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18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민청련 의장을 맡으면서 점차 정치 투사가 되어갔다.
온순했던 성격도 적극적 야성으로 변해지고, 안기부 수사국장의 술상을 뒤엎을만큼 담대해졌다. 민주화에 대한 의지는 더욱 강해지고 대정부 투쟁방법도 여러 방향으로 확대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기관지 발행이었다.

당시 제도언론은 이미 언론의 정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대거 군사정권에 쫓겨난 언론계는 독재정권에 부역하면서 정관계 진출과 치부에 눈이 먼 신문ㆍ방송인들이 많았다.

민청련은 반독재투쟁의 홍보전략으로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했다. 정론부재의 언론상황에서 대안언론의 기능을 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84년 3월 11일 “관제언론이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이 어두움을 뚫고 민주화운동의 앞길을 열어가는 횃불로서 대중언론의 깃발을 높이 들 것”을 선언하며 기관지 <민주화의 길>을 창간했다.

<민주화의 길>은 반독재 투쟁의 전위 역할을 하게 되고, 이후 각급 단체의 기관지발행의 효시가 되었다. 김근태는 창간사 <민주화운동의 깃발을 들며>에서 민청련 기관지의 ‘다섯 가지 임무’를 제시했다.

첫째, 민주화운동의 방향을 제시할 것입니다. 민주화운동은 올바른 운동론하에서 전개되어야 하며, 올바른 운동론은 치열한 논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민주화의 길>은 민주화 열망을 수렴하는 광장이 될 것입니다.

둘째, 정확한 정세분석입니다. 기본적인 정보의 결핍과 와전 때문에 우리 주변은 주먹구구식의 판단이 만연하여 있습니다. 사실의 집적만으로 과학적 판단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 사실의 확인이야말로 올바른 판단을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입니다.

셋째, 우리 내부의 동질성 확보입니다. 우리 내부의 분열이나 갈등은 불필요한 오해나 편견 때문에 일어납니다. 정보와 의견이 보다 신속ㆍ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다면 우리 내부에 인식의 동질성은 확보될 것이고, 더 나아가 실천의 방향을 일치시키기도 한결 쉬워질 것입니다.

넷째,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 중에 관제언론에 의해 가리워졌지만 특히 민주화운동에 의미 있는 사건을 힘닿는 대로 알릴 것입니다.

다섯째, 다른 운동권과의 연대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운동권의 소식은 물론, 지면을 할애하여 제언을 실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주석 15)

그동안 제도 관제언론에 식상해 온 국민들에게 <민주화의 길>은 시원하게 갈증을 풀어주는 청량수가 되었다. 제도언론(인)에도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 이를 접하는 국민이 소수에 불과했지만, 입소문을 타고 많이 알려졌다. 특히 대학생들에게는 신선한 대안언론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지면의 기사와 정세분석은 상황인식과 민주화운동의 지침 역할을 하였다. 창간호에는 문익환 목사의 격려사 <자유-생존-평화>와 신경림 시인의 격려시 <아아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가 권두를 장식하고, <한반도 주변정세와 한국의 정치ㆍ경제>의 분석, 학원ㆍ노동ㆍ농촌ㆍ재야ㆍ종교계의 소식을 실었다. 하나같이 제도언론에서는 보기 드문 뉴스와 분석이었다. 또 ‘두꺼비’란에 <통일문제 사건을 보면서>라는 시론, 민청련의 활동 경과보고, 시사만평, 민청련의 규약 등을 소개하였다. 기관지는 4~6배판의 20쪽에 불과했지만 내용은 알찼다. 발행인 김근태, 편집인 박계동 체제의 기관지였다.

제2호는 4.19특집호로 제작하여 1984년 4월 25일자로 발행하였다. 2호의 권두논설 <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 - 기만적 화해정책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실천>은 내부에서 많은 토론을 거쳐 작성한 민청련의 상황인식과 실천방향을 제시한 글이다. 이 시기 김근태의 시국인식을 살피게 한다. 이 논설은 오랫동안 청년학생운동의 담론이 되고 더러는 ‘지침’이 되었다.

하나의 칼이라 함은 국민대중의 편에 서서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는 것이다. 즉 대중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대중의 삶 속에서 민중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대중에 대한 선전을 강화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언론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부정부패의 폭로와 국민대중을 무시하는 제 분야 정책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현 정권의 폭력성과 매판성 및 부도덕성을 철저히 폭로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방패는 각 부문운동의 조직력을 강화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쓰라린 시련에 무릎꿇지 않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는 관념론이나 준비론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투쟁을 통해서 고난을 감수하면서 추진될 때에만 비로소 실질적 성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것은 고립되어 있는 단위 조직의 개별적 강화가 아니라 운동의 통일성을 기하는 시각에서 조직력의 발전과 통합을 이룩해나가야 한다.

또 다른 방패는 기층 대중과의 구체적인 연대다. 지식인들이 관념적 대중운동 토론에 머무르는 것을 반대하고 기층 민중과의 정서적 동질성을 형성하여 우리는 지식인 노동ㆍ농민운동 참여가 갖는 정당성과 합법성을 쟁취해야 한다.
(주석 16)

제2호는 ‘해직언론인’ 명의로 <권언복합체의 매카시즘>이란 시론, 김정환 시인의 <그날>, 김승균 지도위원의 <4.19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무기명으로 <4월 혁명의 현재적 의미>, 김병걸 지도위원의 <70년대의 몹쓸 유산>, 정세분석으로 <최근의 정치ㆍ경제ㆍ사회상황>, 민청련에서 의욕적으로 신설한 <여성부 발족에 부쳐>, 운동의 노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등이 실렸다.

회원들은 기관지가 나오면 시내 중심가에 나가 배포하였다.
격려해주는 시민들도 많았으나 외면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1984년 3월 14일 오후 7시경 김근태는 종로 2가 4거리에서 배포하다가 종로경찰서 정보계장이 진두지휘하는 사복경찰에 의해 옷이 찢기고 땅바닥에 질질 끌리면서 영장도 없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김근태는 불법적인 물리적 강제 동행을 거부하다가 경찰관들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하고, 3월 16일 즉결재판소로 넘겨져 구류 3일을 선고받았으나, 당일 석방되었다. 민청련은 김 의장의 강제 연행에 항의ㆍ폭력경찰을 고발하는 성명을 내고, ‘내무ㆍ법무장관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등 폭거에 항의하였다.

민청련은 5개 청년단체들과 연합하여 <강제징집 문제 공동조사보고서>의 발표에 이어, 8개 청년단체와 공동으로 <더 이상 이 땅에 억울한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는 제하의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전두환 정권에서 자행된 인명살상과 인권유린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주석
15> <민주화의 길>, 창간호, 3쪽.
16> 앞의 책, 제2호,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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