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2 08:00 김삼웅

 

 

네번째 편지는 3월 20일 역시 서울구치소에서 쓴 것이다.
이 날은 온종일 비가오고, 빗속에 싸라기 우박이 섞여 쏟아졌다. 편지 제목을 <겸재(謙齊)를 생각하며>라 달았다.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鄭敾: 1676 ~ 1759)은 사실주의 기법으로 한국의 산수화를 즐겨 그렸다.
김근태는 눈 비오는 날 감옥에서 왜 겸재를 떠올리며 아내에게 편지를 썼을까.

거리에 캐롤 울릴 때쯤이었을까. 눈덮힌 산 그 아래 뾰족 첨탑 보이고 사슴이 끄는 썰매 탄 산타 할아버지 눈에 어른거렸네, 언제부턴가 생활 속으로 슬쩍 들어와 버린 카드 속 그림 닮은 그런 산, 그런 건물, 썰매, 그런 아이들 상상하였네.

난 그만 실소하고 말았지. 감수성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는 로렐라이 언덕, 하이델베르크 대학 앞 어디쯤 있을 황태자 첫사랑의 그 맥주집에 몸살나는 이 시대 교양인들.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에 몸 자지러지는 저 대중들. 그 중에 하나일까, 나도. 겸재(謙齊) 생각했지, 부끄러워 하면서.
(주석 7)

김근태는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이 중국적 봉건질서에 예속되어서 화가는 상상속의 중국의 산과 강을 그리고, 식자들은 공맹(孔孟)의 길에서 허우적거릴 때 펄펄 살아 뛰는 우리 강산을 유려한 필치로 그린 조선화가 겸재를 그리워한다.

오늘은 어떤가. 혹시 진서 대신 원서가, 한문대신 영어가, 중국 대신 서양이 또 그 역할을 해내고 있는 건 아닐까. 꼬부랑 관념과 감수성, 글씨 몇 개 아는 지식인들 지배계층에 끼여들고 그렇게 제도화되어 있고, 그 아랫사람들 열심히 흉내내고, 흉내바람은 사회적 강제가 되고, 분명하지 않은가 말이여.

여기에 끼지 못하는 건 처벌이고 소외인 거야. 세련됨, 모던함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 그러기 위한 훈련, 학습, 교양 갖으려고, 한 마디로 간판 따려고 우리 모두 서둘러 왔던 것 같지. 서양의 문화, 문물, 예술 모두 암암리에 보편적인 것 되고, 특히 진정한 그 내용이나 진리가 아니라 단편적 사실, 어떤 형식이나 약간의 흉내가 오히려 기승 부려 진짜 인류의 보편적 발전방향은 목졸라 버리는 것 같고, 그것으로써 우리 자신의 주체성과 주인의식은 잊어버려 민족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고, 인간성 구현을 위한 발전방향과 진리는 서양의 특수한 것이라고 매도해 버리고, 역사는 반복할 것인가.

수치스럽게도 소중화(小中華)로 자부하며 더욱 중국적이었던 조선, 또 다시 개명한 20세기 후반에 우리는 자신을 서양보다 더욱 서양적으로 만들어 버릴 것인가. 진리 냄새피우는 한 글자 한 글자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등장한 이 시대에.
(주석 8)

김근태의 이 서한은 그의 세계관 또는 인생관을 가늠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검열자의 시선을 감안하면서 쓴 것임을 생각하면, 운동가ㆍ투사 김근태의 깊은 내면의 일단을 살피게 한다. 주인의식을 상실한 채 ‘민족허무주의’에 빠진 지식인들을 김근태는 조선시대 식자들과 대비하고 있다.

재판에 임하면서 참 묘한 느낌이 들었었다오. 그 중에 하나가 판검사, 변호사들과 만났을 때 나도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로 동류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지. 말씨나 절차 그것에서도 상호 느낄 수 있었고 말이오. 물론 서 있는 입장이 다르면서도.

우린 한국 사회의 지배계층임을 아니 적어도 상류계층임을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소. 그러다가 구치소로 돌아와 특히 자신의 감방에 들어가 갇혀질 때면 최하 천민계층으로 급락하는 것이었소. 부자유 그건 능멸받아 마땅한 것이오. 옛날 노예가 살아 있는 도구라고 짓밟혔던 그림자 아직도 여기에 살아 있는 거요. 여하튼 이런 차이를 반복하여 느끼면서 나는 사실 꽤 당황하였다오. 정서적으로 묘한 혼란도 오고,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얄팍한 마음도 생기고 말이오. 자꾸 설명하고 싶어지고, 이것 모두 쓰잘 데 없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요.
(주석 9)


주석
7> 앞의 책, 179~180쪽.
8> 앞의 책, 180~181쪽.
9> 앞의 책, 181~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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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1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서울구치소 병사 10호실에 수감되어 항소심 재판을 받으면서 1986년 1월 6일 부인 인재근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검열 때문에 깊은 속내는 털어놓을 수 없지만,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어느 정도 정신적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는 그 구절이 가슴을 치는구료, 오는 곳이 아니라 여기는 가는 곳이 틀림없소. 쟂빛 그늘 속으로 점점이 사라져 가는 그런 입구인 것처럼도 생각되고 말이요,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는 한숨과 눈물이 그렁그렁 쌓이고, 치밀어 오르는 목메임 때문에 목을 가누는 것이 어색한 것 같구료, 하지만 저녁식사 후가 되면 별안간 활발해진다고.

다가오는 어스름 속에서 용기도 생기고 목청을 조용히 뽑아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들로 생기가 살아난다오. 야릇한 흥분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요새 대중가요를 익히느라고 제법 바쁘다오. 특히 ‘사랑의 미로’라는 노래는 이제 수준급에 올라섰는데 이걸 들려 줄 기회가 없어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구료.
(주석 3)

김근태는 당시 한참 유행중이던 대중가요 ‘사랑의 미로’를 흥얼대면서 아내를 생각하는 연모의 마음을 담았다. 더불어 결기를 보인다.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 나가고 있는 중이오.
당신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구료. 9월말 그 때 기적 같은 만남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한 것이오. 그 후 당신의 노고 가히 짐작이 되오. 때로는 허둥허둥도 했을 것이지만 훌륭히 견뎌 낸 것이오.
  (주석 4)

서울구치소 검열관은 김근태의 옥중서한의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나가고 있는 중이오”를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걷게 되는 문장으로 ‘오독’하고 그대로 내보냈다.

이 대목은 건강상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김근태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표현이었다. 양심수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김근태의 이런 뜻을 헤아린 민청련은 1987년 9월 그의 고문 실상과 옥중기록을 묶어 책으로 내면서 <이제 다시 일어나>를 제목으로 뽑았다.

김근태는 최진희가 불러 히트한 ‘사랑의 미로’를 열심히 연습하여 아내의 생일날 면회를 왔을 때 접견실에서 이 노래를 불러 선물하였다. 외국의 경우는 몰라도 한국에서 양심수가 아내의 생일선물로 노래를 불러준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와 관련 뒷날 김근태 부부의 인터뷰 한 대목이다.

