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13 08:00 김삼웅
김근태의 노동자ㆍ노동운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담긴 글이다. 다시 인천 지역 산선의 노동상담역 시대로 돌아가 보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인천에서, 그것도 당국의 탄압으로 황무지가 되어버린 산업선교회에서 그는 성실하게 일했다. 공장 근처를 서성거리기도 하고, 선술집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그들과 사귀기도 하면서 차근차근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선천적으로 말수가 적은 그는 노동자와 가까이 지내기 위해 대중적 감각 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김동완 목사로부터 유행가를 배우기도 하고 레크리에이션을 익히기도 했다. (주석 18)
김근태가 인천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신산한 삶을 보내고 있을 때 전두환 일당은 광주의 살육을 거쳐 양심적 언론인을 축출하고, 정치정화법 제정 등을 통해 야성 정친인들을 묶으면서 5공체제를 굳혀갔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여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양심적 정치인ㆍ학자ㆍ종교인들을 묶어서 투옥하였다. 하지만 철벽같았던 유신체제가 허물어지듯이, 5공도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신호로 그동안 움츠렸던 학생운동이 다시 저항의 횃불을 높이 들면서 도전에 직면했다. 김근태는 아직 인천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만난 노동자들은 모두 그에게 매료됐다고 조 목사는 말한다.
그는 노동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겼으며 사소한 인간사에까지 진지하게,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고 대해, 노동자들에게 ‘성실의 대명사’로 통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늘 당하면서 살아온 노동자들은 흔히 지식인 출신 운동가들이 노동자들을 운동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는 달리 인격체로 대해준 그와 오빠나 형처럼 가깝게 지내며 존경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김근태 씨가 일을 한 지 불과 1년 만에 산선엔 다시 노동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가 노동자와 약속을 하면 단 1분도 늦은 적이 없다는 것이 당시 그와 함께 그룹 활동을 했던 노동조합 간부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다. (주석 19)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은 만고의 철칙인 듯 하다.
전두환 절대권력이 채 2년이 못되어 전두환의 친인척인 이철희ㆍ장영자의 ‘개국 이래 최대 어음 사기사건’으로 5공의 성벽에 구멍이 뚫렸다. 민주인사ㆍ학생ㆍ노동자들의 가혹한 고문 사실이 하나씩 밝혀지기도 했다. 김근태는 분노를 삭이면서 여전히 인천에서 노동자들의 상담과 교육에 열정을 바치고 있었다. 당시 그에 대한 평가다.
조 목사는 김근태 씨를 통해 예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조 목사는 그로부터 감동을 받은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만나 교육할 때 하루 한 시간 이상씩 늘 준비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그는 너무 바빠 미처 준비는 하지 않고 노동자들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목사님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은 뭔가를 배우겠다고 장시간 노동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귀한 시간을 소홀히 생각했습니다.”하며 반성한 적이 있다. 풍부한 지식,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 특별히 교육 준비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교육을 할 수 있었던 그였는데, 이처럼 노동자를 마치 보석을 대하듯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산선 활동 과정에서 “운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3년 가까이 함께 활동한 조 목사가 그가 ‘탁월한 이론가’라는 사실을 그로부터 몇 년 후인 85년 재판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알았다고 할 만큼 산선시절 그의 모습은 헌신적이고 성실한 ‘일꾼’이었다. (주석 20)
주석
18> 이재화, 앞의 책, 160~161쪽.
19> 이재화, 앞의 책, 161쪽.
20> 앞의 책과 같음.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인천에서, 그것도 당국의 탄압으로 황무지가 되어버린 산업선교회에서 그는 성실하게 일했다. 공장 근처를 서성거리기도 하고, 선술집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그들과 사귀기도 하면서 차근차근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선천적으로 말수가 적은 그는 노동자와 가까이 지내기 위해 대중적 감각 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김동완 목사로부터 유행가를 배우기도 하고 레크리에이션을 익히기도 했다. (주석 18)
김근태가 인천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신산한 삶을 보내고 있을 때 전두환 일당은 광주의 살육을 거쳐 양심적 언론인을 축출하고, 정치정화법 제정 등을 통해 야성 정친인들을 묶으면서 5공체제를 굳혀갔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여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양심적 정치인ㆍ학자ㆍ종교인들을 묶어서 투옥하였다. 하지만 철벽같았던 유신체제가 허물어지듯이, 5공도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신호로 그동안 움츠렸던 학생운동이 다시 저항의 횃불을 높이 들면서 도전에 직면했다. 김근태는 아직 인천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만난 노동자들은 모두 그에게 매료됐다고 조 목사는 말한다.
그는 노동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겼으며 사소한 인간사에까지 진지하게,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고 대해, 노동자들에게 ‘성실의 대명사’로 통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늘 당하면서 살아온 노동자들은 흔히 지식인 출신 운동가들이 노동자들을 운동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는 달리 인격체로 대해준 그와 오빠나 형처럼 가깝게 지내며 존경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김근태 씨가 일을 한 지 불과 1년 만에 산선엔 다시 노동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가 노동자와 약속을 하면 단 1분도 늦은 적이 없다는 것이 당시 그와 함께 그룹 활동을 했던 노동조합 간부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다. (주석 19)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은 만고의 철칙인 듯 하다.
전두환 절대권력이 채 2년이 못되어 전두환의 친인척인 이철희ㆍ장영자의 ‘개국 이래 최대 어음 사기사건’으로 5공의 성벽에 구멍이 뚫렸다. 민주인사ㆍ학생ㆍ노동자들의 가혹한 고문 사실이 하나씩 밝혀지기도 했다. 김근태는 분노를 삭이면서 여전히 인천에서 노동자들의 상담과 교육에 열정을 바치고 있었다. 당시 그에 대한 평가다.
조 목사는 김근태 씨를 통해 예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조 목사는 그로부터 감동을 받은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만나 교육할 때 하루 한 시간 이상씩 늘 준비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그는 너무 바빠 미처 준비는 하지 않고 노동자들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목사님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은 뭔가를 배우겠다고 장시간 노동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귀한 시간을 소홀히 생각했습니다.”하며 반성한 적이 있다. 풍부한 지식,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 특별히 교육 준비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교육을 할 수 있었던 그였는데, 이처럼 노동자를 마치 보석을 대하듯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산선 활동 과정에서 “운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3년 가까이 함께 활동한 조 목사가 그가 ‘탁월한 이론가’라는 사실을 그로부터 몇 년 후인 85년 재판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알았다고 할 만큼 산선시절 그의 모습은 헌신적이고 성실한 ‘일꾼’이었다. (주석 20)
주석
18> 이재화, 앞의 책, 160~161쪽.
19> 이재화, 앞의 책, 161쪽.
20> 앞의 책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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