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두 달 지났습니다.

시간은 참 빨리도 지나갑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여러분께서도 많은 계획을 세웠을 줄로 압니다.

잘 지키고 계신지요?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담배끊기’ 실패담을 예로 들며 작심삼일의 교훈을 떠올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사실, 새해를 맞으면서 저는 담배를 끊겠다고 결심한 분들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솔직히 지난 연말에 담배값을 인상하면서 걱정을 많이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서민경제가 어려운 상황인지라 ‘담배가 서민의 유일한 낙’이라는 말이 자꾸 귓전을 맴돌았습니다.

언젠가 문인들이 푸념하던 목소리도 쟁쟁했습니다.


“수입은 줄어들고 걱정거리는 늘어나는데 창작의 유일한 ‘벗’인 담배값을 올리면 우린 어쩌란 말이냐?”

 

다행히 언론보도를 보면 새해 들어 사회적으로

‘이 참에 끊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습니다.

 

성인 남성의 8.3%가 금연을 실행했고,

이분들 가운데 73%가 담배값 인상이 금연을 결심하는데 영향을 끼쳤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담배값 인상을 결정하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염치불구하고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이 참에 끊어 버립시다!”

 

저는 담배를 끊은 지 3년 8개월쯤 됐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담배를 피웠으니까 ‘애연가’에 속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살면서 담배를 끊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감옥을 들락날락 하면서 원치 않게 금연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감옥에서도 담배를 피울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장실에 숨어서 피워야 한다는 사실이 싫어서 피우지 않았습니다.

 

숨어서까지 담배를 피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을 나오면 다시 담배를 찾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3년 8개월 전에 완전히 끊었습니다.

 

처음 담배를 피운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진학을 앞둔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친구들끼리 ‘마지막으로 한판 놀자’고 모여서 술도 한잔씩 하고 담배도 한대씩 물었습니다.

 담배를 꼬나물고 거울을 보니 꽤 그럴듯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분들이 저처럼 우연한 계기에

어른 흉내 내다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볍게 시작한 것에 비해 담배 때문에 치러야하는 댓가가 너무 큽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보건복지부 장관이라 국민건강보험 지출이 늘어날까봐 그러는 것 아니냐고 농담도 합니다만

실제로 담배 때문에 건강을 잃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숨을 잃는 분들도 많습니다.

국가적으로 너무 큰 손실입니다.

 

국제사회에서 ‘금연’은 이제 상식입니다.

새삼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군말처럼 생각될 정도입니다.

 

우리도 그동안 지속적인 금연정책을 펴왔고 앞으로 금연정책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방침도 갖고 있습니다.

‘가격정책을 통한 금연 확산이 가장 유력한 방법’이라는 것도 세계적으로 인정된 명제입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흡연율을 낮추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가격 이외의 정책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담배값을 올리는 정책, 다시 말해 ‘가격정책’을 펼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 안에 담배값을 한차례 더 올릴 생각입니다.

작년에 재경부와 기획예산처 장관을 만나 올해 한차례 더 올리기로 합의하고 발표까지 했습니다.

 

그때 가면 또 반대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생각입니다.

 

금연에 대한 ‘사회적 결단’이 내려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기대하겠습니다.

정말 그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2005.2.28
김근태


 



혼란스러웠다.
여주교도소에서 이근안 씨를 만나고 돌아와서 밤잠을 설쳤다.

그때 입술이 부르텄는데 아직도 완전히 낫지 않았다.

 

사태를 악화시킨 건 장영달 의원이었다.

내가 다녀온 다음 날쯤인가 여주교도소로 이상락 전 의원을 면회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내가 이근안 씨를 면회한 얘기를 우연히 들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언론에 귀띔한 것이었다.

 

설 다음날, 방송 카메라 기자들이 집으로 밀고 들어왔다.

첫 번째 온 기자들은 성공적으로 방어해 돌려보냈지만,

그 다음에 들이닥친 기자들이 막무가내로 집으로 밀고 들어오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물론

이근안 씨를 만난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잘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이근안 씨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아니, 비서실에서 주의하지 않고 일정을 짜는 바람에 일이 어긋나서 이근안 씨를 만나게 된 셈이었다.

