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城墙) 건설에 쓰인 벽돌의 책임실명제


난징 성벽을 쌓는 데 쓰인 벽돌에는 관리부터 인부에 이르기까지

해당 벽돌의 제조와 관련된 이들의 이름이 선명히 찍혀 있다.


검사에 불합격하면 관련자는 처벌을 받았다. 사형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벽의 벽돌조차 책임자를 찾아 문책했던 엄격한 ‘품질보증제’ 덕분에 난징의 성벽이 지금까지도 건재하고 있을 것이다.


고대 중국의 성벽은 대부분 이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벽돌을 절약하면서도

충분히 강한 성벽을 건설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타구는 총 13,616곳이 있었고, 성루에는 병사를 숨겨두었던 장병동(藏兵洞)이 200곳 있었다.

장병동은 성루에 마련된 터널식 공간으로 평소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전시에는 병사들을 숨겨두는 장소나 숙소로 이용되었다. 






제조지역, 제작자와 품질관리 관원, 그리고 감독자의 성명이 표기된 벽돌


벽돌의 탁본



南京明代城墙(남경명대성벽)


남경성(南京城) 주위를 해자가 감싸고 있다.

동쪽 주황색으로 표시된 곳이 황제가 살던 궁이고, 중화문(中華門)은 남쪽 큰 탑 앞에 있는 문이다.


북동쪽으로 현무호와 자금산이 보인다.

서쪽 성 안의 산이 청량산이다.


주원장이 어렸을 적 심각한 가뭄이 들었다.

이어진 메뚜기 피해와 돌림병. 반년 만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형까지 모두 잃은 이 가련한 소년,


관을 마련할 돈조차 없어 낡은 옷으로 유해를 수습해 이웃집 땅에다 안장했다.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하고 갈 곳은 절밖에 없었다.


얼마 뒤 절에서도 식량이 동났다. 소

년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탁발승 노릇을 하며 지냈다.


그렇게 몇 년을 떠돌다가 다시 절로 돌아온 게 1348년.

스무 해가 지난 1368년, 그는 난징에서 제위에 올라 명나라 건국을 선포한다.


그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 바로 주원장(1328~1398)이다.

주중팔은 홍건군(紅巾軍)의 우두머리 곽자흥(郭子興)의 휘하로 들어갔을 때 주원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朱)는 주살의 주(誅)를 의미하고, 원(元)은 원나라를 의미하며,

옥으로 만든 홀(笏)인 장(璋)은 인재를 의미한다.


주원장은 그 이름처럼 ‘원나라를 멸망시킬 인재’였다.

그는 원나라 군대를 거듭 격파했다. 곽자흥은 자신의 양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1


355년에 곽자흥이 병사하자 그 뒤를 이은 주원장은 강남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한족의 부흥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원나라와 대적하는 지도자로 부상한 주원장,


그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인재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였다.

주원장이 난징을 근거지로 삼은 것은 책사 풍국용(馮國用)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다.


주승(朱升)이라는 책사는 “성벽을 높이 쌓고, 식량을 많이 저장하고, 왕위에는 천천히 오르십시오”라고 했다.

주원장은 이 말을 그대로 실천한다.


라이벌이었던 또 다른 반란군의 지도자 진우량이 한왕(漢王)을 자칭하고 장사성이 오왕(吳王)을 자칭할 때도,

주원장은 왕위에 오르는 데 급급해 하지 않았다.


그는 소명왕(小明王) 한림아를 계속 받들면서 자신의 실력을 키웠다.

1366년, 홍건군의 기반인 백련교의 지도자 한림아는 난징으로 가던 길에 배가 뒤집혀 강물에 빠져 죽고 만다.


아마도 그의 죽음은 주원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듬해 주원장은 오왕을 자칭했던 마지막 라이벌인 장사성도 죽였다.


그리고 1368년, 주원장은 황제가 된다.

국호는 대명(大明), 소명왕 한림아를 계승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일찍이 백련교를 기반으로 일어났던 홍건군은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강생하고 명왕(明王)이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선전했다. 결


과적으로 보자면, 대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예언의 명왕이었던 셈이다.

“성벽을 높이 쌓으라”는 주승의 권고는 난징에서 착실히 이행되었다.



심만삼(沈萬三)


난징의 성문은 마치 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끝이 없는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난징의 13개 성문은 하늘의 별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난징을 둘러싼 성벽의 북서쪽 귀퉁이 의봉문(儀鳳門, 중화민국 때 흥중문 興中門)과

동남쪽 귀퉁이 통제문(通濟門)에 각각 점을 찍은 뒤 두 점을 선으로 연결해 보면

취보문(聚寶門) · 삼산문(三山門 속칭 수서문水西門) · 석성문(石城門, 속칭 한서문 旱西門 또는 한서문 漢西門) ·

청량문(清涼門) · 정회문(定淮門) · 의봉문은 ‘남두육성(南斗六星)’에 해당한다.


그리고 통제문 · 정양문(正陽門 : 한때 광화문이라 불렸으나 없어짐) · 조양문(朝陽門, 중화민국 때 중산문 中山門) ·

태평문(太平門) · 신책문(神策門) · 금천문(金川門) · 종부문(鍾阜門)은 ‘북두칠성’에 해당한다.


난징의 성벽을 만든 주원장의 효릉(孝陵)은 북두칠성 영역에 자리한다.

게다가 황릉의 신도는 모두 직선 형태인데, 효릉의 신도는 북두칠성 형태로 굽어 있다.


예로부터 남두육성은 삶을 관장하고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하는 별자리로 믿어졌다.

