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실패한 재판

 

86년 3월 6일 오전 10시 118호 법정.
"전부 유죄, 징역 7년 자격정지 6년."


서성 씨 입에서 이 말이 나오자 방청객 사이에서 여러가지 외침이 솟구쳐 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적군", "창피하게 여기시오", "건강하시오", 또 뭐뭐라고....


키 큰 교도관들과 경교대원들에게 둘러싸여 복도로 밀려 나서자,

공판에 여러 번 참석해 왔던 이들 사이에서도 제각기 한 마디씩 던져졌다.


"재판장이 대가 약하군",

"배짱이 없는 사람이야",

"너무 심하군",

"승진은 이제 따 논 당상이군" 등등이 내 귓전을 때렸다.

 

격려해 주는 말에 고마워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씁쓰레한 심정이 되어갔다.

서성 씨 등에게 희미하게 걸었던 것에 대한 배신감도 그렇거니와

"그래도, 그래도" 해 왔던 나 자신에 대한 자기 혐오감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3월 한 달 내내 속이 메스꺼운 상태에서 지냈다.

다른 사람들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어영부영 한 달을 보내 버렸다.

자기에게 불리한 판결을 하는 경우 어떤 누구도 사나운 심사가 되어 버릴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중에 하나일 테고, 그래서 조심을 했다.

투덜거리거나 주접을 떨어 지저분하게 되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지글지글 끓는 이 부아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낱 푸념에 지나지 않겠지만 몇 자 적어 속을 가라앉히려고 한다.


공판에 임해서 나는 더러운 손, 피로 물든 고문자의 손을 고발하기에 급급했다.

정치군부의 적나라한 범죄행위인 고문과 그 은폐로 말미암아 내 가슴 속에 쌓인 한을 풀어내기에 바빴으며,

영원히 비밀 속에 묻어 두려고 온갖 파렴치한 수단도 사양 않는 정치군부의 저 검은 속셈을 폭로하는 데에 안간힘을 썼다.

 

그리하여 이제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현저한 사실이 되었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증거로서 내 몸에, 맘에 남겨진 상처를 드러냈으며,

도대체가 잔인한 고문에 의해 각색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밝혀지기만 하면 아무리 개판인 오늘의 정치군부지만

속절없이 손 털고 물러설 수밖에 없으리라고 낙관했었다.

 

석 달 반 동안을 고통 속에서 완전히 차단당했다가 변호인, 가족들과 간헐적인 만남을 통해서 현실감각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지만,

그러나 워낙 격심한 충격을 받았던 나는 감정이 기복이 심했고, 그에 따라 상황판단에 통일성이 결어되어 있었다.

즉 바깥 사회에서 계속되고 있는 강도 높은 민주화 요구 열기에 따라 상당히 들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일단 날카로운 정점이 되어 있는 사건의 경우에는 그 공판 절차가 비교적 민주적으로 수행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결과에서 아직 변함이 없다"는 변호인의 조언에 나는 사태를 아주 낙관했었다.

 

이 사건이 무엇인지는 과정만 합리적이라면 그대로 드러날 것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투옥된 것이 처음이고 재판받는 것도 처음이어서 부담스럽고 서툴렀다.

그래서 나는 형사소송법은 물론 형법, 헌법교과서, 판례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방어를 해 내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변호인이 얘기한 "아직도 결과는 마찬가지다"라는 조언을 나로부터 변경시키겠다는 의욕에 차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내 꼴이 가관이었던 것 같다.

숲은 못 본 채 나무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그 사이를 이리저리 해매고 다닌 셈이었으니 말이다.

은근히 '설마 설마' 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창피하지만서도.....


85년 12월 19일 첫 공판 기일에 정치군부는 물론 재판부, 검찰, 변호인, 나, 가족, 신문기자, 민주화운동 인사 모두 대단히 긴장되어 있었다.

서성 씨는 별 일이 없었는데도 방청권 발행으로 공개주의 원칙에 일정한 제약을 가했지만,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을 밝히는 내 이야기에 제동걸지는 않았다.

 

제지 또는 제한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일부러 짧게 축약했었는데 그것이 후회가 될 정도였다.

이를 고맙게 생각한 나는 그 다음부터 설렁설렁 넘어간 점이 상당히 많았다.


사실 나는 공판정에서도 진술거부를 하고 싶었다.

이 사건은 정치보복이며 또는 내가 정치군부의 정치적 이용물로 활용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명백하고도 강경한 대처가 바로 묵비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 좋아하는 사람들의 '국가 형벌권' 이라는 것을 조롱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문 얘기, 그 은폐기도, 이것을 밝히지 않을 수는 없었고, 그 유일한 기회가 공판정이었으니 참 어려운 문제였다.

만일 판사가 내 얘기를 제지하거나 제한하였다면 그것으로 끝이었고,

재판에 대한 미련이나 회환 그리고 자기 혐오감이 이토록 깊지는 않았을 것이다.

 

판사 자신들에게 많은 부담과 심리적 압박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문 얘기 개진에 제한을 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그 이후에 묵비를 한다는 것이 인간적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으며, 뭔가 졸렬한 대처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정치군부는 이를 사건은폐로 몰아 선전할 것이라고 헤아려 묵비하지 않았다.

결과가 이렇게 되고보니 내가 한껏 조롱당하고 만 꼴이 되어버렸다.


나의 형이 맨 처음 면회왔을 때 건넨 말은 이러했다.

"국제적으로 네가 유명해졌다"고.

 

이에 대해 "이토록 참혹하게 매맞고 유명하게 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변호인들도 이와 비슷한 말씀들을 했다.

 

언젠가 형이 다시 면회왔을 때, "한국에서 매 맞지 않고 유명해진 사람이 누가 있느나"고 사람들이 말하더라고.

그렇게 말하여 "함께 웃어보자"고 말했다.

 

나를 격려하기 위해서 한 말인 줄을 잘 알면서도 면회실을 나서는 내 걸음걸이가 정상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부드럽게 느껴졌었다.

유명해진다는 것에 바람 든 풍선처럼 붕붕 뜰 정도의 철부지는 아니지만 그 말이 싫지는 않았다.

이런 소문에 휘말리지 않도록 내 딴에는 무척 조심하고 경계를 했었는데.....


아! 나는 어느새 교만해지고 방심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나를 못내 부끄럽도록 만들었다.

 

 

“손학규, 야당성·투쟁성 더 강화해야”

ㆍ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인터뷰

민주당 김근태 상임고문은 26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손학규 대표에 대해

“야당성, 투쟁성을 더 강화했으면 좋겠다”면서 “야당성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를 심각하게 고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상임고문은 최근 민주당의 KBS 수신료,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대응 문제를 지적하며

“(손 대표가) 단호하게 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아쉽다”며 “민주당은 불신 극복이 가장 큰 장애요소”라고 지적했다.

인터뷰는 김 고문이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 내수동 한반도재단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손 대표 체제의 당 운영을 어떻게 평가하나.

“애쓰고 고생하고 있긴 한데, 야당성, 투쟁성이 더 강화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민주당의 존재감, 손학규의 존재감이 국민에게 더 크게 다가가지 않을까.

스타일 정치를 말하는 게 아니다.

KBS 수신료 인상 문제는 ‘언론 생태계’ 문제와 연관된 것이다.

‘국민이 싫어하니까 반대한다’는 게 아니라 한국의 미래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하라는 것이다.

한·EU FTA를 여당에 합의해줬다가 바꾼 것도 마찬가지다.

단호하게 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아쉽다.”

 

- 현재 민주당이 가고 있는 노선은 어떻게 생각하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두 분의 그림자가 비춰져 있다.

두 분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다.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니 빈자리가 크다.

그 빈자리를 중도실용주의라는, 한국 사회의 작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치노선 흐름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4·27 재·보선 분당을 선거에서 손 대표의 승리를 놓고 당에서는 ‘중도실용주의로 이겼다’는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위험한 것이다.”

- 손 대표가 진보적이라고 평가하나.

“손 대표는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야당성을 어떻게 (확실히) 할 수 있느냐를 심각하게 고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민주당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사회적 흐름이나 정책 현안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한·미 FTA 문제다.

당시(2007년) FTA에 대해 판단이 잘못됐음을 국민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성이 생긴다.

불신 극복이 민주당의 큰 장애요소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도 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희망의 버스에 참가하고 있는데,

이런 비정규직 문제는 모두 불완전한 경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도 진정성을 갖고 추진해야 한다.”

- 올 10월로 예상되는 전당대회가 민주당에는 어떤 의미인가.

“이번 전당대회는 범야권을 아우르는 대회가 돼야 한다.

‘통합’으로 아우르면 훨씬 더 좋고, 통합이 안되면 어떻게 해야 한나라당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는가를 정해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한다.”

- 최근 한나라당이 진보적 정책으로써 ‘좌클릭’한다는 평가를 받는데.

“전체적으로는 좋지만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의 지지 영토가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고민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데 이를 긍정적인 모멘텀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 야권에서 내년 선거를 앞두고 연대냐, 통합이냐를 두고 입장이 갈린다.

“우리는 이미 나름대로 정답을 갖고 있다.

통합이 되는 게 더 좋다.

그것이 한나라당의 일대일 구도를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한나라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민생 문제도 절박하다.

무상급식처럼 진보적 정책이 국민에게 가려면 통합해야 한다.”

- 범야권 통합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보나.

“우선 진보세력이 큰 통합을 이루는 것이 전체 야권대통합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닮았고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먼저 뭉치는 게 의미가 있고, 필요하다고 본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은 1987년과 1997년에 버금가는 대전환의 시기다.

고민해야 한다.

지난 4·27 김해을 재·보선처럼 후보단일화를 하고도 지면 곤란하다.

후보단일화는 한나라당을 다시 제1당으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통합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 결국 제1야당인 민주당이 결단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통합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있을까.

“내년 총선·대선 승리를 위한 원탁회의를 만들어 먼저 합의가 가능한 정책연합을 하는 게 좋겠다.

결국 후보단일화 문제인데 우리 입장에선 왜 어려운지,

진보정당들은 왜 불가피하게 후보단일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지 원탁회의에서 토론하고, 이를 국민에게 전해야 한다.

그래서 합의를 모으는 방향이 필요하다.”

- 야권통합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계획인가.

“기도하고 호소할 생각이다.”

-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평가한다면.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신뢰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국가지도자로서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나라의 지도자는 동정심과 과거에 대한 향수로 뽑아서는 안된다.

그가 국가지도자가 되면 우리 국민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또 받을 것 같다.”

- 이명박 대통령 임기 4년차다. 어떻게 평가하나.

“첫 개각부터 ‘고소영·강부자’ 인사를 했다.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하거나 불가피했다고 보는 것 같다.

이 대가가 우리 사회 큰 상처로 올 것 같다.

레임덕은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민에게도 힘든 것이다.

국력의 낭비다.

마땅히 스스로 이번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후보자 지명은 거둬들여야 한다.”

- 요즘 무슨 일에 열중하고 있나.

“제일 많이 하는 것은 노는 것이다.

운동을 주로 한다.

축구를 좋아하는데 요새 골이 잘 안들어가서 슬럼프다.”

- 내년 총선에 출마할 건가.

“그럴 생각이다.

내년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이루는 데 역할을 하고 싶고,

대선에서 또 정권교체를 이뤄 복지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하고 싶다.”

<안홍욱·박홍두 기자 phd@kyunghyang.com>


경향신문 인터뷰_2011년 7월 27일자
입력 : 2011-07-26 22:01:39수정 : 2011-07-26 23:59:43

 

5. 서울 구치소의 겨울



지난 겨울을 지독히도 추웠다.

더구나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버림받은 것 같은 이곳 감옥이 춥지 않을 리는 없는 것이지만,

나는 정말 두 다리 와들와들, 온몸을 떨면서 지내 왔다.

나는 병동 아래층 맨 끝, 북쪽 방에 밀어 넣어졌다.

방의 북쪽 벽에는 얼음이 빙판처럼 깔리고, 저녁 형광등 불이 깜빡거리며 들어오면

얼음은 비수처럼 새파랗게 곤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매트리스 밑은 흥건하게 습기가 차 한겨울에도 곰팡이가 슬고,

두 겹 비닐로 막은 창문은 매서운 칼바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습기가 차다고 가막소 간부들에게 얘기해 봐야 헛일일 뿐이고, 우이독경이었다.

칼날처럼 매섭게 얼어붙은 벽을 가리켜도 그것은 한낱 엄살일 뿐이고 마이동풍이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아무 소리도 없었던 것과 진배없었다.

내 얘기는 처음부터 귀를 꼭 틀어막도록 지시를 받았거나, 의논하여 합의 결정한 것으로조차 보였다.

85년 9월 4일 미명,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꺼내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던 나를 변호인들이 처음 만난 것은 3개월 5일만이었고,

내 처와 형제들은 그러고도 열흘 뒤 첫 공판이 열린 다음 날부터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뜨거운 눈시울, 매캐해 오는 콧속, 그리고 치받치는 목메임에서 그냥 뜨겁게 쳐다보다가,

그러다가 말문을 열어 고문에 대해 지칠 때까지 얘기를 헀다.