김근태 : 이근안 씨한테 고문을 받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윤동주가 이렇게 해서 옥사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시인도 아니고 여기서 옥사하면 안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며 중심을 잡았지요. 아내에게 “나 지금 괜찮다. 흔들리지 않는다”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노래를 연습했습니다. 그 노래가 약간 트로트 비슷해서 나한테는 통 안 맞는데 그땐 그게 기분이 또 맞더라구요. 인재근은 깔깔대고 웃고….

인재근 : 그때는 울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참았어요. 노래도 못하면서 노래 선물을 한다고 그러냐면서….
(주석 5)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다 그렇듯이 가족 면회와 편지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이지만 봉함엽서에 편지 쓰는 것이 그나마 행복한 순간이다.

김근태는 3월 11일 서울구치소에서 두 번째로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있었던, 또 지금 내가 있는 방들은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곳이었소. 앞뒤의 창들은 비닐로, 아스테이지로 완전히 밀봉되어 있었소. 쪼그만 구멍들이 뻥뻥 뚫린 철판을 대어 어두컴컴했었소. 바깥에서 이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상당한 주의력을 집중해야 가능한 일이었고 뭔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였소. 그 안에는 흉측스런 것이 갇혀 있어야 마땅한 일이었고 경멸받아서 마땅한 존재로서 말이오.

작년 9월말 처음 이곳에 내던져졌을 때 난 이러한 것에 흥미나 관심이 전혀 가지 않았다오. 아니 주의를 가질 기력이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오. 오직 필요한 것은 컴컴한 짙은 어둠과 외부의 모든 자극으로부터의 차단 그것이었다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비켜설 수 있게 된 것이었으나, 더욱 깊어져 가는 마음의 상처,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오.

그냥 정신적 위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박하였소. 어떤 와해, 버텨가는 것의 종착역에 이르러 가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오. 나는 내가 이제 황폐함 속으로 밀려 떨어져 쓰러지겠구나, 이러한 것을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오.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 무너져 내리는 곰 같은 신세였소.

컴컴한 동굴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한편으로는 굴 입구에 나타날 수상쩍은 적을 경계하면서 상처가 아물도록 자꾸 혀를 핥는 것이었다오. 그러나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아 이불 속으로 이불 속의 컴컴함으로 더욱 기어 들어갔다오. 오감도 속의 이상(李箱)처럼 나는 점점 이상해져 갔다오. 아, 나는 이 때 정말 누군가의 체온 그것을 갈망하였다오. 인간의 목소리, 사랑이 담긴 그 눈빛을 나는 고대하였던 것이오.
(주석 6)

김근태는 이 편지 말미에서 감옥 안 마루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쥐들의 ‘사랑의 언어’에서, 자신의 “가슴에 다시 생명의 불씨를 살리게 된 것은 이성이 아니고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를 확인했다고 썼다.

주석
3> <이제 다시일어나>, 175쪽.
4> 앞의 책, 176쪽.
5> <레이디경향>,
2005년 12월호.
6> 앞의 책,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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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0 08:00 김삼웅

 

사마천은 <사기>의 <임안(任安)에게 드리는 글>에서 사람은 “지면에 옥(獄)을 그려놓아도 그것을 피하고, 나무를 깎아 형리(刑吏)를 만들어도 그것과 대면하기 싫어한다”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이승의 감옥이 저승의 지옥”이란 말을 남겼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불의의 시대에 의인이 갈 곳은 감옥”이라 말하고, 함석헌은 “자유는 감옥에서 새끼를 친다”고 설파하였다.

감옥은 묘한 곳이어서 강한 사람은 더욱 강하게 만들고, 약한 사람은 허물어지게 한다.
감옥은 육신이 묶여도 생각까지 묶을 순 없어서 인류 지성사에 샛별과 같은 많은 명저들을 남겼다. 볼테르는 바스티유 감옥에서 <앙리아드>를 쓰고, 존 번연은 베드포드 군형무소에서 <천로역정>을 집필했다. 세르반테스는 왕실 감옥에 갇혀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쓰기 시작하고, 마르코 플로는 포로로 갇혀 <동방견문록>을, 오 헨리는 옥중에서 <점잖은 약탈자>를, 네루는 <세계사편력>을 썼다. 이밖에도 사례를 들자면 수없이 많다.

남의 나라 일만도 아니다. 김대중은 진주감옥에서 <옥중서한>을, 신영복은 전국의 여러 감옥을 전전하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정수일은 비슷한 처지에서 <소걸음으로 천리길을 가다>는 옥중기(편지)를 남겼다. 하나같이 옥중문학의 금자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밖에도 문익환ㆍ김남주 등 수없이 많다.

감옥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유배문학, 망명문학도 지성사의 보배로 남는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 추사 김정희의 불멸의 그림 한 폭 <세한도>는, 정작 당사자들의 피눈물과 고투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소중한 민족문화 유산으로 전한다.

서울구치소의 수인이 된 김근태는 차분한 마음으로 옥살이를 각오했다. 고문경찰과 조선총독부의 사법부, 나치의 사법부, 유신체제의 사법부와 다르지 않는 5공체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검ㆍ판사들의 행위에 분노가 치밀고, 고려 최씨 무신정권기 지식인들처럼 글을 쓰는 어용언론ㆍ지식인들에 하염없는 연민을 느끼면서, 그래도 성서의 ‘남은 자’들의 역할을 믿으면서 옥살이를 시작했다.

육신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어 망가졌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행운이었다.
자신이 갇힌 방 근처 어딘가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뒤에도 조봉암 선생과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날조된 인혁당사건 희생자 등 한을 품고 이곳에서 처형당한 선열들에 비하면 행운이라 여기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독일 출신으로 반나치 저항운동을 하다 국적이 박탈되고 긴 망명생활을 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 불현듯 떠오르는 날이 있었다. 브레히트가 이 시를 쓴 시기와는 42년의 시차가 있었으나 처지와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주석 1)

브레히트가 이 시에서 지적한 ‘친구들’은 모스크바에서 병사한 슈테핀,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벤야민, 베를린 시대의 영화감독 콕흐 등이다. 모두 반 나치 저항지식인들이다.

