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
012/07/10 08:00 김삼웅
운명의 여신은 다시 한번 학구파 청년에게 학문연마의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박정희가 기획ㆍ각본ㆍ연출한 유신체제는 김근태에게 고난의 길을 강요했다. 운명의 갈림길은 극적이었다.
사회운동으로 진출하려니 막막했고 사회과학적 이론을 더 쌓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그리고 내심 수배가 아니기를 확인해보고 싶은 복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주석 10)
김근태는 홍성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면회 온 이재화에게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서릿발치는 유신 초기에 ‘사회운동의 진출’은 그가 아닌 누구라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여 대안으로 택한 것이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사태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형 국태 씨에게 전화를 해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내게 했고, 입학시험 당일에 다시 형에게 전화를 해 “수험표를 갖고 시험장에 나와 달라. 혹시 시험장에 수사기관원이 나와 있을 지 모르니 잘 살펴보라”고 했다. 형 국태 씨는 동생이 부탁한 대로 시험장에 수험표를 갖고 나갔다. 아니나다를까 수사관이 쫙 깔려 있었고, 시험이 시작되었는데도 김근태 씨의 모습은 끝끝내 보이질 않았다. 형 국태 씨는 동생이 나타나지 않자 동숭동 소재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곧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먼 발치에서 형을 보고 있었다. 수사기관원들이 나와 있어서 나가지 않았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이렇게 해서 그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도 있었던 대학원 진학은 좌절되고 말았다. (주석 11)
보통 사람들의 운명은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손에 결정되는지 몰라도, 한 시대 지도자들의 운명은 시대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김근태가 당시 대학원 진학이 가능했다면 그의 생애는 평탄하면서 학자의 길을 걷게 되고 학문의 업적을 남겼을 지 모른다.
김근태는 평탄한 길을 접고, 저항의 길에 들어섰다. 운명적인 측면도 있지만, 피 속에 전하는 형들과 가족사의 DNA(유전인자)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동지들의 고난과 박정희 체제의 광폭성이 젊은 지성으로 하여금 광야로 나서게 하는 ‘시대정신’도 끼었을 터였다.
박정희의 권력욕구는 자제력이 보이지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의 필수적인 야당, 언론, 사법부 등이 그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유신쿠데타를 자행하면서부터 그는 모든 비판을 불허하는 신격화의 존재처럼 행세하였다.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 반유신 활동을 하는 김대중을 납치해오고, 1974년 1월 8일에는 긴급조치 1호를 선포, 유신 헌법에 대한 반대와 개헌 논의를 금지시키면서 위반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군법회의를 설치했다. 민간인들을 군사법정에 세우는 야만성을 드러냈다. 그리고 비판적인 언론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짓밟았다.
하지만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1973년 3월 30일 전남대의 <함성> <고발>등 유신반대 유인물 살포 사건, 5월 20일 기독교인들의 유신과 박정희 반대의 <신앙선언문>사건, 9월 6일 서울 제1교회 박형규 목사 중심의 남산부활절 예배사건 등 반유신ㆍ반박정희의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유신 선포 이후 대학가 최초의 반유신운동은 1973년 10월 2일 서울문리대 비상학생총회 소속 250여 명이 자유민주체제 회복을 요구하는 내용의 선언문 낭독과 시위였다. 반유신의 횃불은 4일의 법대생 시위에 이어 5일에는 상대생 300여 명이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규명과 대일예속 청산, 자립경제 확립, 중앙정보부 해체, 학원자유 보장 등을 촉구하는 선언문 낭독과 시한부 농성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유신 선포 1년 만에 박정희는 다시 대학생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서울대생들을 스타트로 하여 전국의 대학가에서는 다시 반정부 투쟁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박정희는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여 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에 좌경의 족쇄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3월 들어 각 대학에서 유신철폐 시위가 빈발하는 한편 전국 대학의 반독재 연합시위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폭력혁명을 시도한다고 날조하면서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민청학련 주모자라 하여 253명을 구속했다.