 

이러기를 며칠 한 후, 당시 내 몸이 워낙 안 좋고 보행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데다가

날씨마저 혹독하게 추워 걱정이 된 가족과 변호인들은 내 감방사정을 자꾸 물어보았다.

 

망설이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얘기를 했다.

사실대로 말하면서 나는 이를 견디어 내기로 작정하였음을 밝혔고,

내 방안의 추위와 얼음에 대해 문제제기하지는 말라고 웃으면서 얘기했다.

헌데, 이튿날 구치소 직원 두 사람이 내 방에 들어와 북쪽 방벽을 만져 보고,

곰팡이가 아우성치고 있는 매트리스를 들쳐 보곤 조금은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울러 넌지시 방을 옮길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나갔다.

 

그 후 간부 한 사람이 올라와 전방 얘기를 꺼내기에 "인심 한번 쓰려면 후하게 쓰라"고 말했다.

마침 건너편인 7방은 비어 있고, 공간도 비교적 넉넉하여 그걸 요구했다.

내가 있는 8방은 겨울 해와는 완전히 원수지간으로 햇볕 꼬랑지 하나 구경할 수 없었지만,

이 7방은 오후가 되면 햇볕이 비쳐 들어 왔다.

내가 7방에 눈독을 들인 이유는 바로 이 햇볕 때문이었다.

외로움과 추위 속에서 햇볕은 은혜처럼 축복같이 날아드는 것이다.

낙관적인 느낌도 동반해 오고.....

이유는 언제가 그렇듯 잘 모르겠지만, 난색을 표하면서 8방과 거의 똑같은 조건인 9방을 말하였다.

이들이 방을 바꿔줄 생각을 한 것은 아직도 학대행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비난이

바깥 사회에서 제기될 근거에 대한 우려 때문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나는 9방으로 옮김에 대해서는 거절했다.

얼마 전까지 징벌을 받던 사람이 살던 방이었고, 정신 질환자를 수감하느라고 부착했다는 조그만 구멍이 뚫린 쇠철판을 붙이고

완전히 밀봉해 놓은 컴컴한 방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추운 북풍 들이치는 8방에 그냥 있는 것이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8방도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고 꽉 막힌 정신질환자 수용독방이었다.

내가 이 가막소에 온 즉시 8방에 들어갔는데, 그렇게 숨통이 조여지는 듯한 어두움 속에서 두 달여를 보냈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이 8방에서 고문으로 인한 상처로 끙끙 앓으면서 나는 요구했고, 호소도 했다.

결국은 화를 잔뜩 내고서야 11월말 경에 쇠철판을 제거하고 바람이 통하는 창문을 얻어냈다.

그토록 어렵게 얻어 낸 흐르는 바람을, 창문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눈치 챈 그 사람들은 9방을 뜯어 고쳐 여닫을 수 있는 창문을 닫고 쇠철판을 뜯어냈다.

12월말 경 9방으로 이사했다.

추위야 별 차이가 없었지만 맨살로 부딪치는 북벽을 갖지 않는 것이 기분상 훨씬 좋았고,

무엇보다 습기가 8방보다 덜차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병사 하 9방의 내 매트리스 밑에는 습기가 고이고 곰팡이가 피어나지만,

이곳은 큰 체하는 간부들이 말하는 특별 권력관계가 작용하는 곳이니까, 여기는 사회가 아니니까,

그까짓 습기와 그 정도 곰팡이는 더불어 같이 살기로 결심을 했고 그 심정 탄탄히 지켜내고 있는 중이다.

12월 중순 경쯤일까, 병사 아래 위층 15~16개 방 모두에 조그만 구공탄 난로를 하나씩 피워 주었다.

그런데 나 혼자 그 혜택에서 제외되었다.

병사 하 9방은 지옥이고 나머지 방들은 천당처럼 바라다 보이기도 했다.

다른 방 사람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녹이고 가슴의 외로움도 녹였으며,

성령처럼 내려 앉는 햇볕에 다시 행복해지는 모습을 나는 본 것 같았다.

 

거기에다 얼굴이 벌개지는 난롯불을 한 가운데 두고 둘러앉을 수도 있었으니, 끝내주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아픈 분들 방에 난롯불을 놓은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나만 빼놓은 이 서러움,

그 옆에서 어느 순간 번쩍하는 숨겨진 적대감을 보곤 내 가슴의 추위는 더 매서워져 갔다.

 

사람이 계속 바뀌어서 정신 질환자들이 7방 또는 8방으로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과 나는 지난 겨울 내내 영원히 저주받은 동토의 나라에서 살았다.

어느 땐가 꼭 두 번, 내게도 난로 좀 놔 달라고 간부들에게 요구를 했다.

 

모 계장은 이렇게 말했다.
"난로는 병약자들에게만 놓아주는 것이다.

당신같이 건강한 사람까지 놓아준다면 전 사동 재소자들에게 다 놓아주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예산이 없다."

순간 나는 몸 속에서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부들부들 노여움으로 몸은 떨려오고 '당신도 인간이냐, 나의 부서진 이런 모습을 보면서,

늘상 누워있는 나를 당신의 두 눈으로 보지 않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애써 목소리를 누르면서 무겁게 뱉어냈다.

단식과 아우성 등 싸움과 싸움을 통해서 학생들이 따낸 보온 수통도 나는 제외시켰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지급했다고 한다.

85년 12월 13일, 고문당할 때 생겼던 발뒤꿈치 상처딱지를 폭력적으로 강탈해 가던 날,

이미 지급했던 감옥 담요 4장조차 도로 빼앗가 간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비인도적 처사,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대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지만

난 당시 싸울 기력이 없었다.

그저 물러서서 이미 입은 상처가 더 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인간 도살장이었던 남영동에서 이곳 서대문구치소로 온 9월 26일 이후 한 일주일쯤 지나서였을까.

9월 13일에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은 이후 나는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식욕은 물론 없고 이가 모두 흔들리고 아파서 씹을 수 없었고, 소화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여기 가막소에서는 죽을 나눠 주었다.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 있담.

그래도 여기는 살만한 곳이구나' 하면서 죽을 오랜 시간 걸려서 천천히 먹었다.

그런 나에게 이 모 주임이라는 사람이 병사 하층을 담당한 사람을 시켜,

또 담당은 이른바 소지를 시켜서 '죽은 떨어졌으니 밥을 주라'는 지시를 했다.

별안간 밥이 나와서 소지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담당에게 얘기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애걸하다시피 죽을 달라고 매달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없다'고 차갑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밥을 먹으려 해도 먹을 수가 없어서 국물만 좀 마시고 짬밥으로 고스란히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시를 받은 담당은 복도 내 방 옆에 몰래 붙어서 밥을 먹나 숨어서 지켜보았고,

식구통으로 나오는 짬밥에 손이 갔는지를 확인하는 숨결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하루 정도 나에게 밥만 주었다.

그러니까 강제로 하루를 굶은 꼴이었다.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이 담당은 투덜거리며 내 방 옆을 떠나갔었다.

 

아! 그때 이 사람이 내뱉은 한 마디, 그것은 내 가슴에 상처를 만들어 버렸다.

듣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이 담당은 나에게 "씨발 새끼"라고 욕을 하면서 멀어져 갔는데, 내가 왜 이런 욕을 먹어야 하는지,

그것을 멀거니 듣고도 해댈 수 없는 나의 상시의 쓰러져 일어나지 못함이 아주 쓰라렸다.

나에 대한 조직적인 학대는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근래까지 이 상처를 잊지 못해 그 담당과 주임을 미워했었다.

이제는 용서하기로 작정을 해버려 괜찮게 되었지만.....

이 모 주임이라는 사람은 그 후에도 공연히 나에게 두어 번 시비를 걸고 욕설을 해대곤 했다.

구둣발 채로 내가 누워 있던 방으로 들어서기까지 했다.

간부인 자기가 순시하는데 내가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면서 모욕을 가했다.

내 몸과 마음의 상태가 누워있을 수밖에 없다며 양해를 구해도 막무가내였다.

멀쩡한 사람이 꾀병을 부린다고 욕을 하면서 나보고 애비도 없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나도 견딜 수가 없어서 같이 싸웠고, '불과 나보다 댓 살 많은 당신같은 애비도 있느냐!'고 조롱도 해주었다.

이 사람이 본래 냉혹하고 염치를 모르는 철판 깐 사람이기도 했지만,

위로부터 은연 중에 오는 모종의 신호에 맹목적으로 충성하고자 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참 우스운 것은 이젠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서 이 사람과도 그럭저럭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가막소 간부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멀쩡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의사들은 비교적 성실하게 진찰하려고 했다.

지금은 그만둔 어떤 의사 한 사람은 특히 더 그러했다.

일부터 나를 불러내서 살펴보고 약도 지어 주었으며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기도 했다.

 

나는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큰 약이었다.

당시 소생하는, 소생하려고 발버둥치는 나에게는 이 의사의 선의가 무엇보다 효험있는 치료였다.

그러나 이런 선의들이 자꾸만 차단되고 거부와 외면의 몸짓으로 돌아서 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가막소 의무과에서는 내게 10여병의 링거와 영양제를 놔 주었다.

처음 실려서 업혀 왔을 때 몇 병 맞고, 증거 보전 신청이 제출되었던 시점 이후,

사회적으로 내가 고문받은 사실이 알려진 이후 몇 번을 더 맞았다.

가끔 어지럽고 두통으로 시달릴 때는 그저 하루분 정도의 진통제, 아스피린, 수면제 등을 얻어먹고 견디곤 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건강하고 멀쩡한 사람으로, 다만 병사에 격리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내외에 발표되고 선전되었다.

의료보호 또는 도움으로부터 사실상 버림을 받았는데 나는 이것을 시정시킬 기력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도 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85년 9월초 남영동에서 전기고문, 물고문에 못견뎌, 나는 발가벗기고 두 눈이 가려진 채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면서

항복한다고 용서해 달라고 두 손으로 빌었다.

그때 고문자인 김수현, 백남은, 그리고 전기고문 기술자 잎에 번졌던 소리없는 웃음, 그 웃음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아니, 이 하수인 뒤에서 충혈된 두 눈으로 낄낄거렸을 이 폭력적 정치군부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인간 파괴자들을.......

그런데 나는 이들에게 살려달라고, 아니 곱게 죽여달라고 애걸복걸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이들 박해자들의 소매에 매달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두 번 다시 입지 않겠다고 말이다.

 

일제하에서 옥사했던 윤동주, 이육사를 그리며 나는 시인도 못되고 이 서대문 가막소에서 죽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죽어 갈지도 모르는 내 모습을 단단히 지켜보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인간적 긍지를 다시 세우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그리고 올바른 의료 제공,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싸워야만 할텐데, 당시 나는 심신이 거의 무너진 상태였고

기력이 없었으며, 고문당할 때 엄습해왔던 공포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대항할 수가 없었다.

또 그런 부딪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상태가 악화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병사 하층 8방의 내 이불 속 깊숙이 들어가 그 속에서 혼자 깊게 앓았던 것이다.

다만 10월초, 중순경부터 내 발뒤꿈치에 났던 상처, 고문으로 인한 유일한 외상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고 의사와 이곳 간부들도 보자고 했다.

정치권력은 의사의 진료행위를 이용하여 고문의 유일한 외적 증거를 수시로 확인하고자한 것이다.

처음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도 않았던 부위에 대해 한두번도 아니고 여러 번 여러 사람이 보자고 하는 데에도 넌덜머리가 났다.

그리고 그 가증스러움이라니!

변호인단이 제출한 고문 증거보전 신청과 내 처 인재근과 민주활동가 여러분의 고문 폭로 규탄 때문에

정치군부의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어떻게 해서든지 고문을 완벽하게 은폐하기로 결정내렸을 것이다.

만일 정치군부의 열렬한 희망과 기대에 반해 나에게서 어떤 충격적인 음모나 내막이 폭로되었다면

그들은 뭐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 하며 태연스럽게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더우기 고문의 역력한 증거를 내 처인 인재근과 이을호 씨의 처 최정순, 김상철 변호사

그리고 여러 검사들이 두 눈으로 명백히 보았고 이에 따라 민주인사 여러분들의 뜨거운 분노와 항의에 부딪쳤던 것이다.

 

이른바 국가보안법으로 제대로 엮지 못했던 것이다.

궁지에 몰린 정치군부는 단단히 결심했을 것이다.

고문을 완전히 은폐하고 관계 언론을 동원해서 내 주위에 수상쩍은 분위기를 형성하도록 말이다.

이야말로 '방귀 뀌고 성내는' 격이었다.

철저하고 완전하게 은폐하기 위해서 나는 아프지 않아야 했고, 치료를 받지 말아야 했으며, 받을 필요 또는 없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 동안은 누구와의 만남도 봉쇄되어 고문사실과 그 증거가 확인되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발 뒤꿈치 상처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가족과 변호인은 물론 이곳 가막소 내의 누구와도,

일반 제소자까지 절대로 말을 주고 받지 못하도록 봉쇄되었다.

