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孫文;손문 1866~1925)의 일생


쑨원은 오늘날의 중국 남부 광둥성 출신으로 홍콩에서 서의서원이라는 의학교에서 줄곧 수석을 했다고 전해지는 당대 수재였다.

재학 중에 혁명에 뜻을 품고 1894년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하여 이듬해 광저우에서 최초로 거병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망명하면서 삼민주의를 착상, 이를 제창했다.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이 당시 일본 여성과 결혼하고 많은 일본인들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한 사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 중국인으로부터 친일파로 매도되지는 않았다.


1911년 쑨원은 난징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북양군벌의 거두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와 타협, 같은 해 3월 1일 원세개에게 실권을 위임하였고

급기야는 같은 해 3월 10일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제2혁명'에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여 반원(反遠, 반 원세개)운동을 계속했다.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9년 중화혁명당을 개조, 중국 국민당을 결성했다.


1924년 국민당대회에서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3대 정책을 채택,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

이어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국민혁명'을 제창, 국민회의를 주장했으나, 이듬해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오늘날 중화민국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쩌둥보다도 유명한 혁명 선구자로서 존경받고 있다.


쑨원은 한국의 독립 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1962년과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청조와 일제, 그리고 군벌 등의 정적들에게 평생 추적을 당하면서 중국 국내외 여행이 많았던 그는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의 호칭은 잘 알려진 쑨원(孫文)과 중산(中山) 외에도 여러 개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호적상의 본명은 쑨더밍(중국어 정체: 孫德明, 병음: Sūn Démíng, 손덕명)이며

아명(兒名)은 쑨디샹(중국어 정체: 孫帝象, 병음: Sūn Dìxiàng, 손제상)이다.


쑨원(중국어 정체: 孫文, 병음: Sūn Wén, 손문)이라는 이름은 그가 10세 무렵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자(字)는 재지(중국어 정체: 載之, 병음: Zàizhī, 자이즈)이다.


그리고 호(號)는 일신(중국어: 日新, 병음: Rìxīn, 르신)이었는데

홍콩 서양 의학원의 중문학 스승의 권유로 일선(중국어 정체: 逸仙, 병음: Yìxiān, 이시옌)이라는 또다른 자(字)를 병용한다,


일신과 일선은 광둥어로 발음하면 "Yat-sen 얏센"으로 같은 발음이다.

잘 알려진 중산(中山)은 정식으로 만든 호가 아니라 1897년 무렵부터 사용한 "나카야마"라고 하는 일본 성씨 가명이다.


쑨원이 광저우에서 1895년 30세의 나이로 가담한 혁명이 실패한 후,

외국으로 수 년간 피신했을 시기에 일본에서 사용한 가명 中山 樵(나카야마 키코리, 나카야마 사코노, 중산 차오, 중산 초)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일본에서 망명하던 시절에 다카노 나가오(高野長雄)라는 일본식 가명을 사용하였다.


의대를 졸업한 후 쑨원은 병원을 개업하고 잠시 개업의로 생활한다.

하지만 서구 열강들의 침입으로 나라가 더욱 어려워지자 쑨원은 1894년 청조의 실력자 이홍장에게 편지를 보내

 "사람은 그 재능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토지는 그 이익을 다할 수 있어야 하며, 물건은 그 쓰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재화는 그 흐름이 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혁적인 주장을 펼쳤지만 이 편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쑨원은 1894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강령으로 하는 흥중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895년 1월에는 홍콩에서도 흥중회 지부를 결성했으나,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흥중회는 청나라 조정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갈수록 그 무능함을 드러내자

'오직 혁명만이 위기에 놓인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는 신념 아래 1895년 10월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봉기는 가담자의 밀고로 허무하게 무산되고, 쑨원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우선 일본으로 탈출, 망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1896년으로 일본을 떠나 영국에 머물렀는데, 거기서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되고만다.


그러나, 다행히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풀려났다.

석방 직후 기자회견에서 영국을 격찬,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은 해외 언론들의 관심을 받았고 중국 혁명의 지도자급 핵심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국 런던에 체류하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을 드나들며 약 9개월간 독서에 열중하면서 지낸다.