김근태의 고문폭로는 전체 민주화운동권이 노선을 초월하여 정부의 용공조작에 맞서 재결집하게 되고 더욱 강력한 투쟁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재판을 거쳐 서울구치소에서 수형생활에 들어간 시기를 전후하여 한국사회는 5공 파쇼정권 타도를 위한 저항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김근태는 이를 수용하려 하지 않겠지만, 그가 뿌린 민주화의 씨앗이 청년ㆍ학생들을 움직이게 하는 큰 역할을 한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1985년 5월 23일 민족통일ㆍ민주쟁취ㆍ민중해방투쟁위원회(삼민투위)가 결성되고, 6월 24일 효성물산ㆍ가리봉전자ㆍ선일섬유 등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의 동맹파업, 11월 4일 서울대 등 시내 7개 대학생 14명의 주한 미상공회의소 점거농성, 11월 18일 14개 대학생 191명의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농성,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결성, 1986년 2월 12일 신민당과 민추협 대통령직선제 개헌 1,000만 명 서명운동 돌입, 2월 26일 서울대생들 졸업식장 집단퇴장, 3월 17일 박영진 열사 분신, 3월 29일 구국학생연맹 결성, 4월 28일 이재호ㆍ김세진 열사 분신, 5월 3일 인천항쟁, 5월 10일 교육민주화선언, 6월 4일 부천서 권인숙양 성고문사건 등 파쇼 정권의 만행과 이를 타도하기 위한 거대한 민중저항이 전개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막장으로 치달았다. 5공의 인권유린의 한 상징이 된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남은 자’ 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고, 직장인ㆍ가정주부들까지 분노의 대열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6년 인천 5ㆍ3항쟁 이후 반독재 민주화운동 진영은 다양한 종류의 헌법개정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부는 정권안보 차원에서 경찰력을 동원하여 5ㆍ3항쟁의 배후를 색출하는 데 주력하였는데, 이를 위해 구속ㆍ수배ㆍ고문 등을 자행하였다.

서울대 의류학과 출신의 권인숙은 1985년 6월 4일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조사관들은 권인숙에게 공문서위조 혐의 외에 인천 5ㆍ3항쟁 관련 수배자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하였다. 문귀동 형사는 권인숙을 수사계 수사실로 데리고 가 6월 6일과 7일에 걸쳐 조사를 하였다. 그 과정에서 문귀동은 성고문과 협박과 공갈을 하였다.
(주석 2)

비교적 완곡하게 기술한 내용이지만, 이날 문귀동은 용납할 수 없는 성고문을 자행하였다.
5공 수뇌부의 도덕적ㆍ정치적 타락상이 일선 경찰에 의해 여과없이 자행된 것이다. 남영동의 고문기술자들과 한 통속의 타락 정권의 하수인들이었다. 권인숙은 교도소 면회 과정을 통해 성고문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곧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성고문 사실을 부정하면서 “운동권이 마침내 성까지 혁명의 도구화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타락한 경찰관들의 악행도 문제이지만, 이를 은폐하면서 민주화운동세력을 매도하는 검찰의 언동에 국민은 더욱 분개하였다.


주석
1> 브레히트 시선, 김광규 옮김, <살아 남은 자의 슬픔>, 117쪽, 한마당, 1985.
2>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461쪽.

 




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9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정연한 논리와 감동적인 진술은 그러나 군부정권의 하수인격인 판ㆍ검사들에게는 우이독경이 되었다. 그들은 이같은 진술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국민이 알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순간만 넘기면 책임을 면하고, 승진도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서성 판사는 김근태에게 국보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7년, 자격정지 6년을 선고했다.
판사는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군”, “창피한 줄 여기시오”라는 방청석의 야유를 귓전에 흘리면서 총총 자리를 떴다.

판사의 유죄판결의 이유 중에는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갖고 있었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이 책이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검찰이 <내외문제연구소>라는 관변 단체의 김영학에게 이 책의 감정을 의뢰하고, 그의 감정서를 바탕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점이다.

김영학은 돕의 주저인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 <자본주의 발전연구> 등의 책 이름조차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기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서, 돕의 저서가 국보법 위반으로 처벌되는 한국이었다. 모리스 돕은 영국의 경제학자로서 이론경제학, 경제사, 사회주의경제학, 후진국문제 등 다방면에 걸친 저작을 발표한 세계적 학자다.

김근태는 항소심을 거쳐 5년 장기수가 되어 서울구치소에서 수형생활에 들어갔다. 전두환 군부독재가 마지막 독기를 뿜어내는 1986년 봄이었다. 김근태는 인간도살장 남영동에서 풀려나 서울구치소에 수감될 때, 지옥에서 천국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설마 "5년 장기수"가 될 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때 인왕산 언덕배기에 피어 있는 노랑 개나리와 검붉은 진달래를 바라보면서 감상에 젖었다. 그는 서정시인이었다.

얕은 골짜기 여기저기 띄엄띄엄 응달진 곳에 붉은 얼룩이 보인다. 노랑천지 속에 얼핏 보이는 저것은, 불그스레한 그 번짐은 무엇일까. 이제는 까맣게 멀어져 간 4월의 함성이 이 봄에 슬그머니 되살아나고 있는가. 부릅 뜬 눈으로 아직은 절대로 잠들 수 없는 피맺힌 5월이, 아스팔트에 낭자하게 쏟아졌던 피, 그 피가 은연중 배어나고 있는가. 아니면 작년 9월. 아! 그 남영동에서 내가 토해냈던 울부짖음의 파편이 튀어서 저리 붉게 피어나는가. 물고문에, 불고문에 바스라졌던 내 넋의 한 조각이 다시 새롭게 물올라 한 무데기 진달래로 피었는가. (주석 18)

김근태가 군사정권과 온몸을 던져 싸우며 재판을 받고 있을 즈음 그가 산모 역할을 했던 민청련의 <민주화의 길> 제12호에는 강성준이 "다시 우리 시작하자 김근태 형 재판에 부쳐"란 시를 실었다.


기나긴 바람타고
곤고한 발걸음
여기 이렇게 모여들었구나
아직 살아 있음을 더듬어 보는
여윈 손과 부르튼 입술
다하지 못한 사랑 그리워
서로 안고 뒹구는 구나
어디쯤 왔을까
얼마나 가야할까
짓이겨진 육신 높다랗게 걸어두고
남영동의 그 비명만 이리로 보낸
아름다운 이여
우리 어린 자식들의 웃음소리
언제나 되찾을까.

그러나 우리
살아 있음을 서로 부끄러워 함으로,
죽음을 건너 그이가 건진
노동의 힘찬 망치질 소리
우리 가슴 다긋히 두들김으로
해방의 모진 뚬은
곤고한 발길을 멈추지 않는구나
지친 깃발들 일으켜 세우는 구나

다시 시작하자
부르튼 입술 부벼대며
다시 시작하자
짓이겨진 육신 서로 안아 세우며
다시 시작하자
다시 우리 시작하자
(주석 19)

