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역사 문화의 도시 난징(南京)


난징(南京)은 중국에서 3,000 여 년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이어져 온 대표적인 도시다.

삼국시대 오(吳)나라를 세운 손권(孫權)은 229년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건업(建業)이라 불렀다.


당시 많은 백성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수도 허창(許昌)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가 되었다.


서진(西晉)시대 279년 흉노 출신의 유연(劉淵)이 세운 한(漢)나라가 서진(西晉)을 정복하자 

이 소식을 서진(西晉)의 황족 사마예(司馬睿)가 이곳 건업(建業)에서 전해듣고,

사마예(司馬睿)는 휘하 심복들과 호족들의 뜻을 모아 동진(東晉)을 세우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는 서진의 마지막 황제인 민제(愍帝) 사마업(司馬鄴) 이름의 끝자 '업(鄴)'이

이곳 건업(建業)의 '업'과 음이 같다해서 이를 피하기 위해 282년 건업(建業)을 건강(建康)이라 고쳤다. 


그 후 진(晋) · 송(宋) · 양(梁) · 진(陳)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이곳을 수도로 삼았고

당(唐)나라 시대에는 금릉(金陵)으로 불렸다.

이 시기 난징은 중국 전체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부상했다.


원(元)나라 시대 몽고인들은 중국 남쪽 지방을 천대하는 정책을 썼는데,

그로인해 금릉이 특히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금릉(金陵) 백성들은 몽고인들에게 많은 재산을 약탈당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지도 못하고 죽어나간 이들이 많았다.


이 시기 몽고인들은 이곳을 집경(集慶)으로 불렀다.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난징 시민들은 몽고인들에 대하여 강한 적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몽고인들과는 교류도 일절 하지 않는 편이다.


다행히도 1356년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 이곳을 점령한 이후로는

백성들을 편히 쉬게 하면서 일에 제대로 종사할 수 있도록 각별하게 배려해 주었다.

그리고 이름을 응천부(應天府)로 고쳤다.


주원장은 1328년 10월, 중국의 남동부 남경(南京) 인근에 위치한 호주(濠州)에서 태어났다.

호주는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이다.


명(明)나라가 건국된 이후 황제로 등극한 주원장은 이곳을 응천부에서 다시 남경(南京)으로 고쳤고,

1378년 정월 정식으로 명(明)나라의 수도가 되면서 경사(京師)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다.


그 이후, 주원장이 사망하고 주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몽고를 정복할 목적으로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北京)으로 천도하면서

영락 원년에 다시 남경(南京,중국어 병음: Nánjīng)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 후로도 난징(南京)의 이름은 여러번에 걸쳐 바뀌었다.

청나라 말기였던 1868~1905년 사이, 태평천국 운동을 주도한 홍수전은 이곳 명칭을 천경(天京)으로 바꾸었다.


천경(天京)이란 하늘의 수도라는 뜻으로

태평 천국이 하느님의 복음으로 발전할 도시이자 수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이곳은 동양에서 최초로 기독교가 가장 크게 발전한 도시가 되었다.

그 때문에 기존 청나라 정부로부터 크게 미움을 받았던 도시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중국의 황조 질서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인류 평등과 사회 개혁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후 1911년 중국 국민당의 최고 지도자인 쑨원(孫文)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중화민국을 세우고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고부터 난징(南京)은 당시 중국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잘 사는 도시로 발전한다.


중화민국은 동양에서 최초로 민주공화국이 되었고,

따라서 이곳은 자유와 혁명의 도시로 거듭난다.


1919년 5월 4일 대규모 반일 시위인 5·4 운동이 베이징(北京 북경)에서 일어나고

당시 난징 시민들도 상점과 학교 등을 휴업하고 일제히 시위에 동참하였다.


그 후 난징은 1928년 장제스(蔣介石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거대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일본군의 침공으로 30만 명이 살해되는 난징대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난징 대학살 이후 난징 시민들은 일본에 대해서 절대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 


1940년 3월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충칭으로 후퇴하고

난징은 왕징웨이(汪精衛 왕정위 1883~1944)가 친일정부를 조직하여

괴뢰정권의 주석으로 취임한 후 본거지로 삼았다.


하지만 그 후 중일 전쟁에서 승리한 장제스는 왕징웨이 정권으로부터 수도 난징을 다시 수복하였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해서, 난징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추방되거나 중국인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심하게는 이곳 난징에 있는 일본인 거주지가 크게 불에 타서 없어지거나

친일파들과 일본인들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국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에게 패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중국공산당은 이 도시의 지위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 여파로 난징은 중국 국민당의 중심인 국민정부 수도였던 시절에 비해서

너무나도 초라한 도시로 전락해버렸다.


그 결과 난징은 찬란한 대도시의 이미지가 사라지고,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 이름에 걸맞지 않은 지방 소도시로 전락하고

1953년 장쑤성(江蘇省 강소성)의 성립과 함께 그 성도가 되었다.  