이 기간동안 쑨원은 경제학자들인 카를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 등의 저술을 탐독했고

사회 과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했는데, 이때부터 그의 혁명이념인 '삼민주의(민권·민족·민생)'의 윤곽이 형성되었다.


이듬해 1897년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우익들의 도움을 받으며 망명생활을 지내게 되는데,

이 시기 쑨원은 나카야마 쇼우라는 가명을 쓰며 다시 혁명세력을 결집하고 다녔다.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청나라 정국이 더욱 어수선해진 상황에서 쑨원은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2차 무장봉기를 준비하지만,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몇 년간 쑨원은 일본, 하와이, 베트남, 시암,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1905년에는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혁명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1905년 8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흥중회, 화흥회 등의 단체를 기반으로

중국혁명동맹회(중국 동맹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창건하고 총리에 추대되었다.


동맹회는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국 창립, 토지 조유의 균등'을 강령으로 채택했고,

쑨원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民報) 발간사를 통해 삼민주의를 발표했다.


이후 중국동맹회는 총재 쑨원의 지휘를 받으며 수십 여 차례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봉기는 빈번이 실패로 끝나고 쑨원에게는 가혹한 질책과 비판이 뒤따랐다.


쑨원은 중국동맹회의 활동을 다른 동지에게 맡기고 출국하여 1911년 무렵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중국혁명의 당위성을 알리는 한편, 혁명자금과 군자금을 마련하여 동맹회의 활동을 뒤에서 도왔다.


혁명의 기회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민간이 스스로 주식을 발행하여 마련한 자금으로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철도 부설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1911년, 청조에서는 우전부대신 성선회의 건의에 따라 이들에게

아무런 설명이나 사전 협의도 없이 철도건설을 국유화시켜 버렸다.


이러한 청조의 철도 국유화 정책으로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것은 쓰촨성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사천보로동지회'를 결성하여 동맹휴학과 납세 거부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하였고,

각지에서 보로운동이 전개되었다.


다급해진 청조는 우창에 있던 군인들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우창에서는 중국동맹회의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동맹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0월 10일 우창 봉기를 일으키고 총독관청을 일시에 장악해 '호북군 정부'를 조직했다.

이 소식은 빠르게 중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각지에서 우창 혁명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두 달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17개 성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12월 2일 혁명군은 난징을 함락하고 난징에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동맹회와 혁명군의 성과는 혁명운동의 지도자들도 예상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을 중흥할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고, 강력한 영도자도 없었다.

때문에 청조로부터 요청을 받은 위안 스카이 군대에 의해 진압당할 형편이 되었다.


한편, 혁명이 일어났을 때, 쑨원은 중국 밖에 있었다.

그는 그때 외교적,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 서구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우창 봉기 당시 쑨원은 혁명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 체류중이었다.

그는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그곳의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국내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쑨원은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서구 열강의 간섭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즉 외교의 성패에 따라 혁명의 성공이 좌우된다고 여긴 것이다.


당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6개국으로 미국과 프랑스는 공화정을 실시하려는 중국을 동정하는 입장이었고,

그 반대로 독일과 러시아는 혁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일본의 재야는 중국의 혁명에 동정적이었으나 정부는 그 반대였고,

영국의 경우는 재야가 동정적이었으나 정부는 미정된 상태였다.


따라서 쑨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나라가 영국이라 보고 급히 영국으로 달려가 교섭을 벌였다.

그는 영국 외무성과 회담하고 영국정부에 대하여 청조에 대한 일체의 차관을 중지할 것과

일본에게 청조의 지원을 중지하도록 해주고,

영국 각 속지에서 '쑨원 추방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여 영국정부로부터 확약 받는 대신에

혁명정부는 청나라와 체결한 모든 조약을 인정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프랑스로 가 똑같은 약속을 받아내고,

12월 16일 싱가포르에서 체류하다 12월 21일에 홍콩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호한민과 요중개를 만나 전후의 사정을 듣고 '광둥지역을 기반으로 삼자'는 일부 인사의 주장을 거절한 채

12월 25일 상하이로 와 진기미,쑹자오런을 만나 정부조직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여기에서 쑹자오런은 '내각 책임제'를 주장했고, 쑨원은 '미국식 대천황중심제'를 주장하였다.


