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

 

원심법원이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라는 책 소유를 유죄로 인정한 것은

현 개명한 20세기 후반의 건전한 사회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며, 또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나는 사실 이처럼 점잖게 말하고 싶지 않다.

상스럽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 달라.

이렇게까지 되고 보면 발길로 걷어차 버리고, 서로 침을 퉤퉤 뱉고 돌아서는 편이 피차간에 차라리 솔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슬프고 기가 막히고 놀라서 어질어질 하기도 하지만, 정치군부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우리 사회를 정말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군부의 부릅뜬 눈아래 오금을 펴지 못하는 겁쟁이,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판사, 검사의 모습이 정치군부보다도 더

인류사회와 민족사회의 발전속도에 저만치 뒤떨어져 있는 집단이 어디에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겠지.


김영학 씨의 증언과 감정서를 유죄의 증거로 한 원심법원의 판결은 수치스런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들으면서, 들여다보면서 절간에 간 색시처럼 얌전하게 공판에 임해 왔던 나 자신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도대체 정치적 사건이란 게 그런 재판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농담이고 장난임을 이 이상 더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없으리라.

도대체 '내외 문제연구소'라는데가 아리송할 뿐만 아니라 미안한 얘기지만, 경제학에 대한 소양이 나보다 없음은 물론,

돕의 주저인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 "자본주의 발전연구"의 책 이름조차 잘 모르고, 그 책이 어떻게 다른지는 물론 모르고,

도무지 헷갈리는 이런 사람의 증언과 감정서를 증거로 하여 유죄로 인정하는 이 철면피의 뻔뻔스러움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겨져 기억되야할 것이다.


이것은 김영학 씨 개인에게도 괴로운 일이었을 게며 모독이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3~4일 전에 검찰로부터 감정 부탁을 받은 후

책을 받고 책을 읽고 감정서를 썼다는 이런 주장을 믿어주어야 하는가.

뭐 이것 뿐만은 아니지만, 거짓말과 사기는 쉬지 않고 줄을 지어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단언한다. 이것은 한낱 사기일 뿐이라고.

검찰청에 뻔질나게 불려 다닐 때 나는 담당검사에게 공소제기된 사실에 대해 모두 말했다고 밝혔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공판장에서 한 말 이상으로 자세히 설명했다.

 

돕의 주저에 대해서, 그런 책들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에 대해서, 또한 문제된 이 소책자가

'자본주의 발전연구'의 한 장을 조금 손대어서 정리하여 강연한 것이라는 것을 검사에게 말했다.

김영학씨는 아마도 그것을 검사한테서 듣고 앵무새처럼 외우려했던 것 같은데, 아주 서툴렀던 것이다.

반대심문의 기회가 왔을 때 분노가 아닌 슬픔이 밀려와 나는 김영학씨에 대한 심문을 포기했다.

그것이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라는 돕의 주저가 근대 경제학의 추세라는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출간된 사실을 인정하면서, 유죄를 인정한 것은 법리를 오해하고 위법적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것은 나의 법적 이익을 깡그리 박탈하는 것으로 자빠진 놈 한 번 더 밟아주자는 것인가.

이것은 법 앞의 평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국민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형해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또한 지성인의 한사람으로서, 경제학도로서 학문의 자유 그리하여 연구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참으려 해도 속이 느글느글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


그래서 한마디 하겠다.

하려면 이정도로 화끈하게 오로지임을 보여주는게 마땅할 것이다.

출세를 하라. 출세를 하라. 그리하여 출세를 하라.

 

 

그래도 못다한 말 한가지

 

행방불명된 나의 탄원서에 대하여.


다 아는 바와 같이 1심 공판정에서 탄원서 집필허가 문제에 대해 나는 네번 문제를 제기하였고, 마침내 재판거부 선언에까지 이르렀었다.

집필신청을 한 지 만 40일 후인 2월 5일 오후 3시 반 경에 허가통지를 받았다.


