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20 07:33 김삼웅

 

김근태와 민청련이 치열하게 반독재 투쟁을 벌이고 있을 즈음 정국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1984년 2월 25일 정부는 정치활동 규제자 202명을 추가 해제하고, 이를 계기로 5월 18일 김영삼 상도동계와 김대중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발족하였다.

민청련의 활동이 야권 정치인들을 각성케 하고 민추협 발족에 영향을 주었다. 민추협의 발족으로 5.17사태 이후 쑥대밭이 되었던 야권은 새로운 구심점을 찾고 진영을 갖추게 되었다.

이 해 6월 29일 민청련은 민중운동단체들과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을 결성하였다. 청년ㆍ노동자ㆍ농민ㆍ재야ㆍ종교계 등 사회 각 민주세력이 그동안 합법영역에서 축적한 역량을 토대로 연대한 것이다. 민민협 결성을 주도한 김근태는 <민주화의 길> 제4호 <민주화의 깃발을 메고 힘차게 나가자>는 시론을 통해, 결성의 의미와 투쟁방향을 천명했다.

김근태는 “민민협 창립은 민주화운동의 일대 진전이다.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화운동의 실현, 그것은 민민협을 통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민민협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할 것이며, 동시에 민청련운동의 강화를 통해 민민협의 발전에 이바지 하고자 한다” 는 전제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요약)

민주화의 깃발을 메고 힘차게 나가자!

1. 민민협은 무엇을 하려는 운동인가.

청년ㆍ노동자ㆍ농민 및 지식인운동 등 각 부분운동의 역량을 더욱 빠른 속도로 증대시키는 데에 기여하여야 한다. 민중 민주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 증가는 물론 올바른 운동방향 정립과 통일성 획득ㆍ투쟁성 제고, 운동규율 강화 등에 일보 전진을 이뤄내야 한다.

민주화 대의를 이루려는 과정에서 조직운동단체가 대중적 신뢰를 얻는 것은 대단히 귀중하지만, 그 성과가 어떤 특정 개인에게 귀속되어 혹시는 민중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교만함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교만함은 운동에서도 개인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이는 분열과 파쟁, 그리고 대의로부터의 타락을 결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민민협 창립의 성과는 무엇인가.

민주화운동의 통일성을 성취할 수 있는 기반을 구체적으로 형성한 점이다. 현재 국면에 대한 여러 해석 상의 차이와 부분운동의 내적 특수성이 따른 강조점의 차이, 이에 따른 역량배치에 대한 견해 차이를 각 부분 내에서 극복하고, 진지한 검토와 상호비판을 통해 방향을 수립하면서 양보 속에서 민민협의 창립이 이루어졌다. 이는 우리의 민주화운동이 개인적 관계를 넘어서 집단화되고 있으면서도 각 집단의 특수성에만 매달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민민협에는 농민ㆍ노동운동 부문과 양심적인 지식인운동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민중운동으로부터 지식인 양심운동세력은 기층대중 생활의 고난과 참을 수 없는 소외의 아픔과 그러면서도 끈질기며 위력적인 민중운동 발전 가능성을 배우고 신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민민협 운동이 갖고 있는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

민민협 내부에서 어떤 의사결정과정의 복잡함과 국민 대중 속에서의 저명함을 부족으로 인해 대표성이 미흡한 점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를 오히려 귀중한 자산으로 활용하여 조직운동의 발전과 집단적 지도력의 발전계기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민민협은 앞으로 한 발자욱씩 더욱 빠른 속도로 전진해 나갈 것이라고 믿으며, 우리 민청련은 이에 적극 기여하고자 한다.
(주석 18)

김근태는 이 성명에서도 밝혔듯이 민주화운동 조직ㆍ단체가 “특정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다. 개인 우상화를 철저하게 반대한 것이다. 그는 5공시대 최초로 공개적인 반정부 단체를 이끌면서, 청년민주화운동의 리더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 속에서 특정개인의 명망성으로 단체가 귀속되는 것을 한사코 막았고, 그런 전범을 보였다. 그리고 민주화운동가들의 겸손한 처신을 강조하였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이 실시될 때 민추협 공동의장인 김영삼이 민청련의 투쟁성과를 높이 평가하여 김근태 의장에게 종로 출마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김근태는 민청련의 성과를 자기 혼자서 차지할 수 없다는 것과 아직 청년운동의 역할이 남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하였다. 그의 언행일체와 겸손함이 묻어나는 ‘비화’다

이즈음, YS는 김근태 의장을 외교구락부에서 만나 종로에서 출마해달라고 권유를 했다.
이때 김근태 의장은 고마운 제의이기는 하나 아직 때가 아니고 나중에 집단적으로 선거에 참여할 것이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김근태 의장은 대신에 조영래 변호사를 추천했으나 조영래 변호사도 후보제의를 고사했다.

김근태 의장과 YS의 회동은 공개되지 않았는데, 이는 김근태 의장이 당시 지위와 역할을 감안해 본다면 순수성의 훼손과 더불어 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그랬던 것이다.
(주석 19)


주석
18> 앞의 책, 제4호, 2~3쪽.
19>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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