 

이상락 전 의원을 설 전에 면회하자는 게 비서진의 생각이었다.

내 의견을 말할 사이도 없이 이 의원을 비롯해 면회를 같이 할 사람들에게

이미 통지를 하고 약속을 해버리는 바람에 면회를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상락 전 의원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민이 있었고,

면회를 가야할 합당한 이유도 있었다.

 

학벌사회인 이 나라에서 가난해서 진학 못한 것도 억울한데

선거에서 좀 과장했다는 이유로 의원직도 뺏고 징역까지 선고한 가혹한 법원의 판결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는 의미에서도 면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근안 씨가 이 전의원이 있는 여주교도소에 함께 있다는 얘기가 뒤늦게 떠올랐다.

부담스러웠다. 비서관에게 안갈 수 없느냐고 묻고,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여주교도소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오면 옹졸한 사람,

국민 대통합을 주장하면서도 막상 솔선수범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내키지 않았다.

내키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다.

 

끔찍한 고문을 받던 그때가 떠오를 것이 분명해서 망설였다.

면회를 가야하는 날 오전까지 망설였다.

그러다가 교도소 당국을 통해 이근안 씨의 의견을 물어달라고 했다.

본인이 동의하면 면회를 하겠다고 했다.

 

면회실로 들어서는 이근안 씨를 보면서 당혹스러웠고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건장했지만 키가 나와 어슷비슷했다.

고문당하고 욕먹고 그리고 소리 지르던 그때 그곳에서와는 엄청나게 달리….


이게 분명히 현실인데, 안심해도 되는지 약간 불안해지기도 했고….
악수를 했다. 두 손을 잡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왔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 눈과 마음은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했다.

눈감을 때까지 사죄한다고 하고,

한참 있다가 무릎 꿇고 사죄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마음속까지 흔쾌해지지는 않았다.

 

지난 날 받은 고문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개운해하지 않았던 것은 내 머리와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어떤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사죄가 사실일까?

남영동의 책임자였던 박처원 씨의 치사한 배신에 분노하고,

권력에 의해 토사구팽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저 말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과연 있는 것일까?

중형을 받을까봐 충분히 계산해서 나에 대한 고문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수했던 저 사람의 저 말에 대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의구심이 떠올랐다.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하는지, 또 어느 정도 흘리고 있는지 나는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 그러나 그것은 신의 영역이구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고, 기대에는 못미치더라도 사죄를 하고 있는 저것이 분명 현실이다.

저런 저 사람에게 더욱 진실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내 권리를 넘어서는 게 아닌가?”

 

어제 어느 목사님을 만나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다.

 

솔직히 조금 아쉽다.

그러나 이제 지나가고자 한다.

정말로 넘어가고자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지금 나는….

2005.2.21
김근태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을 모시고 자활후견기관을 방문했다.

첫 느낌은 이름이 좀 난해하다는 것이었다.

그냥 ‘자활지원센터’라고 하면 어떨까?

 

이곳은 근로능력이 있는 빈곤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훈련도 시키는 곳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일할 의지로 충만한 분들이 모인 곳이다.

 

이곳에서는 얼마 전 국민의 질책을 크게 받았던 ‘결식아동 도시락’에

사랑을 담아 만들고 배달하는 일도 한다.

간병일도 하고, 도배 같은 집수리 일도 열심이다.

 

그런 일을 하는 분들 가운데 비교적 자활에 성공한 네 분을 모시고

대통령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사실, 그동안 좀 혼란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중소기업에 일손이 딸리고 사람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데 공공근로를 시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것은 근로의욕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그래서 결국 외국 노동자들이 대거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미스매치 되어서 그렇겠거니 생각해왔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의 말씀을 들으니 정말로 이해가 된다.

빈곤층의 상당수는 근로능력이 없거나 부족하고,

또 근로능력이 있더라도 사회와 국가가 실질적으로 도와주고 훈련시켜야 스스로 일을 해서 빈곤을 탈출할 수 있다.

