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형식(대구 한의대 교수)의 넋 나간 황홀경 - ‘朴비어천가’ 인용합니다.

 

"꽃 중의 꽃 근혜님 꽃! 8천만의 가슴에 피어라, 피어라, 영원히 피어라!

백두산 상상봉에 한라산 언덕 위에 민족의 꽃이 되어 아름답게 피어라!

별 중의 별 근혜님 별! 8천만의 마음에 빛나라, 빛나라, 영원히 빛나라!

저 하늘 높은 곳에 이 땅의 온누리에 아름다운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라!”

 

▲ ‘어천가’와 ‘鄧비어천가’ 핵심은 “번신물망모택동, 치부물망등소평” (飜身勿忘毛澤東, 致平)입니다.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난 건(정치적 해방) 오쩌둥 덕, 민을 먹고살게 한 건(경해방) 덩샤오핑 덕이니 이들을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중의 역사학자들이 입을 모아 마오를 ‘파(破)의 지자’, 덩을 ‘입(立)의 지도자’로 칭송하면서 주문처럼 읊조리는 문구입니다. 꼭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천편일률적’ 인식조차 곽형식의 ‘박비어천가’만큼 낯부끄러울 일도 아니고, 그저 감성에 치우쳤던 이인화(이화여대 교수)의 ‘朴비어천가’보다는 낯간지러울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소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이후 봉건적 신분제 피 말디 한번이나마 중국 인민들이 ‘정치적 자유권’을 누려본 적이나 있었습니까. 지난날 빈곤의 유는 일단 논외로 친다면, 근래 덩의 개혁개방조차 우리나라로 치면 박정희가 성취한 거와 유사한 ‘서구식 산업화’의 성공적 도정일 따름이지, 그게 어디 중국 인민들의 ‘사회경제적 기본권’ 향유나 풍요의 공유이기나 한 겁니까. 사실 이거야말로 이른바 정치민주화의 위업을 달성한 우리 대한민국이 비로소 오늘날 성취해 나가야 할, 이 시대 최고최대의 현안 과제로 생각합니다.

 

※ 세상에 무슨 진선진미한 건 없을 겁니다. 모처럼 조선일보의 국제관계 좋은 기사 올립니다. 한겨레와 조선일보의 좋기사 비율이 대체로 7 : 3이라면 나쁜 기사 비율은 3 : 7 정도일 겁니다. 이하, 요지와 함께 [조선] 기사, “115년 만에 일본 제친 중국… 中華주의 부활로 주변국 긴장!” 링크시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23&aid=0002456439

 

 

⑴ 경제력 美 이어 2위의 ‘G2 시대’로… 지난 10년간 年평균 10%대 고성장…

 

후진타오가 집권한 지난 10년은 중국이 'G2(주요 2개국)'로 불릴 정도로 경제·군사 등 각 방면에 걸쳐 국력이 크게 신장. 지난 10년간 연평균 10.7%의 고성장 기록. 2010년 일본을 넘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 2002년 1135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GDP지난해 5432달러로 4.7배가 돼. 전체 GDP도 같은 기간 미국의 7분의 1에서 절반 가까치솟아. 빈부·지역 격차에도 불구하고, 중국 동부 연안 지역의 상당수가 1인당 GDP 1만 달러를 넘어서는 등 전반적인 생활수준도 높아져.

 

이런 성장은 장쩌민 시절인 2001년 이뤄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기반으로 작용. 하지만 후진타오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4조 위안(약 7200조원)의 과감한 경기 양책으로 돌파하는 등 중국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끈 점을 과소평가할 수 없어. 또 3조 달러가 넘는 두둑한 외환을 쌓았고, 국가 채무가 GDP의 40%에 불과할 정도로 탄탄한 재정도 구축.

 

 

⑵ 군사력도 ‘G2' 시대로… 70년 숙원' 항공모함 첫 배치, 유인우주선 도킹도 성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군사력 강화와 우주 개발도 본격화. 중국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국방비는 2002년 225억 달러에서 2011년 899억 달러로 4배 수준으로 증가.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다는 것이 해외 연구기관들의 평가. 중국인의 70년 숙원이던 첫 항공모함 랴오닝(遼寧)호도 실전 배치.

 

2003년 첫 유인우주선을 발사한 데 이어, 올해는 우주정거장 건설에 필수적인 유인우주선 도킹기술까지 확보해 물오른 과학기술 수준을 과시. 2008년 건국 후 처음으로 개최된 베이징올림픽은 중국민이 지난 100년 치욕의 역사를 씻고, 자존심을 회복한 대형 이벤트.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이 주변국에 대한 외교적 오만과 군사적 압박으로 이어지면서, '중국 위협론'과 중화주의 부활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어.

 

 

⑶ 3通으로 대만관계 획기적 개선 - 편지도 힘들었는데 이젠 관광객들 서로 왕

 

중·대만 양안 관계 개선은 후진타오의 최대 치적으로 꼽혀. 1990년대만 해도 양안 관계최악. 1995~1996년 중국군이 대만 부근 해역에 미사일을 연달아 발사해 미국의 항모핵잠수함이 출동하는 대만 해협 위기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후진타오는 취임 후 중앙당 내 대만 소조 조장을 직접 맡아 강온 양면책으로 대만 관계를 풀어나가.

 

대만 독립 주장에는 강경 대응을 계속하면서도, 양안 교류와 경제 협력 분야에서는 통 양보로 대만을 끌어들여. 2008년 양안 간 직항로 개설과 직교역, 서신 왕래 등 3통(通)합의됐고, 2010년에는 자유무역협정(FTA) 격인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 대만인의 반중(反中) 정서가 모두 해소된 건 아니지만, 10년 전 서신 교환조차 어려웠던 양안 관계는 서로 관광객이 오갈 정도로 해빙. 지난달 4일에는 '대만 독립'을 내걸고 중국과 대립해대만 민진당의 전 주석 셰창팅(謝長廷·67)이 방중하기도. 2008년의 대만 대선 당시 현 총통 마잉주(馬英九)와 대결했던 그는 역대 중국을 방문한 최고위급 민진당 인사.

