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31 08:00 김삼웅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15호 조사실앞에 14일 오후 조화가 놓여 있다.ⓒ권우성

 

마지막 고문은 9월 20일 저녁 8시경부터 밤 10시 반경까지 전기ㆍ물고문의 합동고문이었다. 김수현ㆍ김영두ㆍ정현규ㆍ박병선ㆍ최상남, 또 한 사람이 고문에 가담했다. 이제까지의 ‘자백’과 ‘번복’의 되풀이였다. 민청련이 반국가단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고문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김근태는 “아,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이구나” 절망하고, 마구 눈물을 흘렸다.

바깥사회와 완전히 차단되었던 나는 정치적 사정이,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본인의 생명의 말살을 절대로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각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끔찍한 고문, 말도 안 되는 각본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그래, 죽을 수도 있다. 40년을 살아왔다. 유관순도, 윤동주도, 그리고 김주열도, 80년 광주의 숱한 선량한 시민들도 그렇게 살해당하지 않았는가. 추하게 정치군부 너희들에게 굽신거리지는 않겠다. 절대로 휘청거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주석 33)

이후에도 고문과 모욕은 그치지 않았다. 반주검 상태가 된 김근태는 9월 26일 오후 3시경 인간 도살장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게 되었다. 악마들은 ‘자백’을 통해 일건 서류를 충분히 마련했고, 더 오래 잡아두었다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사후 처리문제가 귀찮았을 것이다.

9월 4일 남영동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한 지 22일 만이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이 기간, 김근태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야수들에게 도합 열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고문자들은 상처를 남기지 않고, 죽이지 않고 고문하는, 고도의 기술자들이었다.

26일 오후 3시경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김수현과 백남은을 찾았습니다. 잠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김수현과 방에서 앉아서 얘기했습니다. 별 의미있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처참하게 고문을 당하고 간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간다. 이러고도 속수무책인 것이 원통하다. 더구나 너무 끔찍하게 당해서 분노하기조차 두려운 것이 한스럽다. 떠나는 지금도 내놓고 욕 한 마디 할 수 없고 그런 용기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말이다. 이 저주받을 인간들이, 악마같은 자들이 내 생사 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군림하였으며 그에 아양조차 떨어야 했던 이 끔찍한 지옥을 All Mighty처럼 덮쳐왔던 것을….”
(주석 34)

지난 5월29,30일 열린 태안아버지학교에서 이근안씨는 특별강사로 초청돼 자신의 재소자시절을 얘기했다.


남영동에서 김근태에게 살인적인 고문을 총지휘한 자는 90kg이 넘는 거구의 이근안이다.
처음에는 가명이어서 몰랐으나 뒷날에야 그가 이근안임을 알았다. 이근안은 공군 헌병 출신으로 1970년 경찰에 입문하여 1972년부터 대공분야에 근무하면서 악질적인 ‘고문기술자’의 역할로 특진과 승진을 거듭하여 1984년에는 경감에 올랐다. 그에게서 고문을 당한 인사들의 증언대로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고 할 정도로 가학성을 지닌 인물이다.

1979년 <조선일보>가 청룡봉사상을 준 것을 시작으로 1981년 내무부장관 표창, 1982년 육군 제9사단장 표창, 1986년 전두환 정부에서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면서 이를 지휘하는 이근안의 인상착의를 입력했다가 뒷날 이재오ㆍ이선근ㆍ박문식 등 그로부터 고문을 받은 피해자들과 함께 사진 속의 인물이 이근안임을 밝혀냈다.

김근태의 고문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규탄과 진상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10월 17일 민청련에서는 ‘고문 철폐를 위한 투쟁위원회’와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문수사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 위원회’(고문 공대위)가 결성되고, 민통련ㆍ민추협ㆍ신구교 성직자ㆍ불교 승려ㆍ주요 사건 구속자 가족 등이 참가했다. ‘고문 공대위’는 정부의 고문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어서 11월 11일에는 김대중ㆍ김영삼 등 60여 명이 참석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김근태는 남영동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러나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9월 26일 오후 검찰청 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이날 검찰청에서 호송되는 순간 부인 인재근을 만났다. 그동안 남편의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당일 검찰로 이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던 중 해후한 것이다. 짧은 순간에 부인에게 발뒤꿈치의 고문당한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이 기적 같은 일이 김근태의 고문실상이 세상에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기적이었다.

계단을 경찰 한 사람과 본인의 처가 부축해 내려가면서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말했습니다. 불과 1분여 동안이었습니다. 그 고문은 나 개인에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얘기했습니다. 고문 얘기를 듣고 처가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고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문제도 아니었고 도무지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에 나는 말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침착하게 말하면서 신고 있었던 양말을 벗었습니다. 발뒤꿈치의 상처들과 발등의 꺼멓게 탄 부분을 보여 주었고, 팔꿈치의 상처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만남은 정말 기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관례와는 달리 늦은 오후에야 도착한 본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정치군부의 고문과 그 은폐행위가 폭로되고 국내외적으로 맹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게 된 이 만남은 본인에 대한 영원한 기적일 것입니다.
(주석 35)


주석
33> 앞의 책, 83쪽.
34> 앞의 책, 86~87쪽.
35> 앞의 책, 87~88쪽.

  




01.jpg
0.17MB
02.jpg
0.06MB

+ Recent posts