구속자 중에는 윤보선ㆍ지학순ㆍ박형규ㆍ김찬국ㆍ김지하를 비롯하여, 이른바 인혁당재건 관련자 21명, 일본인 2명이 포함되었다. 김근태의 동료 중에서도 여러 명이 구속되었다.
1975년 3월 28일 수원의 서울대 농대 학생총회는 제1차 대학선언과 제2차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원자유 보장과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한데 이어 4월 2일에는 박정희에게 학원과 사회 제반 사태를 타개할 일대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4월 4일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을 벌였다. 이때 한국학생운동에 커다란 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11일 학내에서 벌어진 자유성토대회에서 연사로 나선 김상진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의 양심선언문을 발표하고 할복, 다음날 사망하였다.
김상진의 할복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그를 추모하는 집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학생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서울대생 4,000여 명은 5월 22일 김상진 열사 추도식을 거행한 뒤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이후 일어난 최초의 시위였다. 80여 명이 연행되고, 29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김근태는 서울대생 시위와 명동성당의 김상진 장례식을 주도하여 더욱 수배가 강화되었다.
김근태는 이번에도 피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가 또 다시 그의 친구들을 기소하면서 김근태는 ‘공소외’로 기재하였다. 당국은 김근태를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었으나 용케 피신할 수 있었다.
그는 수배중 자신이 대학원에 진학해서 하고자 한 사회과학 공부를 함과 동시에 운동가가 가져야 할 철저한 규율을 몸소 실천했다. 수배중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생활했는가에 대해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중이었던 손학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민청학련 관련으로 수배중인 나와 장기표ㆍ김승균ㆍ심재권ㆍ신동수 등과 5ㆍ22사건으로 수배된 김근태는 수배중에도 가끔씩 만나곤 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수배중에 있었던 주변 이야기를 하거나 동료들에 대한 근황을 물어보곤 했는데, 유독 김근태만은 자신의 근황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결코 묻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다음 행선지에 대해 다른 사람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끔 철저하게 방비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주석 12)
주석
10> 앞과 같음.
11> 앞과 같음.
12> 이재화, 앞의 책, 159~160쪽.
사회운동으로 진출하려니 막막했고 사회과학적 이론을 더 쌓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그리고 내심 수배가 아니기를 확인해보고 싶은 복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주석 10)
김근태는 홍성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면회 온 이재화에게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서릿발치는 유신 초기에 ‘사회운동의 진출’은 그가 아닌 누구라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여 대안으로 택한 것이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사태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형 국태 씨에게 전화를 해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내게 했고, 입학시험 당일에 다시 형에게 전화를 해 “수험표를 갖고 시험장에 나와 달라. 혹시 시험장에 수사기관원이 나와 있을 지 모르니 잘 살펴보라”고 했다. 형 국태 씨는 동생이 부탁한 대로 시험장에 수험표를 갖고 나갔다. 아니나다를까 수사관이 쫙 깔려 있었고, 시험이 시작되었는데도 김근태 씨의 모습은 끝끝내 보이질 않았다. 형 국태 씨는 동생이 나타나지 않자 동숭동 소재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곧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먼 발치에서 형을 보고 있었다. 수사기관원들이 나와 있어서 나가지 않았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이렇게 해서 그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도 있었던 대학원 진학은 좌절되고 말았다. (주석 11)
보통 사람들의 운명은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손에 결정되는지 몰라도, 한 시대 지도자들의 운명은 시대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김근태가 당시 대학원 진학이 가능했다면 그의 생애는 평탄하면서 학자의 길을 걷게 되고 학문의 업적을 남겼을 지 모른다.
김근태는 평탄한 길을 접고, 저항의 길에 들어섰다. 운명적인 측면도 있지만, 피 속에 전하는 형들과 가족사의 DNA(유전인자)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동지들의 고난과 박정희 체제의 광폭성이 젊은 지성으로 하여금 광야로 나서게 하는 ‘시대정신’도 끼었을 터였다.