 

 

⑷ 향후 최대 숙제 - 서부 대개발 본격 추진 등으로 ‘균부’(均富) 시대 열어내

 

여전히 많은 과제를 남기고 있지만, 경제·사회 분야에서도 나름대로 긍정적 평가를 는 부분이 있어. 후진타오는 '과학적 발전관'을 표방하면서 지역·도농 간 불균형 해소에 노력. 2000년대 후반 농업세가 전면 폐지됐고, 농촌 지역 의료·양로보험 도입. 낙후한 중부 내륙과 서부 지역 발전을 위한 '중부굴기'와 서부 대개발 정책도 그의 임기 중에 본격 추진을 시작. 물론 아직 갈 길이 멀고도 먼, 중국 최대의 향후 숙제일 것.

 

2012. 11. 7. (수) / 오용석, 개방과 통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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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

012/07/10 08:00 김삼웅

 

운명의 여신은 다시 한번 학구파 청년에게 학문연마의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박정희가 기획ㆍ각본ㆍ연출한 유신체제는 김근태에게 고난의 길을 강요했다. 운명의 갈림길은 극적이었다.

사회운동으로 진출하려니 막막했고 사회과학적 이론을 더 쌓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그리고 내심 수배가 아니기를 확인해보고 싶은 복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주석 10)

김근태는 홍성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면회 온 이재화에게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서릿발치는 유신 초기에 ‘사회운동의 진출’은 그가 아닌 누구라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여 대안으로 택한 것이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사태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형 국태 씨에게 전화를 해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내게 했고, 입학시험 당일에 다시 형에게 전화를 해 “수험표를 갖고 시험장에 나와 달라. 혹시 시험장에 수사기관원이 나와 있을 지 모르니 잘 살펴보라”고 했다. 형 국태 씨는 동생이 부탁한 대로 시험장에 수험표를 갖고 나갔다. 아니나다를까 수사관이 쫙 깔려 있었고, 시험이 시작되었는데도 김근태 씨의 모습은 끝끝내 보이질 않았다. 형 국태 씨는 동생이 나타나지 않자 동숭동 소재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곧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먼 발치에서 형을 보고 있었다. 수사기관원들이 나와 있어서 나가지 않았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이렇게 해서 그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도 있었던 대학원 진학은 좌절되고 말았다. (주석 11)

보통 사람들의 운명은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손에 결정되는지 몰라도, 한 시대 지도자들의 운명은 시대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김근태가 당시 대학원 진학이 가능했다면 그의 생애는 평탄하면서 학자의 길을 걷게 되고 학문의 업적을 남겼을 지 모른다.

김근태는 평탄한 길을 접고, 저항의 길에 들어섰다. 운명적인 측면도 있지만, 피 속에 전하는 형들과 가족사의 DNA(유전인자)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동지들의 고난과 박정희 체제의 광폭성이 젊은 지성으로 하여금 광야로 나서게 하는 ‘시대정신’도 끼었을 터였다.

박정희의 권력욕구는 자제력이 보이지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의 필수적인 야당, 언론, 사법부 등이 그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유신쿠데타를 자행하면서부터 그는 모든 비판을 불허하는 신격화의 존재처럼 행세하였다.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 반유신 활동을 하는 김대중을 납치해오고, 1974년 1월 8일에는 긴급조치 1호를 선포, 유신 헌법에 대한 반대와 개헌 논의를 금지시키면서 위반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군법회의를 설치했다. 민간인들을 군사법정에 세우는 야만성을 드러냈다. 그리고 비판적인 언론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짓밟았다.

하지만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1973년 3월 30일 전남대의 <함성> <고발>등 유신반대 유인물 살포 사건, 5월 20일 기독교인들의 유신과 박정희 반대의 <신앙선언문>사건, 9월 6일 서울 제1교회 박형규 목사 중심의 남산부활절 예배사건 등 반유신ㆍ반박정희의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유신 선포 이후 대학가 최초의 반유신운동은 1973년 10월 2일 서울문리대 비상학생총회 소속 250여 명이 자유민주체제 회복을 요구하는 내용의 선언문 낭독과 시위였다. 반유신의 횃불은 4일의 법대생 시위에 이어 5일에는 상대생 300여 명이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규명과 대일예속 청산, 자립경제 확립, 중앙정보부 해체, 학원자유 보장 등을 촉구하는 선언문 낭독과 시한부 농성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유신 선포 1년 만에 박정희는 다시 대학생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서울대생들을 스타트로 하여 전국의 대학가에서는 다시 반정부 투쟁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박정희는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여 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에 좌경의 족쇄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3월 들어 각 대학에서 유신철폐 시위가 빈발하는 한편 전국 대학의 반독재 연합시위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폭력혁명을 시도한다고 날조하면서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민청학련 주모자라 하여 253명을 구속했다.

구속자 중에는 윤보선ㆍ지학순ㆍ박형규ㆍ김찬국ㆍ김지하를 비롯하여, 이른바 인혁당재건 관련자 21명, 일본인 2명이 포함되었다. 김근태의 동료 중에서도 여러 명이 구속되었다.

1975년 3월 28일 수원의 서울대 농대 학생총회는 제1차 대학선언과 제2차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원자유 보장과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한데 이어 4월 2일에는 박정희에게 학원과 사회 제반 사태를 타개할 일대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4월 4일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을 벌였다. 이때 한국학생운동에 커다란 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11일 학내에서 벌어진 자유성토대회에서 연사로 나선 김상진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의 양심선언문을 발표하고 할복, 다음날 사망하였다.

김상진의 할복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그를 추모하는 집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학생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서울대생 4,000여 명은 5월 22일 김상진 열사 추도식을 거행한 뒤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이후 일어난 최초의 시위였다. 80여 명이 연행되고, 29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김근태는 서울대생 시위와 명동성당의 김상진 장례식을 주도하여 더욱 수배가 강화되었다.

김근태는 이번에도 피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가 또 다시 그의 친구들을 기소하면서 김근태는 ‘공소외’로 기재하였다. 당국은 김근태를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었으나 용케 피신할 수 있었다.

그는 수배중 자신이 대학원에 진학해서 하고자 한 사회과학 공부를 함과 동시에 운동가가 가져야 할 철저한 규율을 몸소 실천했다. 수배중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생활했는가에 대해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중이었던 손학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민청학련 관련으로 수배중인 나와 장기표ㆍ김승균ㆍ심재권ㆍ신동수 등과 5ㆍ22사건으로 수배된 김근태는 수배중에도 가끔씩 만나곤 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수배중에 있었던 주변 이야기를 하거나 동료들에 대한 근황을 물어보곤 했는데, 유독 김근태만은 자신의 근황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결코 묻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다음 행선지에 대해 다른 사람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끔 철저하게 방비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주석 12)


주석
10> 앞과 같음.
11> 앞과 같음.
12> 이재화, 앞의 책, 159~160쪽.