12월 29일에 난징에서 '각성대표회의'(17성의 45명, 화교 2명)는 총통 선거회를 열었는데,

쑨원이 16표를 얻어 초대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다.


쑨원은 이 소식을 듣고 이를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1912년 1월 1일에 손문은 난징에서 영접 온 이들과 함께 열렬한 축하를 받으며 상하이를 출발하여

그 날 오후 5시에 난징에 도착하여 밤 11시에 총통부에서 취임식을 갖고 서약하였다.


이어 쑨원은 임시대총통직에 취임한 뒤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하였다.

이로써 그 동안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벌였던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민주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쑨원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록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청조는 굳건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들을 무너뜨리기에 그의 세력은 너무 약했다.


쑨원은 여기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데,

바로 청조의 요청으로 혁명군 진압을 지휘하고 있던 위안 스카이(袁世凱:원세계)와의 협상과 연합이었다.


쑨원은 위안 스카이(袁世凱:원세계)에게 청조를 설득하여 그들을 퇴위시켜줄 것을 요청하고

만일 이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대통령의 지위를 그에게 양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위안 스카이는 청조를 설득하여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를 하여금 2월 12일 퇴위조서를 발표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청조는 1912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혁명정부는 청조와 위안 스카이 사이에 퇴위협약이 진행되는 동안

위안 스카이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3월, 대통령중심제였던 '임시정부 조직대강'을 수정하여

내각 중심제를 기본 틀로 한 '임시약법'을 제정,발표하였다.


그리고 쑨원은 약속대로 위안 스카이에게 1912년 4월에 임시 대총통직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쑨원과 쑹자오런(宋敎仁;송교인)은 중국 동맹회를 1912년 12월에 국민당으로 개편하여

쑹자오런이 이사장 대리으로서 당수가 되었고, 쑨원을 이사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위안 스카이의 야심은 제약할 길이 없었다.

위안 스카이는 임시약법을 무시하고 대통령 중심제로 법을 개정함으로써 완전한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서구 열강세력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받아먹는 등 '매국'행위와 '독재'정치를 일삼았다.


아울러 그의 유력한 정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던 국민당의 이사장 대리였던 쑹자오런을 암살하는 등 전횡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쑨원은 위안 스카이를 무력으로 타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위안 스카이의 전횡에 반대하는 이열균(李烈均) 등이 토원군(討遠軍)을 조직하여 대항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쑨원은 1913년 7월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제2차 혁명)


위안 스카이의 독재정치와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용단체를 조직하고 여론을 선동하여 '황제'로의 등극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1914년 쑨원은 일본 도쿄에서 구(舊) 혁명당원들을 모아 중화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이 중화혁명당은 뒷날 중국 국민당의 모태가 된다.


혁명당원들은 곧 국내로 들어와 위안 스카이에게 반대하는 무리들을 규합하여 토원군을 재조직하였다.

위안 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가운데 운남성 도독이었던 당계요가 토원군에 가담하여 이름을 호국군(護國軍)이라 개칭했다.(제3차 혁명)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위안 스카이의 심복이었던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도 위안 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반대했고,

서구 열강들도 위안 스카이에게 황제 등극을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위안 스카이는 황제 등극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에 호국군은 더욱 압박을 가해 위안 스카이의 퇴임을 요구했으나

1916년 6월, 위안 스카이가 병사함으로써 이 일은 자연스럽게 일단락되었다.

1916년 위안 스카이의 사망과 때를 같이하여 쑨원은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1917년 위안 스카이 사후 북양 정권은 돤치루이의 수중에 떨어졌다.

돤치루이의 탄압을 피해 광둥 성지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비상국회를 열어 서남군벌 세력과 연합하여 광저우에서 군사정부를 세우고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다.(호법 정부)


쑨원은 1917년 9월, '광둥 군정부'의 대원수로 임명되어

임시약법 수호를 위해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첫 번째 호법 정부)


그러나, 그 조직도 실권을 잡지 못했고 같이 손잡은 군벌들의 본질을 보고

이들 군벌들과는 '호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다음 해 1918년에 대원수 직책을 사임하고 5월에 상하이로 망명가야했다.

