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 / [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1 08:00 김삼웅

 

위정자의 덕이 없어서인가, 국민의 복이 없어서인가.

이명박 치하 4년여 동안 강원룡ㆍ박경리ㆍ김수환ㆍ노무현ㆍ법정ㆍ박완서ㆍ김대중ㆍ김준엽ㆍ정기영(건축가)ㆍ박태준ㆍ김근태ㆍ이소선… 등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각계의 지도자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사이비 종교지도자, 친일파군인, 독재자, 기회주의언론ㆍ문인, 유신잔당, 변절민주화운동가, 악덕기업인, 고문기술자 등이 호의호식하면서 한 세상을 누비는 데, 왜 그들은 그토록 빨리 죽어야 하는가.


<노자> 제70장에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지만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 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악당과 악행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해도 진정한 승리는 하늘이 항상 선한 사람의 손을 들어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세상은 거꾸로 되는 경우가 많은가.

사마천은 한무제 천한(天漢) 2년 (B.C 99년)에 이른바 ‘이능의 화’ (李陵之禍)을 당한다.
이릉은 용감한 장군으로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족을 정벌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부대는 전멸당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 그러자 조정의 중신들은 물론 황제까지 나서 너나없이 이릉을 배신자라며 매도하였다. 그때 한 사람 사마천이 이릉의 사람됨과 억울함을 잘 알고 있어서 분연히 일어나 그를 변호하였다. 이로 인해 투옥되고 사내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을 당하고 말았다. 거액의 돈을 내면 방면될 수 있었지만 그는 돈이 없었다.

사마천은 수모를 견디면서 <사기>를 집필하였다.
열전(列傳)의 첫머리에 백이숙제의 고사를 쓰고, <노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였다.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하늘은 옳은가 그른가!”를 거듭 물은 것이다.

사마천은 젊은 날 스승 동중서(董仲舒)에게 춘추공양학을 배우면서 역사철학에 뜻을 세웠다.
스승은 “하늘은 자연의 모습을 한 유의지적(有意志的) 최고신이다. 감응의 방식은 하늘이 인간의 행위를 감찰한 뒤에 일련의 자연현상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나타냄으로써 인간 세계의 지배자에게 훈계나 상을 내린다” (주석 1)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제창하여 천도의 존재를 명확하게 사마천에게 가르쳤다.

“갈 만한 곳을 골라서 가고, 해야 할 말을 하고, 삿된 길로 가지 않고, 공명정대한 일이 아니면 분발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재앙을 당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구나!”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하늘을 우러러 거듭 탄식했다.

김근태는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유신 변란이 아니었으면 유능한 대학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젊은날의 꿈은 교수였다. 전두환ㆍ노태우의 헌정 유린과 폭압 체제만 없었으면 온순한 시민운동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여의도의 햄릿’이라는 닉네임이 따를 만큼, 젊은 그는 행동인이기보다는 사색인이었다.

4월혁명 이후 한국 사회가 평온한 질서의 민주주의 시대였다면, 정치인 네루의 길보다 비폭력저항운동의 간디의 길을 택했을 것이라는 김근태, 그는 유신과 5공 체제에서 가장 강력하게 투쟁하고, 가장 심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폭압과 반이성의 시대가 햄릿을 민주주의의 투사로 만들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광기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이성을 짓밟을 때 김근태는 청년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온건한 대학생이 감분(感憤)하여 전선에 뛰어든 것은 군부독재세력의 야만성때문이다. 전방에 있어야할 군인들이 후방에서 국민을 상대로 총칼을 휘두르는, 마치 고려의 무인시대와 같은 막장을 지켜보면서 저항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가 겪은 고통은 너무 심했고 시련의 세월은 너무 길었다.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은 좀체 아물지 않았다.

