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보호자에게 맡겨진 생명



 나는 어느새 생존 가능성 15 퍼센트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 정도면 우리 혜숙이 넉넉하게 극복해 낼 꺼라고
 거듭거듭 자위하고 있었다.

 

 " ... 아무래도 제 집사람에게 지금의 상태를
 사실대로 알렸으면 싶은데요... 어떨런지요?......"

 

 그렇겠지요?
 그래야 되겠지요???

 

 그러면 내 사랑 혜숙은  비록 잠시...
 충격과 고통... 절망과 공포를 겪게 되겠지만
 아마도 다시금 용기와 의지를 다지게 될 껍니다.

 

 혜숙은 최선을 다 해서 극복해 갈 껍니다.
 나와 우리 가족 모두도
 다 함께 최선을 다해 나갈 꺼구요.....


 "...그 방법은 나라마다 일정치 않습니다.
 조상과 가족과 개개인에 대한 가치와 풍습이
 나라마다 혹은 민족과 지역마다 서로 다른 것과 같습니다.
 역사와 문화...전통적 환경 등등에서 볼 수 있는
 차별성하고도 관계가 있다는 보고도 있고요...


 미국에서는 의사가 환자 자신을 상대로
 모든 상태를 직접 다 이야기합니다.
 피치 못 할 사정이 없는 한...
 아주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호자나 다른 가족에게는 절대 말 안 해요.


 보호자든 가족이든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환자의 권리입니다.
 인간의 생명, 생명의 존엄성. 존엄성의 프라이버시는
 자기 자신, 즉 환자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겠죠......


 치료를 할 지, 말 지... 어떻게 할 지...
 이 모든 판단과 선택을 환자가 의사의 조언을 직접 듣고
 스스로 결정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그것이 반반입니다.
 병원에 따라서, 의사에 따라서 환자에게만 알리는 경우가 있고
 보호자에게만 알리는 경우가 있고 그렇습니다.
 전체적인 통계로 보면 50 대 50 으로 반반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환자에게 직접 이야기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제로 퍼센트예요...
 보호자를 불러서 보호자에게만 알리고
 환자에게 알릴지 말지 하는 선택은 보호자에게 맡깁니다. "


 김용일 박사는 내 의도와는 달리
 교과서적으로만 말씀하신다.

 

 수많은 임상 경험과
 그에 따라 의학적으로 정리된 결과만 가지고


 인간미 없이... 인정사정 없이
 객관적인 이야기만 했다.


 나는 다시금 인간적으로 매달리고 싶었다.

 개개인 환자마다 구체적인 형편과 사정이 제각기 다를텐데...


 그렇게 인정사정 없이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방법으로 구분해서
 획일적으로 정리된 결과로만 말씀하신다면.....

 

 그것 역시 환자에 대한 예단...
 생명에 대한 예단 아니겠느냐고
 매달려 호 소 하 고 싶 었 다 . . . . .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혜숙의 생명에 대한 희망...
 15 퍼센트의 가망성을 위해서

 나와 혜숙이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다 하기로
 엄숙히 다짐하면서 맹세코자 하오니......

 

 김용일 박사님 께서도 인간적인 애정과 관심을
 최대한으로 가져 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나는 그토록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초조하고 애절한 심경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간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김용일 박사를 바라 보았다.


 " 그럼... 혹시...
 제가 보호자로서 부탁을 드리면...
 환자에게 상태를 직접 말씀해 주실 수는 있으시지요?... "


 김용일 박사는 어이없고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 뜸을 드렸다.


 " ... 글쎄요... "


 엉뚱하게도 나는
 다짐하고 맹세하고 매달리고 싶은 말 대신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그 잔인한 판결문을
 주치의인 김용일 박사에게 낭독해 달라고
 은근히 미루려 드는 것이었다.

 

 뒤죽박죽 되어 버린 머리 속과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말마디가 따로따로인 채로
 서로 전혀 연결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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