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2장] 가족사의 비극, 우수한 모범생의 소년기

2012/07/05 08:00 김삼웅

 

 

 

김근태의 형들은 부모의 남다른 교육열로 일제말기 일본에 유학했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민족문제’에 뛰어들었다. 당시 지식청년들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형들의 문제로 인해 김근태는 뒷날 반독재 전선에서 정보기관과 보수신문에 의해 극심한 고문과 색깔론에 시달려야 했다.
6남매 중 큰형 김홍태, 둘째형 김성태 그리고 셋째형 김영태 씨 등 위로 세 명의 형들이 한국전쟁 전후로 민족운동을 하다 그 후 행방불명이 되었고 외갓집의 삼촌들도 마찬가지였다.

큰형 김홍태는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 해방이 되자 귀국해 진보적 운동을 했다. 그는 경기고보에 수석 입학한 ‘수재’로서 해방 당시 ‘탁월한 이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고 당시 우익운동을 했던 계훈제 씨는 말했다.

둘째형 김성태는 맏형 김홍태와 함께 원효로 적산가옥에서 자취를 하면서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 역시 민족운동을 했다.

셋째형 김영태는 양정국교 5학년 때 의용군에 입대했다.
한국전쟁이 날 무렵 김근태는 불과 세 살이어서 형들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저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주석 6)

6.25전쟁기에 이념적으로 갈리거나 피난 중에 이산이 된 가족이 수없이 많았지만, 김근태 가족의 아픔도 컸다. 수재 소리를 듣던 아들 셋이 6ㆍ25 동족상쟁의 와중에서 실종된 것이다. 다시 이재화 씨의 글을 인용한다.

한국전쟁 이후 형 세 명은 집안과 관계가 끊어졌다. 85년 10월 김근태가 민청련사건 (당국은 민추위 배후인물로 그를 엮으려 했다)으로 구속되면서 검찰은 “위 3명의 형들이 월북했다” 며 언론 플레이를 해, 모든 언론매체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그러나 형 국태 씨는 “큰형이 9.28수복 이후 수원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둘째형은 1ㆍ4후퇴 때 서울에서 봤다”는 풍문만 떠돌았을 뿐 확인할 길이 없다고 했다.

어쨌든 한국전쟁 이후 김근태 씨의 집안은 쑥밭이 되어버렸다. 그의 집에는 연일 형사들이 진을 쳤고, 부모들은 소식이 두절된 아들들의 얼굴을 생전에 한 번이라도 봤으면 하고 울먹이곤 했다.
(주석 7)

어린 김근태에게 형들 특히 맏형 김홍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가 그토록 경기고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은 맏형에 대한 막연한 선망 때문이기도 하였다.

김근태는 1958년 서울의 사대부중과 경복중학교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졌다. 충격이 컸다. 형들의 뒤를 따르고자 하여 아버지에게 1년 동안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에 재수하도록 요청했으나 가정형편상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2차인 광신중학교에 “시험 한번 쳐보기나 하라”고 하여 마지못해 응했다가 수석을 했다. 이런 연유로 광신중학교를 다니면서 장학금을 받고 줄곧 수석을 하였다. 광신중학 3학년 때 학원 장학회에서 실시하는 장학금수혜자 시험에 응시하여, 고교, 대학까지 장학금 혜택을 받게 되었다.

김근태의 꿈은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큰형이 다닌 학교에 자신도 입학하는 것도 뜻이 있었겠지만 당시 우수한 중학생들의 일반적인 소망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억척같이 공부하여 경기고등학교 입학의 꿈을 이루었다.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경기고등학교에 비교적 괜찮은 성적으로 입학했다.
내 평생 제일 악바리처럼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이때가 아닌가 싶다.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그럼에도 졸면서 공부를 했다. 불 좀 끄고 잠자라는 부모님들의 성화에 부대끼면서도 늦게까지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주석 8)

김근태가 광신중학교 3학년 때 5ㆍ16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군사반란은 김근태의 가정에도 다시 한번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세대교체론의 열풍이 전개되고 별안간 정년이 60세로 낮아지면서 아버지가 학교에서 쫓겨난 것이다. 정년을 4년 앞둔 시점이었다. 대학에 다니는 형과 여고생 누나 그리고 중학생인 김근태까지 줄줄이 돈 들어가는 살림에서 아버지의 갑작스런 실직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심장판막증을 앓게 되고 5년 정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경기고 시절 내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타교생이라는 설움도 1년 정도는 받아야했고, 학교 공부도 낯설고 또한 치열해서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반에서 1~2등 정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퇴직금은 얼마가지 않아 다 떨어졌고 수입이라곤 형이 가정교사를 해서 가져오는 것이 전부였다. 참다못해 아버지께서 나서 여자 스타킹과 양말을 동대문시장에서 받아다가 각 학교로 다니면서 팔기 시작하셨다. 초등학교 교장밖에 안 되지만 심장병으로 편찮으신 가운데 비닐가방을 들고 이 학교 저학교 다니시는 아버지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있다. (주석 9)



주석
6> 앞의 책, 154쪽.
7> 앞의 책, 155쪽.
8> 김근태, 앞의 책, 416쪽.
9> 앞의 책, 412~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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