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9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정연한 논리와 감동적인 진술은 그러나 군부정권의 하수인격인 판ㆍ검사들에게는 우이독경이 되었다. 그들은 이같은 진술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국민이 알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순간만 넘기면 책임을 면하고, 승진도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서성 판사는 김근태에게 국보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7년, 자격정지 6년을 선고했다.
판사는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군”, “창피한 줄 여기시오”라는 방청석의 야유를 귓전에 흘리면서 총총 자리를 떴다.

판사의 유죄판결의 이유 중에는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갖고 있었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이 책이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검찰이 <내외문제연구소>라는 관변 단체의 김영학에게 이 책의 감정을 의뢰하고, 그의 감정서를 바탕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점이다.

김영학은 돕의 주저인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 <자본주의 발전연구> 등의 책 이름조차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기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서, 돕의 저서가 국보법 위반으로 처벌되는 한국이었다. 모리스 돕은 영국의 경제학자로서 이론경제학, 경제사, 사회주의경제학, 후진국문제 등 다방면에 걸친 저작을 발표한 세계적 학자다.

김근태는 항소심을 거쳐 5년 장기수가 되어 서울구치소에서 수형생활에 들어갔다. 전두환 군부독재가 마지막 독기를 뿜어내는 1986년 봄이었다. 김근태는 인간도살장 남영동에서 풀려나 서울구치소에 수감될 때, 지옥에서 천국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설마 "5년 장기수"가 될 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때 인왕산 언덕배기에 피어 있는 노랑 개나리와 검붉은 진달래를 바라보면서 감상에 젖었다. 그는 서정시인이었다.

얕은 골짜기 여기저기 띄엄띄엄 응달진 곳에 붉은 얼룩이 보인다. 노랑천지 속에 얼핏 보이는 저것은, 불그스레한 그 번짐은 무엇일까. 이제는 까맣게 멀어져 간 4월의 함성이 이 봄에 슬그머니 되살아나고 있는가. 부릅 뜬 눈으로 아직은 절대로 잠들 수 없는 피맺힌 5월이, 아스팔트에 낭자하게 쏟아졌던 피, 그 피가 은연중 배어나고 있는가. 아니면 작년 9월. 아! 그 남영동에서 내가 토해냈던 울부짖음의 파편이 튀어서 저리 붉게 피어나는가. 물고문에, 불고문에 바스라졌던 내 넋의 한 조각이 다시 새롭게 물올라 한 무데기 진달래로 피었는가. (주석 18)

김근태가 군사정권과 온몸을 던져 싸우며 재판을 받고 있을 즈음 그가 산모 역할을 했던 민청련의 <민주화의 길> 제12호에는 강성준이 "다시 우리 시작하자 김근태 형 재판에 부쳐"란 시를 실었다.


기나긴 바람타고
곤고한 발걸음
여기 이렇게 모여들었구나
아직 살아 있음을 더듬어 보는
여윈 손과 부르튼 입술
다하지 못한 사랑 그리워
서로 안고 뒹구는 구나
어디쯤 왔을까
얼마나 가야할까
짓이겨진 육신 높다랗게 걸어두고
남영동의 그 비명만 이리로 보낸
아름다운 이여
우리 어린 자식들의 웃음소리
언제나 되찾을까.

그러나 우리
살아 있음을 서로 부끄러워 함으로,
죽음을 건너 그이가 건진
노동의 힘찬 망치질 소리
우리 가슴 다긋히 두들김으로
해방의 모진 뚬은
곤고한 발길을 멈추지 않는구나
지친 깃발들 일으켜 세우는 구나

다시 시작하자
부르튼 입술 부벼대며
다시 시작하자
짓이겨진 육신 서로 안아 세우며
다시 시작하자
다시 우리 시작하자
(주석 19)

주석
18> 앞의 책, 103쪽.
19> <민주화의 길>, 제12호, 7쪽.


02.jpg
0.1MB
01.jpg
0.05MB

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8 08:00 김삼웅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낙후된 것은 정치군부로서, 국민은 정치군부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이른바 30인 위원회 등으로 해서 민주화운동이 지도자, 국민을 협박하고 다시 70년대 긴급조치 시대로 돌아가고자 했던 저 학원안정법 망령 속에서 우리는 정치군부의 국민들에 대한 협박을 명백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정치군부가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폭력적 탄압을 중지해야만 한다.
민주화운동은 소수 개인 몇 사람에 의해서 조속히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올바른 방향일 뿐 아니라 이러한 운동을 더욱 격화시키고 자극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정치군부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정치군부는 이제 본래 자기 집으로, 군대로 병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민주화의 최소한도의 필요조건은 군부의 정치적 중립화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민간권력의 창출이 요청되는 것이다. 정치군부가 자기의 특권적 이해관계를 계속 주장하는 한 이러한 자신의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 모든 혼란의 가장 중심적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군부는 더 이상 국민의 군대를 출동시켜서, 이른바 지휘계통을 발동시켜서 국민의 뜨거운 민주화 열정을 그리고 국민의 붉은 가슴에, 빈가슴에 총칼을 겨누는 만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국민의 군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군대이다. 그리고 군대의 대부분의 구성원은 정치군부가 아니라 국민의 형제 자매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 다시 국민의 군대를 출동시켜서 국민의 맨가슴에 적대행위를 명령한다면 군대는 복종하지 않고 저항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모두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용기를 내어 결단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나는 오늘 무엇을 하였으며,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두 다시 반성해야 되고 이러한 민주화 실현을 위해 그 누구도 면제되고 제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민주화가 이룩되는 날, 우리는 “나는 민주화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당신은 민주화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를 서로 반문하고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45년, 해방이 된 사회에서 어느 친일도배는 “잔악한 일제 치하에서 일제에 부역하지 않은 사람이 그 누가 있느냐?”고 얘기했는데, 민주화가 실현되는 날 우리는 이러한 의문과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는 결단하고 실천할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먼저 우리는 단순한 심정적 이해와 동조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이 모두가 우리의 의무, 책무이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국민 모두는 실천대열에 나서야 한다. 본인은 체포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저 시켜서 하는 거죠. 밥을 먹고 살려니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고충을 이해해 주십시오”라는 등의 얘기를 들었다. 바로 그런 속에서 정치군부는 자신의 이익과 이해를 관철시켰던 것이다. 더 이상 그러한 얘기가 나오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국민 각계각층에서는 각자 자기 있는 곳에서 정치군부의 퇴진과 민주제 개헌을 위한 조직과 선전에 참여해야 한다. 민주화는 몇몇 전위대열에 선 운동가에게 돌아가는게 아니라 모두의 자유와 안전을 획득하는 길이므로 모두의 의무이며, 운동과 조직에의 참여가 유일한 길이다.

셋째, 이런 과정에서 생기는 불행과 고통에 대해 서로 격려하여 낙오되지 않게 해야 한다. 구치소에 많은 사람이 투옥되어 있는데 앞으로 전국의 교도소가 민주화운동에의 참여로 가득 찰 지도 모르며 가득차는 날 민주화가 실현될 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단하고 일어서야 한다.

끝으로 미국 행정부가 80년 5월의 과오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고를 보내야 한다.
80년 5월의 미국의 정책은 명백한 과오이며 우리 사회 민주화 실현을 저해하는 일이었음을 전달하고 미국에 있는 양심적 인사들과 연대, 지원하여 공통의 목표실현을 확인해야 한다.

이제 본인은 징역을 산다.
높은 담과 부자유, 징역의 외로움과 슬픔을 뚫으며 살 것이다. 쇠창살 너머 하늘의 별에서 윤동주 시인의 눈물을 만나며 이 징역을 살 것이다. 85년 9월 정치군부의 고문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회복하는 과정으로서 징역을 살 것이다. 80년 5월 부릅 뜬 눈으로 정치군부의 총칼에 의해 아스팔트에 쓰러졌던 망월동 시민들의 원혼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징역을 살 것이다. 이 징역 속에서 민주화의 그날을 꿈꾸며 징역을 깨면서 살 것이다. (주석 17)

주석
17> 앞의 책, 164~171쪽, (발췌).