 



 

병준, 병민에게

 

병준아, 병민아 잘 있었니.


오랫동안 너희들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했구나.
아버지는 이사를 하였고, 유난히 마음상하는 일이 있어 그렇게 되었단다.
우리 병준이, 병민이가 씩씩하게 자라는 것은 엄마가 보내주는 편지를 통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특히 엄마편지와 함께 날아 온 너희들의 그림을 재미있게 들여다 본단다.
엄마, 아빠를 그린 병준이 그림, 병민이 그림 모두 잘 그렸고, 글씨도 잘 쓰는구나.


병준아, 학교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그린 네 그림 속에서 금방 병준이가 "아버지!" 하면서 뛰어나올 것 같구나.
학교생활이 신나고, 동무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그 그림에 배어 있구나.
하늘에는 해가 환하게 웃고 있고 말이다.


그 해는 하늘에 있지만, 병준이 마음 속에도 있을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병준아, 뛰어놀다 보면 가끔 넘어지고, 넘어져 무르팍이 깨지기도 하지.
또 피가 나 울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들의 신나고 재미있는 생활 속에 가끔 걸림돌이 나타나고 어떤 때는 방해꾼조차 쫓아와 괴롭히기도 하는 것을

병준이 너도 어렴풋이나마 알리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학교생활, 새로운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들 만나는 것이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기쁨으로 너에게 다가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 긴장들도 왔을 것이다.
쉽고 재미있는 공부와 숙제도 있지만, 따분하고 몹시 귀찮은 것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걸림돌이란다.
여기에 걸려 넘어져 무르팍 깨져 피가 나듯이 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적도 있을 것이다.


넘어져 한바탕 울고나서는 또 동무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병준이는 놀지. 그렇단다.
놀다가 넘어져 다치는 것이 무서워 놀지 않는 것은 너희들에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바보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니.
그건 지는 것이란다.

병준아, 너는, 가슴에 태양을 안고 있는 너는 넘어지는 것을 상처입는 것을 훌륭하게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아버지는 믿는다.
있잖니, 너희들을 떠난 뒤 어떤 사람이 딴지를 걸어 아버지도 넘어졌단다.


심하게 다치기도 했었다.
외롭고 무서워 울기도 했다.
꾹꾹 눌러 속으로 울었단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일어났다.
엄마, 큰엄마, 큰아버지가 도와주고 엄마, 아버지 친구들이 어깨를 빌려줘 저 컴컴한 어두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병준이 그림 속의 태양을 보면서, 아버지도 그런 밝음을 마음 속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겠다고 결심을 했단다.


병민아, 네 생일을 축하한다.
뒤늦게야 축하하고, 너한테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
언니들, 오빠들 하고 네 생일을 축하하면서 즐거워했다고 엄마한테 들었다.
병민이처럼 튼튼하고 마음이 고운 아이가 딸인 것이 아버지는 무척 자랑스럽다.
욕심장이로서 자존심이 강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면서도 의견이 따로 있는 네가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다.
옷도 혼자 입고 그 선택도 네 스스로 하고, 또 엄마와 함께 집안 청소도 한다지.


병민아, 네 손을 잡고 놀이터에도 가소 약수터에도 가게 될 날을 아버지는 기다린다.


병민아, 역곡 일두아파트 뒤에 있던 약수터 기억하고 있니?
거기에 네 손을 잡고 노래부르면서 오빠, 엄마와 함께 갔던 것 나는 그리워한단다.
약수터 가는 논길에서는 개골개골 개구리 소리가 병민이을 반겨주었고, 앞쪽 산 숲에서는 뻐꾸기가 뻐꾹, 뻐꾹, 뻐어꾹 소리내면서

다시 한번 약수터에 가자.
그래서 개구리도 만나고 뻐꾸기도 만나고 말이다.


참 병민아, 너는 엄마보고 "재근아, 재근아" 그런다며.
엄마가 네 친구여서 이름을 부른다지.
엄마는 조금 난처하면서도 재미가 있는 모양이더라.


병민아, 너는 배짱이 센 놈이로구나.
그래, 엄마, 아버지는 병민, 병준이 어머니, 아버지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단다.
그런데 진짜 친구가 된다는 것은 너 스스로 생활에 책임을 질 때 가능한 것이란다.

 

그건 쉽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병민이가 더욱 애쓰고 엄마, 아버지가 돕도록 하자,
이 얘기는 어려워서 다음 기회에 자세히 얘기하자꾸나.


잘 있어라


(1986년 6월 19일, 영등포구치소에서 아들 병준, 딸 병민에게 보낸 편지)

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09 08:00 김삼웅

 


대학가에서는 4ㆍ27 대통령 선거의 부정ㆍ불법에 항거하여 대규모적인 규탄시위가 벌어졌다.
1971년 5월 27일 서울대 공대ㆍ문리대ㆍ상대ㆍ약대ㆍ의대ㆍ치대생 등 900여명과 서강대생 200여명은 구속학생 석방, 학원자유 수호, 교련반대 등을 외치며 교내 시위에 이어 가두에 진출했다. 김근태는 이 시위에 앞장섰다.

정부는 이날 서울대 문리대ㆍ법대ㆍ상대ㆍ사대에 휴업령을 내리고 교문을 폐쇄했다.
9월 30일에는 수도경비사 장교들이 고려대학에 난입하는 폭거가 자행되기도 했다. 김근태는 1971년 11월,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고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수배자의 신세가 되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71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모의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했다”면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위원장 심재권(서울대 상대 3년), <자유의 종> 발행인 이신범(서울대 법대 4년), 장기표(서울대 법대 3년), 조영래(사법연수원생), 김근태(서울대 상대 3년) 등을 구속했다. 이들은 10월 15일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대학에서 제적되었으며, 이들에게 주어진 혐의는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 폭력을 이용한 주요 관공서 파괴ㆍ점령과 박정희 대통령 강제 하야, 혁명위원회 구성과 헌법기능 정지 후 정부전복 기도를 계획했다는 것이었다. (주석 7)

정부가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내란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꾸며 구속한 것은 날로 격화되어가는 학생시위를 저지하려는 정치적 책략에서였다. 특히 4ㆍ27 대통령선거의 부정을 규탄하기 위해 학생들이 조직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학생연맹)을 겨냥하는 처사였다.

