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3 08:00 김삼웅

 

김근태를 간첩으로 만들고자 그의 동료들을 붙잡아다가 고문하면서 조작한 증언이 재판과정에서 속속 드러났다. 서울구치소에서 김근태는 수없이 검찰에 불려가 똑같은 조사를 받았다. 변호인단은 12월 24일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서울 구치소 변호인 접견에서 김근태를 만날 수 있었다. 이 감옥에 수감된 지 3개월 반만이다. 다음은 변호인단이 접견하고 대한변협 회장(김은호)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김근태의 증언과 중복되는 부분이지만 변협의 보고서이기에 재록한다.

1. 피구속자는 학원안정법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혐의로 1985. 8. 24.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에 의하여 체포되고, 8. 26. 경범죄 처벌법 제1조 44호 (유언비어 날조 유포금지) 위반으로 즉결 심판에 회부되어 규류 10일에 유치명령 10일을 선고받아 8.26부터 9. 4까지 10일간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는데 구류 기간이 만료되는 9.4. 5시 30분경 치안본부 직원이 서부 경찰서에 와서 피구속자를 용산구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데리고 가서 그곳 5층 건물 5층 15호실에 가두었다.(구속영장은 9. 7. 13시 30분에 발부되었다고 함)

2. 위와같이 대공수사단에 연행되어 가서 그곳에서 김 전무라고 불리우는 사람(경정 또는 경감인듯)의 지휘아래 8명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는데 연행되던 날(9.4) 6시 30분부터 7시 사이에 “진술을 거부하겠느냐”고 묻기에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대답하자 김 전무는 “해볼테면 해보라 깨부수겠다”고 하면서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한편 (아프지는 않게 모욕적으로)다른 직원에게 고문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약 30분간 무릎을 꿇게 했다.

이때 여러 명이 “죽여 버려라”는 등 소리를 지르고 겁을 주다가 8시경부터 소위 물고문을 시작하였는데, 옷을 홀랑 벗기고 눈을 가리고 고문대 (높이 1미터 남짓되고, 길이 1미터 70~80 센티되며, 어른 어깨넓이의 바닥이 각목으로 된 평상)에 등을 대고 눕게 한 다음 발목, 무릎, 허벅지, 배, 가슴 등 다섯 군데를 벨트로 고문대에 동여메고, 목을 약간 뒤로 저치게 하고 코와 눈을 두꺼운 수건으로 씌우고 나서 그 수건위에다 샤워기로 물을 쏟아붓기 시작하더니 물의 분량을 점점 늘려가면서 나중에는 주전자물을 함께 부었다.

이때 피구속자는 숨이 끊어질 것 같고 그 고통이 견딜 수 없었지만 소리도 지를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사뭇 견디다 못해 묶인 채 비틀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팔뒤꿈치와 발뒤꿈치가 고문대의 각목 바닥에 마찰되어 살이 찢어졌다. (아직도 적갈색의 흉터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보여줌) 이러한 고문은 8시경부터 13시경까지 5시간 동안 계속됐으며 13시경 고문대에서 풀고 민청련의 결성시기, 간부 이름 등을 물었다. 그리고 나서 저녁을 굶긴 채 또 다시 19시 30분경부터 그 다음날 (9.5) 0시 30분경까지 5시간 동안 오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물고문을 하였는데 저녁 고문시에는,

첫째, 피구속자가 폭력혁명을 목적함을 시인하라.
둘째, 피구속자가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시인하라.
셋째, 오늘의 혼란 상황은 민청련과 피구속자 김근태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민청련과 김근태의 지시에 따라 과격하게 움직이는 선을 대라고 하면서 고문을 계속했다.

3. 그 다음 날인 1985. 9.5.20시 경부터 다음날(9.6.) 1시 30분 경까지 또 다시 어제와 같이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 고문을 하였는데 이 때에는 주로 전기고문을 하고 물고문을 병행했다. 고문대 위에 뉘어서 묶어놓고 발에는 전선이 들어있는 붕대를 감고 발가락 사이에 전기코드를 꽂고 발, 사타구니, 가슴, 목, 머리에 물을 붓고 먼저 물고문을 한 다음 전기를 통하게 했다. 처음에는 전력을 약하고 시간을 짧게하다가 차츰 높은 전력을 길게 보냈으며, 이러한 고문을 의식을 잃지않을 정도로 계속하면서 폭력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시인하라고 요구하였다.