01.jpg
0.05MB

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7 08:00 김삼웅

 

엉터리 재판은 진행되어서 1986년 3월 16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법 178호 법정에서 1심 공판이 열렸다. 여전히 방청인은 제한되고, 언론은 외면하거나 정부발표문만을 받아 쓰는 상태였다.

김근태는 최후진술을 활용하기로 하였다. 다른 기록은 훔쳐가고 날조해도 법정의 최후진술만은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치군부의 하수인이 된 법원이 양심껏, 소신껏 판결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긴 감옥살이를 각오하면서 당당하게, 준열하게 진술하였다. 결기 넘치는 진술이었다. 주요 부문을 발췌한다.

본인의 이 사건은 두 개의 잘못된 가정과 정치군부의 보복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오늘날의 민주화 열기가 김근태와 민청련에 의해 초래되었으며
둘째, 광범하게 발생하고 있는 정치군부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의 배후는 명백히 존재하며 그것은 분명히 김근태일 것이라는 단정적인 가정하에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만들어 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정치군부의 범죄행위와 은폐행위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본인의 이 사건에 대해서 재판부는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본인의 사건과 고문 및 은폐행위를 두 개의 사건으로 분리해서 접근한다면, 또한 실체적 진실과 이러한 범죄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는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시대를 10여년 이상 지내며 살아왔는데, 당시 독재자들은 이른바 국가안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사람을 교도소와 감옥, 고문장으로 보냈다. 그 때 법원은, 법관은 이를 합리화시키고 추인, 협력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지난 80년 5월 17일을 전후하여 암담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이 좌절과 공포로 보낼 때도 정치군부는 또 다시 이른바 국가변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많은 사람들을 교도소로 보냈으며, 그 때도 법원과 법관들은 이를 무기력하게 추인하고 협력하였다.

85년 중반 이후 본인이 있는 서울구치소에는 200여명 이상의 많은 수인들로 꽉 찼는데, 이 나이어린 학생들이 본 구치소에 구속된 것은 법관이 발부한 영장에 의해서이다.

본인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배웠는데, 그런데 그 분들 중의 일부가 일제의 탄압과 생활고로 인해 좌절하고 일제의 폭거에 침묵하고 나아가 그들의 주구배가 된 것에 인간적으로 부분적으로는 이해하지만 한편으로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의심이 갔었다.


또한 70년대 암흑과 같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독재에 항거했는데, 그 과정에서 투옥되고 박해받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당시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대열에서 멀어져 가고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며 ‘왜 극복하지 못할까?’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과 그 후의 마음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되돌아보며 우리가 지배자들의 조직적 폭력과 박해를 뚫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 되며 용기 있는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나아가 본인은 이러한 70년대에 한번 투옥되면 원 스타, 세번 투옥되면 쓰리 스타가 되는,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어떤 의미에서는 어깨에 힘을 주는 이러한 민주인사들에 대해 이해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꼭 마땅하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적 박해와 폭력적 탄압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이 시대의 운명과 더불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로부터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 인간은 정치군부의 폭력적 탄압에 굴복하고 좌절할 수도 있다. 본인은 체포된 이래 수많은 굴종을 강요당했다. 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아니 고통 없이 죽여달라고 빌기도 했다. 그리고 조그마한 저항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또 다시 저들에게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다시 지금 본인은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가 있기 때문에 다시 민주화 대열에 한 사람으로서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있다.

그러나 김근태가 민주화 대열에서 당한 고난이 우리 사회에서 열 명 그리고 새로운 백여 명의 민주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창출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민주화 운동은 이미 폭력적 탄압 아래서 굴복하고 좌절해 가는 사람 숫자를 열 배, 스무 배로 보충하고도 남을 충분한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동조하는 배후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80년 5ㆍ17과 광주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 새로운 민주화 열기를 고조시키고 물러설 수 없는 민주화 실현의 몇 단계를 진행해 온 것을 봐서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군부는 이른바 국가안보를 운위할 자격이 없다. 자신들의 특권유지와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부전선을 비운 채 서울로 진격했으며 국민의 군대의 보안을 유지해야 될 보안사령부가 국민을 탄압하고 민주적 질서를 기본적으로 훼손시키는 장치로 기여하고 역할을 한 정치군부가 오늘날 국가안보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정치군부는 헌정질서를 얘기할 자격이 없다. 참모총장 공판과 국방부에 총질을 하여 민주적 기본질서를 기본적으로 유린한 자들이 얘기하는 헌정질서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정치군부의 특권에 대한 보호를, 정치군부에 대한 이의제기를 짓밟고 오직 굴종, 폭력적 탄압을 합법화시키고자 하는 하나의 정치적 언어에 불과한 것이다.


세번째, 정치군부는 이른바 법의 지배와 폭력적 파괴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80년 5ㆍ17 이후 저 광주에서 빈손, 맨주먹과 맨가슴의 무고하고 선량한 시민들에게 총칼을 겨누고 총탄을 퍼 부은 자들이 어떻게 법과 평화의 지배를 애기할 수 있겠는가?

네번째, 정치군부는 민생의 문제나 경제건설 문제를 말할 자격이 없다.
79년 12.12, 80년 5ㆍ17 이후 현 정치군부는 전대미문의 권력형 부정부패를 점철시켜 왔고, 이른바 장영자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부정부패 속에 휩싸여 왔으며, 이외에도 갖가지 소문과 풍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반민중적인 작태가 진행되었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민생문제와 경제건설을 위해서 민주화를 유예하고 연기해야 된다는 것을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02.jpg
0.08MB
01.jpg
0.03MB

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6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재판은 엉터리로 진행되었다.
‘엉터리’의 표현에는 재판정 밖에서, 그러니까 어용화된 언론에서 ‘김근태 죽이기’의 보도가 연일 신문과 방송에 터져 나온 것까지 포함된다. 신군부는 이른바 ‘협조’ 명목으로 신문사 사주, 편집국장을 협박하여 남영동 경찰관들의 고문사실을 보도하지 못하게 막았다. 재판은 언론을 동원하여 좌경으로 용공몰이를 하면서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어용 보도기관인 KBS와 연합통신을 동원하여 사실을 왜곡ㆍ날조함으로써 사전에 관제여론재판을 강행하려 시도하였으며, 그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고문 사실의 일부가 노출된 이후 KBS 등은 더욱 기승을 부렸는데, 이것은 맞붙어 자름으로써 고문은폐 효과를 거두고 의도된 정치보복을 최종적으로 완수코자 한 것이었다. 서 성 판사는 공판정에서 이 사건이 신문, 방송에 보도된 것과는 다르다고 말하였다. 그것에서 만들어진 편견에서 해방되느라고 무척 힘들었다는 의미의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정치군부와 관제언론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강요된 편견 속을 헤매었으며, 남영동에서 각색된 피묻은 서류에 파묻혀 영원히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서 성 판사를 비롯하여 재판부 전원이 아주 깊숙이 침몰되어 버린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예단과 편견 배제의 원칙을 저버리고, 공정성을 잃어버림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연합통신 제공으로 반(半) 강요된 기사가 각 일간 신문에 획일적으로 크게 보도되었고, 뉴스 시간에 여러 번, 거기다가 2회에 걸쳐 40여 분짜리 특집기획물까지 (나 개인에 대한 것을) 만들어 KBS는 방영하였다.
(주석 15)

서성 판사는 제1회 공판 때부터 방청인수를 대폭 제한하여 민청련 회원 등의 방청을 막았으며, 그나마 허용된 방청인은 대부분 기관원으로 채우는 등 법관으로서의 기본적 양식도 지키지 않았다. 서성은 증인 심문에서도 판사의 공정성을 저버리고 유죄를 예단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증인에게 던지곤 하였다.

