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

012/07/08 08:00 김삼웅

 

박정희는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두번째 제치고 재선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해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였다. 박정희는 이때 이미 3선 개헌을 구상하면서 6ㆍ8총선거를 관권 부정선거로 치뤘다. 3ㆍ15를 방불케 하는 공개ㆍ대리투표 등 부정 타락선거였다. 야당은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학생들은 연일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였다.

김근태는 이때 3학년이었다. 상대 대의원회 의장에 선출될 만큼 동료들의 신임을 받았다. 민주주의 기초인 선거의 부패ㆍ타락상을 지켜보면서 침묵할 수가 없었다. 6월 10일 김근태는 상대생들을 이끌고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다. 6월 15일에는 전국 21개 고교와 5개 대학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21일에는 서울대ㆍ연세대ㆍ성균관대ㆍ건국대 등 학생 대표들이 모여 ‘부정부패 일소 전국학생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부정선거규탄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후에도 6월 내내 서울시내 대학생들은 ‘학원주권 수호’와 ‘부정선거 규탄’을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6월 15일 서울대 등 서울의 주요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강압적으로 학원시위를 봉쇄하려 했지만, 시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김근태는 연일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앞장섰다. 학생운동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보복이 따랐다. 학교 당국은 김근태를 상대생 시위 주동을 이유로 권고처분에 이어 제적이라는 ‘극형’에 처했다. 한 달 뒤에는 신체검사도 받지 않고 강제로 군에 끌려갔다. 박정희 정권은 이때부터 시위학생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키는 이른바 ‘강제징집’을 자행하였다. 정부는 교련을 거부한 학생들에게 35개 대학에서 13,505명에게 병무신고를 하게 하고 그 중 5,000명에게 집병영장을 발부했다. 데모 주동으로 제적된 학생 중 71명에게 1차로 영장이 발부되고 이들을 징집열차에 태웠다.

1971년 입영열차 오르는 강제징집 대학생들. 사진은 http://cafe.daum.net/asssuplee

 

박정희 정권은 국방의무를 반정부 학생들을 처벌하는 형벌로, 그리고 군복무를 유배지로 악용한 것이다. 김근태는 그 첫 희생자가 되었다. 1967년 9월의 일이다. 3학년 2학기가 개학하기도 전에 제적을 당하고 논산훈련소로 끌려갔다.

한 언론인은 징집 학생들이 강제 입영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제적학생들이 첫번째로 입영하던 10월 26일, 이미 동대문경찰서에 신병이 확보된 서울대 대의원회의장 김재홍(문리대 정치학과 3년)과 최대철(법대 행정과 3년) 등 10명의 학생들은 경찰서 앞마당에서 경찰에 인솔되어 용산역으로 나가기 전 배웅나온 서울법대 박병호 학생과장과 김치선 교무과장을 보자 눈물을 글썽였다.

오후 4시경부터 용산역 앞 광장에는 입영학생들의 학우와 교수 및 가족 등 5백여명이 모여 교가, 응원가, 이별의 노래를 부르며 이들을 전송했다.

이날 입영한 학생은 서울대 9명(법대. 문리대ㆍ상대 각 3명), 고대 5명, 연대 5명, 성대 3명, 서강대 2명, 건대 2명, 서울시립농대 2명, 강원대 1명, 명지대 1명 등 모두 30명이었다.
(주석 4)

이 기사의 ‘서울대 9명’ 중에는 김근태도 끼어 있었다.
‘강제징집’된 학생들은 훈련과정이나 부대 배치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의 불이익이 따랐다.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군의 처사는 대단히 적대적이어서 훈련 중 심한 구타가 일쑤이고 대부분 최전방 부대로 배치되었다. 김근태도 다르지 않았다. 소속 부대는 물론 방첩대의 감시로 책 한 권, 편지 한 통 맘 놓고 보고 쓰기 어려웠다.

