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남경 대학살은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어
여기서는 남경 전투에 대해서만 알아본다.


상하이 전투에서 2~3개월이나 전투가 장기화되었는데,
여기서 일본군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중국국민당군의 저항이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장제스(蔣介石)의 엘리트 직계군대가 투입되었고
이들의 저항이 상당히 격렬했던데다가 여기서 일본군은 오송 상륙 전투에서
무모한 작전을 펼치다가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 일본군은 중국군과 중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악이 받칠 대로 받쳐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1937년 11월,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어렵게 상하이를 점령하고,
예정도 없이 곧바로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향해 진격을 한다.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화민국 정부는 시민들의 피해를 우려하여 난징을 포기하고
무방비 도시로 남겨둔채 충칭(중경)을 임시수도로 정한다고 발표하려고 하였으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난징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는 경고를 했다.
그러나 난징을 지키고있던 탕셩즈 사령관 휘하의 15만 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 거부했다.


중국군의 당시 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성 안에 고립한 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 방식으로 나가려했었다.


1937년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결국 역시 중국군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중국 군대가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 까닭은
흐트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되지 못했던 것도 큰 몫을 했다.


결국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 본 채로 뒤숭숭한 혼란 속에 빠져 있기만 했다.

그 무렵,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했다.


여기서 피난가지도 못한 채 남아 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 상태 속에서
4~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당한다.

 



해자 역할을 하는 진회하(秦淮河)와 남경성, 그리고 주변 남경 시가지







▲ 중화민국 장군 탕셩즈. 난징 전투 당시 중국군 지휘관이었다.


탕셩즈 장군은 난징을 지키겠다고 큰소리 친후 제일 먼저 도망을 가서

난징 대학살을 일으키게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군들은 계절이 겨울에 들어섰는데도 불구하고 군복을 여름 하복 복장을 하고 있었고
병력 또한 중국군이 많았으므로 그가 수십 만의 중국군과 함께 적극적으로 항전을 했더라면
전쟁의 양상은 과연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 아사카 야스히코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12일)


일본 국왕의 사촌인 황족으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 현장 책임자.
모든 포로들을 죽이라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그가 난징 대학살의 최고 책임자 였으며 실제로 1937년 12월 13일 학살 명령서에 최종 사인을 했지만 ,
종전 후 전범 재판에서 왕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미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그는 아무런 혐의도 받지 않은채 석방되고 대신 마쓰이 이와네가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되었다.


▲ 마쓰이 이와네 (1878년 7월 27일 ~ 1948년 12월 23일)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
그러나 난징이 함락될 당시에는 병으로 전선에 있지 않았다.


그는 12월 7일 병가를 내고 전선을 이탈 하였으며
아사카 야스히코가 대학살을 명령한 12월 13일 이후인 12월17일 요양 후 전선으로 가서
사실 남경 대학살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지만 미국 정부에 의해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 다니 히사오 (1882년 12월 22일 ~ 1947년 4월 26일)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
난징 함락 직후 항복한 중국군 포로와 비무장 민간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도록 지시하였다.


상하이 방면에서 남경으로 이동하는 일본군




남경 부근에서 공격 명령을 기다리며 신문을 읽고 있는 일본군


일본군의 공격 명령



방어하는 중국군



상하이에서 퇴각한 부대도 남경 방어전에 합류



 




방어 준비중인 중국군








남경에 입성하는 일본군 전투 부대






남경을 함락한 일본군






일본군 환영행사에 설탕및 담배를 받고 동원중인 중국인들


일본군이 배포한 남경 주민들의 환영행사


 




일본군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


일본군 수뇌부



남경의 국민당 본부를 점령한 후 일본군 본부를 설치하고 들어가는 장면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년 11월 30일 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된 기사이다.


종전 후 무카이, 노다 두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역시 최후까지 자신이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와 함께 총살되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아직까지도 일본 정부를 상대로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소송 중이다.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의 총살 후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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