또 그래야 자부심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20대 초반인 딸을 데리고 산다는 40대 초반쯤 된 한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상당히 세련되고 미인이며 지금은 자활에 성공하고 있다는 그 아주머니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였다.

 

아마도 설움에 북받쳐서 그랬던 것 같다.

“희망이 있어야 살지요. 희망이 있어야…”

 

그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자활사업은 경쟁에서 탈락한 이웃이 다시 경쟁의 장으로 돌아오도록 사회가 돕는 일이다.

희망을 잃은 사람이 희망을 갖도록 도와주는 일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우리 사회가 이웃과 희망을 나누는 따뜻한 사회로 발전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지난 설 연휴를 지내면서 이런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편지를 읽는 여러분께서도 그런 생각을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우리 사회 희망의 질량도 커지는 셈이니까...


2005.2.14
김근태




 

 

지난 주말에는 ‘사랑의 연탄 나누기 운동’에 참여했다.

지금은 독립공원, 그전에는 서대문구치소 병사 위쪽에 있는 달동네였다.

 

‘서대문구치소 병사’는 나에게 아픈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곳이다.

85년, 남영동에서 야만적인 고문을 받고 내동댕이쳐졌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내 삶을 되찾기 위해 모든 마음을 다 모았다.

 

매일 세 번씩 따뜻한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았다.

그때의 그 ‘따뜻함’이 나를 ‘삶’의 방향으로 되돌려내는 어머니 같은 힘이 되었다.

그 ‘따뜻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연탄에서 느끼는 것이 바로 그런 따뜻함이다.

전형적인 산동네 비탈길에서 40~50명이 늘어서서 연탄을 받아 넘기는 일은 참으로 리드미컬했다.

사랑이 손에서 손으로 따뜻하게 전달되는 듯했다.

 

내 옆으로 한두 명 건너편에는 젊은 여성과 청년들이 떠들썩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두어 명이 구두를 벗어던지고 양말 바람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비탈이어서 굽이 있는 구두가 불편하다고 했다.

왠지 콧등이 시큰해졌다.

 

그리고 별안간 박세리가 생각났다.

골프화와 양말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그 ‘하얀 맨발’로 물속으로 들어가 공을 쳐내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98년이었던가? IMF 위기로 경제가 어렵고,

국민 모두가 미국에 기죽어 있을 때,

박세리는 미국에서 벌어진 미국의 운동경기인 골프에서 우승을 한 것이다.

 

그때 박세리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었던가?

 

민생경제가 어렵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오늘,

연탄나누기에 참여한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기대한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맨발의 사랑나누기’ 같은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게 할 수는 없을까?

 

곧 설날이다.

이번 설에는 그런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지내야겠다.

여러분께서도 그런 생각을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

 

2005.2.7
김근태

 


 

 

지난 주에는 소록도를 찾아갔다.


대구, 경북 지역에 뿌리를 내린 ‘참길회’ 회원 130여명이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호남에 기반을 둔 ‘소록도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함께 방문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동행에 나서기로 했다.

‘한센병 환우들과 인사할 때는 손에 힘을 주고 악수를 해야 한다’
‘인사가 끝난 다음에 바로 손을 씻지 마라. 그렇게 하면 수군거림 속에 욕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이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의사 선생님들이 준엄하게 행동수칙을 정해 주었다.

약간 긴장되었다.

에이즈 환자를 만나러 갈 때도 그랬는데 그에 버금가는 부담감이 없지 않았다.

녹동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를 향하면서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가 떠올랐다.

그 피리소리를 들으려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삘릴리~’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 사이 사이에 무덤도 남기지 못하고 흔적없이 사라져간

만여 명의 한센병 환자들의 한숨과 슬픔이 뿌옇게 다가오는 듯 했다.

얼마간 결심이 필요했다.

노인 환자들이 식사하시는 것을 도왔다.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침이 튀기는 듯했다.