이 기간동안 쑨원은 얼마간은 상황이 유리할 때는 광저우로 돌아갔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다시 상하이로 도망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고 지냈는데,

상하이에서 《쑨원학설》,《건국대강》등 중요한 저술을 발표하였고,

이는 뒷날 국민 정부의 지도이념이며 국정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또, 쑨원은 상하이에 있는 동안에 《건설》잡지를 창간하고,

'민지서국'(民智書局)을 세워 혁명 사상을 선전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18년 여름무렵에 레닌과 소련 정부에 축전을 보냈다.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은 쑨원에게 있어서 커다란 자극을 주었는데,

이 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보고 '중화혁명당에 대중성을 도입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쑨원은 5.4 운동을 계기로 기존에 구상했던 '위로부터의 혁명'노선을 버리고 '아래로부터의 혁명'노선으로 선회하여

1919년 10월 10일에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칭하고 총부를 상하이에 두었다.


중국 국민당은 조직상에 있어서 중화혁명당과 달랐는데, 비밀당의 조직을 공개적으로 한 점과

중화 혁명당 시기에 당원이 당수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규정을 삭제하고 당원의 등급을 폐지시킨 것 등이었다.


한편, 쑨원이 대원수 직책 사임한 이후 1918년 5월~1920년 6월까지의 광둥 정부(호법 정부)는 '7인 총재정부'로 존재했다.

1920년 6월에 쑨원은 상하이에서 당소의(唐紹儀, táng shào yí), 오정방(伍廷芳, wǔ tíng fāng) , 당계요(唐繼堯;탕지야오) 등과 함께

합작을 성명하고, '광둥 정부의 계계 군벌이 호법의 이름을 빌려 나쁜 일을 저지른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복건성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광둥 성 군벌 진형명(陳炯明, chén jiǒng míng)에게

광둥에 자리잡고 있는 광서성(계계) 군벌을 타도하도록 하였다.


이에 진형명은 '광둥인이 광둥을 다스려야 한다'며 광둥 정부를 타도하였다.
진형명은 쑨원이 광저우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쑨원은 그를 광둥성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안심시켰다.


그리고 11월 말에 국회의원들과 함께 광저우로 와 국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에서 '군정부가 이미 존재하지 않으므로 정식 정부를 세우자'고 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21년 4월 광둥 성 국회에서 '중화민국 정부조직 대강'이 결정되었다.

다음달 5월에는 쑨원이 광둥에서 '중화민국 정식정부'의 총통에 취임했다.

이로써 중국은 북쪽에서는 북양 정부, 남쪽에서는 쑨원 중심의 광둥 정부(두 번째 호법 정부)로 양분되었다.


호법 정부가 성립된 후 쑨원은 호법(護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력으로 북양 정부와 대항하고자 국회에 '북벌안'(北伐案)을 제출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호법 정부는 구이린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대대적으로 북벌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쑨원은 안휘파와 봉천파와 함께 '반(反) 직예파 삼각동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형명은 직예파의 오패부와 결탁하여 북벌을 반대하고, 쑨원과 가까운 광둥군 참모장 겸 제2사단장을 암살하였다.


이에 쑨원도 1922년 봄에 구이린에서 긴급 군사회의를 열어 북벌 계호기을 변경,

광둥으로 돌아와 진형명이 가지고 있던 광둥 성 성장 등의 직책을 취소하였다.

또 5월 4일에 북벌령을 내려 소관(韶關)에 대본영을 설치, 강서 성으로 북벌을 시작하였다.


한편 진형명은 쑨원의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1922년 6월에 총통부를 포위하였다.

이 때,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황푸에서 영풍함(永豊艦)을 타고 광저우로 와 쑨원을 구하였으며,

호법 정부는 북벌군을 불러들여 진형명을 토벌하였다.


결국 호법을 위한 두 번째의 북벌도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쑨원도 상하이로 갔다가 1923년 초순 주변군벌의 압력에 의해 '진형명의 난'이 평정되자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

세 번째 호법 정부를 조직하고 다시 북벌을 도모하였는데, 이러한 시기에 쑨원에게 접근한 것이 소련의 코뮌테른이었다.