주석
18> 앞의 책, 103쪽.
19> <민주화의 길>, 제12호,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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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8 08:00 김삼웅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낙후된 것은 정치군부로서, 국민은 정치군부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이른바 30인 위원회 등으로 해서 민주화운동이 지도자, 국민을 협박하고 다시 70년대 긴급조치 시대로 돌아가고자 했던 저 학원안정법 망령 속에서 우리는 정치군부의 국민들에 대한 협박을 명백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정치군부가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폭력적 탄압을 중지해야만 한다.
민주화운동은 소수 개인 몇 사람에 의해서 조속히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올바른 방향일 뿐 아니라 이러한 운동을 더욱 격화시키고 자극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정치군부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정치군부는 이제 본래 자기 집으로, 군대로 병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민주화의 최소한도의 필요조건은 군부의 정치적 중립화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민간권력의 창출이 요청되는 것이다. 정치군부가 자기의 특권적 이해관계를 계속 주장하는 한 이러한 자신의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 모든 혼란의 가장 중심적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군부는 더 이상 국민의 군대를 출동시켜서, 이른바 지휘계통을 발동시켜서 국민의 뜨거운 민주화 열정을 그리고 국민의 붉은 가슴에, 빈가슴에 총칼을 겨누는 만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국민의 군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군대이다. 그리고 군대의 대부분의 구성원은 정치군부가 아니라 국민의 형제 자매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 다시 국민의 군대를 출동시켜서 국민의 맨가슴에 적대행위를 명령한다면 군대는 복종하지 않고 저항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모두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용기를 내어 결단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나는 오늘 무엇을 하였으며,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두 다시 반성해야 되고 이러한 민주화 실현을 위해 그 누구도 면제되고 제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민주화가 이룩되는 날, 우리는 “나는 민주화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당신은 민주화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를 서로 반문하고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45년, 해방이 된 사회에서 어느 친일도배는 “잔악한 일제 치하에서 일제에 부역하지 않은 사람이 그 누가 있느냐?”고 얘기했는데, 민주화가 실현되는 날 우리는 이러한 의문과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는 결단하고 실천할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먼저 우리는 단순한 심정적 이해와 동조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이 모두가 우리의 의무, 책무이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국민 모두는 실천대열에 나서야 한다. 본인은 체포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저 시켜서 하는 거죠. 밥을 먹고 살려니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고충을 이해해 주십시오”라는 등의 얘기를 들었다. 바로 그런 속에서 정치군부는 자신의 이익과 이해를 관철시켰던 것이다. 더 이상 그러한 얘기가 나오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국민 각계각층에서는 각자 자기 있는 곳에서 정치군부의 퇴진과 민주제 개헌을 위한 조직과 선전에 참여해야 한다. 민주화는 몇몇 전위대열에 선 운동가에게 돌아가는게 아니라 모두의 자유와 안전을 획득하는 길이므로 모두의 의무이며, 운동과 조직에의 참여가 유일한 길이다.

셋째, 이런 과정에서 생기는 불행과 고통에 대해 서로 격려하여 낙오되지 않게 해야 한다. 구치소에 많은 사람이 투옥되어 있는데 앞으로 전국의 교도소가 민주화운동에의 참여로 가득 찰 지도 모르며 가득차는 날 민주화가 실현될 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단하고 일어서야 한다.

끝으로 미국 행정부가 80년 5월의 과오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고를 보내야 한다.
80년 5월의 미국의 정책은 명백한 과오이며 우리 사회 민주화 실현을 저해하는 일이었음을 전달하고 미국에 있는 양심적 인사들과 연대, 지원하여 공통의 목표실현을 확인해야 한다.

이제 본인은 징역을 산다.
높은 담과 부자유, 징역의 외로움과 슬픔을 뚫으며 살 것이다. 쇠창살 너머 하늘의 별에서 윤동주 시인의 눈물을 만나며 이 징역을 살 것이다. 85년 9월 정치군부의 고문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회복하는 과정으로서 징역을 살 것이다. 80년 5월 부릅 뜬 눈으로 정치군부의 총칼에 의해 아스팔트에 쓰러졌던 망월동 시민들의 원혼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징역을 살 것이다. 이 징역 속에서 민주화의 그날을 꿈꾸며 징역을 깨면서 살 것이다. (주석 17)

주석
17> 앞의 책, 164~171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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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7 08:00 김삼웅

 

엉터리 재판은 진행되어서 1986년 3월 16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법 178호 법정에서 1심 공판이 열렸다. 여전히 방청인은 제한되고, 언론은 외면하거나 정부발표문만을 받아 쓰는 상태였다.

김근태는 최후진술을 활용하기로 하였다. 다른 기록은 훔쳐가고 날조해도 법정의 최후진술만은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치군부의 하수인이 된 법원이 양심껏, 소신껏 판결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긴 감옥살이를 각오하면서 당당하게, 준열하게 진술하였다. 결기 넘치는 진술이었다. 주요 부문을 발췌한다.

본인의 이 사건은 두 개의 잘못된 가정과 정치군부의 보복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오늘날의 민주화 열기가 김근태와 민청련에 의해 초래되었으며
둘째, 광범하게 발생하고 있는 정치군부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의 배후는 명백히 존재하며 그것은 분명히 김근태일 것이라는 단정적인 가정하에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만들어 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정치군부의 범죄행위와 은폐행위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본인의 이 사건에 대해서 재판부는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본인의 사건과 고문 및 은폐행위를 두 개의 사건으로 분리해서 접근한다면, 또한 실체적 진실과 이러한 범죄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는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시대를 10여년 이상 지내며 살아왔는데, 당시 독재자들은 이른바 국가안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사람을 교도소와 감옥, 고문장으로 보냈다. 그 때 법원은, 법관은 이를 합리화시키고 추인, 협력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지난 80년 5월 17일을 전후하여 암담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이 좌절과 공포로 보낼 때도 정치군부는 또 다시 이른바 국가변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많은 사람들을 교도소로 보냈으며, 그 때도 법원과 법관들은 이를 무기력하게 추인하고 협력하였다.

85년 중반 이후 본인이 있는 서울구치소에는 200여명 이상의 많은 수인들로 꽉 찼는데, 이 나이어린 학생들이 본 구치소에 구속된 것은 법관이 발부한 영장에 의해서이다.

본인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배웠는데, 그런데 그 분들 중의 일부가 일제의 탄압과 생활고로 인해 좌절하고 일제의 폭거에 침묵하고 나아가 그들의 주구배가 된 것에 인간적으로 부분적으로는 이해하지만 한편으로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의심이 갔었다.


또한 70년대 암흑과 같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독재에 항거했는데, 그 과정에서 투옥되고 박해받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당시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대열에서 멀어져 가고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며 ‘왜 극복하지 못할까?’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과 그 후의 마음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되돌아보며 우리가 지배자들의 조직적 폭력과 박해를 뚫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 되며 용기 있는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나아가 본인은 이러한 70년대에 한번 투옥되면 원 스타, 세번 투옥되면 쓰리 스타가 되는,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어떤 의미에서는 어깨에 힘을 주는 이러한 민주인사들에 대해 이해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꼭 마땅하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적 박해와 폭력적 탄압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이 시대의 운명과 더불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로부터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 인간은 정치군부의 폭력적 탄압에 굴복하고 좌절할 수도 있다. 본인은 체포된 이래 수많은 굴종을 강요당했다. 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아니 고통 없이 죽여달라고 빌기도 했다. 그리고 조그마한 저항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또 다시 저들에게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다시 지금 본인은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가 있기 때문에 다시 민주화 대열에 한 사람으로서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있다.