‘학생연맹’은 1971년 4월, 13개 대학 학생 대표로 구성되어 4ㆍ27 대통령 선거 참관을 실시하는 한편 소속 대학의 시위를 주도하는 등 반정부 학생운동의 핵심 서클이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 보복적인 집중 타격을 가한 것이다.

김근태는 동료들이 구속될 때 용케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검찰은 이들을 구속기소하면서 김근태는 ‘공소외’로 표기하여 별명의 하나가 되었다. 정보부 요원과 형사들의 추적을 따돌리면서 피신하고 있을 때 구속된 심재권ㆍ이신범ㆍ장기표ㆍ조영래 등은 수사 기관에서 가혹한 구타를 당하고, 검찰은 9월 5일 항소심 결심 공판에서 이들에게 징역 10년씩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9월 11일 징역 10년 6월과 2년, 집행유예 3년 등을 각각 선고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 공소사실의 허구성이 폭로되고 수사기관의 가혹행위가 드러나 크게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 이 사건은 선고 공판에서 반국가단체 구성과 예비음모 부분은 무죄, 기타 부분은 유죄가 인정된다. 당초 검찰이 발표한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의 허구가 밝혀진 것이다. 김근태는 이 때부터 길고 긴 피신 생활을 하게 되었다. 수배자들의 끈질긴 추격을 따돌리고, 숨어 사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5공 때는 그마저 불가능했다.

김근태는 변형윤 교수 등의 배려로 수배 중에 시험 대신 우편으로 리포트를 제출하여, 1972년 2월 가까스로 서울상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피신 생활 중에 택한 방편에는 가명으로 취업하는 길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위장취업자’라 하여 회사ㆍ공장을 뒤져 찾아다가 처벌하였다. 노동자들을 ‘의식화’ 시킨다는 이유였다.

이 때부터 그는 길고 긴 수배생활에 들어갔다. 물론 그 기간 동안 간간이 수배로부터 ‘사실상 해제’된 상태도 없지 않았으나 그 기간은 매우 짧았다.

피신을 하던 그는 피신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오는 한 방편으로 일신산업(일신제강의 전신)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그는 수출 업무를 맡아 약 11개월 동안 근무했다. 그의 45년 생애(인터뷰 시점-필자)에 넥타이를 매고 월급봉투를 만져 본 유일한 기간이었다.
(주석 8)

김근태가 일신산업에서 월급쟁이 노릇을 하고 있을 때는 ‘학생연맹’의 친구들이 옥살이를 하고, 박정희가 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 선언에 이어 12월 27일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보위법을 변칙적으로 통과시키면서 영구집권의 길목으로 치닫고 있는 시점이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마침내 군부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유신쿠데타를 감행하였다.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공개적으로 폭로하고, 자신들이 우려했던 한국판 총통제가 ‘유신’의 이름으로 현실화되어 나타났다.

그야말로 국체변혁의 내란행위였다. 김근태는 긴 고민에 빠져들었다. 유신쿠데타로 양심적인 야당정치인, 재야인사, 학생, 노동운동가들이 속속 구속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 한국사회는 11년 전 5ㆍ16쿠데타 당시의 상황이 재현되고 있었다.

김근태는 이런 상황에서 남들처럼 넥타이 메고 출퇴근하면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할 것인가,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인권이 유린되는 유신체제에 도전하는 사회운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대학원에 들어가 더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거듭하였다. 성격상 ‘햄릿적’이어서 그의 고민의 심도는 깊어갔다. 이때의 고민은 그리고 결과는 인간 김근태가 고난의 길을 걷게 하는 ‘민주주의자’의 선택이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몇 개월 후 그는 회사생활이 자신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판단, 사회운동으로 전환할 것인가 아니면 대학원에 들어갈 것인가 고민하던 중 대학원 진학의 길로 마음을 정하고 시험준비에 돌입했다. (주석 9)


주석
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226쪽, 2006.
8> 이재화, 앞의 책, 159쪽.
9> 앞의 책,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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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

012/07/08 08:00 김삼웅

 

박정희는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두번째 제치고 재선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해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였다. 박정희는 이때 이미 3선 개헌을 구상하면서 6ㆍ8총선거를 관권 부정선거로 치뤘다. 3ㆍ15를 방불케 하는 공개ㆍ대리투표 등 부정 타락선거였다. 야당은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학생들은 연일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였다.

김근태는 이때 3학년이었다. 상대 대의원회 의장에 선출될 만큼 동료들의 신임을 받았다. 민주주의 기초인 선거의 부패ㆍ타락상을 지켜보면서 침묵할 수가 없었다. 6월 10일 김근태는 상대생들을 이끌고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다. 6월 15일에는 전국 21개 고교와 5개 대학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21일에는 서울대ㆍ연세대ㆍ성균관대ㆍ건국대 등 학생 대표들이 모여 ‘부정부패 일소 전국학생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부정선거규탄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후에도 6월 내내 서울시내 대학생들은 ‘학원주권 수호’와 ‘부정선거 규탄’을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6월 15일 서울대 등 서울의 주요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강압적으로 학원시위를 봉쇄하려 했지만, 시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김근태는 연일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앞장섰다. 학생운동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보복이 따랐다. 학교 당국은 김근태를 상대생 시위 주동을 이유로 권고처분에 이어 제적이라는 ‘극형’에 처했다. 한 달 뒤에는 신체검사도 받지 않고 강제로 군에 끌려갔다. 박정희 정권은 이때부터 시위학생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키는 이른바 ‘강제징집’을 자행하였다. 정부는 교련을 거부한 학생들에게 35개 대학에서 13,505명에게 병무신고를 하게 하고 그 중 5,000명에게 집병영장을 발부했다. 데모 주동으로 제적된 학생 중 71명에게 1차로 영장이 발부되고 이들을 징집열차에 태웠다.

1971년 입영열차 오르는 강제징집 대학생들. 사진은 http://cafe.daum.net/asssuplee

 

박정희 정권은 국방의무를 반정부 학생들을 처벌하는 형벌로, 그리고 군복무를 유배지로 악용한 것이다. 김근태는 그 첫 희생자가 되었다. 1967년 9월의 일이다. 3학년 2학기가 개학하기도 전에 제적을 당하고 논산훈련소로 끌려갔다.

