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5 08:00 김삼웅

 


유신과 5공시대의 사법부는 독립성을 상실한 독재정권의 부속기관에 불과했다.
이들은 특히 민주ㆍ민족관련 사건에는 정부(검찰)의 뜻을 그대로 쫓았다. 시국사건에서 기소장과 판결문이 똑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근태 사건을 담당한 판사도 다르지 않았다. 판사는 변호인들의 증거보전청구를 간단히 기각했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의 김오수 판사다.

김근태는 12월 9일 변호인 접견봉쇄가 사라질 때까지 일주일에 2~3회 정도 검찰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때마다 변호인 접견이 허용되지 않는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말하고, 끝까지 묵비권으로 일관하였다.

우선 9월 26일 송치 당일 관련 검사들에게 발뒤꿈치 상처와 발등의 전기고문 흔적을 보이면서 조사하여 처벌을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또 진술거부를 철회하도록 종용을 받았을 때 나는 고문을 조사하여 처벌한다면, 검찰 요구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검찰은 두 개의 사건이기 때문에 고문도 조사하여 처벌해야겠지만 묵비를 중지하는 것이 나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었다. (주석 12)

12월 29일 김근태는 구술을 통하여, 그리고 부인과 변협소속 변호사들은 정식으로 정석모 내무장관, 박배근 치안본부장, 윤재호 대공분실장 외 7명의 수사관과 김원치 등 공안부검사 4명을 불법감금과 가혹행위,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고소한 지 3~4개월이 지나도록 조사의 흉내도 내지 않았다. 모두 한 통속이었다. 고소에 참여한 변호사는 대한변협 인권위원회 위원장 유택형과 부위원장 강신옥, 위원으로 변정수ㆍ강철선ㆍ조승형ㆍ조영래ㆍ홍성우ㆍ김철 등이다. 다음은 고발장이다.

1. 피해자 김근태는 학원안정법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혐의로 1985.8.24. 서울중부경찰서 형사에 의하여 체포되고 8.26. 경범죄 처벌법 제1조 44호 (유언비어 날조 유포금지) 위반으로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구류 10일에 유치명령 10일을 선고받아 8.26부터 9.4일까지 10일간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는데 구류기간이 만료되는 9.4. 5시 30분경 치안본부 직원이 서부경찰서에 와서 피구속자를 용산구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데리고 가서 그곳 5층 건물 5층 15호실에 가두었다.(구속영장은 9.7. 13시 30분에 발부되었다고 함)

2. 이와같이 대공 수사반에 연행되어 가서 그 곳에서 김 전무라고 불리우는 사람(경정 또는 경감인 듯)의 지휘 아래 8명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는데 연행되던 날(9.4) 6시 30분부터 7시 사이에 “진술을 거부하겠느냐”고 묻기에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대답하자 김 전무는 “해볼테면 해보라 깨수부겠다”고 하면서 얼굴을 때리는 한편 (아프지는 않게 모욕적으로) 다른 직원에게 고문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약 30분간 무릎을 꿇게 했다.

이때 여러 명이 “죽여 버려라”는 등 소리를 지르고 겁을 주다가 8시 경부터 소위 물고문을 시작했는데, 옷을 홀랑 벗기고 눈을 가리고 고문대 (높이 1미터 남짓되고, 길이 1미터 70~80 센티이며, 어른 어깨넓이의 바닥이 각목으로 된 평상)에 등을 대고 눕게 한 다음 발목, 무릎, 허벅지, 배, 가슴 등 다섯 군데를 벨트로 고문대에 동여매고, 목을 약간 뒤로 저치게 하고 코와 눈을 두꺼운 수건으로 씌우고 나서 그 수건위에다 샤워기로 물을 쏟아붓기 시작하더니 물의 분량을 점점 늘려가면서 나중에는 주전자물을 함께 부었다.

이때 피구속자는 숨이 끊어질 것 같고 그 고통이 견딜 수 없었지만 소리도 지를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사뭇 견디다 못해 묶인 채 비틀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팔뒤꿈치와 발뒤꿈치가 고문대의 각목 바닥에 마찰되어 살이 찢어졌다. (아직도 적갈색의 흉터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보여줌)

이러한 고문은 8시 경부터 13시 경까지 5시간 동안 계속됐으며 13시 경 고문대에서 풀고 민청련의 결성시기, 간부 이름 등을 물었다. 그리고 나서 저녁을 굶긴 채 또 다시 19시 30분 경부터 그 다음날(9.5) 0시 30분 경까지 5시간 동안 오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물고문을 하였는데 저녁 고문시에는,

첫째, 피구속자가 폭력혁명을 목적함을 시인하라.
둘째, 피구속자가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시인하라.
셋째, 오늘의 혼란 상황은 민청련과 피구속자 김근태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민청련과 김근태의 지시에 따라 과격하게 움직이는 선을 대라고 하면서 고문을 계속했다.

3. 그 다음 날인 1985. 9.5.20시 경부터 다음날(9.6.) 1시 30분 경까지 또 다시 어제와 같이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 고문을 하였는데 이때에는 주로 전기고문을 하고 물고문을 병행했다. 고문대 위에 뉘어서 묶어놓고 발에는 전선이 들어있는 붕대를 감고 발가락 사이에 전기코드를 꽂고 발, 사타구니, 가슴, 목, 머리에 물을 붓고 먼저 물고문을 한 다음 전기를 통하게 했다. 처음에는 전력을 약하고 시간을 짧게 하다가 차츰 높은 전력을 길게 보냈으며, 이러한 고문을 의식을 잃지 않을 정도로 계속하면서 폭력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시인하라고 요구했다.