김근태는 부당하게 진행되는 재판과 장외에서 전개되는 언론기관의 인격학살에 대해 하염없이 분노하면서, 공판 사이 사이에 고문의 실상과 현재의 심경을 담은 <탄원서>를 썼다. 집필 허가를 신청한 지 40일 만에 간신히 허가 통지를 받았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구치소에서는 2부를 작성하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는 데도 김근태에게는 1부만을 작성하도록, 미리 쪽수가 매겨진 조서용지를 주었다. 김근태는 여차 하면 없애버릴 지 모른다고 우려하면서도 심혈을 기울여 집필했다. 그런데 예상대로였다. 애써 쓴 <탄원서>를 출정하는 시간에 누군가가 훔쳐가고 말았다.

일제식민통치자들보다 더한 야만의 짓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남겼고,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한용운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조선독립이유서>를 쓸 수 있었다. 김근태가 여러 날 고심하여 쓴 <탄원서>는 빼앗기고 말았지만, 마지막 부문은 생생하게 기억하였다.

맨 끝으로 고문을 당하며 속으로 통곡하고 지내온 지난 겨울, 이 가막소에서 나는 애정 넘쳐 있는 수많은 학생, 그리고 버림 받은 제소자들의 격려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그 때 두 겹 비닐 창문을 때리는 북풍에 견디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되뇌고 되뇌었다.

내 귀여운 아이들아
느이들 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애비가 어디 가서 오래 못 와도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
외로울 때는 엄마랑 들에도 나가 보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봐야지
바람이 차거들랑 옷깃 잘 여며
감기들지 않도록 조심도 하고.
(주석 16)


주석
15> <이제 다시 일어나>, 143쪽.
16> 앞의 책, 163쪽.





01.jpg
0.05MB

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5 08:00 김삼웅

 


유신과 5공시대의 사법부는 독립성을 상실한 독재정권의 부속기관에 불과했다.
이들은 특히 민주ㆍ민족관련 사건에는 정부(검찰)의 뜻을 그대로 쫓았다. 시국사건에서 기소장과 판결문이 똑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근태 사건을 담당한 판사도 다르지 않았다. 판사는 변호인들의 증거보전청구를 간단히 기각했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의 김오수 판사다.

김근태는 12월 9일 변호인 접견봉쇄가 사라질 때까지 일주일에 2~3회 정도 검찰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때마다 변호인 접견이 허용되지 않는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말하고, 끝까지 묵비권으로 일관하였다.

우선 9월 26일 송치 당일 관련 검사들에게 발뒤꿈치 상처와 발등의 전기고문 흔적을 보이면서 조사하여 처벌을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또 진술거부를 철회하도록 종용을 받았을 때 나는 고문을 조사하여 처벌한다면, 검찰 요구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검찰은 두 개의 사건이기 때문에 고문도 조사하여 처벌해야겠지만 묵비를 중지하는 것이 나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었다. (주석 12)

12월 29일 김근태는 구술을 통하여, 그리고 부인과 변협소속 변호사들은 정식으로 정석모 내무장관, 박배근 치안본부장, 윤재호 대공분실장 외 7명의 수사관과 김원치 등 공안부검사 4명을 불법감금과 가혹행위,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고소한 지 3~4개월이 지나도록 조사의 흉내도 내지 않았다. 모두 한 통속이었다. 고소에 참여한 변호사는 대한변협 인권위원회 위원장 유택형과 부위원장 강신옥, 위원으로 변정수ㆍ강철선ㆍ조승형ㆍ조영래ㆍ홍성우ㆍ김철 등이다. 다음은 고발장이다.

1. 피해자 김근태는 학원안정법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혐의로 1985.8.24. 서울중부경찰서 형사에 의하여 체포되고 8.26. 경범죄 처벌법 제1조 44호 (유언비어 날조 유포금지) 위반으로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구류 10일에 유치명령 10일을 선고받아 8.26부터 9.4일까지 10일간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는데 구류기간이 만료되는 9.4. 5시 30분경 치안본부 직원이 서부경찰서에 와서 피구속자를 용산구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데리고 가서 그곳 5층 건물 5층 15호실에 가두었다.(구속영장은 9.7. 13시 30분에 발부되었다고 함)

2. 이와같이 대공 수사반에 연행되어 가서 그 곳에서 김 전무라고 불리우는 사람(경정 또는 경감인 듯)의 지휘 아래 8명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는데 연행되던 날(9.4) 6시 30분부터 7시 사이에 “진술을 거부하겠느냐”고 묻기에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대답하자 김 전무는 “해볼테면 해보라 깨수부겠다”고 하면서 얼굴을 때리는 한편 (아프지는 않게 모욕적으로) 다른 직원에게 고문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약 30분간 무릎을 꿇게 했다.

이때 여러 명이 “죽여 버려라”는 등 소리를 지르고 겁을 주다가 8시 경부터 소위 물고문을 시작했는데, 옷을 홀랑 벗기고 눈을 가리고 고문대 (높이 1미터 남짓되고, 길이 1미터 70~80 센티이며, 어른 어깨넓이의 바닥이 각목으로 된 평상)에 등을 대고 눕게 한 다음 발목, 무릎, 허벅지, 배, 가슴 등 다섯 군데를 벨트로 고문대에 동여매고, 목을 약간 뒤로 저치게 하고 코와 눈을 두꺼운 수건으로 씌우고 나서 그 수건위에다 샤워기로 물을 쏟아붓기 시작하더니 물의 분량을 점점 늘려가면서 나중에는 주전자물을 함께 부었다.

이때 피구속자는 숨이 끊어질 것 같고 그 고통이 견딜 수 없었지만 소리도 지를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사뭇 견디다 못해 묶인 채 비틀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팔뒤꿈치와 발뒤꿈치가 고문대의 각목 바닥에 마찰되어 살이 찢어졌다. (아직도 적갈색의 흉터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보여줌)

이러한 고문은 8시 경부터 13시 경까지 5시간 동안 계속됐으며 13시 경 고문대에서 풀고 민청련의 결성시기, 간부 이름 등을 물었다. 그리고 나서 저녁을 굶긴 채 또 다시 19시 30분 경부터 그 다음날(9.5) 0시 30분 경까지 5시간 동안 오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물고문을 하였는데 저녁 고문시에는,

첫째, 피구속자가 폭력혁명을 목적함을 시인하라.
둘째, 피구속자가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시인하라.
셋째, 오늘의 혼란 상황은 민청련과 피구속자 김근태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민청련과 김근태의 지시에 따라 과격하게 움직이는 선을 대라고 하면서 고문을 계속했다.

3. 그 다음 날인 1985. 9.5.20시 경부터 다음날(9.6.) 1시 30분 경까지 또 다시 어제와 같이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 고문을 하였는데 이때에는 주로 전기고문을 하고 물고문을 병행했다. 고문대 위에 뉘어서 묶어놓고 발에는 전선이 들어있는 붕대를 감고 발가락 사이에 전기코드를 꽂고 발, 사타구니, 가슴, 목, 머리에 물을 붓고 먼저 물고문을 한 다음 전기를 통하게 했다. 처음에는 전력을 약하고 시간을 짧게 하다가 차츰 높은 전력을 길게 보냈으며, 이러한 고문을 의식을 잃지 않을 정도로 계속하면서 폭력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시인하라고 요구했다.

4. 1985. 9. 6.도 어제와 같은 시간에 (20시부터 다음날 1시 30분 경까지) 거의 비슷한 전기 및 물고문을 하였는데 이 때에는 배후 관계를 대라고 추궁했다.

5. 1985. 9. 8. 10시 경부터 15시 경까지 5시간 동안 19시부터 24시까지 5시간 동안 전날과 같은 전기 및 물고문을 했다. 이 때에는 배후관계를 추궁하면서 북한도 다녀왔고, 북한에 있는 형들과 만나고 왔다고 전혀 허무맹랑한 사실을 시인하라고 하므로 견디다 못해 시키는 대로 시인했다.