내가 있던 8방의 앞 7방과 9방은 비워 두거나 정신이상자들만 수용함으로써 그 차단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던 것이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4>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기사입력 2011-07-05 오전 9:10:33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을 만났다. 김근태 고문은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리고 지난 15, 16, 17대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력 정치인이기도 하다. 또한 현재 민주당 진보개혁모임의 대표로서 민주당의 개혁을 위해 여러 세대 정치인들과 시민사회를 규합하고 이끄는 수장이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수식어보다 그를 더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지난 겨울 방현석의 '당신의 왼편'에서 만났던 그 김근태를 만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신의 왼편'은 1980년대 반독재와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했던 사람들의 아픔, 사랑, 고뇌들에 대한 가슴 저릿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던 소설이다. 역사기록물이 아닌 소설에 특정인이 실명으로 언급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그 소설에 김근태가 실명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엄혹했던 시절, 김근태란 존재는 그만큼 어떤 이에게는 희망을, 또 어떤 이에게는 투쟁의 단어를 떠올리게 했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그를 만나러 갔다.

인터뷰 내내 그는 매우 고뇌에 찬 모습으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그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특히 민주당의 개혁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단호했다.


"민주당이 반한나라당 전선에 자신을 위치 짓고, 현 정권을 심판하는 국민 정서에 안주해서 그로 인한 승리를 향유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서민과 중산층을 위하는 정치노선과 정치를 과감하게 실천해야 한다. 정권교체를 위해선 야권과 한나라당이 일대일 구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결단을 해야 한다. 기득권을 양보하는 모습. 또 진보정당들과 시민사회와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결단하고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냐는 드러날 것이다. 그 토론의 과정에 충실하게 임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민주당 내에서 대혁신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프레시안(최형락)

그리고 무비판 · 무검증 하의 박근혜 대세론이 가져올 위험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표했다.


"박근혜 대표의 경우 지난 대선 후보 경쟁에서는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를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평생 맞춤형 복지, 생애주기형 복지 등을 주장한다. 이 두 주장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 사이의 간격을 검증하고 물어야하는데, 언론도 그렇고 전문가들도 그렇고 국민들도 그렇고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이 간격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거야말로 포퓰리즘이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이 평사원에서부터 기업의 CEO가 되었기 때문에 서민과 충산층의 삶을 잘 이해하고 이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지'라는 기대 속에 대통령에 당선 되었듯이, 그럴 것이라는 추측 속에 검증 없이 지도자를 뽑는 과오를 2012년에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 그는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주요 정치인으로서 여러 번에 걸쳐 자기 반성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잃고 중산층과 서민들이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든 것에 말할 수 없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가 처한 구조적인 한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의 실수와 실패로부터 온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을 극복할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나름대로 반성하고, 고민을 많이 하는데 잘 안되고 어렵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그의 사과를 받고 있는 것 같아, 또 왠지 꾹꾹 눌러둔 그의 속울음을 듣고 있는 것 같아 미안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땅의 청년들에게 죄송스럽다는 말과 함께 라는 '"함께 분노하고 계속 싸우자"라는 이야기를 남겼다.


"사실 지난 정권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제도를 물려준 것이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청년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래서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 하지만 청년들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정치인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도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하고 도전을 해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것을 극복할 힘이 생긴다. 분노할 것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행동이다. 나도 함께 분노하고 계속 싸울 것이다. 분노하자."

그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내내 1980년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희망을 싹틔웠던 그의 분노가 2011년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가슴에도 동일한 희망의 불씨가 되어주길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다.

자유에 대한 생각을 여쭙고 싶다.

ⓒ프레시안(최형락)
근래에는 자유에 대한 생각을 좀 하는데 사실 이전까지는 자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온 것은 아니다. 우리세대에 자유라 함은 타는 목마름 내지 그리움이었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자유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났다. 이발사가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상황, 말하자면 말할 자격이 박탈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유라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존재케하는 그 어떤 의미였었다.

하지만 자유주의하면 좀 느낌이 다르다.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사회 각계각층이 자유롭게 사유하고, 각자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주화에 의해 확보된 자유의 공간 속에서 이른바 권력, 재산 등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권한과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한 이념적 도구로 자유주의를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 하면 연상되는 것이 부패한 언론, 검찰, 재벌, 관료, 뉴라이트 등이 연상이 되어서 좀 상종 못할 그룹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계의 지도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고민하지 않은 채, 국민들의 정서는 전혀 고려치 않고 뚱딴지 같은 이야기만 계속 하고 있다. 최근 언론에 드러나는 것처럼 자기들이 내는 법인세와 재산세는 감세를 지속할 것을 요구하면서 학생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반값등록금 요구는 포퓰리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단적이 예이다. 오히려 재벌은 감세로 이익을 누리고,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할 사회적 책임인 교육투자는 국민고통으로 전가하는 이중적 무임승차자다.

국민들 속의 화합이나 통합, 타협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봉쇄하는 사람들, 이런 그룹들이 자유주의 깃발을 든다. 한 예로 한국의 검찰이 있다. 근래에 벌어지고 있는 저축은행사건에 대해 국민적 비판 여론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왜 발생했는지, 혹시 권력형 비리는 아닌지 등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경찰과 검찰 간의 수사권을 둘러싼 갈등에서 기선을 잡기 위해, 자기들이 보호해야 할 서민들의 고통을 볼모삼아 자기들의 권한을 확대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것은 국민들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연유 때문에 자유주의는 아직 한국사회에서 긍정적인 흐름을 갖추고 뿌리를 내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사실 자유인이라는 단어는 어려서부터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 학교 교훈이 자유인이었다. 이 단어에 담긴 함의가 너무 크고 복잡해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학교 조례 등에서 자유인이라는 구호를 외칠 때는 당혹스러웠다. 다만 교정에 4.19혁명 때 목숨을 잃은 분 두 세분의 기념물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앞에 서면 자유인은 저렇게 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유를 떠올리면 죽음이 연상되 곤혹스럽고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자유'하면 죽음을 연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위해 싸워왔던 것인가?

자유를 위해 싸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사실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한국사회가 낙원 같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좀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민주화 운동 내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공포가 있었기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는데, 민주화를 이루어내기만 하면 지난 100년 동안 수많은 희생과 고통을 겪은 한반도의 오천만 내지 칠천만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도래할 거라고 생각했다. 관념적으로 그런 희망과 기대를 가슴에 품고 '그렇다면 내 비록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것이 정말 보람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왔다.

그렇게 민주화는 나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화두였던 것에 반해, 자유는 민주화로 인해 얻게 되는 열매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즉, 민주화를 이루면, 그 세부 항목인 자유는 자연스럽게 획득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싸워온 것 같다. 그것이 민주화를 위해 싸워왔던 70년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자유에 대한 감각이 아닌가한다.

김근태에게 "자유란?",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자유는 우리세대에게 타는 목마름으로 그리워하는 대상이었다. 공포,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공포의 시대로부터 해방되기 바라는 것. 그렇게 자유는 소중하고 그리운 것이었다. 그래서 자유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가 없다면 생명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근황에 대해 여쭙고 싶다.


ⓒ프레시안(최형락)
운동을 열심히 한다. 놀고 땀 흘리고 운동을 많이 한다. 일주일에 한 반 정도는 도봉구에 내시 환관 묘 수백 개가 방치되어 있는 초안산에 올라갔다 온다. 요새 같은 날씨에 한번 올라갔다오면 땀에 흠뻑 젖는다. 주말에는 축구 동호인들과 함께 축구를 한다. 작년까지는 골을 꽤 넣었는데 요즘엔 골이 도통 들어가지 않아 고심이다.(웃음)

가끔 시간이 나면 지난 민주정부 10년을 돌아보고, 그 때 우리의 한계는 무엇이었고 실수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본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생각해보고 유사한 실패나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공부를 한다. 그런데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최근 4.27 재보선 결과와 관련하여 특별히 민주당에게 주문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2010년 6.2 지방선거와 올해 4.27 재보선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었다. 민주당에게는 정치적으로 축복된 선거결과였다. 하지만 두 번의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족해서는 안 된다. 사실 지난 승리는 민주당이 잘해서라기보다 부자정당인 한나라당을 심판하고자 하는 유권자들이 그 비판의 일환으로 민주당을 선택한 경향이 컸다. 따라서 민주당이 반한나라당 전선에 자신을 위치 짓고, 현 정권을 심판하는 국민 정서에 안주해서 그로 인한 승리를 향유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서민과 중산층을 위하는 정치노선과 정치를 과감하게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4.27 재보선과 지자체 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민생문제가 절박하다. 이 민생문제를 완화하고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당은 이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현 민생문제를 돌파해나가야 한다. 지금 반값등록금도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는 의무급식, 무상급식이라는 내용이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그리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정책을 민주당이 자신감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당이 중도진보적 성향을 띠긴 하지만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선택할 때마다 여전히 내부적으로 진통을 겪는 것 같다. 민주당이 진보적, 개혁적 정책노선을 선택하도록 하는 동력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나?

민주당의 정책, 또는 민주당을 견인하는 힘은 국민들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이번 4.27 재보궐선거는 비교적 성공적이었고 승리를 했다고 본다. 하지만 작년 6.2 지방선거 이후 치러진 7.28 재보궐 선거의 경우 민주당이 참패를 당했다. 국민들이 공감을 하거나 국민들의 가슴에 감동이 있다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선거로 드러난다. 그러나 정치공학적으로 문제를 풀고 접근을 하면 국민들에게 절대로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런 감동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기득권을 포기하는 모습에서 국민들은 감동을 받는다. 지난 4.27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순천에 무공천을 한 것 등에서 국민들이 야권 승리를 향한 민주당의 진정성을 느낀 것이 아닌가 한다. 감동은 그런데서 나오는 것 같다. 이번 4.27 재보궐선거도 한나라당 정권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라 생각한다. 그 배경에는 이명박 정부가 권력을 이렇게 사용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민주당이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선택하도록 견인하는 것은 민주당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회를 향한 국민들의 요구, 이를 추구하는 정당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민주당은 스스로 개혁하고 기득권을 포기하는 모습을 통해 국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준비하며 야권통합 논의가 활발하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내년에 총선이 있고 대선이 있다. 총선과 대선을 통해서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한 번의 정권교체, 다시 말해 세 번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절박한 민생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수출대기업에만 이롭고 국민들이 피부적으로 느끼는 물가는 폭등하는 고환율 제도나 부동산 버블의 원인이 되는 인위적 저금리 등의 정책을 고쳐 나아가야 한다. 정권교체를 통해서 철학과 마인드를 바꾸지 않으면 이러한 정책의 변화를 이루기 힘들고, 민생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보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경제의 구성주체 중에 재벌과 부자들을 우선 고려하고 있다. 진정으로 민생문제를 해결 하려면 경제정책운용의 철학적 기저를 거시지표 중심의 '국가경쟁력'보다는 국가 구성원 하나하나가 경쟁력을 갖추는 '국민경쟁력'에 기초하는 경제구조로 바꾸어야 한다.

한국이 놓인 국제사회 현실에서 보더라도 냉전 이후 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냉전이 지속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중국, 여기에 친미세력과 친중세력이 동아시아에서 갈등을 하고 있다. 한국은 상당한 딜레마에 놓여 있다. 한국은 그간 정치경제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확대 심화,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최근에 경제관계에서 중국과의 교역이 획기적으로 늘고 인적교류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는가, 물론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것만 바라고 이에 대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2012년 총선과 대선은 큰 변화, 즉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상과 관계를 고민하고 추진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정권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치비전의 정책연합을 기초로 통합과 연대의 과정을 이루는 원탁테이블의 구성을 통해 한나라당과 1:1구도를 만들어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많은 정치인들이 당장의 정치현황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반해, 국제적인 시각으로도 한국정치를 조망하시는 것 같다. 이유가 있나?


폼 잡는 거다.(좌중 웃음)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이라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한반도의 평화나 동아시아의 협력과 공동번영을 이루어 낼 수 있기 위해서는 중국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한 방향으로 치우친 정책은 실패로 돌아간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 상황 시 그에 대한 준비와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은 한반도의 밝은 미래를 위한 당연한 준비이고 최소한의 의무라고 본다.

동아시아 협력에 관련해서도 한국과 중국 일본은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이다. 천안함 사건 이후 일본의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가 좌절되었다.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에 의한 후쿠시마 원전 사태도 만약에 편서풍이 아닌 편동풍이 불었다고 한다면 한반도와 중국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2008년 미국의 리먼브러더스 금융회사 도산 이후 한국의 경제지표는 그나마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수출시장으로서 중국시장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을 고려하여 국제관계에 대한 정책을 고민하고 수렴해 나아가야한다. 미국과 중국이 동아시아 내에서 패권적 경쟁을 하게 되면 현재의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년 총선과 대선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협력과 공존, 번영의 시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정권이 되어야 한다. 6자회담과 같은 채널을 통해서도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그것을 디딤돌로 활용할 수 있는 고민도 함께 해야 한다.