그러나 김근태가 민주화 대열에서 당한 고난이 우리 사회에서 열 명 그리고 새로운 백여 명의 민주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창출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민주화 운동은 이미 폭력적 탄압 아래서 굴복하고 좌절해 가는 사람 숫자를 열 배, 스무 배로 보충하고도 남을 충분한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동조하는 배후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80년 5ㆍ17과 광주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 새로운 민주화 열기를 고조시키고 물러설 수 없는 민주화 실현의 몇 단계를 진행해 온 것을 봐서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군부는 이른바 국가안보를 운위할 자격이 없다. 자신들의 특권유지와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부전선을 비운 채 서울로 진격했으며 국민의 군대의 보안을 유지해야 될 보안사령부가 국민을 탄압하고 민주적 질서를 기본적으로 훼손시키는 장치로 기여하고 역할을 한 정치군부가 오늘날 국가안보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정치군부는 헌정질서를 얘기할 자격이 없다. 참모총장 공판과 국방부에 총질을 하여 민주적 기본질서를 기본적으로 유린한 자들이 얘기하는 헌정질서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정치군부의 특권에 대한 보호를, 정치군부에 대한 이의제기를 짓밟고 오직 굴종, 폭력적 탄압을 합법화시키고자 하는 하나의 정치적 언어에 불과한 것이다.


세번째, 정치군부는 이른바 법의 지배와 폭력적 파괴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80년 5ㆍ17 이후 저 광주에서 빈손, 맨주먹과 맨가슴의 무고하고 선량한 시민들에게 총칼을 겨누고 총탄을 퍼 부은 자들이 어떻게 법과 평화의 지배를 애기할 수 있겠는가?

네번째, 정치군부는 민생의 문제나 경제건설 문제를 말할 자격이 없다.
79년 12.12, 80년 5ㆍ17 이후 현 정치군부는 전대미문의 권력형 부정부패를 점철시켜 왔고, 이른바 장영자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부정부패 속에 휩싸여 왔으며, 이외에도 갖가지 소문과 풍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반민중적인 작태가 진행되었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민생문제와 경제건설을 위해서 민주화를 유예하고 연기해야 된다는 것을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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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6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재판은 엉터리로 진행되었다.
‘엉터리’의 표현에는 재판정 밖에서, 그러니까 어용화된 언론에서 ‘김근태 죽이기’의 보도가 연일 신문과 방송에 터져 나온 것까지 포함된다. 신군부는 이른바 ‘협조’ 명목으로 신문사 사주, 편집국장을 협박하여 남영동 경찰관들의 고문사실을 보도하지 못하게 막았다. 재판은 언론을 동원하여 좌경으로 용공몰이를 하면서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어용 보도기관인 KBS와 연합통신을 동원하여 사실을 왜곡ㆍ날조함으로써 사전에 관제여론재판을 강행하려 시도하였으며, 그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고문 사실의 일부가 노출된 이후 KBS 등은 더욱 기승을 부렸는데, 이것은 맞붙어 자름으로써 고문은폐 효과를 거두고 의도된 정치보복을 최종적으로 완수코자 한 것이었다. 서 성 판사는 공판정에서 이 사건이 신문, 방송에 보도된 것과는 다르다고 말하였다. 그것에서 만들어진 편견에서 해방되느라고 무척 힘들었다는 의미의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정치군부와 관제언론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강요된 편견 속을 헤매었으며, 남영동에서 각색된 피묻은 서류에 파묻혀 영원히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서 성 판사를 비롯하여 재판부 전원이 아주 깊숙이 침몰되어 버린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예단과 편견 배제의 원칙을 저버리고, 공정성을 잃어버림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연합통신 제공으로 반(半) 강요된 기사가 각 일간 신문에 획일적으로 크게 보도되었고, 뉴스 시간에 여러 번, 거기다가 2회에 걸쳐 40여 분짜리 특집기획물까지 (나 개인에 대한 것을) 만들어 KBS는 방영하였다.
(주석 15)

서성 판사는 제1회 공판 때부터 방청인수를 대폭 제한하여 민청련 회원 등의 방청을 막았으며, 그나마 허용된 방청인은 대부분 기관원으로 채우는 등 법관으로서의 기본적 양식도 지키지 않았다. 서성은 증인 심문에서도 판사의 공정성을 저버리고 유죄를 예단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증인에게 던지곤 하였다.

김근태는 부당하게 진행되는 재판과 장외에서 전개되는 언론기관의 인격학살에 대해 하염없이 분노하면서, 공판 사이 사이에 고문의 실상과 현재의 심경을 담은 <탄원서>를 썼다. 집필 허가를 신청한 지 40일 만에 간신히 허가 통지를 받았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구치소에서는 2부를 작성하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는 데도 김근태에게는 1부만을 작성하도록, 미리 쪽수가 매겨진 조서용지를 주었다. 김근태는 여차 하면 없애버릴 지 모른다고 우려하면서도 심혈을 기울여 집필했다. 그런데 예상대로였다. 애써 쓴 <탄원서>를 출정하는 시간에 누군가가 훔쳐가고 말았다.

일제식민통치자들보다 더한 야만의 짓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남겼고,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한용운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조선독립이유서>를 쓸 수 있었다. 김근태가 여러 날 고심하여 쓴 <탄원서>는 빼앗기고 말았지만, 마지막 부문은 생생하게 기억하였다.

맨 끝으로 고문을 당하며 속으로 통곡하고 지내온 지난 겨울, 이 가막소에서 나는 애정 넘쳐 있는 수많은 학생, 그리고 버림 받은 제소자들의 격려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그 때 두 겹 비닐 창문을 때리는 북풍에 견디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되뇌고 되뇌었다.

내 귀여운 아이들아
느이들 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애비가 어디 가서 오래 못 와도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
외로울 때는 엄마랑 들에도 나가 보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봐야지
바람이 차거들랑 옷깃 잘 여며
감기들지 않도록 조심도 하고.
(주석 16)


주석
15> <이제 다시 일어나>, 143쪽.
16> 앞의 책,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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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5 08:00 김삼웅

 


유신과 5공시대의 사법부는 독립성을 상실한 독재정권의 부속기관에 불과했다.
이들은 특히 민주ㆍ민족관련 사건에는 정부(검찰)의 뜻을 그대로 쫓았다. 시국사건에서 기소장과 판결문이 똑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근태 사건을 담당한 판사도 다르지 않았다. 판사는 변호인들의 증거보전청구를 간단히 기각했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의 김오수 판사다.

김근태는 12월 9일 변호인 접견봉쇄가 사라질 때까지 일주일에 2~3회 정도 검찰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때마다 변호인 접견이 허용되지 않는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말하고, 끝까지 묵비권으로 일관하였다.

우선 9월 26일 송치 당일 관련 검사들에게 발뒤꿈치 상처와 발등의 전기고문 흔적을 보이면서 조사하여 처벌을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또 진술거부를 철회하도록 종용을 받았을 때 나는 고문을 조사하여 처벌한다면, 검찰 요구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검찰은 두 개의 사건이기 때문에 고문도 조사하여 처벌해야겠지만 묵비를 중지하는 것이 나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었다. (주석 12)

12월 29일 김근태는 구술을 통하여, 그리고 부인과 변협소속 변호사들은 정식으로 정석모 내무장관, 박배근 치안본부장, 윤재호 대공분실장 외 7명의 수사관과 김원치 등 공안부검사 4명을 불법감금과 가혹행위,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고소한 지 3~4개월이 지나도록 조사의 흉내도 내지 않았다. 모두 한 통속이었다. 고소에 참여한 변호사는 대한변협 인권위원회 위원장 유택형과 부위원장 강신옥, 위원으로 변정수ㆍ강철선ㆍ조승형ㆍ조영래ㆍ홍성우ㆍ김철 등이다. 다음은 고발장이다.