움찔 물러났다.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이 환자들을 대담하게 만나는 장면이 순간 스쳐갔다.

‘거리를 두어서는 안된다. 장관이 거리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힘을 주어 악수했다.

병실 모두를 방문해서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마을도 찾아갔다.

손 또는 발이 없는 분들과 손과 눈이 마주치는 악수를 했다.

 

그 분들 중 몇 분이 마음을 여는 듯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세상은 물론

가족, 친구 그리고 국가로부터도 외면당해 왔던 지난날의 아픔과 고통에 비해

이것은 아주 작은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언제 시작할 수 있는가?

자문하면서 소록도를 떠나왔다.

저 건너편에 소록도를 남겨두고 말이다….

2005.1.24
김근태



‘부실 도시락’ 문제가 많은 국민들을 허탈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하는 자괴감을 느낀 분들이 많았습니다.

 

책임을 통감합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문제의 발단은 ‘준비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작년 하반기, 방학 때 여러 가지 이유로 밥을 못 먹는 아이들이 많다는 점이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니까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일을 시작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실은, 정부 안에서도 준비가 부족하다는 문제제기가 있었고 논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밥 못 먹는 아이는 없게 하자’는 쪽으로 정책결정이 이뤄졌습니다.

 

‘학기 중에 학교에서 무료급식을 받는 아이들을 방학 때는 아무 대책 없이 방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판단과 주장 앞에 ‘준비가 덜 되어 있다’

‘5만 5천 명에서 25만 명으로 확대할 때 뒷받침이 가능한 인프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대가 있었지만 ‘그래도 해내자’ 하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이런 방침에 따라 실제로 이 일을 맡을 지방자치단체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정책결정 취지에 대해 일선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한게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마음’을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정책이라는 재료에 ‘사랑과 정성’을 보태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이들의 입장에서 한번만 더 생각했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질책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지행정은 정책이라는 그릇에 세심하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 전달하는 일입니다.

특히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서귀포에서 부실 도시락이 전달 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며칠 뒤 ‘밤골 공부방’이라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천주교 수녀님들이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공부도 가르치고 점심도 제공하는 곳입니다.

 

여기 아이들은 모두 명랑하고 활발했습니다.

그 다음에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초등학교 여학생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학생으로부터 ‘못산다고 친구들이 잘 놀아주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목이 메었습니다.

 

이 여자 아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양극화의 두려운 결과이고, 참으로 무서운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정말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뇌관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배고픔이나 외로움보다

주위에서 ‘낙인찍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의를 기울여 왔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번에 우리 사회 복지 시스템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특히 복지정책을 전달하는 시스템에 허점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어쩌면 불행 중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 해결할 방법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니까요.

그렇게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읽으시는 여러분께 ‘참여’도 함께 고려해 주실 것을 요청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공직사회가 자기 역할을 다하도록 각별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사회 구석구석에 빠짐없이 피가 돌게 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참여가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공직사회가 핏줄 구실을 제대로 하는 바탕 위에 지역사회가 모세혈관 역할을 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제도적 지원을 해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공감대를 이뤄나갈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널리 모아질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함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2005.1.24

김근태

하늘이 보내온 구원의 선물

 

지난 주에 남아시아에서 가슴 뭉클한 사연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인도네시아의 한 청년이 9일 동안 나무등걸 하나에 의지한 채 망망대해를 떠돌아다니다가

지나가는 화물선을 만나 극적으로 구조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진 속의 그 청년은 우리를 향해 두 팔을 크게 흔들고 있었습니다.

 

몰아치는 해일에 맞서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한 어머니의 이야기도 가슴을 뒤흔들었습니다.

 

어머니는 한 살배기 자식을 지키기 위해 다섯 살 아들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며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고백했습니다.

어머니의 그 마음이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 다섯 살짜리 아들이

다시 살아서 돌아왔다며 기뻐하는 어머니의 모습도 지켜보았습니다.

