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

012/07/07 08:00 김삼웅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http://gtcamp.tistory.com/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김근태는 1965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공대가 아닌 상대를 택한 이유는 확인되지 않지만, 가정의 가난을 극복하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가 대학에 진학한 1965년은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의 추진으로 정국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대학가에서는 굴욕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서울의 시위대는 시내 중심부까지 진출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부족한 재원을 일본에서 가져오기 위해 쿠데타 직후부터 극비리에 한일회담을 진행했다. 여기에는 아시아의 반공기지연대를 통해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압력도 크게 작용하였다.

1961년 6월 미국 대통령 케네디와 일본 수상 이케다(池田)의 회담에 이어, 11월의 박정희-케네디 회담을 통해 한일국교정상화 문제가 한ㆍ미ㆍ일 3국 간에 장막 속에서 은밀히 논의되었다. 대일 협상진행과정을 비밀에 부쳐오던 박정희 정권은 1964년 3월에 와서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밝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근태는 시국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학내의 ‘순수서클’이라는 기독교서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을 뿐이다.

야당과 시민ㆍ학생들의 거센 반대에도 대일굴욕회담을 강행하면서 반대측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박정희 정권의 처사는 한 학구파의 대학생을 더 이상 캠퍼스에서만 머물러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굴욕회담 반대 시위는 야당 및 각계 대표 200여 명이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대정부 경고문을 발표하면서 반대 시위가 대학가로 번졌다.

1964년 3월 24일 고교생을 포함한 대규모 대학생 시위로부터 점화되어 4월 17일의 시위, 5월 20일의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및 5월 25일의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로 이어졌다. 6월 2일 서울시내 대학생 6,000여 명이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광화문까지 진출한 데 이어 3일에는 수만명이 "박정권 타도, 매판자본 몰수" 등을 외치며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이날 저녁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박정희는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물리력으로 제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근태는 학내 사회과학 서클에 가입하고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굴욕외교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도 없이, 돈 몇 푼에 덜컥 국교정상회의 길을 튼 박정희의 처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생운동하는 동료들의 밝은 분위기가 좋았다.”는 것이 그의 운동에 뛰어든 변이다.
물론 그가 운동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성장과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아버지의 강제퇴직, 그로 인한 가난과 소외감 그리고 행방불명된 세 명의 형들의 민족주의적 영향 등이 잠재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와 작고한 조영래 씨와 함께 당시 서울대 운동권에서 ‘경기고 출신 65학번 트로이카’로 불린 손학규 씨는 “김근태가 학생운동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아주 얌전하고 데모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석 1)

박정희는 거센 국민의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1965년 6월 22일 한일회담을 타결하고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다. 기본관계조약은 양국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인 일제강점기의 죄악상에 대한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하고,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무상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에 매듭 짓고 말았다. 액수도 문제지만 동남아 국가들이 전승국으로서의 배상을 받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또 이 협정으로 한국의 40해리 전관수역이 철회되고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이로써 일본의 저인망 어선의 남획으로 우리 인근 바다에서 어족자원이 씨를 말리게 되었다.

김근태는 굴욕회담 반대 시위에는 참가했으나 아직 리더 그룹은 아니어서 계엄사태에서도 구속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상대 안에 구성된 경우회와 경제복지회 등 서클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사회과학 분야의 공부에 매달렸다. 이 시기에 각종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점차 사회의식의 깊이와 지평을 넓혀 나갔다.

당시 문리대의 경우 행동을 중시한 반면 상대는 이론을 중시하는 분위기였다.
상대 내에는 이른바 ‘지하서클’이 다른 대학에 비해 많았고, 사회과학 공부도 훨씬 많이 했다. 그때 공부한 서적은 주로 폴 바란, 스위지, 모리스 돕 등이 쓴 정치경제학 저서들이었다. 1학년 때는 주로 위와 같은 책들을 영어 원서로 공부하고 가끔은 청계천 고서방을 통해 어렵게 입수한 <세계사 교정>(소련 과학아카데미 발행), <조선경제사>(백남운 저) 등 이른바 ‘마분지 서적’ 등을 읽었고, 2학년이 되면서는 일어를 배워 진보적인 일어 서적을 탐독했다.
(주석 2)

김근태는 지식욕이 왕성했다. 진보적인 사회과학 서적을 영어와 일본어 책을 구해 읽으면서 점차 역사문제와 한국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통해 용돈이 생기면 청계천 헌책방을 순회하면서 일제가 남기고 간 교양서적과 미군 PX를 통해 흘러들어온 양서를 구입하였다. 국내외의 문학서적도 많이 구하여 읽었다. 서클에서는 읽은 책을 주제로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당시 상대 조교로 있던 안병직은 김근태가 2학년 때에 처음으로 만났다. 안병직의 증언.

"김근태는 몇 년 만에 나올까말까 하는 비상한 인물이었다. 뛰어난 판단력,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천재’였다. 2학년 초엔 대부분 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등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주로 이야기하는데 그와 수 차례 이야기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미뤄보아 그때 당시부터 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것 같다.” (주석 3)


주석
1> 이재화, 앞의 책, 157쪽.
2> 앞의 책, 157~158쪽.
3> 앞의 책,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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