박정희의 권력욕구는 자제력이 보이지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의 필수적인 야당, 언론, 사법부 등이 그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유신쿠데타를 자행하면서부터 그는 모든 비판을 불허하는 신격화의 존재처럼 행세하였다.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 반유신 활동을 하는 김대중을 납치해오고, 1974년 1월 8일에는 긴급조치 1호를 선포, 유신 헌법에 대한 반대와 개헌 논의를 금지시키면서 위반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군법회의를 설치했다. 민간인들을 군사법정에 세우는 야만성을 드러냈다. 그리고 비판적인 언론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짓밟았다.
하지만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1973년 3월 30일 전남대의 <함성> <고발>등 유신반대 유인물 살포 사건, 5월 20일 기독교인들의 유신과 박정희 반대의 <신앙선언문>사건, 9월 6일 서울 제1교회 박형규 목사 중심의 남산부활절 예배사건 등 반유신ㆍ반박정희의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유신 선포 이후 대학가 최초의 반유신운동은 1973년 10월 2일 서울문리대 비상학생총회 소속 250여 명이 자유민주체제 회복을 요구하는 내용의 선언문 낭독과 시위였다. 반유신의 횃불은 4일의 법대생 시위에 이어 5일에는 상대생 300여 명이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규명과 대일예속 청산, 자립경제 확립, 중앙정보부 해체, 학원자유 보장 등을 촉구하는 선언문 낭독과 시한부 농성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유신 선포 1년 만에 박정희는 다시 대학생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서울대생들을 스타트로 하여 전국의 대학가에서는 다시 반정부 투쟁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박정희는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여 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에 좌경의 족쇄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3월 들어 각 대학에서 유신철폐 시위가 빈발하는 한편 전국 대학의 반독재 연합시위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폭력혁명을 시도한다고 날조하면서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민청학련 주모자라 하여 253명을 구속했다.
구속자 중에는 윤보선ㆍ지학순ㆍ박형규ㆍ김찬국ㆍ김지하를 비롯하여, 이른바 인혁당재건 관련자 21명, 일본인 2명이 포함되었다. 김근태의 동료 중에서도 여러 명이 구속되었다.
1975년 3월 28일 수원의 서울대 농대 학생총회는 제1차 대학선언과 제2차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원자유 보장과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한데 이어 4월 2일에는 박정희에게 학원과 사회 제반 사태를 타개할 일대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4월 4일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을 벌였다. 이때 한국학생운동에 커다란 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11일 학내에서 벌어진 자유성토대회에서 연사로 나선 김상진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의 양심선언문을 발표하고 할복, 다음날 사망하였다.
김상진의 할복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그를 추모하는 집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학생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서울대생 4,000여 명은 5월 22일 김상진 열사 추도식을 거행한 뒤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이후 일어난 최초의 시위였다. 80여 명이 연행되고, 29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김근태는 서울대생 시위와 명동성당의 김상진 장례식을 주도하여 더욱 수배가 강화되었다.
김근태는 이번에도 피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가 또 다시 그의 친구들을 기소하면서 김근태는 ‘공소외’로 기재하였다. 당국은 김근태를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었으나 용케 피신할 수 있었다.
그는 수배중 자신이 대학원에 진학해서 하고자 한 사회과학 공부를 함과 동시에 운동가가 가져야 할 철저한 규율을 몸소 실천했다. 수배중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생활했는가에 대해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중이었던 손학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민청학련 관련으로 수배중인 나와 장기표ㆍ김승균ㆍ심재권ㆍ신동수 등과 5ㆍ22사건으로 수배된 김근태는 수배중에도 가끔씩 만나곤 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수배중에 있었던 주변 이야기를 하거나 동료들에 대한 근황을 물어보곤 했는데, 유독 김근태만은 자신의 근황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결코 묻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다음 행선지에 대해 다른 사람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끔 철저하게 방비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주석 12)
주석
10> 앞과 같음.
11> 앞과 같음.
12> 이재화, 앞의 책, 159~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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