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15 08:00 김삼웅

 


1983년 9월 30일 저녁 서울 성북구 돈암동 소재 가톨릭 상지회관에서는 경찰의 삼엄한 포위속에서 진보적인 지식청년 59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청련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저녁 7시를 전후하여 150여 명의 회원들이 상지회관 주변에 모였으나 상당수가 성북경찰서로 연행되고, 59명만 참석이 가능했다.

마치 1919년 2월 8일 오후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김상덕 등 유학생들이 2ㆍ8 독립선언대회를 할 때 왜경의 포위속에서 행사를 거행했던 것과 유사한 모습이었다. 64년의 시차를 두고 왜경과 국립경찰로 저지 권력이 달랐을 뿐이다.

대회는 의장으로 내정된 김근태가 <민청련 창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막이 올랐다.

“고통과 희망을 한 몸에 안고 억압받는 제3세계 민중의 일원으로서, 민족사의 전진에 앞장서야 할 청년으로서 (중략) 민주ㆍ통일을 위한 민주정치 확립, 민주자립경제의 확립, 자생적이고 창조적인 문화 교육 체계의 형성, 냉전체제해소와 핵전쟁방지”라는 내용의 선언문으로, 김근태의 낭독 뒤에 채택되었다.

창립선언문(요지)은 다음과 같다.

―. 민족통일의 대과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참된 민주정치는 반드시 확립되어야 한다.
―. 평등하고 인간적인 생활을 위한 민주자립경제가 이룩되어야 하며, 부정부패 특권경제는 마땅히 청산되어야 한다.
―. 역동적이고 건강한 민중의 삶을 위하여 자생적이고, 창조적인 문화, 교육체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 국제평화와 민족 생존을 위해 냉전체제의 해소와 핵정잰의 방지가 이루어져야 한다.
(주석 2)

창립총회는 김근태가 작성한 민청련 발기문을 부의장으로 내정된 장영달이 낭독하였다.

“민청련은 투쟁성의 회복을 첫번째 과제로 제시”하며,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오늘의 현실 상황은 뿔뿔이 흩어진 민주청년들이 다시 한데 모여 민중운동의 흐름속에서 양심적인 지식인ㆍ종교인ㆍ정치인ㆍ노동자ㆍ농민들과 연대를 강화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회건설에 매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주석 3)는 내용이었다.

대회는 이어서 전문 21조의 민청련 규약을 통과시키고 임원진을 선출하였다.

집행위원회 : 의장 김근태 / 부의장 장영달 / 총무과장 박우섭 / 홍보부장 박계동 / 사회부장 연성수 / 재정부장 홍성엽

상임윈원회 : 위원장 최민화 / 부위원장 이해찬

민청련이 출범하기까지에는 학생ㆍ노동운동출신 지식청년들의 숨은 노력이 배어 있었다.

“1983년 5월부터 60년대 후반에서 72학번까지 학생운동을 주도해온 김경남ㆍ문국주ㆍ송진섭ㆍ이해찬ㆍ장영달ㆍ정문화ㆍ정화영ㆍ조성우ㆍ황인성 등은 최민화의 집에서 매주 한 차례씩 회동을 가졌다. 이를 OB모임이라고 했고, 72학번부터 70년대 후반 학번까지는 별도로 만나 회동을 가졌는데, 이를 YB라 불렀다.” (주석 4)


민청련을 태동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이범영ㆍ이해찬ㆍ조성우 등이었다.

83년 봄, 이범영은 우선 날조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2년 반의 징역을 살고 1982년 12월에 출소한 이해찬을 만나 공개 정치투쟁 단체를 만드는 데에 뜻을 같이했다. 사실 이해찬은 또 운동한다고 잡아가겠느냐는 심기도 있었고, 설사 또 잡아가면 오히려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에 방패막이 역할로 적합하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잡혀가면 몇 년 더 감옥에 갔다온다는 각오로 청년단체를 만드는 일에 열심히 뛰어다녔다.

또한 이해찬과 같이 조성우에게도 83년 1월, 이범영이 찾아와 청년단체를 만들자는 제의를 하자, 역시 흔쾌히 동참을 한다. 조성우는 1978년 결성된 민주청년운동헙의회(민청협) 회장을 역임한 터라, 공개투쟁을 담당하는 청년단체 건설이 당면관제라는 것에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고문을 많이 당해 건강이 많이 약해져 있는데다가 당시 운동권의 한계였던 해외정보의 취약점을 보완하고자 내심 일본출국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청년단체 준비과정에서 여러 대학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주도하면서 깊이 관여하기는 했으나 이후 청년단체의 중심축에는 서지 않았다.

마침 이즈음 일부 민주화운동세력에서 어른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를 우선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사연인즉슨, 이전 1979년 3월에 결성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5.17 이후 와해되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조직을 건설하자는 제안이 마침 제기되고 있던 터였다. 장기표ㆍ박우섭 등이 중심이었는데, 그러나 어른단체 건설이 난관에 봉착하여 생각보다 여의치 않자 이를 준비하던 박우섭은 청년단체 건설에 합류한다.

이로써 이범영ㆍ이해찬ㆍ조성우가 논의를 시작하고, 박우섭ㆍ박성규ㆍ설훈 등이 호응하고 이후, 후배인 권형택ㆍ이우재ㆍ서동만ㆍ연성만ㆍ유기홍 등이 합류하며 청년운동 조직화는 외연이 넓어지고 있었다.
(주석 5)

하지만 민청련의 조직은 쉽지가 않았다. 5공의 독기가 여전히 서릿발치고 청년층에까지 패배주의가 만연해있었다. 이런 속에서 일군의 지식청년들은 마치 일제감정기의 독립운동가들처럼 경찰과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청년조직을 추진하였다. 8월 15일 경기도 양수리 근처 동막이라는 계곡에서 야유회를 하는 양 동지들이 모여 청년단체결성에 합의했다. 이날 모임에는 40여 명이 모였다.

참석자들은 이전 민청협 출신과 복학생협의회, 노동운동 그룹 등을 주축으로, 서울대에서 김경남ㆍ이해찬ㆍ박우섭ㆍ김정환ㆍ박성규ㆍ김도연ㆍ황성진ㆍ이범영ㆍ문국주ㆍ권형택ㆍ이을호 등 72~74학번을 주축으로, 75~77학번인 연성만ㆍ이우재ㆍ서동만ㆍ김종복ㆍ오세중 등도 참석했고, 대학별 대표는 고려대는 조성우, 연세대는 최민화ㆍ홍성엽, 중앙대는 이명준ㆍ이석표, 서강대는 김선택, 한신대는 김희택, 이화여대는 최정순, 명지대는 김준묵 등이 그 면면이다. (주석 6)


주석
2> <민주화의 길> 창간호, 표지, 민주화운동청년연합, 1984년 3월.
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07쪽, 2007.
4> 앞의 책, 199쪽.
5> 앞의 책과 같음.
6> 앞의 책,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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