4. 1985. 9. 6.도 어제와 같은 시간에 (20시부터 다음날 1시 30분 경까지) 거의 비슷한 전기 및 물고문을 하였는데 이 때에는 배후 관계를 대라고 추궁했다.

5. 1985. 9. 8. 10시 경부터 15시 경까지 5시간 동안 19시부터 24시까지 5시간 동안 전날과 같은 전기 및 물고문을 했다. 이 때에는 배후관계를 추궁하면서 북한도 다녀왔고, 북한에 있는 형들과 만나고 왔다고 전혀 허무맹랑한 사실을 시인하라고 하므로 견디다 못해 시키는 대로 시인했다.

6. 1985. 9.10. 9시부터 12시 경까지 전기봉 고문 (전기가 몸에 직접 통하지 않고 발에 통증만 오게 한다) 물고문을 하면서 이제까지 허위자백한 것을 복습시켰다.

7. 1985. 9. 13. 23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 30분까지 4시간 30분간 그리고 새벽 3시부터 6시 경까지 3시간 전기봉 고문과 물고문을 병행하면서 재정문제와 배후관계를 추궁하였다. 9.13, 밤 고문시에는 오늘이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면서 고문을 했다. 견디다 못하여 함세웅 신부가 배후 인물이라고 진술하자 그러면 함세웅 신부를 배후인물로 하자고 서로 합의를 보았다.

8. 1985. 9. 20. 20시경 부터 24시 경까지 4시간 동안 9.5에 있었던 것과 같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하였다. 이 때에는 그 동안에 허위진술 한 것을 총복습하였다.

9. 1985. 9.25. 아침 5시 김 전무라는 사람이 문용식과의 관계를 묻기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부인하자, 팔 뒤꿈치로 10여 차례 가슴을 가격하였다. 결국은 견디다 못해 문용식의 자술서를 보고 그대로 베꼈다.

10. 1985. 9. 4.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 수사단 (피구속자의 진술에 의한 것이므로 과연 그러한 수사기관이 틀림없는지는 알 수 없음)에 연행되어 가서 1985. 9. 26.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피구속자 김근태가 당하였다는 고문의 실상은 이상과 같은 바,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9.13. 이후 지금까지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 되어 밥을 먹지 못하고 죽을 먹고 있으며, 온 몸이 아프고 기운이 없어 걷지도 못한다고 하며, 교도관의 말도 김근태는 몸이 불편하여 잘 걷지도 못하여 감방에서 변호인 접견실까지 나오자면 30분도 더 걸린다고 함. (주석 13)

다음은 부인 인재근이 검찰에 제출한 호소문이다.

부인 인재근의 호소문

치안본부에서 고문당한 남편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저는 민청련 초대의장이며, 자문위원인 김근태 씨의 아내입니다.
김근태 씨는 지난 9월 4일 5시 30분 경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의해 강제 납치되어 9월 7일 국보법위반으로 구속되었고, 20여 일 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고 안타까워만 했던 저는 26일 오후 2시 30분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에서 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오는 남편을 본 순간 반가움과 함께 놀라움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남편에게 “많이 다쳤어요”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남편은 “굉장히 당했어”, “굉장히 당했어!”를 되풀이 했습니다. 9월 4일, 8일, 13일 각각 두차례씩, 5일, 5일 각 한차례씩, 20일~26일까지 열 차례 온몸을 꽁꽁 묶어놓고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물 먹이기, 소금물 먹이기 등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을 거의 재우지 않고, 고문한 날은 밥을 주지 않아 꼬박 굶었다고 합니다.

검찰청 5층에서 4층 대기실까지 내려가는 동안 남편이 저에게 발뒤꿈치를 보여 주었습니다. 짓이겨진 그의 발뒤꿈치와 발등은 저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습니다. 옷을 입고 있어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온몸에도 상처투성이고, 특히 팔꿈치는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20일 이후 26일까지 치료를 하여 많이 나은 상태가 그 정도이니 그 당시 그는 사경을 헤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더욱 공포에 떨게 한 것은 검찰청 5층 521호 김원치 검사실에서 남편이 검취를 받고 나오면서 전해 준 옷 보따리에 그동안 세 차례에 걸쳐 전달했던 속옷을 하나도 전달받지 못하고 겉옷 두 벌만 전달해 준 사실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분명히 남편의 속옷은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남편의 고문상처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제가 검찰청으로 가지고 간 내의를 구치소에서만 갈아입도록 했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악랄하게 고문하고 이런 사실을 감출 수 있는 허가 받은 폭력 깡패집단이 이 나라에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이 엄청난 고문을 자행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도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고 떠드는 자는 누구입니까?

악랄한 고문을 통해서 죄를 조작하는 수사기관이야말로 폭력죄로 처단해야 합니다. 이는 저와 남편만의 고통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고통이며 민주화를 갈망하는 모든 국민에 대한 협박이며 도전입니다.

자유를 열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호소합니다.
치가 떨리는 이 고문만행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일곱 살 난 아들에게 저는 이 무서운 세상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주석 14)


주석
12> 김근태, <이제 다시 일어나>. 131쪽.
13> <1985년 인권보고서>, 72~73쪽.
14> 인재근 강연자료집, <엄마가 뿔났다>, 62~63쪽, 한반도재단여성위원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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