1. 피해자 김근태는 학원안정법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혐의로 1985.8.24. 서울중부경찰서 형사에 의하여 체포되고 8.26. 경범죄 처벌법 제1조 44호 (유언비어 날조 유포금지) 위반으로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구류 10일에 유치명령 10일을 선고받아 8.26부터 9.4일까지 10일간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는데 구류기간이 만료되는 9.4. 5시 30분경 치안본부 직원이 서부경찰서에 와서 피구속자를 용산구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데리고 가서 그곳 5층 건물 5층 15호실에 가두었다.(구속영장은 9.7. 13시 30분에 발부되었다고 함)

2. 이와같이 대공 수사반에 연행되어 가서 그 곳에서 김 전무라고 불리우는 사람(경정 또는 경감인 듯)의 지휘 아래 8명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는데 연행되던 날(9.4) 6시 30분부터 7시 사이에 “진술을 거부하겠느냐”고 묻기에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대답하자 김 전무는 “해볼테면 해보라 깨수부겠다”고 하면서 얼굴을 때리는 한편 (아프지는 않게 모욕적으로) 다른 직원에게 고문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약 30분간 무릎을 꿇게 했다.

이때 여러 명이 “죽여 버려라”는 등 소리를 지르고 겁을 주다가 8시 경부터 소위 물고문을 시작했는데, 옷을 홀랑 벗기고 눈을 가리고 고문대 (높이 1미터 남짓되고, 길이 1미터 70~80 센티이며, 어른 어깨넓이의 바닥이 각목으로 된 평상)에 등을 대고 눕게 한 다음 발목, 무릎, 허벅지, 배, 가슴 등 다섯 군데를 벨트로 고문대에 동여매고, 목을 약간 뒤로 저치게 하고 코와 눈을 두꺼운 수건으로 씌우고 나서 그 수건위에다 샤워기로 물을 쏟아붓기 시작하더니 물의 분량을 점점 늘려가면서 나중에는 주전자물을 함께 부었다.

이때 피구속자는 숨이 끊어질 것 같고 그 고통이 견딜 수 없었지만 소리도 지를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사뭇 견디다 못해 묶인 채 비틀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팔뒤꿈치와 발뒤꿈치가 고문대의 각목 바닥에 마찰되어 살이 찢어졌다. (아직도 적갈색의 흉터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보여줌)

이러한 고문은 8시 경부터 13시 경까지 5시간 동안 계속됐으며 13시 경 고문대에서 풀고 민청련의 결성시기, 간부 이름 등을 물었다. 그리고 나서 저녁을 굶긴 채 또 다시 19시 30분 경부터 그 다음날(9.5) 0시 30분 경까지 5시간 동안 오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물고문을 하였는데 저녁 고문시에는,

첫째, 피구속자가 폭력혁명을 목적함을 시인하라.
둘째, 피구속자가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시인하라.
셋째, 오늘의 혼란 상황은 민청련과 피구속자 김근태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민청련과 김근태의 지시에 따라 과격하게 움직이는 선을 대라고 하면서 고문을 계속했다.

3. 그 다음 날인 1985. 9.5.20시 경부터 다음날(9.6.) 1시 30분 경까지 또 다시 어제와 같이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 고문을 하였는데 이때에는 주로 전기고문을 하고 물고문을 병행했다. 고문대 위에 뉘어서 묶어놓고 발에는 전선이 들어있는 붕대를 감고 발가락 사이에 전기코드를 꽂고 발, 사타구니, 가슴, 목, 머리에 물을 붓고 먼저 물고문을 한 다음 전기를 통하게 했다. 처음에는 전력을 약하고 시간을 짧게 하다가 차츰 높은 전력을 길게 보냈으며, 이러한 고문을 의식을 잃지 않을 정도로 계속하면서 폭력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시인하라고 요구했다.

4. 1985. 9. 6.도 어제와 같은 시간에 (20시부터 다음날 1시 30분 경까지) 거의 비슷한 전기 및 물고문을 하였는데 이 때에는 배후 관계를 대라고 추궁했다.

5. 1985. 9. 8. 10시 경부터 15시 경까지 5시간 동안 19시부터 24시까지 5시간 동안 전날과 같은 전기 및 물고문을 했다. 이 때에는 배후관계를 추궁하면서 북한도 다녀왔고, 북한에 있는 형들과 만나고 왔다고 전혀 허무맹랑한 사실을 시인하라고 하므로 견디다 못해 시키는 대로 시인했다.

6. 1985. 9.10. 9시부터 12시 경까지 전기봉 고문 (전기가 몸에 직접 통하지 않고 발에 통증만 오게 한다) 물고문을 하면서 이제까지 허위자백한 것을 복습시켰다.

7. 1985. 9. 13. 23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 30분까지 4시간 30분간 그리고 새벽 3시부터 6시 경까지 3시간 전기봉 고문과 물고문을 병행하면서 재정문제와 배후관계를 추궁하였다. 9.13, 밤 고문시에는 오늘이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면서 고문을 했다. 견디다 못하여 함세웅 신부가 배후 인물이라고 진술하자 그러면 함세웅 신부를 배후인물로 하자고 서로 합의를 보았다.

8. 1985. 9. 20. 20시경 부터 24시 경까지 4시간 동안 9.5에 있었던 것과 같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하였다. 이 때에는 그 동안에 허위진술 한 것을 총복습하였다.

9. 1985. 9.25. 아침 5시 김 전무라는 사람이 문용식과의 관계를 묻기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부인하자, 팔 뒤꿈치로 10여 차례 가슴을 가격하였다. 결국은 견디다 못해 문용식의 자술서를 보고 그대로 베꼈다.

10. 1985. 9. 4.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 수사단 (피구속자의 진술에 의한 것이므로 과연 그러한 수사기관이 틀림없는지는 알 수 없음)에 연행되어 가서 1985. 9. 26.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피구속자 김근태가 당하였다는 고문의 실상은 이상과 같은 바,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9.13. 이후 지금까지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 되어 밥을 먹지 못하고 죽을 먹고 있으며, 온 몸이 아프고 기운이 없어 걷지도 못한다고 하며, 교도관의 말도 김근태는 몸이 불편하여 잘 걷지도 못하여 감방에서 변호인 접견실까지 나오자면 30분도 더 걸린다고 함. (주석 13)

다음은 부인 인재근이 검찰에 제출한 호소문이다.

