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루유지(镝楼遗址)

"본래는 한 채의 세 개 처마로 된 헐산식 적루가 있어 요망대로 사용하였는데 청조 가경년에 무너져 내려

강령현에서 다시 재건할 때 규모를 축소하였고, 1937년 겨울 일본군이 남경을 침공할 때 파괴되었다."



임시로 복원한 성루(城楼)의 모습


중국에서 꼭 봐야 할 4대 역사 명승지로 만리장성과 북경의 자금성, 서안의 병마용,

그리고 남경의 중화문을 꼽을 정도로 중화문은 중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南京明城墙全景圖(남경명성벽전경도)


1366년 주원장은 지리조건이 좋은 남경에 마음을 두고 옛 성을 확장하고 궁전을 지었다.

궁성(宮城), 황성(皇城), 내성(內城), 외곽(外郭)의 4중 성벽이 건설되었으며,

이것들을 총칭하여 남경성으로 불렀다.


하지만 현재는 내성만을 가리켜 남경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성의 성벽은 동쪽으로는 종산(鍾山)에 닿아있고, 서쪽으로는 석두성(石頭城),

남쪽으로는 진회하(秦淮河), 북쪽으로는 후호(後湖)에 걸친 지역에 건설되었다.


외곽성까지 모두 완공된 건 1393년으로,

처음 궁성을 건설하기 시작한 때(1366)로부터 무려 28년이 걸렸다.


명나라 성벽의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될까?

“두 사람이 각각 말을 타고서 성벽의 반대 방향으로 하루 종일 가야만 만날 수 있다.”


16세기 중엽에 난징에 세 번이나 왔던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마테오 리치 중국 찰기(札記)>에 나오는 말이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명나라 성벽은 명실상부 세계 최대의 규모였다.

외곽성이 60㎞, 경성이 총 35.267km로 도시에 건설된 고대의 성벽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성벽이며,

중국에서도 보존상태가 좋은, 얼마 남지 않은 성벽이다.


하지만 일부 구간이 끊어진 상태이며, 현존하면서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구간이 23.399km에 불과하여

서안성(西安城)이나 개봉성(開封城)의 완전성에는 못 미치고 있다.

남경에서는 가장 거대한 고대 건축물이다.  


내성은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은 형태를 하고 있다.

벽돌을 쌓고, 그 속을 흙으로 채워 만들었다.


내성은 지형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성들과는 달리 방(方)형으로 지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의 성으로서는 혁신적인 모습을 한 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성은 남쪽에 정양문을 정문으로 3곳, 서쪽에 5곳, 동쪽에 1곳, 북쪽에 4곳, 총 13곳의 성문이 있었다.

성문의 이름은 각각 정양문(正陽門 : 한때 광화문이라 불렸으나 없어짐), 통제문(通濟門),

취보문(聚寶門, 중화민국시기 中華門으로 개명), 삼산문(三山門, 속칭 수서문水西門),

석성문(石城門, 속칭 한서문旱西門 또는 한서문漢西門), 청량문(清涼門), 정회문(定淮門),

의봉문(儀鳳門, 중화민국 때 흥중문興中門), 종부문(鍾阜門), 금천문(金川門), 신책문(神策門),

태평문(太平門), 조양문(朝陽門, 중화민국 때 중산문中山門)으로,

이들 성문과 외곽의 성문들을 합하여 “내십삼, 외십팔(裏十三,外十八)”이라 하였다.


13개의 성문 위에는 성루(城樓)를 지었고,

중요한 성문에는 옹성(甕城)을 지어 공격에 대비했다.


그 중 취보문(聚寶門), 통제문(通濟門), 삼산문(三山門)은 수륙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매 문마다 모두 옹성을 건설하여 방어에 힘썼다.


성벽위에는 군사들이 머무르며 보초를 섰던 와포방(窩鋪房)이 200곳 있었으며,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13,000여 개 있었다.


와포방은 모두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성가퀴는 일부만 남아 있다.

명나라 초기에 남경성 내외에 주둔했던 군사는 약 20만 명이었다.


황궁과 강을 지켰던 일부의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군사가 성내의 서북지역에 주둔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대규모의 병영과 식량창고, 병기창이 있는 일종의 군사구역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3개의 성문 중에서 사연 많기로는 신책문(神策門)과 태평문(太平門)을 능가할 게 없을 것이다.

먼저 신책문의 사연부터 알아보자.


남명의 정성공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기치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난징을 공격했을 때

난징을 지키고 있던 청나라 군대는 1만여 명에 불과했다.


청나라의 양강 총독은 신책문을 굳게 닫고 지연작전을 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성문 밖으로 나가 싸워서 큰 승리를 거둔다.


순치제는 이를 기념해서 신책문을 ‘득승문(得勝門)’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난징이 태평천국의 수도였을 때, 청나라 군대가 내내 공격의 목표로 삼았던 곳도 바로 신책문이다.


결국 신책문도 태평천국도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말았다.

신책문의 ‘화평문(和平門)’이라는 글씨는, 민국시기에 화평문으로 개칭되면서 새겨진 것이다.


당시 화평문 안에는 아시아 석유회사(Asiatic Petroleum Company)의 유류창고가 들어섰다.

이후 일본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도 이곳에 유류창고를 두었다.