난징의 13개 성문에는 자신이 세운 나라의 수도에 우주를 구현하고자 했던 주원장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또한 북두칠성 형태의 신도는 그가 우주의 중심 북두칠성에 묻힘으로써

영원을 기약하고자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런데 주원장은 엄청난 축성 자금을 어떻게 조달한 것일까?

명사(明史)에 따르면, 강남의 부자 심만삼(沈萬三)이 난징 성의 3분의 1을 쌓는 비용을 댔다고 한다.


심만삼(沈萬三 1330년 ~ 1379년)은 원나라 말기의 강남의 거부였다.

자는 중영(仲榮)이며 절강(浙江) 오흥(吳興)(현재 湖州)출신이다.


1368년 ~ 1911년에 이르는 명나라와 청나라 때 저우장의 심청(沈廳)의 60% 이상이 건축되었다.

저우장이 발전된 것은 명나라 때 유명한 거부 심만삼(沈萬三) 때부터이다.


명사에는 주원장이 심만삼의 재력에 도움을 받아, 서수휘, 진우량, 장사성 등의 세력을 격파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심만삼은 개인 출자로 난징 성벽을 쌓고, 게다가 그는 군대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금까지 내놓겠노라고 했다.


일개 필부가 천자의 군대를 위로하겠다니! 주원장은 분노하며 그를 죽이려 했다.

이때 마(馬)황후가 이렇게 말하며 주원장을 말린다.


“법률이란 불법을 저지른 자를 죽이기 위함이지, 불길한 자를 죽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라에 대적할 정도로 부유한 자는 불길하고, 불길한 자는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니 폐하께서 그를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주원장은 심만삼을 죽이는 대신 윈난(雲南)으로 유배를 보냈다.
명나라 초에 강남 일대의 부자는 모두 주원장의 고향인 펑양(鳳陽 봉양)으로 이주당하기도 했다.


이는 한나라 고조가 부자를 죄다 관중(關中)으로 이주시킨 사례를 따른 것으로,

주원장은 자신의 고향을 수도로 삼고자 14만 호에 달하는 강남 백성을 펑양으로 이주시켰다.


결국 펑양으로의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하들의 반대도 있었거니와, 그곳은 자신뿐 아니라 개국공신들의 고향인지라 권력의 누수가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대한 경계와 의심을 떨칠 수 없는 게 일인자의 숙명이긴 하지만 주원장은 그 정도가 너무도 심했다.

그런 그가 심만삼과 같은 이를 그냥 두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게다가 심만삼은 일찍이 주원장의 라이벌 장사성을 도운 전력까지 있다.

장사성을 도운 부자가 어디 심만삼뿐이랴.


장사성이 세력을 발휘할 때 누구든 그를 도울 수밖에 없었던 게,

주원장이 황제가 된 상황에서는 원죄가 되어버린 것일 따름이다.


주원장은 이 부자들을 죄다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경계와 의심을 해소했다.

그리고 부자에 대한 분풀이까지 해낸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13개의 성문 중에서 ‘취보문(聚寶門)’에는 심만삼과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진다.

취보문을 세울 때 계속해서 지반이 무너져서 점을 봤더니, 성문 아래에 취보분(聚寶盆)을 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취보분은 재물이 계속해서 나오는 일종의 화수분이다.

주원장은 심만삼이 가지고 있던 취보분을 가져다 성문 아래에 묻게 한다.


그랬더니 더 이상 지반이 무너지지 않았고 성문을 세울 수 있었단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설이지만, 취보분의 소유자로 말해질 정도로 심만삼이 부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부를 주원장이 앗아갔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취보문은 ‘천하제일의 옹성(甕城)’이라 불릴 정도로 완벽한 옹성을 갖추고 있는데,

1931년 국민정부에 의해 중화문으로 개칭되었다.


주원장의 지나친 경계와 의심이 도리어 그의 의도와 어긋난 결과를 가져온 경우도 있다.

황태자 주표가 한창 나이에 죽자 주표의 장자 주윤문을 후계자로 지명한 뒤 단행한 대규모 숙청이 대표적인 예다.


주윤문이 숙청의 이유를 묻자 주원장은 그에게 가시가 가득한 나뭇가지를 쥐어보라고 한다.

머뭇거리는 주윤문에게 주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 가시 돋친 나뭇가지를 쥐지 못하니, 내가 너를 위해 가시를 죄다 없애주려는 것이다.”

주원장은 이렇듯 손자를 위해 가시를 없애주고자 했으나,

능력 있는 이들이 모두 제거됨으로써 도리어 손자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원장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1399)에 넷째아들 연왕(燕王) 주체가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킨다.

1402년, 주체의 군대가 난징에 이르자 주혜와 이경륭은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난징은 함락되고 건문제(주윤문)의 행방은 미궁에 빠진 채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한다.

주체의 군대가 들어왔던 성문이 바로 ‘금천문(金川門)’이다.


일찍이 주원장이 잔인한 숙청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혹시 그들 중 목숨 걸고 금천문을 지켰을 사람이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홍무통보(洪武通寶)


중국 명대(明代:1368∼1644)에 주조된 화폐.

태조(太祖) 때의 홍무통보(洪武通寶), 성조(成祖)의 영락(永樂)통보, 선종(宣宗)의 선덕(宣德)통보 등이 있다.


그 후 세종(世宗)의 가정(嘉靖)에 이르기까지, 효종(孝宗)의 홍치(弘治) 때 이외에는 주전(鑄錢)이 시행되지 않았으며,

가정 이후부터 다시 대대로 그 연호의 돈을 주조하였다.

원료는 처음에는 구리에 납과 주석을 더한 것이었으며, 가정 연대 이후에는 아연을 섞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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