코민테른은 1920년에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다고 해도 그 힘으로는 중국 혁명을 이끌어 낼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 안에서 협조자를 물색하였는데, 오패부와 같은 군벌도 고려되었지만

그동안 혁명을 이끌어 온 쑨원을 지목해 관심을 가졌다.


때문에 보이틴스키(Voitinsky)는 상하이에 와서 쑨원을 만났고,

쑨원도 소련의 혁명 사정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였다.


1921년 7월, 레닌의 비서인 마링도 중국에 오자마자 쑨원과 만나 중국 국민당 개조를 촉구하고,

군사학교를 세워 혁명을 위한 무력을 키워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때 쑨원은 소련이 실시하고 있는 신경제정책(NEP)과 자신의 실업 계획이 별차이가 없음을 밝히고,

처음에는 중국 공산당이나 코민테른과의 합작을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쑨원은 북벌을 준비하고 있어 양쯔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이 지역은 영국의 세력권이어서 그 방해를 받을까 우려되었고,

당시 '반(反)직예파 삼각 동맹'의 안휘파나 봉천파는 모두 일본과 가까운 관계여서 소련과의 합작은 곤란하였으며,

또한 중국 공산당의 힘이 당시로서는 너무 미약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쑨원은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면서 이들의 주도 아래 노동운동이 확산되고 노동자의 요구가 관철되는 모습을 목격하며,

만일 중국공산당 당원이 개인적으로 가입을 원한다면 받아들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결의하고,

소련은 외교가인 요페(Adolf Abramovich Joffe)를 파견하여 북양 정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고 하면서 베이징으로 왔다가

다시 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쑨원을 만나 중국 국민당의 개조문제,

코민테른의 중국 혁명 원조 문제 등을 협의하여 1923년 1월 16일 이른바 '쑨원-요페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으로 쑨원은 '연소용공' 정책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른바 '제1차 국공합작'의 기초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쑨원과 소련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1923년 1월 1일에 쑨원은

'중국 국민당 개조 선언'을 발표하여 당의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따라서, 공산당 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게 되었으며,

또 프랑스에 유학 중인 학생들로 조직된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의 단원은 단체로 중국 국민당 프랑스 지부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초청으로 8월 16일에 장제스를 단장으로 '쑨원(일선) 박사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소비에트 제도와 군사 조직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이들은 약 4개월 동안 소련의 각 도시를 돌면서 소비에트 조직과 군사학교 등을 시찰하고 12월 15일에 귀국하였다.

소련 정부도 쑨원에게 재정 원조와 고문단을 보내기로 결정하여 정치 고문 미하일 보로딘과 군사전문가를 중국에 파견하였다.


1924년 1월에는 쑨원의 주관으로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광저우에서 소집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하여 공산당과의 합작을 이루었다.(제1차 국공합작)


여기에서 새로운 당의 강령과 헌장을 제정하여,

1.소련과의 연합, 2.공산당과의 연합, 3.노동자·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 정책을 확립하고,

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 통치 기구를 구성하였다.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서 쑨원은 삼민주의에 반제 · 반봉건적 내용을 추가하였다.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이 소집은 쑨원의 혁명사업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련의 투쟁을 통해 쑨원은 제국주의 타도만이

중국의 독립과 부강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북벌군이 진격할 즈음,

1924년 10월 봉천파 군벌 장쭤린과 직예파 군벌인 펑위샹이 연합하여

차오쿤을 대표로 하는 군벌 정부를 전복시켰다.(베이징 정변)


이후 펑위샹(馮玉祥:풍옥상, 1882~1948), 돤치루이, 장쭤린(張作霖 장작림)이 쑨원에게 전문을 보내어

국정을 함께 논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쑨원은 정치교섭이 필요함을 느껴 이 요청을 받아들여

1924년 11월 광저우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는 광저우->상하이->일본 고베->톈진->베이징 순으로 시찰하고 다녔는데,

이때 그의 몸에는 암이 번지고 있었다.


시찰 도중에 일본 고베에 들렀을 때 현립 고등여학교에서

'대아시아주의'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일본 정부에 이같이 물었다.


