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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박 씨의 시련
이튿날 새벽
형사들이 찾아 와 박 씨를 연행해 갔다.
그리고 그는 폭행치사죄로 구속되고
재판을 통해서 7 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나이 스물 여덟 살 때 일어난 일이니까
그가 만기 석방되려면 35 세가 된다.
이 일로 해서 그는 물론이려니와
그의 가정 또한 얼마나 큰 시련을 당했을까.
변호사 측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요구할 때마다
돈을 끌어대야 했고
결국에는 논과 밭을 떼어 팔아
재산이 반으로 줄어 들었다.
초범이고 범죄의 동기와 죄명
연령과 석방 후의 생활 보호 관계 등 여건이 좋으니까
형기의 3 분의 1 정도 복역한 다음
가석방될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해 보자는
변호사 측의 말을 한가닥 기대로 삼고
그는 징역형을 살아야 했다.
꿈에도 상상 못했던 별천지 지옥같은 교도소에서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동안
그는 부모님과 처자식이 있는 가정을 한없이 그리워했고
산과 밭, 논과 들이 있는 고향을 한시도 잊은 적없다.
수형 생활에 따르는 규율을 어기지 않고
모범적으로 살게 되면
2 년 반 후에는
그리운 처자식이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는 하루하루를
마음 속 깊이 다짐하고 노력하면서 생활했다.
세월이 흐르고 2 년 반이 지난 무렵부터
그는 감형이나 가석방 이야기가 나돌 때마다
'만기병'을 앓아야 했다.
이번에는 꼭 나가서
아버님 회갑연을 차려 드려야 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이번에는 정말로 꼭 나가서
귀여운 딸아이 손목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시켜야만 했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어머니께서 아들 걱정에
한숨과 눈물로 지새우시다가
몸져 앓아 누우셨다는데...
이번에도 못 나가면
생전에 어머니를 뵙지 못하는
불행이 닥칠 것 같고
불효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살고 살다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그는 마침내 특별 가석방으로
감옥문을 나서게 되었다.
4 년 여 동안 '만기병'을 호되게 앓던 끝에
7 년 형의 만기를 사흘 남겨 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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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수술을 거부당하고
처남과 처제 그리고 육동휘 원장은
내가 석방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면서
무엇보다 먼저 시급히 수술해야만 한다고 의견을 모았단다.
마침 한양대 병원에 육 원장과 처남의 경기중고등학교 선배로
위암 수술에서는 국내에서 둘째 가라면 섭섭할 전문의가 계시고
처제가 간호사로 있어 바로 입원하고
이틀 만에 수술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단다.
하지만 주치의 김용일 박사는 이미 수술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것 같다고
치유란 게 수술만이 능사겠느냐고 완곡하게 거절하시더란다.
남편은 왜 안 보이느냐고 1 차 보호자인 남편과 상의해야겠다고 하시더란다.
처남은 당황하고 다급해 졌단다.
여동생이 같은 병원 간호사인데 그 형부라는 양반이 이 시급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징역살이 하고 있는 중이라고 차마 말 할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피치 못할 일로...
말 못 할 임무를 어깨에 얹고 해외에 나가 2 주 후에나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사정인듯
얼버무려 넘기고는 처남이 전적으로 위임받아 놓았다고 했단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술만은 꼭 받게 해 달라고 매달렸단다.
김용일 박사 말씀인즉슨 열었다가 손도 못 대보고 도로 닫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일단 손을 댄다 하더라도 마무리를 못 하고 덮어야 할 수도 있단다.
그런 상태면 차라리 손을 안 대는 게 더 낫단다.
그런 상태에서 손을 댈 경우 환자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고
생명이 3 ~ 4 개월 못 넘길 수도 있고 급기야는 수술 도중 사망할 수도 있는데
제아무리 막중한 사명인지 뭔지.....
1 차 보호자인 남편의 동의없이 어떻게 손 댈 수 있겠느냐는 거다.
처남과 처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수술만은 꼭 받게 해 달라고 매달렸단다.
환자의 여동생이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는데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설혹 병원에 누가 되는 일 불미스런 일을 끼치기야 하겠느냐면서
선처해 달라고 매달렸단다.
처남은 워낙 다급했던 나머지 감옥에 있는 나와 상의할 겨를이 없었단다.
설사 그럴 겨를이 있었더라도 출감을 앞두고 그 안에서 내가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싶었단다.
1 차 보호자...