현 정권이 그렇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그렇다면 한반도의 평화 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정권을 잡아야 할 텐데, 과연 정권교체가 가능할까?

국민들이 현 정권 및 여당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5년 전 참여정부, 열린우리당의 경우에도 민심을 잃어버렸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질적'으로는 지금이 더 악성인 것 같고, 민심을 잃어버린 '정도'로 보면 그 때가 더 심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은 민주당이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민주당이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권교체를 위해선 야권과 한나라당이 일대일 구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이 총선에서 다수당이 될 수 있고,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결단을 해야 한다. 어떤 결단인지는 국민들의 가슴 속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일정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결단을 해 낼 수 있어야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감동을 줄 수 있는 결단이란? 혹시 생각하고 있는 히든카드가 있는지?

히든카드 그런 건 없다.(웃음) 예를 들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난 4.27 재보선에서 순천을 무공천 했다. 김해를 결국 양보를 한 것이다. 또 한나라당한테는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분당 지역구에 민주당 대표인 손학규 대표가 입후보하는 것 등이 모여서 전체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된 것 같다. 기득권을 양보하는 모습. 또 진보정당들과 시민사회와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결단하고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냐는 드러날 것이다. 그 토론의 과정에 충실하게 임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민주당 내에서 대혁신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2012년 대선을 맞아 박근혜, 손학규 등 여러 인물들이 대선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 필요한 리더십을 꼽는다면?

ⓒ프레시안(최형락)
두 가지 기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압도적 다수의 사회경제적 약자, 그리고 아주 소수의 사회경제적 강자 간의 대타협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아닌 상호 존중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말 그대로 G2의 책임과 역량을 동아시아에서 건설적으로 기여하는 방안과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리더십이다. 또 6자 회담을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동아시아 협력에 기여할 수 있는 리더십, 이러한 비전을 갖고 이해하고 그 필요성을 채울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표의 경우 지난 대선 후보 경쟁에서는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를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평생맞춤형 복지, 생애주기형 복지 등을 주장한다. 이 두 주장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런 차이를 국민들에게 해명을 해야 하는데, 해명도 안 되고 설명도 안 되는 부분이다. 이 사이의 간격을 검증하고 물어야하는데, 언론도 그렇고 전문가들도 그렇고 국민들도 그렇고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이 간격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거야말로 포퓰리즘이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이 평사원에서부터 기업의 CEO가 되었기 때문에 서민과 충산층의 삶을 잘 이해하고 이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지'라는 기대 속에 대통령에 당선 되었듯이, 그럴 것이라는 추측 속에 검증 없이 지도자를 뽑는 과오를 2012년에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대선 시기가 되면 대권주자로 부각되어왔다. 대선과 총선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어떠한지?

대선은 밑천이 다 떨어졌다.(웃음) 중요한 것은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여당의 중요한 정치인 중 한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잃고 중산층과 서민들이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든 것에 말할 수 없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가 처한 구조적인 한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의 실수와 실패로부터 온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을 극복할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나름대로 반성하고, 고민을 많이 하는데 잘 안되고 어렵다. 또 중요한 점은 지도자가 중요하지만 메시야 같은 지도자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한국사회가 이전의 양김처럼 그런 정치적 영웅을 만들어내는 토대는 이미 사라졌다.

개인의 리더십보다는 '우리사회가 정말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가, 또 어떻게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고 그에 대한 대안을 분명히 제시하는 정당과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또 정당과 지도자들은 스스로 그렇게 할 때, 국민들에게 자신을 선택해 달라는 요청과 부탁을 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지만 국민들로부터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미래상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오래 전부터 한국은 작은 미국이 아닌, 큰 스웨덴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미국처럼 소득도 높고 영향력도 강한 미국이 되자는 바램이 한국의 엘리트 및 시민들 사이에 두루 퍼져 있는 것 같다. 많은 엘리트들이 자신의 출신 대학이 미국인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미국화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국민들도 미국처럼 잘 살았으면 좋겠고 영향력이 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미국 시스템이 가져오는 빈부의 격차 심화나 이로 인한 사회불안정성은 사회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다. 반면, 스웨덴은 금융위기 이후에도 경제성장률이 괜찮았고 국민들 사이에서 화합과 통합이 어느 국가보다 잘 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스웨덴 유형은 언제부터 생각하셨는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2006년도였는데 스웨덴 모델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이전인 1998년도부터였다. 1998년도에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취임사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배정되었다. 거기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두 수레바퀴로 합의를 구하자'는 주장을 당선자가 했는데, 당선자가 없는 자리에서 '민주주의와 민주적 시장경제'라고 하자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혼자 주장하다 물러서고 말았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시장경제,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불안전성 이런 것을 다른 수레바퀴인 민주주의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즉, 시장이 가진 폭력성을 경제시스템 내에서 제어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민주적 시장경제다. 김대중 대통령도 71년 대통령 선거 때는 대중경제라고 해서 시장경제의 폭압성, 폭력성을 제어하기 위한 제어장치를 두자는 주장을 했었다.

그래서 1997년 IMF 위기가 왔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IMF가 요구하는 것은 마치 미국과 유럽의 채권은행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국민들을 희생시키는 것이라며 재협상을 요구했다가 기득권 세력에 총공격으로 대선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래서 결국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IMF와 맺은 합의를 꼭 지키겠다고 서명하고 말았는데 굴욕적이었다. 이런 과정들을 겪으며 스웨덴 모델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의식이 당시 일부의 경제학자들에게도 있었는데 한국 사회 전반이 미국식으로 경제시스템을 만들자는 생각이 팽배해서 논의가 힘을 받지 못했다. 근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확산력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다.

ⓒ프레시안(최형락)

말하자면 미국식 모델보다 유럽식 모델이 우리에게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 시스템보다는 북유럽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 더 적합한 모델이라고 보는 이유는 우리에게 힘이 없는 다수와 가진 것이 많은 소수가 대타협을 해 나아가자는 시스템이 다른 그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유럽 시스템에는 사회협약, 사회합의의 구조와 정신이 배겨있다. 그런 제도들을 통해 우리 사회시스템에 대해 논의를 함으로써 우리의 제도적 시행착오를 줄이고 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토대로 한국 고유의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데,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 사회 시스템을 보니 한국의 시스템으로도 적합하다는 생각이다. 스웨덴 인구가 천만명 정도인데 한국은 오천만명, 남북한 합치면 칠천만명 정도되니 동아시아의 큰 스웨덴이 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미국식이냐 스웨덴식이냐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아직도 미국이면 옳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미국 시스템 중에서 배워야할 것들도 많이 있지만 잘못한 것들도 많다. 미국은 스스로 예외주의 국가임을 자청하며 이라크 전쟁도 안보리의 합의 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의식 없이 미국에 대한 관성적이고 무비판적인 선호 혹은 지지는 곤란하다.

유달리 대타협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시는 것 같다. 솔직히 나와 뜻이 다른 사람들과 싸워 이기는 것보다 그들과 대타협을 이뤄내는 것이 더 힘든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승리를 얻어내는 것보다 대타협을 이뤄내는 것에 더 고도의 정치력이 필요한 것 같다. 한국 사회의 여러 세력들 간의 깊은 골을 극복하고 대타협을 이룰 방안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는가?

연세대학교의 모 교수가 '한국 사회같이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적 상황이 발생되지 않는 것이 참 기적이다'는 말을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혁명적 상황이라는 것은 적대적 관계가 노골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소득불평등, 재산불평등 정도가 악화되고 더욱이 부자감세로 더 악화되고 있다. 노인의 46% 정도가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고, OECD국가 중 한국의 자살률은 1위이다.

이런 고통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은 더욱이 분단 상황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적 분위기가 고조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이런 고통스런 사회를 지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각자 양보를 해가며 절충과 타협을 해 나아갈 것인가를 물어보았을 때 절충과 타협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나아가는 것이 훨씬 훌륭한 선택이다. 혁명적 갈등 상황은 인간을 망가뜨린다. 이런 고통스런 사회를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변화는 기본적으로 힘이 있어야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정치인들은 어떻게 이런 힘을 집결시키고 운용해야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최근 관심사나 흥미를 가지고 계신 것은?

요새는 축구를 하는데 골을 못 넣어 속상하다. 컨디션이 안 좋거나, 킥을 하는 순간 발의 각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를 운동장에서는 고민을 하는데 막상 운동장을 벗어나면 또 잃어버린다. 어쨌든 골이 들어갔으면 좋겠다.(웃음)

그리고 우리 사회가 자유롭게 꿈을 꿀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1등부터 100등까지 서열화해 놓고 1등이 나머지 99명을 먹여 살린다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100명 모두가 각각의 고유한 꿈을 꿀 수 있는 넉넉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요즘 계속 생각하고 있다.

결정적일 때 골이 잘 안 들어가서 고민이라는 답을 들으니 지난 몇 번의 선거가 연상된다. 축구라는 것이 전후반 내내 열심히 뛰어도 골을 못 넣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인데, 선거를 축구라 비교하면, 매번 대선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대선후보가 되지 못했던 것이나, 또 지난 2002년 대선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양보한 것이나, 지난 총선에서 신지호 한나라당 후보에게 진 것이나. 결과적으로 골 결정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것이 아닌가. 그 때마다 마음이 어떠했나?

사실 2002년 대선 민주당 경선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라 포기한 것이었다. 고통스러워서 경선을 할 수 없는 마음 상태였고, 내 실력이 거기까지였다고 본다. 대선에서 당시 노무현 의원이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 대통령 본인의 역량이 컸던 이유도 있었지만 크게 두 가지가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지역주의와 싸우기 위해 당선이 보장되는 종로를 떠나 부산에 출마해서 떨어지는, 정치적으로는 어리석지만 국민들의 가슴에는 감동을 주는 그의 정치여정이 공감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호남 유권자들이 당시 이회창 후보가 당선돼 사실상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영남후보가 주목을 받으면서 영남에서 표를 모으고 호남이 단결하면 이회창 후보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을 수 있다는 집단지혜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시 내 가슴 속에서는 노무현 후보보다 내 자신이 후보로 더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라고 보는데, 우선 내가 나라를 더 잘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노무현 후보 쪽으로 전개되었는데 그에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 사퇴를 하였다.

지난 총선에서의 실패는 쓰라렸다.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많이 앞서있었고, 계속 추격되긴 했지만 총선 사흘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상당히 앞서있었다. 상황이 엄중하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는데 그 엄중한 정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참여정부나 열린우리당에서 바른 선택과 바른 길을 주장해왔었다고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권자와 국민들에게는 나도 지난 정부의 지도자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에서 당대표도 하고 장관도 했다. 따라서 나 역시 지난 정부의 실패에 대해 궁극적으로 책임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뉴타운 열풍이 분 탓도 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1.1%라는 간발의 차이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의 심판이었다. 가슴이 많이 쓰라렸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프레시안(최형락)

민주화운동의 아이콘, 민주주의 투사로서 청춘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투사로서의 김근태가 아닌 청년 김근태까 꾸었던 꿈과 낭만에 대해서 알고 싶다.


가슴을 열어야겠다.(웃음) 며칠 전에 가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들었다. 낭만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요소다. 마치 기름칠을 하지 않으면 기계가 뻑뻑하게 돌아가다가 결국 멈추게 되고 말듯이, 낭만은 한 개인과 사회를 부드럽게 돌아가게 해주는 윤활유와 같은 것이다. 나는 사실 60년대 중반세대인데 당시 한국에서 세시봉 이야기라고 해서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와 같은 사람들이 유명하였고 이 사람들의 노래도 유행하였다. 비틀즈가 유행하였고, 무하마드 알리도 유명했다.

무하마드 알리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무하마드 알리가 캐시우스 클레이라는 본명을 바꾼 것에 대해서 미국 언론들, 미국 주류사회가 불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나 또한 미국주류 언론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한국의 학생운동은 베트남 반대투쟁을 내용으로는 담고 있지 않았지만 분위기로는 그 당위성에 대해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하마드 알리는 헤비급 복서로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면서 군대 입영을 거부함으로 인해서 챔피언 자격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자 노력했는데, 한국에서 청년 학생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알리의 이러한 행동을 당연히 찬성하고 지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TV중계로 알리 시합을 볼 때면 오히려 반대편 선수를 응원하곤 했다. 당시 미국 주류사회와 주류언론들이 알리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편한 시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그렇게 일관되지 못하고 모순된 행동을 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

행복했었던 기억은 광나루에 백사장이 있었다. 그 앞에 배에서 음식점을 하는 곳이 있었는데 식사도 팔고 술도 파는 식당이 있었다. 그곳에서 집사람하고 데이트를 하고 프로포즈를 했다. 소주를 마시고 프로포즈를 하고 나오는데 비가 내렸다. 우산이 없어서 비를 흠뻑 맞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앞에 원형으로 된 콘크리트 수로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으로 들어가서 비를 피했는데 그때 전해지는 온기가 참 따뜻했다. 프로포즈도 성공하는 것 같았고, 비에 젖었지만 아내의 체온이 전해지는 것이 행복했다. 당시 지명수배 중이었는데 참 행복했던 기억이다.