6. 1985. 9.10. 9시부터 12시 경까지 전기봉 고문 (전기가 몸에 직접 통하지 않고 발에 통증만 오게 한다) 물고문을 하면서 이제까지 허위자백한 것을 복습시켰다.

7. 1985. 9. 13. 23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 30분까지 4시간 30분간 그리고 새벽 3시부터 6시 경까지 3시간 전기봉 고문과 물고문을 병행하면서 재정문제와 배후관계를 추궁하였다. 9.13, 밤 고문시에는 오늘이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면서 고문을 했다. 견디다 못하여 함세웅 신부가 배후 인물이라고 진술하자 그러면 함세웅 신부를 배후인물로 하자고 서로 합의를 보았다.

8. 1985. 9. 20. 20시경 부터 24시 경까지 4시간 동안 9.5에 있었던 것과 같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하였다. 이 때에는 그 동안에 허위진술 한 것을 총복습하였다.

9. 1985. 9.25. 아침 5시 김 전무라는 사람이 문용식과의 관계를 묻기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부인하자, 팔 뒤꿈치로 10여 차례 가슴을 가격하였다. 결국은 견디다 못해 문용식의 자술서를 보고 그대로 베꼈다.

10. 1985. 9. 4.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 수사단 (피구속자의 진술에 의한 것이므로 과연 그러한 수사기관이 틀림없는지는 알 수 없음)에 연행되어 가서 1985. 9. 26.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피구속자 김근태가 당하였다는 고문의 실상은 이상과 같은 바,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9.13. 이후 지금까지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 되어 밥을 먹지 못하고 죽을 먹고 있으며, 온 몸이 아프고 기운이 없어 걷지도 못한다고 하며, 교도관의 말도 김근태는 몸이 불편하여 잘 걷지도 못하여 감방에서 변호인 접견실까지 나오자면 30분도 더 걸린다고 함. (주석 13)

다음은 부인 인재근이 검찰에 제출한 호소문이다.

부인 인재근의 호소문

치안본부에서 고문당한 남편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저는 민청련 초대의장이며, 자문위원인 김근태 씨의 아내입니다.
김근태 씨는 지난 9월 4일 5시 30분 경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의해 강제 납치되어 9월 7일 국보법위반으로 구속되었고, 20여 일 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고 안타까워만 했던 저는 26일 오후 2시 30분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에서 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오는 남편을 본 순간 반가움과 함께 놀라움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남편에게 “많이 다쳤어요”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남편은 “굉장히 당했어”, “굉장히 당했어!”를 되풀이 했습니다. 9월 4일, 8일, 13일 각각 두차례씩, 5일, 5일 각 한차례씩, 20일~26일까지 열 차례 온몸을 꽁꽁 묶어놓고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물 먹이기, 소금물 먹이기 등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을 거의 재우지 않고, 고문한 날은 밥을 주지 않아 꼬박 굶었다고 합니다.

검찰청 5층에서 4층 대기실까지 내려가는 동안 남편이 저에게 발뒤꿈치를 보여 주었습니다. 짓이겨진 그의 발뒤꿈치와 발등은 저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습니다. 옷을 입고 있어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온몸에도 상처투성이고, 특히 팔꿈치는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20일 이후 26일까지 치료를 하여 많이 나은 상태가 그 정도이니 그 당시 그는 사경을 헤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더욱 공포에 떨게 한 것은 검찰청 5층 521호 김원치 검사실에서 남편이 검취를 받고 나오면서 전해 준 옷 보따리에 그동안 세 차례에 걸쳐 전달했던 속옷을 하나도 전달받지 못하고 겉옷 두 벌만 전달해 준 사실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분명히 남편의 속옷은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남편의 고문상처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제가 검찰청으로 가지고 간 내의를 구치소에서만 갈아입도록 했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악랄하게 고문하고 이런 사실을 감출 수 있는 허가 받은 폭력 깡패집단이 이 나라에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이 엄청난 고문을 자행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도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고 떠드는 자는 누구입니까?

악랄한 고문을 통해서 죄를 조작하는 수사기관이야말로 폭력죄로 처단해야 합니다. 이는 저와 남편만의 고통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고통이며 민주화를 갈망하는 모든 국민에 대한 협박이며 도전입니다.

자유를 열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호소합니다.
치가 떨리는 이 고문만행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일곱 살 난 아들에게 저는 이 무서운 세상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주석 14)


주석
12> 김근태, <이제 다시 일어나>. 131쪽.
13> <1985년 인권보고서>, 72~73쪽.
14> 인재근 강연자료집, <엄마가 뿔났다>, 62~63쪽, 한반도재단여성위원회, 2012.

  



03.jpg
4.91MB
01.jpg
3.99MB
02.jpg
0.07MB

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4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2월 20일, 그러니까 공소가 제기되고도 한달 반 이상이 지난 뒤에야 가족 면회가 이루어졌다. 검찰은 물론 담당 판사인 서성이 “죄증을 인멸할 상당한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가족 면회를 못하게 한 것이다.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은 검찰청사에서 남편의 고문 사실을 알고, 이것을 세상에 폭로하면서 권력층은 이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자 가족의 면회까지 막은 것이다.

85년 12월 13일 변호사 접견이 고의적으로 봉쇄된 것이 풀린 지 닷새가 되던 날, 나는 흥분하여 깊숙이 간직해 두었던 양쪽 발뒤꿈치에서 아물어 떨어진 상처 딱지를 이돈명 변호인, 목요상 의원에게 드리면서 재판의 증거로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이 통할 리 있겠는가. 행형법(行刑法)상 교도관 입회라는 것을 이용하여 간섭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제지당하고 결국은 강탈당하고 말았다. (주석 10)

김근태의 고문 상처 딱지는 그가 검찰에 출정하는 사이 교도관들이 방을 샅샅이 뒤져 화장지 틈새에 끼워 놓았던 것을 훔쳐갔다. 증거인멸을 위해서였다. 김근태의 변호인들은 증거보전신청과 아울러 증거 보전기일에 관한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하였다.

다음

1. 이 사건 증거보전의 필요성
피의자는 사법경찰관의 수사과정에서 고문 특히 10회 가량의 전기고문을 받아 현재 그 흔적으로서,

ㄱ) 양발뒷굼치에 직경 21센티 가량의 원형 피부결손 및 찰과상의 반혼. 이는 전신을 묶인 상태에서 격심한 고통 때문에 발을 한없이 비틀게 된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상혼으로 보임.

ㄴ) 양팔의 발가락 가까운 쪽 발등에 10여 개의 찔린 흔적
이는 전기쇼크를 주기 위하여 사지의 끝부분 전선에 연결된 어떠한 형태의 침을 찌를 때 생긴 상흔으로 보임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상흔은 시일경과에 따라 치유되기 마련이므로 그 상흔을 검증해 보고 이와 동시에 그 상흔이 언제 생긴 것인지를 감정케하는 것이 바로 이 증거보전의 필요성입니다. 이와 같은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는 증거법 및 적법절차 문제에 관하여 피의자의 방어권행사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증거방법입니다.

2. 신체검증을 즉시하여야 하는 이유

(1) 이 사건 증거보전신청을 85. 10. 2. 오후에 제출한 바, 아직도 증거보전기일이 지정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사건과 같은 증거보전이야말로 절박한 것인데 피의자가 최후로 고문받았다는 날인 85.9.20. 이후 지금까지 15일이 경과된 바, 이제 며칠만 지나면 위 상흔이 치유로 인하여 없어질 우려가 매우 큽니다.

만일 신체감정을 위한 감정인 선정 때문에 시일이 지연된다고 한다면 적어도 이 사건 증거보전기일을 선후로 나누어서 급박한 신체검증을 먼저 하고 다음으로 감정인 선정 즉시 감정을 하는 방법이 매우 긴요하게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2) 이 사건 증거보전의 필요성 및 이유를 감안하여 우선 즉시 신체검증의 기일을 지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 기일통지에 관한 항변권의 포기
변호인들에 대한 기일통지 역시 서면에 의할 필요가 없어 변호인들 중 어느 1인에게라도 전화통지를 하면 이에 대하여 변호인들 전원명의의 기일통지영수증서를 작성할 것이며 이에 관한 절차상의 항변을 사전에 포기하는 바입니다.

