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은 시인의 감수성으로 인물을 내다보는 독특한 안목을 갖고 있다. 1
986년부터 간행한 <만인보 12>에는 김근태에 관해 썼다.
김근태
그는 70년대에는 물 위에 떠오르지 않았다
인천 어딘가
후덥지근한 이 공장 저 공장에 스며들어가
자격증 네 개 다섯 개 땄다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장 따위 던져도 좋았다
공장에서
떳떳한 호모 파베르였다
하얀 양초 같은 얼굴
하연 염소 같은 얼굴
그러나 노란 눈동자 안에는
어떤 동요도 없이
몇십 년을 한 뜻으로 가는 의지
슬쩍 내비쳤다가 숨어버린다.
평생 노동자와 일치하리라고 결심한 이래
그는 70년대에는
몇몇 친구들밖에는 몰랐다
무서운 청년시절을 다 바쳐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 떨치는 것
나서는 것
그것이야 뒤로 뒤로 미루어도 좋아라
죽기 직전까지
그 자신의 고문을 의식 속에 기록한
결사적인 또 하나의 그 자신이야 뒤로 미루어도 좋아라. (주석 1)
1980년대는 한국현대사에서 보기드문 격동의 시대였다. 쿠데타와 살육, 저항과 연대가 동시적으로 혹은 비동시성으로 나타났다. 김근태는 격동기의 청년운동 중심부에 들어가 역량을 키우고, 아직 광주의 핏자국이 선명한 5공 초기에 반독재투쟁을 선포하였다.
1980년 5월, 공수부대의 강경한 광주 시위진압. ⓒ5.18 기념재단
돌이켜보면 한국 현대정치사는 두 차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첫번째는 1960년대 초 4월혁명으로 이승만 백색 전제에 짓밟혔던 민주주의를 살려내서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국민의 자유선거에 의해 민주당이 집권하였다. 혁명 뒤끝이라 다소 소란이 있었지만 장면 정부는 인내심을 갖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런데 일본군 출신 박정희가 주동하는 군 일부의 반란으로 민주당정부는 8개월 만에 붕괴되고 18년 5개월의 박정희 1인 독재가 자행되었다.
두번째는 1979년 10월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되면서 대한민국은 모처럼 ‘서울의 봄’을 맞아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듯 하였다. 하지만 박정희 밑에서 권력의 단맛을 본 전두환, 노태우 일당이 반란을 일으켜 가녀린 민주주의의 새싹을 짓밟고 광주학살에 이어 정권을 찬탈했다. 민주주의는 다시 생명력을 잃고 대한민국은 제2기 군사독재 시대가 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온갖 패악을 그대로 전수받은 전두환 5공정권은 새로 개발한 수법까지 동원하여 포악성이 더욱 심했다. 광주학살의 피를 뿌리고 등장한 5공의 포학성은 학생운동을 비롯하여 비판세력을 탄압하는 데 가히 광적이었다. 반유신 투쟁을 벌여온 학생ㆍ재야ㆍ야권은 1980년 5ㆍ17사태로 풍비박산, 초토화를 면치 못했다.
80년대 초반 한국사회는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적막강산이 되고, 사체를 훔치는 인면(人面)의 여우ㆍ승냥이 무리만이 성세를 누렸다.
한민족이 ‘반도국가’로 정착된 이래 그런 속에서도 지배세력은 사대주의를 국책으로 삼고서 권세를 누려왔지만, 민중은 민족자존과 자주정신을 잃지 않았다. 옛적의 일은 접어두고라도 근대에 이르러 동학 농민혁명을 시발로 하여 의병운동, 독립운동, 3.1운동, 의열투쟁, 의열단활동, 광복군 창군, 4월 혁명,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촛불시위로 이어지는 면면한 저항의 전통을 지켜왔다.
한국의 전통적인 양심세력은 “일의 성패를 문제삼지 않고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다”, “시작과 끝은 오직 양심에 호소할 뿐 성패를 묻지 않는다”는 양명학(陽明學)의 정신으로 무장하였다.
전제군주, 외세, 독재세력과의 싸움이란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격이지만, 그것이 옳은 일이기에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해온 것이다. 한말 의병이 그랬고,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다. 해방 뒤 독재와 맞선 민주화운동도 다르지 않았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냐 사도냐가 문제”라는 백범 김구의 경구에서 의미가 집약된다고 하겠다.
전두환 일당의 폭압속에서도 저항의 활화산은 멈추지 않았다. 민중의 지층에서 저항의 용암이 다시 꿈틀거렸다. 단절될 수 없는 양심세력의 맥락이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청년ㆍ학생들이 앞장섰다. 반유신의 학생운동 출신과 5공의 만행에 침묵할 수 없는 학생들이 일어섰다.
1982년 3월 18일 김부식ㆍ김은숙 등 부산 고신대생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및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미국 측의 책임을 묻고자 벌인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학생들에게 만연된 패배감을 털고 다시 분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사건을 횃불로 하여 대학가에서는 산발적이나마 반정부 시위가 일기 시작했다.
1982년 하반기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학생운동은 1983년을 맞아 더욱 강화되었다.
이 해 연초 나까소네 일본총리의 방한 반대를 이슈로 하여 방학 중인데도 대학생들과 운동권에서는 반대 집회가 열리게 되고, 이는 반정부 투쟁의 시위로 연계되었다.
때마침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5월 18일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26일간 단식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가 미국에서 이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국내에서는 함석헌ㆍ문익환ㆍ홍남순 등이 동조단식에 들어가는 등 정계와 원로그룹의 움직임은 한동안 움츠렸던 지식청년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주석
1> 고은, <만인보 12>, 150~151쪽. 창작과 비평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