지명수배 중에 프로포즈! 그래서 프로포즈에 성공하셨나?

'예스'라는 답은 얻질 못했다. 다만 "노"라고 하지 않았다.(웃음)

현재 꿈이 있으시다면?

북한과 중국의 동북 3성을 왕래하고 방문하고, 그리고 물류를 이동시키는 상황을 꿈꾼다. 그리고 우리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북한도 가난에서 극복되었으면 좋겠다. 동아시아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북한뿐만이 아닌 동북 3성의 조선족, 중국의 한족, 러시아 등과 협력도 하며 머리를 맞대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을 만들어 가는데 한국이 솔선수범할 수 있기를 꿈꾸어본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소수자, 다문화 가정 등 사회적 소수집단이 보호받고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만 시혜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친구로 한국 사회에서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총선에서 떨어지고 한양대와 우석대에서 강의를 했다. 우석대 대학생들에게 등록금 인하 투쟁을 하고 일자리가 제공되도록 정부에 요구를 하라고 하였다. 비유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밥을 달라고 보채야 밥을 준다. 이 사회 기성세대들은 대학생,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청년들을 비인간화 시키는 이런 경향과 세력들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 광장으로, 소셜미디어로 참여하여 분노를 집결시켜야 한다. 반값등록금이 국민의 공감대를 널리 얻고 있는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를 해서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라야 한다. 그래야 개선되고 바뀌기 시작한다.

사실 지난 정권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제도를 물려준 것이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청년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래서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 하지만 청년들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정치인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다. 청년들이 분노해야 정치인들이 올바른 것을 밀고 나가고, 올바른 것을 실천하기 위해 싸움을 불사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도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하고 도전을 해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것을 극복할 힘이 생긴다. 분노할 것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행동이다. 나도 함께 분노하고 계속 싸울 것이다. 분노하자.

[에필로그]

ⓒ프레시안(최형락)
이런! 마치 우리 맘을 읽은 것처럼 젊은이들을 향해 "분노하라"는 이야기를 거듭하시다니. 사실 인터뷰 가기 전 93살 레지스탕스 영웅 스테판 에셀이 쓴 "분노하라"를 읽었다. 그 책을 읽으며, 또 김근태 고문이 살아온 여정을 공부하며, 스테판 에셀의 삶과 김근태의 삶이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문득 김근태 고문의 나이를 헤아려보았다. 김근태 1947년생. 이제 64세. 스테판 에셀. 1917년생. 이제 95세. 이런 한국의 스테판 에셀로 불리우기엔 그가 아직 너무 젊다. 아직 30년 이상을 더 분노하고 더 뛰어야 한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시간들 동안 그가 어떤 '분노의 성과'들을 이뤄낼지 기대가 되었다. 아마도 그가 말한 것처럼 민주화 이후에 올 줄 알았던 자유, 빈곤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자본으로부터의 자유, 그 자유를 위해 뛰고 있지 않을까. 한국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던 김근태 고문에게 경제적 민주화, 사회적 민주화의 상징 또한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너무 무리일까 걱정했는데, 그가 도리어 우리더러 분노하라고 한다, 또 같이 분노하겠다고 한다. 잘 됐다. 그래서 같이 분노하겠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한국판 "분노하라"와 마침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불어판 "분노하라"를 선물해드렸다. 분노를 공유했는데 기뻤다. 아마도 그건 우리가 나눈 분노가 희망을 위한 분노여서 그랬던 것 같다.

(인터뷰 및 정리: 김경미, 양태성 정치경영연구소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10703135240§ion=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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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땅굴과 엘리베이터

법원 검찰청 밑으로 굴이, 침침한 땅굴이 뚫려 있는 줄은 나는 몰랐다.

감옥 출입이 잦았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얘기들은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건 얘깃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지 모른다.

쇠창살 사이사이에 맺히는 서러움만 얘기해도 끝이 없을 텐데, 이 땅굴까지 포함시키면 필경 지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땅굴 얘기를 좀 해야겠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기록해둘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구치감으로부터 검찰청 빌딩 5층 공안부 검사실까지 걸어가는데 꼭 30분이 걸렸다.

논스톱 엘리베이터를 탔는데도 말이다.

보행을 아주 느리게 할 수밖에 없었고, 계단은 부축해서야 오르내릴 수 있었다.

나는 이 땅굴에 들어서면 늘 환상적인 세계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갈래 길도 있으며 계단도 있다.

가끔씩 흐릿한 바깥 빛이 조금씩 새어드는 데도 있고.

 

그러나 무엇보다 굴 벽 여기저기 걸려있는 노란 불. 이것이 나를 어질어질하게 했다.

여기 들어서면 속이 느글느글해지고, 굴 전체가 왼쪽으로 기우뚱 오른쪽으로 기우뚱 끊임없이 흔들렸다.

이런 것을 롤링이라고 하는지 핏칭이라고 하는지 헷갈리지만, 멀미가 날 것 같아 멈춰서서 벽에 기댄 채 호흡을 조정해야만 했다.

눈을 감고 자꾸 속을 내리 누르면서.

 

어떻게 보면 자베르 경감에게 쫓겨 도망쳤던 장발장의 암담한 하수도 같이 생각되었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악당 무림인들을 쳐부수기 위해 당당하게 쳐들어갔을

무협지 속의 의협심 있는 청년 검술인의 지하통로일지도 모르겠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몸을 피하는 장발장은 분명 아니었고,

불의한 도배를 무찌르기 위해서 짓쳐 들어가는 경천동지할 힘을 가진 청년 검객도 아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장발장과 청년 검객이 짬뽕된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런 수백명 중의 하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 땅굴을 구역질내면서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9월말부터 11월말까지 두어 달 동안. 남영동에서 송치되던 날 말고는 맨 첫 번째로 가막소에서 검찰취조 호출을 받던 날,

나는 앰블런스인가 지프차인가를 타고 구치감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땅굴을 걸어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도관과 더불어 검찰서기의 에스코트를 구치감에서부터 받았다.

이 정중한 배려에 나는 감사하는 마음조차 가졌다.

내가 고문받아 엉망이 된 것을 알고 이런 배려를 해 주는 것인가.

어쩌면 VIP 대접을 하느라고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그런 중에도 기분 나쁘지 않아서 은근히 희희낙락하며 이 땅굴을 통해 검찰청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피의자, 피고인은 모두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데

유독 나는 엘리베이터를 지하층까지 끌어내려 손님으로는 오직 혼자 타고 5층까지 논스톱 직행했다.

어떻게 실수로 1층이나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서 문이 열리게 되면

검찰 서기와 교도관이 엄숙하게 입장금지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오는 짜릿한 그 기분을 누를 수 없어 높은 사람들은 별 희한한 짓도 다하는 것일 게다.

 

내 손에는 벨기에제 특별 수갑이 채워져 있고, 벌건 포승줄이 칭칭 동여매져 있지만 나는 여유있게 웃어 주었다.

혹시 내가 정치인 경력이 있었다면 손으로 V자를 그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조바심쳤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도 약간은 머리가 회전되는 편이어서 이런 특별 에스코트에 '홍이야 홍이야' 하며

잠에 취해 꿈에 취해 계속해서 헤맬 리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태는 분명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철저한 고문은폐 수단이었다.

아니 완전무결한 고문은폐의 예기치 못한 실패로 인해 책임추궁을 당한 검찰이 취한 그렇고 그런 것이었다.

 

이 지하 땅굴을 가끔씩 오가며 학생들, 오랏줄로 꽁꽁 묶여서 더욱 기가 사는 학생들의

아는 체하는 인사와 목소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을 차단하기 위한 권력의 방어조치였다.

고문받은 얘기를 주고받아 그것이 가막소에 퍼지고, 그리하여 바깥으로 흘러나가면 골치가 아프므로....,

 

다른 모든 기회는 완전 차단이 가능한데, 가족, 변호인, 다른 재소자와의 만남은 물론

담당교도관 이외에는 누구도 접근이 봉쇄되는데, 이 땅굴이 성가신 것이다.

 

사실 나는 거기서 많은 학생들과 부딪쳤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정어정 벽을 붙잡고 기어가는 나를 보고 대략 알아봤으며, 큰 소리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슬슬 고문 얘기도 하고 시간은 불과 3~4초 정도씩 밖에 안되었지만 꽤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검찰 서기의 에스코트는 대략 한 달 반 이상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약화되고 흐지부지되기까지 시간이 제법 흘렀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 편 사람들은 마음 놓고 만나서 서로 눈빛도 교환하고 서러운 가슴을 열어보이기까지는 세 달 여가 걸렸던 것이다.

 

그동안 검찰 서기의 에스코트 차단을 포함해서 정치군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던 것이다.

단 한 차례의 예기치 못한 실패를 제외하고 정치군부는 완전무결하게 성공했다.

그러나 단 한 차례의 실패, 그것은 대단히 치명적이었고 그들에게는 큰  정치적 부담이 지워졌다.

고문의 증거, 발뒤꿈치 상처 딱지 탈취사건

85넌 12월 31일. 고의적인 변호사 접견 봉쇄가 풀린 지 닷새가 되던 날, 나는 흥분하여 깊숙이 간직해 두었던,

양쪽 발뒤꿈치에서 아물어 떨어진 상처딱지를 이돈병 변호인과 목요상 의원에게 드리면서 재판의 증거로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이 통할 리 있겠는가.

행형법상 교도관 입회라는 것을 이용, 간섭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지당하고 결국은 강탈당하고 말았다.

그들로서는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고문의 증거가 내 가족이나 민주화운동가 손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해야했고,

그래서 나는 모든 주의를 다했던 것인데 정치군부의 뻔뻔스러움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이 또다시 증명되었다.

 

그토록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고도 또 당했으나, 역시 나는 맹하고 순진한 경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여러 사람이 보았다 하더라도 뭐든지 필요하다면 언제나 깔아뭉개버리는 그들인데도....나는 또 설마 했던 것이다.

정치권력의 수작은 이렇게 성취되었다.

절취의 시도. 실패, 노골적 강탈, 말썽이 생길 소지가 있는 사람들의 사전 인사이동 조치, 그리고 거짓말로 진행되었다.

특권적 군부의 본질이 이 작은 사건에서도 축약되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폭력적 대처와 뻔뻔스런 은폐, 그리하여 끊임없이 불신과 증오를 조장하고 갈등과 대결적 분위기를 반복해서 불러 일으켰다.

절취의 시도는 이랬다.

변호사 접견을 끝내고 내 방으로 돌아와 대략 한 시간 쯤 지나자 면도를 하라며 면도사가 왔다.

보통 병사는 목요일에 면도를 하는데 금요일에 온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또 이상한 것은 다른 때와 달리 방 바깥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다른 방에 있는 재소자들에게 내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언제나 방안에 앉아서 면도를 하곤 했기에 묘하게 생각했었다.

 

문밖으로 나가 앉았더니 다시 내 감방 안을 볼 수 없는 거리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좀 이상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거절할 필요가 없어서 그대로 따랐다.

면도를 시작하자 곧 검방 담당 교도관이 내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옆모습을 보니 얼굴이 굳어진 표정이었다.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서 면도를 중단시키고 내 방으로 들어가니 역시였다.

나는 그동안 모은 상처 딱지를 이들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평범하게 휴지에 싸서

두루마리 화장지 가운데 틈새에 끼워 놓았었는데, 검방교도관은 이미 상차딱지를 싼 휴지를 훔친 다음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변호인 접견시 이들이 똑똑히 보았고. 이에 대해서 즉시 보고를 받은 가막소 간부들과 또 뭐시뭐시들은 절도를 지시받았을 것이고,

그 하수인으로 이 검방 담당관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변호인에게 전달하는 것을 방해받은 뒤 나는 줄곳 불안해 했지만 또 '설마'하고 화장지 틈새에 끼워 놓았으니,

이 교도관이 찾아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던 것이다.

이 배신감이라니, 이 저주받아 마땅한 가증스러움이라니!

얼굴이 확 달아오른 나는 "생사의 고비를 넘어 온 나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교도관은 쩔쩔매고 주저하다가 십 분 정도 지나자 마지못해서 모자를 벗어 자기 이름 써 놓은 곳,

거기에서 휴지를 꺼내어 놓았다.

나는 이번의 절취 시도, 도둑질은 이렇게 막았지만 또 다시 훔치러 올텐데,

특히 내가 없을 때는 어디다 두어야 하나 궁리하면서 막연해 하고 있었다.

이럴 즈음 권력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염치 따위는 벗어 짓뭉개 버리고,

주저하지 않고 강도의 본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서는 나의 상상력,

아니 우리의 양식범위를 간단하게 넘어버리는 본래의 흉측한 모습이 나타는 것이다.