1985. 10. 5.

 

 


01.jpg
0.72MB

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3 08:00 김삼웅

 

김근태를 간첩으로 만들고자 그의 동료들을 붙잡아다가 고문하면서 조작한 증언이 재판과정에서 속속 드러났다. 서울구치소에서 김근태는 수없이 검찰에 불려가 똑같은 조사를 받았다. 변호인단은 12월 24일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서울 구치소 변호인 접견에서 김근태를 만날 수 있었다. 이 감옥에 수감된 지 3개월 반만이다. 다음은 변호인단이 접견하고 대한변협 회장(김은호)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김근태의 증언과 중복되는 부분이지만 변협의 보고서이기에 재록한다.

1. 피구속자는 학원안정법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혐의로 1985. 8. 24.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에 의하여 체포되고, 8. 26. 경범죄 처벌법 제1조 44호 (유언비어 날조 유포금지) 위반으로 즉결 심판에 회부되어 규류 10일에 유치명령 10일을 선고받아 8.26부터 9. 4까지 10일간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는데 구류 기간이 만료되는 9.4. 5시 30분경 치안본부 직원이 서부 경찰서에 와서 피구속자를 용산구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데리고 가서 그곳 5층 건물 5층 15호실에 가두었다.(구속영장은 9. 7. 13시 30분에 발부되었다고 함)

2. 위와같이 대공수사단에 연행되어 가서 그곳에서 김 전무라고 불리우는 사람(경정 또는 경감인듯)의 지휘아래 8명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는데 연행되던 날(9.4) 6시 30분부터 7시 사이에 “진술을 거부하겠느냐”고 묻기에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대답하자 김 전무는 “해볼테면 해보라 깨부수겠다”고 하면서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한편 (아프지는 않게 모욕적으로)다른 직원에게 고문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약 30분간 무릎을 꿇게 했다.

이때 여러 명이 “죽여 버려라”는 등 소리를 지르고 겁을 주다가 8시경부터 소위 물고문을 시작하였는데, 옷을 홀랑 벗기고 눈을 가리고 고문대 (높이 1미터 남짓되고, 길이 1미터 70~80 센티되며, 어른 어깨넓이의 바닥이 각목으로 된 평상)에 등을 대고 눕게 한 다음 발목, 무릎, 허벅지, 배, 가슴 등 다섯 군데를 벨트로 고문대에 동여메고, 목을 약간 뒤로 저치게 하고 코와 눈을 두꺼운 수건으로 씌우고 나서 그 수건위에다 샤워기로 물을 쏟아붓기 시작하더니 물의 분량을 점점 늘려가면서 나중에는 주전자물을 함께 부었다.

이때 피구속자는 숨이 끊어질 것 같고 그 고통이 견딜 수 없었지만 소리도 지를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사뭇 견디다 못해 묶인 채 비틀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팔뒤꿈치와 발뒤꿈치가 고문대의 각목 바닥에 마찰되어 살이 찢어졌다. (아직도 적갈색의 흉터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보여줌) 이러한 고문은 8시경부터 13시경까지 5시간 동안 계속됐으며 13시경 고문대에서 풀고 민청련의 결성시기, 간부 이름 등을 물었다. 그리고 나서 저녁을 굶긴 채 또 다시 19시 30분경부터 그 다음날 (9.5) 0시 30분경까지 5시간 동안 오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물고문을 하였는데 저녁 고문시에는,

첫째, 피구속자가 폭력혁명을 목적함을 시인하라.
둘째, 피구속자가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시인하라.
셋째, 오늘의 혼란 상황은 민청련과 피구속자 김근태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민청련과 김근태의 지시에 따라 과격하게 움직이는 선을 대라고 하면서 고문을 계속했다.

3. 그 다음 날인 1985. 9.5.20시 경부터 다음날(9.6.) 1시 30분 경까지 또 다시 어제와 같이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 고문을 하였는데 이 때에는 주로 전기고문을 하고 물고문을 병행했다. 고문대 위에 뉘어서 묶어놓고 발에는 전선이 들어있는 붕대를 감고 발가락 사이에 전기코드를 꽂고 발, 사타구니, 가슴, 목, 머리에 물을 붓고 먼저 물고문을 한 다음 전기를 통하게 했다. 처음에는 전력을 약하고 시간을 짧게하다가 차츰 높은 전력을 길게 보냈으며, 이러한 고문을 의식을 잃지않을 정도로 계속하면서 폭력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시인하라고 요구하였다.

4. 1985. 9. 6.도 어제와 같은 시간에(20시부터 다음날 1시 30분 경까지) 거의 비슷한 전기 및 물고문을 하였는데 이 때에는 배후 관계를 대라고 추궁했다.

5. 1985. 9. 8. 10시 경부터 15시경까지 5시간 동안 19시부터 24시까지 5시간 동안 전날과 같은 전기 및 물고문을 했다. 이 때에는 배후관계를 추궁하면서 북한도 다녀왔고, 북한에 있는 형도 만나고 왔다고 전혀 허무 맹랑한 사실을 시인하라고 하므로 견디다 못해 시키는 대로 시인했다.

6. 1985. 9. 10. 9시부터 12시 경까지 전기봉 고문 (전기가 몸에 직접 통하지 않고 발에 통증만 오게 한다) 물고문을 하면서 이제까지 허위자백한 것을 복습시켰다.

7. 1985. 9. 13. 23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 30분까지 4시간 30분간 그리고 새벽 3시부터 6시 경까지 3시간 전기봉고문과 물고문을 병행하면서 재정문제와 배후관계를 추궁하였다. 9.13, 밤 고문시에는 오늘이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면서 고문을 했다. 견디다 못하여 함세웅 신부가 배후 인물이라고 진술하자 그러면 함세웅 신부를 배후인물로 하자고 서로 합의를 보았다.

8. 1985. 9. 20. 20시 경부터 24시 경까지 4시간 동안 9.5에 있었던 것과 같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하였다. 이 때에는 그 동안에 허위진술한 것을 총복습하였다.

9. 1985. 9.25. 아침 5시 김 전무라는 사람이 문용식과의 관계를 묻기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부인하자 팔꿈치로 10여 차례 가슴을 가격하였다. 결국은 견디다 못해 문용식의 자술서를 보고 그대로 베꼈다.

10. 1985. 9. 4.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피구속자의 진술에 의한 것이므로 과연 그러한 수사기관이 틀림없는지는 알 수 없음)에 연행되어 가서 1985. 9. 26.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피구속자 김근태가 당하였다는 고문의 실상은 이상과 같은 바, 그는 고문 휴유증으로 9.13. 이후 지금까지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되어 밥을 먹지 못하고 죽을 먹고 있으며, 온몸이 아프고 기운이 없어 걷지도 못한다고 하며 교도관의 말도 김근태는 몸이 불편하여 잘 걷지도 못하여 감방에서 변호인 접견실까지 나오자면 30분도 더 걸린다고 함. 그리고 피구속자의 전술 태도로 보아서 그의 진술은 보탬도 없고 꾸밈도 없는 진실로 인정됨.

11. 변협 조사위원은 이상과 같이 보고 하는 바, 이 나라에 명색이 법이 있고, 인권옹호를 그 직무로 한다는 검찰과 법원이 있으며, 인권옹호를 사명으로 한다는 변호사 단체들이 엄연히 있는 마당에 어떻게 독재 국가나 팟쇼 정권 아래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러한 잔인 무도한 가혹행위가 사법경찰에 의하여 자행될 수 있는 것인지 몸서리 처지며,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임(더구나 1985. 9. 4.부터 9. 6까지의 고문은 구속영장도 없는 불법구속 상태에서 자행된 것임) 직접 고문을 자행한 경찰관에 대하여는 직권 남용(형법 제125조 소정의 폭행, 가혹행위죄)으로 고발해야 할 것이고, 검찰이 사후에 이를 알고도 형사 입건하지 아니하고 고문 경찰을 묵인하였다면 담당검사에 대하여는 직무유기죄로 고발하여야 할 것이며, 경찰 최고책임자에 대하여도 단호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으로 생각됨. (주석 9)


주석
9> 앞의 책, <1985년 인권보고서>, 62~65쪽.