타이완 섬에 있는 중화민국 정부는 이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50~1960년대에 난징의 지위를 떨어뜨렸다는 것은

중화민국의 국민들을 크게 화나게 할 일이라고 경고성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후 난징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하고 덩샤오핑(鄧小平 )이 집권하면서

개혁 개방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예전 못지않게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 정부는 난징을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농업과 공업과 산업을 크게 발전시키는 정책을 폈다.


개혁 개방의 영향을 받아서 난징은 1994년 부성급시로 승격되었다.

'오경(吳京)'은 지금도 난징의 비공식적 이름으로 사용된다.

이는 난징이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난징(南京)은 말 그대로 '남쪽의 수도' 라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수도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다른 도시들인 일본의 교토(京都, 경도), 대한민국의 서울(漢城, 한성)이 단순히 수도를 뜻하는 것처럼,

중국의 베이징(北京, 북경)은 북쪽의 수도를 의미하고,

일본의 도쿄(東京, 동경), 베트남의 통킹(東京: 오늘날 하노이)은 둘 모두 ‘동쪽의 수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북경'(베이징)과 '남경'(난징), '장안-서경'(시안)은

중국 내륙에 있는 낙양(洛陽 뤄양)을 중심으로 방향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삼국 시대이래로 난징은 전략적으로 지리적인 위치와 편리한 교통 때문에

방직과 조폐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명나라 때 난징은 산업이 더욱 확장되었고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번영하는 도시가 되었다.


방직과 조폐, 인쇄와 조선 등 많은 다른 산업들은

난징을 극동 아시아에서 가장 번화한 업무 중심지로 성장시켰다.


20세기의 첫 50년간 난징이 잠시 동안 중국의 정치 중심지의 지위를 회복하자

부유층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난징을 생산 중심에서 대량 소비도시로 점차 변모시켰다.

중양상창(中央商場)과 같은 거대한 백화점이 많이 생겨났고

중국 전역의 상인들이 자신의 물건을 팔기 위해 난징으로 모여들었다.


1933년에는 식품과 오락 산업에서 발생한 세입이 농업과 제조업에서의 산출량 합계를 초과하였다.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였고

마약과 도박과 살인 등의 불법 행위도 또한 크게 성행하였다.


1950년대에 중국 공산당은 빠른 산업화를 위한 국가 계획의 일환으로

국가 소유의 중공업을 세우기 위해 난징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전기, 기계, 화학, 철강 공장 및 회사 본사들이 연이어 세워졌고

동아시아 중공업 생산 기지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세계적인 수준의 산업 도시를 건설하려는 난징 지도자들의 지나친 열정은

석탄이 없는 광산에 수백만 위안을 투자하는 등의 재앙적인 실수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1960년대에 난징의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다행히도 오늘날에 이르러 개혁 개방의 영향을 크게 받아 난징은 거대한 도시로 다시 발전하고 있다.


도시 지역의 현재 산업은 1960년대의 특성을 이어받은 것으로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전력 산업이 5개의 기둥 산업을 이룬다.


대표적인 거대 공기업으로 판다 전자, 진청 자동차, 난징 철강이 있다.

난징은 양쯔강 삼각주에 위치한 이웃 도시들과 외국인 투자를 놓고 경쟁하고 있고

마이크로소프트, IBM, 애플, 폭스바겐, 이베코, A.O 스미스, 샤프와 같은

수많은 유명 다국적 기업들의 지부들이 세워져 있다.


중국이 WTO에 가입한 이래로 이곳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관심과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

현재 인구는 600 여만 명이지만 점차 많아지고 있고

난징 종합대개발의 목표는 2000만 명으로 잡고 있다.


중화문(中華門 종후아먼)


중화문(中華門)은 난징시에 있는 거대한 성문이자, 문화 유산이다.

명대(明代)에 있었던 13개의 성벽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대했던 명나라 도성의 정남문이다.


문의 길이가 남북으로 128m, 동서폭이 118.5m, 총면적이 15,168㎡ 에 달한다.

외진회하(外秦淮河)와 내진회하(內秦淮河)의 사이에 있다.


중국 대륙에서 현존하는 성문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성보식(城堡式 : 작은성) 옹성(甕城)이며, 세계적으로도 구조가 가장 복잡한 옹성(甕城)이다.


중화문(中華門)은 명나라 때 취보문(聚寶門)이라 불렸다. 

명나라 홍무 2년부터 8년(1369~1375)까지 축성되었고, 1931년 중화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전체 성벽은 1366년에 건설하기 시작해서 1386년 완성된 총 길이 33,676m로 세계 최대 규모이다. 

중화문(中華門)은 고대에 방어를 위한 군사용으로 지어진 것인데, 

어마어마한 규모에 걸맞게 3중의 옹성(甕城)이 있고 4개의 아치형 문이 설치되어 있다.


성문의 높이는 21.45m이며 성루 옆으로 말이 올라갈 수 있도록 마도(馬道)가 마련되어 있다.  