검방 담담 교도관이 물러간지 십여 분이 되었을까, 최덕이라는 주임이 와서 내 방 창문을 열고

"상처 딱지는 불법소유이니 내 놓으라"고 협박을 했다.

 

"사람은 최소한도의 양심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윗자리에서 시킨다 해도 해야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지 않는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나는 외쳐댔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 있겠는가.

시비를 걸고 폭력으로 빼앗도록 지시를 받은 이들은 창백하게 질릴 것도 같고, 겁을 잔뜩 집어먹는 눈으로 그냥 돌진해 왔다.

가막소 간부들은 싸우는 소리가 시끄러워지자 다른 방 재소자들은 목욕을 보내서 텅 비게 해놓고 설쳐 대었다.

 

그들은 나에게 욕을 하고 공갈도 쳤지만 이것이 통하지 않자 나를 끌어낸 다음, 방을 샅샅이 뒤지고 엎어 놓았다.

그 상처 딱지는 내 허리춤에 있었으니 이제는 내 몸에 손을 댈 차례가 되었다.

부소장 권태정, 보안과장 송선홍, 보안계장 방을룡, 주임 최덕, 보안과 배치부장,

그리고 교도관 7~8명이 지옥사자 같은 얼굴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가 왔다.

이들이 내 방을 뒤지는 동안 나는 권태정과 의무관실에서 말싸움을 했으나 이미 사태는 너무나 명백하였다.

당시 화내지 않고 마주 앉은 권태정에게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이건 당신에 대한 배려이다. 결국 나는 빼앗길 것이고 그것으로 고문의 구체적 근거는 잃게될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당신 개인들에게도 반드시 피해가 갈 것이다. 난 꼭 그렇게 하겠다. 그러니 당신은 서둘러 내려가라."


최덕의 직접 지휘와 권태정, 송선홍, 방을룡이 치료실에서 지켜보는 사이에 병사 복도로 끌려나온 내게

이른바 검신을 한다며 옷을 벗기려 했다.

 

아! 몸을 부딪쳐 싸워야 할텐데 어떻게 하나.

남영동에서 고문받은 후 나는 공포심에 눌려 그야말로 기가 죽어 있었고, 몸도 제대로 움질일 수 없어서 저항할 수가 없었다.

지켜봐 주는 눈 하나 없이 양팔를 꽉 붙잡은 채 허리띠를 풀은 이 강도들은 허리춤에서 상처딱지를 발견하고 강탈해 갔다.

 

내 몸이 아마 지금만 같았어도 격렬하게 저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분하고 원통했지만 울화병이 깊어지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안정시켜야 했다.

첫 공판 기일 85년 12월 19일.

남영동에서 고문당한 얘기 뒤에 이 파렴치한 강도행위를 짤막하게 얘기했다.

권태정은 빼놓고. 내 충고를 스스로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송선홍을 증인 신청 했다.

며칠 후 연말쯤, 갑작스럽게 송선홍과 접견과장이 각각 안양교도소와 대구교도소로 전보 발령나 버렸다.

접견과장은 나와 변호인의 접견을 봉쇄했기 때문에, 송선홍은 딱지사건으로 말썽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구치소에는 의아해 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나의 '공판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수군대는 것이 내 귀에도 들려왔다.


이 상처딱지에 대한 재판부의 조회에 대해 구치소측은 '빈 휴지를 압수해서 폐기처분했노라'는 회신을 했다.

고문, 은폐, 거짓말, 중첩적 범죄행위를 감행하고도 여전히 늠름하게 웃어대는 저 정치군부의 가면에

우리는 침을 빝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사건에서 내가 잊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 검방 교도관이 도둑질에 실패하고 간부들에게 몰려 나에게 닥치기 전까지 얼마나 닥달을 당하였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이 검방 교도관은 상처딱지를 손에 넣으면서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만일 이것이 재판부에 제출된다면 자신은 파면됐을 것이고, 나이 50세인데 식구들과 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당신을 평생 저주했을 것'이라면서 씩씩거렸다.

 

이 교도관 얘기대로 됐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용케 재판부에 증거로 현출되었다면

이 구치소 직원과 간부들에게 일정한 부담과 피해가 돌아갔음은 거의 틀림없었다.

나는 교도관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 슬프고 다른 한편으로 혼란이 일어났다.

피해와 부담은 늘 자신 혹은 나와 비슷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만 짊어져야 하는가.

민주화의 귀결은 우리에게만 돌아오는 것이 아닌데,

전제와 자의적 지배로부터 진정한 법 지배의 실현 채무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정치군부가 이런 나약함, 비열함의 틈을 뚫고 끊임없이 공포심을 조장, 확산시킴으로써,

자신들이 지배를 계속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하는 이 무서운 쇠사슬을 어떻게 끊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는가. 왜 우리에게 부담을 안기는가. 당신들의 뜻은 잘 알지만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구속되기 전에도 이런 얘기를 여러 번 들었지만, 구속 이후 그야말로 어디서나 귀가 따갑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도 위에서 시키는 일은 그것이 옳은지, 어떤지를 불문하고 행해지는 모습에서 참으로 깊은 외로움에 빠지곤 했다.

 

나는 이것을 고문 현장인 남영동에서, 이 구치소에서, 검찰에서, 그리고 공판정에서도 반복해서 들었다.

그 표현되는 방법과 분위기는 달랐지만 나는 모두에게서 분명히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는가, 자신들을 이해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들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직위가 낮은 사람은 '이 밥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얘기하는 데에 비해서 직위가 높은 사람은

에둘러서 완곡하게 말하거나 '자리를 유지하려면 별 수가 없다'는 씁쓸한 자조 속에서 그것을 표현했던 차이는 있다.

물론 아주 드물게 적대적인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뭔가 대단히 큰 존재인것처럼 어깨에 힘주는 사람이나

자리가 제법 높아 그에 걸맞게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눈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그 윗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

그런 지식인들을 왜 내가 모르겠는가. 정치 군부의 졸렬한 하수인들을......


나는 이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이 가막소 맨 땅바닥에 침 한번 뱉고 신발바닥으로 문질러 버린다.

 

 

 

 

이번 4.27선거는 국민 분노의 폭발이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었다.

 

물가대란을 비롯한 절박한 민생문제에 대해 해결할 수 있는 아무런 방편도, 실효성 있는 조치도 없었다.

그런 저들에 심각한 패배를 안긴 것이다.

 우리는 반사이득을 본 측면이 강하다.

야권연대가 상당한 정도로 이뤄져 국민이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심판론을 불붙게 만들었다.

민주당도 쉽지 않은 부담을 나눠진 것 사실이다.

순천에서 무공천한 것과 김해에서 야권단일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것,

분당에 위험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손학규 대표가 후보로 나선 것 모두 국민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후보가 직접 당선된 곳은 분당과 강원도지사 둘 뿐이다.

하지만 국민의 관심과 주목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가 민주당을 “지금 이대로”에 안주하게 만들 개연성이 있다.

그것은 민주당을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명박 세력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 “거짓 희망”에 대해 다시 주목하고 관심을 갖게 만들 수 있다.


이번 4월 27일에 동시에 치러진 지자체 장 · 의원 선거에서 양양 군수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둔 곳이 없다.

작년 6.2지방선거에서 그야말로 대승을 거두고서도 그 몇 개월 뒤 치러진 10월 재보선은 참패를 당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지나간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세력은 과반수를 넘어섰다.

 

첫 번째 당선자 워크숍에서 당시 당을 주도했던 이른바 “주류측”이 중도적 실용주의를 내걸었다.

과반수에 고무되어 오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간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른바 “중도 실용주의”를 주장했다.

 

이런 깃발이 국정운영기조에 큰 충격을 준 것은 물론이다.

참여정부는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데, 당시 여당이었던 정치세력은 그것을 반대하는 듯한 중도실용주의 깃발을 내걸었다.

그 결과는 말할 것 없이 혼선과 혼란이었다.

중간계층의 획득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확고한 철학에 기초한 정책과 대안의 제시, 그것의 실천을 통한 중간계층의 참여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번 4.27 분당선거에서 인물론을 강조한 것은 고심에 찬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집결시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있다.

출근 전, 점심시간 때, 퇴근시간 때 30~40대가 대거 투표장으로 나선 것은 아무래도 “심판론‘에 공감하고 동조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심판론이 적극적이고 강하게 제기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일부에서 위험천만한 이야기가 들려나온다.

이번 분당선거에서 인물론이 통했다.

중간층이 민주당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중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중도노선을, 중도주의를 내걸자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중도실용이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로 보이지만 곧 낭떠러지가 나타나는 길이다.


이번 4.27선거도, 작년 6.2 지방선거도, 작년10월 선거도 국민의 승리, 야권연대의 승리였다.

범야권 연대는 조건이 아니라 승리의 전제이다.

그것을 위해 진보적인 다른 야당들, 개혁적인 시민단체와 꾸준히 정책연합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총선과 대선에서 후보단일화를 하되, 감동적으로 이룰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논의해야한다.

원탁테이블을 서둘러서 만들어야한다.

시간이 충분치 않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주당을 개혁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국민이 바라는 절박한 민생문제 해결과 평화, 복지, 민주적 시장경제의 실현을 향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당조직 개혁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모든 인사와 세력에게 공정한 기회가 보장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이 독선적이고 오만한 특권 부자세력의 지배를 끝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전진기지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2011년 5월 2일

김근태

 

3. 묵비권의 대가 - 보복구속과 접견 봉쇄

관례가 대충 그렇다고 듣기도 했지만 (한눈으로 봐도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몇 줄의 제1회 신문조서로 끝나고 나는 검사 방을 떠났다.

 

피의자 신문조서라 해봐야 내가 김근태임을 확인하는 것과

뉴욕 타임즈 동경지국장을 만나서 인터뷰한 사실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했으며, 질문과 답변을 합해서 댓 줄 정도였을 것이다.

손도장을 찍고 나는 떠났다.

구치소는 천국이었다.

야수들의 소굴인 남영동에 비하면, 나는 내일부터 처를 면회할 수 있는 곳으로 온 것이다.

 

그런데 기다리는 면회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되지 않았다.

끔직한 고문을 받으면서 나는 바깥 사회에서 정치적인 대 변란이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믿었다.

광주사태 몇 배 가는 대대적 학살이 발생하고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야 그런 용서할 수 없는 고문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79년 YMCA에서 감행한 유신잔당축출 궐기대회, 80년 5.17과 광주사태 때 잡혀 들어갔던 수많은 민주인사. 학생들이 당했던

참혹한 고문을 여러번 들었던 나로서는, 바로 그 역의 추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병걸 선생님이 당한 고문, 백기완 선생님이 반죽음이 되어 버린 고문, 네 번이나 의식을 잃어버렸다는 조성우 씨,

그리고 누구하나 예외없이 엉금엉금 기도록 짓밟혔다는 그 시절이 명백히 다시 시작된 것이다.

 

남영동 방구석에 찌그러든 나에게 그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에게 내 처, 최정순, 그리고 변호인이 나타나다니,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불일치, 혼란을 수습하려면 나도 들을 얘기가 많을 것 같았다.

할 얘기도 있고, 아니 수없이 많고, 분명히 내 처는 매일 빠지지 않고 구치소에 와 면회신청을 했을텐데,

그것을 우격다짐으로 막는 것이로구나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다 해도 더 이상 고문을 당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면회봉쇄는 고문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었다.

그러나 나는 면회봉쇄가 고문의 은폐기도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를 뚫고 나갈 방도, 대처 방안을 조금씩 궁리해 보곤했다.


9월 30일 검찰청으로 끌려 나갔다.

거기엔 김원치 검사와 김종남 검사, 검찰 서기 그리고 타이피스트 한 사람이 그렇게 있었다.

조그만 메모지에 몇 항목을 적어서 나에게 보이고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느냐. 종이에 쓸 수도 있느냐"고 김원치 검사는 물었다.

 

"둘 다 할 수 있다"고 하니까 김 검사는 그러면 "한번 써보라"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잘 기억해 낼 수 없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고 생각된다.

민족민주주의의 내용과 배경, 공급경로와 전파경위,

시민민주주의 혁명, 민족민주주의 혁명, 민중민주주의 혁명의 차이와 각각에 대한 평가 등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을 자술서를 쓰라는 얘기임이 분명했지만,

당시는 나에게 '참고하기 위한 것이니 한번 써봐라'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김검사에게 물었다.

"쓰기 전에 두가지를 묻겠다. 나는 변호사 접견을 하겠다. 또 가족 면회를 하겠다.

그런데 지금 이것이 봉쇄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것이냐? 설명해달라."


이에 대해 김검사는 "변호인 접견은 해야겠지요" 하면서 그러나 가족 면회는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재차 "가족 면회가 금지되었다는 뜻이냐" 묻자 "그렇다"는 것이었다.

검사가 금지한 것이고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이없어 하면서 "금지의 근거와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라"고 요구하자 "다음에 자세히 답변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면회금지는 증거인멸 우려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고문의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서, 인멸하기 위해서 내려진 조처"라고,

그러자 김 검사는 "나를 열 받게 만든다"고 말하며 정말 열을 받는지 얼굴이 붉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하얘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몇 번 되뇌었다.