한 언론인은 징집 학생들이 강제 입영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제적학생들이 첫번째로 입영하던 10월 26일, 이미 동대문경찰서에 신병이 확보된 서울대 대의원회의장 김재홍(문리대 정치학과 3년)과 최대철(법대 행정과 3년) 등 10명의 학생들은 경찰서 앞마당에서 경찰에 인솔되어 용산역으로 나가기 전 배웅나온 서울법대 박병호 학생과장과 김치선 교무과장을 보자 눈물을 글썽였다.

오후 4시경부터 용산역 앞 광장에는 입영학생들의 학우와 교수 및 가족 등 5백여명이 모여 교가, 응원가, 이별의 노래를 부르며 이들을 전송했다.

이날 입영한 학생은 서울대 9명(법대. 문리대ㆍ상대 각 3명), 고대 5명, 연대 5명, 성대 3명, 서강대 2명, 건대 2명, 서울시립농대 2명, 강원대 1명, 명지대 1명 등 모두 30명이었다.
(주석 4)

이 기사의 ‘서울대 9명’ 중에는 김근태도 끼어 있었다.
‘강제징집’된 학생들은 훈련과정이나 부대 배치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의 불이익이 따랐다.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군의 처사는 대단히 적대적이어서 훈련 중 심한 구타가 일쑤이고 대부분 최전방 부대로 배치되었다. 김근태도 다르지 않았다. 소속 부대는 물론 방첩대의 감시로 책 한 권, 편지 한 통 맘 놓고 보고 쓰기 어려웠다.

3년여 만에 육군병장으로 제대한 김근태는 1970년 8월에 복학하게 되었다.
김근태가 군에 복무하고 있을 즈음에 국내 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정부는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서울침투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 창설(4월 1일), 중앙정보부의 통일혁명당사건 발표(8월 24일), 국민교육헌장 선포(12월 5일), 공화당 3선개헌안 날치기 통과(1969년 9월 14일), 개헌안 국민투표(10월 17일), 3선개헌반대 학생시위 격화(6월 19일~12월) 등 박정희의 국가안보를 빙자한 장기집권 책략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박정희는 3선개헌을 강행하면서 이미 장기집권의 ‘건널 수 없는 강’을 넘어섰다.
이 과정에서 국가안보 문제를 적절히 활용하고, 공화당 내의 개헌반대 세력을 제거하면서 1인독재의 길을 열었다. 이승만이 장기집권 끝에 쫓겨난지 9년, 민주정부를 쿠데타로 타도하고 자신의 손으로 대통령 4년 중임제의 헌법을 만든지 6년 만의 일이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1970년 9월 전당대회에서 40대 후보들의 치열한 대결 끝에 비주류의 김대중이 주류의 지원을 받은 김영삼을 제치고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다. 11월 13일에는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의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하여, 1970년대 노동운동의 자극제 역할을 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1969년부터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각 대학에 군사교련을 실시하였다. 향토예비군이 제대를 한 청장년들을 상대로 한 것이라면 교련은 재학생들을 한 묶음으로 엮으려는 준군사조직이었다. 국가안보를 내세워 대학생들을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1969년부터는 교련이 대학의 정규과목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교련은 대학이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는 지식의 생산과 토론이라는 교육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동떨어진 과목이었다. 교련 교육이 정규과목으로 채택되는 과정에서 대학의 교양교육 및 학사운영 전반이 큰 영향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학내에서의 토론이나 의사수렴은 전혀 불가능하였다. 교련은 형식상 대학의 교과과정에 들어있는 것이면서도 그것은 대학의 학문적인 공동체 바깥에 놓여있는 것이었고 교수들의 영역과는 무관하게 군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 것이었다. (주석 5)

박정희 정권이 전국의 대학에서 교련을 실시한 것은 대학의 병영화를 통해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정부의 의도를 꿰뚫은 학생들은 교련 철폐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근태가 참여한 서울대 총학생회는 1971년 <교련철폐 투쟁선언>을 발표하고, 다음날 서울대 사회학과생들은 <교련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교련 철폐를 주장했다. 이것이 대학가 ‘교련철폐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전체 국가예산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자금과 관권을 총동원하고서도 어렵게 승리하였다. 김대중 후보와의 표차는 95만여표에 달했으나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과 대도시에서는 사실상 패배하였다. 박정희는 3선에 만족하지 않고 영구집권을 획책하면서 가장 저항이 심한 김대중과 대학을 더욱 심하게 탄압했다.

김근태가 속한 서울상과대학 교수들은 1971년 8월 21일 <대학자치선언>을 발표하면서 정부의 대학 간섭을 비판하였다.

“오늘날 우리 대학은 내외로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그 위기의 근본요인은 대학운영의 비자치성에 연유한다. 형식적 자유와 실질적 자유가 망라됨으로써 본래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대학의 본질에 비추어 대학의 운영이 상부기관의 자의에 좌우되는 현실적 제도하에서 대학의 대학다운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주석 6)고 완곡하게 나마 정부의 처사를 비판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확보하면서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19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로 완벽하게 1인전제 체제를 구축하게 되면서, 대학은 자율성을 잃게 되었다. 교수 중에는 어용 교수도 많았지만, 학자적 양심을 지키면서 반독재 투쟁에 나선 학생들을 음으로 양으로 보호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주석
4> 이경재, <유신쿠데타>, 167~168쪽, 일월서각, 1986.
5> 서울대학교 교수민주화운동 5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교수 민주화운동 50년사>, 66쪽, 1997, 서울대학교 출판부.
6> 앞의 책,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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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대로 기자 =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의 부인 김정숙 여사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 부인 김미경 서울대 교수가 3일 나란히 빈곤층 대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야권후보 단일화를 놓고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이뤄진 터라 두 사람의 만남에 정치권 안팎의 눈길이 쏠렸다.

김 여사는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너른들판에서 열린 '가난을 이긴다' 전국자활대회 행사에 참석해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는 사회, 실패한 사람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가 바로 문재인 후보가 꿈꾸고 만들고 싶은 '사람이 먼저인 나라'"라며 문 후보의 정견을 소개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경제규모나 국력에 비해 사회안전망이 너무 취약하고 부모님이 가난하면 자식도 가난할 수밖에 없고 한 번 넘어지면 일어설 수가 없다"며 "이제는 나라가 가난을 극복할 수 있게 지원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미경 교수도 이 행사에 참석해 "국가는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분들이 두 발로 굳건히 설 때까지 기본적인 생계에 책임을 다 해야 한다"며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 기준을 현실에 맞게 개선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안 후보의 꿈은 국민을 보듬는 따뜻한 정부를 만드는 것"이라며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나라가 그의 꿈"이라고 안 후보의 정책을 설명했다.

daer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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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

012/07/07 08:00 김삼웅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http://gtcamp.tistory.com/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김근태는 1965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공대가 아닌 상대를 택한 이유는 확인되지 않지만, 가정의 가난을 극복하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가 대학에 진학한 1965년은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의 추진으로 정국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대학가에서는 굴욕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서울의 시위대는 시내 중심부까지 진출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부족한 재원을 일본에서 가져오기 위해 쿠데타 직후부터 극비리에 한일회담을 진행했다. 여기에는 아시아의 반공기지연대를 통해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압력도 크게 작용하였다.

