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3 08:00 김삼웅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유성호

 

김근태는 흔히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그래서 2011년 말 별세했을 때, 생자(生者)들은 입을 모아 그에게 ‘민주주의자’ 라는 헌사를 붙이고, 장례를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치렀다. 명색이 민주공화국에서 ‘민주주의자’는 모든 성원에게 주어지는 보통명사일 터인데도 유독 김근태에게 주어졌다. 이 헌사가 돋보이고, 그의 고유명사가 되다시피한 것은,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파행과 불구성을 말해준다.

그가 성장하여 활동한 기간에 겪은 군부독재 30년은 민주주의가 처절하게 유린되는 반이성, 야만이 지배하는 몰상식의 시대였다. 그 시대에 김근태는 결코 관념적인 민주주의론자가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파수꾼이고 수호자 노릇을 하였다. 그래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고, 그로 인해 긴 세월을 병마에 시달리다가 홀연히 떠났다.

그는 불의에 저항하고 압제와 싸웠다. 청년들을 조직하고 동지들과 연대하면서 바빌론의 철옹성에 불을 질렀다. 그는 용기가 있었고 담력이 남달랐다. 무인(武人)의 기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때문이었다.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15호 조사실앞에 14일 오후 조화가 놓여 있다. ⓒ권우성

 

짧다고도 길다고도 하기 어려운 64년의 생애, 특히 청년기와 중년시절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기간이었다. 동시대의 인물들 중에서 그만큼 치열하게 싸우고, 처절하게 육신이 망가진 ‘민주인사’도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분신ㆍ투신ㆍ자결ㆍ의문사 등 숱한 의열사들과 같은 반열에서 김근태를 ‘민주화의 화신’ 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김근태에게는 ‘햄릿’ 말고도 몇 가지 별명이 따랐다. ‘공소외(公訴外)’ ‘국제신사’ ‘김진지’가 그것이다. ‘공소외’는 독재시대 조영래ㆍ장기표ㆍ심재권 등과 반정부 시위를 도모하다가 이들은 체포되고 용케 피신했을 때 검사의 기소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독립운동가 출신 백봉 나용균 선생을 기려 제정된 ‘백봉 신사상’의 단골 수상자일만큼 언행이 신사적이다. 일반적으로 투사와 신사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그에게는 이것이 가능했다. 독립운동가 중에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은 투사이면서 신사의 이미지를 갖는다. 어느 시인의 표현을 차용하면,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차서 / …”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찬 김근태는 투사와 신사의 모습이 불편하지 않게 공존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세속의 KS출신에 민주 투사이면서도 뽐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험한 말이나 함부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진중하고 소박하고 겸손하고 진지하였다. ‘김진지’ 의 별명은 ‘햄릿’과도 연관이 닿는다. 행동하지 않는 진지함이란 자칫 햄릿이 되기 쉽지만, 누구도 그를 일러 실천성 없는 관념론자라 말하지 않는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장례위원을 맡은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공보실장이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지난 1988년 9월 3일 서남 민청련 창립대회에 참석한 고인의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은 고인이 창립대회에서 민중운동의 진로에 대해 강연하는 모습). ⓒ유성호

박정희가 짓밟은 헌정을 다시 짓밟고 광주학살을 통해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5공의 독기가 시퍼렀던 1983년 김근태는 공개적으로 살인 정권에 도전장을 보냈다. 민청련의 조직이 그것이다. 민청련은 5공체제 등장 이후 최초의 공개적인 반정부 청년조직이었다. ‘김진지’와 그의 동지들은 오랜 진지한 사유 끝에 민청련의 상징으로 두꺼비를 내걸었다. 양서 동물로서 독성이 강한 두꺼비는 뱀에게 잡히면 죽지만 뱀 역시 두꺼비의 독성 때문에 죽는다. 하지만 두꺼비 새끼들은 그 안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자란다.

실제로 민청련은 5공이라는 뱀파이어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그 대신 독사의 뱃속에 들어간 김근태는 남영동의 지옥에서 오랜 ‘짐승의 시간’을 보내어야 했다. 일찍이 죽음을 대면했던 사람이다.

그는 민족모순과 시대모순이 활개치는 시절에 젊음을 보내면서, 그리고 ‘제도적 약탈’에 민중의 삶이 고통받는 시대를 살면서 뜨겁게, 불꽃같이 저항하였다. 작은 체구에서 불같은 열정이 치솟았다. 혁명가들의 생애가 그렇듯이 독재시대 그의 삶에는 비장감이 서렸다.