“ 일본은 열강을 본떠 중국 등 약소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같은 편에 설 것인가. 왕도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패도를 취할 것인가. ”


이듬해 1925년 초 돤치루이의 주선으로 시국 수습을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베이징에서 소집되었다.

쑨원은 동지들을 인솔하여 베이징으로 향하는 도중에 간암으로 쓰러졌다.

이해 2월 24일 아들 손과와 송자문, 공상희, 대계도 등을 증인으로 한 가운데 유언을 남겼다.


“ 나는 30년 동안 중국의 자유평등을 얻기 위한 국민혁명에 모든 힘을 다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반드시 민중에 호소해 궐시키기고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해

공동으로 분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는 아직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

나의 동지들은 필히 내가 쓴 《건국방략》, 《건국대강》, 《삼민주의》, 《제1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따라

계속 노력하고 관철해달라. ”


이는 왕징웨이(汪精衛 왕정위 1883~1944)가 쑨원의 구술을 받아쓰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그의 첫 유언에는 부인 쑹칭링(宋慶齡 송미령)과 자식들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는 한달 뒤 다시 첫 유언을 남길 때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 모아놓고 두 번째 유언을 했다.


“ 나는 국사에 진력하다 보니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다.

내가 남긴 서적과 의복, 주택 등 일체는 나의 처 쑹칭링에게 주어 기념으로 삼도록 하라. ”


그는 1925년 3월 12일 간암으로 베이징에서 향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모두 네 차례에 걸친 입관 끝에 장제스가 1928년 북벌에 성공한 직후인 1929년 6월 1일

난징 시외의 중산릉에 안장될 수 있었다.


쑨원은 청년 시절부터 쑹자수(宋嘉樹), 여우례(尤列), 양허링(楊鶴齡), 루하오둥(陸皓東),

관징량(關景良), 천사오보(陳少白)와 절친한 친구 관계였다.


친구이자 흥중회 동지인 루하오둥은 1895년 청나라 관군에 체포되어 사형 집행되었고

친구이자 장인인 쑹자수는 훗날 개신교 목사가 되었는데 쑨원이 쑹자수의 차녀인 쑹칭링과 재혼하였기 때문에

쑹자수가 쑨원의 장인이기도 하다.


옛 일본인 첩실 오쓰키 가오루(大月 薰)의 딸 미야가와 후미코(宮川 富美子)에게는 친아버지가 되나

생전에 쑨원이 친권을 포기하였고 후미코가 나중에 일본을 떠나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이미 죽은 쑨원과 그가 남긴 중국국민당을 지지하며 쑨원을 정신적 지주로 섬겼다.


명효릉에서 이런 차를 타고 중산릉으로 이동


박애(博愛)


중산릉의 패방부터 묘실까지 모든 것에 쑨원의 정신,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중국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패방에 적힌 ‘박애(博愛)’라는 글자는 쑨원의 일생을 개괄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중산릉(中山陵)


쑨원이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 후 베이징 벽운사(碧雲寺)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던 쑨원의 유해가

난징으로 옮겨져 묻힌 건 1929년 6월 1일이다.


쑨원이 잠들어 있는 곳을 ‘중산릉’이라고 한다.

일찍이 쑨원은 일본 망명시절에 중산초(中山樵)라는 가명을 썼는데,

이후 ‘중산’은 그의 여러 이름 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중산릉은 쑨원이 생전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히길 바랐던 장소다.

광둥에서 태어나 베이징에서 사망한 그가 왜 난징에 묻힌 것일까?


임시대총통에서 사임한 1912년 어느 봄날, 쑨원은 이곳에 사냥을 하러 왔다가 사방을 둘러본 뒤

훗날 자신이 죽으면 이 땅에 안장해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쑨원이 난징에서 머문 기간은 오래지 않지만 그에게 난징은 어느 곳보다 의미 있는 곳이었으리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곳, 신해혁명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곳이 바로 난징 아닌가.


능문(陵門)과 천하위공(天下爲公)


패방을 지나 설송(雪松)과 향나무가 늘어선 400m가 넘는 묘도가 끝나는 자리에 ‘능문’이 자리하고 있다.

능문의 위쪽에 적힌 글자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다.


천하는 모두의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쑨원이 평생 분투했던 이상이기도 하다.


