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09 08:00 김삼웅

 


대학가에서는 4ㆍ27 대통령 선거의 부정ㆍ불법에 항거하여 대규모적인 규탄시위가 벌어졌다.
1971년 5월 27일 서울대 공대ㆍ문리대ㆍ상대ㆍ약대ㆍ의대ㆍ치대생 등 900여명과 서강대생 200여명은 구속학생 석방, 학원자유 수호, 교련반대 등을 외치며 교내 시위에 이어 가두에 진출했다. 김근태는 이 시위에 앞장섰다.

정부는 이날 서울대 문리대ㆍ법대ㆍ상대ㆍ사대에 휴업령을 내리고 교문을 폐쇄했다.
9월 30일에는 수도경비사 장교들이 고려대학에 난입하는 폭거가 자행되기도 했다. 김근태는 1971년 11월,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고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수배자의 신세가 되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71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모의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했다”면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위원장 심재권(서울대 상대 3년), <자유의 종> 발행인 이신범(서울대 법대 4년), 장기표(서울대 법대 3년), 조영래(사법연수원생), 김근태(서울대 상대 3년) 등을 구속했다. 이들은 10월 15일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대학에서 제적되었으며, 이들에게 주어진 혐의는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 폭력을 이용한 주요 관공서 파괴ㆍ점령과 박정희 대통령 강제 하야, 혁명위원회 구성과 헌법기능 정지 후 정부전복 기도를 계획했다는 것이었다. (주석 7)

정부가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내란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꾸며 구속한 것은 날로 격화되어가는 학생시위를 저지하려는 정치적 책략에서였다. 특히 4ㆍ27 대통령선거의 부정을 규탄하기 위해 학생들이 조직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학생연맹)을 겨냥하는 처사였다.

‘학생연맹’은 1971년 4월, 13개 대학 학생 대표로 구성되어 4ㆍ27 대통령 선거 참관을 실시하는 한편 소속 대학의 시위를 주도하는 등 반정부 학생운동의 핵심 서클이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 보복적인 집중 타격을 가한 것이다.

김근태는 동료들이 구속될 때 용케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검찰은 이들을 구속기소하면서 김근태는 ‘공소외’로 표기하여 별명의 하나가 되었다. 정보부 요원과 형사들의 추적을 따돌리면서 피신하고 있을 때 구속된 심재권ㆍ이신범ㆍ장기표ㆍ조영래 등은 수사 기관에서 가혹한 구타를 당하고, 검찰은 9월 5일 항소심 결심 공판에서 이들에게 징역 10년씩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9월 11일 징역 10년 6월과 2년, 집행유예 3년 등을 각각 선고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 공소사실의 허구성이 폭로되고 수사기관의 가혹행위가 드러나 크게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 이 사건은 선고 공판에서 반국가단체 구성과 예비음모 부분은 무죄, 기타 부분은 유죄가 인정된다. 당초 검찰이 발표한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의 허구가 밝혀진 것이다. 김근태는 이 때부터 길고 긴 피신 생활을 하게 되었다. 수배자들의 끈질긴 추격을 따돌리고, 숨어 사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5공 때는 그마저 불가능했다.

김근태는 변형윤 교수 등의 배려로 수배 중에 시험 대신 우편으로 리포트를 제출하여, 1972년 2월 가까스로 서울상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피신 생활 중에 택한 방편에는 가명으로 취업하는 길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위장취업자’라 하여 회사ㆍ공장을 뒤져 찾아다가 처벌하였다. 노동자들을 ‘의식화’ 시킨다는 이유였다.

이 때부터 그는 길고 긴 수배생활에 들어갔다. 물론 그 기간 동안 간간이 수배로부터 ‘사실상 해제’된 상태도 없지 않았으나 그 기간은 매우 짧았다.

피신을 하던 그는 피신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오는 한 방편으로 일신산업(일신제강의 전신)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그는 수출 업무를 맡아 약 11개월 동안 근무했다. 그의 45년 생애(인터뷰 시점-필자)에 넥타이를 매고 월급봉투를 만져 본 유일한 기간이었다.
(주석 8)

김근태가 일신산업에서 월급쟁이 노릇을 하고 있을 때는 ‘학생연맹’의 친구들이 옥살이를 하고, 박정희가 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 선언에 이어 12월 27일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보위법을 변칙적으로 통과시키면서 영구집권의 길목으로 치닫고 있는 시점이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마침내 군부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유신쿠데타를 감행하였다.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공개적으로 폭로하고, 자신들이 우려했던 한국판 총통제가 ‘유신’의 이름으로 현실화되어 나타났다.

그야말로 국체변혁의 내란행위였다. 김근태는 긴 고민에 빠져들었다. 유신쿠데타로 양심적인 야당정치인, 재야인사, 학생, 노동운동가들이 속속 구속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 한국사회는 11년 전 5ㆍ16쿠데타 당시의 상황이 재현되고 있었다.

김근태는 이런 상황에서 남들처럼 넥타이 메고 출퇴근하면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할 것인가,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인권이 유린되는 유신체제에 도전하는 사회운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대학원에 들어가 더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거듭하였다. 성격상 ‘햄릿적’이어서 그의 고민의 심도는 깊어갔다. 이때의 고민은 그리고 결과는 인간 김근태가 고난의 길을 걷게 하는 ‘민주주의자’의 선택이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몇 개월 후 그는 회사생활이 자신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판단, 사회운동으로 전환할 것인가 아니면 대학원에 들어갈 것인가 고민하던 중 대학원 진학의 길로 마음을 정하고 시험준비에 돌입했다. (주석 9)


주석
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226쪽, 2006.
8> 이재화, 앞의 책, 159쪽.
9> 앞의 책,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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