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유난히 올 겨울의 추위가 더욱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고, 무섭게 만드는구료.

속 의를 입을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 매서운 추위가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잘 모를 것이요.

어깨를 내리찍어 웅크리게 만드는 이 추위를 나도 60년대 중반 이후 한 20여 동안 잊어버리고 살다가 뜻밖에 여기서 다시 부딪치게 되었소.

 
'간다 간다 나는 간다'는 그 구절이 가슴을 치는구료.

여기는 오는 곳이 아니라 가는 곳이 틀림없소.

잿빛 그늘 속으로 점점이 사라져 가는 그런 입구인 것처럼도 생각되고 말이오.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는 한숨과 눈물이 그렁그렁 쌓이고, 치밀어 오르는 목메임 때문에 목을 가누는 것이 어색한 것 같구료.

하지만 저녁 사 후가 되면 별안간 활발해진다오.

다가오는 어스름 속에서 용기도 생기고 목청을 조용히 뽑아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들로 생기가 살아난다오.

 

야릇한 흥분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요새 대중가요를 익히느라고 제법 바쁘다오.

특히 '사랑의 미로'라는 노래는 이제 수준급에 올라섰는데 이걸 들려줄 기회가 없어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구료.

 
지나온 그 짙은 어둠은 이제 어렴풋하게 느껴진다오.

하지만 그것은 어느 밤 달그림자 진 건물 모퉁이에서 왔다갔다 서성대는 이곳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

그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고 말이오.

잠속에서 꿈속에서 짓눌려 오는 공포로 되살아나곤 하는구료.

그 때는 숨을 몰아쉬어 방어의 채비도 서두르게 되고,

윤동주 시인의 맑은 눈물이 스며 있을 듯한 벽에 기대어 밤하늘의 별을 끌어안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오.

 
그러나 요사이 나는 행복한 것 같구료.

목요일의 따스함을 안고 주말을 보내고 일주일을 보낸다오.

반가운 얼굴, 귀에 익은 목소리들의 수군거림이 나를 여간 흥분시키는 것이 아니오.

소풍가는 어린이처럼 마음을 들뜨게 한다오.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 나가고 있는 중이오.

당신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구료.

9월말 그 때 기적같은 만남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한 것이오.

그 후 당신의 노고가 가히 짐작이 되어,때로는 허둥허둥도 했을 것이지만 훌륭히 견뎌 낸 것이요. <후략>

 


-1986년 1월 26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 씨에게 보낸 편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