능문(陵門)


천하위공(天下爲公)


손문이 직접 쓴 “천하위공(天下爲公)” 네 글자가 현판에 쓰여 있다.

서양식 디자인이 가미된 문루 위에는 푸른색 유리기와가 얹혀 있다.

푸른색은 창천(蒼天)을 상징하며 푸른색 기와는 “천하위공(天下爲公 : 조금도 사적인 것이 없다.)”을 뜻한다고 한다.


비정(碑亭)


능문을 지나면 비정이다. 넓이 12m, 높이 17m의 방형 건물이다.

내부에는 높이 8.1m, 폭 4m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는 당시의 국민당정부 주석이자 국민당 4대 명필의 한 사람이었던 단연개(譚延闓)선생이

“중국국민당 총리 손선생 여기에 묻히다. 중화민국 18년 6월 1일(中國國民黨葬總理孫先生於此 中華民國十八年六月一日)”

라고 쓴 비문이 적혀있다.


손문이 사망할 당시 그는 대총통의 지위를 원세개에게 양위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총통’이 아닌 ‘손선생’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쑨원의 공적을 담은 비문을 새길 계획이었지만 결국엔 이렇게만 새겼다.

그의 공적을 비문에 제대로 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당 입구의 문미에는 ‘민족(民族), 민생(民生), 민권(民權)’이라고 적혀 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中國國民黨葬總理孫先生於此, 中華民國十八年六月一日

중국국민당이 총리 쑨 선생을 이곳에 안장하다, 중화민국 18년 6월 1일.


후에 중국공산당은 중국국민당을 축출하고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국민당 주관으로 세운 이런 기념비를 그대로 남기고 기리는 것은 승자가 가지는 아량의 표현일 것.


한편 쑨원 선생이 차지하는 비중이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을 뛰어 넘을만큼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돌계단


비정을 지나면 제당까지 이어진 돌계단이다.

비정에서 제당까지 돌계단의 개수는 339개, 당시 국민당 의원의 수를 상징한다.


패방부터 제당까지 돌계단의 개수는 392개, 당시 중국의 인구 3억9200만명을 상징한다.

쑨원에 대한 중국인 모두의 존경을 담은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제당이 있다.



제당(祭堂)

 

제당 입구의 문미에는 ‘민족(民族), 민생(民生), 민권(民權)’이라고 적혀 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글씨를 쓴 이는 당시 국민당 원로였던 장정강이라고 한다.


천지정기(天地正氣) 쑨원의 친필


쑨원의 좌상


쑨원의 관


제당(祭堂)에는 2.1m 높이의 기단 위에 4.6m에 달하는 쑨원의 좌상이 놓여 있다.

제당 뒤편 묘실(墓室)에는 묘혈 위로 쑨원의 와상이 놓여 있다.


쑨원의 모습을 일대 일 비율 그대로 재현한 이 와상 아래 5m 지점에 쑨원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제당의 좌상과 묘실의 와상 모두 흰색 대리석 조각이다.


그런데 제당의 쑨원은 중국 전통의 마고자 차림인데, 묘실의 쑨원은 중산복 차림이다.

이는 국민당 우파와 좌파의 갈등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우리가 흔히 인민복이라 부르는 옷을 발명한 사람이 쑨원이다.

흔히들 인민복은 중국 본토에서만 입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쑨원이 일본 거주당시 일본의 가쿠란에 영향을 받아서

우리도 저런 실용적인 옷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만들어 낸 것이 '중산복(中山裝)'이다.


이 옷이 훗날 재봉방식의 변화에 따라 '마오복'이라고도 하는 인민복과 타이완의 국민복으로 나뉘게 된다.

2차 국공내전 직전에 중재협상 과정에서 찍은 마오쩌둥과 장제스 두 사람이 입은 옷을 보면 둘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상의 앞 주머니를 드러나지 않게 안쪽으로 재봉하면 인민복, 드러나게 재봉하면 국민복이 된다.

쑨원의 조각상에 대해 국민당 우파는 전통 복장을 주장한 반면 국민당 좌파는 중산복을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합의를 보지 못했고, 쑨원의 좌상과 와상의 차림새가 제각각이 된 것이다.