3년여 만에 육군병장으로 제대한 김근태는 1970년 8월에 복학하게 되었다.
김근태가 군에 복무하고 있을 즈음에 국내 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정부는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서울침투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 창설(4월 1일), 중앙정보부의 통일혁명당사건 발표(8월 24일), 국민교육헌장 선포(12월 5일), 공화당 3선개헌안 날치기 통과(1969년 9월 14일), 개헌안 국민투표(10월 17일), 3선개헌반대 학생시위 격화(6월 19일~12월) 등 박정희의 국가안보를 빙자한 장기집권 책략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박정희는 3선개헌을 강행하면서 이미 장기집권의 ‘건널 수 없는 강’을 넘어섰다.
이 과정에서 국가안보 문제를 적절히 활용하고, 공화당 내의 개헌반대 세력을 제거하면서 1인독재의 길을 열었다. 이승만이 장기집권 끝에 쫓겨난지 9년, 민주정부를 쿠데타로 타도하고 자신의 손으로 대통령 4년 중임제의 헌법을 만든지 6년 만의 일이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1970년 9월 전당대회에서 40대 후보들의 치열한 대결 끝에 비주류의 김대중이 주류의 지원을 받은 김영삼을 제치고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다. 11월 13일에는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의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하여, 1970년대 노동운동의 자극제 역할을 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1969년부터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각 대학에 군사교련을 실시하였다. 향토예비군이 제대를 한 청장년들을 상대로 한 것이라면 교련은 재학생들을 한 묶음으로 엮으려는 준군사조직이었다. 국가안보를 내세워 대학생들을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1969년부터는 교련이 대학의 정규과목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교련은 대학이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는 지식의 생산과 토론이라는 교육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동떨어진 과목이었다. 교련 교육이 정규과목으로 채택되는 과정에서 대학의 교양교육 및 학사운영 전반이 큰 영향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학내에서의 토론이나 의사수렴은 전혀 불가능하였다. 교련은 형식상 대학의 교과과정에 들어있는 것이면서도 그것은 대학의 학문적인 공동체 바깥에 놓여있는 것이었고 교수들의 영역과는 무관하게 군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 것이었다. (주석 5)

박정희 정권이 전국의 대학에서 교련을 실시한 것은 대학의 병영화를 통해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정부의 의도를 꿰뚫은 학생들은 교련 철폐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근태가 참여한 서울대 총학생회는 1971년 <교련철폐 투쟁선언>을 발표하고, 다음날 서울대 사회학과생들은 <교련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교련 철폐를 주장했다. 이것이 대학가 ‘교련철폐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전체 국가예산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자금과 관권을 총동원하고서도 어렵게 승리하였다. 김대중 후보와의 표차는 95만여표에 달했으나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과 대도시에서는 사실상 패배하였다. 박정희는 3선에 만족하지 않고 영구집권을 획책하면서 가장 저항이 심한 김대중과 대학을 더욱 심하게 탄압했다.

김근태가 속한 서울상과대학 교수들은 1971년 8월 21일 <대학자치선언>을 발표하면서 정부의 대학 간섭을 비판하였다.

“오늘날 우리 대학은 내외로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그 위기의 근본요인은 대학운영의 비자치성에 연유한다. 형식적 자유와 실질적 자유가 망라됨으로써 본래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대학의 본질에 비추어 대학의 운영이 상부기관의 자의에 좌우되는 현실적 제도하에서 대학의 대학다운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주석 6)고 완곡하게 나마 정부의 처사를 비판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확보하면서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19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로 완벽하게 1인전제 체제를 구축하게 되면서, 대학은 자율성을 잃게 되었다. 교수 중에는 어용 교수도 많았지만, 학자적 양심을 지키면서 반독재 투쟁에 나선 학생들을 음으로 양으로 보호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주석
4> 이경재, <유신쿠데타>, 167~168쪽, 일월서각, 1986.
5> 서울대학교 교수민주화운동 5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교수 민주화운동 50년사>, 66쪽, 1997, 서울대학교 출판부.
6> 앞의 책,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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