 

두 가지 뉴스를 들으며 저는 하늘이 세계인을 향해

‘구원은 이렇게 이뤄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늘의 구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많은 나라에서 민간과 정부가 힘을 합쳐 지진해일 피해자들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번 사태는 그 자체로 인류에 대한 엄청난 재앙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인류가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계기도 된 것 같습니다.

세계인이 서로 단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눈에 거슬리는 점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돕고 격려하면서 자신들의 주도권과 국가이익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향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번 기회를 활용해 은근슬쩍 자국 군대를 파견하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좀 과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과거에 외국의 원조를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도 어린시절에 미군들이 달리는 쓰리쿼터 안에서 껌을 던지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때는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솔직히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차마 그 껌을 줍지 못했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도와주는 사람들은 먼저 그 아픔을 가슴에 생생히 담아야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자존심이 다치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합니다.

모욕감이 들게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남을 도우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집니다.

남을 도울 때는 주도권이나 이익을 생각하기에 앞서

‘높아진 자부심’에 만족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정말 감상에 불과한 것일까요?

 

한밤중에 열린 군사분계선

 

한밤중에 군사분계선을 넘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말만 들어도 긴장되고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남북이 협력해서 안전하게 그것도 한밤중에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주목해서 본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북한 쌀 지원을 나갔던 무역협회 직원 한 분이 갑작스럽게 상을 당했습니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속만 태웠을 일입니다.

그런데 북한 당국이 적극 협조하고 아마도 북한 군 지휘부가 결단해서

이 분이 한밤중에 군사분계선을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여기까지 와있는 것입니다.

더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2005년에는 반드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으면 합니다.

남북 정상이 다시 만나는 것을 계기로 많은 분들이 개성공단과 금강산으로 가고,

원산과 신의주에서 서울로 와야 합니다.

 

그런 2005년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5.1.10

김근태

 

새해 아침 복 많이 받으셨는지요?


처음 ‘일요일에 쓰는 편지’를 시작할 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편지를 쓰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평소에는 할말이 많았는데 막상 편지를 쓸려고 하면 쉽게 써지지가 않습니다.

생각을 정리할 여유도 없고 이것저것 걸리는 것도 많아서 그런가 봅니다.

 

지난 한 주는 거의 날마다 국회로 출근을 했습니다.

새해 예산안과 보건복지부 관련 법안 여럿이 국회에 상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정부는 예산과 법률이 국회를 통과해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산안과 보건복지부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로 출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회의가 열린 시간보다 회의를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데도 아직 통과시켜야할 법률안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남아시아 지진해일 참사가 세계인을 슬프게 한 한주였습니다.

뜻밖의 참변을 당하신 모든 분들께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번 사태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분들께도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시아의 손꼽히는 아름다운 휴양지들이 해일에 휩쓸렸습니다.

스리랑카,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성탄연휴를 즐기던 분들과 현지 주민들이 다치고 생명을 잃었습니다.

 

사망자 수만 15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인류에 대한 엄청난 재난입니다.

게다가 전염병이 창궐할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한주동안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움직였습니다.

적십자사를 비롯해 의사협회, 병원협회와 같은 민간보건의료단체들이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긴급히 사고지역에 의료진을 파견하는 등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이런 민족성은 더욱 빛납니다.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말처럼 서로 돕는 아름다운 품성은 때론 마을, 지방, 나라를 넘어 발휘되기도 했습니다.

 

1999년 9월 대만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119 구조대가 대만 현지에서 벌인 활동은

단교 이래 대만 국민이 한국에 대해 가져온 거리감을 좁히는 계기가 될 정도로 정말로 분위기를 바꿨습니다.

 

작년 북한의 용천 폭발사고 때에도 우리 국민들은 성금을 모으고 기꺼이 북한 동포들을 지원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남북이 하나였고 동북아가 하나였습니다.

 

아시아도 하나입니다.

남아시아 피해 복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겠습니다.

 

제가 보건복지부에 부임한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장관 역할을 잘하려면 최소한 6개월은 지나야한다는 시중의 농담이 있습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요즘은 ‘장관 2기’를 맞는 기분입니다.