또 문마다 양 쪽으로 여닫는 목조성문과 상하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천근갑(千斤閘) 문이 달려 있어

완전히 폐쇄(閉鎖)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즉 적이 성문을 파괴하고 진입해도 천근갑이 아래로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

적을 가두고 퇴로를 차단할 수 있다. 그야말로 철옹성(鐵甕城)이다.


성문 옹성에는 상, 하 총 27개의 장병동(藏兵洞)이 있다.

평소에는 식량을 저장했고, 전시에는 군수물자를 제작하거나, 병사를 숨기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중화문의 장병동은 창이 없는 터널식으로 그 깊이가 상당하다.

3,000명의 병사가 숨을 수 있다고 하니 그 규모와 아이디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군의 최대 5배 되는 적군을 상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 난징성에는 13개의 문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중화문, 한서문, 청량문(淸凉門), 화평문 네 개 뿐이다.


중화문 안쪽에는 내진회하(內秦淮河)를 가로지르는 진회교(鎮淮橋)가 있는데,

이 다리는 남당(南唐)이래 1000년 동안 가장 번화했던 중화로(中華路)로 연결되며,

중화문 밖에는 장간교(長幹橋)가 있어 우화로(雨花路)로 연결된다.


중화문은 남당의 도성 남문유적에 다시 지은 성문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성문 아래에 강남 최고 부호였던 심만삼(沈萬三)의 취보분(聚寶盆)을 묻어

취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중화문이라는 지금의 이름은 1931년에 얻은 것이다.


중화문(中華門)의 모형도


종후와먼(中華門)은 4중의 성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도시 방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성벽이었고,

성벽 중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는 성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옹성을 쌓는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종후와먼(中華門)의 4중 성문 체계는 그 중 가장 뛰어난 편일 것 같다.

설사 적군이 가장 바깥의 성문을 파괴하고 내부로 진입한다 해도,

여전히 부숴야할 성문 3개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성문에는 천근갑(千斤閘)이라는 철문이 내려와 퇴로를 봉쇄하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성문 지하에는 기습부대가 숨어 있었다고 한다.


성문 곳곳에 기습부대가 튀어나올 수 있는 문이 있었다.

5배의 적군도 거뜬히 방어해낼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중화문(中華門)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글씨


옹성(甕城)


중화문은 처음에는 취보문이라고 불렀는데

모양새가 도자기 단지처럼 생겼다고 하여 옹성이라고도 불렀다.


세 개의 옹성에다 네 개의 권문이 관통하고 있었다.

기묘한 설계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군사적 고려 때문이라고 한다.


적이 바깥쪽 문을 뚫고 들어오면 문과 문 사이에 있는 아치형의 통로 위에서 천근 갑문을 내려

27개 장병동에 숨어 있던 삼천여 명의 군사들이 기습적으로 적군을 섬멸했다고 한다.


옛날 전쟁의 승패는 성벽과 성문을 얼마나 잘 방어하는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 천근 갑문은 없어졌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원래 13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중화문 한서문 청량문 화평문 등 4개가 남아 있다.

철옹성(鐵甕城) 천근갑(千斤閘) 문의 흔적


천근갑(千斤閘) 문이 끼어 있던 흔적(사진 왼쪽)만 깊게 패인 모습으로 남아 있다.

문마다 상하로 열 수 있는 천근갑(千斤閘) 문이 달려 있어 완전히 닫을 수 있게 해 놓았다.


즉 적이 성문을 파괴하고 진입해도 천근갑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닫히면 

적을 가두고 퇴로를 차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천근갑은 명나라 초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방성기구이다.

나무로 만든 문에 철판을 덧대어 만드는데 무게가 천근이라고 하여 천근갑이라 부른다.


중화문의 천근갑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천근갑을 고정했던 홈의 크기로 옛 모습을 추정해볼 따름이다.


현존하는 최대의 천근갑은 북경 정양문(正陽門) 전루(箭樓)에 있는 것으로,

폭 6m, 높이 6.5m, 두께 6Cm로 그 무게는 1990kg이다.


천근갑은 그 이름과 무게 때문에 일종의 아이콘이 되었다.

소설 <수당연의(隨唐演義)>를 보면 양림(楊林 : 수나라 개국공신)이 성문을 닫고

성안에 갇힌 군사들을 태워 죽이려 했을 때 대역사 웅활해(雄阔海)가 천근갑을 들어 올려 병사들을 탈출시켰다.


비록 웅활해 자신은 힘이 빠져 천근갑에 깔려죽었지만,

천근갑 덕에 웅활해는 더욱 유명해졌고, 천근갑은 ‘어려움’, ‘고난’을 대표하는 용어가 되기도 했다.


 “천근갑과 마주치다(遭遇千斤閘)”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는 뜻이며,

“개갑(開閘)”은 난제를 해결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천근갑(千斤閘)이 설치되었던 홈


천근갑(千斤閘)이 설치되었던 홈에 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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