 

‘자서전 어록’ 대선 앞두고 화제
어린아이 화법, 따스함이 없는 인간미, 비민주적 관행 혹평
“한나라당은 ‘나의 당’, 청와대는 ‘나의 집’, 대통령은 ‘가업’”

 

전여옥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1월 출간한 자서전 〈i 전여옥〉이 대선을 앞두고 누리꾼 사이에서 다시 화제다. 전 전 의원은 이 책에서 박 후보에 대해 “대통령감이 아니다”고 평가 절하했다. 전 전 의원은 2005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대변인으로서 박 후보를 보좌한 바 있다.

 

전 전 의원은 “박근혜 후보. 내가 당에 들어와 지난 3년 동안 지켜봐 왔다. 가까이서 2년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대통령 감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과연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나의 답은 이미 정해졌다. 아니다. No였다. 대통령이 될 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안되는 후보라고 생각한다”라고 적었다.

 

전 전 의원은 박 후보에 대해 실망했던 경험들을 열거했다. 전 전 의원은 박 후보의 집에 방문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박근혜 의원의 서재는 날 감동시키지 못했다. 서재라고 부르기도 좀 그랬다. 나는 언론에서 맨날 박근혜고 안철수고 ‘대권 공부’를 한다는데 그런 기사를 접할 때마다 짜증이 난다. 공부가 끝났어도 시원찮은데 말이다. 교수들에게 특별과외를 받는 것도 사실 웃기는 일이다”라며 김종인 새누리당 행복추진위원장(당시 비상대책위원)의 말을 이어 전했다. “옛날에 비하면 엄청나게 나아진 거지요. 그런데 아직 초보 수준이고 자기가 얘기하는 것이 다 알고 얘기하는 것 같지는 않고 옛날보다 나아진 것은 있지요.” 전 전 의원은 또 “거의 교과서를 암기하고 족집게 과외 공부하는 수준이라면 이 나라 국민이 곤란하지 않는가?”라며 박 후보를 힐난했다.

 

그는 또 박 후보의 화법을 어린아이에 비유하며 혹평했다. 전 전 의원은 “박근혜는 늘 짧게 답한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오만의 극치’. 그런데 이 단언은 간단명료하지만 그 이상이 없다. (중략) 국민들은 처음에는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했다. 뭔가 깊은 내용과 엄청난 상징적 비유를 기대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쳤다. 어찌 보면 말 배우는 어린아이들이 흔히 쓰는 ‘베이비 토크’와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어 박 후보의 인간미에 대한 평도 덧붙였다. 전 전 의원은 “박근혜는 너무 어둡다. 사람에 대한 따스함이 없다. 박근혜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면, 널리 알려졌듯이 이코노미를 탄다. 그런데 박근혜의 이코노미석 옆은 대개 블록이 되어 있다. 옆에 사람이 앉지 않게 하는 것이다. 비행기가 만석일 때 빼놓고는 옆에 사람이 앉지 않는다. 이코노미 타는 이유가 뭔가? 사람들과 섞이기 위해 아닌가? 한정된 좌석의 비즈니스클래스를 타면 볼 수 없는 것,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장점이건만-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고 적었다.

 

전 전 의원은 박 후보의 비민주적 업무지시 관행도 지적했다. 전 전 의원은 “친박 의원들 사이에서는 박 전 대표의 뜻을 헤아리느라 우왕좌왕하는 것이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면 박 전 대표는 ‘제가 꼭 말을 해야 아시나요?’라고 단 한마디 한다고 한다. 말하지 않고 어떻게 아나?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정치인은 최선을 다해 말로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유권자와 국민에게 설명하고 호소해야 한다. (중략)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비민주적이다”고 비판했다.

 

전 전 의원은 2005년 한나라당에 막 들어와 박 후보의 시중꾼 노릇을 했던 경험도 적었다. 전 전 의원은 “경상북도 대구에서 있던 행사로 기억된다. 그날 앞쪽에는 박근혜 당시 대표가 앉아 있었고 바로 뒷줄에는 나와 대구 경북 지역의 의원들이 줄줄이 앉아있었다. 그런데 비가 주르륵 내리기 시작했다. (중략) 옆에 있던 김태환, 이해봉 의원이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전 대변인 뭐하고 있나? 대표님 머리 씌워드려야지’. 순간 나는 당황했다. 아니, 자기 우비의 모자는 자기가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중략) 박근혜는 내가 씌워주기를 기다렸다. (중략) 나는 박근혜 대표 커다란 올림머리가 비에 젖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우비모자를 씌워주었다. 박근혜 대표는 여전히 한마디도, 미동도 없었다”고 말했다.

 

전 전 의원은 또 ‘박근혜 신격화하기에 동참하지 못한 친박 의원들’에 대해 적었다. 전 전 의원은 “김무성 의원도, 진영 의원도 친박의 울타리를 떠났다. 이 두 사람은 박 전 대표에게는 매우 중요한 그리고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김무성 원내대표는 ‘2인자’를 두지 않는 박 대표와의 미묘한 갈등 속에서 떠났다. 진영 의원도 ‘친박으로서 충성도 부족’이라는 질타를 견디지 못해 떠났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박근혜 의원을 신격화해도 모자라는데 우습게 본 사람들’이란 다른 친박 의원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결별선언을 했다”고 적었다.

 

박 후보의 권력의지에 대한 평가도 눈길을 끈다. 전 전 의원은 “그녀는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다. 나는 그런 속내를 알고 있었다. (중략) 박근혜의 권력 의지는 대단했다. 나는 그녀를 관찰하면서 아 저렇게 까지 대통령이 되고 싶을까 싶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권력이란 매우 자연스럽고 몸에 맞는 맞춤옷 같은 것이라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에게는 생활 필수품이라는 것을 말이다”라고 적었다. 이어 “박근혜에게 한나라당은 ‘나의 당’이었다. 대한민국은 우리 아버지가 만든 ‘나의 나라’였다. 이 나라 국민은 아버지가 긍휼히 여긴 ‘나의 국민’이었다. 물론 청와대는 ‘나의 집’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바로 ‘가업’이었다”고 주장했다.

 

누리꾼들은 전여옥 전 의원의 어록을 트위터 등에 퍼나르며 저마다 한 마디씩 남기고 있다. 고종석(@kohjongsok)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전여옥이 문재인의 가장 큰 우군이 될 줄이야”라고 썼고, 누리꾼 @myworld***은 “전여옥도 앙심을 품은듯. 그래도 보는 눈이 정확한 듯”이라고 평가했다. 누리꾼 @mettayoon은 “여러분! 한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쁜 놈입니다. 그러나 두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바보입니다. (‘MB의 추억’ 마지막에 나오는 전여옥의 말)”이라고 적었다.

 

허재현 기자catalunia@hani.co.kr

 

 

 

출처 : 트위터 이용자 @BeanPole2000이 12월2일 트위터에 연재한 내용임

 

▶전여옥 어록 1

 

“박근혜 위원장은 자기의 심기를 요만큼이라고 거스리거나 나쁜 말을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그가 용서하는 사람은 딱 한 명 자기 자신이다.”

 

▶전여옥 어록 2

 

“하루는 어머니들과의 대화를 위해서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는데 박근혜 위원장이 햄버거를 먹지 않고 있기에 ‘왜 먹지 않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더라. 보좌관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오니 그제야 먹었다.”

