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옥바라지


첫 번째로 감옥살이를 할 때다.
나는 74 년 소위 민청학련 사건으로 그녀와 함께 구속되었다.

전국적으로 1 천 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연행되어 조사받고 구속되었는데
이화여대 학생으로는 그녀가 유일하게 구속된 것이다.

그 때는 세상이 하~~ 험악해서

구속된 학생들에게 접견이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내가 소위 긴급조치 9 호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두 번째 구속되었을 때 그녀는 복학해서 3 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우리는 그때만해도 뜻을 같이하고 실천을 함께하는 선후배로, 학생운동의 동지로 만나던 사이였다.

내가 두 번째로 구속되자 그녀는 나서서 나의 옥바라지를 도맡아 했다.
다니던 학교에서는 전공 과목과 수업 시간이 가장 많고 힘들다던 약학을 전공하면서
그녀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접견했다.

그뿐인가? 나의 부모님이 사시는 시골 집을 수시로 왔다갔다하고
변호사를 만나고 인권 단체 사무실을 찾아 다니며 나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하는 일 등등으로
그녀는 그야말로 시간과 생활을 바쳤었다.

그렇게도 열성적이던 나에 대한 그녀의 옥바라지는
당시 서울 장안 대학가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1 년 여 만에 내가 감옥에서 석방되고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우리는 결혼했다.
이듬해 79 년 딸아이를 낳고 9 개월 여 만에 나는 또다시 박 대통령 시해 사태 직후에 일어난
소위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시위 사건으로 계엄포고령을 위반했다 해서 세 번째로 구속되었다.

그때 그녀는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만삭이 된 몸을 이끌고 계엄사령부 비상군법회의로 교도소로 면회를 다녔다.

하루도 빠짐없던 그녀가 어느날 접견을 오지 않았다.
내 머리 속은 별의별 생각으로 뒤엉켰다.

'접견하러 오다가 쓰러진 건 아닌가???...
아이를 낳을 때가 됐을텐데...
아이를 출산한 건가???...
몸조리를 잘 해야 될텐데...
아마 한동안 면회 오기가 힘들겠지......'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안정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이튿날 아침 일찍 접견 소식이 왔다.

'...혜숙이 온 건가???..... 어머니시겠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나는 접견장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혜숙의 밝은 표정이 눈에 화~~~악 들어 온다.

"어저께 마~니 기다렸지???......
어제도 올려구 그랬는데... 어머니가 하두 못 오게 말리셔서...
걱정 마~~니 했찌???... 그저께 자기 면회하고 약국에 있는데...
진통이 시작되는 거 같아서 약국 문 닫구 집으루 올라 갔어...
아들 났써... 저녁 8 시 경에... 살결이 허~어옇구 자~알 생겼써......"

'아!!! 그랬구나... 애를 낳는 날까지 접견을 왔었구나......'

"그런데 어떠케... 왜 왔어!!! 집에서 몸조리하구 있지!!!......"

"당신이 나 보구시포서 기다리구 있자나...
안 오면 걱정두 많을 꺼구... 첫 애 때보다 쉬웠어. 몸두 편하구......"

"그래두 찬바람 쐬믄 안 좋다는데...
이제 한동안 접견 오지 말구 집에서 몸조리나 잘 해....."

참으로 옥바라지하기를 이렇듯
온 몸과 영혼으로 하는 이가 있었을까???... 또 있을까???......

아내 혜숙은 그 흔한 산부인과 병원에도 가지 않고
세 아이를 모두 집에서 낳았다.



'▷ 사랑과 희망으로 > 1. 네 번째 석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02. 박 씨의 시련   (0) 2008.01.22
03. 네 번째 감옥문을 나서는 날   (0) 2008.01.22
05. 건강하십시요  (0) 2008.01.22
06. 석방 환영식  (0) 2008.01.22
07. 위암이요 ! ! !   (0) 2008.01.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