사마천이 울분하여 <사기>를 지었다면 김근태는 감분하여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고 하겠다.
어찌 김근태 뿐이었을까. 수많은 독립운동가, 평화통일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외적의 침략으로, 외세의 탄압으로, 독재자들의 폭압으로, 겨레와 민족이 짓밟힐 때 빼앗긴 조국독립과 통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분연히 몸을 던졌다. 그들의 능력과 역량으로 보아 시대에 적응하고 시세를 좇았으면 크게 출세하여 부와 감투가 주어지고 대대손손 부귀광영을 누렸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배부르고 등 따뜻함”을 추구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하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고래로 정도(正道)는 가시밭길이고 사도(邪道)는 풍요롭지만, 그래도 소수 나마 정도를 택한 사람이 있고, 이들로 인해 정의와 진리는 지켜지고 역사는 조금씩이나마 진보한다.

김근태는 가끔 구약성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꺼내곤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용기 있는 자들은 저항하다 잡혀 죽고, 비겁한 자들은 투항해서 바빌론의 앞잡이나 개가 되고, 저항하기에는 용기가 없고 투항하기에는 소시민적 양심이 살아 있던 남은 자들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남은 자들이 후에 다시 일어서서 이스라엘 민족사를 재건하는 중추세력이 되었다. 남은 자들은 용기는 없지만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심성이 많고 때로는 눈치도 보지만 근본은 선한 자들이며 때가 되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역사의 주된 물줄기를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김근태는 민중을 믿었고, 민중의 힘으로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김근태는 군부독재 시절에 가장 격렬하게 싸우고 가장 심하게 핍박을 받았지만, 이를 크게 내세우지 않았다. 독재자 편에 섰거나 반독재 투쟁을 외면하다가 ‘무임승차’하여 정ㆍ관계의 주역 노릇을 하는 사람들을 크게 탓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도 용서하였다. 다음은 김근태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어느 날의 ‘삽화’다.

1974년 1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택시 합승을 했다.
뒷좌석에는 신세대 여대생들인 듯한 손님 둘이 앉아 있었다. 택시가 출발하고 얼마 후 김근태는 뒷좌석의 여대생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우연히 마주친 그를 알아보고 인사하거나 격려해주는 것을 많이 접해본 그였다. 특히 고문경감 이근안으로부터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치욕을 당한 후 3년여의 옥고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던 88년에는 지하철을 타면 낯선 시민들의 따뜻한 인사말에 답하느라 바빴다. 이번에는 상대가 신세대 여대생들인지라 속으로 괜히 흐뭇해하며 무슨 말을 하나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머뭇거리며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대다가 예의를 차려 물어 온 말인즉슨,

“저 … 이근안 선생님 아니세요”?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여러 번 본 적이 있어 낯이 익고 그가 고문당했던 재야인사라는 것도 생각나는데 그만 이름이 헷갈린 것이다. 고문 경감 김근태에게 붙잡혀 고생한 재야인사 이근안 선생님으로.

물론 그날 그 자리에서 김근태는 허허 웃었다.
그러나 끝내 ‘나는 이근안이 아니라 김근태’라고 정정해주지 못하고 차를 내렸다. 마음 한 켠에 휑한 슬픔마저 느끼면서….
(주석 2)

하나의 ‘삽화’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때도 김근태는 ‘남은 자’들의 역할을 믿었다.

우리 겨레가 1900년대 전반기 ‘망국노’가 되었을 때나, 1900년대 후반기 이승만의 백색독재와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의 카키색 군부독재시대에 헌법상의 ‘주권자’가 되었을 때도 ‘남은 자’들의 역할은 다르지 않았다.

굳이 아놀드 토인비의 사관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난 역사는 어차피 ‘창조적인 소수’에 이끌려왔다고 할 수 있다. 소수의 독립운동가와 소수의 민주화투사들에 의해 우리는 독립을 전취하고 제도적이나마 민주주의를 쟁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민중의 힘이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남은 자’들의 숫자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김근태는 ‘남은 자’ 들의 역할을 믿었던 것이다.

주석
1> 풍우(馮禹)지음, 김갑수 역, <천인관계론>, 95~96쪽, 신지서원, 1993.
2> 윤석진, <월간중앙 WIN>, 1999년 1월호, <국민회의 김근태 부총재>, 이후 (<월간중앙>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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