 

▶전여옥 어록 3

 

“박근혜에게 한나라당은 ‘나의 당’이었다. 한국은 아버지가 만든 ‘나의 나라’였다. 국민은 아버지가 긍휼히 여긴 ‘나의 국민’이었다. 물론 청와대는 ‘나의 집’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바로 ‘가업’(my family‘s job)이었다.

 

▶전여옥 어록 4

 

”친박 의원들이 박근혜 대표의 뜻을 헤아리느라 우왕좌왕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 박 대표는 ’제가 꼭 말을 해야 아시나요?‘라고 단 한 마디 한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라‘하는 것은 그 자체가 비민주적이다.“

 

▶전여옥 어록 5

 

”박근혜는 늘 짧게 대답한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등. 국민들은 처음에는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했다. 그러나 사실 아무 내용 없다. 어찌 보면 말 배우는 어린애들이 흔히 쓰는 ’베이비 토크‘와 다른 점이 없다.“

 

▶전여옥 어록 6

 

”박 대표 바로 뒷줄에 앉아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의원들이 말했다. ’대표님 머리에 우비 모자 씌워드려야지.‘ 나는 당황했다. 자기 우비 모자는 자기가 쓰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씌워드렸지만 박 대표는 한마디도 없었다.“

 

▶전여옥 어록 7

 

”박근혜는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은 부정부패 연루자를 보호하지 않으며, 기소되면 당원 자격을 정지시키고 유죄가 확정되면 영구 제명하겠다”고 말했는데 부정부패로 유죄가 확정돼 2년반 콩밥을 먹은 사람을 당을 쇄신할 비대위원으로 임명했다”

 

▶전여옥 어록 8

 

“박근혜는 대통령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정치적 식견ㆍ인문학적 콘텐츠도 부족하고, 신문기사를 깊이 있게 이해 못한다. 그녀는 이제 말 배우는 어린 아이 수준에 불과하다.”

 

▶전여옥 어록 9

 

“영등포에 손가락이 잘린 분들이 많은데 유신독재 시설 공장에서 각성제를 먹고 졸면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다. 산업화의 영웅은 그들인데 꽃다발도 없고 명예도 없다.”

 

▶전여옥 어록 10

 

“박근혜는 공천 승복하는 것이 정도라고 얘기하지만 정작 박 위원장 본인은 승복하지 않았다. 친이계에 공천 승복하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전여옥 어록 11

 

“보좌관이 박근혜 위원장의 쓸 샴푸를 사야 하는데 단종이 돼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다. 왜 최근 나온 제품들을 안 쓰고 옛 제품만 고집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전여옥 어록 12

 

“박근혜 위원장은 클럽에 갈 때에도 왕관을 쓰고 갈 것 같다.”

 

▶전여옥 어록 13

 

“박근혜 위원장의 자택 서재를 둘러보고 박 위원장의 지적 인식능력에 좀 문제가 있다 생각했다. 서재에 일단 책이 별로 없었고 증정 받은 책들만 주로 있어 통일성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여기가 서재인가‘하는 생각을 했다.”

 

▶전여옥 어록 14

 

“여러분,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쁜 놈입니다. 그러나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바보입니다!”

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2 08:00 김삼웅

 

피의자에 대한 변호사의 접견과 가족의 면회는 법으로 보장된 정당한 권리다.
그럼에도 서울구치소 당국은 김근태가 수감되고 3개월여 동안이나 변호사의 접견을 막은 것은 물론 가족 면회까지 차단했다. 국가기관이 공공연하게 위법을 저지른 것이다. 남영동의 가혹한 고문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실상이 세상에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을 덮자는 수작이었다.

홍성우ㆍ황인철ㆍ신기하 등 변협 소속 변호사들이 1985년 10월 14일부터 수차례 서울구치소에 찾아와 김근태의 접견을 신청했으나, 그때마다 검찰출정을 이유로 거부당했다. 변협의 보고서다.

△ 본인들은 1985. 11. 30. 9시 30분 서울구치소에 가서 집견원을 제출하였던 바 벌써 검찰에 출정하였다는 이유로 접견을 거절하므로 구치소장을 찾아가서 항의하였더니 구치소장은 피구속자 김근태는 매일 아침 일찍 검찰에 불려갔다가 오후 5시 이후에야 돌아오기 때문에 도저히 접견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므로 어쩔 도리없이 접견을 못하고 돌아왔음.

△ 본인들은 1985. 12. 2. 오전에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정구영을 찾아가서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의 고문실태조사에 협력해 달라고 하면서 피구속자 김근태의 접견을 요청하였던 바, 검사장은 위 피구속자는 지금까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어 그의 진술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진술을 듣고자 매일 아침 일찍 검찰에 출정시키고 있으며, 아직 사선 변호인들에게도 접견을 시키지 아니하였는데 사선 변호인들보다 먼저 대한변협의 조사위원에게 접견을 시킬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머지않아 사선 변호인들에게 접견의 기회를 주고자하니 대한변협의 조사위원은 그 다음에 접견을 해달라고 말하므로 그대로 돌아왔음.

△ 이상과 같은 경위로 피구속자 김근태에 대한 고문실태조사는 못하고 말았는 바, 그동안 18회에 걸친 사선 변호인들의 접견을 허용하지 아니하고 본 조사위원들의 접견 또한 허용하지 아니한 처사는, 고문 여부는 잠시 제쳐놓더라도 그 자체가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인권침해이며, 신체고문에 대하여도 매우 짙은 의심을 갖게 하는 것임.
(주석 6)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인권이나 법질서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비판자에 대한 탄압과 보복으로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되었다. 출범 과정에서부터 정통성이 없는 정권의 도당적(徒黨的) 행태였다. 검찰은 김근태를 국가보안법(국보법) 위반혐의로 기소하고, 매일 검찰청에 호송하여 조사하였다. 남영동에서 받은 조사가 되풀이 되었다. 김근태는 변호사 접견을 막는 한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말하고 이를 지켰다.

민청련을 이적 단체로 규정한 김근태의 공소장은 다음과 같다.(요지)

1985년 3월 하순 경기도 시흥군 소재 속칭 작은자리 건물 회의실에서 민청련 간부들과 만나 1985년도의 정세전망 및 사회운동권 단체 통합문제에 관한 토의를 하였다. 피고인은 보고를 통하여 운동단체 통합과정에서 CD(시민민주주의), ND(민족민주주의), PD(민중민주주의) 등의 이념적 차이를 드러냈는데 CD와 PD의 입장을 절충하는 ND의 이념이 가장 적절하다는 취지로 설명하여 전원이 이에 동의, 위 이념을 민청련 지도이념으로 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하는 단체를 구성했다.
(주석 7)


검찰의 공소장대로라면 “CD와 PD의 입장을 절충하는 ND의 이념이 가장 적절하다”는 취지의 설명이 북한을 이롭게 하여 국보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알려진대로 국보법은 제정과정에서부터 ‘반대세력 제거용’이라는 비판이 따르면서 그동안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괴롭혀왔다. 이것이 김근태를 묶는 쇠사슬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하수인들은 김근태를 간첩으로 몰고자했다. 그래서 민청련 등 민주화운동단체들이 북한과 접선된 불순단체로 색칠을 하려한 것이다. 김근태와 민청련에서 함께 일하다가 구속된 문용식의 공판기록이다.