1 차 보호자인 내 동의를 꼭 받아야겠다고 완강히 거절하면 대전 교도소로 달려 갈려고
했 었 단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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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식은 땀만 흐르고
감옥에서 출소할 때마다
나는 며칠 씩 미열이 오르고
식은 땀이 끈적지게 흐르면서
밤잠을 설치곤 했다.
처음에는 까닭을 알 수 없어
그저 몸이 허해지고
골아서 그렇거니 했다.
그런데.....
석방될 때마다
되돌이병처럼 계속 반복해서 앓게 되자
왜 이럴까??? 하고
까닭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감옥에서는 독방에서
웬종일 앉아 있고 누어 있고
잠자는 게 일과인데......
그러면서도 저녁 잠에 떨어지면
아침 기상나팔 소리에
단잠 깨기에 여간 꾀를 부리곤했는데......
방안을 밤새도록 밝혀 놓는
전기불도 없고
잠자리도 더 편안한데
왜 이리 잠이 안 오나......
처음에는 여러날 계속되고 나서야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신경안정제를 꺼내 주셨다.
그 후부터서 출소할 때마다 나는 한 일주일 가량
잠자리에 들기 전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 했다.
감옥 안에 있을 때 눈에 들어오는 모습
시야에 잡히는 풍경은 항상 일정하다.
색깔도 단순하다.
담벽은 온통 백색으로 칠해져 있고
건물 내부는 허리춤을 기준으로 해서
아래쪽은 회색이고 위쪽은 백색이다.
옷 색깔은 청색
그리고 하늘과 땅.....
오로지 똑같은 풍경만 있어 사시사철 그런 풍경만 볼 수 있고
그런 색깔 그런 풍경에만 젖어 지낸다.
그러다가 감옥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세상에 널려 있는 온갖 색상이 눈으로 입력되고
갖가지 풍경이 스치면서 머리 속에 잔영으로 남게 된다.
눈으로 코로 귀로 피부로 온몸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스쳐 지나고 느껴지는 세상의 온갖 모습들은
감옥 안에서 담아 낸 용량에 비하면 가히 견줄 수 없을만큼
커다란 육체적 정신적 환경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대단하고도 엄청난 혼란이다.
그러니 출소할 때마다 복잡다단한 혼란과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한동안 식은땀이 흐르고 잠을 설쳐 댈 수밖에.....
나는 이미 온 몸이 식은땀에 젖을대로 젖어 있었다.
시시큼큼한 땀내가 진동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했다.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온통 기름으로 뒤집어 쓴 듯 온몸이 끈적거렸다.
그런 몰골로 망연자실해서 한동안 병실 벽에 몸을 의지하고 기대 있었다.
주치의 김용일 박사 방에서 진료실로 내려 오라는 전갈이 왔다.
처남과 처제 그리고 혜숙의 친구 천영초와 함께 진료실로 향했다.
나는 마치 재판정에 끌려가는 심정이었다.
마지막 판결을 받으러 가는 피고인의 심경이었다.
사형인지 무기 징역형인지.....
혹시라도 무죄 석방되는 기적은 없는지.....
이 가운데 하나를 골라 심판하는
재판장의 처분을 받아야 하는
피고인의 심정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그보다 더더더더더.....
하느님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는 심정이었다.
지옥인지.....
연옥인지.....
기적과 희망의 천국은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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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주치의와 대면
드디어 내 아내 혜숙의 온전한 보호자로
주치의 김용일 박사와 마주 앉았다.
재판장 앞인지... 저승사자 앞인지...
뒤엉킨 심사로.....
▲ 주치의 김용일 박사
김용일 박사는 68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후,
78년부터 94년까지 한양대의대 일반외과 교수를 거쳐
94년부터 삼성서울병원 외과에서 일반외과장, 소화기센터장, 성대의대 주임교수 등을 역임한
소화기암 수술분야에 대가이시다.
내 후배 동료이자 혜숙의 친구 천영초가
굳이 따라 들어와 옆자리에 배석했다.
판결문과 형량 그리고 운명을
직접 확인하고 증거하려는 듯.....
법정에서처럼
인정 신문부터 시작한다.
"부군 되신다고요?......
그동안 어떻게......?"
당연했을 김용일 박사의 첫 번째 신문 사항에 대한 답변부터
그러고보니 나는 전혀 준비하지 않고 있었다.
순간 뭐라고 진술해야 할지 당황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 두리번거리는 사이
혜숙의 친구 천영초가 눈치빠르게 수습하려 나섰다.