지난 6개월 동안 경험하고 파악한 내용을 바탕으로 새롭게 일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새해를 맞아 신년을 맞는 포부를 밝힌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합니다.

 

▼ ▼ ▼

 

2005년을 ‘국민통합 원년’으로 만듭시다.

 

여러분은 새해에 어떤 희망을 갖고 있습니까?

‘좋은 터를 잡아야 좋은 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굳은 마음을 먹고 계획을 세워야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새해 설계를 하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는 ‘국민통합의 튼튼한 밑받침을 놓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빈익빈 부익부라는 ‘양극화의 함정’을 넘어

‘새로운 성장을 위한 사회통합’이라는 큰 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국민통합의 길로 사회의 물줄기를 돌린 원년!

저는 세월이 흐른 다음에 우리 사회가 2005년을 그렇게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맡은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새해를 맞아 ‘국민과의 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이 ‘그 정도면 괜찮다’고 할만한 새해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국민 여러분에게 보고하고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계약’을 맺을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사회 각계 전문가들과 함께 구체적인 내용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준비가 되는대로 국민 여러분께 보고하겠습니다.

 

새해에는 성장과 복지가 선순환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뛰겠습니다.

 

무엇보다 보건복지부는 국민 속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을 잊지 않겠습니다.

한숨짓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행정을 혁신하겠습니다.

투명한 행정, 국민에게 다가가는 행정을 하겠습니다.

 

2005년에는 우리 사회가 서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따뜻한 사회,

인간적인 사회로 몇 발자국 전진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함께 웃을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고, 만사형통 하십시오.

 

2005.1.3
김근태


참담한 일주일이었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국민의 보건과 복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지난 18일, 대구에서 네 살짜리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우리 모두의 가슴을 때렸기 때문입니다.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는 말과 굶어죽었다는 말이 함께 기사화 되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대명천지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사람이 굶어죽을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죄책감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정민이와 청훈이 경철이 세 어린이가 엄마가

신문배달을 나간 사이에 화재로 숨져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 사건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다시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국민들이 충격과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경제대국을 꿈꾸는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국민적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나중에 ‘희귀질환을 앓고 있어 음식을 먹기 어려웠고,

그 결과로 영양실조가 되었다’는 보도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안전망이 이렇게 허망하게 뚫렸다’는 객관적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특히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아이를 많이 낳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의 생명조차 지켜내지 못했다는 참담함이 가슴을 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충격과 상처를 입은 국민들께 무슨 말로 사죄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멀리서 거친 파도가 쉴새없이 우리를 덮쳐오는 느낌입니다.

 

우리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이제 익숙한 것들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날로 심화돼 가는 빈익빈부익부 사회 양극화 현상을 뒤로 제쳐두고도

과연 우리 사회가 계속 전진할 수 있을까?

 

근저에서 분열되어 있고 낯설어 하고 대립,갈등하는 구조를 갖고서도

우리 사회가 정말 안전하게 운영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러고도 시장경제가 훌륭하게 작동할 수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런 시장경제는 억압적인 시장이 아닐까?

이제는 정말 ‘사회통합’을 위해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건 아닐까?

빈곤층은 물론 중산층까지 혜택을 받고 참여하는 진정한 복지사회를 시급히 이뤄내야 하는 것 아닐까?

보건복지부에 부임한 이후 이런 고민을 계속해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회안전망을 튼튼하게 새로 짜고,

우리 사회의 물길을 ‘사회통합’이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밀고 나갈 수 있을지

그리고 사회통합을 통해 새로운 성장, 새로운 발전으로 힘차게 밀고나갈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왔습니다.

 

지난 한 주를 보내면서 자꾸만 쫒기는 느낌입니다.

제 마음이 점점 다급해지는 듯합니다.

 

결국 2005년 내년에 새로운 국민적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새로운 결단을 할 수 있는 새해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준수하게 생긴 그러나 외로워하는 장년 에이즈 환자

 

지난 화요일에는 에이즈 환자를 만났습니다.

