질 것이다.

 

‘살아남의 자의 슬픔’을 말하기엔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긴박하다.

이소선 여사께서는 늘 ‘슬픔’ 대신 우리에게 삶을 긍정하고 꿈을 쟁취하라고 하셨다.

그렇기에 이명박 정부라는 현실을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이소선 어머니의 길이 아니다.

슬픔과 분노에 긍정과 꿈을 보태야한다.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긍정하는 연대의 길과 보다 많은 평등과 자유의 길을 찾아 우리의 땀과 열정을 바쳐야 한다.

이소선 정신을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는 정치적으로 민주대연합일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정규직/비정규직 차별문제의 해결이 될 것이다.

이소선 여사를 추억하고 마는 것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일 뿐 진정한 추모가 아니다.
이소선 정신을 실천하여 세상을 바꾸는 것, 바꾼 세상을 하늘의 이소선 여사에게 보여 드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추모의 정이다.

이소선 여사는 말씀하셨다.

“살아라. 살아서 싸워라. 싸워서 바꿔라.”

2011년 9월 6일

김 근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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