"오늘 아침에 대전 교도소 감옥에서 마~악 나왔어요...
그동안 1 년 반두 넘게 징역살다가요......"
나는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했다.
나보다도 처남과 처제는 더 했다.
김용일 박사는 더욱 더 놀란 표정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면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천영초 역시
이거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큰 실수를 했구나 싶었던지
뒤따라 놀라면서 어쩔줄 몰라 했다.
한동안 혼란스럽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천영초는 기왕에 내친김이라 싶었던지 한번 더 까발리면서
진술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해 준다.
"저.... 우리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다가 구속되었어요.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석방된 거라구요......"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 봐도 그렇다.
나는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감옥을 네 번씩 살고
그 안에서 절도 사기 횡령 등 파렴치범들과
강도 강간 폭력 등 흉악범들을 셀 수 없이 만나고 보아 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밖에서 만나거나 본 적은 없다.
내가 가까이 알거나 그저 막연하게나마 알만한 사람들 중에도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 징역을 살았다는 말조차 전해 들은 기억도 없다.
사람사는 세상이 이토록 천차만별인데
밑도끝도 없이 징역형을 살다가 새벽에 감옥문을 나섰다는 사람을
오후에 탁자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마주 앉아 상담하고 있다는 사실은
김용일 박사를 저으기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하게 만들 법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제서야 해외에서
마~악 돌아왔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사람이
아무리 사정이 그렇더라도
좀 더 빨리 올 수는 없었느냐고 지적하면서
뭔놈의 사정인지 환자 대신으로
따끔하게 훈계 한 번 하고 넘어 가려던 주치의는
느닷없는 상황 변화에 충격을 받을 만했다.
계속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긴장이 감싸고 도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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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수술할 수 있어서 다행
하지만 경기중고등학교 후배인 육동휘 원장과 처남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처제
그리고 이네들과 연고있는 주위 분들의
간곡하고 애절한 부탁을...
때로는 강요를 저버릴 수 없어
결심하고 수술에 들어 갔단다.
일단 열어 보니까
도로 닫아 버릴 상황은 아니었단다.
그래서 최선을 다 해
수술할 수 있었단다.
위는 전체를 다 잘라 냈고...
위 부근에 있는 비장과 췌장도...
일부를 잘라 냈단다......
주변과 임파선으로 전이된 암세포도
확인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 해서 찾아 내어
제 거 했 단 다.
결과적으로
수술할 수 있어 다행이었고
수술도 매우 자~알 되었다는 말씀이시다.
앞으로가 문제인데...
창자와 창자를 바로 이어 놓은 상태라서
위 역할을 창자가 맡아 할 수 있도록
환자는 항상 조심하고
참고 견뎌내야 한단다...
암세포가 더이상 전이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호자와 온 가족의 관심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란다...
나는 김용일 박사의 말씀 가운데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내용이 담긴 대목에서는
차마 알아 듣기에 치를 떨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에만
집요하게 매달리려고 발버둥을 쳐 댔다.
" 그렇다면... 앞으로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리 자상하고 성의껏
자세히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말귀를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멍청한 상태에서 불쑥 튀어 나온 내 말에
김용일 박사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머~엉하니 바라본다.
한참을 그러더니
환자의 의학적 상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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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십중팔구는 죽는 병
" 암에 대한 생존 가망성을...
의학에서는 일반적으로 5 년 생존율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위암으로 진단받게 되면...
앞으로 5 년을 생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의학적으로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5 년을 견디고 무사히 넘기면
암에서 해방된 것으로 보는 거지요.
나라에 따라서는 7 년 생존율을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마는.....
5 년을 생존할 수 있는 가망성의 정도에 따라서
의학적으로 1 기에서 4 기까지로 구분하고 있어요.....
위암 4 기라고 하면 보통 말기라고도 하는데...
5 년을 생존할 수 있는 가망성이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박혜숙 환자의 경우에는 내시경과 조직검사 결과로는
말기암으로 판단했는데...
수술하고 나서 보다 정밀하게 검사한 바로는
3 기에서 말기로 진행하는 상태로 밝혀 졌습니다....."
나는 온 몸이 조여 들면서
또다시 식은땀을 흘렸다.
또다시 재판장의 심판을 받는
피고인의 심정이 되고
하느님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는
죄인의 심정이 되었다.
" 그럼... 제 처의 5 년 생존율은 어떻게?..."
" 한 15 퍼센트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
아~~~!
이게 무슨 말인가......!