12월 1일이 ‘세계 에이즈의 날’이었습니다.

 

축사도 하고 현황도 살펴봤지만 뭔가 찜찜했습니다.

에이즈 환자를 만나 직접 얘기를 듣고 위로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탁했습니다.

뒤에서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허락도 받았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긴장했습니다.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의사가 미리 말해줬는데도 불구하고 손에 땀이 나는 듯했습니다.

 

악수를 하면서 마음을 들킬 것 같아 약간 초조해지기도 했습니다.

에이즈 환자를 만나고 나오면서 목이 말랐습니다.

 

자꾸 ‘소록도’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가 다시 ‘제2의 소록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에이즈를 ‘천형’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에이즈는 과거에 문둥병이라고 부르며

사회에서 격리하고 배척하던 ‘한센씨병’과 비슷한 처지로 규정받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만난 에이즈 환자는 정말 준수하게 생긴 남성이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저 역시 은연중 일그러진 모습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알게 모르게 편견과 공포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나 TV에서 보던 말기 에이즈 환자를 떠올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만난 그분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회에 대한 증오심도 없었고, 자제력도 충분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오직 에이즈 환자들의 모임을 인정하고 지원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분들의 인권을 위해서도 그렇고,

이미 치명적인 질병에서 만성적인 병으로 전환되고 있는 ‘에이즈’로부터

우리 사회를 효과적으로 지켜내기 위해서도

에이즈 환자에 대해 선의를 갖고 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이미 결심을 했기 때문에 약속을 했습니다.

 

앞으로 지켜나갈 생각입니다.

 

해군 방문 이야기

 

좀 가벼운 얘기를 하겠습니다.

수요일에는 동해에 있는 해군부대를 방문했습니다.

 

부대를 둘러보는 동안 군악대가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연주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노래는 제가 지난 4.15 총선에서

국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면서 도처에서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부대에서 사전에 저의 18번에 대해 알아보고

‘사랑으로’를 골랐다고 합니다.

 

그런 부분까지 신경 써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제가 실수를 좀 했습니다.

 

첫 번째는 ‘국군장병 아저씨’였습니다.

군부대를 방문하면서 어릴 때 위문편지를 쓰던 기분이 들어서 그랬는지

자꾸 그 말이 입안을 뱅뱅 돌면서 튀어나오려고 해 혼났습니다.

 

아들까지 군대를 갔다 온 제 처지를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두 번째는 장병들과 함께 ‘화이팅’을 외치는 순간에 터져 나왔습니다.

‘대한민국 해군 화이팅!’을 하자고 했는데

실제로는 그만 ‘육군 파이팅!’이라고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육군 병장 출신이라서 그렇다고 하면서

‘와’ 웃으면서 상황을 넘겼습니다.

다소 쑥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정겨운 느낌도 많았습니다.

우리 기술로 만든 자랑스러운 ‘광개토대왕함’을 둘러봤습니다.

 

그런데 내 눈길을 끈 것은

옛날에 영화를 통해 봤던 좁고 가파른 계단이었습니다.

 

그때는 계단을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는데

막상 현장을 보니 이해가 됐습니다.

 

좁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군복을 보니 그리웠던 지난날이 떠올랐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해군복 같은 디자인의 옷을 ‘세라복’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진명여고 학생들이 입고 다니던 세라복이 그렇게 예뻐 보였는데

그 세라복이 바로 해군복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아주 정겹게 다가왔습니다.

 

간부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세계화시대를 맞아

해군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합의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륙에 연결된 섬’의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휴전선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해군은 우리의 물동량을 지키고

세계와 우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해군 장병들에게 구호에 그치는 ‘세계속의 해군’이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대양 해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해군부대를 방문하는 동안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육해공군의 경계를 넘어서 동아시아에서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할 것인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군사전략을 어떻게 짜야 하며

결국은 그것을 담보할 정치 전략은 무엇이고 그것을 실현시킬 프로그램은 무엇인지

등등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해군 부대 방문은 그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2004.12.27

김근태

 

 

 

일요일, 편지쓰기를 시작하며―.

