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2장] 가족사의 비극, 우수한 모범생의 소년기

2012/07/06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저항의식은 이 즈음부터 가슴 한 켠에서 모락모락 움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쫓아낸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으나, 그것을 박정희 정권과 연계시키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5.16 군사 쿠데타로 아버지께서 별안간 강제로 정년퇴직하게 되고, 그 이후 우리의 가정 경제는 어려워졌지만 나는 박정희 권력을 지지하는 쪽에 서 있었다. 고교 시절 내내 그랬다. 한일회담 반대 데모 대열에 전교생이 참여했을 때도 나는 두어 명을 꼬셔서 교실에 외롭게 남아 있었고, 그 전해 그러니까 1963년에 있었던 대통령선거에서도 나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주장하는 박정희 쪽이었다. (주석 10)

김근태의 중ㆍ고등학교 시절은 정치사회적으로 격동기였다.
4ㆍ19혁명으로 잠시 민주주의의 꽃이 피는 듯 하다가 1년여 만에 박정희의 군사쿠테타가 일어나면서 천지는 군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김근태는 가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도 사회문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범생’이었다. 경기고 시절에는 아르바이트를 두 군데나 다니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사회문제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영어회화 클럽에도 참석하는 등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고 우등생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여전히 ‘모범생’이었다.
비록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강제퇴직을 계기로 사회가 불합리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형체를 가진 사회의식은 아니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한마디로 ‘친정부적 학생’에 머무르고 있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을 이 나라의 산업발전과 아울러 국민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쾌거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는 박대통령의 말이 대단히 합리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형식논리’에 속은 것이다. 그의 고교동창생들의 기억에도 김근태는 영어회화클럽에 참석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 그 이상은 결코 아니었다.
(주석 11)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고도 모범생이었던 김근태는 여전히 아버지에 관해 소년기의 콤플렉스와 반항심을 털쳐내지 못하였다.

미아리고개에서 살 때였는데 집 근처에 복덕방이 있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아버지께서는 복덕방에서 장기를 두다가 나오시면서 반색을 하시곤 했다. 복덕방 노인들이 빼다 박은 듯 똑같다고 하며 웃으실 때 나도 그냥 따라 웃었지만 그것은 동의의 표시가 아니라, “아니에요, 나는 아버지하고 달라요” 하는 부정의 웃음이었다. 이런 건방진 내가 마음의 빚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이었다. (주석 12)


주석
10> 앞의 책, 417쪽.
11> 이재화, 앞의 책, 156~157쪽.
12> 김근태, 앞의 책, 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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