1961년 6월 미국 대통령 케네디와 일본 수상 이케다(池田)의 회담에 이어, 11월의 박정희-케네디 회담을 통해 한일국교정상화 문제가 한ㆍ미ㆍ일 3국 간에 장막 속에서 은밀히 논의되었다. 대일 협상진행과정을 비밀에 부쳐오던 박정희 정권은 1964년 3월에 와서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밝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근태는 시국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학내의 ‘순수서클’이라는 기독교서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을 뿐이다.

야당과 시민ㆍ학생들의 거센 반대에도 대일굴욕회담을 강행하면서 반대측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박정희 정권의 처사는 한 학구파의 대학생을 더 이상 캠퍼스에서만 머물러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굴욕회담 반대 시위는 야당 및 각계 대표 200여 명이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대정부 경고문을 발표하면서 반대 시위가 대학가로 번졌다.

1964년 3월 24일 고교생을 포함한 대규모 대학생 시위로부터 점화되어 4월 17일의 시위, 5월 20일의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및 5월 25일의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로 이어졌다. 6월 2일 서울시내 대학생 6,000여 명이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광화문까지 진출한 데 이어 3일에는 수만명이 "박정권 타도, 매판자본 몰수" 등을 외치며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이날 저녁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박정희는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물리력으로 제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근태는 학내 사회과학 서클에 가입하고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굴욕외교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도 없이, 돈 몇 푼에 덜컥 국교정상회의 길을 튼 박정희의 처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생운동하는 동료들의 밝은 분위기가 좋았다.”는 것이 그의 운동에 뛰어든 변이다.
물론 그가 운동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성장과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아버지의 강제퇴직, 그로 인한 가난과 소외감 그리고 행방불명된 세 명의 형들의 민족주의적 영향 등이 잠재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와 작고한 조영래 씨와 함께 당시 서울대 운동권에서 ‘경기고 출신 65학번 트로이카’로 불린 손학규 씨는 “김근태가 학생운동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아주 얌전하고 데모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석 1)

박정희는 거센 국민의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1965년 6월 22일 한일회담을 타결하고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다. 기본관계조약은 양국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인 일제강점기의 죄악상에 대한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하고,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무상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에 매듭 짓고 말았다. 액수도 문제지만 동남아 국가들이 전승국으로서의 배상을 받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또 이 협정으로 한국의 40해리 전관수역이 철회되고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이로써 일본의 저인망 어선의 남획으로 우리 인근 바다에서 어족자원이 씨를 말리게 되었다.

김근태는 굴욕회담 반대 시위에는 참가했으나 아직 리더 그룹은 아니어서 계엄사태에서도 구속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상대 안에 구성된 경우회와 경제복지회 등 서클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사회과학 분야의 공부에 매달렸다. 이 시기에 각종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점차 사회의식의 깊이와 지평을 넓혀 나갔다.

당시 문리대의 경우 행동을 중시한 반면 상대는 이론을 중시하는 분위기였다.
상대 내에는 이른바 ‘지하서클’이 다른 대학에 비해 많았고, 사회과학 공부도 훨씬 많이 했다. 그때 공부한 서적은 주로 폴 바란, 스위지, 모리스 돕 등이 쓴 정치경제학 저서들이었다. 1학년 때는 주로 위와 같은 책들을 영어 원서로 공부하고 가끔은 청계천 고서방을 통해 어렵게 입수한 <세계사 교정>(소련 과학아카데미 발행), <조선경제사>(백남운 저) 등 이른바 ‘마분지 서적’ 등을 읽었고, 2학년이 되면서는 일어를 배워 진보적인 일어 서적을 탐독했다.
(주석 2)

김근태는 지식욕이 왕성했다. 진보적인 사회과학 서적을 영어와 일본어 책을 구해 읽으면서 점차 역사문제와 한국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통해 용돈이 생기면 청계천 헌책방을 순회하면서 일제가 남기고 간 교양서적과 미군 PX를 통해 흘러들어온 양서를 구입하였다. 국내외의 문학서적도 많이 구하여 읽었다. 서클에서는 읽은 책을 주제로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당시 상대 조교로 있던 안병직은 김근태가 2학년 때에 처음으로 만났다. 안병직의 증언.

"김근태는 몇 년 만에 나올까말까 하는 비상한 인물이었다. 뛰어난 판단력,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천재’였다. 2학년 초엔 대부분 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등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주로 이야기하는데 그와 수 차례 이야기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미뤄보아 그때 당시부터 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것 같다.” (주석 3)


주석
1> 이재화, 앞의 책, 157쪽.
2> 앞의 책, 157~158쪽.
3> 앞의 책,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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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2장] 가족사의 비극, 우수한 모범생의 소년기

2012/07/06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저항의식은 이 즈음부터 가슴 한 켠에서 모락모락 움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쫓아낸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으나, 그것을 박정희 정권과 연계시키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5.16 군사 쿠데타로 아버지께서 별안간 강제로 정년퇴직하게 되고, 그 이후 우리의 가정 경제는 어려워졌지만 나는 박정희 권력을 지지하는 쪽에 서 있었다. 고교 시절 내내 그랬다. 한일회담 반대 데모 대열에 전교생이 참여했을 때도 나는 두어 명을 꼬셔서 교실에 외롭게 남아 있었고, 그 전해 그러니까 1963년에 있었던 대통령선거에서도 나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주장하는 박정희 쪽이었다. (주석 10)

김근태의 중ㆍ고등학교 시절은 정치사회적으로 격동기였다.
4ㆍ19혁명으로 잠시 민주주의의 꽃이 피는 듯 하다가 1년여 만에 박정희의 군사쿠테타가 일어나면서 천지는 군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김근태는 가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도 사회문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범생’이었다. 경기고 시절에는 아르바이트를 두 군데나 다니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사회문제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영어회화 클럽에도 참석하는 등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고 우등생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여전히 ‘모범생’이었다.
비록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강제퇴직을 계기로 사회가 불합리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형체를 가진 사회의식은 아니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한마디로 ‘친정부적 학생’에 머무르고 있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을 이 나라의 산업발전과 아울러 국민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쾌거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는 박대통령의 말이 대단히 합리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형식논리’에 속은 것이다. 그의 고교동창생들의 기억에도 김근태는 영어회화클럽에 참석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 그 이상은 결코 아니었다.
(주석 11)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고도 모범생이었던 김근태는 여전히 아버지에 관해 소년기의 콤플렉스와 반항심을 털쳐내지 못하였다.