'열받게 한다고, 한다고....' 이건 모욕적이고 도발적인 언사였다.

고문의 공포 속에 빠져 있는 것은 그때도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본래의 나 자신,

고문받기 전의 나로 조금씩 되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내 속을 건드렸다.

그건 아직 자존심은 아니었고 오기였던 것이다.

 

나는 선언했다.

"이런 조건에서는 말하지 않겠다." 진술거부를 분명하게 얘기했다.

두 사람의 김 검사는 조금 당황하는 듯하면서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나왔다.

능히 추측한 것이지만 협박적인 언사와 분위기가 튀어나오고 조성되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지금 진술거부를 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 협박하는 것이냐. 남영동에서도 진술거부하겠다고 했다가 참혹한 고문을 당했는데,

검찰에서도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것에 대해 협박하는 것이냐" 고 확인했다.

 

김 검사의 말은 '협박'이 아니라 '권유'라는 것이었다.

여하튼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옥신각신했지만, 이것으로서 나의 진술거부는 확고해져 버렸다.

심리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진술거부, 묵비권은 관철되었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권리로서 보장되어 있는 이 묵비권을 해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묵비권을 획득한 대신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니 또 다른 보복조치를 당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적당할지도 모른다.

이 보복조치를 통해서 고문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활동하였다, 정치권력은.


검찰이 공식적으로 말한 것뿐만이 아니다.

공소제기 단계에서 분리 결정하여 - 뉴욕 타임즈 동경지국장과의 인터뷰, '민주화의 길 등- 법적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논고에서 밝혔던 것처럼 묵비권 행사에 대한 보복적인 중형 구형 등이 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고문 상처에 대한 증거보전신청의 기각사유로도 묵비권행사가 핑계로 이용되고,

검찰에 의한 가족면회금지는 물론 서성판사에 의한 면회금지결정에도 마찬가지로 이용되었다.

변호인단에 의한 증거보전신청이 제기된 얼마 후 검찰은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면서

"앞으로도 쭈욱 진술거부할 것이지요?" 하고 다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고마워하는 마음이 되었었다.

그런 사실을 알려준 것도 그렇지만 묵비권을 공식적으로 기정사실화해준 것도 피차간에 좋은 일이었다.

지금 이를 생각해 보면 나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 대처 필요성에서 그러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정치권력은 묵비권행사 여부는 별 문제가 아니었고,

고문의 은폐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묵비권 여부를 현실적으로 확인하고,

이것을 증거보전신청을 받은 법관에게 제시하여 법관이 편하게 기각 결정할 핑계거리로 사용하도록 했을 것이다.

묵비권을 고문은폐의 유효한 수단으로 써먹는 한편 묵비권 고수로 인한 공소유지의 어려움을 다른 방편으로 정치권력은 해결했다.

10월 초순경, 아마 10월 5,6일경이었을 것이다.

최민화, 김희상, 김종복 씨가 구속되었다고 검찰이 통고했다.

 

나는 납득할 수가 없어서 "그 이유가 무엇이냐, 민주제 개헌운동 때문이냐?"고 다그쳐 물었지만, 명료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민청련 간부들에 대한 전면적 구속과 지명수배, 이것이야말로 나의 묵비권 행사에 대한 가장 철저하고 잔인한 보복이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이것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할까, 그런 혼란뿐이었다.

 

왜 이렇게 뒤늦게, 내가 체포, 구속된지 한 달 후에나 새삼스럽게 확대하는가,

특별한 일을 민청련 간부들이 했는가? 그렇지 않다면야....

남영동은 고문을 수단으로 하여 결국 민청련을 반국가단체로 몰아버렸지만

나는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 점에 있어서 남영동 아니 정치권력과 나 사이에는 타협이 이루어졌던 것인데, 즉 나에 대한 보복으로 국한하도록 말이다.

새삼스런 구속의 확대를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사건 내지 사태발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묵비권에 대한 비열한 보복조치였던 것이다.

나에 대한 공소증거확보를 위해서 구속을 대폭 확대해 버린 것이다.

검찰이 나에게 묵비권을 고수하면 오히려 불이익이 크게 돌아갈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참 분한 일이었다.

간 주고 쓸개도 주어 버리고 만 꼴이 되어버렸다.

묵비권 행사라는 말은 얻었지만 야비한 보복을 여러가지 형태로 받은데다가 묵비권 행사 그 자체도

사실상으로는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돼 버렸기 때문이다.

조서가 작성되거나 자술서를 쓰지는 않았지만 고소제기된 사실은 물론 그 주변적 사실을 포함하여

남영동에서 강제된 것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고문의 공포,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이야기했으며, 후에는 진술거부로 인해 관여 검사가 처해 있는 곤경,

상사로부터의 힐난과 질책받음 등이 예상되고 암시되어 그야말로 개인적 차원에서 미안해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또한 검찰에게 온건하게 보이고 싶은 심약한 마음도 작용했지만

변호인, 가족 등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당함으로써 생겨난 이상심리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에게 부담이 되고 불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을 공판정에서 말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검찰에서 내가 한 말에 분명히 구속되었으며, 동시에 그 말을 지켜야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성실성은 아무런 의미도 보답도 없었다.

오직 배신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함 뿐이었다, 돌아온 것은.

만 석달 이상이나, 공소제기되고도 한 달 반 이상 동안 나는 가족은 물론 변호인을 만나지 못했다.

뭐라 할까, 같은 편이라 할까 좋은 나라끼리라고 할까.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이상심리에 빠지게 된다.

극도의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가족을 만나게 된 것은 12월 20일이었으니 구속된 이후 3개월 반 만이었다.

남영동에 있을 때는 물론 검찰 심지어는 서성 판사에 의해서도 면회가 금지되었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죄증을 인멸할 상당한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술을 거부했기 때문에 상당한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고문은폐를 위한 것임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판, 검사들의 형식적인 이 결정은 논리 그 자체로도 위험한 것이다.

즉,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요인이라면

무조건 금지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9월 26일 송치된 이후 12월 9일 변호인 접견봉쇄가 사라질 때까지, 거의 일 주일에 두 번 또는 세 번 정도 검찰청에 소환당했다.

구치소 출발시각은 보통 3시 반 전후가 많았고, 이것이 변호인 접견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당시에도 알았지만,

그러나 사실 전모를 분명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한마디로 비열한 수작을 부렸던 것이다.

더러운 수법을 사용했다.

변호인이 와서 접견을 신청하면 그때야 부랴부랴 출정을 내보냈으니...

이렇게 맞춰서 하는 짓들인 줄은 정말 몰랐었다.

검찰에게 "나도 변호인 접견을 해야겠다"고 여러번 말했다.

그럴 때마다 우물쭈물하고 대답이 명백하지 않았다.

"접견해야겠지요. 검사장에서 하면 어떨까요?" 또는 "변호인이 선임계를 내지 않아서 아직 안 된다"고도 하고.


나는 당시 헌법의, 형사소송법의 변호인 접견권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검찰에게 감쪽같이 속아 버렸다.

여하튼 그때 변호인이 오면 나를 즉시 접견봉쇄하기 위해서 불러냈던 것이다.

검사가 없는 경우 구치감에서 그냥 돌아오기도 하고, 회의가 있다고 금방 검사가 나가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토록 비열할 줄은 몰랐고, 나도 사태를 분명히 파악하지는 못했었다.

언젠가 이을호 씨의 감정유치문제와 시립정신병원에서 국립정신병원으로 옮겨 달라는 얘기를 하러 왔다는 김상철 변호인을

검찰청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었다.

그때 변호인은 구치소로 매일 접견신청을 한다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다가 더욱 나를 확신케 만든 것은 당시 구치소 부소장 권태정의 여러 번에 걸친 확인이었다.

4~5번에 걸쳐 내 방 앞에 머물러서는 "매일 검취 나가지요?" 하고 묻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정해서 말해 줬다. "그렇지 않다. 일주일에 2~3번 간다"고.

그러나 그 다음에 또 와서는 역시 "매일 나가지요, 검취를?" 하고는 다짐했다.

 

이곳 어느 간부 말마따나 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고 있으며,

그것을 직접 확인하는 부소장이 이런 혼란을 일으킬리는 없는 것이고,

매일 검취 나가는 것으로 하여 변호인 접견봉쇄 핑계를 미리 확정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렇게 알고 있는 나는 검찰청에 불려 나가면 관여 검사에게 미안한 마음,

나의 진술거부로 받게 될 직장에서의 곤경에 대해 늘 부담스러워 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마음은 당시 철저히 우롱당하고 있었으니....

변호인 접견봉쇄가 풀린 뒤 구치소 간부 여럿이 이렇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변호인 만나게 되니까, 더 약이 오르지요?"


그러나 그 때는 가슴에 담아 두었던 고문당한 얘기를 하느라고 바빠서 이 뜻을 새겨듣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고의적으로 변호인을 따돌린 것이고,

그것이 검찰은 물론 구치소 간부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놓고도 재판부엔 두 명은 빼놓고 모두 출정을 나가서 변호인 접견을 못 했었다고 대답해 온

권력의 철판같은 뻔뻔스러움이라니...

법이니 법 위반이니 하는 얘기를 하고 싶은 의욕은 정말 없지만 기록을 위해 몇 가지만 더 짚어 보겠다.

우선 9월 26일 송치 당일, 관련 검사들에게 발뒤꿈치 상처와 발등의 전기고문 흔적을 보이면서 조사하여 처방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또 진술거부를 철회하도록 종용받았을 때 나는 "고문을 조사하여 처벌하다면 검찰요구대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두 개의 사건이기 때문에 고문도 조사해 처벌하겠지만

묵비를 중지하는 것이 나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었다.

여하튼 나는 구술을 통해 고소를 제기했던 것이다.

형사소송법 237조는 '구술에 의한 고소를 받은 검사는 고소조서를 작성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검사는 이것을 위반한 것이다.

 

하긴 고소장을 쓰기 위해서 집필하겠다고 요청했고, 그것의 봉쇄에 대해 네 차례나 공판정에서 항의를 해도 꿈쩍하지 않는

이 정치군부의 배짱을 보면 고소조서 따위는 한낱 농담에 지나지 않은 것일 게다.

대한 변협이 고발한 지는 거의 넉달, 본인의 처 등이 고소를 제기한 지 석달이 지나가도

고문에 대한 조사 제스처 그런 것조차도 있을 수 없는 이들인 것이다.

 

그것을 영원히 깔아뭉개버리기로 작당한 결심이 변할 리 있겠는가.

10월 26일 공소제기 이후에도 변호인 접견을 방해하려고 검찰청으로 불러내었는데,

이것도 순수하게 형식논리적으로만 봐도 위법인 것이다.

피고인인 나는 소송주체로서 검사의 주장인 '소인의 이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비판하는 활동'이 보장되어 있다.

따라서 피고인을 수사기관이 신문함으로써 증거수집 수단으로 삼는 것은 당사자 지위와 양립하지 않는다.

또한 신문 당함으로써 피고인은 공판활동에서 물리적, 심리적으로 제한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이 기간동안 나는 검사의 소인을 제시받아 제1회 공판기일 전까지 그에 대한 공격,

방어를 준비해야 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기회를 유린당한 것이다.

법 얘기, 이는 모두 쓰잘데 없는 노릇이어서 이 정도로 일단 마치기로 한다.

다만 끝으로 한 가지 분명하게 할 것이 있다.

검사를 공익의 대표자로 규정하고 있는 검찰청법 제5조를 개정할 시기가 무르익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 이상 주저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


'검사는 정치군부의 옹호자며 방위자이고 동시에 공익의 대표자'라고 하든지,

아니면 너절하고 들척지근한 것 모두 다 빼내 버리고 화끈하게 '오직 정치군부의 옹호와 방위를 그 직무로 한다'고

 

 

삼성하면 세계적인 기업이다.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기업인으로서 이건희 회장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건희 회장의 말이 국민정서와 초점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삼성의 조세포탈 및 편법증여에 대한 재판결과를 대부분의 국민들이 공감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평창올림픽 유치를 위한 국민적 염원을 빌미로 유죄판결이 확정된 지 채 5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이건희 회장 한 사람만을 사면복권했다.

이런 이명박 대통령의 처사를 대부분의 국민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사면을 받은 직후 이건희 회장은 ‘우리 국민들이 좀 더 솔직해 졌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공감하지 못한 차원을 넘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할 말인가?

세금 안내고 비자금을 만들어서 2세에게 거의 공짜로 상속한 것에 대해 솔직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건희 회장 자신 아닌가?

국민은 당황하고 어이없어했다.

이 회장은 우리 국민과는 먼 거리에 서 있는 것이다.


삼성에는 노조가 없다.

노조를 만들려고 하면 부당해고를 감행하거나 먼저 유령노조를 신고 등록 했다.