쑨원의 유해를 중산릉에 안장하는 ‘봉안대전(奉安大典)’이 거행된 1929년 6월 1일,

정오를 기해 전국의 교통이 3분 동안 멈추었고 전 국민이 3분 동안 애도를 표했다.


국부(國父)에 대한 최고의 예를 표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사후에 중산릉 곁에 묻히길 바랐다.


장제스(蔣介石 ; 장개석) 역시 중산릉 서쪽에 자신의 묏자리를 봐둔 적이 있다.

만약 훗날에 벌어졌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승리했다면 장제스는 바로 그곳에 묻혔을 것이다.


1929년 6월 1일,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코 장제스였다.

바로 전해에 그는 북벌을 완수하고 군벌 세력을 잠재웠다.


국민정부의 지도자로서 장제스는 쑨원의 이장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관했다.

장제스는 국가 수장이자 쑨원의 동서였으며, 쑨원의 후계자였다.


그런데 봉안대전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장제스를 쑨원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쑨원의 부인 쑹칭링(宋慶齡 ; 송경령)이다.


쑨원이 세상을 떠난 뒤 쑹칭링은 장제스와 대립하며 국민당 좌파를 지지했다.

그녀는 장제스가 쑨원과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에 반대하며 중국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가 나중에는 베를린에서 지냈다.


‘봉안대전’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은 쑹칭링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귀국은 자칫 장제스를 쑨원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인정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쑨원의 아내로서 봉안대전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녀는 귀국을 결정하는 한편 성명서를 발표한다.


중앙집행위원회의 정책과 활동은 반혁명적이기에 국민당의 일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거듭 강조하면서,

자신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결코 기존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 게 아님을 밝혔다.


봉안대전이 거행된 당일 저녁, 쑹칭링은 난징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장제스는 그녀가 묵을 곳을 마련해 놓았고, 그녀의 친동생이자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 ; 송미령)은

그녀에게 남아 있길 간청했음에도. 장제스가 자신을 이용할 그 어떤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서 떠났던 것이다.


장제스 앞에는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복잡한 당내 분쟁, 여전히 딴마음을 품고 있는 군벌, 중국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열강, 게다가 눈엣가시인 공산당.

이런 상황에서 쑨원은 그에게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버팀목과 같았다.

그가 봉안대전에 온갖 심혈을 기울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쑹칭링과 장제스, 두 사람은 쑨원으로 인해 서로 대립하면서도 쑨원으로 인해 그날 한 장소에 모였다.

훗날 쑹칭링은 중국 대륙에 남고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쫓겨 간다.


이후 중산릉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요 인사들의 참배 장소가 되었음은 물론,

2005년에 타이완의 국민당 주석 롄잔(連戰)이 참배한 것을 필두로 타이완 주요 인사들의 참배 장소가 되었다. 


2016년 타이완에서는 민진당 주석 차이잉원(蔡英文)이 총통에 취임했다.

그녀는 5월 20일, 타이베이 총통부에 걸린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선서를 했다.


차이잉원은 역대 그 누구보다 탈중국화와 타이완 정체성을 강조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이 내세우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은 매우 견고해 보인다.


쑨원의 유해가 안치된 자동관(紫銅棺)은 시멘트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일찍이 항일전쟁 시기에 국민당 정부는 쑨원의 유해를 충칭으로 옮기려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묘혈을 폭파할 경우 유해가 손상되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장제스가 쑨원의 유해를 타이완으로 옮겨가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먼 훗날 타이완 총통이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선서를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는지 사뭇 궁금하다.

손문의 좌상은 프랑스 조각가인 폴 랜도우스키(Paul Randowsky) 의 작품.


한백옥(漢白玉)이라는 돌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한백옥이 중국에서 생산되는 고급 옥돌인지

아니면 이탈리아나 그리스 등지에서 수입한 최고급 대리석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쑨원 (孫文 손문 1866~1925)


 쑨원의 부인 쑹칭링 (宋慶齡 송경령 1892~1981)


장제스 (蔣介石 장개석 1887~1975)


쑨원의 처제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 (宋美齡 송미령 1897~2003)


제당 양쪽으로는 오벨리스크를 닮은 돌기둥 2개가 대칭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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