탄원서 집필문제를 가지고 이처럼 격렬하게 싸운 이유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나는 '탄원서'라는 이름으로 저 남영동에서 받았던 고문을 낱낱이 밝히고자 했던 것이며,

정치군부는 그것을 체면불구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막아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공판 사이사이에 나는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탄원서를 썼다.

보통 구치소에서 두 부 작성하는 다른 사람의 경우와 달리, 오직 한 부만을 작성하도록 미리 페이지가 매겨진 조사용지를 공급받아 썼다.

나는 그 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소심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국 이것이 행방불명된 것이다.


이제 탄원서 내용을 간략히 얘기하자.
고문준비, 계획은 어떻게 되었으며, 누가, 왜 했고, 어떻게 했으며, 그 때 고문자가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에 대해 나는 어떻게 견디고 또 굴복했는지, 그 고문대 위에서 또 아래에서 내 심정은 어떠했는지를 기록했다.

여기서 우선 고문자들의 이름을 밝혀 두겠다.

이 탄원서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는 기록이다.


총경 윤재호(남부경찰서장),

경정 김수현(전무),

경정 백남은(전무),

경감 장의사 둘째주인(고문 전문기술자),

경위 김영두,

경장 정현규,

경장 박병선,

경장(경북사람) 등


검찰은 피로 적셔 있는 남영동 기록을 증거서류로 제출했다.

공판정에서 고문사실과 그에 의해 강제된 것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 고발하였는데도 검찰은 이를 재판부에 제출한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했었는데 서성 판사는 그것이 피고인에게 불리할 수도 있고 유리할 수도 있다고 했다.

결국 이에 보기좋게 속아넘어갔지만, 나는 이 탄원서에서 남영동 증거서류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

고문은 물론 그 때 고문자들이 요구한 것을 자세히 기록하며 반박했다.

그런데 이를 절취하여 숨겨버린 것이다.


영화 '25시'에 이런 장면이 있다.

강제수용소 철조망 안에 갇혀 있는 한 지식인이

자신의 신념을 적은 글(아마도 성명서-적절한 이름은 아니지만)을 손에 들고 보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긴장이 고조되다가 보초가 들고 있는 총에서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총알이 튀어 나왔고 그 지식인은 거기서 퍽 꺾여졌다.

종이는 이리저리 바람에 날리면서 땅에 떨어지고 쓰러진 몸뚱아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적셔지고....

그 종이는 어쩐지 그 사람의 입에 물려졌던 것 같은 착각이 자꾸 들었다.

지식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그렇다. 나는 오른쪽 가슴을 관통당한 채 쓰러져 피 흘리며, 속으로 울고 웃으면서 쓴 것이다.

그런 탄원서가 행방불명된 것이다.

검찰이나 법원 둘 중에서 어디선가 꽉 틀어쥐고 내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재판이 끝난 직후 서성 판사에게 열람등사를 요청하였더니 "이미 발송했다"고 하며 역시 훌륭하게 따돌렸다.

검찰에 가서 확인하니 "서성 판사가 틀림없이 갖고 있다"고 하고....,

시작부터 끝까지 코미디이고, 거짓말이고......


지금 이 탄원서는 어디쯤에서 강철상자 쯤에 들어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나, 아 그러나 이것은 언제 끝날 것인가.


맨 끝으로 고문을 당하며 속으로 통곡하고 지내온 지난 겨울,

이 가막소에서 나는 애정이 넘쳐 나는 수많은 학생, 그리고 버림받은 재소자들의 격려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그때 두 겹의 비닐창문을 때리는 북풍에 견디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되뇌고 되뇌었다.

 

내 귀여운 아이들아
느이들 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애비가 어디 가서 오래 못 와도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져선 안된다
외로울 때는 엄마랑 들에도 나가보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봐야지
바람이 차거들랑 옷깃 잘 여며
감기들지 않도록 조심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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