4. 1985. 9. 6.도 어제와 같은 시간에(20시부터 다음날 1시 30분 경까지) 거의 비슷한 전기 및 물고문을 하였는데 이 때에는 배후 관계를 대라고 추궁했다.

5. 1985. 9. 8. 10시 경부터 15시경까지 5시간 동안 19시부터 24시까지 5시간 동안 전날과 같은 전기 및 물고문을 했다. 이 때에는 배후관계를 추궁하면서 북한도 다녀왔고, 북한에 있는 형도 만나고 왔다고 전혀 허무 맹랑한 사실을 시인하라고 하므로 견디다 못해 시키는 대로 시인했다.

6. 1985. 9. 10. 9시부터 12시 경까지 전기봉 고문 (전기가 몸에 직접 통하지 않고 발에 통증만 오게 한다) 물고문을 하면서 이제까지 허위자백한 것을 복습시켰다.

7. 1985. 9. 13. 23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 30분까지 4시간 30분간 그리고 새벽 3시부터 6시 경까지 3시간 전기봉고문과 물고문을 병행하면서 재정문제와 배후관계를 추궁하였다. 9.13, 밤 고문시에는 오늘이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면서 고문을 했다. 견디다 못하여 함세웅 신부가 배후 인물이라고 진술하자 그러면 함세웅 신부를 배후인물로 하자고 서로 합의를 보았다.

8. 1985. 9. 20. 20시 경부터 24시 경까지 4시간 동안 9.5에 있었던 것과 같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하였다. 이 때에는 그 동안에 허위진술한 것을 총복습하였다.

9. 1985. 9.25. 아침 5시 김 전무라는 사람이 문용식과의 관계를 묻기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부인하자 팔꿈치로 10여 차례 가슴을 가격하였다. 결국은 견디다 못해 문용식의 자술서를 보고 그대로 베꼈다.

10. 1985. 9. 4.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피구속자의 진술에 의한 것이므로 과연 그러한 수사기관이 틀림없는지는 알 수 없음)에 연행되어 가서 1985. 9. 26.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피구속자 김근태가 당하였다는 고문의 실상은 이상과 같은 바, 그는 고문 휴유증으로 9.13. 이후 지금까지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되어 밥을 먹지 못하고 죽을 먹고 있으며, 온몸이 아프고 기운이 없어 걷지도 못한다고 하며 교도관의 말도 김근태는 몸이 불편하여 잘 걷지도 못하여 감방에서 변호인 접견실까지 나오자면 30분도 더 걸린다고 함. 그리고 피구속자의 전술 태도로 보아서 그의 진술은 보탬도 없고 꾸밈도 없는 진실로 인정됨.

11. 변협 조사위원은 이상과 같이 보고 하는 바, 이 나라에 명색이 법이 있고, 인권옹호를 그 직무로 한다는 검찰과 법원이 있으며, 인권옹호를 사명으로 한다는 변호사 단체들이 엄연히 있는 마당에 어떻게 독재 국가나 팟쇼 정권 아래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러한 잔인 무도한 가혹행위가 사법경찰에 의하여 자행될 수 있는 것인지 몸서리 처지며,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임(더구나 1985. 9. 4.부터 9. 6까지의 고문은 구속영장도 없는 불법구속 상태에서 자행된 것임) 직접 고문을 자행한 경찰관에 대하여는 직권 남용(형법 제125조 소정의 폭행, 가혹행위죄)으로 고발해야 할 것이고, 검찰이 사후에 이를 알고도 형사 입건하지 아니하고 고문 경찰을 묵인하였다면 담당검사에 대하여는 직무유기죄로 고발하여야 할 것이며, 경찰 최고책임자에 대하여도 단호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으로 생각됨. (주석 9)


주석
9> 앞의 책, <1985년 인권보고서>, 62~65쪽.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