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12 08:00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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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뿌린 악의 씨앗은 심각했다. 그의 권부 아래서 육성된 하나회 소속의 정치군인들이 1979년 12ㆍ12 군부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고, 이들은 1980년 5ㆍ17 전국비상계엄 확대 조치라는 쿠데타로 ‘서울의 봄’을 짓밟고 제2기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이들은 박정희가 밟은 길을 재현해나갔다. 독재자가 제거되고 이제 민주주의의 밝은 세상이 올 것으로 기대했던 국민이나 민주화운동가들에게는 다시 한번 혹한의 계절을 맞게 되었다.
김근태는 짧은 ‘서울의 봄’ 기간인 1980년 4월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인재근과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1978년 수배중에 가까운 가족만 모시고 결혼식을 치렀었다. 이번에는 모처럼 친척ㆍ친구들이 참석하여 축하해주었다. 주례는 서울상대 변형윤 교수가 맡았다. 수배중에도 리포트로 학점을 주고 항상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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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족이 딸린 몸이어서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했다. 다행이라면 박정희 체제에서 따라 붙었던 추적자들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1980년 여름부터 ‘산선’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80년 7월경부터 '산선'에서 노동상담역의 간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산선'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화순 목사가 동일방직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지 6개월 되던 시점이었다. 조 목사는 자신이 구속된 후 활동정지가 돼 버린 산선활동을 다시 복원시키기 위해 실무자를 구하던 중 김동완 목사, 최영희 씨 그리고 김근태 씨와 만나 네 사람이 한 팀이 되어 다시 일을 시작했다.

조 목사는 노동상담역을 김근태 씨에게 맡겼다. 사실 일은 맡겼지만 당국의 흑색선전과 탄압으로 노동자들은 자취를 감춰버린 지 오래인 실정이었다. 그래서 조 목사는 김근태 씨에게 “당신 능력껏 노동자들을 조직해보라”고 하고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주석 16)

김근태는 천성이 성실하고 근면한 편이다. 무슨 일을 맡으면 최선을 다하고 솔선수범한다. 그는 전태일과 같은 세대였다. 그가 노동자들의 권리를 호소하면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힌 일을 똑똑히 기억하였다.

이후 노동자, 노동운동에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되고, 박정희 시대에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육체노동을 하며 살았다. 다음은 뒷날 노동자들의 수난을 지켜보다가 현장에 뛰어들었던 김근태의 기록이다. 1988년 12월 29일 밤 11시경 서울 광장동에 있는 미국계 회사인 모토로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미국인 사장 봅 칼빈을 면담하러 본관 쪽으로 가던 노조원과 구사대 간에 충돌이 발생하여 일어난 사고였다.
“구사대 물러가라!” 하며 대치하던 조합원 중 4명이 위협용으로 자신의 몸에 신나를 붓고 맞섰는데 갑자기 누군가 붙힌 불이 그들의 몸에 확 옮아붙었던 것이다.

구사대 쪽에서 “어디 불 붙여 봐라” “신나인지 확인해 보자” 등의 비웃음소리가 나온 직후였다.
이 사고로 이강욱 씨는 깊은 화상을 입고 의식불명인 상태이고, 강문희ㆍ이종찬 씨 등 3명도 중태이다. 이런 끔찍한 사고가 누구에 의해 저질러졌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합원들의 목 쉰 증언에 의하면 구사대 쪽에 있던 김모 차장이란 자의 소행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것은, 불꽃이 되어 뒹굴고 있는 4명의 조합원들에게 달려들어 불을 끄는 대신 냉정하게, 아주 냉정하게 사진을 찍어 대는 관리직 사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과격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찍어 둔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을까 참으로 모를 일이다.

시간이 긴박했다. 지금도 안에는 도충환 노조 위원장을 비롯한 11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신나통을 들고 전산실에 들어가 노조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싸고 수백 명의 구사대가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명에까지 어떤 위협감이 감돌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과 함께 빵과 우유를 사 들고 정문 옆 좁은 문을 통과하여 공장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인도적인 이유를 들어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답은 구사대의 시꺼먼 적대감과 추운 겨울날에 쏟아지는 소방 호스의 물세례, 물공격뿐이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아니, 피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정면으로 소방 호스에서 쏟아지는 억센 물줄기에 맞서다가 돌아서서 등 뒤로 버티었다.

공장마당에 나 혼자 남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외로움이 몰려왔다. 신나통을 들고 버티고 있을 조합원들의 고독과 함께 남영동에서 지독하게 곱씹었던 무력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돌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 추위가 서성이는 밤거리에 비명소리가 울려나왔다.
(주석 17)

주석
16> 이재화, 앞의 책, 160쪽.
17> 김근태, <겨울 속의 풀뿌리>, <노동문학> 창간호(1983. 3), 38~39쪽,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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