미아리고개에서 살 때였는데 집 근처에 복덕방이 있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아버지께서는 복덕방에서 장기를 두다가 나오시면서 반색을 하시곤 했다. 복덕방 노인들이 빼다 박은 듯 똑같다고 하며 웃으실 때 나도 그냥 따라 웃었지만 그것은 동의의 표시가 아니라, “아니에요, 나는 아버지하고 달라요” 하는 부정의 웃음이었다. 이런 건방진 내가 마음의 빚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이었다. (주석 12)


주석
10> 앞의 책, 417쪽.
11> 이재화, 앞의 책, 156~157쪽.
12> 김근태, 앞의 책, 417쪽.

 


김근태 평전/[2장] 가족사의 비극, 우수한 모범생의 소년기

2012/07/05 08:00 김삼웅

 

 

 

김근태의 형들은 부모의 남다른 교육열로 일제말기 일본에 유학했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민족문제’에 뛰어들었다. 당시 지식청년들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형들의 문제로 인해 김근태는 뒷날 반독재 전선에서 정보기관과 보수신문에 의해 극심한 고문과 색깔론에 시달려야 했다.
6남매 중 큰형 김홍태, 둘째형 김성태 그리고 셋째형 김영태 씨 등 위로 세 명의 형들이 한국전쟁 전후로 민족운동을 하다 그 후 행방불명이 되었고 외갓집의 삼촌들도 마찬가지였다.

큰형 김홍태는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 해방이 되자 귀국해 진보적 운동을 했다. 그는 경기고보에 수석 입학한 ‘수재’로서 해방 당시 ‘탁월한 이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고 당시 우익운동을 했던 계훈제 씨는 말했다.

둘째형 김성태는 맏형 김홍태와 함께 원효로 적산가옥에서 자취를 하면서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 역시 민족운동을 했다.

셋째형 김영태는 양정국교 5학년 때 의용군에 입대했다.
한국전쟁이 날 무렵 김근태는 불과 세 살이어서 형들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저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주석 6)

6.25전쟁기에 이념적으로 갈리거나 피난 중에 이산이 된 가족이 수없이 많았지만, 김근태 가족의 아픔도 컸다. 수재 소리를 듣던 아들 셋이 6ㆍ25 동족상쟁의 와중에서 실종된 것이다. 다시 이재화 씨의 글을 인용한다.

한국전쟁 이후 형 세 명은 집안과 관계가 끊어졌다. 85년 10월 김근태가 민청련사건 (당국은 민추위 배후인물로 그를 엮으려 했다)으로 구속되면서 검찰은 “위 3명의 형들이 월북했다” 며 언론 플레이를 해, 모든 언론매체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그러나 형 국태 씨는 “큰형이 9.28수복 이후 수원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둘째형은 1ㆍ4후퇴 때 서울에서 봤다”는 풍문만 떠돌았을 뿐 확인할 길이 없다고 했다.

어쨌든 한국전쟁 이후 김근태 씨의 집안은 쑥밭이 되어버렸다. 그의 집에는 연일 형사들이 진을 쳤고, 부모들은 소식이 두절된 아들들의 얼굴을 생전에 한 번이라도 봤으면 하고 울먹이곤 했다.
(주석 7)

어린 김근태에게 형들 특히 맏형 김홍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가 그토록 경기고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은 맏형에 대한 막연한 선망 때문이기도 하였다.

김근태는 1958년 서울의 사대부중과 경복중학교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졌다. 충격이 컸다. 형들의 뒤를 따르고자 하여 아버지에게 1년 동안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에 재수하도록 요청했으나 가정형편상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2차인 광신중학교에 “시험 한번 쳐보기나 하라”고 하여 마지못해 응했다가 수석을 했다. 이런 연유로 광신중학교를 다니면서 장학금을 받고 줄곧 수석을 하였다. 광신중학 3학년 때 학원 장학회에서 실시하는 장학금수혜자 시험에 응시하여, 고교, 대학까지 장학금 혜택을 받게 되었다.

김근태의 꿈은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큰형이 다닌 학교에 자신도 입학하는 것도 뜻이 있었겠지만 당시 우수한 중학생들의 일반적인 소망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억척같이 공부하여 경기고등학교 입학의 꿈을 이루었다.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경기고등학교에 비교적 괜찮은 성적으로 입학했다.
내 평생 제일 악바리처럼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이때가 아닌가 싶다.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그럼에도 졸면서 공부를 했다. 불 좀 끄고 잠자라는 부모님들의 성화에 부대끼면서도 늦게까지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주석 8)

김근태가 광신중학교 3학년 때 5ㆍ16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군사반란은 김근태의 가정에도 다시 한번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세대교체론의 열풍이 전개되고 별안간 정년이 60세로 낮아지면서 아버지가 학교에서 쫓겨난 것이다. 정년을 4년 앞둔 시점이었다. 대학에 다니는 형과 여고생 누나 그리고 중학생인 김근태까지 줄줄이 돈 들어가는 살림에서 아버지의 갑작스런 실직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심장판막증을 앓게 되고 5년 정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경기고 시절 내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타교생이라는 설움도 1년 정도는 받아야했고, 학교 공부도 낯설고 또한 치열해서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반에서 1~2등 정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퇴직금은 얼마가지 않아 다 떨어졌고 수입이라곤 형이 가정교사를 해서 가져오는 것이 전부였다. 참다못해 아버지께서 나서 여자 스타킹과 양말을 동대문시장에서 받아다가 각 학교로 다니면서 팔기 시작하셨다. 초등학교 교장밖에 안 되지만 심장병으로 편찮으신 가운데 비닐가방을 들고 이 학교 저학교 다니시는 아버지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있다. (주석 9)



주석
6> 앞의 책, 154쪽.
7> 앞의 책, 155쪽.
8> 김근태, 앞의 책, 416쪽.
9> 앞의 책, 412~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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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제(謙齊)를 생각하며
 

비오고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비 가운데로 싸라기 우박이 가끔씩 뿌려지고, 이 3월 하순에 말이오.
겨울 떠나보내고 봄 기다리는 마음에 심술이겠지만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소.
착각은 그냥 자유일 뿐이지.
번갈아가며, 다투며 내리는 눈비가 익살스러워 차라리 마음이 들뜨는구려.