부인 인재근의 호소문

치안본부에서 고문당한 남편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저는 민청련 초대의장이며, 자문위원인 김근태 씨의 아내입니다.
김근태 씨는 지난 9월 4일 5시 30분 경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의해 강제 납치되어 9월 7일 국보법위반으로 구속되었고, 20여 일 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고 안타까워만 했던 저는 26일 오후 2시 30분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에서 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오는 남편을 본 순간 반가움과 함께 놀라움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남편에게 “많이 다쳤어요”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남편은 “굉장히 당했어”, “굉장히 당했어!”를 되풀이 했습니다. 9월 4일, 8일, 13일 각각 두차례씩, 5일, 5일 각 한차례씩, 20일~26일까지 열 차례 온몸을 꽁꽁 묶어놓고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물 먹이기, 소금물 먹이기 등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을 거의 재우지 않고, 고문한 날은 밥을 주지 않아 꼬박 굶었다고 합니다.

검찰청 5층에서 4층 대기실까지 내려가는 동안 남편이 저에게 발뒤꿈치를 보여 주었습니다. 짓이겨진 그의 발뒤꿈치와 발등은 저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습니다. 옷을 입고 있어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온몸에도 상처투성이고, 특히 팔꿈치는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20일 이후 26일까지 치료를 하여 많이 나은 상태가 그 정도이니 그 당시 그는 사경을 헤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더욱 공포에 떨게 한 것은 검찰청 5층 521호 김원치 검사실에서 남편이 검취를 받고 나오면서 전해 준 옷 보따리에 그동안 세 차례에 걸쳐 전달했던 속옷을 하나도 전달받지 못하고 겉옷 두 벌만 전달해 준 사실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분명히 남편의 속옷은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남편의 고문상처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제가 검찰청으로 가지고 간 내의를 구치소에서만 갈아입도록 했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악랄하게 고문하고 이런 사실을 감출 수 있는 허가 받은 폭력 깡패집단이 이 나라에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이 엄청난 고문을 자행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도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고 떠드는 자는 누구입니까?

악랄한 고문을 통해서 죄를 조작하는 수사기관이야말로 폭력죄로 처단해야 합니다. 이는 저와 남편만의 고통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고통이며 민주화를 갈망하는 모든 국민에 대한 협박이며 도전입니다.

자유를 열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호소합니다.
치가 떨리는 이 고문만행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일곱 살 난 아들에게 저는 이 무서운 세상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주석 14)


주석
12> 김근태, <이제 다시 일어나>. 131쪽.
13> <1985년 인권보고서>, 72~73쪽.
14> 인재근 강연자료집, <엄마가 뿔났다>, 62~63쪽, 한반도재단여성위원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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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4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2월 20일, 그러니까 공소가 제기되고도 한달 반 이상이 지난 뒤에야 가족 면회가 이루어졌다. 검찰은 물론 담당 판사인 서성이 “죄증을 인멸할 상당한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가족 면회를 못하게 한 것이다.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은 검찰청사에서 남편의 고문 사실을 알고, 이것을 세상에 폭로하면서 권력층은 이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자 가족의 면회까지 막은 것이다.

85년 12월 13일 변호사 접견이 고의적으로 봉쇄된 것이 풀린 지 닷새가 되던 날, 나는 흥분하여 깊숙이 간직해 두었던 양쪽 발뒤꿈치에서 아물어 떨어진 상처 딱지를 이돈명 변호인, 목요상 의원에게 드리면서 재판의 증거로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이 통할 리 있겠는가. 행형법(行刑法)상 교도관 입회라는 것을 이용하여 간섭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제지당하고 결국은 강탈당하고 말았다. (주석 10)

김근태의 고문 상처 딱지는 그가 검찰에 출정하는 사이 교도관들이 방을 샅샅이 뒤져 화장지 틈새에 끼워 놓았던 것을 훔쳐갔다. 증거인멸을 위해서였다. 김근태의 변호인들은 증거보전신청과 아울러 증거 보전기일에 관한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하였다.

다음

1. 이 사건 증거보전의 필요성
피의자는 사법경찰관의 수사과정에서 고문 특히 10회 가량의 전기고문을 받아 현재 그 흔적으로서,

ㄱ) 양발뒷굼치에 직경 21센티 가량의 원형 피부결손 및 찰과상의 반혼. 이는 전신을 묶인 상태에서 격심한 고통 때문에 발을 한없이 비틀게 된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상혼으로 보임.

ㄴ) 양팔의 발가락 가까운 쪽 발등에 10여 개의 찔린 흔적
이는 전기쇼크를 주기 위하여 사지의 끝부분 전선에 연결된 어떠한 형태의 침을 찌를 때 생긴 상흔으로 보임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상흔은 시일경과에 따라 치유되기 마련이므로 그 상흔을 검증해 보고 이와 동시에 그 상흔이 언제 생긴 것인지를 감정케하는 것이 바로 이 증거보전의 필요성입니다. 이와 같은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는 증거법 및 적법절차 문제에 관하여 피의자의 방어권행사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증거방법입니다.

2. 신체검증을 즉시하여야 하는 이유

(1) 이 사건 증거보전신청을 85. 10. 2. 오후에 제출한 바, 아직도 증거보전기일이 지정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사건과 같은 증거보전이야말로 절박한 것인데 피의자가 최후로 고문받았다는 날인 85.9.20. 이후 지금까지 15일이 경과된 바, 이제 며칠만 지나면 위 상흔이 치유로 인하여 없어질 우려가 매우 큽니다.

만일 신체감정을 위한 감정인 선정 때문에 시일이 지연된다고 한다면 적어도 이 사건 증거보전기일을 선후로 나누어서 급박한 신체검증을 먼저 하고 다음으로 감정인 선정 즉시 감정을 하는 방법이 매우 긴요하게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2) 이 사건 증거보전의 필요성 및 이유를 감안하여 우선 즉시 신체검증의 기일을 지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 기일통지에 관한 항변권의 포기
변호인들에 대한 기일통지 역시 서면에 의할 필요가 없어 변호인들 중 어느 1인에게라도 전화통지를 하면 이에 대하여 변호인들 전원명의의 기일통지영수증서를 작성할 것이며 이에 관한 절차상의 항변을 사전에 포기하는 바입니다.

1985.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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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3 08:00 김삼웅

 

김근태를 간첩으로 만들고자 그의 동료들을 붙잡아다가 고문하면서 조작한 증언이 재판과정에서 속속 드러났다. 서울구치소에서 김근태는 수없이 검찰에 불려가 똑같은 조사를 받았다. 변호인단은 12월 24일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서울 구치소 변호인 접견에서 김근태를 만날 수 있었다. 이 감옥에 수감된 지 3개월 반만이다. 다음은 변호인단이 접견하고 대한변협 회장(김은호)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김근태의 증언과 중복되는 부분이지만 변협의 보고서이기에 재록한다.