일요일 오후입니다.
며칠 전, 함께 일하는 후배로부터 

 ‘일요일에 쓰는 편지’에 대한 원고청탁을 받았습니다.

 

“일요일 오후에 그저 부담 없이 짧게 쓰시면 됩니다”

 

그 후배는 정말 부담 없이 부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만 주눅이 들어버렸습니다.


‘정말, 쓸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번씩??’


하지만 후배의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어

덜컥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돌아섰지만

그 순간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편지를 쓰겠다는 약속을

온전히 지킬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편하게 쓰겠습니다.
잘 정리된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냥 제가 일주일을 보내면서 품었던 ‘생각의 조각’을

여러분과 함께 나눈다는 마음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일주일을 보내고 제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추억이건 감상이건 눈물이건 분노건….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여러분과 나누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그리워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작은 ‘말’ 하나도 틀림없이 책임져야하는 장관으로서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구실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늘 아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많은 분들께

더없이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빚 갚는 심정’도 작용했습니다.

 

읽어주시고 제가 전하는 ‘생각조각’을

여러분이 ‘큰 생각’으로 키워 주셨으면 합니다.


울고 싶은 일이 많은 지난 한 주였습니다.

먼저, 어이없는 화재로 세상을 떠난

세 남매 때문에 울었습니다.

 

경찰인 아빠는 철야근무를 나갔고,

엄마는 신문배달을 하던 그 새벽에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엄마, 아빠가 너무나 열심히 일하던 분들이라

슬픔이 더 큽니다.

 

특히 “나를 용서하지 말라”고 절규하던

그 어머니 때문에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정민이와 청훈이 경철이….

세 친구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역할을 해야겠다고 두 주먹 꼭 쥐고 다짐합니다.

 

제가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여러분께서 절대 이 김근태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한 번 더 울었습니다.
노숙자들에게 밥 퍼주는 행사를 하면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특히

‘신이 우리에게 두 팔을 주신 것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보듬어 안기 위해서이다.

마음과 마음이 합쳐지면 기적을 이룬다’

는 영상물이 나를 목메게 했습니다.

사실, 밥퍼 행사 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12년 동안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봉사자들의 몸가짐과

마음 쓰는 모습이 성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다일공동체 봉사자들도 피하고 싶어 하던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친절한 공무원의 소임을 다한다는 이문행 경장님,

천사병원의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님들….

그곳은 정말 너무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이었습니다.

“밥을 많이 퍼야 합니다”라는 말이 가슴을 찡하게 했습니다.
세상은 웰빙이니 비만이니 하는 말과 함께 밥을 조금 먹으려는 추세인데

그곳에서는 밥을 많이 퍼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밥을 많이 퍼서 식판에 높이 쌓아 배식 했더니

또 너무 많이 펐다고 혼이 났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느낌이 많았습니다.

사실, 좋은 일을 계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몇 번하고 마는 밥퍼가 아니라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계속하는 밥퍼’라는 점이 특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사랑과 평화가 있는 이곳에 다시 오겠습니다-김근태”

이렇게 사인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언제 우리 모두 함께 앞치마를 두르고 그곳에서 밥을 펐으면 좋겠습니다.

정치 얘기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뜬금없는 간첩논쟁에 대해서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잘 대응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만

그래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용서하면 안 됩니다.

 

더 이상 이 땅에 냉전과 색깔논쟁의 망령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이런 야만이 준동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됩니다.

지난 봄 촛불로 대통령과 민주주의를 구했듯이

언제나 나라와 민주주의를 구하는 것은 국민이었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모든 일이 잘 되리라 확신합니다.

지난 주에는 의사당에서 단식하던 권영길 의원님을 위로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 나왔지만 가슴은 더없이 짠했습니다.

이런 이심전심이

여러분과 저를 연결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요일에 보내는 편지’가

여러분과 제가 더 깊이 이심전심을 나누는

‘따뜻한 악수’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덜 춥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겨울입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주에 또 뵙겠습니다.


 

2004.12.15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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