화평문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내내 유류창고의 기능을 하면서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었다.


화평문이 군에서 인민정부로 넘어오고 시민에게 개방된 것은 2001년,

비로소 평화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된 것이다.


태평문이야말로 그 이름과의 불일치가 가장 심한 성문이다.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의 최후 보루였던 태평문과 주변 성벽이 20여 장(丈)이나 무너져 내렸다.


태평천국 진압에 나선 상군(湘軍)이 성벽 아래 매설한 600여 포대의 화약이 폭발한 것이다.

조열문(趙烈文)의 <능정거사(能靜居士) 일기>에서는 난징이 함락된 이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성이 함락된 날 전군이 성을 약탈했다.”

“사흘 동안 10여만명을 죽였고 진회하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마흔 이하로는 한 명도 살아남은 이가 없고 노인은 부상당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칼에 십여 번 혹은 수십 번을 찔렸으며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으로 멀리 퍼졌다.”


그로부터 70여 년 뒤, 태평문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1937년 11월 상하이를 함락한 일본군은 난징을 향했다.


12월 8일, 장제스는 비행기로 난징을 떠났다.

난징 사수를 강력히 주장했던 탕성즈(唐生智) 역시 퇴각 명령을 받고서 12월 12일에 배를 타고 난징에서 빠져나갔다.


이튿날, 태평문 부근에서 무려 1300여명이 학살된다.

일본군은 항복한 중국군과 시민을 이곳에 모아 놓고 주위에 철조망을 둘러쳤다.


이들의 발아래는 일본군이 매설해 둔 지뢰가 있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고 철조망 안에 갇힌 이들은 굉음과 함께 폭사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일본군은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70년이 지난 2007년 12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었던 태평문 근방에는

이날을 기억하고자 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날의 학살에서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을 증언한 이는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일본 병사다.

인터뷰 당시(1999) 그는 이미 여든 중반을 넘어선 노인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성벽의 역할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통행상의 필요에 따라 성문의 개수는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1908년 초장문(草場門)이 생겼고, 1909년에는 지금의 현무문(玄武門)인 풍윤문(豐潤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13년 지금의 읍강문(挹江門)에 해당하는 해릉문(海陵門)이 생겼으며,

1929년 무정문(武定門), 1931년 한중문(漢中門), 중앙문(中央門), 소북문(小北門),

1934년 신민문(新民門), 1935년 우화문(雨花門) 등이 건설되었다.


1930년대 이미 남경성의 성문은 24곳에 달했으며

 1952년에는 다시 해방문(解放門)이 생겨났고, 1992년에는 집경문(集慶門)이 추가되었다. 


내성은 1950년대까지도 대체로 완전한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20년 동안 심각하게 파괴되어 지금은 원형의 60%정도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내성의 최초 13개 성문 중에서 취보문, 석성문, 신책문, 청량문만이 명나라 때 건설된 성문이며,

나머지 것들은 전쟁에 파괴되어 나중에 다시 지은 것이다.


신책문도 성문자체는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성루는 파괴되어 재건하였다.
난징성은 전체적으로 "ㅏ" 자 모양이다.


성의 서북쪽(난징성의 최북단)은 양쯔강에 면해 있고,

동북쪽은 지금의 중산릉과 명효릉이 위치한 자금산에 닿아있다.


자금산 서쪽에는 인공 호수 현무호가 있고,

동남쪽으로는 월아호(月牙湖)에 이어 호성하(護城河)가 성을 보호하기 위한 해자 역할을 했다.


남쪽부터 서쪽에 이르는 긴 구역은 친후와이허가 해자 기능을 담당했다.

진짜 강줄기인 친후와이허는 난징성의 남쪽으로부터 서북쪽을 향하여 흐르다 양쯔강에 합류한다.


난징성의 최남단부터 양쯔강 합류 지점 중간쯤에

친후와이허를 바라보며 한중문(漢中門)과 청량문(淸凉門)이 있다.

진회하(秦淮河)


옛날 해자 역할을 하던 강 위로 다리가 놓여있다.

진회하는 총 길이 110 Km되는 남경의 주요 강으로 시 동남쪽에서 시내 방향으로 흘러든다.


중화문은 외진회하(外秦淮河)와 내진회하(內秦淮河)의 사이에 있다.

진회하의 옛 이름은 "회수(淮水)"였고, "용장포(龍藏浦)"라고도 했다.


원류는  동쪽으로 구용현(句容縣) 보화산(寶華山), 남쪽으로 율수현(溧水縣) 동려산(東廬山)이다.

두 물줄기가 강녕현(江寧縣) 방산태(方山埭)에서 만나서 남경성 동쪽 수문으로 흘러 들어와 성을 관통하여

서쪽 수문으로 빠져나가 장강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전체 길이는 약 110Km이다.


성밖의 물줄기는 외진회(外秦淮)라고 하고,

내 물줄기는 내진회(內秦淮)라고 하는데, 내진회의 길이는 약 5Km이다.


전해지기로 진시황제가 이곳으로 순행 왔을 때 방산(方山)을 파고 장롱(長隴)을 잘라

금릉(현재의 남경)의 왕기(王氣)를 없앴던 연고로 진회하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의봉문(儀鳳門) 남경성 북쪽에 있는 문. 중화민국 때 흥중문(興中門)으로 바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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