그래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안 된다.” 는 선친의 말씀을 관철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

한마디로 삼성이 우리 헌법과 노동관계법을 짓밟고 있다.

세계의 상식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삼성이야말로 자본주의도, 전체주의도 아니고 도대체 무엇인가?


이익공유제를 주장한 정운찬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총리를 지낸 분이다.

어떤 한나라당 정치인은 정운찬 교수의 발언을 급진좌파로 몰아 세웠다.

 

그러더니 이건희 회장은 일거에 정교수를 “불학무식한” 사람으로 몰아 붙여 버렸다.

“사회주의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니다”라는 말을 통해서

사실은 “급진좌파 소동”을 지지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걱정스럽다.

 

정운찬 서울대총장을 이렇게 모욕할 수 있나?

이건희 회장의 삼성자본권력이 섬뜩하게 느껴진다.


솔직히 말하면 그 오만함에 공포심이 느껴진다.

삼성의 이런 교만한 권력행사에 대해 국민들이 투표로 심판할 수도 없다.

 

세계적인 기업 삼성이 앞으로도 잘 되기는 해야겠는데 솔직히 혼란스럽다.

삼성과 이건희 회장에게는 삼성이 그간 누려온 정경유착과 부당판결과 편법증여와 조세포탈,

무엇보다도 권력과 국민위에 군림했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이런 헛말이 계속 나오는 것 아닌가?

도대체 어디까지, 언제까지 이런 교만함이 계속 될 것인가.

 

2011년 3월 11일
김근태

2. 기적

기적을 타고 내려왔다. 그것은.....,

남영동 야수들의 고문흔적은 전혀 반박의 여지없이 내 아내 아니 인재근,

다음에는 최정순, 김상철 변호인의 눈에 가슴에 사진 찍혀 버렸다.

9월 26일 오후 3시경 검찰청 건물에서.....

남영동 짐승들은 무거운 짐을 벗고 얼마간은 승리 비슷한 기분에 싸여 슬슬 휘파람이라도 불면서 돌아갔고.

이른바 검찰 공안부라는데서는 약간 들뜬 긴장 아니면 늦여름 나른한 식곤증에 졸리운 채 기다리고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이를 칼날 끝으로 뚫어버린 것이다.

그 후 별별 짓을 다했지만 한번 들통난 것이 지워질 리 있겠는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아! 거기에 내가 잘 아는 인재근이 서 있었다.

못 본지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 우리 사이의 거리는 까마득했다.

 

죽음 저편에서 짓밟혀 버렸던 나는 인재근의 삶 옆으로 도저히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적응하고 이해하는 그런 시간은 필요했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인재근의 눈에 물기가 핑 도는 그런 시간으로 충분했다.

이해와 사랑을 실은 눈빛이 나를

짓밟혀 극도로 왜소해진 나를 원상태로 되돌려 보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은 나에게 부피를, 무게를 되돌려 주는 전기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짓밟혀 짜부러져 평면이 되어버렸고 먼지처럼 왜소해진 나는 부피도, 무게도, 인간적 자존심까지 모두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이 시선에 의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되돌아가 결정적으로 다시 소생하기 시작해 버린 것이다.

포니 뒷자석 가운데 끼여서 서부역 앞을 지났다.

푸른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햇빛이 따사롭고 눈부셨다.

 

다시 다가온 이 햇빛, 푸른 하늘이 눈물이 나고 시간이 멈춰지는 것 같았다.

죽음의 세계로만 흐르던 시간이 멈춰서고, 분명히 멈추고 서서히 필름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잃어버렸던 내 생명이 꿈틀거리면서 강요된 죽음의 영화필름, 헷갈린 내용이 흐릿해지는 것이었다.

인재근의 그 눈빛이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정치군부. 남영동 야수들이 심어놓은 내 가슴의 죽음은, 사탄은 소리를 지르면서 내 몸에서, 마음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너무 쫄아서 그런지, 시선의 전류가 아직 약해서인지 혹시 내가 대담해서인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내가 당한 고문 얘기를 듣고 얼마나 처참해 할까도 헤아려 봤고,

동시에 얘기를 듣는다 해도 절망적인 죽음의 정면 얼굴을 상상할 수가 있을까 등등이 떠올랐다.

 

그러나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나 개인에 관한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에 관계된 것이므로 말하기로 결정했다.

 

손목시계의 초침소리가 째깍쩨깍 귀청을 때리는 듯 했다.

서둘러야 했다.

가능한 한 정확하게 구체적인 사실을 전해야 한다 하니까 오히려 말을 더듬게 되고, 앞뒤가 바뀌어 표현되었다.

 

헛바퀴가 돌아가고 구멍이 뚫어져 김이 새어 나가는 듯 싶기도 하고,

내가 말하고 있는 고문 사실의 그 무게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지, 내 처 얼굴에는 묘한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너무 엄청나서인지 감정 이입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엿보였고,

주고받는 우리의 말과 표정이 서로 따로 노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전한 것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씩 열 번 당했다.

4일, 8일, 13일은 각각 두 번씩, 그리고 5일, 6일, 10일, 20일은 각각 한 번씩 당했다"고 말한 것이 고작이었고,

그것도 숨넘어가듯이 빠르게 해댔다.

이 말을 두어 번 반복한 다음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서 내 처에게 주었다.

여름이면 무좀이 생겨 성하게 되므로 몇 년 째 샌들을 신어 왔으며 85년 8월 24일 체포될 당시도 그러했다.

간신히 양말을 쭈그려 앉아서 벗었다.

그리고 발뒤꿈치 양쪽과 발등(새끼 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윗부분), 양 팔꿈치를 보여 주었다.

"온몸 다섯군데를 꼼짝 못하도록 묶이고, 전기고문, 물고문 받다가 못 견뎌 비두발광하다가 닳아서 찢어진 것이다.

그리고 양쪽 발뒤꿈치, 팔뒤꿈치가 똑같은 모양으로 상처가 났고,

발등 양쪽에 까맣게 탄 점들이 한 무더기씩 있는 것은 전기고문시 전류가 타서 생긴 것이다."

최대한으로 잘, 그리고 정확하게 전하려고 했지만,

쉴 새 없이 떠들었지만 무언가가 가로막혀서 내 의사가 전달되는 것인지 어떤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가위눌린 꿈속에서 진땀 흘리는 것과 유사했다.

 

말을 하려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고 소리를 치려해도 소용이 없고,

두꺼운 유리가 가로막혀져서 입이 벙긋벙긋 하는 것을 보면서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속 태우는 그대로였다.

남영동 5층 구석방에서의 23일, 이것은 지옥이었다.

독가스 대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였다.

시간이 종국적으로 멈춰 버린 영원한 저주의 세계였다.

나는 이 전부를, 이 부서져 쓰러졌던 죽음을 불과 몇 분 동안에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문받았던 얘기를 단순하게 묘사함으로써 깊고 깊게 패인 상처 그 전부를 알아듣기 바랐던 것이었다.

 

그러니 톱니바퀴가 서로 헛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내 처를 기적처럼 만나서 내 처에게 요령있게 설명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듯한 이 분위기에서

나는 또 다시 깊은 소외감, 버림받은 서러움으로 생채기를 입었다.

그러나 서서히 톱니바퀴가 맞아들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팔꿈치는 피딱지가 져 있었지만, 발뒤꿈치는 그날 아침까지 피고름이 흘렀었다.

 

이것을 모두 내 처는 똑똑히 보았다.

검찰청 4층에 있는 대기실로 들어가 앉아 있었다.

나는 거듭 발뒤꿈치, 발등, 팔꿈치를 보여 주었고, 내 처도 재삼재사 확인했다.

내 처는 그늘진 복도에 서 있어 미묘한 표정을 보기가 어려웠지만, 나는 그러나 느낄 수 있었다.

멍하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에서 맹렬하게 분노하는 표정으로 변하는 것을,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러더니 통곡하는 표정이 되고, 대기실 경찰이 저지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내개로 걸어들어 오는 것이었다.

그 쪽문을 닫아 버리니까 또 다른 문으로 돌아오고, 내 처는 그 참혹함을 통째로 이해한 것 같았다.

 

내 처의 치 떨리는 분노로 흐들거리는 것이 나에게 전해 오는 것이었다.

나를 위한 그 분노, 그 눈물이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이도록 만들었다.

 

완전히 메말라 버려 눈물 따위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내 눈에도 물기가 어렸다.

내 편을 들어주는 친구도 있었구나, 아직 이 세상에 신음, 비명이야 수없이 질러대고

고통과 공포 속에서 울부짖음으로 제 정신이 아니었지만, 남영동에서 진짜 눈물은 꼭 한 번 흘렸다.

그 이후 나에게서 눈물 같은 것은 사라져 버렸다.

9월 20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반국가단체로 민청련을 몰고 그렇게 피의신문 조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베끼고 종착역에 도착한 것이다.

 

그 혼란 중에서도 나는 이것의 현실적인 의미를 명백히 알 수 있었다.

합법을 가장한 살해를 성취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저들은 한 단계 한 단계 밟아온 것이었다.

 

나는 여기 남영동에서 정치군부의 하수인들에 의해 살해되는 과정의 예비단계를 지나 그것의 확고한 단계로 떠밀려 간 것이었다.

죽음은 이렇게 오는 것이구나,

고문으로 이미 쓰러져 죽어 있던 나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합법을 가장하여 살해되는구나,

그렇게 하여 죽음을 완성시키는구나, 저들은.

나는 이때 슬퍼서 눈물울 흘렸다.

줄줄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이미 회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덧씌워져 온 것이다.

 

그리고 나서 눈물은 완전히 말라 버렸는데.....

그랬었는데 내 처의 떨리는 가슴이, 그 눈물이, 아니 창 밖으로 흐르는 푸른 하늘이 내 눈물을 되돌아오게 한 것이었다.

대기실 경찰들은 내 처를 저지하느라고 앞뒷문을 모두 닫아 버리더니 더운지 다시 문을 열어 제꼈다.

내 처는 뭐라고 말하고 사라지더니 잠시 후 아기를 업은 이을호 씨의 처 최정순씨와 같이 나타났다.

대기실 입구에 서서 내 상처를 눈여겨보고 헤드라이트 같은 커다란 두 눈이 되는 최정순씨였다.

얼마 후 대기실을 나와 처의 부축을 받으면서 5층 김원치 검사 방 입구까지 같이 갔다.

김원치 검사 방에 들어가 얼마쯤 있으려니까 김상철 변호사가 들어왔다.

내 변호인임을 밝히면서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손을 마주 잡고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발뒤꿈치, 발등, 팔꿈치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히 기억을 해내서 말했다.

 

맞은편 자리에서 김원치 검사도 들었다.

김상철 변호인이 들어오기 전에도 고문받은 사실을 말하고, 상처를 김원치 검사에게 보여 주었음은 물론이다.

 

눈물샘이 터졌는지 김상철 변호사와 얘기하면서 나는 자꾸 콧등이 매캐해졌다.

목소리도 자꾸 떨려오고 연달아 아는 세 사람의 우리편, 좋은 나라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잃어버린 내 영토를 수복해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검사 방을 나와 구치소로 가는 차를 타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로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처는 나를 부축해 주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나는 용기를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부축하는 처에게 반복해서 고문 얘기를 했고 확실히 기억하도록 당부했다.

구치소로 가는 포니 자동차를 타기 직전 나는 웃어 보였다.

처에게 힘껏 웃어주고 나는 떠났다.

ㅡ 진보개혁모임 창립대회 기념사



오늘 “대한국민”의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모욕을 당하고 있다.

짓밟히고 있다.

 

오늘 “대한국민”의 민생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 외면되고, 경시되고 있다.

한마디로 민생은 심각하다.

위기이다.

 

수출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고환율과 저금리가 계속 유지되는 한

이 정권 아래에서 물가대란은 막을 수 없다.

 

부자감세를 계속하고, 유류세의 탄력적용을 거부하는 한 유류가 급등으로 서민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부동산 가격하락을 막아야, 금융을, 그리고 경제가 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런 토건철학이 권력집단의 마인드로 자리 잡고 있는 한, “전세대란”은 서민들 당신네들의 걱정거리일 뿐이다.

“주거”의 공공성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있어야 중·장기적으로 전세대란을 극복할 수 있다.

 

세계금융위기를 일으킨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시장강자중심주의,

벌거벗은 천민자본주의를 신성한 시장경제라고 주장하면서 빈익빈, 부익부를 격화시키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독재적이 아니라 이미 “민간독재”인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빈익빈 부익부를 격화시켜 국민을 대립과 갈등케 만드는 국민분열 세력이다.

 

지금 우리는 크게 분노해야 할 때이다.

꼭 그때 그 처럼은 아니지만 다시 “운동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여기에, 우리는 모였다.

오늘 그 출발의 하나로 “진보개혁 모임”을 발족시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 볼 것이다.

그야말로 뼈를 깎는 성찰을 국민 여러분께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야 국민 속에서 다시 부활 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다.

고맙다. 마치겠다.

 

 

2011년 3월 8일

진보개혁모임 공동대표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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