1. 피구속자는 학원안정법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혐의로 1985. 8. 24.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에 의하여 체포되고, 8. 26. 경범죄 처벌법 제1조 44호 (유언비어 날조 유포금지) 위반으로 즉결 심판에 회부되어 규류 10일에 유치명령 10일을 선고받아 8.26부터 9. 4까지 10일간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는데 구류 기간이 만료되는 9.4. 5시 30분경 치안본부 직원이 서부 경찰서에 와서 피구속자를 용산구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데리고 가서 그곳 5층 건물 5층 15호실에 가두었다.(구속영장은 9. 7. 13시 30분에 발부되었다고 함)

2. 위와같이 대공수사단에 연행되어 가서 그곳에서 김 전무라고 불리우는 사람(경정 또는 경감인듯)의 지휘아래 8명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는데 연행되던 날(9.4) 6시 30분부터 7시 사이에 “진술을 거부하겠느냐”고 묻기에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대답하자 김 전무는 “해볼테면 해보라 깨부수겠다”고 하면서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한편 (아프지는 않게 모욕적으로)다른 직원에게 고문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약 30분간 무릎을 꿇게 했다.

이때 여러 명이 “죽여 버려라”는 등 소리를 지르고 겁을 주다가 8시경부터 소위 물고문을 시작하였는데, 옷을 홀랑 벗기고 눈을 가리고 고문대 (높이 1미터 남짓되고, 길이 1미터 70~80 센티되며, 어른 어깨넓이의 바닥이 각목으로 된 평상)에 등을 대고 눕게 한 다음 발목, 무릎, 허벅지, 배, 가슴 등 다섯 군데를 벨트로 고문대에 동여메고, 목을 약간 뒤로 저치게 하고 코와 눈을 두꺼운 수건으로 씌우고 나서 그 수건위에다 샤워기로 물을 쏟아붓기 시작하더니 물의 분량을 점점 늘려가면서 나중에는 주전자물을 함께 부었다.

이때 피구속자는 숨이 끊어질 것 같고 그 고통이 견딜 수 없었지만 소리도 지를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사뭇 견디다 못해 묶인 채 비틀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팔뒤꿈치와 발뒤꿈치가 고문대의 각목 바닥에 마찰되어 살이 찢어졌다. (아직도 적갈색의 흉터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보여줌) 이러한 고문은 8시경부터 13시경까지 5시간 동안 계속됐으며 13시경 고문대에서 풀고 민청련의 결성시기, 간부 이름 등을 물었다. 그리고 나서 저녁을 굶긴 채 또 다시 19시 30분경부터 그 다음날 (9.5) 0시 30분경까지 5시간 동안 오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물고문을 하였는데 저녁 고문시에는,

첫째, 피구속자가 폭력혁명을 목적함을 시인하라.
둘째, 피구속자가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시인하라.
셋째, 오늘의 혼란 상황은 민청련과 피구속자 김근태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민청련과 김근태의 지시에 따라 과격하게 움직이는 선을 대라고 하면서 고문을 계속했다.

3. 그 다음 날인 1985. 9.5.20시 경부터 다음날(9.6.) 1시 30분 경까지 또 다시 어제와 같이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 고문을 하였는데 이 때에는 주로 전기고문을 하고 물고문을 병행했다. 고문대 위에 뉘어서 묶어놓고 발에는 전선이 들어있는 붕대를 감고 발가락 사이에 전기코드를 꽂고 발, 사타구니, 가슴, 목, 머리에 물을 붓고 먼저 물고문을 한 다음 전기를 통하게 했다. 처음에는 전력을 약하고 시간을 짧게하다가 차츰 높은 전력을 길게 보냈으며, 이러한 고문을 의식을 잃지않을 정도로 계속하면서 폭력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시인하라고 요구하였다.

4. 1985. 9. 6.도 어제와 같은 시간에(20시부터 다음날 1시 30분 경까지) 거의 비슷한 전기 및 물고문을 하였는데 이 때에는 배후 관계를 대라고 추궁했다.

5. 1985. 9. 8. 10시 경부터 15시경까지 5시간 동안 19시부터 24시까지 5시간 동안 전날과 같은 전기 및 물고문을 했다. 이 때에는 배후관계를 추궁하면서 북한도 다녀왔고, 북한에 있는 형도 만나고 왔다고 전혀 허무 맹랑한 사실을 시인하라고 하므로 견디다 못해 시키는 대로 시인했다.

6. 1985. 9. 10. 9시부터 12시 경까지 전기봉 고문 (전기가 몸에 직접 통하지 않고 발에 통증만 오게 한다) 물고문을 하면서 이제까지 허위자백한 것을 복습시켰다.

7. 1985. 9. 13. 23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 30분까지 4시간 30분간 그리고 새벽 3시부터 6시 경까지 3시간 전기봉고문과 물고문을 병행하면서 재정문제와 배후관계를 추궁하였다. 9.13, 밤 고문시에는 오늘이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면서 고문을 했다. 견디다 못하여 함세웅 신부가 배후 인물이라고 진술하자 그러면 함세웅 신부를 배후인물로 하자고 서로 합의를 보았다.

8. 1985. 9. 20. 20시 경부터 24시 경까지 4시간 동안 9.5에 있었던 것과 같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하였다. 이 때에는 그 동안에 허위진술한 것을 총복습하였다.

9. 1985. 9.25. 아침 5시 김 전무라는 사람이 문용식과의 관계를 묻기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부인하자 팔꿈치로 10여 차례 가슴을 가격하였다. 결국은 견디다 못해 문용식의 자술서를 보고 그대로 베꼈다.

10. 1985. 9. 4.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피구속자의 진술에 의한 것이므로 과연 그러한 수사기관이 틀림없는지는 알 수 없음)에 연행되어 가서 1985. 9. 26.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피구속자 김근태가 당하였다는 고문의 실상은 이상과 같은 바, 그는 고문 휴유증으로 9.13. 이후 지금까지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되어 밥을 먹지 못하고 죽을 먹고 있으며, 온몸이 아프고 기운이 없어 걷지도 못한다고 하며 교도관의 말도 김근태는 몸이 불편하여 잘 걷지도 못하여 감방에서 변호인 접견실까지 나오자면 30분도 더 걸린다고 함. 그리고 피구속자의 전술 태도로 보아서 그의 진술은 보탬도 없고 꾸밈도 없는 진실로 인정됨.

11. 변협 조사위원은 이상과 같이 보고 하는 바, 이 나라에 명색이 법이 있고, 인권옹호를 그 직무로 한다는 검찰과 법원이 있으며, 인권옹호를 사명으로 한다는 변호사 단체들이 엄연히 있는 마당에 어떻게 독재 국가나 팟쇼 정권 아래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러한 잔인 무도한 가혹행위가 사법경찰에 의하여 자행될 수 있는 것인지 몸서리 처지며,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임(더구나 1985. 9. 4.부터 9. 6까지의 고문은 구속영장도 없는 불법구속 상태에서 자행된 것임) 직접 고문을 자행한 경찰관에 대하여는 직권 남용(형법 제125조 소정의 폭행, 가혹행위죄)으로 고발해야 할 것이고, 검찰이 사후에 이를 알고도 형사 입건하지 아니하고 고문 경찰을 묵인하였다면 담당검사에 대하여는 직무유기죄로 고발하여야 할 것이며, 경찰 최고책임자에 대하여도 단호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으로 생각됨. (주석 9)


주석
9> 앞의 책, <1985년 인권보고서>, 6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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