창틀 기대어 눈 쏟아지는 하늘 올려다보고, 희끗희끗 가려지는 앞산 건너다 보았지.
저 높은데서 거뭇거뭇하고 벌떼처럼 몰려 짓쳐 내려오는데, 점점 가까워지면 몸놀림 가뿐히 공간 넉넉하게 비워두고 하얗게 내렸다오.
한눈파는 사이 스르르 땅속으로 스며 하나 남기지 않고, 이 겨울 마지막 눈 전혀 쌓이지 않았어. 건너편 산골짜기에도.


지난 겨울 앞산 자주 눈 덮여 있었어.
가물가물한 두 겹 비닐 통해 쳐다봤지.
가끔 창 열고 바라봐도 '흑~' 찬바람 한입에 얼른 닫아 버렸었지.


거리에 캐롤 울릴 때쯤이었을까.
눈덮힌 산 그 아래 뾰족 첨탑 보이고 사슴이 끄는 썰매 탄 산타할아버지 눈에 어른거렸네.
언제부턴가 생활속으로 슬쩍 들어와 버린 카드 속 그림 닮은 그런 산, 그런 건물, 썰매, 그런 아이들 삼삼하였네.
난 그만 실소하구 말았지. 감수성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는 로렐라이 언덕, 하이델베르크 대학 앞 어디쯤 있을 황태자 첫사랑의 그 맥주집에 몸살나는 이 시대 교양인들,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에 몸 자지러지는 저 대중들, 그 중에 하나일까, 나도.


겸제(謙齊) 생각했지, 부끄러워 하면서.
어떤 사회적 변화가 있어 가능했겠지만, 그것은 고뇌 끝의 결단이었어.
그렇더라도 상상 속 중국 산과 강 그리는 기법, 그 흉내 버리고, 펄펄 살아 뛰는 우리네 강산 선택한 건 모험이었어.
서러운 삶의 감정 스며있는 이 산하를.
차라리 반역이었을까, 사대 그늘아래 왕권질서에 대한.
위험하지 않았을까.
겸제는 얼마나 조롱당했을까, 경멸 또한.
눈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 어두움들 어디에서 오는가.
허위의식 물든 관념에서, 감수성으로부터 올까, 누구였을까, 저주받은 바리새인들은.


중국적 봉건질서의 정치 문화적 표현인 주자학이 조선사회 발전에 기여한 바 크겠지.
헌데 일자 일획이 온통 진리였던 그것을 왜 한글로 번역하지 않았는지.
수많은 사람들 공맹의 길에 보다 쉽게 접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 글 쓰임대 한층 풍부해졌을 게고.
이젠 복종의 다른 표현된 충효 빈 껍데기만 남겨놓고서 가버린 허망함 아니었을지도.


너무나 심오하여 감히 번역할 능력 아무도 없고, 언문으론 진서 그걸 제대로 표현할 길 도무지 없고,
누군가 개거품 물고 주장한 사람 있었을 게야.
많았을지도 모르고.
당시 시대적 제약 있어 모두 학문할 수는 없는 거고, 어차피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말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지.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딴데 있는 거지.
혈통에 의한 봉건적 신분질서 유지 너무 적나라하여 문화적 구획으로 덮어 씌워놀 필요 정말 있었겠지.
깊은 진리 터득한 사람 있었을 게고, 많지 않지만.
일부만 알거나 형식적으로 아는 체하여 양반 지배계층에서 탈락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별 상관없었을 것이지.
아는거야, 이런 것은.

 

오늘은 어떤가.
혹시 진서 대신 원서가, 한문 대신 영어가, 중국 대신 서양이 또 그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 아닐까.
꼬부랑 관념과 감수성, 글씨 몇 개 아는 지식인들 지배계층에 끼여들고 그렇게 제도화 되어 있고,
그 아랫사람들 열심히 흉내내고, 흉내바람은 사회적 강제가 되고, 분명하지 않은가 말이여.


여기에 끼지 못하는 것 처벌이고 소외인 거야.
세련됨, 모던함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 그러기 위한 훈련, 학습, 교양 가지려고, 한마디로 간판 따려고 우리 모두 서둘러 왔던 것 같지.
서양의 문화, 문물, 예술 모두 암암리에 보편적인 것 되고, 특히 진정한 그 내용이나 진리가 아니라 단편적 사실,
어떤 형식이나 약간의 흉내가 오히려 기승부려 진짜 인류의 보편적 발전방향은 목졸라 버리는 것 같고,
그것으로써 우리자신의 주체성과 주인의식은 잊어버려 민족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고,
인간성 구현을 위한 발전방향과 진리는 서양의 특수한 것이라고 매도해 버리고, 역사는 반복할 것인가, 수치스럽게도.


소중화(小中華)로 자부하며 더욱 중국적이었던 조선,
또다시 개명한 20세기 후반에 우리는 자신을 서양보다 더욱 서양적으로 만들어 버릴 것인가.
진리냄새 피우는 한 글자 한 글자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등장한 이 시대에.


재판에 임하면서 참 묘한 느낌이 들었다오.
그 중에 하나가 판검사, 변호사들과 만났을 때 나도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로 동류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지.
말씨나 절차 그것에서도 상호 느낄 수 있었고 말이오.
물론 서 있는 입장이 다르면서도.
우린 한국사회의 지배계층임을, 아니 적어도 상류계층임을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소.


그러다가 구치소로 돌아와, 특히 자신의 감방에 들어가 갇혀질 때면 최하 천민계층으로 급락하는 것이었소.
부자유, 그건 능멸받아 마땅한 것이오.
옛날 노예가 살아있는 도구라고 짓밟혔던 그림자 아직도 여기에 살아있는거요.


여하튼 이런 차이를 반복하여 느끼면서 나는 사실 꽤 당황했다오.
정서적으로 묘한 혼란도 오고,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얄팍한 마음도 생기고 말이오.
자꾸 설명하고 싶어지고, 이것 모두 쓰잘 데 없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요

<후략>


(1986년 3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씨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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