그들은 고문을 하며 어거지로 질문했는데 “7월 이후 도피하여 평양으로 갔지? 접선장소는 어디였어?” 이런 질문을 하며 옷을 발가벗겨 칠성판 위에 눕힌 후 안전벨트로 손가락, 발가락만 움질일 수 있도록 묶고 실신할 때까지 물을 부어 마치 몸을 묶고 물 속에 빠뜨려 놓은 상태에서 "DJ를 만나 지시받았지? 장기표를 만나 삼민투지시를 받았지?" 등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만약 김대중 씨를 한 번이라도 만났더라면 “네, 그랬습니다”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수없이 실신하고 똥물까지 게워낸 후 하룻밤이 지나 인내가 극히 한계에 다다를 때 "김근태 의장 만났지, 지시 받았지" 하고 물어 “네, 지시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 의장 얼굴을 제가 아는 게 죄였겠지요. “만나서 뭐했어?”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총회 때…”, “네 이놈, 이제 풀렸어”하며 고문하면 “네 2~3번 만났습니다”로 됩니다. 그리고 그들 마음대로 날짜가 정해집니다. 또한 미문화원 전에 김근태 의장을 만나 5월투쟁과 미문화원 점거 지시를 받은 걸로 조서가 작성 됩니다.…그리고 그들은 계속 “김근태는 간첩이다. 이북에 있는 형이 남파되어 접선했는데 너도 그것을 알았지?” 라는 엄청난 질문을 해 저는 “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 그가 간첩인지 몰랐다”고 밝히는 데 급급했습니다.

자신이 희미하게 아는 것을 글로 쓸 때는 명확히 쓰게 되었습니다. 즉 치안본부에서 자술서를 쓸 때마다 틀려져서 논리적으로 살이 붙게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CNP는 치안본부에서 비로소 성립된 것입니다.
(주석 8)


주석
6> 대한변호사협회, <1985년 인권보고서>, 60쪽.
7>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ㆍ민족민주운동연구소편,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84쪽, 아침, 1980.
8>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장 김근태씨 제8차공판기록>(1986년 2월 17일), 문용식의 변호인반대신문사항,14쪽.

 



01.jpg
0.05MB

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1 08:00 김삼웅

 

옛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무형무소역사관)와 그 너머로 인왕산이 보인다. 사진은 보림재블로그에서.

 

김근태는 남영동에서 모지락스런 권력의 하수인들로부터 잔인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의병ㆍ독립운동가ㆍ통일운동가ㆍ민주화운동가들이 거쳤던 ‘정규과정’이었다. 한말 이인영 의병대장, 총독암살 미수의 강우규 의사를 시작으로 3ㆍ1운동 민족대표. 유관순 열사, 의열단원, 서로군정서, 대한광복군 등 수많은 지사들이 수감되고 더러는 처형되었다.

해방 뒤에는 조봉암과 인혁당 간부들이 처형되었다.
함석헌ㆍ장준하ㆍ김대중ㆍ리영희ㆍ송건호 등이 거쳐가고 민청학련사건의 학생들에 이어 김근태도 1985년 9월 26일 이곳에 수감되었다. 일제가 침략하면서 이곳에 감옥을 지을 때는 경성감옥이었다.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바뀌고, 해방되던 해 서울형무소로,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면서부터 서울구치소가 되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서대문구 현지동 101번지, 민족의 한이 서린 이곳은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불리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김근태가 수감될 당시의 이름은 서울구치소였다. 5공권력의 핵심에 찍힌 김근태는 수감번호 14번을 달고 서대문구치소 중에서도 가장 추운 외진 방에 수감되었다.

나는 병동 아래층 맨 끝 북쪽 방에 밀어 넣어졌다. 방의 북쪽 벽에는 얼음이 빙판처럼 깔리고 저녁 형광등 불이 껌뻑거리며 들어오게 되면 얼음은 비수처럼 새파랗게 곤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매트리스 밑은 흥건하게 습기가 차 한겨울에도 곰팡이가 슬고, 두 겹 비닐로 막은 창문은 매서운 칼바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습기가 차다고 감옥 간부들에게 얘기해 봐야 헛일이었고, 그것은 우이독경일 뿐이었다. 칼날처럼 매섭게 얼어 붙은 벽을 가리켜도 그것은 한낱 엄살일 뿐이고 마이동풍이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아무 소리도 없었던 것과 진배없었다. 내 얘기는 처음부터 귀를 꼭 틀어막도록 지시를 받았거나, 의논하여 합의 결정한 것으로조차 보였다.
(주석 1)

김근태가 이처럼 감옥 중에서도 가장 추운 곳에 수감된 것은 권력핵심의 지침과 아울러 검찰청사에서 잠깐 만난 부인에게 전한 남영동의 고문사실이 알려지게 된 때문이다. 대한변호사협회(변협) 인권위원회 소속 홍성우ㆍ황인철ㆍ신기하 변호사 등이 진상규명 활동에 나서면서 김근태는 가족 면회와 변호사 접근이 금지되고, 가장 추운 방으로 수감되는 보복으로 나타났다. 변협 소속 변호사들의 활동은 뒤에서 상술하기로 하고, 서울구치소의 실상을 더 살펴본다.

남영동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김근태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식사를 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은 뒤에는 “이가 모두 흔들리고 아파서 씹을 수도 없었고, 소화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주석 2) 그래서 간수에게 죽을 부탁하여 오랫동안 천천히 먹었다. ‘먹었다’기 보다는 그냥 삼켰다.

그나마 남영동에 비하면 크게 나아진 편이었다. 며칠 뒤부터는 간신히 삼켰던 죽도 들이지 못하게 막았다. 상부 지시라 했다. 굶어죽으라는 처사였다.

별안간 밥이 나와 소지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담당에게 이야기 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애걸하다시피 죽을 달라고 매달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없다고 차갑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밥을 먹을래야 먹을 수가 없어서 국물만 좀 마시고 짬밥으로 고스란히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지시받은 담당은 복도 내방 옆에 몰래 붙어서서 밥을 먹나 숨어서 지켜보고, 식구통으로 나오는 짬밥에 손이 갔는지 확인하는 숨길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주석 3)

김근태는 자신이 수감된 건너편 7방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간부에게 전방(轉房)을 요청했다. 8방은 하루종일 햇볕을 볼 수 없으나 7방은 오후가 되면 햇빛이 비쳐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어 있는 방인데도 전방을 거부하고 굳이 9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9방은 얼마 전까지 징벌을 받던 사람이 살던 곳이었고, 정신질환자를 수감하느라고 쇠철판으로 작은 창문을 밀봉해 놓은 상태였다. 김근태는 12월 말경에 쇠철판을 뜯어내고 바람이 통하는 창문을 내는 조건으로 9방으로 옮겼다.

지금도 여전히 병사(病舍) 9방의 내 매트리스 밑에는 습기가 고이고 곰팡이가 피어나지만, 이곳 큰 체 하는 간부들이 말하는 특별권력관계가 작용하는 곳이니까, 여기는 사회가 아니니까 그까짓 습기, 그 정도 곰팡이는 더불어 같이 살기로 결심을 했고, 그 심정 탄탄히 지켜내고 있는 중이다. (주석 4)

김근태에 대한 권력의 학대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이 해 12월 중순 경부터 서울구치소 위층 15~16개 방에는 모두 조그만 구공탄 난로를 하나씩 피워 주었다. 그런데 유독 김근태 방만은 제외시켰다.

아픈 분들 방에 나롯불을 놓은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나만 빼놓은 이 서러움, 그 옆에서 어느 순간 번쩍하는 숨겨진 적대감을 보곤 내 가슴의 추위는 더 매서워져 갔다. 사람이 계속 바뀌어서 정신질환자들이 7방 또는 8방에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과 나는 지난 겨울 내내 영원히 저주받은 동토의 나라에서 살았다. 어느 땐가 꼭 두번 나도 난로 좀 놔달라고 간부들에게 요구를 했다. 모 계장은 이렇게 말했다.

“난로는 병약자들에게만 놓아주는 것이다. 당신같이 건강한 사람까지 놓아 준다면 전 사동(舍棟) 재소자들에게 다 놓아주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예산이 없다.”
(주석 5)

혹독한 고문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부축이 없이는 걷지도 못한 상태의 중환자, 그래서 서울구치소의 병동에 수감하고서도 딴소리를 하는 것이다. 차별 대우는 변호인 접견과 가족 면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주석
1> 김근태, <이제 다시 일어나>, 105쪽, 중원문화사, 1987.
2> 앞의 책, 108쪽.
3> 앞과 같음.
4> 앞의 책, 106~107쪽.
5> 앞의 책, 107쪽.

 




02.jpg
0.14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