뒤집어 말하면 사망 가능성이 85 퍼센트란 말 아닌가......!
내 사랑 혜숙이 십중팔구는 죽는다는 말 아닌가......!
나는 치떨리는 가슴을 쓸어 앉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댔다.
아~~~! 내가 정신차려야지...
혜숙이 겪어야 할 공포와 절망을
당장 어떻게 해야 하나......
" 선생님! 이럴 때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지요?...
제 처는 지금 위암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나본데요...
직업이 약사이다 보니까 치료받는 과정에서
당장 이상해 할테고 어차피 알게 될 텐데요...
그럴 때마다 겪게 될 절망과 공포를
견뎌 내기도 어려울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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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암 환자의 심리 변화
김용일 박사
한동안 뜸을 드린다.
그제서야 말귀를 알아 듯나 싶었던지
벙벙하던 표정이 조금씩 풀어 지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제정신 못 차리고
뒤죽박죽인 내 심리 상태를
찬찬히 들여다 보는 듯했다.
" 암 환자의 심리와 심경의 변화 상태에 대해서도
연구한 결과가 보고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맨 처음... 자신이 암에 걸리고
죽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대부분의 암 환자는 의심하고 믿지 않는 것으로 반응합니다.
첫 번째 단계로 자신의 병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심리 상태입니다.
내 몸은 내가 잘 안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이 병원 이 의사가 알지도 못하고 그런다고...
나는 암에 걸릴 몸이 아니라고...
어디서 이따위 병원 이따위 의사가 있느냐고...
다른 병원에 가 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을 놓치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다가
그야말로 손을 댈 수 없게 돼서야
다시 찾아 오는 경우도 있고요...
설혹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심리로 반응한다는 거지요...
두 번째 단계로는 증오하고 저주하게 됩니다.
몸이 점점 쇄약해 지고 통증이 심해지면서
암이라는 사실을... 죽음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르게 되면...
환자는 세상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심리 상태를 겪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을 증오하게 되고 아름다운 생물을 저주합니다.
내가 왜... 왜 나만 이 세상만물 생명체를 두고 죽어 없어져야 하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미웁고 싫어 지게 되지요......
세 번째 단계는 그러다가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증오하고 저주하다가 지치고 지쳐서
세상을 포기하고 자기자신을 포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절망에서 헤어나 죽음과 협상하게 됩니다.
네 번째 단계로 환자가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정신적으로 아주 피폐해 지기도 하구요.....
시기적으로는 환자마다 제각기 다른데...
이 상태는 거의 마지막 순간에 오기도 합니다.
죽기 하루 이틀 전... 몇 시간 전까지 밀려 가서야 오기두 하고요......
마지악 5 단계는 자포자기한 후에 자기 삶을 정리하고 안정하는 단곕니다.
종교적으로 깊이 위로받고 안정하기도 하고...
살아 남아 있어야 할 가족을 위해서 삶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 들이게 됩니다.
대개의 환자들은 이 마지막 단계까지 이르기가 쉽지 않아요......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암이라는 사실을... 죽는다고 하는 사실을...
보호자가 끝끝내 환자에게 밝혀 주지 않는 경향이 심해서
대부분 2 단계나 3 단계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보호자의 심리 상태도 애증의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이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보호자는 4 단계를 다 거칩니다.
아무래도 환자 자신보다야 생명에 대한 여유...
생명에 대한 여유가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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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5 퍼센트에 매달리고...
아~~~!
혜숙의 삶이
내 사랑 혜숙의 생명이
나와 혜숙의 운명이 이 지경이 되다니......
그런데... 그러면...
앞으로 닥쳐 오는 절망과 공포...
나와 혜숙의 운명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그렇지!!!
생존율이 있지...
15 퍼센트가 있지...
혜숙이 꼭 죽는 건 아니지!!!
가망이 있는 거야!......
혜숙은 이 날 이 때껏
남들에게 그리 뒤떨어지지 않아 왔어...
15 퍼센트가 뭐야???
어디에 내 놔도... 뭐를 해도...
5 퍼센트 안에도 들겠다...
달리기도 잘 한다고 그랬지 참...
나는 중간 정도밖에 못 했던 그누무 달리기를
혜숙은 수송초등학교에서도 선수로 뽑혔다고 그랬어...
공부로라면야 더 말 할 것 없고...
혜숙은 뭐를 해도
맘 먹고 하겠다면 100 명 중 15 등 안에는 들꺼야...
아니아니 5 등 3 등 안에도 들 수 있을꺼야...