김근태는 3선 국회의원, 원내대표, 당대표, 보건복지부 장관 등 정계에 투신한 이래 세속적인 출세를 하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다지는 큰 역할을 하였다.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노인요양보험을 제정하고 암환자 진료의 본인부담률을 10%로 낮추는 등 민주주의, 통일 등 거대 담론과 함께 서민들의 복지에도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그는 본디 서민출신이고 서민과 함께 살아왔다.

하지만 그의 꿈이 채 영글기도 전에 ‘민간 독재자’가 나타나서 역사를 87년 이전 체제로 되돌리고, 그는 병마에 쓰러졌다.

김근태는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다가 2011년 12월 30일 눈을 감았다.
송건호ㆍ리영희 등이 겪었던 그 증상이었다. 체포 26회, 구류 7회, 5년 6개월에 걸친 두 차례의 투옥과 숱한 가택연금과 수배 …. 망국기 독립운동가들이나 겪었던 험난한 길을 그는 해방된 나라에서 겪게 되었다.

김근태는 대단히 겸손하고 성실한 품성이었다. 공사 생활에서 깨끗하고 정직한 정치인이었다. 지극히 가정적이고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그만한 정치적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재산을 모을 줄 몰라 부인은 항상 생활에 쪼들리고,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에는 그 흔한 자동차 한 대 굴리지 못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그는 야권의 누구보다 개혁성이 강한 진정성의 지도자였다. 장준하를 닮은 데가 많았다. 그는 어디서나 허투루 말하지 않고, 야당 정치인으로서 언론플레이용 강성 발언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면서 의회주의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진짜배기 민주주의자였다. 이승만으로부터 군부독재 그리고 민간독재에서 신줏단지처럼 모셔온 국가보안법 등 악법을 폐기하고, 외세가 갈라놓은 조국의 분단을 이어보려는 큰 꿈을 간직했던, 우리 정계에서 흔치 않은 한반도의 미래를 구상하는, 진정성의 정치인이었다. 그러던 그는 “2012년을 점령하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ㆍ중동의 아랍국가에서 민중들이 독재자와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을 때, 반독재 민주화의 ‘원조(元祖)’ 격인 한국에서는 ‘민간독재’가 극성을 부렸다. 여기에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의 망령을 불러들이는 ‘초혼제’가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의 거대한 동상이 다시 세워지고, 박정희의 호화판 기념ㆍ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경상도 어디선가는 ‘전두환공원’이 만들어졌다.

벤 알리(튀니지 전 대통령), 무바라크(이집트 전 대통령), 카다피(리비아 전 대통령)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다가 분노한 시민들에게 쫓겨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비슷한 시각, 한국에서는 60여 년 전과 30여 년 전에 죽은 독재자들의 망령이 부활하는 모습을 병상에서 지켜보면서 김근태는 “그동안 헛 살아오지 않았는가!” 라는 자괴감을 갖게 하고,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김근태는 “2012년을 점령하라”는 피울음을 유언처럼 남기고 갔다. 그리고 지역구민들은 그의 ‘바깥사람’ 인재근을 의회로 보냈다. 김근태의 부음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국민이 때이른 그의 죽음을 안타까와 했다. 그의 많은 동지와 후배들이 빈소에서, 영결식장에서 고인의 유지를 잇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발리바르는 조국해방전선에 나서면서 선서하였다.

“나 자신의 명예와 하나님의 이름과 조국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내 마음과 팔뚝은 스페인의 권력이 우리를 속박한 그 사슬을 깨뜨릴 때까지 한 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

김근태의 <남영동> 표지 ⓒ중원문화

남한의 반독재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감옥에서 다짐하였다.

“지나온 그 짙은 어둠은 어렴풋하게 느껴진다오. 잠속에서 꿈속에서 짓눌려 오는 공포로 되살아나곤 하는구려. 그때는 숨을 몰아쉬어 방어의 채비도 서두르게 되고, 윤동주 시인의 맑은 눈물이 스며있을 듯한 벽에 기대어 밤하늘의 별을 끌어안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오.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나가고 있는 중이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지도자 문익환 목사는 1980년대 중반에 이미 <김근태 동지를 알자>고 광야에서 목메이게 외쳤다. 아직 대중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 시점이다.

김근태 동지는 이제 나이가 겨우 마흔을 갓 넘었지만 그는 이미 우리가 깊이 알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80년대 민족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나아가 90년대 민족사를 구상하고 전망하는 데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에 그치지 않고 이미 그는 민족사의 핵심에 서 있고, 앞으로도 그는 그 핵심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는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지난날의 투쟁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날의 투쟁을 미루어 앞으로 전개될 민족사에 그가 담당할 몫을 생각하면서 나는 우리가 알아야 할 미래의 인물가운데 그를 첫 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 (주석 6)


주석
6> <김근태씨의 고문 및 옥중기록 남영동>, 277쪽, 중원문화, 1987.(이후 <남영동>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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