그러려면 혜숙이 스스로가
용기를 가져야 될 꺼야...
맘 먹고 싸울 준비하고
극복해 내려는 의지를 가져야 될 꺼야...
그런데......
혜숙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약사니까
어차피 자기 병을 서서히 알아 가게 될 꺼고
그럴 때마다 부정하고 거부해야 하는 고통과
증오하고 저주해야 하는 공포를...
그러다가 자포자기하는 절망을 겪게 될 텐데......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혜숙이 지금 처해 있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대처해 나가는 게
보다 효과적일 지도 몰라...
혜숙이 맘 먹고 용기를 가지게 되면...
희망을 가지고 이겨내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면...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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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퍼센트 안에는 들고도
남 을 꺼 야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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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보호자에게 맡겨진 생명
나는 어느새 생존 가능성 15 퍼센트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 정도면 우리 혜숙이 넉넉하게 극복해 낼 꺼라고
거듭거듭 자위하고 있었다.
" ... 아무래도 제 집사람에게 지금의 상태를
사실대로 알렸으면 싶은데요... 어떨런지요?......"
그렇겠지요?
그래야 되겠지요???
그러면 내 사랑 혜숙은 비록 잠시...
충격과 고통... 절망과 공포를 겪게 되겠지만
아마도 다시금 용기와 의지를 다지게 될 껍니다.
혜숙은 최선을 다 해서 극복해 갈 껍니다.
나와 우리 가족 모두도
다 함께 최선을 다해 나갈 꺼구요.....
"...그 방법은 나라마다 일정치 않습니다.
조상과 가족과 개개인에 대한 가치와 풍습이
나라마다 혹은 민족과 지역마다 서로 다른 것과 같습니다.
역사와 문화...전통적 환경 등등에서 볼 수 있는
차별성하고도 관계가 있다는 보고도 있고요...
미국에서는 의사가 환자 자신을 상대로
모든 상태를 직접 다 이야기합니다.
피치 못 할 사정이 없는 한...
아주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호자나 다른 가족에게는 절대 말 안 해요.
보호자든 가족이든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환자의 권리입니다.
인간의 생명, 생명의 존엄성. 존엄성의 프라이버시는
자기 자신, 즉 환자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겠죠......
치료를 할 지, 말 지... 어떻게 할 지...
이 모든 판단과 선택을 환자가 의사의 조언을 직접 듣고
스스로 결정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그것이 반반입니다.
병원에 따라서, 의사에 따라서 환자에게만 알리는 경우가 있고
보호자에게만 알리는 경우가 있고 그렇습니다.
전체적인 통계로 보면 50 대 50 으로 반반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환자에게 직접 이야기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제로 퍼센트예요...
보호자를 불러서 보호자에게만 알리고
환자에게 알릴지 말지 하는 선택은 보호자에게 맡깁니다. "
김용일 박사는 내 의도와는 달리
교과서적으로만 말씀하신다.
수많은 임상 경험과
그에 따라 의학적으로 정리된 결과만 가지고
인간미 없이... 인정사정 없이
객관적인 이야기만 했다.
나는 다시금 인간적으로 매달리고 싶었다.
개개인 환자마다 구체적인 형편과 사정이 제각기 다를텐데...
그렇게 인정사정 없이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방법으로 구분해서
획일적으로 정리된 결과로만 말씀하신다면.....
그것 역시 환자에 대한 예단...
생명에 대한 예단 아니겠느냐고
매달려 호 소 하 고 싶 었 다 . . . . .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혜숙의 생명에 대한 희망...
15 퍼센트의 가망성을 위해서
나와 혜숙이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다 하기로
엄숙히 다짐하면서 맹세코자 하오니......
김용일 박사님 께서도 인간적인 애정과 관심을
최대한으로 가져 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나는 그토록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초조하고 애절한 심경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간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김용일 박사를 바라 보았다.
" 그럼... 혹시...
제가 보호자로서 부탁을 드리면...
환자에게 상태를 직접 말씀해 주실 수는 있으시지요?... "
김용일 박사는 어이없고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 뜸을 드렸다.
" ... 글쎄요... "
엉뚱하게도 나는
다짐하고 맹세하고 매달리고 싶은 말 대신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그 잔인한 판결문을
주치의인 김용일 박사에게 낭독해 달라고
은근히 미루려 드는 것이었다.
뒤죽박죽 되어 버린 머리 속과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말마디가 따로따로인 채로
서로 전혀 연결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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